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신기하게도 어제 하루 병으로 조퇴를 했다. 아파서 조퇴한 건 일하기 시작한 이래 꼬박 7년이 지났건만 어제가 처음이었다. 아무튼, 오늘은 썩 괜찮아 져서 아이들이랑 유쾌하게 모임도 하고 늦게 들어왔다.

   학교는 우리반 아이들과 잘 지내고 있는 편이다. 적당히 서로 봐주고 있는 것 같다. 녀석들은 마구 도망가고 싶은 욕구를 내 눈치를 보며 조금씩 줄이고, 나도 아이들의 상태를 대충 이해하는 척 하면서 넘어가 준다. 그러다가 한 번 마음을 먹으면 혼내키기도 하고, 좀 달래기도 한다. (흠, 내 이야기는 다시 써야지.)

  이번 달에도 바쁘다는 핑계로 책을 그렇게 많이 읽지는 못한 것 같다.

 

 

 

 

 

 

 

 

 

  • 한국인코드 : 근현대사를 통해 만들어진 한국인의 10가지 특성. 읽으면서 공감은 갔으나, 그랬다. 마음으로부터 멀어진 것일까?(최근들어 강교수의 실명비판의 의미를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의 앞에 내세우는 경우가 많으나 단지 꾸밈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교수는 알고 있을테지. 어떻게 생각하시나?)
  • 새끼 개 : 개인적으로 동년배인 박기범씨를 꼭 한 번 만나 보고 싶다. 그의 동화는 사람의 마음을 아릿하게 한다.
  • 앵무새 죽이기 : 다혜가 빌려준 책. 초반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 조금 지루했으나... 갈수록 흥미진진하다.
  • 사이시옷 :  십시일반2라고 해야겠지. 그러나 비정규직의 문제를 정규직의 이기주의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엔  동의할 수 없다.
  • 엄머 외로운 거 그만하고 밥 먹자 : 당신의 삶이 행복하다면 득도하셨소. 대단하신 분.  
  • 두려움과 배움은 함께 춤출 수 없다 : 새 학기 시작을 이 책과 함께 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해마다 새로운 마음 가짐으로 아이들을 만나는데 아주 도움이 되는 책이다.
  •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 왜 당연한 저 말이 제목이 되어야 했을까, 했는데 끝까지 읽은 사람은 잔잔한 깨달음을 얻으리라.
  • 삼색공감 : 정혜신씨의 날카로움이 무뎌진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의 깊이가 더 넓어지고 있다고 믿고 싶다.

 

[아이들과 2006년 3월에 함께 읽은 책]

 

 

 

 

  • [아홉 번째]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2(2006년 3월 3일) - 우리 근현대사 100년 중에서 역사상 최악의 인물은 누구이며, 그 이유를 설명하기, 우리 역사의 가장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던 사건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발표하기
  • [열 번째]거꾸로 읽는 세계사(2006년 3월 16일) - 책을 읽고 각자가 맡은 부분을 요약 정리하고 발표하기
  • [열 한 번째]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6년 3월 31일) - 사형제도, 이대로 둘 것인가 <찬성/반대> 토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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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이벤트성 행사에 아주 약한 사람이지만 오늘 같은 날은 좀 특별하니까 기념 이벤트가 필요했다. 징크스도 아닌 것이 오늘이 무슨 기념일이면 항상 준비를 전날 밤 아주 늦게 하게 된다. 어제만 해도 학급운영모임에 가서 공부를 하고 마치니 저녁 9시 30분. 그제서야 허겁지겁 꽃집으로 가서 장미를 열 송이 사고, 담임회의 시간에 먹을 빵도 조금 샀다. 준비하면서도 '아, 이거 뻘쭘해서 어떻게 전해드리지?'하는 걱정만 앞서고, '괜히 했나?'하는 마음만 들었다.

