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
김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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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문학에 대한 성찰은 우리들의 삶을 객관화하기 위한 욕망일지도 모른다. 도대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알고 싶다면 이 시대의 소설을 읽어보자. 주목할 만한 신인들과 기성 작가들의 소설들이 조화를 이루며 풍요로운 읽을 거리를 제공한다면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다.

  김이설의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은 여덟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로테스크한 표지의 얼굴이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닐까 싶다. 소설이 어떤 사이와 간격에 대한 충실한 보고서라면 김이설의 단편들은 여성과 남성, 개인과 가족, 모성과 부성 사이를 가로지른다. 극단적인 모습은 사람들이 외면한다. 현실이 아름답지 않지만 굳이 들여다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이설은 두 손으로 뺨을 잡고 똑바로 들여다보도록 강요한다. 바로 당신이 살아가는 이 사회의 모습 혹은 타자의 현실이 어떠한지 확인하지 않으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듯이 완고하다.

  좋은 글은 불편하고 좋은 음악은 가슴이 아프다. 그렇다면 김이설의 글은 좋은 글이다. 편안하고 푹신한 소파가 아니라 조금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의자같다. 하지만 안락한 소파에 앉아 잠을 청하기보다 불편한 의자에 앉아 비오는 창밖을 내다보는 게 좋은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소설이다. ‘열세살’의 노숙인 소녀, ‘엄마들’의 대리모를 위시해서 ‘하루’의 위선적인 주인공에 이르기까지 김이설은 언제나 부딪칠 수 있거나 낯선 여자들을 골고루 보여준다. 물론 이 여자들의 공통점은 불편함이다. ‘엄마들’의 부족할 것 없는 여자가 대리모에게 밤늦게 찾아와 술이 취한 채 쏟아놓는 넋두리에 대해 작가는 “상대의 반응을 고려하지 않는 고백은 처연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김이설의 소설은 처연하지 않고 낯설고 아프다.

  버려진 아이는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야 한다. ‘순애보’의 불편한 관계 또한 관계 너머의 관계를 보여준다. 그래서 “보이는 것이 전부다 아니라고, 관계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꿈은 환상일 뿐이라고, 불쌍한 건 오히려 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단념은 빠를수록 좋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지 않은가.”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다. 잠언투의 이야기가 때로는 소설 읽기를 방해하지만 나는 누구의 소설에서도 일반화가 가능한 문장들에 밑줄이 간다. 맥락이 다를 뿐, 어쩌면 우리는 똑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관계를 맺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불안한 싱글 연극배우의 비루한 일상과 꿈 없는 미래를 보여주는 ‘막’은 “세상은 늘 두 가지였다. 있거나 없거나. 그건 예쁜가 안 예쁜가, 정상이냐 비정상이냐로 구분되었고 결국 승자와 패자로 나뉘게 했다.”는 말로 삶의 단면을 보여준다. 어떤 자리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올가미처럼 옭죄는 현실 혹은 답답한 미래에서 시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김이설의 소설은 불편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여자들을 끊임없이 나열한다. 앞으로 그 여자들의 어떤 측면을 보여줄지 혹은 그 여자들의 관계와 남성의 이야기를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 기다려진다. 새로움이 항상 미덕이 될 수는 없으나 그녀만의 새로운 영역은 무엇일지 조금 더 읽어봐야겠다. 나는 기꺼이 그녀의 소설을 읽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에 비해 박솔뫼의 장편소설 『을』은 독특한 감수성과 분위기를 지닌 장편 소설이다. 제1회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 수상작인 이 소설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망을 집합체로 보여준다. 하나의 존재는 또 다른 존재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 제 홀로 서 있는 것조차 불편한 존재들이 있는 법이다.

