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8 제너시스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7
버나드 베켓 지음, 김현우 옮김 / 내인생의책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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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문제를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담아낼 수 있느냐에 따라 소설은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의 범위를 넘어선다. 때로는 『소피의 세계』처럼 철학이 소설의 옷을 입고 나타나기도 하고 서사 구조를 빌어 다양한 형식의 학문 영역이 융합되기도 한다. 그만큼 다양한 스펙트럼이 펼쳐진다는 것은 소설의 재미가 갖는 매력 때문이다. 어찌됐든 소설은 여전히 사람과 삶에 대한 가장 깊은 고민과 통찰을 제공한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그 사회와 역사가 보여주는 다양한 이야기를 변주하며 현실과 미래를 조망하기도 하고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기도 한다. 따라서 모든 소설은 인간의 삶이며 역사이고 미래이다.

  미래 사회를 다룬 고전으로 올더스 헉슬리의『멋진 신세계』, 조지 오웰의『1984』 등을 들 수 있다. 쥘 베른의『지구속 여행』은 SF 소설의 고전으로 손꼽을 만하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현실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제시하는 데 소설만큼 효과적인 방법도 없다. 얼마든지 상상하고 창조하고 파괴할 수 있는 세계가 바로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가의 창조력 상상력은 『해저 2만리』처럼 미래를 예견하고 과학의 발달을 선도하며 인간의 삶을 짐작할 수 있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이 멀지 않아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이성적 존재인 인간의 지식과 과학기술은 끝없는 문명의 진보를 초래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변함이 없다.

  네덜란드의 작가 버나드 베켓의 소설 『2058 제네시스』는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에 대한 철학적 질문들을 쏟아낸다. <공각기동대>가 보여주는 인간과 인공지능 로봇의 미래사회 때문에 두려움은 물론 혼란스런 의문들을 가진 적이 있다. 충격적이기까지 했던 기억이 수많은 영화를 통해 확대, 재생산되고 있지만 근본적인 질문에는 답이 없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과 기계의 차이가 단순히 뼈와 살과 피로 구분할 수 있는가. 과학적 경계를 넘어 존재론적 의문들에 대해 쉽게 답을 할 수 없는 문제이다. 이 소설은 독특한 형식과 깊이 있는 내용으로 이런 문제들에 대한 독자들의 깊은 고민을 요구하고 있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를 미래 사회에 실현했다는 발상이 재미있는 소설이다. <허생전>의 ‘빈섬’이나 <홍길동전>의 ‘율도국’과 유사한 유토피아가 건설된 미래 사회는 행복할까? 세상과 단절된 후 신분과 계급에 맞게 완벽한 시스템 속에 갇힌 사람들의 삶은 온전하게 유지될 수 있을까? 작가는 가상의 유토피아를 만드는 일에는 서툴다. 서양의 고전철학에서 그 이상을 가져와 플라톤의 이데아를 실현하는 듯하지만 시스템을 감독하고 통제하고 지배하는 자들의 세계는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음모와 함정을 숨기고 있다. 결국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은 완전할 수 없고 어둠과 그림자가 있게 마련이다. 완벽한 세상은 어디에도 없다. 그곳은 어쩌면 영원히 인간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곳인지도 모른다. 복잡하고 완벽해 보이는 시스템에도 균열이 일어나며 그 작은 틈은 나비효과를 가져온다.

역사는 우리에게 음모이론의 무용성을 보여줍니다. 복잡한 것은 실수를 낳게 되고, 그런 실수 속에 편견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 P. 49

  이 소설은 철저하게 대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험관과 아낙시맨더의 대화는 단순한 외화에 불과하다. 학술원에 들어가려는 아낙시맨더의 준비와 사유의 틀은 결국 전체 시스템의 균열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소설은 끝난다. 극적인 반전과 서스펜스를 즐기기 위한 소설이 아니다. 결론을 말한다고 해서 재미가 반감되는 것도 아니다. 이 소설은 시스템에 도전하는 아담과 인공지능 로봇 아트가 주인공이다. 둘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야말로 이 소설의 팽팽한 긴장의 끈이다. 인간과 로봇의 차이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아담의 입을 통해 작가는 인간이 이룩한 이성과 합리적 제도 그리고 조직과 시스템을 움직이는 거대한 권력과 음모에 대해 이야기한다. 과연 무엇을 위해 어디까지 개인을 희생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전체주의에 대한 반성에 앞서 개인의 삶과 행복의 의미를 묻고 있는 듯하다. 철학적, 형이상학적 주제에 대한 성찰과 논쟁으로 이 소설을 읽을 수도 있겠지만 단순하게 행복이란 무엇인지, 인간의 삶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부호로 읽어도 좋다. 물론 정답은 없다.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른 생각을 가지고 생의 목적과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공통분모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도 같다.

