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비타 악티바 : 개념사 20
홍기빈 지음 / 책세상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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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첫째, 자본과 자본가에서 파생된 말이라는 점, 둘째, 그 시작부터 ‘자본 혹은 자본가가 지배하는 사회 체제’를 상당히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어감으로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는 점, 셋째, 수많은 사상가들이 이 말을 근대 사회를 이해하는 대단히 중요한 핵심어로 여기고 연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보편적인 정의는 여전히 모호한 상태에 있으며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그 혼란상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 28쪽

책을 선택하는 다양한 기준 중의 하나는 저자다.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로 깊은 인상을 받았던 홍기빈을 <학벌없는 사회> 강연 포스터로만 다시 만났다. 한 권의 책을 읽고나면 그의 논리와 설득에 몰입하게 된다. 깔끔한 문장과 정확한 분석이 마음에 든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의 『자본주의』를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주제에 대한 관심과 저자에 대한 믿음.

살림출판사의 ‘지식총서’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와 ‘고전의 세계’는 짧은 분량으로 특정 분야에 대한 기초 지식과 다양한 관점을 제시한다. 지식의 에피타이저로 적당하다. 책세상의 ‘비타악티바’ 시리즈는 인권과 아나키즘을 필두로 우리가 알아야 할 세상의 다양한 ‘개념’들을 설명한다. 자주 사용하면서도 잘 알지 못하는 개념이나 그 뜻이 모호하고 불분명한 개념들에 대한 기초적이고 정확한 안내서 역할을 하고 있다. 홍기빈의 『자본주의』는 1장에서 자본과 자본가와 자본주의라는 말썽꾸러기 용어에 대한 혼란를 정리한다. 여기서 정리한다는 뜻은 정리되지 않은 것들을 정리해서 명료화한다는 뜻이 아니라 왜 정리되지 않고 그 뜻이 모호할 수밖에 없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모호한 상태의 개념을 저자 나름의 방식으로 정리한 것을 연역적으로 먼저 내세워 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개념을 저자는 나름대로 그 특징을 짚어 낸 것이다. 한두 마디 말로 설명되지 않는 개념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 책은 ‘화폐, 생산, 권력’이라고 하는 보다 구체적인 개념을 이용한다. 화폐경제의 발생과 ‘자본’의 발생 그리고 권력과 자본주의 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주변을 이용해서 실체를 밝히는 방식인 것이다. 그런다음 고전적인 자본주의 이론가들을 내세운다. 리카도와 마르크스, 좀바르트와 베버, 브로델과 베블런이 그들이다. 마르크스와 베버 그리고 베블런의 책을 읽었지만 저자의 요약 설명과 다른 경제학자와의 비교 설명은 명쾌하게 와 닿지 않는다. 내가 과문한 탓도 있겠지만 서로 다른 관점들을 통한 개념 설명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지막은 자연스럽게 21세기와 자본주의의 역사적 경향을 일괄한다.

자본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의미는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에 기초한 경제 체제 및 이를 토대로 성립하는 사회구성체’이다. 현대사회에 적용할 수 없는 모호한 개념이고 변화하는 경제 시스템 속에서 설명이 불가능하지만 언제나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개념과 환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용어의 모호함 때문에 그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가 처한 사회를 설명하는 빈도가 가장 높은 개념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개념에 대한 역사적 변천 과정과 나름의 기준을 명확히 해 둘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우리가 발딛고 서 있는 사회 현상과 미래 사회에 대한 전망이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개념이 없다는 말은 무식하다는 말이 아니라 생각할 능력이 없다는 말이다. 본질적인 의미에 대한 명확한 개념 규정과 이해로부터 인식의 힘은 출발한다. 보다 넓고 깊게 세상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우선 쉽고 간단하게 개념을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지식을 쉽게 설명할 수 없다면 아는 것이 아니라고 한 리처드 파인만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자본주의 개념을 간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이 책을 포함한 ‘비타악티바’ 시리즈에 찬사를 보낸다.

