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잠 - 이보다 더 확실한 행복은 없다 아무튼 시리즈 53
정희재 지음 / 제철소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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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여덟 시간은 자야 하는 사람이다. 밤 열한 시를 넘기지 못할 정도로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난다. 잠에 관하여 가장 동의할 수 없었던 게 네다섯 시간만 자도 충분하다는 거였다. 체질상 일고여덟 시간을 채우지 못하면 일주일 내내 병든 닭처럼 힘없이 지낸다. 눈 밑이 거뭇거뭇하고 볼이 패는 현상은 당연하다. 잠이 많다는 게 조금은 부끄러웠다. 게을러서 혹은 능력이 없는 사람처럼 여겨지는 게 싫었다. 이제는 안다. 적게 자도 충분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처럼 일고여덟 시간은 자야 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이라는 주제의 아무튼 시리즈가 출간되었다. 누구보다 달게 자는 사람으로서 꼭 읽어 봐야 할 책 같았다. 정희재 작가가 처음이지만 잠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책을 최근에 읽었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잠이 이토록 중요하게 될 줄이야. 잠은 기억력을 높이는 동시에 우리가 느끼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에서 자유로워진다. 비로소 편안한 감정, 안식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비록 내일 해야 할 일 중 마음에 걸리는 게 있더라도 그건 내일의 일인 것이다. 밤새 꿈속에서 처리하지 못한 일 때문에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깨어있는 것처럼 여겨지더라도 말이다.




 


텅 빈 학교는 조용했다. 그 큰 건물에서 홀로 잠들면서 무섭다기보다는 서러워서 눈물을 훌쩍였다. 어른의 세계란 더럽고 치사하다는 생각, 가난이란 상상 이상으로 불편한 것임을 온몸으로 실감하던 밤. 타들어가는 쑥색 모기향의 따가운 냄새에 재채기가 쏟아졌다. 문자 그대로 갈 곳이 없다는 실향 의식을 사탕 녹여 먹듯 음미하다가 잠에 빠져들었다. 그대로 아침까지 푹 잤다. 역시 잠 덕후는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내 인생의 첫 도둑잠은 그렇게 완성됐다. (52페이지)


 

낯선 장소에서 잘 자지 못한다. 여행을 좋아하면서도 선잠을 자는 바람에 늘 피곤하다. 그럼에도 여행을 포기할 수 없어 외국에 갈 때는 수면유도제를 사 가기도 한다. 먹어도 잠이 오지 않아 눈만 감고 있는 때가 여러 번이었다. 꽤 오래전, 토요일에도 근무할 적에 친구가 운영하는 학원에 갔다가 피아노 치는 아이들 틈에서 꿀잠에 빠져든 적이 있었다. 피아노 소리가 꼭 자장가처럼 들렸었다. 갈 곳을 잃은 소녀(작가)의 도둑잠. 전혀 잠들 상황이 아닌데도 까무룩 잠에 빠져드는 순간처럼 말이다.

 


어릴 적의 나는 여덟 시 반에 하는 드라마를 못 봤다. 기필코 눈을 뜨고 있으려고 했음에도 눈을 떠보면 아침이었다. 대학 기숙사의 방, 신생아실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잠에 빠져 있기도 했고, 30분만 자자고 누웠던 게 24시간을 내리 자느라 친구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던 작가의 일화는 잠 덕후답다. 잠에 관한 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은 작가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직장 생활을 오래 한 덕분에 작가처럼 24시간을 내리 잔 적은 없지만 말이다. 규칙적인 생활을 오래 해 온 까닭이다. 일어나기 싫어도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해야 했다. 특히 계절상 겨울에는 이불 밖으로 나오기 싫어 미적거리다가 지각할 뻔한 적도 많았다. 눈이 많이 내려 추운 겨울 아침. 이불 밖은 위험하다고 외치면서도 제시간에 일어나 출근을 준비한다.





 

수면계의 홀든 콜필드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아이를 빼고 누군가 잠의 열락에 빠진 사람에게 부채를 부쳐준 적이 있었던가. 홀든 콜필드는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으로 호밀밭에서 노는 아이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낭떠러지 가장자리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 했던 인물이다. 많은 사람에게 오래도록 회자되는 작품으로 숙면에 이르도록 돕고 싶다는 작가의 바람이 배어 있었다. 작가가 말하는 잠 파수꾼의 역할은 휴대폰 무음으로 해두기, 커튼이나 블라인드를 내려 어둡게 하기 등이다. 침실을 어둡게 했을 때 숙면을 취할 수 있다. 암막 커튼을 고르고, 안대를 사용하기도 한다.