역시 시간이 흐르면, 행동은 습관이 되고, 습관이 이성을 조금씩 몰아내, 결국 이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죠. 아담은 자기 머리를 믿지만, 결국 마음을 따릅니다. - P. 113

  머리가 아니라 가슴을 따라가는 존재가 인간이 아닐까? 작가는 이성보다 감성을, 논리보다 직관을 인간의 본능적 도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모두가 공감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창밖에 연녹색 이파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작가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며 인간에게는 인간의 길이 있는 법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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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법을 만나다 - 예술의 자유와 법의 구속을 말한다
박홍규 지음 / 이다미디어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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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법과 예술은 삶의 갈등이라는 동일 현상을 함께 다루고, 위대한 예술 작품은 법이 지향해야 할 인권의 신장을 지향한다. 그런 예술이 우리에게 없는 것은 예술가들의 사고와 경험 및 시야가 좁기 때문이고, 사회 전반의 지적 수준과 폭, 법치가 후진성을 띠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인권의식이 낮은 탓이다. - P. 44

  우리 사회에서 예술가는 정치가나 법률가의 역할과 활동범위보다 좁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예술가들에 대한 비난과 냉소를 넘어 모욕에 가깝다. 자유롭게 사유하고 활동할 수 없는 사회적 상황과 역사적 맥락을 탓하기 이전에 기존 질서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몸짓이 부족했다는 점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누구나 할 수 생각과 아무나 할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것은 예술이 아니다.

  적어도 예술은 네모난 틀에서 벗어나 규범과 기존 질서에 의문을 던지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미적 성취를 이뤄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인간이 본능적으로 미의식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지만 순수한 미적 감동은 오로지 자연과의 조화로움에서 기인한다. 순응적 질서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이끌어 내는 안일한 역할은 조금만 노력하면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닐까. 기술이 아닌 예술은 모방이 아닌 창조여야 하며 새로운 질서와 낯선 아름다움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는 완고한 질서와 규범이 자리 잡고 있으며 예외적인 일탈 행동과 틀에서 벗어난 생각을 좀체로 용납하지 않는다. 마치 학교교육처럼. 하지만 예술가는 바로 이런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무질서한 세계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따라서 법과 예술은 상충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이다. 박홍규의 『예술, 법을 만나다』는 화해할 수 없는 둘의 관계를 조망하는 책이다.

  『예술, 정치를 만나다』에서 예술가도 사회를 떠나 살 수 없는 정치적 인간임을 확인한 저자가 이번에는 전공인 법과 예술의 관계를 파헤친다. 평소 폭넓은 인문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하나의 주제를 꼼꼼하게 짚어나가는 저자 특유의 솜씨를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예술과 법의 충돌을 이야기한다. 자유분방해야 하는 예술과 빈틈과 오차를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법은 한 이불을 덮을 수 없다. 법과 예술의 행복한 만남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의 목적은 예술과 법의 조화로움을 추구한다. 두 세계는 불행하게 만났고 지금도 여전히 서로의 영역에 대한 이해 부족과 자신의 영역에 대한 고집으로 불편한 관계일 수밖에 없다. 이 불편한 공존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저자가 가진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인문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이 책을 단순히 예술과 법의 충돌과 화해에 그치지 않고 즐거운 예술사, 폭넚은 인문학의 성찬으로 만들고 있다.