이 책은 근대 이후 우리가 걸어온 역사와 가야 할 길의 방향을 묻고 있다. 하나의 개념은 정확하고 명료한 설명에 있지 않고 미래 사회의 전망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고찰은 과거와 현재에 대한 반성이고 미래에 대한 고민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자본주의의 개념을 설명하는 대신 자본주의 길을 되묻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행간의 의미를 꼼꼼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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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윤리를 말하다 - 유전학적으로 완벽해지려는 인간에 대한 반론
마이클 샌델 지음, 강명신 옮김 / 동녘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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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를 풍미하는 책은 나름의 이유를 갖고 있다. 최근 『정의란 무엇인가』로 서점가를 휩쓸고 있는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샌델 교수의 책은 제목으로 이 시대를 웅변한다. ‘공정사회’를 부르짖는 사회의 불공정성은 악취를 풍길 정도라는 걸 모두가 안다. 감사원의 지적을 받은 정부 각 부처의 결과를 공개한 최근 국감 자료는 우리 사회의 공정성을 방증한다. 이처럼 한 권의 책은 유행가를 포함한 다양한 문화 현상의 일부로 시대를 측정할 수 있는 리트머스 역할을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앞서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를 읽어본다. 이 책의 부제는 ‘유전학적으로 완벽해지려는 인간에 대한 반론’이다. 짧은 논문에 나타난 저자의 생각은 부제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롤스의 정의론 비판으로 27세에 하버드대 교수가 된 석학의 말하기 방식은 공감과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다. 유전학적 강화와 자연발생적 선택에 대한 지극히 자극적인 도입부는 관심을 집중시킨다. 청각장애 부부가 5대째 청각장애인 가족에서 정자 공여자를 찾아 청각장애 아들을 고뱅을 얻었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그른가?

부모가 아이를 고른다는 생각이 잘못되었다면 프리미엄 난자를 구하기 위한 광고나 장애아 검사 등에 대한 도덕적 논란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근육 강화, 기억 강화, 신장 강화, 성 감별 등에 대한 서로 다른 기준과 잣대가 아니라 ‘생명’ 자체에 대한 윤리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과연 가능한가? 종교, 인종, 문화적 차이에 따라 도덕적 기준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마이클 샌델도 첨단 과학인 생명공학에 대한 윤리적 기준을 제시하는 것에 대한 한계를 토로한다. 배아세포에 이용에 관한 서로 다른 기준과 견해는 이 논쟁의 출발이다. 무엇을, 어디서부터 생명으로 볼 것인가. 이 이야기는 에필로그에서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의 전제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생체공학적 운동선수와 자녀를 디자인하는 부모 그리고 우생학에 대한 자유주의와 공동체적 관점을 다룬 본문의 내용들은 철학적, 윤리적 논란에 대해 어렵지 않게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 논란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논점에 대한 문제를 제시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저자의 이러한 말하기 방식은 생명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이 단순히 기능적 관점이나 종교적 관점이 아닌 인간사회의 보편타당한 윤리적 관점에서 해결할 수 있음을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뉴욕 맨해튼에 있는 아이비와이즈사가 최상류층을 상대로 대학 입학과 관련된 지원에 2년 동안 3만 2995달러가 드는 ‘플래티넘 패키지’를 출시했다. 창업자 캐서린 코헨은 “나는 대학 지원만 도와주는 게 아니에요. 인생 설계를 도와주죠”라고 말한다. 한국의 맞춤형 고액과외, 입학사정관제 관리 프로그램 등과 다를 바 없다. 저자는 아이를 과도하게 공부시키는 일에 대한 예를 들어 우생학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지 묻고 있다. 아이들의 자발적 선택이 아니라 부모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면 도덕적으로 별반 다르지 않다는 주장일 것이다.

윤리학의 관점에서 ‘생명’의 문제는 과학의 발달을 따라가는 형태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 논란은 가열되지만 기술의 진보는 철학을 앞선다. 서로 다른 생각들이 합의되지 않은 상태에서 생명 윤리를 논하는 것은 그것 자체에 대한 위험부담을 넘어 우리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어쩌면 영원히 그 꿈을 향해 노력하는 것이 인간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전학적으로 완벽해지려는 인간의 욕망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 마이클 샌델은 이 문제에 대한 공개적인 토론을 제안 한 듯하다. 정답이 없다고 해서 피해갈 수 없는 문제이다. 다수결로 결정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윤리학자들의 논리가 정답일 수도 없다.

