서재 결혼 시키기
앤 패디먼 지음, 정영목 옮김 / 지호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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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결혼 시키기>를 읽고 나서, 머릿속으로만 실컷 서재를 결혼시키던 내가 드디어 실제로 서재를 결혼시켰을 때, 나의 서재 결혼은 페디먼과는 많이 달랐다.

나는 남편도 책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우리의 서재 결혼은 훌륭한 화합을 이루리라 너무 몽상에 젖어 있었던 거 같다. 그는 다 읽고 난 책을 잘 내다버리는 스타일이었다. 책을 내다버리는 기준은 그런 것이었다. 이 책을 다음에 다시 들춰볼 것이냐 말 것이냐였는데 제아무리 세기의 문학 작품이라도 다시 읽지 않을 책을 붙들고 있는 것은 허영심과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좁고 지반도 약한 집이 책들의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면 어떻게 하냐는 오버스런 걱정도 했다.

그런 그가 여기저기 어지럽게 쌓아두고 한번 사면 절대 버리지 않는 나의 책 사랑을 실눈뜨고 대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나 내 책을 정리해서 버릴 것을 입으로 강요하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의 두꺼운 전공 서적과 기타 수십권의 책 한 리어커를 파지 모으러 다니는 할아버지에게 넘겨 드리는 걸 내가 목격하도록 했다. ‘어떻게 저 책들을 쉽게 한번에 버릴 수 있나’......수십마디의 잔소리보다 더 무서운 한번의 행동이었다.

남편의 무언의 성화에 힘입어 책을 합치면서 같은 책이 두 권이 되었거나, 없어도 그만이겠다 싶은 책들을 40리터짜리 배낭에 한 가득 넣고서, 동네 헌책방에 팔러 갔다. 결국엔 절반 이상을 도로 메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책방 주인 왈, 헤리포터나 이문열의 삼국지 류만 받고, 나머지는 값을 쳐주지 못하겠다고, 나머지는 서점에 두고 갈테면 가라하기에 도로 들고 와 버렸다... 그 책들은 집에서도 귀환을 환영받지 못했다. “그냥 헌책방에 마저 두고 오지 왜.” 하지만 성향이 나와는 많이 다른 남편은 조금씩 나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 같다. 나 역시 한수레의 책을 버리는 남편을 이해하듯이, 페디먼의 말처럼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이 하나가 아니듯이 책을 사랑하는 방법도 하나가 아닌 것을 깨달은 것이다.

페디먼은 어릴 적 부모님의 책 중에 <부부들>이라는 책을 읽고 성에 대해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어릴 적에 우리집 다락방에 있던 <수사반장>이라는 책이 기억났다. 하드커버이며 세로 줄로 된 두꺼운 책이었는데 불륜에 얽힌 치정극 같은게 제일 많았고, 난삽한 침실 묘사가 간간히 나와서 애간장을 많이 태우며 엄마 몰래 읽던 기억이 난다.

엔 페디먼의 책 사랑 중에 상당히 이질감을 느꼈던 내용이 하나 있다. 다름아닌, “현장 독서”이다. 책이 묘사하는 바로 그곳에 가서 책을 읽을 것.의 열렬한 신봉자가 페디먼이다. 달리는 평원에서, 굽이치는 급류에서, 안개 낀 숲 강가에서 책이 묘사하는 바로 그 현장에서 책을 읽는다니, 아무리 마음의 눈이 문자로 모든 만족을 얻지 못해 그리한다지만 말이다. 우리 같은 평범한 독자는 현장과 아무 상관없는 곳에서 읽는 것이 팔자인데....평생에 걸쳐 현장 독서다운 독서를 과연 몇 번이나 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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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 지적 망국론 + 현대 교양론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정환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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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읽는 내내 이기죽거리고 있는 내 입을 본다. 이 책에서 도쿄대생의 문제가 아니라 적어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아야 할 과학 지식으로 당연시하며 다카시가 언급한 과학적 상식들이, 나는 비로소 처음 듣거나 모르고 있었거나 한 것들이라서 무식을 절감하게 되었고, 바로 그 것이 내 입술을 씰룩거리게 만들었나보다. 하지만 이기죽거린다고 능사는 아니리라. 그의 치밀하게 준비된 자료를 보면 어쩔 수 없는 자극들을 받게 된다. 위약적이고 일시적인 플라시보와 같은 성격의 것이긴 해도, 그의 글은 평범한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도, 무언가를 열심히 읽는다는 행위에 동기를 부여를 확실히 해 주곤 한다.