  을과 민주. “이민주는 방을 떠남으로 더 이상 ‘민주’일 수 없었다.”는 문장은 민주보다 비어있어 채울 수 있는 공간인 방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사람과 관계로 시작한 듯하지만 호텔방에 대한 공간이 먼저 다가온다. 익숙한 소설적 구성과 배치가 아니라 잠시 머물다 떠나는 의미의 호텔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일회적 혹은 단편적 관계를 오히려 전면적, 복합적 관계로 이끌어 낼 수 있는 공간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을은 풀리지 않는 기호와 오래된 신호 같은 것을 사랑했다. 그렇다고 그것으로 어떤 비밀을 밝혀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을은 그것을 따라가는 과정, 풀어내는 과정에 매혹되었을 뿐이다. - P. 21

  밑줄이 남아 있는 문장은 그대로 소설에 대한 인상이 되고 인물에 대한 평가가 된다. 이 소설은 낯설고 신선하다. 그것은 을이 따라가는 과정 때문이 아니라 을이 관계 맺는 방식 때문이 아닐까 싶다. 기호와 오래된 신호 같은 것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따라가는 과정에 매혹되는 것이 독자들이 할 일처럼 여겨진다. 깊은 갈등도 흥미진진한 사건도 없다. 빛바랜 사진처럼 탈색된 이미지와 지루한 웅얼거림이 반복된다. 하지만 나는 그 조용한 웅얼거림에 귀 기울였다. 그래서,

민주의 사려 갚음은 한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향한 공평한 것이었다. 그 말을 달리 하자면 민주의 무관심은 지극히 공평했다. 하지만 민주는 대개 늘 사려 깊었고 주변의 사람들은 민주의 사려 깊음이 무관심으로 바뀌는 과정을 잘 알아채지 못했다. 물론 무관심이 사려 깊음으로 녹아드는 과정도 말이다. 그것이 민주의 예의 바름이었다. - P. 38

와 같은 문장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열정이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도대체 어떤 모습인가. 민주처럼 무관심을 공평하게 나누어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의바름의 위악을 즐기고 있는 건 아닌가 말이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결국 현실 속의 나와 타자 그리고 세계와의 관계를 묻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의 정체성도 너에 대한 사랑도 세상에 욕망도 완성되는 순간 사라진다. 아니 영원히 완성되지 못한 채 부끄러워진다. 그것이 관계에 대한 쾌락이 아닌가. 정여울은 작품해설에서

인간은 관계의 쾌락을 즐길 때 그 쾌락이 둘 사이의 배타적인 것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쾌락은 언제나 흐르는 것이며 절대로 멈추지 않는 것이 쾌락의 본질이기에, 그리하여 고정된 시공간에 가둘 수 없는 것이기에, 그리하여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것임을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 - P. 220

라고 일침을 가한다. 쾌락의 본질은 소유할 수 없다 사실을 부정하려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운 연민이 이 소설을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시간을 조금만 건너뛰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세상을 살았다. 가련한 인간 『소현』은 머나먼 이국땅에서 인간이 아니었다. 조선의 세자로 살아간 그의 한숨과 삶의 결을 따라가는 김인숙의 미려한 문체는 김훈의 그것을 넘어선다. 지나치게 섬세하고 화려해서 지루할 지경이다.

  실존했던 한 인간을 따라가는 일이 소설가에게는 어떤 고통이나 운명이었을까. 자신의 한 순간을 과거의 누군가에게 완전히 몰입하는 것은 즐거운 고통이었을 것이다. 왕이 되지 못한 세자. 그의 한과 눈물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겪어야했던 고뇌와 회한을 보여주는 것이 이 소설의 목적이었다면 독자들에게는 충분히 전달되고도 남음이 있다. 만상과 막금, 흔과 석경이라는 흥미있는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결국 ‘소현’으로 귀결되는 작가의 관심은 굴욕의 역사도 아니고 동방의 작은 나라의 비루함도 아니다. 한 인간에 대한 연민이며 운명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정복자의 세상, 정복자의 세월이었다. 세자가 문득 어금니를 물고 생각했다. 부국하고, 강병하리라. 조선이 그리하리라. 그리되기를 위하여 내가 기다리고 또 기다리리라. 절대로 그 기다림을 멈추지 않으리라. 그리하여 나의 모든 죄가 백성의 이름으로 사하여지리라. 아무것도, 결코 아무것도 잊지 않으리라. - 김인숙, <소현>, 316쪽

  한 군데 밑줄 치고 책장을 덮으니 띠지와 일치한다. 울분에 찬 소현의 독백은 시대를 건너 작가의 상상력으로 부활한다. 독자들도 물론 김인숙의 소설을 ‘결코 아무것도 잊지 않으리라.’