이 책은 이러한 수많은 논쟁과 서로 다른 관점에 대한 성찰과 당면한 생명공학에 대한 제문제를 꼼꼼하게 살피고 있다. 짧지만 강렬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완벽하고 근사한 이론을 제시하고 훌륭한 대안을 찾을 수는 없다. 하지만 생각의 방향과 일관성 없는 윤리적 기준들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가능성에 도전하면서도 도덕적 가치와 과학적 발전의 욕구 사이에서 갈등할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이며 생명은 어떻게 시작되어 끝을 맺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반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수많은 담론들은 풍성한 말잔치에 불과하다.

우리 사회의 윤리적 기준과 도덕적 잣대가 ‘생명’이라고 해서 비껴갈 수는 없다. 정교하고 흔들리지 않는 법과 제도를 만들 수는 없겠지만 우리 사회의 기준과 원칙을 세워나가고 그것을 지켜나가는 것이 건강한 대한민국의 출발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은 ‘생명의 윤리’ 뿐만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삶의 윤리’를 생각해 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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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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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무장지대를 담당하는 수색중대에서 군생활을 마감할 무렵 마지막 휴가를 나왔다가 삐삐를 구입해서 복귀했다. 주둔지 마지막 언덕을 돌아 GOP 라인 부근에 이르자 삐삐의 안테나가 사라졌다. 무용지물이 된 조그만 기계장치를 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토요일에 전역 신고를 마치고 월요일부터 출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KTF 016 번호를 예약해서 받은 전화 번호를 010으로 바꾸면서 작년에 번호가 바뀌었다. 휴대폰이 생기기 전에는 사람들이 생활이 지금보다 불행했을까?

신속하고 편리한 생활은 생각할 시간과 여유 있는 삶을 앗아갔다. 우연에 기대지 않아도 좋을 만큼 뭐든 정확하고 빈틈이 없어졌다. 숨가쁘게 살 수 밖에 없는 촘촘한 네트워크로 세상은 연결되기 시작했다. 인터넷과 휴대폰이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스마트폰 시대를 맞아 이제는 문자와 메일, 소셜 네트워크로 모든 사람과 실시간으로 연결되는 시대를 살아간다. 문득, 강원도에 여행을 다녀오는 길에 풀씨를 코팅해서 만든 책받침을 우체통에 꽂아 놓았던 친구를 떠올린다. 스무 살 무렵이었다. 그때는 전화벨이 울려도 나를 찾는 전화가 많지 않았다. 공중전화 박스를 지날 때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고, 그 마음의 문을 닫고 스스로 상처 받던 시절이었다.

사랑은 언제나 목마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보편적 정서를 담아낸 소설들의 종착역은 사랑이다. 작가는 어떤 종류의 사랑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고민할 뿐이다. 사랑을 다양하게 변주했던 신경숙의 장편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을 천천히 읽는 가을은 또 어떤가.

기억이란 제 스스로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는 속성까지 있다. 기억들이 불러일으킨 이미지가 우리 삶 속에 섞여 있는 것이지, 누군가의 기억이나 나의 기억을 실제 있었던 일로 기필코 믿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고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면 나는 그 사람의 희망이 뒤섞여 있는 발언으로 받아들인다. - 22쪽 

연애소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구체적 시공간을 걷어내고 보편성을 담아내려는 노력과 흔적이 곳곳에 드러나는 이 소설은 ‘시대’와 ‘사랑’ 두 가지를 모두 아프게 읽어내야 한다. 그러한 시대가 있었고 그러한 사랑이 있었다는 말로 요약될 수 없는 행간의 깊이와 떨리는 문장과 긴 호흡이 압권이다. 그러나 지나친 감수성과 인물들이 가진 작위적 성격은 가독성을 떨어뜨리고 공감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은 곳곳에 흘러넘친다. 오랬동안 신경숙의 소설을 읽어온 독자로서 피로감이 들기 시작한 걸까. 『엄마를 부탁해』의 감동과 여운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일까. 서로 다른 감정을 보여주고 있지만 사랑이 차고 넘쳐 부담스럽다.

