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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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를 결정하는 건 스피드?

1994년 10월 21일 아침 7시 40분경에 성수대교가 무너져 내리고 교각만 남은 장면을 TV에서 처음 봤을 때 황당함. 이듬해 1995년 6월 29일 붕괴된 삼풍 백화점의 처참함. 곧이어 1997년 IMF로 상징되는 한국 경제의 몰락.

우리는 혼란스런 근현대사에서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로 치장된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어왔다. 하지만 밥은 먹고 살자는 생존을 넘어서 경주마처럼 돈벌레로 살아온 것은 아닌가 싶은 깊은 반성의 시간을 가진 적이 없다. 해방과 6.25로 이어지는 치열한 생존 경쟁 조건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을 밟고 일어서야했으며 무엇보다도 삶의 목표와 철학적 성찰이 없었다. 거창한 이념이나 궁극적인 지향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박하게 내 아이들과 우리들의 미래는 이래야 한다는 공동체의 가치관이나 삶의 질에 관심을 갖지 않고 살아온 것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경제적으로 윤택해지는 것이 곧바로 대한민국의 번영과 발전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닌 것이다.

이렇게 혼란스럽고 급변하는 상황에서 친일파가 그대로 우리 사회의 기득권이 되고 각종 이권을 선점하며 권력과 명예를 거머쥐는 뼈아픈 현대사가 전개된다. 시작부터 잘못 꿰어진 단추를 바로 잡으려니 이제는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지 60년이 넘었지만 이제는 그 정통성마저 부정하는 시도가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악취를 풍기는 수구 보수 세력은 철지난 이념 논쟁으로 공공연하게 온 국민을 협박한다. 21세기에 벌어지는 부끄러운 대한민국의 현실을 돌아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는 것이 가장 어리석은 인간이라는 어느 역사가의 말대로 우리는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금방 잊어버리고 또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이제 발전의 속도와 차이가 아니라 발전의 방향과 질적인 면을 살펴야 할 때이다. 무한 경쟁 시대에서 살아남는 일이 중요했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통해 이념의 허망감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인 우리들의 모습이 크게 달라졌다고 보기 어렵다. 씨줄과 날줄처럼 정교하게 얽혀있는 우리의 삶은 시간과 공간의 축을 따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넘나들며 자연스럽게 현상에 대한 원인을 찾고 결과를 예상하기도 한다. 역사가 그러하듯이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지금-여기’의 삶은 오래된 미래일 뿐이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는 일은 추억을 더듬는 감상적인 행위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조망하는 가장 기본적인 성찰이다.


숨가쁜 근대화의 파노라마, 그 빛과 그림자

황석영의 『강남몽』은 자본주의 상징인 백화점이 대한민국 강남 한복판에서 붕괴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일이 연이어 벌어졌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다음 해에 백화점이 무너졌다. 천박한 자본주의와 부패 사슬로 얽힌 건설업이 빚어낸 참극이었다. 이 소설은 백화점에 콘크리트 더미에 깔린 유한 마담 박선녀의 삶을 추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일제시대 일본군의 첩자 노릇을 하던 김진의 삶도 파란만장하다. 부동산과 강남 개발에 편승하여 투기 자본의 형성 과정을 보여주는 심남수까지 보태지면 대한민국의 현재를 보여주는 대표적 개인이라고 할 만하다. 거기에 조직폭력의 보스로 등장하는 홍양태가 가세한다.

