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고질병인 편두통이 시작되려고 한다. 여고시절 국민윤리에서 철학부분은 봐도봐도 이해가 안됐다. 겨우 외웠다가도 시험에선 정답만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통에 매번 틀렸다. 철학자들은 쉽게 말해도 될텐데 왜 이렇게 어려운 말을 해서 날 골탕먹이나...생각했다. 대학때도 마찬가지였다. 신입생때 교양필수로 수강했던 철학은 내게 공인된 낮잠시간이 되버렸다. 에이, 이 넘의 철학. 이제 다시는 보나봐라....절대 안 봐!! 다짐을 했다.
그런데 다짐이란 건 깨어지기 위해 존재하나보다.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만나게 된 그림책엔 저마다 철학이 숨어있다는 걸 새삼 느낀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지혜를 비롯해 예절, 지식, 가치관...들을 알록달록한 이쁜 색깔로 포장해놓고 아이들을 기다린다. 아이가 한 번 두 번...횟수를 거듭해서 책을 읽다보면 그 속에 숨어있던 핵심, 정수, 알맹이에 조금씩 녹아든다. 얼마전에 만난 에릭 바튀의 철학그림책이 바로 그런 책이었다.
에릭 바튀가 누군가. 언뜻 <새똥과 전쟁>이 생각난다. 빨간 나라, 파란 나라가 사소한 이유로 전쟁을 벌인다는 내용의 그림책을 큰아이가 유치원 다닐무렵 부지런히 읽어줬다. 아이에게 친구들끼리 편갈라서 놀면 안돼...하고 몇 마디 하면 쉽게 끝날 일을 이 그림책 한 권으로 대신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가 세계 어린이책 3개상인 볼로냐 국제도서전 올해의 작가상을 비롯해 BIB 비엔날레 대상, 국제 어린이문학회 옥토곤상을 수상한 작가였다니...좋은 작가를 또 한명 알게 됐다.
에릭 바튀의 철학 그림책 <작은 행복>. 그는 이 책에서 말한다.
행복이란 작은 우산을 펴는 것처럼 간단하지.
<작은 행복> 이 그림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작은 우산의 이동을 따라간다. 어느 날 아침 날아가버린 작은 행복은 제발 돌아오라고 소리쳐도 멀리 멀리 달아난다. 작은 행복을 놓쳐버린 ‘나’는 가장 먼저 작은 행복을 걱정한다.
“나 없이 어떡하려고 그러지? 번개에 맞아 불타기라도 하면 어쩌지? 붉은 하늘 저편으로 영영 날아가기라도 하면 어쩌지?”
그래도 돌아오지 않는 작은 행복. ‘나’는 슬며시 심술이 난다.
“비바람에 혼자 떨고 있을 작은 행복을 떠올려 봐. 심술궂은 바람이 작은 행복을 데려갔다고.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하지.”
뾰족해진 마음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마음이 누그러들고 ‘나’는 조금씩 마음을 놓는다.
“작은 행복은 언젠가는 꼭 돌아올 거야. 작은 행복은 꽃잎처럼 장난을 치고, 춤을 추려고 하늘로 날아올랐던 거니까. 작은 행복은 장난꾸러기이거든.”
한 편의 짧은 시 같기도 하고 명상집의 일부를 읽는 느낌도 드는 <작은 행복>. 처음 읽을땐 이 책이 도대체 무슨 얘길하나...싶었다. 며칠에 걸쳐 연거푸 읽고 나서야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 책은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냐. 우리 가까이에 있어. 네 곁을 봐. 작은 행복이 보이지?’란 말을 ‘바람에 날아간 작은 우산’에 빗대어 표현한 게 아닐까. 바람에 날려 놓쳐버린 우산을 잡으려고 달려갔지만 작은 우산이 내 손을 피해 요리조리 피해다니는 걸 우리가 행복을 찾으려고 방황하는 모습으로 나타낸 듯하다.
어린 시절 집 주변에 머물러 있던 아이의 행동반경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자연히 본격적으로 넓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이들의 생각이나 사고는 그렇지 않다. 좀 더 깊게 생각하고 넓게 바라보는 시각을 어릴 때부터 대화와 그림책을 통해 조금씩 연습하고 길러줘야 한다. 오늘 책을 읽고 한 가지 생각을 했다면 내일은 두 가지...이런 식으로 말이다.
사실 이 책은 9살 큰아이에겐 좀 어려운 책이었다. 책에서 말하는 내용을 매번 일일이 상황을 설명해주지 않는한 잘 이해하지 못했다. 최소한 초등고학년 정도가 되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는다. 지금은 어렵게 첫 발을 내딛었지만 내일은 두 걸음을 걸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아이와 함께 나도 조금씩 성장하는 느낌이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질문’이란 소타이틀을 붙인 <생각의 탄생>. 이 책은 모두 30권의 그림책으로 이뤄졌는데 관계/ 자아/ 성장/ 세계관 등 4개의 부분으로 나눠져 있다. 또 <에릭 바튀 철학 그림책 읽기>라는 가이드북이 있어서 한 권의 그림책을 읽고 생각을 어떻게 넓혀나가면 되는지 참고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