  프롤로그에서 정의의 여신상과 법의 정의를 일갈하고 1, 2장에서 법과 예술의 행복한 그리고 불행한 만남을 역설한다. 이후에는 영화 속에 나타난 법의 모습을 살펴본다. 인권과 영화, 재판 영화는 물론 현실에서 법으로 금지된 영화에 이르기까지 현실의 법과 영화 속의 법을 함께 돌아본다. 그리고 호메로스에서 괴테, 19세기, 20세기 문학과 법을 살펴본다. 음과 법, 미술과 법은 물론이다. 이렇게 크게 영화, 문학, 음악, 미술과 법의 관계를 고찰하는 동안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예술이 인간을 떠나 존재하기 힘들 듯이 인간과 가장 멀고도 가까운 법 또한 예술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결국 인간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사는 존재이고 예술은 그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법은 예술의 영원한 주제이면서 인간의 존재 양상을 살피는 도구가 된다. 현실적으로 억압의 도구가 되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며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부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인간과 법의 관계를 살피고 억압과 구속의 고리를 끊고 어두운 이면을 드러낼 수 있는 것 또한 예술의 중요한 역할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한없이 자유로운 사회를 꿈꾼 예술가가 없듯이 법과 질서를 통해서만 행복한 사회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조화와 균형은 기준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재단한다. 그것이 예술이든 법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예술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유희 본능에서 출발한다. 일차원적인 욕망을 통제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법은 그 무분별하고 이기적인 욕망을 제한한다. 그래서 어쩌면 서로 다른 얼굴을 한 두 세계가 공존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두 세계는 끊임없이 서로를 욕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유와 구속의 화려한 이중주, 위험한 줄타기가 바로 예술과 법이 만날 수 있는 자리가 아닐까 싶다.

법학이란 기본적으로 어떤 다툼에 어떤 법을 적용하는 기술에 불과하다. 말자면 컴퓨터의 키보드 같은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 기술을 사용하기 전에 가져야 될 가치 판단의 능력이다. 그런데 그 판단 능력은 법학이라는 기술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법이 다루는 여러 현상에 대한 공부로부터 얻어질 수 있다, - P. 168

그래서 저자는 법을 이렇게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단한 권력을 가진 법률가들에게 던지는 통렬한 자기 반성의 촉구가 아닐 수 없다. 기술자가 아니라 인간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존엄을 가지려면 법학 지식이 아니라 그 법이 다루는 인간과 현상에 대한 깊은 고뇌와 폭넓은 지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대한민국의 만연한 법치(?)의 정신을 진정한 법의 역할과 권리로 착각할 지도 모른다.

 “모든 규칙, 모든 규범은 죽음을 낳는다.”(앙소르) - P. 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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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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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 [食口] 한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

가족 [家族]
1 부부와 같이 혼인으로 맺어지거나, 부모·자식과 같이 혈연으로 이루어지는 집단. 또는 그 구성원. ≒처노(妻孥) .
2 <법률> 동일한 호적 내에 있는 친족.

  가족이 친족으로 이루어진 폐쇄적 집단이라면 식구는 끼니를 함께하는 열린 개념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는 말은 생면부지라도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확인되는 순간 모든 관계의 룰을 넘어서는 것이 한국적 전통의 가족이다. 살을 부대끼며 한 지붕 아래서 함께 살아가는 가족이 곧 식구이고, 식구가 곧 가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식구가 곧 가족인지도 모르겠다.

  사회학적으로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일부다처에서 일부일처로 변화한 것은 권력의 문제로 볼 수 있다. 아직도 지구상에는 모계사회나 일처다부제가 존재하기도 하지만 문명국가의 가족제도는 대체로 일부일처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박현욱은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현대사회의 일부일처제에 대해 재치 있게 의문을 던졌다. 앞으로 가족의 개념이 어떤 형태로 달라지고 그 의미가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21세기가 되어도 한국적 개념의 가족은 견고한 형태로 유지되고 있다. 아니 어쩌면 불안한 사회일수록 경쟁적 관계의 사회질서가 강화될수록 가족의 유대는 더욱 공고해질지도 모른다.

  독일의 사회학자 퇴니스가 분류했듯이 가족은 자발적이고 의도적인 목적이 개입된 집단이 아닌 공동사회에 해당한다. 이해관계를 떠나 오로지 혈연관계로 이어져 분리될 수 없는 관계로 치부되는 것이 한국적 개념의 가족이다. 따라서 입양, 재혼, 혼외정사 등에 의해 새롭게 결합된 가족의 경우 한국인의 정서로는 온전한 가족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천명관은 이런 예민한 문제로부터 『고령화 가족』을 온전한 가족으로 만들어냈다.