정치와 경제는 분리될 수 없으며 더구나 우리의 삶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제 2의 이인국 박사 같은 ‘김진’은 신산스런 근현대사의 상처이자 아픔이다. 선악의 기준으로 김진과 박선녀, 심남수와 홍양태를 손가락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상황 논리로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견뎌온 세월에 대한 아픈 성찰의 시간을 갖자는 것이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옷은 처음부터 다시 채워야 한다. 하지만 역사를 어찌 그리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겠는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한 편의 소설이 시대에 물음을 던지고 과거의 시간과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거시적인 안목에서 우리 근현대사를 성찰하는 무거운 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황석영의 『강남몽』은 최소한 우리 시대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강남’이라는 신화에 대한 근원을 파헤치고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한 편이 어떻게 우리에게 전달되느냐의 문제는 소설의 기본이다. 인터넷 연재라는 새로운 생산과 수용방식으로 독자와 만났던 소설이기 때문에 그 의미가 남다르다. 이제는 보편적인 방법이 되었기 때문에 특별히 색다르게 바라볼 필요도 없지만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독자들의 흥미와 요구에 부흥하고 창작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든 독자들의 반응을 살폈을 작가의 속내를 상상해 본다.

가볍고 흥미진진한 단막극처럼 각 장의 주인공을 내세운 점이나 요정과 지하경제, 폭력세계 등 자극적인 요소들의 사적 전개 과정을 그린 점 등은 독자들의 호기심에 충분히 부흥했다는 면에서 성공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근대화 과정에서 펼쳐진 발전의 이면이 아니라 소설적 재미를 위한 양념일 수도 있다. 이 소설의 궁극적인 목적이 우리 사회의 아픈 성장과정을 그린 대한민국의 성장소설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누구나 겪는 ‘성장통’이라고 치부하기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너무 많다. 아니 어쩌면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일 수도 있다. 우리 사회가 나아갈 공동체의 가치와 대한민국이 만들어가야 할 문화에 대한 반성은 지난 시간을 통한 지금 이 시대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우리 소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를 이제는 트위터에서 종종 만난다. 얼마 전에 트위터를 시작한 작가에게 박수를 보내는 이유는 시대의 흐름을 쫓기 때문이 아니라 형식과 틀을 벗어나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책임의식 때문이다. 함께 더불어 호흡하고 울고 웃는 작가야 말로 이 시대가 원하는 젊음이 아닌가. 나이를 무색케 하는 작가의 자유분방함과 열정이 독자에게 그대로 전해지는 『강남몽』을 이번 휴가에 챙겨야 할 배낭 속 필수품으로 권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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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기업 이야기
권은정 지음, 손문상 사진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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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부터 고민을 했지요. 소수 엘리트만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게 과연 정상인가? 많은 평범한 이들도 스스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기회를 제공받지 못하고 있는 게 우리 사회의 현실입니다. 진보건 보수건 엘리트 의식이 강하지 않습니까?” - 원주의료생활협동조합 최혁진 전무이사, 107쪽

인생은 불공평하고 세상은 냉정하다. 어느 정도 세상을 살아본 사람들이 쉽게 내리는 평가이다. 하지만 이기적인 세상이 살만한 이유는 모두 자신의 잇속만을 차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다. 그 욕망의 노예가 되어 더 많은 이익과 더 많은 돈과 더 많은 권력과 더 높은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들은 진정 행복할까?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라고 해서 욕망의 크기가 작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나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작은 이해와 배려 그리고 나눔을 실천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새삼스럽게 깨닫는 일이 누구에나 중요하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이타심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정책과 실천으로 극복해야 하는 우리들의 의무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게으름, 무능력의 차별적 시선으로 그들을 평가할 때가 많다. 그러나 일하지 않고 경제적 지원을 받아야 하는 계층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은 일할 의지가 있어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거나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사회적 기업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한 자활기회의 확대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 기업과 달리 삶의 공간으로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교량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기업은 불가능할까?