이 책에서 다카시는 일본의 교육 현실을 명문이라는 도쿄대를 중심으로 해서 비판하고 그 대안을 살펴보고 있다. 정말 자신이 독서광답게 다양한 자료들을 언급해가며 도쿄대의 몰락 원인을 이야기한다. 그는 말한다. 오늘날의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스페셜 리스트'들이 아니라 '높은 수준의 제너럴리스트'라고. 전문 분야의 기술에 대한 이해력을 갖추면서 사회 전체를 보는 안목까지 갖춘 교양인을 양성할 수 있는 교육이 오늘날에 취해야 할 인재 교육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양을 쌓는 데 요긴한 기술 중에 하나가 독서이다.

사회를 움직이는 핵이 되어야겠다는 거창한 야심 같은 건 없다. 헌데 다카시가 이 책 내내 논리적이고 분석적으로 입증하고 있는 학문의 필요성과, 열심히 독서하는 행위에 대한 권장은 독자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사실을 수긍하게 했다. 인생을 풍요롭게 살고 싶은 소인에게도 독서는 꼭 필요한 행위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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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즐거움 (양장)
히로나카 헤이스케 지음, 방승양 옮김 / 김영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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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읽은 건 대학 2학년 때이다. 사회학 개론 수업에서 레포트로 주어진 책이었기 때문에 사실은 억지춘향으로 읽었었다. 그 땐 학문이 도저히 즐거워질 리가 없던 시절이었다.(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그래서 약간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렇다면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비결이나마 얻을 수 있을까' 하는 흑심(?)을 품었다. 그래서일까 최근에 다시 꺼내 펼쳐든 이 책엔 다음과 같은 부분에 밑줄이 팍팍 그어져 있다. '인간은 1백 40억개나 되는 뇌세포 중에서 보통 10퍼센트만 사용한다......' 같은. 당시엔 기억하고 외우는 학문의 방법적인 측면에서 이 책을 읽었던 것 같다.

그러던 이즈음의 어느 늦은 밤에, 텔레비전의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수학 <정석>의 저자 홍성대가 가요무대의 명엠씨 김동건이 진행하는 토크쇼에 나와 이야기하는 걸 보게 된다. 홍성대 님의 수학 정석의 인기는, 막말로 지금까지 팔린 <정석> 쌓아 놓으면 에베레스트산을 120번 오르락내리락 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가난했던 홍성대는 대학 재학 시절 등록금과 용돈 마련을 위해 수학 과외 지도를 했었고, 지금의 <정석>은 그때 당시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그가 만든 과외 지도 교본이었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언젠가 읽었던 일본의 어느 수학자가 학문을 하는 기쁨에 대해 써 놓은 책을 읽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학문을 하는 기쁨이 어떠했다고 했는지 다시 한번 그 수학자의 겸손한 일담을 회상하고자 학문의 즐거움을 찾아 읽었다.

다시 읽어보니, 이제는 지난 시절에 읽던 내용과는 또다른 측면에서 행간이 읽히기 시작했다. 다 읽고 나서 책상 앞에 앉아 그냥 가만히 오래도록 생각했다.

이즈음 나는 밤에 잠을 자다가 한번 깨면, 다시 잠들기까지 수만가지 생각을 하는데 그 중에 대다수가 회사 일 생각이다. 뭐 엄청난 업무를 한다고 이러는가. 스스로에게 반문한다.언제부터인지 나는 이렇게 회사일 때문에 조바심 쳐대는 버릇이 생겼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끈기를 발휘하는 일, 느긋하게 기회를 기다리는 일과는 너무나 멀어져버린 일상을 뒤돌아본다.

