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오바디스 한국경제 (이준구) - 이준구 교수의, 이념이 아닌 합리성의 경제를 향하여
이준구 지음 / 푸른숲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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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가고 있는가, 한국 경제

   1년 반전에 우리-우리,라고 말을 하니 마음이 많이 아프다-는 죽어가는(?) 우리나라 경제를 확실히 살릴 수 있다며 출마했던 어느 대통령 후보에게 ‘묻지마’식 투표로 표를 몰아주었다. 그가 내건 공약은 어딘지 모르게 미심쩍었고, 그의 지난 언행에는 수많은 도덕적, 법적 결점이 있었지만, 내가 사는 아파트 값을 올려주고, 내가 내는 세금도 덜 내고, 거기다가  내 월급도 올려 줄 비상한 실력이 있다는 말에 혹해서(결코 ‘속아서’가 아니다.) 선택한 것이다. 소위 말하는 지난 10년의 ‘좌파’(진짜 ‘좌파’들은 이 말 들으면 가소로워서 웃는다.) 정권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던 자칭 ‘보수(진짜 ’보수‘들은 이 말 들으면 서운해서 운다.)’ 언론에 세뇌당한 국민들은 지난 5년 평균 4.2%의 경제성장률과 국민소득 2만 달러 달성, 종합주가지수 2.3배로 성장한 경제를 두고 죽었다, 고 생각해서 그 대체자로 고른 인물이 건설업자 출신의, 경제를 살린다는 이명박 후보였다.

   온갖 폼을 잡으며 경제를 살리겠다던 그 후보의 실력이 제대로 드러나는 데는 채 몇 달이 걸리지 않았다. 인수위원회 시절의 ‘어륀지’ 사건 이후로, 온통 자기 삶의 이력을 닮은 ‘고․소․영, 강․부․자’들로 구성된 내각의 출범을 출범시켜 자신의 출신 배경을 맨얼굴로 드러내었다. 더구나 자신 있다던 경제 분야에서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일으킨 ‘올드 보이’의 컴백, ‘MB식 물가 관리’, ‘고환율 정책’ 등을 통해, 자신의 사고방식이 과거의 어느 순간(그것도 오래 전 어느 순간. 아마, 1970년대쯤?)에서 멈춰 버렸음을 단적으로 드러내었다.

   굴욕적인 쇠고기 수입 협상이나 미국발 금융위기의 엉성한 대처만 보더라도 과연 그가 말한 ‘프로’의 실력은 언제쯤 발휘되는 것인지 궁금하다.(아직도 그 놈의 ‘좌파 타령’이다. 아마, 임기가 끝난 다음에도 큰소리 칠 것 같긴 하지만…… 그에 앞서서 남의 머리를 빌려 대통령직을 수행했던 김영삼을 보니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뻔뻔함은 그네들의 주요 자질이다.) 기껏 경제를 살리겠다고 나서는 것이, 전 국민이 그렇게 반대하고 있는 ‘대운하’를 ‘4대강 살리기’라는 이름으로 슬그머니 꺼내는 것이나 ‘녹색 성장’이라는 이름의 형용 모순 정책을 아무 사업에나 갖다 붙이기 ‘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다.(얼마 전에 자전거 축제에 참여하셔서 한 말씀 하셨단다. 우리나라가 곧 3대 자전거 생산국이 될 것이라고. 그런데 역시나, 그 주장이나 전망의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번에도 역시 그냥 그 자리에서 기분이 ‘업’ 되어서 아무렇게나 한 번 해 본 말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이 글의 전체 맥락과 상관없을지 모르겠다만, 아, 또 마음에 진짜 안 드는 게 하나 있다. 제발, 자기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도 뭐 했네, 이런 얘기 좀 안 했으면 좋겠다. ‘가난한 시절’은 이제 그만~!

   내가 느끼기에 이 정부는 정책의 결정에 아무런 논리적 근거를 찾을 수 없고, 그냥 ‘아무렇게나 하고’ 있는 것 같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의 말은 조금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몰상식한 태도’까지 보인다. 더군다나 자신들을 뽑아준 국민들을 적대적으로 대하면서도 성찰의 기미가 안 보인다.(하기야 ‘성찰’이라는 단어는 이들에게 너무 품격 높은 단어라고 느낌이다. 그러니, 혹시나 저들의 입에서 ‘성찰’이라는 말이 나온다면 앵무새의 목소리가 연상될 것이다.)

   나는 다른 분야에 대해서도 거의 무지한 편이지만, 경제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런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이 정부의 경제 정책은 내가 보기에도 너무 엉성하고 허술한 것 같다. 항상 추상적인 전망만 난무하고, 어디에도 전망의 근거와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답답함을 넘어 이젠 이 정부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안 믿을 지경이다. ‘경제’라는 말만 들어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나 같은 사람한테도 이 정부의 능력이 들통났으니, 경제를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 보기엔 이 정부의 경제 정책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습게 생각될까?

