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의 방송통신대 도서실에서 공부하는 삼수생을 만나고, 얼른 집으로 들어오니 10시였다. 아내와 잠깐 오늘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 전화가 왔다. OO이. 아까, 연극을 보러 가는 지하철 안에서도 전화를 했었더랬다. 오늘 학교로 찾아갔는데, 소풍 가면 어떡하냐는 말씀! 좀 어이가 없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화요일까지 내 사인과 사진을 찍어가야 한단다. 10시 반쯤에나 집에 갈 수 있다고 그 때쯤 보자고 약속해 두었다.
OO이는 지금 '자유학교'에 다닌다. 녀석이 처음부터 우리 반이었던 건 아니었다. 새학년이 시작되고 열흘 쯤 지났을 때 진주에서 전학을 왔다. 녀석을 따라 온 생활기록부가 장난이 아니었다. 결석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처음부터 인문계 학교에 적응하기 어렵다며 잘 다닐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나도 내심 불안했다. 다행스러운 점은 나와 같은 아파트에 살아서 출근 시간에 가끔 볼 수있다는 거였다.
일주일 정도 다니더니, 녀석이 학교를 안 나오기 시작했다. 매일 전화를 해도 녀석은 전화를 안 받고, 할머니와 어머니가 번갈아 전화를 받으시더니 체념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다면서,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고 하신다. 결석이 일주일을 넘어가자, 안 되겠다 싶어서 일반 학교 부적응 학생들을 위탁받아서 가르치는 자유학교 이야기를 꺼냈다. 어머니께서 직접 방문해 보시고, 결정하시라고 권했다. 그래서 OO이는 3월말부터 자유학교를 다닌다.
자유학교에서 숙제를 내 준 모양이었다. 담임선생님을 만나뵙고 인사를 드리라는 것이었나 본데, 무슨 날 찾아오는 게 그랬는지 오늘 학교로 찾아왔었다. 그러나 내가 소풍을 가고 없었으니 녀석은 허탕을 친 셈이었다.
그래서 아파트 앞 수퍼에서 밤 늦게 만나게 되었다. 약간 어눌한 말투는 여전했지만, 훨씬 건강해 보였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어떻게 사는지 안부도 물었다. 숙제가 뭐냐고 물으니까 공책을 꺼냈다. 거기다 내 사인과 자기에게 건네는 당부의 말을 적어달라는 것이다. 선 채로 사인과 몇 마디를 적었다. 다른 숙제는 없냐니까, 같이 있는 모습을 담아가야 한단다. 약간 당황했으나, 핸드폰 카메라로 둘이 사진을 찍으려는데, 여자랑 아니면 같이 사진을 안 찍는다는 녀석과 혼자 찍히는 싫다는 내가 수퍼 앞에서 꽤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같이 찍었다.
이제 숙제는 모두 끝났다. 우리는 몇 마디 더 나누었고, 녀석이 집으로 가려고 돌아서다가 다시, 돌아보며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생님, 죄송해요. 며칠 있으면 스승의 날인데, 아무 것도 준비 못 했어요. 담에 만나면 델몬트라도 사드릴게요..."
"그래, 담에 꼭 그래라"
이렇게 길고도 긴 나의 하루가 끝났다.
2006년 5월 12일, 하루가 참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