사회적 기업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주주의 이윤 극대화가 아니라 나눔과 배려를 선택하고 고객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소외된 이웃을 돌보는 아름답고 착한 기업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성공회대학교의 사회적기업 연구센터와 함께 사회적 기업가들을 만나고 인터뷰한 『착한 기업 이야기』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찾을 수 있는 대안과 희망을 제시한다. 아무리 승자독식시대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신자유주의가 최종 승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매일 확인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할 때 우리의 삶은 불행해지고 방향과 목적을 상실한 채 경쟁과 불안,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괴로울 뿐이다. 사회적 기업은 몇몇 사람들의 노력과 실천으로 이제 작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정책적 지원이 이루어지고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간다면 우리 사회의 대안적 기업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막 시작 단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싹을 틔우고 민들레 홀씨처럼 점점 확산되어 가는 사회적 기업의 과거와 현재를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물론 그 안에 우리의 미래가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인터뷰 형식으로 사회적 기업가들을 찾아 나선다. 자치 은행, 생활협동 조합, 생활병원, 장애인 오케스트라에서 건설회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놀라운 실천과 변화를 소개한다. 우리 생활 주변에서 사라진 공동체를 되살리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노력과 실천이 부족할 뿐이다. 전태일 열사의 동생 ‘참 신나는 옷’의 전순옥 대표로 시작된 이야기는 ‘사랑의 손맛’ 백미선 대표의 이야기로 끝난다. 틈새 시장에서 사회적 기업의 아이디어를 얻은 사람들, 지역 사회와 함께 하는 사회적 기업가들, 대안적 세계관을 현실로 옮긴 사회적 기업가들은 특별히 이타적 유전자가 발달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저 평범한 우리들의 이웃이며 생각을 실천에 옮긴 사람들일 뿐이다. 나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 함께 행복해야 진짜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혜로운 사람들이다.

이 책은 자본주의의 우월성과 경제 논리를 가르치면서 그것이 어떤 사회적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그 대한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훌륭한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부자와 빈자의 이분법적 사고 방식으로 사람을 구별하는 세상은 정상이 아니다. 살맛 나는 세상, 모두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우리 모두가 함께 꿈을 꾸면 그것은 현실이 된다는 믿음을 버리지 말자. 이 책에 소개된 사회적 기업가들 뿐만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들을 배려하고 소외된 이웃들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소수인 사회가 아니라 바로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이 되는 사회를 함께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떤가.

경영학과 경제학을 전공하고 싶다는 많은 청소년들이 바로 이런 기업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대한민국을 꿈꿔본다. 학교에서 가르칠 것이 너무 많아 가르치지 않는 것일까? 암기용 지식은 아주 작고 사소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을 얻는 데 우리는 얼마나 더 큰 비용을 지불하고 실수를 반복해야 하는 것일까? 경제 교과서 대신 이 책을 한 번씩 읽게 하는 것은 어떨지 선생님들에게 묻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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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이야기의 이론과 해석
최시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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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인간 군상들의 삶을 보라.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본다면 매일매일 시점이 다른 시트콤을 보게 될 것이다. 태어나고 죽고 다치고 사랑에 빠지고 아이를 낳고 학교에 입학하고 졸업을 하거나 이별하며 잠 못 이루고 미친 듯 달리며 행복하게 미소짓고 맛있게 먹으며 슬퍼하고 기뻐하며 화내고 울부짖고 싸우거나 병들고 떠나거나 사라진다. 소설은 말할 수 없는 것과 말하고 싶은 모든 이야기를 담아내는 가장 방대하고 익숙한 갈래의 문학이다.

이야기는 역사와 더불어 가장 오래된 인간의 본능적 욕구에 닿아있다. 서사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편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야기를 만들고 듣고 전달한다. 사실이든 허구이든 가리지 않고 이야기가 가진 매력은 영원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이야기는 ‘소설’이라는 문학의 한 갈래 안에 포섭되어 있다. 스토리텔링은 단순히 어느 갈래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 드라마, 만화, 게임 등 수많은 분야에 응용되고 확대 재생산 된다. 하나의 창작물은 다양한 형태의 미디어로 재탄생하며 매체가 갖는 특성 때문에 오히려 신선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기도 한다. 어쨌든 시대를 막론하고 이야기 즉 서사의 힘은 막강하기만 하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 특히 ‘소설’을 읽는 힘에 대해서는 소홀한 것이 사실이다. 학교에서 시험을 치르기 위해 불이 나게 외웠다가 까먹었던 소설의 이론을 알고 모르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물이나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정확하고 냉정한 판단 능력이 필요하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그저 재미있게 스토리만 읽어낼 수도 있다. 아니 대부분 그렇게 소설을 소비한다. 하지만 조금 더 꼼꼼하게 그리고 천천히 소설을 음미하는 방법은 없을까?