   그러나 이 정부에 대한 한 터럭의 기대도 없었던 나 같은 사람 말고, 이 정부가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하고, 이 정부에 상당한 기대를 걸었던 소위 말하는 ‘보수 우익’의 사람들은 과연 지금 이 정부의 정책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싶었다. 더군다나 자신 있다던 경제 분야에 대한 그들의 평가는 어떨까? 그들은 내가 사사건건 짜증스럽게 느끼는 이 정부의 정책을 정말 환호하고 있을까? 매번 여론조사를 하면 적어도 25-35%는 지지한다니까 그런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짐작은 하고 있지만, 우리나라 국민 중에 이 정부의 정책으로 덕 보는 부자가 그리 많단 말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이번에 우리나라의 주류 경제학자로서 ‘보수 우익’ 성향이라는 이준구 교수의 ‘쿠오바디스 한국 경제’를 읽었다. 사실, 몇 년 전부터 참여정부 정책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몇 편 읽었던 적이 있어(물론 인터넷 포털에서다.) 이준구 교수의 이름이 그렇게 낯설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는 포털에 이 교수의 글이 오르는 주기가 훨씬 짧아지고, 글의 내용도 정부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이전보다 훨씬 쎄서 여러 가지 논란(?)을 일으켰던 것으로 기억한다.

   예전에 이준구 교수의 글을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은 역시 ‘수구 꼴통’이로군, 이었다. 작은 허물을 트집 잡아 새로운 개혁 정책을 흔들어 보려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누구는 이걸 이념적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만, 나에게 이념이 무슨 소용이랴?) 그런데, 새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는 이 교수의 글이 더 자주 올라왔다. 그리고, 기사에 소개될 때는 이준구라는 이름 앞에 꼭 ‘보수주의자’라는 수식어가 달리곤 했다. 내가 일부러 찾아 읽은 건 아니지만, 이 분이 쓴 몇 편의 글을 읽어보면서, 이 정도면 진짜 보수라고 할 만하군.(난 역시 직업 특성상 칭찬에 인색하다.)

   그러면서 의아스러웠다, 보수를 표방한 정부가 보수주의 경제학자에게 비난받는 현실이. 이 책을 읽고 이준구 교수의 도움을 받아 내가 내린 결론은, 이 정부의 경제 정책은 전혀 보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흔히들 보수주의 경제 정책의 핵심은 시장 기능에 대한 신뢰에서 출발하는 거라고 말한다. 그런데 과연 이 정부는 시장 친화적인 정책을 쓰고 있는가? 이명박 정부의 경제 정책엔 시장 기능에 대한 믿음과 신뢰보다는 개발주의 시대의 ‘관치’의 냄새가 더 짙다.(미분양 아파트 사태 해결에 쏟는 정책들을 보라.) 반대로 그들이 시장 기능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책들은 사실, 우리나라에서 시장 기능이 왜곡되어 정상적인 시장의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경우에 한정적인 경우가 더 많지 않은가?(공공 부문 민영화 계획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정부는 보수를 표방하는 정부(아, 물론 자기들은 ‘실용주의’ 정부라고 말했다만, 실용은 방법이지 목표가 될 수 없다는 지적을 받고 국정이념을 수정했다고 들었다. 아무리 아니라고 강변해봐야 이명박 정부를 ‘보수주의’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은 없지 싶다. 아, 가스통 할배들은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답지 않게 정책의 변화가 너무 급진적이다. 모름지기 보수란 지켜야 할 가치를 고수하면서 점진적인 변화, 안정된 변화를 추구하는 이념이 아니었나? 그런데, 자고 일어나면 갑자기 ‘규제 완화’라고 해서 지금껏 학교에 있었던 200여 가지 규제(규제에 대한 오해도 있다. 규제가 나쁜 것은 아니다. 사회 환경의 변화를 따라 가지 못해서 불필요한 규제도 있지만, 그 규제가 생겨나게 된 배경을 꼭 생각해 봐야 한다.)를 ‘오늘’부터 싹 다 없애버린다는 정책을 발표하는 정부가 안정 속에 변화를 추구하는 ‘보수’ 정부라고 할 수 있나? 그렇기 때문에 이준구 교수는 이 정부의 정책에 대해 몹시 근심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바꾸려고 달려드는 폼이 곧 초가집을 홀라당 태워 버릴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럼 저들의 황당무계한 계획을 밀어붙이는 자신감의 원천은 무엇인가? 귀를 막고 일방적인 정책만 펴는 이유를 외부적 요인과 내부적 요인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외부적 요인은 너무도 싱겁게 선거가 끝날 정도로 압승을 했다는 점이고, 내부적 요인은 국민에게 선택 받은 것으로 자기의 공약을 마음대로 실행할 백지수표를 받았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두 요인이 상승 작용을 일으켜 아무리 국민들이 바꾸라고 비판해도 ‘소귀에 경 읽기’ 마냥으로 밀고 나간다. (이준구 교수도 이젠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이라는 기사를 읽은 것도 같다.)