100426-035~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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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의 역사 한홍구의 현대사 특강 2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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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에 우리는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보냈다. 21세기의 시작은 20세기 초반의 흐름만큼이나 격동기를 거치고 있는 느낌이다. 바보 노무현은 대통령 당선만큼이나 극적인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다. 2004년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거쳐 이명박 정권의 등장, 노무현의 자살과 뒤이은 김대중의 죽음으로 우리는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한꺼번에 보냈다. 노무현은 황혼녘의 부엉이가 되어 날아간 것이 아니라 새벽녘에 부엉이 바위에서 자살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쌓아올린 민주주의의 기틀이 무너지는 모습을 우리는 비명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목격하고 있다. 용산참사를 필두로 일련의 사태들은 ‘설마’를 현실로 만들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의 역사는 빠른 속도로 뒷걸음치며 과거를 또 다른 미래로 만들어가는 중이다.

  한홍구의 『대한민국史 1~4』, 『특강』에 이은 『지금 이 순간의 역사』는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에 대한 뼈아픈 성찰이며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필수적인 프리즘이다. 역사는 어차피 역사가의 주관적 해석에 불과한 것일지 모르지만, 객관적 사실의 흐름을 연속선상에서 이해하는 것은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다. 이 책은 ‘지금-여기’에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을 알기 위해 필요한 조감도라고 볼 수 있다.

루쉰이 한 얘기처럼 어디에고 처음부터 길이 나 있는 법은 없다. 그것을 알면서도 다들 새 시대의 첫발을 떼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 한 30여 년 역사를 공부하고 나니 남는 생각은 한 번도 역사에서 길이 복잡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우리의 생각이 복잡했을 뿐이다. - P. 7

  ‘바뀐 것과 바뀌지 않은 것’이라는 머리글에서 한홍구가 술회한 것처럼 역사에서 길이 복잡한 적이 없었다. 다만 우리의 생각만 복잡했을 뿐이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 길을 가면 된다. 길이 없다면 만들면 된다. 완고한 현실에 순응하자고 하면 기득권에 편입하기 위한 소수의 행복과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피비린내 나는 무한 경쟁 속에 모든 사람이 부나방처럼 달려들 수밖에 없다. 행복은 그곳에 있지 않다는 것은『꽃들에게 희망을』 같은 책을 통해 아이들도 알고 있지만 그것이 현실이 되는 일은 왜 어려운 것일까?

  자본과 권력 -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욕망의 블랙홀. 그것이 다수의 행복과 더불어 함께 잘 살 수 있는 길을 가로막고 독점하는 있는 소수를 위해 남용되는 역사의 한 복판에 서 있는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인가. 가장 손 쉬운 방법 중에 하나는 바로 역사를 돌아보는 일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고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는 것만큼 현명한 방법을 찾지 못할 것이다. 과거의 시행착오를 통해 현재의 문제를 개선하는 일이 문명을 이룩한 인간 역사의 역할과 기능이다. 머나먼 선사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불과 몇 십 년 전의 이야기가 반복되는 현실은 얼마나 참혹한가. 그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면 눈 뜬 장님의 시대를 건너갈 수밖에 없다.
 
  현실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은 계급과 계층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문제는 자신의 계급적 이익에 반하는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속한 계층적 문제의식을 공유하지 못한 채 흑백 논리의 이분법적 사고와 극단적 지역주의에 기반한 투표 행위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지 우리는 온몸으로 경험하고 있다. 그것은 보수와 진보의 대결이 아니라 민주와 반민주의 대립이며 역사의 발전과 퇴행의 갈등일 뿐이다. 누구를 위한 혹은 무엇을 위한 정책과 제도인가를 놓고 사람들은 늘 똑 같은 기준을 제시한다. 그런데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은 왜 다른가?