소설에 관한 이론서를 읽는다고 해서 소설이 더 재미있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어두운 밤에 정원을 산책하는 것보다 밝은 빛을 따라 길을 걷는 것이 더 많은 꽃과 나무와 풀들을 보게 된다. 인물과 갈등이 소설을 읽는 중심 축이다. 물론 인물들이 엮어내는 사건이 본격적인 소설의 흐름을 형성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작가가 창조한 인물의 성격과 핵심 갈등이 소설의 뼈대를 형성하게 된다. 이것을 드러내기 위한 사건들이 배열되고 적절한 시공간 배경과 다양한 장치들이 마련된다. 하나의 완벽한 구조물이 형성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협력해야 하는 것처럼 소설은 각 부분과 요소들의 끊임없는 상호작용과 긴밀한 협조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복잡하다고 해서 좋은 소설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단순한 구성과 인물만으로도 인상적이고 깊은 감동을 주는 단편이 있는가 하면 수많은 등장인물과 복잡한 사건 전개가 이루어지는 데도 지루한 소설이 있기 마련이다. 소설의 재미는 사건의 독특함이나 신선함에서 올 수도 있지만 인물의 성격, 배경에 대한 치밀한 묘사, 유려한 문체, 유기적이고 정교한 구성 등 다양한 요소들이 만들어내는 교향곡과도 같다. 작가의 능력은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완전하게 탄생시키는 창조자이거나 조정자로서 보이지 않는 손을 움직이는 능력에 달려 있다.

독자에게 소설을 읽어주는 서술자는 작가와 또 다른 소통자의 역할을 한다. 한 편의 소설이 탄생되고 그것이 독자에게 어떻게 전달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작가의 것이 아니라 소설을 읽어야 하는 독자들의 몫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이렇게 많은 소설들을 읽고 또 읽으며 울고 웃는다. 그렇다면 과연 소설을 읽는 목적이 ‘재미’만을 위한 것일까?

소설을 읽는 과정은 그것을 쓰는 과정을 닮았는데, 실제로 독자는 눈으로 읽고 있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자처럼 종합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을 하여, 마음속으로 자기 이야기를 쓰기도 한다. - 최시한, <소설, 어떻게 읽을 것인가>, 22쪽

모든 책읽기가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소설은 소설 속의 허구적 인물의 삶을 관찰하며 나를 돌아보고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그 진정한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소설을 쓰는 과정을 닮아있다는 소설 읽기의 과정에 관한 최시한의 지적은 적확해 보인다.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을 돌아보고 내 삶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소설을 읽는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특별한 교훈과 성찰을 담아내야 하는 것이 소설은 아니지만 적어도 독자의 입장에서는 소설을 읽는 것은 어쩌면 나를 읽는 일이고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읽는 일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즐거움만을 위한 소설에 대한 이야기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지 않을까.

이론을 통해 소설의 즐거움을 찾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이 책에서 전하는 이야기들은 일반 독자들에게도 충분히 효용가치가 있다. 소설을 가르치는 사람이나 깊이 있게 분석해야 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조금 더 자세하게 그리고 정밀하게 읽고 싶은 독자라면 어려움 없이 새로운 시각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특히 우리에게 익숙한 소설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오발탄’, ‘역마’, ‘눈길’ 등 다양한 한국소설을 통해 소설의 기본 구조와 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어 이해하기 쉽다. 소설을 분석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 아닐지 모르지만 충분히 즐기고 싶은 사람에게는 필요한 이야기들이 아닐까 싶다. 보지도 못하고 지나가는 길가의 풀꽃과 나무위의 새들을 살펴보듯이 길을 가면서도 충분히 경치를 즐기는 일은 가능하다. 이 책은 그렇게 우리에게 사건 너머의 소설읽기의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지막으로 소설을 읽는 독자의 기본자세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새겨본다.