 

죽음을 영면이라고 표현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잠을 못 자면 굉장히 힘들어한다. 잠에 필요한 도구를 이용하고 늦은 밤이면 카페인 섭취를 줄이는 등 잠에 유익한 차를 마시기도 한다. 죽으면 영원히 잘 수 있는데 우리는 왜 잠에 그토록 예민할까. 숙면을 도와주는 잠 파수꾼이 있음으로 인해 우리가 불안해하는 모든 감정들을 잠의 뒤편으로 보낼 수 있다. 그걸 알기에 우리는 오늘도 편안한 잠을 자고자 한다. 하품하며 침대로 향한다. 내일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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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김영민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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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과 함께하는 중세의 죽음의 춤을 추는 그림을 보자. 해골은 아이 틈에서 손짓하듯 춤을 춘다. 이제 막 태어난 아이 곁에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이 손짓하자 아이는 죽음에게 향한다. 새 생명과 죽음이라, 전혀 상관없는 관계 같지만, 죽음이라는 건 순서가 없다. 누구에게든 갈 수 있고 어느 때고 다가갈 수 있다. 아무도 모른다. 어린아이라고 하여 일찍 가지 않는다고 보장하지 못한다.


 

삶과 죽음은 한 끗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죽음을 생각하면 삶의 희열이 더 생기는 법일까. 삶이 소중하게 여겨지는 건 분명하다. 내 존재가 사라지는 죽음. 타인이나 가족이 나를 기억하고 하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다. 영원하지 않기에 삶이 더 소중하지 않은가 말이다. 삶의 유한성 때문에 최선을 다하여 오늘을 살아간다.




 


인생의 허무라는 말에 꽂혀 읽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묵직한 내용의 글이었다. 허무를 바라보는 방법, 사상가의 눈으로 바라보는 삶의 통찰을 엿볼 수 있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무거운 질문과 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직장 생활에 지친 사람은 여유로운 삶을 꿈꾼다. 저자는 지나친 여가는 공허하고 무료하게 만드는 법이다, 일을 즐길 수 있어야 구원이 있다고 말한다. 삶의 목적을 어디에 둘 것인가 생각하게 만든다. 책 속에는 전시장 벽면 가득히 헌 옷들을 걸어 만든 볼탕스키의 설치 작품이 나온다. 삶의 유희를 설명하는 작품이다. 문득 어떤 작가가 올리는 버려진 작품에 대한 사진이 떠올랐다. 목에 두르고 다니는 머플러, 장갑 등이 떨어진 줄도 모르고 버려진 물건 들이었다. 한때는 소중했으나 버려진 물건들은 더 이상 쓰임새를 갖지 못한다. 마치 우리의 삶처럼.

 




유유자적한 삶을 바랐다. 시골에서 밭을 가꾸고 정원 삼아 사는 것도 바쁜 생활 속에 잠시 취해야 즐거운 법, 시간이 계속된다면 지루하게 여길지도 모르겠다. 일상의 지겨움을 피하기 위해 여행을 다니고 새로운 일에 매달리게 된다. 현재의 일상을 사랑하기란 어렵다. 그럼에도 지나친 여가는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다. 더불어 노동을 없애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노동의 질을 바꾸는 것이 구원이다라고 했다. 노동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말이다. 일을 하므로써 무료함을 없애고 삶에 더 집중할 수 있게 하는 힘을 얻는 것 같다.


 

사상사 연구자인 저자는 고전 시의 문학성, 그림의 예술성이 함께 어우러져 밋밋할 수 있는 부분을 채웠다. 그림을 보며 삶의 허무를, 죽음과 삶의 연관성을 느끼게 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깊은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최근에 읽은 리사 제노바의 기억의 뇌과학의 결론과도 일맥상통한다. 모든 게 마음가짐에 달렸다. 책의 뒤편에 소식의 적벽부가 수록되어 인생의 허무를 논하게 한다. 차고 기우는 것을 반복하지만 늘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는 듯한 물과 달을 보며 우리의 삶도 그러하다는 것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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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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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뇌과학 - 인간의 기억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사라지는가
리사 제노바 지음, 윤승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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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기억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전에는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는데 탁월하다고 여겼는데 말이다. 안타까운 건 어쩔 수 없다. 분명히 아는 인물이 있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입에서 맴돌기만 할 뿐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럴 때 나는 검색 사이트에 연관어를 검색해보고 찾는 과정을 겪는다.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내 이야기라 여기면서 책을 읽었다.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다만, 알츠하이머를 늦출 수 있다면, 이왕이면 죽을 때까지 온전한 기억을 가지고 죽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리사 제노바가 쓴 소설 스틸 앨리스의 동명 영화에서 주인공은 차라리 암에 걸리고 말지 기억을 잃어간다는 건 너무 슬프다고 했었다. 물론 정확한 대사는 아니다. 그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온전한 존재가 아닌 것만 같다. 곁에 있는 사람이, 사랑하는 가족이 누구인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슬프다. 그토록 총명하던 분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앉아있는 모습은 안타깝다. 그게 슬프다. 우리도 얼마 뒤 똑같은 전철을 밟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이다. 노인이 되었을 때 우리의 반 이상이 알츠하이머라고 한다. 어느 시기가 되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거다. 우리라고 피해 갈 수 없다.