   이 책은 지금까지 비판해 온 글을 묶은 것이다. 대운하를 비롯한 부동산 문제, 종부세 폐지, 교육 개혁…… 이 모두를 조금씩 엮어서 아마추어 정부의 1년이라는 장에 참여 정부의 문제점과 이명박 정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두 정부의 정책에 대한 간접적인 비교도 가능한데, (나의 오독誤讀일지도 모르겠지만) 참여정부의 경제 정책(교육 정책)은 대체로 큰 줄기의 방향은 옳았으나 ‘과욕’이 앞선 탓에 투박한 채로 그대로 밀고 나갔다가 기득권층과 수구 언론의 저항의 빌미로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고, 이명박 정부의 경제 정책(교육 정책)은 오직 부자들을 위한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낡은 사고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실패가 불을 보듯 뻔하다고 일갈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의 단적인 사례는 종합부동산세 폐지를 둘러 싼 논란에서 확인할 있는데, 참여정부가 도입한 종합부동산세(종부세)는 부동산 광풍을 잠재울 수 있는 바람직한 제도였으나, 종부세 부과 기준을 지나치게 낮게 정해서 기득권층의 반발을 불러일으킨 점을 문제로 지적하고 있다. 반면에 이명박 정부는 종부세를 무력하게 만들기 위해, 과세 기준을 상향하고, 세율도 대폭 낮추어서 가진 자들이 내야할 세금을 대폭 깎아주어 다주택 소유의 길을 터준 셈이다.(다주택 소유자에게 이런 부담을 덜어주면, 주택의 공급이 줄어드는 효과가 생겨서 결국 주택 가격의 상승을 불러온다.) 여기다가 헌법재판소의 세대별 과세에 대한 위헌 판결까지.

   이 책의 제목처럼 우리 경제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유능한 보수주의자의 걱정스런 경고에도 귀를 닫고 있는 이명박 정부. 그러면서도 ‘경제’는 자신 있다는 큰소리는 여전한데…… 그 공허한 큰소리를 읽을 때마다 마음이 철렁 내려앉는다.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가? 우리의 미래에 대한 장밋빛 전망을 말하기엔 그들의 무능이 너무 도드라진 지난 1년 4개월이었다. 아울러 이준구 교수도 독자를 생각하며 건필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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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의 중국견문록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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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아주 좋아하는 어떤 선생님께서 한비야 씨(이런 경우 뭐라고 불러야 하지, 한비야 씨?, 한비야 선생님?, 한비야?, 한비야 님?, 딱 마음에 드는 호칭이 없네.)가 자신의 ‘롤 모델’이라고 하시면서 이 책을 말씀해 주셨다.(음, 책은 내 돈 주고 샀다.) 나도 한비야 씨의 책은 그가 세계 일주를 마치고 냈던 책 덕분에 한창 유명세를 탄 이후에 펴낸 ‘… 우리 땅에 서다’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땐 설렁설렁 책을 넘겨서 그랬나, 굳이 한비야 씨의 다른 책을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던 것 같다.(그러면서도 괜히 한비야 씨에 대해서 좀 안다,는 어이없는 생각을 하곤 한다.)

   굳은 생각을 하며 살아가다 보니 신문이나 온라인 서점, 심지어 텔레비전의 요란한 (간접) 광고에도 끄떡 없이 한비야 씨의 책을 무심하게 넘겼는데, ‘저런 훌륭한 선생님께서 닮고 싶은 모습이라면 어떤 모습일까?’ 하는 호기심 때문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역시 홍보는 구전(口傳)이 힘이 세다. 한비야 씨의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들었던 내 생각은 - 부러움!

 

    부럽다. 글쓴이가 저렇게 어디든 마음먹은 곳으로 떠날 수 있는 자유로운 몸과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게 말이다. 늘 반복적인 일에다 평온하다 못해 무덤덤하기까지 한 일상을 살고 있는 내 처지-물론 내 상황이 부러운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에서는 가끔은, 부럽다. 물론 글쓴이가 저렇게 멋진 모습으로 살게 되기까지는 남이 모를 많은 시련과 인내를 거쳐 온 것이겠지만, 그 화려함의 이면(裏面)을 잘 보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에겐 그냥 지금의 그 모습이 부러울 뿐이다. ‘뭐,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겠지’라는 일상의 매너리즘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아니다, 인생은 그렇지 않다’고 온몸으로 실증해 주고 있는 글쓴이의 존재가 마냥 부러울 따름이다.

   또 부럽다. 어떤 사람은 저렇게 자기 사는 이야기를 술술 잘도 풀어내고, 1년 동안 살아가는 이야기를 토막토막 글로 쓰기만 해도, 글이 묶여서 뚝딱 책이 되고, 또 그게 먹고 사는 벌이(?)가 될 수 있다는 게 또 부럽다.(이런 걸 문화자본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언젠가 술자리에서, 어느 선생님께서 글 쓰는 사람들은 목숨 걸고 쓴다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던 내가 그 사이에 그 말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책을 읽는 내내 또 부럽다,는 말을 입에 줄줄 달고 있었다. 
   그런데, 진짜 부럽다. 글쓴이의 열정에 가득한 삶이야말로 내가 진짜 부러운 부분이다. 삶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수 있고, 그 기회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삶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삶이 곧 글이 되기도 하고, 그가 쓴 글을 읽어주는 독자도 많아지는 것이다.