신형철은 “왜 나는 지드와 헤세의 청춘소설에 감동받은 척했던 것일까. 그들의 책은 아름다웠지만 상처가 만져지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아픔을 느끼지도 못했었는데. 그러나 신경숙의 소설은 아파서, ‘세계는 떠나버렸다. 내가 널 짊어져야 한다’라는 첼란의 시구를 생각나게 했지. 자신의 삶을, 동료의 죽음을, 심지어 공동체의 운명을 짊어져야 했던 한 시대의 ‘크리스토프’들이 여기 있네.”라고 말했지만 나는 지드와 헤세의 청춘소설에 감동받았다. 그것은 작가의 힘이나 작품의 위대함 때문이 아니라 나이와 감수성과 상황 때문이었다. 오래전 기억을 더듬어 청춘의 한 구석의 먼지를 털어내야 하는 일은 기쁨이거나 고역이다. 신경숙의 소설은 너무 아파서, 한 시대의 ‘크리스토프’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 듯해서 부담스럽다.

내가 그쪽으로 갈 수 있는 마음인지 그럴 수 있는 상황인지는 상대가 아닌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네 명의 청춘과 윤교수는 한 시대와 서로 다른 방식의 사랑과 아픔을 토해낸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도 모든 사람은 ‘크리스토프’일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강을 건너는 사람과 강을 건너게 해주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네. 여러분은 불어난 강물을 삿대로 짚고 강을 건네주는 크리스토프이기만 한 게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 전체이며 창조자들이기도 해. 때로는 크리스토프였다가 때로는 아이이기도 하며 서로가 서로를 강 이편에서 저편으로 실어나르는 존재들이네. 스스로를 귀하고 소중히 여기게. - P. 63쪽

오래된 기억 속의 조작된 추억들을 수채화로 채색하고 싶은 사람들이나 가장 비극적인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사람에게 권할 만한 소설이지만, 신경숙의 소설 중에서는 만지작거리다가 다른 소설들을 우선 추천하게 될 것 같은 작품이다.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말해질 수밖에 없는 청춘소설 한 권을 읽은 셈이다. 그리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기억의 언저리를 기웃거렸을 뿐이다.

또다시 주어진 시간과 과거의 결과인 현재를 돌아본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려도 듣지 못하는 순간이 있고 간절하게 기다려도 전화벨이 울리지 않는 때도 있는 법이다. 우리는 때때로 그 모든 순간을 인생이라고 부른다. 다 지나가는 인생.

인생은 매순간 우리에게 힘든 결단과 희생을 요구합니다. 산다는 것은 무의 허공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무게와 부피와 질감을 지닌 실존하는 것들의 관계망을 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아 있는 것들이 끝없이 변하는 한 우리의 희망도 사그라들지 않을 것입니다. - 291쪽


100928-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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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들
김중혁 지음 / 창비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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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젊은 날,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한강의 야경을 내다보다가 문득 차창에 비친 내 얼굴이 너무 낯설어 뛰어 내리고 싶었던 적이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세상은 핵폭발을 일으키듯 내가 감당할 수 없을만큼 혼란스럽고 거대한 압력으로 다가왔다. 그 후로 오랫동안 규칙과 질서는 사라졌고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와 내가 생각하는 원칙 사이에 심각한 균열이 발생했음을 깨달았다. 집에 돌아올 무렵 술이 깨기 시작하면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고 소설을 뒤적이거나 비디오를 봤다. <퐁네프의 연인들>이나 <블루벨벳> 같은 영화였던 것 같기도 하고 <씨네마 천국>이나 <베를린 천사의 시>를 몇 번씩 다시 보기도 했던 것 같다. 조지 클루니와 쿠엔틴 타란티노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던 <황혼에서 새벽까지>는 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델리카트슨>만큼 인상적인 영화로 내 기억의 저편에 저장되어 있다.