   아침에 좀 늦게 일어났더니 정신없이 챙기고 있는데, 부지런한 해콩님께서 사과를 사 놓았으니 빨리 와서 나눠주기라도 해라는 연락이 왔다. 더 서둘러 집을 나서서 좀 가다보니 아뿔싸, 장미와 빵을 집에 그대로 두고 와 버린 걸 알았다. 늦었지만 어쩔 수 없어서 다시 돌아가서 챙겨들고 나와 코앞인 학교까지 택시를 타고 와야 했다.

   2학년 교무실에 들어와 보이는 여선생님부터 차례로 꽃 한송이씩 드렸다. 별 설명 없이 드려도 다 알아채시고, '여성의 날이라고 주는 거죠?' 묻는 분도 계셨다. 학년 회의 시작할 때 준비해 간 빵도 풀었다. 아, 그 전에 역시 재빠른 해콩님은 여성의 날을 챙겨온 여성이라는 푸념과는 달리 이미 선생님들의 책상에 먹음직스러운 사과를 두고 가셨다.

   아이들에게 해 줄 말이 없을까 싶어서 어제부터 자료를 뒤적였으나 썩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겨우 찾은 게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을까'라는 시 한 편. 꽃 한송이만 덩그러니 드린 게 못내 미안해서 선생님들께도 이 시를 보내드렸더니 좋다는 답장을 보내주셨다. 나는 수업시간에 들어가 아이들에게 읽어주기도 했다. 나만의 착각이겠지만, 시를 읽는 동안은 평소보다 약간 더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튼 오늘도 분주한 하루였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는 공부방 수업이 있는 날이기도 했으니 마음은 더 바빴는데, 수업을 끝내고 와서는 오랜 친구네 문상까지 다녀왔다. 얼른 긴 하루를 마감해야겠다. 할 말은 많지만, 여기서 참아야할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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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3-09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 말 많은데 참으면 병 된다우~ ^^

느티나무 2006-03-09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이 와서 죽을 뻔 했는데요, 뭘~! 다른 건 아니어요. 어제 교감이랑 연구부장이랑 이야기해서 동아리 신입회원 문제 해결했어요 ^^ㅋ
 

우리 역사 100년 동안의 최악의 인물은 누구인가?

* 금요일 글밭 나래, 우주인 모임의 독토책은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2'였다. 그리고 함께 이야기할 숙제로는 우리 역사 100년 동안의 최악의 인물을 선정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기였다. 이 글은 책을 읽고 고심 끝에 해 간 나의 숙제다.

   최악의 인물이라고 한다면 우리나라를 불행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던 장본인을 말하는 것일텐데, 글쎄, 나라의 불행이 어느 한 개인에 의해서 결정될 수 있는가라는 논쟁도 충분히 가능할 듯하지만 그 문제는 또 따로 다루어야 할 주제라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일단 주어진 숙제를 충실히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내 생각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우선 선뜻 떠오르는 인물들을 정리해 보면,

   우리나라를 일제에 팔아넘긴 매국노 중에서 가장 적극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꼽히는 이완용, 역사적인 격동기에 '황제'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제대로 나라를 이끌지 못하고 나라를 잃은 책임이 있는 '고종황제', 일제 강점기 당시에 우리나라 사람의 혼을 친일화 하는데 앞장 선 이광수, 해방 이후 쿠데타를 일으키고 경제발전을 명분으로 독재 정치를 펼쳤던 박정희, 박정희가 죽은 후 터져나온 민주주의의 열기를 역시 쿠데타로 누르고, 이에 저항하던 광주시민들을 총칼로 진압한 전두환, 그리고 민족해방을 명분으로 일으킨 전쟁 때문에 죽은 수백만 명의 목숨에 대한 책임이 있는 김일성 등이 떠오른다.