  사십대 후반의 화자인 나는 관객을 배신했다는 평가를 받은, 철저하게 망해버린 영화를 만든 실패한 영화감독이다. 스튜어디스 출신 아내와 이혼하고 신용불량자가 되어 칠순이 넘은 어머니에게 돌아가지만 오십대 초반의 전과자 백수 형이 먼저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면서 남긴 보상금으로 마련한 연립주택에 이혼하고 중학교에 다니는 딸을 데리고 돌아온 여동생이 결합하면서 다섯 식구가 완성된다. 뒤늦게 다시 모인 형제들은 서로의 상처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전처 자식인 형과 어머니의 불륜으로 얻은 여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과정이 이 소설의 중심축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소설은 제각각 말할 수 없는 상처와 신산스런 고통을 맛본 가족들이 다시 모이고 흩어지는 과정을 통해 가족의 의미를 묻기 전에 ‘밥벌이의 지겨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족이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지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려 한 것은 그저 통속적이고 특별할 것 없는 우리들의 삶의 단면이 아닐까.

하지만 인생은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법이다. 지루한 일상과 수많은 시행착오, 어리석은 욕망과 부주의한 선택……인생은 단지 구십 분의 플롯을 멋지게 꾸미는 일이 아니라 곳곳에 널려 있는 함정을 피해 평생 동안 도망다녀야 하는 일이리라.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해피엔딩을 꿈꾸면서 말이다. - P. 45
 
  죽는 순간까지 우리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기대하는 것처럼 우리 삶의 해피엔딩을 꿈꾼다. 그것을 희망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생은 영화와 다르다. 작가는 그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지루한 일상, 수많은 시행착오, 어리석은 욕망과 부주의한 선택을 이 소설의 곳곳에 배치한다.

  찌질한 인간의 향연이라고 할 만한 인생 막장 드라마와 같은 소설을 읽는 내내 공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가족이라는 이름의 중심에 선 어머니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어머니의 존재는 이 소설에서 ‘밥’으로 대변된다. 먹이는 일에 목숨을 거는 듯한 모습에서 우리는 평범한 어머니를 읽게된다. 가족으로 묶일 수도 없는 3남매의 연결고리가 되어 한 가족을 이끌고 살아온 어머니를 통해 형제들은 각기 또다시 세상 속으로 나아간다. 마치 생의 출발과 종착역 같은 어머니의 모습은 이 소설에서도 여전히 따뜻함의 원천이 된다.

  더불어 『고래』에서 보여주었던 거침없는 상상력과 영화 스토리 같은 사건 전개 걸쭉한 입담과 구라 솜씨는 소설의 흡입력으로 작용한다.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다는 인생에 대해 우리는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볼 기회를 갖게 된다. 삶의 의미와 가족에 대해.

나는 언제나 목표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다 과정이고 임시라고 여겼고 나의 진짜 삶은 언제나 미래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결과 나에게 남은 것은 부서진 희망의 흔적뿐이었다. - P. 286쪽

  생의 마지막 순간에 얻지도 못하고 말 깨달음은 아닐까. 항상 미래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이 모든 순간과 과정이 바로 우리들의 인생이라는 사실을 언제쯤 인정하게 될지 모르겠다. 부서진 희망의 흔적뿐인 삶이 아니라 즐겁고 행복하게 순간을 즐길 수 있는 인생을 위해 다시 한 번 주변을 돌아볼 일이다. 가족을 넘어 우리 모두의 행복한 삶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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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레인보우의 관심사는 저출산, 고령화, 인플레이션, 은퇴, 연금. 모두 연관되어 있습니다.
    from 낚시질은 이제 그만!!! 레인보우의 보험 뽀개기 2010-05-20 13:50 
    레인보우의 관심사는 저출산과 그리고 고령화입니다. 저출산의 문제와 고령화의 문제는 어떤것이 먼저라고 할 것없이 밀접한 연관성이 있고 해결방안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포스팅을 저출산과 고령화로 설정하고 왜 저출산과 고령화가 레인보우의 관심사인지는 부족한 글솜씨로 소개를 해드리겠습니다.유 저출산/고령화 문제는 저 개인적인 문제를 떠나서 사회적으로 어떤 문제를 야기할까요? 먼저 저출산으로 인한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인구재앙은 이미 소리없이..
 