한국이 얼마나 민주화되었느냐고 묻는다면, 노무현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될 만큼 민주화되었다고 얘기할 수 있다. 한국이 얼마나 민주화되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노무현 같은 대통령이 벼랑에서 뛰어내려야 할 만큼 민주화되지 않았다고 얘기해야 한다. - P. 9

  용산참사와 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을 통해 확인된 공인된 국가 권력의 횡포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웠나. 어떤 경찰, 검사, 기자, 정치인이 되라고 가르칠 수 있을까? 우리는 아이들에게 ‘정의롭게’ 살라고 가르치고 있나? 이 책의 저자 한홍구는 울분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외친다.

우리 역사에서 지난 600년 동안 부모들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왔다는 겁니다. 조선시대 내내 권력에 도전하면 모난 돌이 정 맞고, 귀양 가고, 멸문지화를 당했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개고생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다 보니 아무도 젊은이들에게 정의롭게 살라고 가르치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다는 거죠. - P. 269

  1960년 4. 19와 1980년 5. 18에 대해 아는 세대와 모르는 세대가 있다. 1991년을 기점으로 학생운동은 사라졌다. 시민사회가 그 역할을 대신할 정도로 민주주의가 완성된 것으로 우리는 착각한 것일까? 이 책은 5. 18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1987년 6월로 이어진 현대사의 흐름과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전직 대통령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과정은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과정이기 때문에 역사라기 보다 철지난 잡지나 빛바랜 신문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 기분이 너무 우울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대한민국처럼 다이나믹한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겪는 국가는 세계사에서도 찾기 힘들다. 신산스런 역사의 한 복판에서 피를 흘린 사람들은 힘없는 서민들이었고 평범한 이웃들이었다. 이념과 사상을 떠나 사소한 일상과 행복을 누리고 싶은 사람들, 작은 소망과 꿈을 키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현실은 너무 가혹하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세상, 환경이 아무리 어렵고 척박해도 꿈꾸고 노력하면 지500년을 버틴 조선 왕조도 19세기 들어 '세도정치'라는 극단적인 닫힌 체제로 굳어졌을 때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망해버렸습니다. 지렁이도 용이 되는 세상이 진정으로 사람 살 만한 세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P. 269

상식과 이성이 통용되고 합리와 논리가 사회의 원칙이라고 말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역사는 언제쯤 쓸 수 있을까. 끝없는 경쟁을 피할 수 없는 사회가 될수록, 승자 독식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나날이 가혹해질수록,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 될수록 ‘지금 이 순간의 역사’는 암울하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내일은 조금 더 나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위안을 삼고 이렇게 사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제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네 꿈이 무엇이냐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조금만 노력하면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공정한 룰과 게임의 법칙을 통해 자유와 평등, 사랑과 평화, 나눔과 배려를 가르칠 수 있을까? 우리의 역사는 지금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최소한 다음 세대에게 올바른 길은 제시해 주어야 하지 않는가. 옳고 그름과 선악의 가치 판단은 아니더라도 삶의 목표와 방법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은 마련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100418-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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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와 빨강
편혜영 지음 / 창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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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험에 대한 경고는 언제나 실제로 닥쳐오는 위험보다 많지만 막상 위험이 닥칠 때는 어떤 경고도 없는 법이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불길한 예감을 전해준다. 우리가 느끼는 불안과 걱정 중에서 30%는 일어나지 않고 45%는 사소한 것이며 25%는 과거의 것이라는 심리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불안이 기실 쓸데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거나 준비할 수 없는 위험에 대해 끊임없이 걱정하는 것은 인생을 불행하게 사는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막상 위험이 닥칠 때 우리는 거의 무방비 상태가 된다.

  소설은 현실에서 가능한 모든 이야기뿐만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거기에 일어날 수 없는 일들까지 상상하는 것은 물론이다. 작가의 상상력은 한계가 없어야 하며 간접 경험의 즐거움은 예상할 수 없을수록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정해진 순서와 충분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보다 우리는 때때로 황당하고 기괴하지만 딱히 불가능하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들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갖는다. 바로 편혜영의 『재와 빨강』같은 소설 속에서 말이다.