독자의 기본 자세. 첫째, 스스로 읽어야 한다. 둘째, 인간과 삶의 모습을 깊이 느끼고 생각하며 읽어야 한다. 셋째, 작품 자체의 질서와 논리에 충실하게 읽어야 한다. - 최시한, <소설, 어떻게 읽을 것인가>,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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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빼미의 없음
배수아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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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작은 이야기다. 새롭고 재미있는 이야기는 모든 사람들의 기본적인 욕망이라고 한다.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 경험해 보지 못한 이야기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끝없는 호기심과 창조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이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 낯선 대상에 대한 호기심, 익숙한 것에 대한 엉뚱한 상상력을 갖추지 못하면 소설가가 되기 어렵다.

그러나 전통적인 서사구조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된 작가는 무엇을 써야할까. 아니 이야기꾼으로서가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다양한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면 어떻게 써야할까. 배수아의 소설집 『올빼미의 없음』은 소설의 틀과 형식과 규범에 대한 상식을 거부한다. 일반 독자에게 낯선 이야기의 구조는 색다름이 아니라 어색함과 불편함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한 모양이다. 천상 소설가로 살아야하는 것이 작가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이라면 충분히 그 고통을 즐길 수 있으리라고 본다. 단순한 창작의 고통이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이야기의 구조라는 틀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 작가가 느끼는 개인적 고민일 수도 있고 문학의 갈래가 갖는 근본적인 형식적 고민일 수도 있겠다.

8편의 소설을 모아 놓은 평범한 소설집 『올빼미의 없음』은 가독성이 현저히 떨어지고 서사의 기본 틀은 와해되어 있다. 최근 2010년이 하나의 기준이 될 수는 없겠지만 또다른 10년을 준비하는 대한민국 소설의 가능성과 방향에 대한 모색인지 지루한 형식과 방법에 대한 도전인지 조금 더 지켜봐야겠다. 비단 배수아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또다른 작가들도 고민하는 부분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소설이 당대의 시대 현실을 담아내야 하거나 미래에 대한 호기심과 상상력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지극히 당위적인 관점에서 벗어나더라도 최소한 ‘재미’를 포기할 독자는 많지 않다. 고급한 독자의 취향 - 이를테면 박상륭류의 매니아가 아니라면 쉽게 읽히지 않을 소설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을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가장 대중적이고 가장 속된 갈래라고 말할 수 있는 소설이 이렇게 꿈과 환상에 관한 기억을 더듬고 주인공의 내면 풍경 묘사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소설의 다양성 측면에서 반가운 일이다. 단순한 서사구조를 벗어나 과거의 기억과 추억의 갈피를 쫓고 의식의 흐름을 쫓아다니는 일은 작가와 독자들이 만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이다. 독자들은 소설을 다양하게 그리고 온몸으로 읽는다. 이야기의 전개를 따라 가는 것은 물론이고 문장과 여백, 행간의 의미와 주인공의 섬세한 심리를 따라간다. 소설가가 안내하는 생의 이면과 또 다른 현실 속에서 울고 웃으며 희망과 절망의 롤러코스트를 타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소설의 내용과 구조를 따라 가는 일이 전통적인 소설읽기의 방법이라면 낯설고 생경한 방식으로 독자들의 내면 풍경을 유추하게 하는 일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배수아는 ‘양의 첫눈’을 비롯해서 ‘올빼미’, ‘북역’을 통해 기승전결 구조에 길들여진 소설의 독법을 불편하게 만든다. 잔잔하고 일상적인 독백 같기도 하고 사유의 흐름을 따라 걷는 산책같기도 한 소설을 통해 독자들은 오히려 주인공이 아니라 자신의 방식으로 소설을 새롭게 이해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진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든 소설에 대한 판단 기준에 독자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평가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나를 구성하는 이 외부의 물과 그림이 낯설다고. 이 독특한 비현실성 속에서 살고 있었고 그것이 곧 내가 되었다고. - ‘무종’ 중에서, 187쪽