    그러나, 나는 '우리 역사 100년의 최악의 인물'에 이 사람을 앞서 말한 사람들의 앞자리에 두고 싶다. 최근에 어느 신문에서는 이 사람을 나라를 세운 '국부(國父)'라고 하던데, 내가 생각하기엔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이승만은 외세에 의한 독립운동을 주장하여 미국에 독립청원서를 주임무로 했다.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여러 가지 문제로 임시정부 요인들과 갈등을 일으켰고, 여러 사람들은 이승만이 있는 임시정부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임시정부를 떠나기까지 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 세력이 단합하지 못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두 번째로는 미국/소련이 남북을 분할 점령한 후 정부 수립을 논의하던 중,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주장하고 나서 4.3항쟁과 남북한 분단의 책임이 있다. 단독 선거에 반대한 제주도민을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그 과정에서 무고한 민중들도 많이 희생되었다.(사망 추정자는 약 3만 명)

   세 번째는 정부 수립 후 호전적(好戰的)인 통일관으로 남북한의 긴장 관계를 강화하였고, 결국 북한의 남침으로 인한 전쟁까지 가게 되었다. 이승만의 통일관은 북진 무력 통일로, 전쟁을 하면 '평양에서 점심을, 신의주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다고 큰소리쳤으나 정작 전쟁이 시작되자 도망가기에 바빴다.

   네 번째는 정부 수립 후 독립운동 세력들에게서 인정받지 못한 이승만은 친일파 인사들을 정부관리로 대거 등용하였다. 친일파 인사들도 당연히 이승만 정부에 적극 협조하였고, 해방 이후 우리나라는 친일 부역자 청산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반민특위'의 강제 해산이었고, 60년이 지난 지금도 친일부역자 청산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예민한 문제로 남아 있다.

   다섯 번째는 자유로운 민주 정부에 대한 대다수 국민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독재와 전횡을 일삼았다는 점이다. 대통령직 유지를 위해 헌법을 마음대로 뜯어고치고, 부정 선거를 주도했으며,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총칼로 진압하기도 했다. 그래서 결국 4.19항쟁에 의해 쫓겨나 하와이로 망명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 다섯 가지가 지난 100년의 역사에서 내가 최악의 인물로 이승만을 선정한 이유다.

   일제 강점기 때의 친일 논란의 핵심이었던 이광수 문제를 두고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주제로 짧은 토론이 있었다. 한편에서는 그 당시의 상황은 어쩔 수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런 논리라면 '친일부역자'들은 모두 면죄부를 받아야 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역시나 토론은 흥미진진하고, 생기가 돌아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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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6-03-04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승만이 싫습니다.
비겁하기 짝이없는 비열한이었던 거 같애요.
박통이나 전통에 비해 훨씬 비겁하게 동족을 살해한 놈이죠.
국민방위군 같은 걸 보면 정말 나쁜 놈이에요.
그리고 '면제부'는 <면죄부(免罪簿)>가 맞습니다.

느티나무 2006-03-06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맞네요. 면죄부! 제가 뭐 이 정도 수준입니다. ^^;; 그래도 정말 나쁜 놈이긴 한데, 정말 나쁜 놈이라고 내뱉기에는 항상 망설여져요. 생각이 회색이라 그런가 흠.
 

   오늘, 아니 사실은 어제지. 정말 무지 피곤했나 보다. 학교에 있을 때부터 다리가 무척 아팠다. 그런데도, 부르는 사람은 왜 그렇게 많은지. 하기야 성격 탓도 좀 있긴 하다. 그냥 새로 오신 선생님들이 어쩔 줄 몰라하시는 건 도와드리고 싶다. 1학년부실에도 두 세 번 요청이 와서 내려갔었고, 3층에 있는 내 교무실과 4층에 있는 우리반을 여러 번 들락거렸더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작년엔 1층에 교무실과 교실이 마주 보고 있었다. 그 땐 그게 좋은 줄 몰랐는데...)