  삶의 아이러니에 대해 생각해 본다. 한 순간도 빈틈없이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한가? 아니면 게으르게 하고 싶은대로 적당히 즐기면서 사는 사람이 행복한가? 물론 이 문제에 대해 어느 쪽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 치열하게 욕망할수록 불행해지고 포기한 듯 절망하는 편이 더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생의 아이러니다. 삶이 부조리하지 않고 정해진 규칙과 룰에 따라 움직이는 순간 모든 예술은 사라진다. 말할 수 없고 해석되지 않는 영역에 대해 보여줄 것이 없다면 소설가는 무엇을 쓸 수 있단 말인가.

  편혜영의 장편 소설 『재와 빨강』은 위험한 상상과 불온한 세계를 보여준다. 그것은 불가능한 상황 설정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미리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경계선 너머의 인생에 대한 불안을 표현하는 것이다. 사건은 단순하다. 제약회사에서 약품을 개발하던 주인공은  C국에 파견된다. 전염병이 창궐하는 C국에 도착하자마자 불행은 시작된다. 이혼한 아내가 칼에 찔려 죽었다는 동창생 유진의 말을 믿을 수 없으나 출국하기 전날 그의 기억은 흐릿하기만 하다. 혼란스런 그는 감금생활을 해야하는 아파트에 낯선 사람들의 방문을 받고 쓰레가 더미로 뛰어 내린다. 부랑자 생활을 거쳐 방역업체에서 쥐를 잡게 된다. C국에 파견된 것도 쥐를 잡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독자들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주인공은 결국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채 소설은 끝이 난다.

  어둠과 파괴 그리고 동물적 상상력의 세계가 재로 표현된 것 같다. 눈부신 빛과 인간의 생명을 상징하는 빨강으로 나타낸 것은 아닐까 싶다. 어쨌든 재와 빨강은 양립할 수 없는 모순된 이미지로 주인공 사내의 아이러니한 삶을 극적으로 대비시켜 보여주는 듯하다. 기괴한 이미지와 칙칙한 분위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헤어날 수 없는 수렁 속에서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살아내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동일시된 자아를 발견한다.

  조금씩 상황만 다를 뿐 이보다 더 지독한 반전과 생의 아이러니를 경험하기는 힘들 것 같다. 전혀 낯선 세계에서 살인자가 되어 쫓기는 주인공은 전염병과 낯선 언어와 사람들 속에서 오로지 치열하게 생존을 위해 버틴다. 멀쩡한 직장과 평범한 일상이 있는 곳에서 전혀 다른 세계로 진입한 주인공은 자신의 선택과 타인들의 보이지 않는 손길 때문에 극적 반전을 경험한다. 우리의 삶도 이러하지 않은가? 최선을 다해 노력했고 치열하게 욕망했으나 그것이 오히려 불행의 시작이 되는 모순. 이것이 아마 모든 인간의 운명은 아닐까?

  편혜영은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고 했는지 모르겠으나 신종플루의 공포가 전세계를 뒤덮던 시기에 인간의 삶은 언제든 극적 반전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것 같다. 독자들의 입장에서 불편하게 읽히지만 새롭고 낯선 세계를 경험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나 그로테스크한 세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소설도 우리에겐 언제든 필요하다. 생경한 방식으로 인간과 삶의 방식을 통찰하고 있는 작가의 다음 소설도 기다려진다. 조금 더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로 우리를 안내 줄 것만 같기 때문이다.

  더 이상 소설을 읽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지만 나는 언제나 소설을 읽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은 사람과 세상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며 작가들의 애정만큼 가열차게 욕망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것이 헛된 욕망이며 오히려 불행을 경고하는 빨간 신호등일지라도 말이다.