   견문록 곳곳에 글쓴이의 삶에 대한 열정이 가득 넘친다. 이 삶에 대한 열정이야말로 한비야 씨를 진정 한비야 씨답게 만드는 매력적인 요소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나는 글쓴이의 삶에 대한 열정이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피나는 노력의 결과일 것임을 ‘머리’로는 알면서도-따라서 누구나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슴’으로 마냥 부러워하기만 한다. 진짜 부럽다.

 

   정작 중국에서의 유학 생활 1년을 담은 책의 내용은 평이한 편이었다. 글쓴이의 말처럼 학생 신분이니까 당연히 공부에 집중해야 하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책의 여기저기엔 이방인으로서 중국(베이징)에 살면서 보고 듣게 되는 중국의 다양한 사회와 문화에 대한 주관적 인상, 또 유학생 신분으로서 겪을 수 있는 다양한 에피소드와 그 상황에서도 언제나 생기를 잃지 않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상황을 받아들이는 글쓴이의 씩씩한 모습이 나타나 있어 이 책을 읽는 사람에게도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러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그 선생님이 참 멋있다,고 느낀 점이 바로 한비야 씨의 저런 모습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한비야 씨의 모습과 그 선생님의 모습이 묘하게 겹친다. 그 선생님은 이미 자신의 롤 모델과 충분히 닮은 것 같다.(본인은 별로 인정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지만...) 나도 나만의 '롤 모델'을 찾아서 닮으려고 애쓰다 보면 조금은 나은 사람으로 성장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 일단 역할 모델부터 한 번 찾아보자. 자, 누구 있을까?.............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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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8-08-30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유롭게 생각하고, 진지하고 성실하게 사는 게 제 삶의 목표지요. 중심을 잡고 편견 없이 바라보며 ... ㅋㅋ 대문에 걸어 놓은 이 말을 읽으면서요...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자유와 성실이 함께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진지는...
중심을 잡는 것과 편견없는 것이 함께할 수 있을까? 중심을 잡는단 것이 편견 아닐까 하는 쓰잘데기 없는 생각이... ㅎㅎㅎ 롤 모델. 있는 것도 좋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것이 삶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느티나무 2008-08-31 02:41   좋아요 0 | URL
저 글의 원래 의도는 '생각'은 막힘 없이, 경계 없이, 안 된다는 선입견 없이 '자유롭게' 하고, 그 생각이 한 번 결정되고 나면 진지한 자세로 성실하게 '실천'해 나가고 싶다-그냥 한때의 치기나 만용이 아니라-는 것이였습니다. 그러니까 자유와 성실이 맡은 영역이 다르다고 할까요? 중심과 편견이라.. 이건 생각해 보니 그럴 수 있겠네요. 자기 생각이 없으면 편견도 없을 테니까요. 어떤 식으로든 중심을 잡는다는 하나의 시각을 갖는다는 의미고, 모든 시각은 편견일테니까요.^^

느티나무 2008-08-31 02:40   좋아요 0 | URL
역할 모델,에 대한 이야기. 일종의 목표 같은 거 아닐까요? 누구를 닮고 싶다는 욕망이 어쩌면 저를 지금보다는 조금 더 괜찮은 사람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수단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다만, 미안하고 미안한 말씀이지만, 학교에서 제 역할 모델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들꽃학교 노교사, 교육 희망을 보다 - 이원구 선생님의 교육에세이
이원구 지음 / 우리교육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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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안준철 선생님의 <들풀>

들풀

- 안준철

들풀을 보면 생각난다.

이름으로 불러 준 적 없는 아이들

마음으로 읽고

눈빛으로 알고

따스히 흘러

빗장을 열게 하는 사랑

나눠 준 적 없는 아이들

그런 사랑 받아 본 적 없어

더 가슴 태웠을 것을

더 다가오고 싶었을 것을

들풀을 보니 생각난다.

화사하지 못하여

키에 가리워

먼발치로만 서성이던 아이들

한 번 더 다가섰으면

꽃이 되었을 우리 아이들


안준철,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한동안 이 시가 좋았다. 그래서 좋아하는 여러 선생님들께 나눠주기도 했다. 들풀 같은 우리 아이들, 많이 사랑해 주십사는 의미였다. 어느 순간, 산에 들에 피어난 들꽃의 이름을 외우려고 애쓰는 내가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들꽃의 이름을 알려는 노력을 아이들의 삶을 이해하는데 쏟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제는 그 강박관념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

   그런데 시간이 다시 한참이나 지난 후, 지금은 이 시가 참 좋다. 이 시를 쓴 안준철 선생님을 직접 만나 뵌 게 이유기도 하지만,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인이 그런 것처럼, 들풀의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이 들풀 같은 우리 아이들의 아름다움을 모를 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이 아닐까? 이 시를 읽을 때 마음의 울림이 오는 사람이라면 들꽃의 아름다움만 취하지 않고 우리 아이들의 참모습에도 따스한 눈길을 전하는 감성이 함께 있다고 믿는다.