 


뇌는 지루하고 익숙한 것들은 지독하게 잘 잊어버리지만 의미 있고, 감정을 자극하고, 예측을 벗어나는 경험들은 기가 막히게 기억한다. 기억에 남는 저녁 식사가 있다면 한번 생각해보자. 모두 어떤 식으로든 특별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은 기억들은 점점 희미해지다가 사라진다. (91페이지)

 


의미 있는 일이 아닌 일상적인 일이라면 대부분 그날을 기억하지 못한다. 감정을 자극하는 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무엇이든 맥락이 중요하다. 기억에 관련된 용어를 살펴보자. 일화기억은 내 인생에 일어난 일들에 관한 기억이며, 섬광기억은 충격적이고 의미 있으면서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킨 경험들에 대한 기억이다. 어제 뭐 먹었는지도 기억하기 힘든 요즘 일화기억들을 엮어 자서전적 기억을 만들어도 좋겠다. 일상에서 벗어나 안 가본 도시로 휴가를 떠나는 방법이 있을 거고, 모바일 기기를 끄고 세상을 바라보는 법, 우리가 무엇을 느끼는지 스스로와 소통하기, 반복하여 기능을 강화하고, 오늘 경험한 일을 일기로 남기는 방법이 있다. SNS를 활용하여 기록을 남기는 방법도 있다. 특별한 일이 있었을 때 느낌을 간단하게 적어 사진과 함께 올렸던 페이지를 들여다보면 그때의 감정과 기억이 떠오르는 걸 느낄 수 있다. 즉 뇌에 저장한 정보를 유지하고 싶다면 계속 활성화하면 된다. 정보를 자꾸 되뇌고, 회상하고 되뇌는 것을 반복하는 거다.

 


일 년 정도 직장을 쉴 때 휴대폰에 시간대별로 알람을 설정하여 사용했다. 미래기억을 위한 단서 남기기다. 어마어마한 고가의 첼로를 깜박하고 택시 트렁크에서 꺼내지 않고 내렸던 요요마처럼 누구나 그럴 수 있다.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나갈 때 잊지 않으려고 현관에 두었던 물건이 쌓여가는 장면을 상상해보니 한편으로는 웃기다.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기억하지 못하는 거다. 물론 나이가 들어가면서 잊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겠지만 이십 대도 그럴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안심하게 된다.

 


시간의 무게를 피할 수는 없다.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노화로 인한 기억저하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건강을 위해 누구나 강조하는 것. 지중해식 식단을 실천하고 정기적으로 운동하고, 매일 명상하고, 매일 여덟 시간씩 수면을 취한다면 기억 나이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잠이야말로 진정한 슈퍼히어로인 셈이다! (226페이지)


 

나이가 들어갈수록 가장 두려운 게 알츠하이머가 아닐까. 고혈압, 비만. 당뇨, 흡연, 높은 콜레스테롤 수치 등은 알츠하이머병의 발병 위험을 높인다. 뿐만 아니라 만성적 수면 부족이 알츠하이머병을 유발하는 치명적인 위험 요소다. 알츠하이머병에 좋은 운동은 수면 부족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니 더할 나위 없다. 뇌에 인지자극을 주고 싶다면 운동하고, 새 친구를 사귀고, 안 가본 도시를 여행하는 것이다.

 


낯선 장소를 여행하는 것,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잠이 기억을 좋게 한다는 것, 알츠하이머병에 좋다는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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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과 나의 사막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3
천선란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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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 소설 속에서만 보던 로봇이 우리 실생활에 처음부터 있던 존재처럼 살아갈 날이 머잖았을까. 로봇이 나오는 소설을 읽어도 어쩐지 근 미래의 우리 모습인 것만 같다. 우리 곁에서 숨 쉬고 먹고 시간을 보내는, 어쩌면 없어서는 안 될 단 하나의 친구인 것만 같다.