100413-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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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주의보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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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주의보  - 최승호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시대를 대표하는 문학을 돌아보면 아득한 느낌이 든다. 1980년대 폭압적 정치현실과 사회적 혼란을 드러내는 작품들이 많다. 최승호의 「대설주의보」는 한 발짝 떨어진 자리에서 우회적으로 ‘백색 계엄령’을 선포했다. 곽재구의 ‘은행나무’, 이성부의 ‘벼’ 같은 시와 함께 최승호의 ‘대설주의보’는 한 시대를 상징하는 시가 되었다.

  윤대녕의 신작 소설집 『대설주의보』의 제목은 곧바로 최승호를 연상시켰다. 윤대녕은 작가의 말에서 최승호에게 제목을 허락받았다는 내용을 적고 있어 연상작용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시와 소설의 내용은 무관하다. 곽재구의 ‘사평역에서’를 읽고 임철우가 ‘사평역’이라는 소설을 쓴 것과는 거리가 좀 있다. 제목이 같다고 해서 상징적 의미가 동일하지는 않다. 다만 대설주의보라는 말이 주는 눈의 중량감, 백색의 공포와 혼란 등의 이미지는 윤대녕의 소설에서도 그대로 차용된다.

  일곱 편의 단편이 묶인 이번 소설집은 『제비꽃』 이후 그를 기다린 많은 독자들에게 단비처럼 충분하게 갈증을 풀어준다. 책장을 덮는 순간 다음 책을 기다리게 하는 작가를 가졌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윤대녕의 소설은 늘상 변함없는 것처럼 읽히지만 조금씩 변하고 있다. 『은어낚시통신』으로 80년대 소설의 문을 닫았던 그는 이제 아이러니하게도 80년대를 대표하는 시와 동일한 제목인 『대설주의보』로 2010년대의 문을 열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평론가의 말대로 ‘존재의 시원’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일에 지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작업을 줄기차게 해 나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평단과 독자들에게 호평을 받으며 꾸준히 자기 세계를 구축해가는 행복한(?) 작가 윤대녕의 앞으로도 계속 기다릴 필요가 있다. 

  『제비꽃』이 출간됐을 때 예스 24 독자와의 대담에서 그를 만났던 기억이 새롭다. 이대 후문 북카페에서 어느 독자가 ‘소설이 되지 않는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는 이야기를 했다. 내가 쓴 리뷰였음을 작가는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두 시간 이상 이어진 대담으로 가까이서 본 그의 모습은 소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작가의 소설 속 주인공들을 만나고 있다는 생각은 나만의 착각이겠지만 즐거운 추억이다.

  이 책에 수록된 일곱 편의 소설들은 단편이면서 장편으로 읽힌다. 유사한 인물들 혹은 비슷한 사건들이 중첩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 상황, 마음의 갈피들이 끊어진 듯 보이지 않게 이어져 있는 것 같다. ‘보리’는 ‘정희’를 연상시키고, ‘수연’이는 ‘은주’를 떠올리게 한다. ‘해란’이가 ‘연미’고, ‘혜경’이 울산 화장품점 아가씨로 보인다. 이렇게 주인공들이 선명하면서도 중첩되는 것은 이 소설집이 단순한 단편 모음이 아니라 유기적인 구조물로 보이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보통 한 작가의 소설집을 읽다보면 파편화된 단편들이 뒤섞여 인상적인 한 두 편을 제외하고는 기억조차 희미해진다. 그런데 『대설주의보』는 한 편 한 편이 선명하게 각인된다. 그렇게 윤대녕의 문체와 감각이 오롯이 전달되는 것은 개인적인 취향 뿐만 아니라 그의 소설이 가진 진정성의 힘은 아닐까? 결국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일상에 대한 환멸 속에서 길어 올리는 필연적 구멍 같은 것은 아닐까? 현실에서 모든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어 버리는 힘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간극 때문인지도 모른다. 메울 수 없는 그곳에 대한 미련과 그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려는 간절함이 팽팽한 긴장을 만들고 그 긴장의 끈을 조율하는 솜씨는 윤대녕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다.