   들꽃 학교 노교사, 교육희망을 보다, 라는 책은 들풀의 아름다움에 빠진 한 교사의 교단생활 이야기다. 아니, 들꽃 같은 우리 아이들의 풋풋한 아름다움에 취해 살아온 세월에 대한 이야기기라고 말해야 의미가 더 정확하게 전달될 듯 싶다. 생각은 많지만 행동은 머뭇거리는 교사가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은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며 살아온 ‘교육운동가’답게, 아름다운 들풀을 학교 구석구석에 옮겨 심고 가꾸는 과정을 통해 다른 교사들과 아이들에게 들풀의, 교육의, 나아가 인생의 새로운 의미를 조근 조근 말해주고 있는 책이다. 새 학기가 되면 새 학교로 옮겨 온 새싹 같은 아이들과 한 평생을 살아온 이야기가 넉넉하게 담겨있으니 지금 아이들과 함께 하는, 함께 하고픈 모든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책이리라고 믿는다.

2. 주말 농사 실패하다.

   한 4년 전인가 보다. 그 때는 나도 여러 선생님들 틈에 끼여서 노조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 선생님 중에 한 분이 부산에서 가까운 김해에 노는 땅을 얻으셨고, 그 때 노조에서 함께 일하던 사람들끼리 주말 농사를 지어보자며 희망하는 분들에게 그 밭을 두 고랑씩 분양해 주신다기에 앞 뒤 재보지도 않고 덜컥 분양을 받았다. 아마도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사람이 느끼는, 도시 생활에 대한 어떤 결핍감 같은 게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 밭은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라 자가용이 없는 나는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그래도 한동안은 들뜨고 기쁜 마음이 계속되었다. 밭에는 종묘상에서 산 상추와 쑥갓의 씨를 심었고, 고추와 방울토마토는 어린 모종을 옮겨다 심었다. 씨와 어린 모종에다가 거름도 주고, 물을 흠뻑 뿌려 주면서 나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서너 달 후에 제대로 수확을 하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내가 키운 고추라며 한 봉지를 슬쩍 내놓을 수 있으리라는!

   그러나, 해도 해도 끝이 없던 학교 업무와 노조의 일에 밀려서 겨우 주말에나 가서 얼굴만 내밀던 일도 점점 뜸해지고 말았다. 나중에는 내 고랑의 어린 새싹들이 어떤 상태로 있을 지 뻔히 눈앞에 보이는 듯 해서 밭을 찾는 발걸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당연히 그해 주말농사는 완전 망했다. 무참하게도 다른 건 한 번도 수확하지 못 했고, 물만 주면 자란다는 상추만 겨우 두어 번 뜯어서 집에 가져왔을 뿐이다.

   다음해엔 텃밭을 분양받지 않았지만, 이후에도 미련이 남아서 조금 넓었던 아파트 베란다에 고추와 상추를 다시 심었으나, 그것도 제대로 수확 한 번 못했다. 아내에게 큰소리를 쳤던 나는 다시 무안했다.

   텃밭을 일구려고 했던 나는 안다, 들꽃 학교의 텃밭에서 채소를 심고 그것을 가꾸는 일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님을! 그리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나는 안다, 아이들이 잘 자라려면 교사의 온 정성과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실패를 해 보니 더욱 잘 알겠다. 농사나 교육은 농부나 교사의 꾸준한 관심을 거름 삼아 그 대상이 본바탕을 꽃피운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 자명한 진리를 이 책에서 다시 배운다.

3. 나도 아름답게 늙을 수 있을까?

   2007년 3월, 올해로 학교에 들어온 지 9년차이다. 아직도 많은 것이 서툴기만 한데 벌써 꽤 시간이 지나버렸다. 처음 발령을 받고 학교에 출근하던 날의 기억도 또렷한데, 내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십년의 세월이 흐르는 것이다. 이럴 때 ‘시간, 참 빠르다’라고 하는가 보다. 그러나 나는 시간이 갈수록 경험이 쌓여 안정감이 드는 것이 아니라 늘 무엇인가에 쫓기는 듯 불안함이 든다.

   교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는 다양한 답이 나올 수 있지만, 나는 요즘에 인간이라는 존재의 중요하고도 특별한 한 시기(‘질풍노도기’라는 말이 정확하다는 생각이 든다.)에 있는 인간과 소통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전문가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이 불안함의 원인은 바로 이 소통의 문제 때문에 온다. 교사의 나이가 적을 때는 전문성에 대한 훈련만으로도 특별한 노력 없이 자연스럽게 학생들과 소통이 가능하지만, 물리적인 나이가 들고, 경험을 통한 자신의 생각이 굳어지기 시작하면서 아이들과 소통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을 많이 보았다. 심지어는 아이들과 수업하기 힘들어서 승진 준비를 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떠도는 것이 학교의 현실이기도 하다.