   집에 오자마자 아내가 챙겨주는 밥을 먹고 그대로 쓰러졌다. 방학 때 신나게 논 벌로 새학년 준비가 거의 안 되어서 집에 와서도 바빴어야 했으나 아무 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그냥 자버렸다. 문자메시지 덕분에(?) 잠을 깬 게 11시쯤이었다. 일어나서 정신을 좀 차리느라 시간을 좀 보냈고, 당장의 수업 준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을 서가에서 몇 권 골랐다. (낼 챙겨갈 것들이다.)

   올해 내가 맡은 과목은 '문학'이다. 전혀 '문학적'이지 않은 교사와 함께 문학을 배울 우리 아이들을 생각하니 한숨이 나온다. 고백하건데, 나는 문학을 가르치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는 거 같다. 설사 있었다고 하더라도 기억도 가물가물한 상태로 어떻게 문학을 가르치나 싶다. '문학'은 '국어'라는 과목이 주는 중압감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아직, 내가 '문학; 수업을 해 본 적이 없어서 더 그런가 보다.) 아무튼 올해는 2학년 문학 수업 때문에 고생을 좀 해야 할 것 같다.

   입시 고등학교의 현실에서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로 들리겠지만, 문학 시간을 통해서 내가 문학 작품을 많이 소개해 주면, 아이들이 문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일 수 있도록 하고 싶다. 자신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는 작품도 있다는 걸 알았으면 한다. 

   나는 해마다 그렇지만 담임 발표를 앞둔 아이들의 표정을 보는 것이 씁쓸하다.그 알듯 말듯한, 속내를 감춘 표정. 안도와 불안이 교차하는 눈빛. 찡그린 것도 아니고 엷은 웃음을 띈 것도 아닌 애매한 웃음. 그 복잡다단한 감정을 전혀 모른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표정을 바라봐야 하는 나도 고역이다.

   올해는 2학년 O반 담임이다. 일부러 담임 발표 전까지 교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운동장에서 돌아와 3교시 담임시간. 교실에 들어서니 이제 익숙한 아이들의 눈빛이 읽힌다.(작년에 모두 수업을 함께 한 학생들이다.) 역시나 준비가 덜 되어 아이들에게 해 줄 말이 부족하다. 그 가운데서도 새롭게 출발하자는 부탁과 두 달 동안의 허니문 기간을 갖자는 약속을 했다. 아이들 뿐만 아니라 나 역시도 새로운 마음을 먹어야 한다.

   오늘 집에 올 때 같이 온 녀석이 툭 내뱉었다

   "샘도 이제 2학년인 거 같아요"

   "그래? 그렇지! 하하"

   이제 나도 2학년이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나 역시도 새 마음으로 새롭게 출발해 보자. 나는 자리를 옮길 때마다 챙기는 게 몇 개 있는데, 제일 먼저 챙기는 것은 '처음처럼'이라는 글이 적힌 다포와 '우리들이 꿈꾸는 행복한 학교'라는 포스터이다. 첫마음을 간직하며 가르친다는 것, 어렵지만 지키면서 가야 할 길이다.

   대강의 얼개나마 수업 준비를 했다. 많이 늦어 버렸다. 내일은 아이들과 토론하는 날이다. '살아 있는 한국사교과서2'를 다 읽어 온 아이들이 어떤 이야기를 쏟아낼 지 몹시 궁금하다. 요즘엔 토론이나 모임을 위해서 읽어야 할 책이 많아서 끌려가는 느낌도 살짝 든다. 그래도 뭐, 어디든 좋아서 하는 일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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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일에 본가에 들러 자동차를 빌렸다. 일요일에 아내와 바람 쐬러 나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아내는 기분이 살짝 좋아진 것 같다. 아내는 어디를 가든 상관이 없다고 한다. 이제 고민은 나의 몫이다.