늘 그리워하지는 않아도 언젠가 서로를 다시 찾게 되고 그때마다 헤어지는 것조차 무의미한 관계가 있다. - ‘대설주의보’, 101쪽

  표지를 벗겨내고 소설을 읽다가 처음 밑줄 그은 문장이다. 나중에 표지 카피로 썼음을 확인하고 편집자를 떠올려 보았다. 윤대녕이 말하는 그 관계는 말해지는 순간 그것이 아닌 관계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가 맺는 수많은 관계 속에 그 말의 진실이 숨어 있다. 확언할 수 없는 미래, 불투명한 현재, 아득한 과거 속에서 서로 상처 받는 인간 군상의 모습들을 객관적 거리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내면의 문제로 몰아가는 작가의 태도는 오히려 절실함에서 독자들을 압도한다. 비현실적 인물들을 보는 거리감이 아니라 나사가 하나씩 빠져버린 사람들의 무감함이 오히려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상처는 대개 스스로 받는다는 사실을.

“뭐 꼭 또래를 사귀라는 법은 없지. 하지만 모쪼록 상처에 대비하거라. 상처라는건 대개 스스로 받는거니까.” - ‘대설주의보’, 136쪽

  가끔 윤대녕의 소설을 읽다가 현실 속의 나를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아니 내 주변 사람들을, 그들과의 관계를 돌아본다. 그래서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문장에 혹은 관계의 잔인함에 머리 숙여 사죄드린다. 서로를, 자신을 속이며 살아가는 우리를 위하여!

도대체 우리는 무슨 일을 하며 나이를 먹어가고 또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일까. 사는 게 모두 어리석고 잔인한 속임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 윤대녕, ‘도비도에서 생긴 일’, 234쪽

  거대한 서사도, 기막힌 사건도, 처음 듣는 이야기도, 특별한 인물도, 가고 싶은 배경도, 자극적인 표현도, 없다, 윤대녕의 소설에는. 하지만 여전히 그의 소설이 매력적인 이유는 평론가 신형철의 말대로 “시를 엿보는 소설도 있지만 시를 통과한 소설도 있다는 것을, 남자와 여자는 완전히 만날 수도 완전히 헤어질 수도 없다는 것을 나는 그의 소설에서 배웠다.”

세상 모든 이들이 저기 언덕 너머에 숨어 있는 달리아 밭처럼 뜨거운 마음으로 생을 살아가기를 바라며, 삼가 두 손 모음. - 윤대녕, ‘여름, 여행’, 276쪽

오늘도 삼가 두 손을 모으고 하루의 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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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 사랑, 결혼, 가족, 아이들의 새로운 미래를 향한 근원적 성찰
울리히 벡.벡-게른스하임 지음, 강수영 외 옮김 / 새물결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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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건 아니면 눈이건 또는 대양이건
한때 활짝 피었던 모든 것은 이제는 져버리고
오직 두 가지만 남았다네. 공허
그리고 상처입은 자아만이.

사랑의 열정은 처음부터 서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게 하거나 그 사람에 대해 진정으로 공감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것은 차라리 우리 자신 속으로 가장 깊숙이 파고들어가는 것이며, 천 번, 만 번 접힌 외로움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 자신의 외로움으로 하여금 만물을 포용하는 세계로 뻗어나가 나래를 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치 천 개의 빛나는 거울에 둘러싸인 듯이


  한 때, 사랑이 생의 전부이던 시절 - 그 미망에 사로잡혀 온통 전 존재를 불태울 수 있다고 믿었던 순간이 누구에게나 존재하리라.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인가?

  산업화와 근대화의 자본주의 사회가 ‘위험사회’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한 저명한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아내 엘리자베트 벡-게른샤임과 함께 ‘사랑’에 대한 주목할 만한 저서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을 남겼다. 이 책은 사랑과 결혼 그리고 가족과 아이들의 새로운 미래를 성찰하고 있다.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과 사랑의 근본적 구조에 대해 조망함으로써 인간 사회의 과거와 현재를 물론 미래를 통찰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 우리는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사랑’에서 시작된다.