 


멸망한 세계, 사막에서 함께 살던 인간, 랑이 죽었다. 다른 인간들보다 이른 나이에, 랑의 엄마 조가 죽은 나이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 랑을 묻고 함께 떠나자던 지카의 권유를 뒤로하고 랑이 그토록 가고 싶어 하던 곳으로 떠났다. 과거로 갈 수 있다는 땅이었다. 그 여정에서 고고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세상의 모든 진리를 아는 자 버진,

푸른 스카프를 두른 인간의 시체,

자신의 몸이 망가지는데도 주인을 위해 트랙터에 부딪치며 길을 만드는 로봇 알아이아이,

황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외계인 살리.

 


전쟁 시대에 만들어진 고고는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는지 궁금하다. 지구를 망하게 하는, 즉 인간을 죽이기 위한 로봇이었을까 봐 두렵다. 과거를 아는 자, 과거의 땅을 향해 고고는 거친 사막을 가로지른다. 삶의 목적을 찾는 동시에 고고의 그리움에 대한 여정이 펼쳐진다. 로봇에게 마음이 없다고 여겼지만, 불쑥 떠오르는 랑의 영상이 그를 살아있게 한다. 사막에 파묻혀져 있던 그를 발견해 고쳐서 고고라는 이름을 주었던 랑. 랑의 엄마 조가 죽고 묻은 자리에 물을 뿌려주며 눈물을 머금던 랑. 랑은 그것을 마음이라고 했고, 누군가를 생각한다는 건 그리움이라고 했다.


 

너도 감정이 있다는 말처럼 들려. 너는 아쉬워하고 슬퍼하는 것처럼 느껴져. 감정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에. (132페이지)

 

감정은 교류야. 흐르는 거야. 옮겨지는 거고, 오해하는 거야. (133페이지)

 


고고는 랑이 그리운 것이다. 랑과 함께 했던 시간을 떠올리고 더 이상 그와 함께 하지 못한다는 게 슬픈 것이다. 오로지 랑을 추억하며 사막을 건넜다. 마치 희망의 땅이 저 너머에 있는 것처럼 나아갔다. 애도의 여행일망정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 아직도 주인을 기다리는 로봇 알아이아이에게 팔 하나를 떼어줄 수 있었던 것도 랑에게 배운 것이었다. 랑에게 배운 그대로 애틋함을 느꼈을 것이다. 타인에 대한 측은함, 안타까움. 그냥 지나치지 못한 것도 랑에게 배웠다.


 

삶의 목적을 잃었다고 해서 죽을 수는 없다. 가르친 대로 세상을 보기 마련이다. 랑이 주었던 마음과 감정에 대하여 생각하고 삶의 목적이 다른 데 있지 않음을 느낀다. 랑을 떠올리고 그리워하는 시간이 곧 랑과 함께 하는 시간이었다. 자기의 시간과 다르지 않았다. 생각하던 바대로 움직이니 과거의 땅을 아는 살리를 만날 수 있었다.

 




랑을 다시 만나면 이야기해주고 싶다. 내가 만난 사막에 대해. 너를 만나기 위해 걸어온 나의 사막에 대해. 그렇게 늙어가는 랑의 곁에서, 조금씩 망가져 가는 내 몸으로 이야기 하겠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비로소 랑과 시간이 맞는 것 같다는 착각을 한다. 이번에는 너와 함께 늙어갈 수 있겠다는 헛된 희망을 품고 랑을 떠올리며, 더 깊은 어둠으로 내려간다.

간절하게. (144페이지)


 

살리의 모습에서 어린 왕자를 떠올렸다. 마차부자리라고 부르는 별에서 온 살리, 황금빛 홍채와 머리칼을 가졌으며 아직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살리. 사막에서 혼자 나무를 친구 삼아 지냈던 그는 고고를 보자마자 쉴새 없이 말을 늘어놓았던 살리였다. 인간처럼 생긴 로봇을 보며 친구를 기다렸던 감정을 공유했다. 친구를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전해졌을 것이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듯하다. 곁에 누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느끼고 의지가 되는 듯하다. 그게 꼭 인간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로봇이든 내 마음을 전해줄 수 있다면 그게 친구인 것이다. 상실의 아픔은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듯하다. 상실의 순간에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고고를 보며 우리의 감정을 들여다보게 된다. 우리가 친구라고 여기는 것에 대하여, 감정을 공유한다는 것에 대하여.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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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12-08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