소설 속의 주인공이 ‘비현실성’ 속에서 살아간다면 소설의 외부로 나아갔다는 뜻인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고백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소설을 소설이 아닌 신선하고 새로운 방식의 사유 방식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고 삶에 대한 성찰을 위한 도구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독자의 선택과 취향에 맞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작가의 손을 떠난 문제이다.

우리가 이야기를 통해 얻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으나 작가의 의도를 읽어낼 필요는 없다. 다만 그 이야기들이, 꿈과 환상이 어떻게 부딪쳐 소리를 내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형되는지에 대해서는 각자의 몫으로 돌릴 수밖에 없지 않을까.

모든 직업은 우울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살아가는’ 그 직업은 우울하며, 필연적인 우울을 유발한다. 은퇴와 죽음 말고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우울. - ‘빠리거리의 점잖은 입맞춤’ 중에서, 195쪽

책을 읽으면서 그날의 기분과 느낌, 날씨와 건강상태에 따라 다른 문장을 뽑아낼 때가 있다. 소설의 내용과 무관하지는 않겠지만, 먹고 사는 일이 신산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직업적 만족과 무관하게 필연적으로 ‘우울’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는 말은 ‘죽음과 은퇴’ 이외에는 희망이 없다는 선언에 대해 반박의 여지가 없을 때의 낭패감!

내가 이제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 중에서 그 어떤 것도 내가 당신을 떠나는 이유를 직접 설명해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을 것이다. - ‘밤이 염세적이다’ 중에서, 289쪽

그래도 여전히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이렇게라도 위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그 모든 변명을 책 속에서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뱉어내는 말과 언어의 한계에 대한 반성적 고찰!

사랑은 모순의 일인극이다. 민감하고 선명하게 각인되는 사랑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사랑은 외국 낭송극이다. 사랑은 새로운 말과 언어를 만들고 그것들을 드러내려고 몸부림친다. - ‘밤이 염세적이다’ 중에서, 3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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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란 무엇인가
크리스토프 바우젠바인 지음, 김태희 옮김 / 민음인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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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저마다 현실 밖에서 꿈을 꿀 때가 있다. 그 꿈이 어떤 것이든 우리 모두는 꿈꿀 권리가 있다. 그 꿈은 자신만의 즐거움일 수 있고 또 하나의 세계일 수도 있다. 현실원칙과 쾌락원칙의 간극이 벌어질수록 더 몰입하고 열광한다. 상징계와 상상계가 현실계를 반영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비틀리고 왜곡된 환타지어도 좋고 간절히 바라는 소망이어도 좋다. 다만, 우리들의 삶을 즐겁게 해 줄 수만 있다면.

4년에 한 번씩 지구인들은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지른다.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동물적 본능에 가까운 스포츠 축구. 세련된 형태로 발전했고 자본과 매스미디어를 등에 업은 채 거대한 산업으로 발전했지만 축구경기 자체가 주는 즐거움과 흥분을 반감시키지는 않았다. 축구는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지구인의 스포츠가 틀림없다.