 
 

하지만 인생은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법이다. 지루한 일상과 수많은 시행착오, 어리석은 욕망과 부주의한 선택……인생은 단지 구십 분의 플롯을 멋지게 꾸미는 일이 아니라 곳곳에 널려 있는 함정을 피해 평생 동안 도망다녀야 하는 일이리라.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해피엔딩을 꿈꾸면서 말이다. - 천명관, <고령화가족>, 45쪽

'행복한 가정은 모두 똑같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불행하다'고 말한 사람이 톨스토이였던가. - 천명관, <고령화가족>, 128쪽

유년의 기억 중에서 어떤 것은 당시엔 너무 어려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단지 기억 속에만 묻어두었다가 오랜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연후에야 비로소 그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다. - 천명관, <고령화가족>, 136쪽

자존심이 없는 사람은 위험하다. 자존심이 없으면 자신의 이익에 따라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위험한 건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사람이다. 그것은 그가 마음속에 비수같은 분노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자존심을 건드리면 안 되는 법이다. - 천명관, <고령화가족>, 222쪽

헌신적으로 나를 보살피는 캐서린을 지켜보며 나는 한 인간의 삶은 오로지 이타적인 행동 속에서만 완성되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돌보고 자신을 희생하며 상대를 위해 무언가를 내어주는 삶......거기에 비추어보면 나의 삶은 얼마나 이기적이고 불완전한 삶이었던지. - 천명관, <고령화가족>, 263쪽

그들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했다. 짐은 새로운 법은 아름답지만 옛날 법을 따르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인생을 희롱했다가 실패했다. - 프랑수아 트뤼포, <쥘과 짐>

나는 언제나 목표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다 과정이고 임시라고 여겼고 나의 진짜 삶은 언제나 미래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결과 나에게 남은 것은 부서진 희망의 흔적뿐이었다. - 천명관, <고령화가족>, 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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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 - B급 좌파 김규항이 말하는 진보와 영성
김규항.지승호 지음 / 알마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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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낡은 이념의 좌표는 더 이상 우리에게 필요 없다.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람답게 살자는데, 모두 함께 행복하자는 데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 그러나 우리들의 상식은 서로 조금씩 다르고 행복의 기준도 다르다. 그래서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고 나와 가족만을 생각하며 살아남기 위한 경쟁에 목숨을 건다. 일견 당연한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삶의 기준과 목표에 따라 우리들의 이야기는 조금 달라질 수 있다.

  사람들은 들을 이야기가 아니라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는다. 김규항의 글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꿈같은 이야기에 위안을 얻을까 아니면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자의 이야기로 들을까. 내가 김규항의 글을 읽는 것은 운동화 끈을 다시 묶듯 풀어진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이다. 혼자 걷다 보면 때로는 힘들고 지칠 때가 많다. 더불어함께 걷는 것 같지만 주위를 돌아보면 홀로 사막을 걷는 느낌일 때가 있다. 일면식도 없는 김규항의 말을 듣다보면 어느새 위안을 받게 된다. 정색을 하고 자신의 길을 힘차게 걷고 있는 것 같은 그의 신념이 때때로 부럽고 변함없는 그의 목소리가 가끔 그립다. 그래서 『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를 읽는다.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와 인터뷰이 김규항을 보고 자연스럽게 읽게 된 책이다. 스스로 B급 좌파로 칭하는 김규항이 말하는 이 시대의 진보와 영성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보면 우리들의 현실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된다. 말하자면 나는 김규항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그대로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부끄러움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지극히 평범한 생각에서 출발한다. 그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에 과정도 다르고 결과에 대한 평가와 만족도 다르다. 부끄러움의 기준도 다르고 욕망하는 것도 다르다. 세상에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지만 사람들의 욕망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이 사회에서 자신의 행복과 타인의 삶을 함께 생각하는 욕망이 아니기 때문이다. 끝이 없는 물질적 욕망, 타인과의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의 견고한 질서에도 균열이 시작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대로 얼마나 우리가 더 버틸 수 있을까.