   사실, 이번 방학에는 제대로 집 밖을 나선 적이 거의 없다. 뭐, 집안 사정도 어려운 점이 있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아무래도 집 안에서 뒹구는 걸 최고의 행복으로 아는 나 때문이다. 이번 방학엔 어디 나서는 게 그렇게 싫어서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니, 몸에 군살도 붙고 생각도 게을러지는 게 역시나 지나고 나니 약간 후회가 되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일요일 아침, 놀러가기로 한 날 아침인데도 늦게 일어나 느긋하게 아침을 먹었다. 그 때까지도 우리는 어디로 갈지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도 무작정 차를 몰고 나섰다. 자동차에 밥을 먹이면서 우리는 지리산 주변을 둘러보기로 결정했다. 생각보다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진주를 거쳐 단성IC를 빠져나온 우리는 산청 남사 예담촌에 들렀다. 남사 예담촌은 제대로 준비하면  멋진 민속마을이 될 수 있을 듯 하나, 현재는 덩그러니 마을만 있는 상태였다. 전통 가옥이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들어가 보기는 어려워서 마을만 한 바퀴 돌아보고 나왔다.

   그리고는 곧장 '단속사지'로 갔다.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다는 뜻의 절이 있었던 터인데, 고즈넉한 시골 마을길 옆에 지금은 절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지만, 천년이 가도 변하지 않고 있는 탑만은 옛모습 그대로 솟아 이곳에 절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내와 오후 햇볕이 따사로와 봄이 성큼 달려와 있는 밭고랑 사이를 걸으며, 꿈결 같이 '이런 곳에서 사는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단속사터를 지나 산등성이를 타고 넘어가는 길을 계속 달려서 찾아간 곳은 산청의 '율곡사'라는 절이었다. 율곡사야 말로 '단속'의 이미지가 어울리는 절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대웅전 하나 만큼은 멋지게 지어졌다는 말과 대웅전의 꽃살문이 아름답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서 내심 기대가 컸으나 아쉽게도 이미 수리를 마친 뒤여서 꽃살문은 볼 수 없었다. 다만, 인적 없는 대웅전에 혼자 앉아 불경을 외는 소리와 목탁소리가 청아하게 들렸다.

   아내와 나는 아쉬움을 달래며 산청에서 합천으로 넘어와 황매산 모산재 아래에 있는 '영암사터'를 들르기로 했다. 사실, 영암사터야 이번 나들이의 하일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삼가면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했으나, 식당이 문을 닫아서 영암사터 아래까지 와서야 '보리밥정식'으로 늦은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슬금슬금 걸어서 절터에 닿았다. 언제 보아도 귀엽고, 토실토실한 쌍사자 석등이 단연 돋보인다. 영암사터에 남아 있는 쌍사자석등과 무지개형 돌계단은 그 옛날 경상도 지역의 문화적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를 유감 없이 보여주는 멋진 유물들이다. 지금 터에 남은 유물을 보면 기암괴석들이 불꽃 같이 솟아있는 모산재를 배경으로 한 영암사가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유추하고도 남는다.

   영암사터에 해가 지기 시작한다. 폐사지의 무상함을 느끼기에 가장 적당한 시간. 영암사터 서쪽에 있는 서금당터에도 들르고 다시 절터를 돌아 내려왔다. 어느새 해는 많이 기울었고,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합천까지 왔기 때문에 고속도로에 진입하는 것이 쉽지 않다. 서진주까지 국도를 달려 고속도로에 들었으나 이내 정체! 이유를 알고 보니 교통사고가 났었다.

   마음이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천천히 달려서 본가로 갔다. 부모님은 외출 중이시라 자동차만 돌려드리고 우리집으로 돌아왔다. 하루 동안의 나들이라 아쉬웠으나, 하루치고는 꽤 쏠쏠한 여행을 했다는 생각이다.

   만족스러운 여행을 하고 나면 그 기운이 꽤 오래 간다. 지금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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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s 2006-03-01 0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속사지, 엄두도 못 낼 이름인데 어쩐지 궁금하네요. 여유로운 나들이였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