   아직 과문한 탓이겠지만, 후배 교사가 보기엔 참 아름답게 늙어가는 선배 교사를 그리 많이 보지 못 했다. 승진 욕심에 물불을 가리지 않으니까 머릿속에서 ‘교육’이라는 단어를 지워버린 사람들도 많고, 무욕(無慾)한 듯 보이는 분들도 따분한 일상에 무기력하게 반응하거나, 모든 일들에 오직 자신의 ‘나이 먹었음’만이 논리의 모든 근거가 되어 학생들은 고사하고 후배 교사와의 소통마저 힘든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나는 불안하다. 나도 저렇게 늙어갈까 봐 말이다. 지금 내가 싫어하는 모습을 보이는 분들도 내 나이 때는 선배 교사를 보면서 나처럼 생각했을 테니까.

   누구나 초임 교사 시절에는 아이들의 삶을 이해하기 어려워질 때 교단에서 내려오기를 꿈꾼다. 그러나 세월은 살 같이 흐르고, 또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 꿈을 실천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처음부터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대신 정년 때까지 평교사로, 교실을 지키는 이름 없는 노병(老兵)으로 사는 꿈을 꾸었다.(늙으면 천덕꾸러기가 되는 것은 아닐까, 싶은 두려움이 아직도 많다.)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지만, 오늘 나는 거기에 다른 꿈을 새로 꾼다. 내가 학교에서 늙은 교사가 되었을 때 후배 교사가 스스럼없이 찾아와 도와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그런 교사가 되고 싶다는 꿈 말이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변하는 세상의 흐름을 볼 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싶다만, 꿈조차 꿀 수 없는 것은 아니니까 마음속에 오롯이 큰 꿈을 품어 본다.

  그런데, 나는 요즘 내 큰 꿈에 등불을 밝혀 준 이를 책에서 만났다. 그 분이 바로 들꽃 학교 노교사, 이원구 선생님이시다.

  정녕 아름답게 늙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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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2007-03-11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제목과 본문의 내용은 별로 관계가 없어요. 글만 써 넣고 올리려니까 제목을 넣으라는 안내 메시지가 나왔고, 요즘 개인적인 고민 때문에 일주일이 넘게 학교를 안 나오고 있는 OO이가 생각 났어요. 빨리 힘내고 기운 차려서 학교에 다시 나왔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제목을 붙였습니다.

2007-03-11 0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만과 편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8
제인 오스틴 지음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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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까지 내가 읽어 본 외국소설이라고는 대학 다닐 때, 친구들이 읽으면서 감동했다는 말에 솔깃한 ‘데미안’ 정도였다. 그런데 다 읽고도 그 소설이 감동적이라는 말엔 전혀 동의할 수 없었다. 그 이후 ‘호밀밭의 파수꾼’과 ‘위대한 개츠비’에도 손이 갔지만 그리 탁월한 선택은 아니었던 듯싶었다. 아무튼 나에게는, 배경을 잘 알 수 없는 외국소설은 친구가 맛있다고 권하는 낯선 음식을 무슨 맛인지도 잘 모르면서 계속 먹어야하는 것처럼 곤혹스러운 일이다.


   지금에야 고백하건데, 나는 오만과 편견이라는 책은 소설책이 아니라 문학이론서나 두꺼운 사회과학 서적인 줄 알았다. 내가 이런 오해를 하게 된 것은 아마도 책의 제목이 주는  중압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처음 오만과 편견이라는 말을 들었던 건, 10년도 훨씬 더 지난 일이지만, ‘너에게 나를 보낸다’라는 영화에서 바지 입은 여자로 나온 정선경 씨가 비빔밥을 다 먹고 그 그릇에다 물을 부어 마시면서 하는 대사 중에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라는 책을 보면…’ 이라는 말이 나왔던 것 같은데, 그 때 오만과 편견이라는 단어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이 결국 며칠 전에 내가 이 책을 읽은 이유일 것이다.


   이 책은 훌륭한 귀족 가문을 배경으로 모든 것을 다 갖춘 듯한 한 남자-손꼽힐 만큼 많은 재산과 뛰어난 지적 능력, 알고 보면 따뜻한 마음을 가진-다아시 씨와 평범한 가문에서 자랐지만 재기발랄하며 똑똑하고 재치가 넘치면서도 아름답기까지 한, 엘리자베스 베넷 양의 사랑이야기가 주요 내용이다.

   다아시 씨는 앞에서 말한 모든 장점도 있지만 ‘오만’한 성격 탓에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엘리자베스 주변의 천박한(?) 인물들-특히,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상업을 하는 친척들- 때문에 사랑을 망설이고 있으며 또, 그래서 쉽게 엘리자베스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지 못한다.

   엘리자베스는 다아시 씨가 진실로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면서 그의 오만한 듯한 모습과 다른 사람의 잘못된 평가만을 믿고, 다아시 씨가 성격적 결함이 많은 사람이라는 ‘편견’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 둘은 두 사람 사이에 얽힌 여러 가지 사건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이해하며 사랑하게 된다. 다아시 씨는 엘리자베스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천박하다고 생각했던 엘리자베스의 가족을 이해하려고 하고 자신의 오만한 성격을 고치려고 노력한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총명함 뒤에 있던 다아시 씨에 대한 편견을 없애려고 애쓰면서 둘의 사랑은 완성된다.