앞으로도 살아가면서 문득문득 심각하리만큼 중심을 읽어버리게 되는 날이 몇 번인가 또 찾아올 것이다. 지금 생각으로는 그때마다 히로나카 헤이스케 씨의 이 책을 펼쳐 들게 된다면 .....?

그러나 딱 한가지 이 책에서 거슬렸던 것 4장 <자기 발견> 부분을 보면, 하버드에서 공부한 그가 미국의 학풍이 다양성을 중요시한 다고 목소리 높여 칭찬하는 부분이 있다. 다양성까지는 좋은데......... 미국과 일본의 학풍을 비교하고, 자국의 현실을 비판하는 견지를 취다하보니, 조금은 친미론적인 글이 되었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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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 김현의 일기 1986~1989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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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은, <한국 문학의 위상>에서 문학을 해서는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고, 출세를 하지도, 큰 돈을 벌지도 못한다고 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문학은 인간을 억압하지 않으며, 따라서 문학이 모든 형태의 억압에 자유롭게 대항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문학이 억압에 대해, 권력에 대해 자유로우면서도 순수하게 항거할 수 있다는 것을 비평을 통해 보여 주었다. 이런 김현을 우리 또래들은 마음의 큰 스승으로 받들지 않을 수 없었던 분위기다. 그런데 이 책은 우리 나라 세기의 비평가 김현이 아닌, 다분히 소시민적으로 납득이 될 수 있는 인간적인 김현 선생을 보게끔 하는 책이다.

영화 <마지막 황제>를 보고 와서는 미국 놈들이 밉더라고 그의 아내와 서로 토로하는 부분이나, 김혜순의 시 <도솔가>를 읽으면, 서유석의 노래 <타박네>가 생각난다라는 표현이나, 산행 중에 설사를 일으키고 주차장 근처의 화장실에서 황급히 볼일을 보면서, 머리보다 육체가 더더욱 사유를 주체라고 말하는가 하면, 이제는 갈수록 긴 책들이 싫어진다며 짧고 맛있는 그런 책들에 마음을 끌리고, 두껍기만 하고 읽고나도 무엇을 읽었는지 분명하지 않은 책들을 읽다가 맛좋은 짧은 책들을 발견하면 매우 기쁘다는 말이나, 사회학자들이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로 읽지 않고 자료로 읽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사회학자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마음대로 폄하하는 것은 사회학적 인식이 덜 됐다고 서슴없이 말하기도 한다.

그의 저작들을 좋아했던 독자로서, 자뭇 진지하고 엄격하기까지 한 비평의 세계에서 한 발자국 벗어나, 한 인간의 내밀한 독백과 사사로운 기호를 엿보는 즐거움은 아주 크다.그의 일기이자, 이 책 제목인 <행복한 책읽기>에서, 나를 강력하게 매료시킨 문구가 하나 있다. 여기에 옮기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칠까 한다.

1988년 1월 7일의 일기 - 내 존재의 밑바닥을 이루고 있는 것은 잊음(oubli)이다. 나는 잊기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이 잊음이다. 내 활력은 잊음에서 나온다. 모든 존재가 들어가 웅크리고 있는 알집과 같은, 거푸집과 같은 구멍으로서의 잊음.

한때 나는 우리 나라의 큰 선생님인 김현의 저서 <한국 문학의 위상>을 읽고, 밥빌어먹는다는 문학의 언저리에서 떠나지 않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사실 지금까지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는 생각은 이 짓(문학)을 왜 하려 할까 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주위의 환경에 대한 자신의 일차적이고 피상적인 무력감에서 갖게 된 질문인 거 같다. 사실상 모든 예술, 학문은 인간을 위해서 봉사하고 인간에게만 봉사한다. 문학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제시하는 유일한 분야는 아니지만, 가장 대표적인 분야임에는 분명하다.-한국 문학의 위상 중에서-' 

 

"구멍의 공에 제일 깊게 사유한 최초의 인물은 노자이다. 그는 항아리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은 항아리의 텅빈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빈 곳이 있어야 채울 마음이 생겨난다. 공은 행위, 욕망의 행위의 밑바닥이다.