초등학교시절에 잠시 축구선수 생활을 하다가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공부(?)하라는 아버지의 강압에 못 이겨 포기했기 때문에 언제나 운동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었다. 20대 중반까지 축구 경기장 계단을 올라 녹색의 잔디를 보면 미친 듯이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떤 여자를 만났을 때 그렇게 내 심장이 90분간 두근거렸을까. 그것은 말할 수 없는 동경이며 환타지에 가까운 열망이었다. 그래서 여전히 축구는 때때로 관심과 증오와 환희와 열광의 대상이다.

1986년 박창선의 월드컵 첫 골 장면이나 최순호의 중거리 슛이 1982년 한일전 김재박의 스퀴즈 번트만큼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또 다른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었고 열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런너스하이를 경험해 본 사람은 운동 중독에 빠지게 된다. 쉬지 않고 그라운드를 달리고 드리블하고 상황을 파악하고 순간적으로 판단하며 숨이 넘어갈 듯 달리다보면 동물적 즐거움의 극치를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축구 경기를 즐기는 사람뿐만 아니라 경기를 보며 몰입하는 사람의 흥분상태를 포함한다. 독일의 크리스토프 바우젠바인의 『축구란 무엇인가』는 바로 이렇게 축구에 미친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아니 왜 축구여야 하는지 궁금한 사람들을 위한 책이기도 하다.

알프레드 바알의 『축구의 역사』와 이은호의 『축구의 문화사』가 축구에 관한 에피타이저라면 프랭클린 포어의 『축구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와 닉 혼비의 『피버 피치』는 축구에 대한 본격적인 몰입의 즐거움을 선사하고 축구의 역할과 기능을 다각도로 살펴보는 책이다. 『축구란 무엇인가』는 ‘축구’라는 경기에 대하여, 축구의 역사, 축구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라는 큰 주제를 가지고 축구의 모든 것에 대해 말한다. 실로 축구의 백과사전이라 할 만한 분량과 내용을 갖춘 책이다. 축구의 기원과 역사에서부터 사람들이 축구에 열광하는 이유까지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축구가 관중에게 주는 매력은 본질적으로 발의 허약함에 있다. 고집 센 공을 다루는 발의 허약함으로 인하여 자주 실수가 일어나기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우리가 절대 예견할 수 없고 거기에서 매력이 나온다. - 크리스토프 바우젠바인, <축구란 무엇인가>, 70쪽

이 책은 단순히 지식과 정보를 담고 있는 백과사전류가 아니다. 저자는 독일 축구의 주요 장면을 실감나는 문장으로 되살려내고 있으며 역대 월드컵을 기억한다. 축구에 대한 깊은 애정과 깊이 있는 분석을 토대로 다양한 접근을 시도한다. 저자는 축구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샅샅히 훑어내고 있다. 참 많은 이야기로 독자들을 사로잡는 책이다.

월드컵이 열리는 기간이다. 온 국민이 열광하고 있지만 단기간의 축제여도 좋고 분위기에 휩쓸려 흥겨움을 즐겨도 좋다. 집단적 애국주의와 전체주의의 광기라고 욕하지 말고 국가주의를 공고히 하는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지 말고 ‘축구’ 자체가 주는 즐거움과 의외성 그리고 몰입의 즐거움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어떤 사람들은 축구를 생사가 걸린 문제라고 여긴다. 나는 이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축구는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다."(빌 생클리, 리버풀 감독) - 크리스토프 바우젠바인, <축구란 무엇인가>, 507쪽

미쳐야 미친다. 무엇에든 미치지 않고서야 그 지극한 즐거움의 언저리를 맛보지 못한다. 세상에는 다양한 즐거움이 있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행복과 기쁨을 만들어 간다. 축구는 인류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으며 어떤 역사를 거쳐 여기까지 왔는지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재미있게 즐겨보자.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스타디움이 아닌 TV를 통해 봐야하는 아쉬움은 사치에 불과하다. 즐길 준비가 되어 있다면 ‘공은 둥글다’는 말을 믿어보자. 승부와 상관없이 이미 축제의 한 가운데 서 있다. 우리들의 생이 늘 축제일 수는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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