   흥미로운 사건들이 이어져서 지루하지 않고, 젊은 여자들의 심리 묘사도 탁월했고, 전부 다 느낀 것은 아니지만 곳곳에 가득 찬 유머와 풍자 등도 책을 읽는데 즐거움을 주었다. 그렇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나는 이 소설에서 결혼과 연애에 대한 엘리자베스-아마도 제인 오스틴의 생각이 투영된-의 생각이 나타난 부분이 재미있었다.

   이 소설에서는 모두 네 쌍이 결혼을 하게 되는데, 첫 번째는 자기(엘리자베스)에게 청혼했다 거절당한 후 사흘 만에 자기의 친구에게 청혼을 한 콜린스 씨와 그의 청혼을 받아들여 성사된 샬롯의 결혼에 대해서는


   콜린스 씨는 똑똑한 사람도, 함께 있기에 즐거운 사람도 분명 아니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지루했고, 그녀에 대한 그의 애정도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어찌 됐든 그녀는 남편을 갖게 될 것이었다. 남자나 혼인 관계 그 자체를 중요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혼은 언제나 그녀(샬롯)의 목표였다. 좋은 교육을 받았지만 재산이 없는 아가씨에겐 오직 결혼만이 명예로운 생활 대책이었고, 결혼이 가져다줄 행복 여부가 아무리 불확실하다 해도 결혼만이 가장 좋은 가난 예방책임이 분명했다. 이제 마침내 그 예방책을 손에 넣은 것이니 스물일곱의 나이에 한 번도 예뻐 본 적이 없는 여자로서는, 이번만큼은 정말 운이 좋았다고 느꼈다.(177쪽)


   “너도 알지만 난 낭만적인 사람이 아니야.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지. 내가 원하는 건 단지 안락한 가정이야. 그리고 콜린스 씨의 성격과 집안 배경, 사회적 지위 등을 고려해 볼 때, 내 생각엔 우리에게도 다른 어느 커플 못지않게 행복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어”(181쪽)


   콜린스 씨가 사흘 동안에 두 사람에게 청혼을 했다는 사실이 황당하기는 했지만, 그건 샬럿이 실제로 청혼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결혼에 대한 샬럿의 견해가 자기와 꼭 같지만은 않다는 건 그녀도 언제나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도 그녀가 세속적인 이익을 위해 더 중요한 다른 것들을 희생시킬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콜린스 씨의 아내인 샬럿, 정말로 창피스러운 그림이었다! 그리고 친구가 창피스러운 일을 함으로써 자신을 실망시켰다는 것도 가슴이 아팠지만, 마음을 더 무겁게 한 건 샬럿이 자기 스스로 선택한 운명 속에서 웬만큼이라도 행복하게 살 수는 없을 거라는 확신이었다. (181쪽)


   엘리자베스는 그 두 사람이 애정 없이, 조건에 따라 선택한 결혼이기에 행복하게 살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을 내리고 있다. 리지는 콜린스 씨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그의 청혼을 단호히 거절하는데, 그에게는 조금도 애정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친구는 애정 없는 결혼도 행복해 질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리지는 회의적이다.


   두 번째는 한 때 리지도 호감을 가졌던 민병대의 장교, 위컴과 그를 따라 다른 지방의 친척집으로 갔다가 결국 위컴과 함께 가출하여 베넷 집안을 근심과 걱정 속에 몰아넣었던 동생 라디아와의 결혼에 대해서도 역시 부정적인데, 위컴이라는 사람이 근본적으로 나쁜 사람이고, 리디아는 사람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안목도 없을뿐더러 사랑에 눈이 멀어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당시에는 가문의 허락 없는 결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집안의 망신을 막기 위해서 그나마 두 사람이 결혼하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지만 그 결혼 생활도 리지가 보기에는 행복을 기대하기 어려운 생활이 된다.


   “정말 결혼을 하게 되다니! 뭐 이런 일이 다 있어! 이따위 일에 우리가 감사해야 하니 말이야. 행복할 가망이 거의 없는데도 결혼해야 하고, 남자의 성격이 형편없는데도 우린 기뻐해야 한다는 거지! 에이, 리디아 계집애!”(417쪽)

   불쌍한 리디아의 처지는 그야말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더 나빠지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해야만 했다. 그녀는 그렇게 느꼈다. 비록 앞을 내다보면 당연히 동생에게서 정상적인 행복도 세속적인 번영도 기대할 수가 없었지만, 단 두 시간 전에 자신들이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돌이켜보면, 그나마 이렇게라도 된 것이 어디냐고 감지덕지하는 기분이었다. (421쪽)

   반대로 이어지는 두 번의 결혼은 여러 번의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지지만 희망으로 가득 차 있는데, 먼저 옆집에 살았던 빙리 씨와 천사 같은 리지의 언니 제인과의 결혼은 두 사람이 현실적인 근거에 기반을 둔 사랑을 하고 있고, 두 사람의 성품이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끌어 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엘리자베스는 그가 사랑에 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에 대한 그의 온갖 기대가 튼튼하고  현실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제인의 탁월한 이해심, 탁월이라는 말로는 모자랄 성품, 그리고 그녀와 빙리 사이의 감정과 취향이 전반적으로 비슷하다는 점 등이 뒷받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476쪽)


   나머지 한 번의 결혼은 엘리자베스 자신과 다아시 씨와의 결혼인데, 이 둘의 결혼은 나무랄 데 없이 이상적이고 훌륭한 것이라 더 이상의 설명을 불필요한 듯하다.