  인간의 소유욕에 대해 김규항은 권정생 선생님의 말씀을 비려와 “권선생께서 ‘32평짜리 아파트를 마련하는 숙제 때문에 사람들이 바보가 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그분은 어떤 사상이나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금욕 생활을 한 게 아닙니다. 욕망이 달랐던 거죠. 다른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평범한 사람들 안에도 그런 편린들이 있어요. 세상이 강요하는 욕망을 열심히 좇다가도 순간순간 허무감에 빠지는 건 실은 그런 편린들 때문입니다. 물론 대개는 더욱 욕망을 좇아서 허무를 극복하려 들지만요.”라고 말한다. 우리가 바라는 것, 원하는 삶은 네모난 틀에 담기듯 비슷하다. 그러나 현실은 비참하다. 열여덟 살 아이들의 꿈이 공무원이라니! 날마다 두근거리고 재미있는 일을 꿈꾸며 내일을 향해 달려야 할 아이들의 꿈은 어른들의 꿈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길들여진 아이들과 길들이고 있는 어른들에게 삶은 치열한 경쟁이며 살아남기 위한 전쟁이고 소박한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멈춰버리는 난쟁이의 꿈이다.

  우리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페미니즘, 2008년의 ‘촛불’과 2009년의 ‘추모’ 등 김규항은 우리들 삶의 갈피들을 읽어내며 구체적인 부분에서 거시적인 담론까지 종횡무진 솔직하고 거침없는 이야기를 쏟아낸다. 인터뷰어 지승호의 인터뷰이에 대한 꼼꼼하고 성실한 준비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이야기들이다. 인터뷰이의 글을 통해 작은 생각 하나, 생각의 단초 하나 놓치지 않고 깊고 넓게 들여다본다. 지승호의 질문을 따라가다보면 자연스럽게 김규항의 시작과 현재를 알게 되고 생각의 흐름을 들여다보게 된다.

  예민한 문제인 ‘예수’에 대한 이야기 또한 흥미롭다. 『예수전』을 통해 이미 기독교와 예수의 본질에 대해 깊이 천착했던 김규항의 영성은 미국까지 날아가 헌금을 강요하고 전직 두 대통령이 지옥에 갔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는 김홍도 목사의 믿음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예수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고 예수의 말을 해석하는 방법이 다르니 당연히 믿음도 다르다.

지승호 : 백만장자들한테 ‘만족하느냐?’라고 묻자 가장 많이 나온 대답이 ‘딱 두배만 더 있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대요.
김규항 : 그들은 영원히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부자와 낙타 이야기를 해석하는 방법은 제각각이다. 아니 그런 이야기에 신경 쓰거나 귀 기울이는 사람은 없다. 부자가 나쁘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의 욕망, 부자가 되는 방법과 그 출발선, 부자의 기준과 부자가 되려는 목적 따위에 대한 성찰이 없다는 게 문제가 아닐까.

  과연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성찰은 불피요한 것일까. 김규항은 내일을 위한 진보와 미래세대의 교육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다. 『고래가 그랬어』를 발행한 이유가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는 말에 공감한다. 키워지는 대로 길러지고 말하는 대로 믿고 시키는 대로 공부하는 것 같지만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다만 어른들의 잘못된 생각이 심어지고 나밖에 모르는 이기심으로 가득 채워지지만 않는다면.

어떤 사람으로 키우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높은 가격을 가진 사람으로 키우는가가 교육의 목표가 되었어요. 실은 교육이라는 게 사라진 거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람을 키우는 게 아니라 상품으로 키우는 거죠. 그걸 교육이라고 부르면서 대한민국의 모든 부모들이 올인합니다. - P. 292

  이 말에 나는 ‘아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부모가 있을까? 아이들에게 제시하는 직업, 미래, 꿈에 대해 진지하게 돌아보자.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기 위해 오늘을 살아가는지 함께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사람은 못 되도 괴물은 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닐까. 김규항의 생각과 삶의 방식에 동의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별로 다를 것도 없는 오십보 백보의 싸움은 되지 않도록 나 스스로부터 진지하게 반성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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