그것은 단순히 낮과 다른 밤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혐오감에서 비롯된 호기심이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뱀파이어나 좀비를 다룬 모든 영화나 소설들은 현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아니라 현실 너머에 존재할 지도 모르는 또 다른 세상에 대한 동경과 희망에 대한 경이로움이다. 요지부동인 현실에 대한 권태와 끝없이 반복되는 인간 역사에 대한 실망이 아니라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서성거리는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다. 죽음에 대한 모든 살아있는 인간의 영원한 갈증! 바로 그것이 드라큐와와 뱀파이어와 좀비와 강시와 구미호와 귀신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김중혁의 장편소설 『좀비들』은 그야말로 좀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좀비 소설이다. 좀비란 살아있는 시체를 말한다. 서인도 제도 원주민의 미신과 부두교의 제사장들이 마약을 투여해 되살려낸 시체에서 유래한 단어라 한다. 실제 존재 여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과학으로 예술을 증명하려는 어리석음이나 예술과 과학을 경계짓는 따위의 논란은 이 소설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좀비를 통해 현실 아닌 현실을 창조해 낸다. 현실과 상상 세계를 이어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좀비들이다. 그들은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니고 죽었지만 살아있는 존재들이다. 그 경계인을 통해 우리에게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가를 성찰해 보자고 말하는 것 같다.

사실 이 좀비 소설이라고 이름 붙였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은 여전히 살아있는 인간들이다. 좀비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조연이며 부수적 역할에 불과하다. 본격적인 판타지나 SF로 보기는 어려운 애매모호한 장르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소재의 새로움과 낯선 기법으로 한국 소설의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는 데 의의가 있겠지만 그 성격이 분명하지 않아 많은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아야 할 작품이기도 하다. 이와 유사한 작품들이 더 나오거나 김중혁의 관심이 좀 더 확장될지 궁금하기도 하다.

이 소설의 얼개는 과거 회상 형식의 액자식 구성이다. 안테나 감식반 일을 하면서 만난 좀비 이야기를 시작하는 주인공은 유일한 혈육이자 정신적인 지지대였던 형의 죽음으로 인해 삶의 의욕을 상실한 사람이었다. 도서관에서 만난 뚱보130과 수신감도가 0인 고리오마을에서 만난 홍혜정 그리고 그녀의 딸 홍이안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고리오 마을의 비밀이 밝혀지고 좀비들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소설은 얽힌 실타래가 조금씩 풀린다. 추리소설 기법으로 고립되고 낯선 세계에 좀비들을 등장시켜 현실 밖의 세계와 현실의 접목을 시도한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삶과 죽음의 공존이 아니라 특정 공간에 만나는 좀비는 낯설고 이물스럽다. 공포와 전율의 대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연민과 동경과도 거리가 멀다. 이 소설에서 좀비는 뭐라 규정할 수 없는 존재다. 다만 좀비를 통해 비정한 인간 존재에 대한 반성이 있을 뿐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 삶에서 해석도 이해도 불가능한 충격이다. 작가는 죽음을 포함한 모든 삶의 ‘충격’을 이렇게 말한다.

충격이란 건 말이죠. 받아들이는 쪽에서 마음만 먹으면 아무 일도 아닌 게 될 수 있는 겁니다. 아주 작은 충격이 커다란 폭발을 동반할 수도 있지만 엄청난 충격이 깃털처럼 가벼워질 수도 있는 거죠. 우리는 새로운 물건을 발명한 게 아니라 충격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개발한 겁니다. - P. 12

인간이 죽음의 세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좀비가 되는 것도 살아있는 인간들의 욕망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 소설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작가는 좀비와 대면한다는 것을 ‘허공을 들여다보는 일이고, 깊은 구멍을 들여다보는 일이고, 죽음과 마주하는 일이다.’라고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좀비를 통해 죽음을 마주하는 인간은 이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다.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살아있는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이용당하는 좀비만 등장할 뿐이다.

사람들은 ‘정작 알아야 할 것들은 알아내지 못하고, 알 필요가 없는 것들을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에 답해 보자. 단순한 호기심은 본능에 가깝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과 알 필요가 없는 것들을 구별이나 하며 살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홍혜정의 과거나 고리오마을에 대해 주인공이나 뚱보130은 알 필요가 있었을까, 없었을까. 소설적 진실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삶의 욕망을 넘어 선 곳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숨김과 감춤의 미학이 아니라 드러내고 싶은 작가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진실’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 것일까. 소설은 진실한가, 아니 인간이 아닌 좀비들은 그 진실을 알고 있을까.

"진실이 아무런 가치도 없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진실은 그저 사실의 한 종류일 뿐이에요."