  인생은 어느 시인의 시처럼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다. ‘사랑’의 의미와 역할은 개인에 따르지만 이것 또한 사회화 과정에서 빚어진 남녀 간의 차이와 전통적 가족관계와 분리될 수 없다. 사랑은 결혼으로 열매 맺는다는 고정관념은 많은 사람을 불행에 이르게 한다. 가족과 아이들의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과연 ‘사랑’의 진정성을 확인하고 있는가.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과 그의 아내는 다양한 측면에서 사랑을 이야기한다. 이성 간의 사랑도 역사적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고 사회적 관점에 따라 다르게 반응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우리에게 사랑은 무엇일까?

  현대사회에서 사랑은 자본의 결합에 다름 아니다. 아니, 결혼에 대해 조금만 냉정하게 살펴보자. 소설가 정이현은 『낭만적 사랑과 사회』, 『달콤한 나의 도시』 등을 통해 이미 사랑과 결혼에 대한 속물적 욕망에 대해 냉소를 날린 바 있다. 어느 사회든 경제적 기반과 결혼의 상관 관계를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순수한 ‘사랑’에 대한 열망에서 한 순간도 자유롭지 못한 것이 인간이다.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 그 낯선 열정과 들림[憑]의 상태는 정상에서 벗어난 열기에서 비롯된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을까?

사람들이 사랑에 더 많은 희망을 걸면 갈수록 사랑은 그만큼 더 빨리, 모든 사회적 결속을 잃어버린 채 허공 속으로 사라져 간다. - P. 23

딜레마의 양측면, 즉 자기자신이 되는 것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 이 둘이 모두 뚜렷이 나타나고 제각기 주목해 달라고 아우성쳐대는 곳이 바로 이 오래된 결혼이기 때문이다. - P. 135


  저자들은 이 책에서 개인화가 초래한 삶과 사랑의 여러 가지 방식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예속적이고 관계 지향적이던 결혼제도가 개인화되는 과정에서 어떤 의미와 역할을 가지게 되는지 살펴보면 사회의 진화 과정이 한 눈에 들어온다. 결국 근대화는 자아의 발견과 결혼제도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는 지난한 과정과 다름없다. 사랑이냐 자유나 그것이 문제로다. 함께 사는 과정에 벌어지는 문제들은 고스란히 사회 문제와 연결된다. 교육과 취업, 가사노동이 산업혁명과 맞물려 남녀의 성별 투쟁으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개인화, 파편화 된 것 같은 현대사회에서 사랑은 더 중요해진다. 끈끈하고 1차적인 관계가 사회의 기본 구조와 바탕이었던 전근대 사회보다 역설적으로 사랑의 중요성이 커진 이유는 전통적 결속보다 개인적 안정성이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자유로운 사랑과 이혼 과정에서 자유는 증대됐지만 안전은 감소했다. 시대가 변해도 절대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능은 자식 사랑이다. 아이에게 모든 사랑을 쏟는다는 것은 아이를 자신의 아바타로 생각하는 부모들이 늘어간다는 뜻이다. 타자로서, 독립된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자신의 종속변수가 된다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저자들은 이 책의 말미에서 사랑을 신흥종교에 비유하고 있다. 우리의 세속적 종교인 사랑이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고 현실의 도피처가 될 수 없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사랑은 수많은 역설을 내포한 감정의 물결이다. 아무리 사회적 의미를 고찰한다고 해도 해결되지 않는, 해석할 수 없는 불가해한 영역이 사랑은 아닐까?

사랑을 위한 결혼은 겨우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나서야 존재하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산업혁명의 발명품이었다. 그러나 사회 현실과는 정반대로 사랑을 위한 결혼은 가장 바람직한 목표로 간주되고 있다. - P. 296

  2010년의 사랑이 산업혁명의 발명품이든 신자유주의의 고통이든 사회 현실의 우울한 자화상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안에서 꿈을 꾸고 의미를 찾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소박한 생각들은 변함없이 계속된다.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조차 사회 변화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랑은 자본주의 안에 있는 공산주의이다’라는 말을 믿고 싶다.

사랑은 자본주의 안에 있는 공산주의이다. 노랭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주며, 이는 그를 한없이 기쁘게 한다. - P. 303


100405-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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