   애정 없이 조건을 보고 결혼하는 현실파나 애정에만 목을 매는 낭만파 모두를 비판적으로 보았던 제인 오스틴. 현실에서의 제인 오스틴은 과연 ‘다아시’ 씨를 만날 수 없었던 것일까? 샬럿이나 리디아와 같이 불행이 뻔히 보이는 결혼을 하느니 차라리 독신으로 사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편견’에 사로잡힌 느낌이지만 오스틴이 행복한 결혼을 할 수 있었다면 200년이나 더 지난 후, 그가 살았던 땅의 반대편에서까지 읽히는 이런 소설은 아마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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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사중주
김재준 외 지음 / 박영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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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시대한민국'답게 서점가에는 대입성공수기나 '공부 방법'에 관한 책은 굳이 입시철이 아니어도 넘쳐난다. 그러나 나는 유감스럽게도 그런 책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이런 책은 늘 공부로 고민하는 대한민국의 '보통 학생들'에게 소박한 꿈을 주는 미덕에도 불구하고,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성공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심어주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책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쓰여진 것도 절대로 쉬운 것이 아닌 것은 물론이다. 개인의 편견일수도 있겠지만 '공부 방법'에 관한 책은, 개인의 특수한 경험을 보편적인 방법으로 소개하거나 합리적인 근거나 과학적인 검증 없이 '성공의 신화'만 강조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뭔가 특별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책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도 이 특별한 경험이 보편적인 방법으로 소개되는 것이 현실이다.
 
   얼마 전에 우연히 대학교수들이 언어와 창의성을 주제로 고등학생을 위한 책을 냈다는 광고를 보고 망설이다가 책을 사서 보았다. 지금까지 나와 있는 입시 관련 책과는 무엇인가 다르겠다는 생각이 크게 작용했는데, 대학교수들이 고등학생을 위한 책을 썼다는 점과, 수학을 논리적 언어라며 언어의 영역으로 포함시킨 것이 참신한 발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난 내 느낌을 미리 말한다면, 이 책은 지금까지의 책들과는 분명히 다른 참신한 점을 보여주고 있으나 실제로 교육현장에, 학생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겠다.

   이 책은 읽기와 토론(주경철), 영어(김종면), 수학=생각하기(김재준), 글짓기(신광현)의 영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일단 나는 창의성과 언어 능력을 높이려는 시도가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지금까지의 책들과는 다른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대표적인 것이 공부하는 방법으로써 제시하는 이 책의 일관된 전제는 '스스로 생각하기'이다. 실제로 학교에서 학생들과 수업을 하다보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많이 느끼는데, 이 책을 통해서 고등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교수와 교사간의 인식의 차이는 이렇게도 큰 것일까? 교사인 내가 생각하기에 이 책이 주요 독자로 삼고 있는 고등학생들이 이 책을 얼마나 이해하며 읽어 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더구나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학습 방법은 현재 우리 나라의 고등학교 학생이 그대로 따라하기에는 더욱 힘들 것이다. 교수님들이 생각하고 있는 고등학생은 어떤 수준의 학생들인지 잘 모르겠으나 내가 만나고 있는 대다수의 고등학생은 어려움을 느낄 것 같다.

   예를 한 번 들어보면, 대다수의 고등학교 수준의 학생들은 생활 영어 단어 익히기(익히기), 기본 문장 읽기, 일상적인 대화 상황 듣기와 표현하기-사실, 교실에서 '표현하기'가 얼마나 활발하게 이뤄지는지 알 수 없지만- 정도도 힘들어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영어로 사고하기, 입으로 말하기, 다양한 영어 표현 익히기, 개성 있고 세련된 표현 만들기, 영어의 강약 리듬 느끼기의 순서로 영어 학습법을 설명하고 있다. 현실은 기본 문장을 읽고 이해하는 정도의 수준인데, 자기만의 개성 있는 문장 만들기를 주문하고 있으니 그 간극의 차이는 너무나 크다.

   이것이 같은 고등학교 교과서를 보고 문제를 내더라도 대학 교수들은 다른 방향에서 생각을 하는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집필진의 선의(善意)와는 상관없이 이 책은 '다수의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읽힐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다. 그 원인은 앞에서 지적했듯이 독자의 '눈높이'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이 책을 보면 선의가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아쉬움이 남지만, 그래도 이런 시도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입시 공화국', '교육 열풍'의 허울좋은 구호 속에 대한민국의 교육 분야 콘텐츠는 얼마나 살풍경한가? 이 책을 발판으로 제대로 된 학습 방법 안내책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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