100924-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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뺨에 서쪽을 빛내다 창비시선 317
장석남 지음 / 창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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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해 봄 불 타기 전 낙산사 뒷방에 얼마쯤 머물자고 청했을 때 스님 한 분, 밥값으로 종두일을 권했으나 그만 못하고 말았는데 이제 와 후회한다
- ‘어느해 낙산사 새벽종 치는 일을 권해 받았으나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함’ 중에서

*종두 : 절에서 종 치는 일을 하는 사람

말년에 시골에 가 텃밭이나 일구고 낚시나 하며 자연을 벗삼아 여유있게 살고 싶은 게 꿈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어이없어 하는 농부나 어부의 심사를 헤아려 보자. 사는 일이 덧없고 한 점 구름처럼 사라져버리는 시간 앞에서 인간의 육신과 현실의 삶은 그저 덧없기만 하다. 허무주의적 태도가 아니라 욕망에 대한 전혀 다른 관점에 대한 고민이다. 우리는 얼마나 더 원하는가.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등에서 보여주었던 장석남 시인의 관심은 『뺨에 서쪽을 빛내다』에서도 변함없이 계속된다. 사람들은 더 이상 ‘사랑’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말은 반어이거나 역설이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미래가 불안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을수록 사람들은 ‘사랑’을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모태신앙처럼 남들보다 ‘사랑’을 더 많이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뺨의 도둑

나는 그녀의 분홍 뺨에 난 창을 열고 손을 넣어 자물쇠를 풀고 땅거미와 함께 들어가 가슴을 훔치고 심장을 훔치고 허벅지와 도톰한 아랫배를 훔치고 불두덩을 훔치고 간과 허파를 훔쳤다 허나 날이 새는데도 너무 많이 훔치는 바람에 그만 다 지고 나올 수가 없었다 이번엔 그녀가 나의 붉은 뺨을 열고 들어왔다 봄비처럼 그녀의 손이 쓰윽 들어왔다 나는 두 다리가 모두 풀려 연못물리 되어 그녀의 뺨이나 비추며 고요히 고요히 파문을 기다렸다


뺨‘의’의 서쪽을 빛내는 것도 아니고 뺨‘에’ 서쪽을 빛낸다는 제목을 한참 들여다보며 그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제목만으로도 깊은 인상을 남겼던 전작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해가 저무는 시간을 방향을 나타내는 서쪽을 뺨에 빛낸다는 말은 소멸에 대한 아쉬움, 이별 직전의 안타까움이 배어있다.

여전히 부끄럽고 두근거리는 그녀 혹은 그의 뺨을 생각해 보자. 발그스름하게 빛나던 그 고운빛을 떠올려 보자. 그것이 바로 뺨이 가장 빛나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시인은 그 사랑의 순간을 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닌가.

묵집에서

묵을 드시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시는지
묵집의 표정들은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

나는 묵을 먹으면서 사랑을 생각한다오
서늘함에서
더없는 살의 매끄러움에서
떫고 씁쓸한 뒷맛에서
그리고

아슬아슬한 그 수저질에서
사랑은 늘 이보다 더 조심스럽지만
사랑은 늘 이보다 위태롭지만

상 위에 미끄러져 깨져버린 묵에서도 그만
지난 어느 사랑의 눈빛을 본다오
묵집의 표정은 그리하여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


묵집에서도 사랑을 보는 것이 시인의 눈이고 양념간장부터 찾는 것이 우리들의 눈이다. 서글프지는 않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세계를 인식하느냐의 문제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사랑이 얼마나 조심스럽고 위태로운지 그것만 생각하면 되지 않겠는가. 시인의 시를 통해 미끄러져 깨져버린 묵에서 조차 어느 사랑의 눈빛을 빌려오면 되지 않겠는가. 그것이 시 읽기의 즐거움은 아닐는지.