장자는 그것을 더 논리화해서, 구멍을 뚫으면 혼돈은 죽는다. 라고 말한다. 그것을 뒤집으면, 구멍이 있으면 혼돈은 없다. 그 구멍은 질서 , 사회 생활의 기본틀이다. 구멍이 없는 존재는 완전자--신, 악마, 자연.....뿐이다. 구멍이 있는 것은 모두 인간적이다. 인간은 구멍의 모음이다. 채워도 채워도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구멍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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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없는 이 안 2004-08-05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정말 오래 전에 너무도 아껴서 읽던 책인데 님 서재에서 보게 되니 다시 꺼내볼까 봐요. 가끔 이런 책 있죠, 읽어서 뒷부분이 점점 적어지는 게 너무 아쉬운...

icaru 2004-10-01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책을 사랑하시는군요...저두 그래요 ^^
 
독서가 어떻게 나의 인생을 바꾸었나? - 세상을 보는 글들 4
애너 퀸들런 지음, 임옥희 옮김 / 에코리브르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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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계속 비슷한 부류의 책들을 읽게 되는 것 같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라는 책을 최근에 읽었고, 얼마 안 있어 이 책 <독서가 어떻게 나의 인생을 바꾸었나>라는 책을 읽었으니, 그래서 두 책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역시나 두 책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먼저 공통점은 이 책에서 추천 도서라고 올라온 목록 중에 어느 것도 건질만한 게 없었다는 것이고, 북디자인이 둘 다 예쁘다는 것이다.

차이점이라 하면 다치바나의 '나는 이런~'은 실용서 위주의 독서를 권장하고, 논픽션을 통해 새로운 세상에 눈뜸에 대해 주로 이야기를 했다면, 에너 퀸들런의 <독서가~ 어떻게>는 주로 문학 작품을 읽어오면서 행복감을 느꼈던 경험들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나는 그다지 속독을 하는 스타일이 아님에도 이 책을 출퇴근길 30~40분을 할애해서 삼일 만에 다 읽었다. 그만큼 평이하고, 담담한 필치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앞의 서평을 써주신 분들 지적대로 이 책의 총 페이지가 130페이지 넘지 않는다는 것(중간 중간 저자의 추천 도서 책표지 삽화가 들어가므로 엄격하게 따지면 백페이지 남짓의 내용이다.)도 빠르게 읽히는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이 책이 심각하고 진지하게 정독하지 않았던 진짜 이유는 가볍고 평이하게 읽어달라는 것이 이 책의 저자가 독자에게 요구하는 무언의 주술이 있었달까. 다소 선동적인 냄새가 풍기는 이 책의 제목과 달리 내용은 그저 미국의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의 평범한 독서 경험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자는, 앞으로 작가가 되기를 희망할지도 모르는 독자들에게 '작가가 되려고 한다면 너무 잘 쓴 책부터 읽지 말라는' 작은 교훈도 잊지 않는다.

이 책의 독서평 같은 걸 올리기 전에 대략 다른 사람들이 올린 서평을 훑어보니, 이 책의 오역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나는 그런 생각도 든다. 오역으로 이해되는 데에는 미국과 우리 나라의 정서 차이가 크다는 것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하는....

사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의문스럽게 여져졌던 부분은 오역의 문제가 아니라, 책의 소제목이 시작되는 부분에 한 페이지 전체에 걸쳐 나오는 삽화였다. 이 삽화는 저자가 앞부분부터 뒷부분까지 내내 언급하고 있는 추천 도서인 작은 아씨들'이나 '오만과 편견', '호밀밭의 파수꾼', '앵무새 죽이기' 이다.

그런데 이렇게 앞부분에 한 페이지씩이나 차이하고 시선을 집중시키는 책의 삽화는 다음에 이어지는 저자의 이야기들과 아무런 연결 고리가 없다. 저자가 추천하는 책에 대한 소기의 홍보 효과를 가져오기 위한 상업적 전략이었는지...나는 그 덕분에 앞의 삽화와 글 내용의 연관성을 찾기 위해 중간중간 읽어 온 페이지를 되짚어 보기도 하였다. 이것은 속독할 책을 정독하도록 유도한 셈이니, 이것 또한 이 책의 편집자의 아주 생뚱한 배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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