찬 바람이 불고 어둠이 내리면 사람들은 하나둘씩 따뜻하게 불켜진 집으로 돌아간다. 이제 가을은 오자마자 뒷모습을 보일 터이고 어둠은 깊어만 갈 것이다. 뺨에 서쪽을 빛내던 사람도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가고 모두가 혼자 남겨지는 시간을 감당해야 할 시간이 온다. 그것을 ‘석류 익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석류 익는 시간

당신은 내게 비단을 주니

그걸 눈에 두르고
더듬어서 내 맘속 둥그런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보네

항아리에 늘 허공이나 담아두는 당신의 뜻을 모르니
붉은 비단이나 두 눈에 곱게 두르고 들어가보면 알려나?

하늘이 온통 노을로 꽃핀
이 부러진 듯 시디신
석류 익는 시간

가슴 속에 ‘허공’을 담고 싶다는 것도 또 하나의 이기적인 욕망에 불과할지 모른다. 간절함 만큼 어리석은 감정이 또 있을까. 그것은 비움과 채움의 문제와 조금 다르지만 결국 붉은 비단이나 두 눈에 곱게 두르고 들어가보는 일과 다를 바 없다. ‘시디신 석류 익는 시간’은 견뎌내야 하는 생의 어느 한 순간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모든 순간일 수도 있다.

죄의식이나 부끄러움보다 사랑과 연민에 대해 마음의 갈피들을 짚어내는 시인의 목소리가 큰 울림을 갖는 것은 장석남의 특징이며 독자들에게 가장 적확하게 시를 보여줄 수 있는 그의 능력이다. 잘 할 수는 것을 계속 잘 하는 것도 하나의 미덕이다. 나이가 들고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 다른 생각, 다른 대상들이 눈에 들어오고 마음의 변화가 다르게 표현될 수도 있겠다. 그때 독자들은 또 다른 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뿐.

지나버린 ‘처서’에 나는 무엇을 꺼내 말렸을까?

처서

마른 빨래는 방안으로 던지고
덜 마른 빨래들을 처마 아래 건다

나뭇잎이 쩡쩡 소리내며 물든다

전기 검침원의 오토바이 소리 오솔길을 미끄러져 내려가고
나는 바지춤이 풀린 줄도 모르고 그를 배웅했다

담장 밖에 아무렇게나 몸 버린 구절초는 구절초
빈 몸의 옥수숫대 끝에서 새가 울어
건너 산이 건너온다

이해가 가지 않던 일들 몇 내놓기 좋다
덜 마른 빨래를 한번 더 손에 쥐어본다

장마에 젖은 옷이나 책을 음지에 말리기도 했다는 처서가 이쯤이어야지 싶다. 짱짱한 햇빛에 내다 말리지 못하고 그늘에서 천천히 말려야 하는 것들이 있다. 우리들 마음 속에도.

빳빳하게 마른 빨래처럼 건조하고 상쾌하기만 한 인생이 어디 있을까. 매일매일 우울하고 습한 일들이 벌어지는 일상은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다. 젖은 빨래를 처마 밑에 널 듯 힘들고 괴로운 일들은 조금씩 내어 말려야 한다. 시인은 천업인 ‘시’를 다 지운다는 말로 이 시집을 닫는다. 그것은 소멸이 아니라 자유이다. 있는 것을 없앤다는 뜻이 아니라 경계를 지우고 시의 말들을 자유롭게 풀어 놓고 싶다는 말이 아닐까. 그래서 비어있음 즉 ‘공복을 즐기’고 싶다고 한 것은 아닐까.

비움으로 차오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우리에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 그리고 그것이 얼만 소중한 경험인지 깨닫는데 또 얼마나 많은 세월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시를 다 지우다

새벽빛도
홑겹만 남고

시인으로서도 참으로 오랜만에
새벽뿐인 자리에 떨고 앉아
공복을 즐기다

언제 스민 건가?
먹물 스민 손톱을 보며
그믐달처럼 웃는다

공복 창자의 이랑마다
무슨 꽃씨를 뿌릴까
무슨 망아지를 풀어볼까

시의 나라의 국경을 부수고
시의 마을의 약도를 지우고
시를 지우고
시의 자리에 앉아
어라,
아침이 와서
함께 덜덜 떨다



100922-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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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10-09-23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묵집에서 를 읽으면 아슬아슬하고 위태위태하던 그 어느 시절의 사랑의 눈빛이 아른거리며 떠오르곤 하더군요.

sceptic 2010-09-28 23:21   좋아요 0 | URL
이제 호젓하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