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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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떤 개념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하지 못하면 그것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라는 리처드 파인만의 말은 새겨 둘만하다. 우리는 매일매일 수많은 지식을 얻는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명료한 시선과 냉철한 판단력으로 그것들을 분류하고 정리하며 개념화시키지 못한다. 지식과 정보의 양보다 질을 따져야 한다. 독선적이지 않은 범위 안에서 자신만의 범주와 기준이 마련되어야 하고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앎의 세계를 넓혀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면에서 유시민은 두 얼굴의 사나이다. 지식인과 정치인. 이제 어떤 사람으로 분류하느냐는 그의 향후 행보에 달려있거나 국민의 선택에 달려있다. 스스로 걷는 길도 중요하지만 공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했다면 공인의 선택도 그만큼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지식 소매상으로 자처하며 글을 써 온 유시민은 정치적 수사보다 그의 수많은 글을 통해 먼저 만났다. 노무현과 함께 떠오르는 정치인이 되어 국회의원, 보건복지부 장관을 거쳐 이제는 차기 대권 후보로 거론되는 영향력 있는 정치인이 되었다.

면바지를 입고 국회 본회의장에서 야유를 받던 청년 유시민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어린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고 양복에 넥타이를 맨 공장에서 찍어낸 어른들의 모습과 달랐기 때문이다. 평생 흰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한 벌 양복을 입은 모습으로 학교에 출퇴근했던 아버지처럼 유시민의 아버지도 학교 선생이었단다. 명민했을 어린 시절의 모습, 똘망똘망한 눈으로 책을 들여다보는 귀여운 모습이 떠오른다.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그가 웃음 많은 장난꾸러기의 모습과 오버랩 되는 이유를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에 그가 들고 나온 책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적어도 내게 각인된 유시민의 이미지다. 차가운 철창 안에서 ‘항소이유서’를 쓴 20대의 청년, 경제와 역사와 철학을 넘나드는 지식 소매상, 유려한 문장과 명쾌한 논리로 설득력 있게 독자를 사로잡는 베스트셀러 작가, 진보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차세대 대권주자가 된 정치인.

『국가란 무엇인가』는 지난 겨울부터 그의 트위터를 통해 집필 소식을 언뜻언뜻 알게 된 책이다. 이 책의 내용은 큰 틀에서 이전에 유시민이 쓴 책의 맥락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양한 지식의 향연을 즐길 수 있는 책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인류가 쌓아온 지적 토양을 자양분 삼아 2011 대한민국의 현실을 짚어 볼 수 있도록 일곱가지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홉스의 『리바이어던』으로 시작되어 박상훈의 『정치의 발견』에 이르는 지적 성찰의 과정이다. 대략 40 여권의 책을 인용하고 분석하며 현재 대한민국을 이루고 있는 정치, 사회적 토대를 정치하게 살펴보는 유시민의 안목은 명료하다. 파인만의 말을 적용하자면 개념 있는 지식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던진 일곱 개의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이끌어 냈던 책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국가란 무엇인가?
- 홉스, 『리바이어던』
- 버트런트 러셀, 『사람들은 왜 싸우는가』
- 카야노 도시히토, 『국가란 무엇인가』
- 마키아벨리, 『군주론』
- 존 로크, 『시민정부론』
- 애덤 스미스, 『국부론』
- 데이비드 흄, 『도덕감정론』
- 장 자크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시민정부에 대한 저항」
- 마르크스, 엥겔스, 『공산당 선언』
-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2. 누가, 어떤 사람이 다스려야 하는가?
- 앨빈 토플러, 『권력이동』
- 플라톤, 『국가』
- 맹자, 『논어』
3. 애국심은 고귀한 감정인가?
- 피히테, 『독일 국민에게 고함』
- 톨스토이, 『국가는 폭력이다』
- 에르네스트 르낭, 『민족이란 무엇인가』
-다카하시 데쓰야, 『국가와 희생』
4. 혁명이냐, 개량이냐?
- 헤롤드 J. 라스키, 『국가란 무엇인가』
- 카를 포퍼, 『열린 사회와 그 적들 Ⅰ, Ⅱ』
- 케인즈, 『고용, 이자 및 화페의 일반이론』
- 하이에크, 『노예의 길』
5. 진보정치란 무엇인가?
- 소스타인 베블런, 『유한계급론』
- 김상봉, 박명림, 『다음 국가를 말하다』
- 이남곡, 『진보를 연찬하다』
- 막스베버, 『직업으로서의 정치』
-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시민의 불복종』
- 프랑수아-자이에 메랭, 『복지국가』
6. 국가의 도덕적 이상은 무엇인가?
- 라인홀트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적 사회』
-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7. 정치인은 어떤 도덕법을 따라야 하는가?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비판』
- 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정치』
-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민당의 과제』
-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 박상훈, 『정치의 발견』

맺음말
- 프랜시스 후쿠야마, 『강한 국가의 조건』

이 책들 중 대략 삼분의 일을 읽었고 하이퍼링크 책읽기를 통해 읽어야 할 책 몇 권이 목록에 추가되었다. 인용한 책에 대한 사전 지식이나 정보가 전무한 사람에게 이 책은 인류의 정치 사상사를 소개받는 책으로 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 어찌됐든 책은 책을 부르고 또 하나의 새로운 개념과 논쟁을 촉발하는 역할을 하기 바랄 뿐이다.

용산참사 이야기를 통해 ‘국가’의 의미와 역할을 고민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결국 진보자유주의를 주창하는 유시민의 생각과 주장들이 곳곳에 배어 있다. 자유와 정의가 양립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예약본 표지에 선명하게 손글씨로 인쇄된 ‘시민은 자유롭게 국가는 정의롭게’가 이 책을 웅변한다. 진보자유주의자 유시민의 생각은 ‘국가’에 집중된다. 국가의 역할과 의미를 생각하며 정부와 국가의 관계를 짚어보고 도대체 어떤 정부를 가져야 우리가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그것은 정치인 유시민의 바람이 아니라 바로 모든 사람의 꿈과 희망이다. 하지만 현실은 책 속의 이론과 일치하지 않는다. 바란다고 해서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이 책에의 핵심은 ‘진보정치’에 있다. 쉽게 말하자면 자유주의와 진보주의의 연합을 제안하는 것이다. 실제 선거에서 막강한 파괴력을 보여주기도 했고 현실적인 대안으로 논의되기도 하지만 사람의 생각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산을 옮기는 것보다 어렵다. 향후 유시민의 정치적 행보와 정치 현실을 생각해 보면 이 책의 의미가 새로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문제는 남는다. 이 책을 지식인 유시민의 책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정치인의 책으로 볼 것인가. 내용의 갈피들을 살펴보면 유시민의 정치적 이상과 포부 그리고 개인적 고뇌를 읽어낼 수 있다. 독자들의 판단과 행동은 물론 책이 아니라 현실이다. 이 책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현실적인(?) 힘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사유과정과 지식 소매상으로서 안내자 역할을 기대해 본다. 그가 앞으로 어떤 자리에서 무슨 일을 하든 그 바람은 순진한 독자의 바람일지도 모르지만.

이 책을 통해 수많은 인류의 지적 자산을 섭렵하고 현실 정치에 대해 고민해 보는 기회로 삼는다면 충분하다. 책과 현실, 그것은 영원한 애증의 관계이다. 지식은 실천이지만 현실을 위한 도구로만 볼 수 없고, 책 속에만 갇힌 지식 또한 무의미할 뿐이다. 국가는 우리에게 무엇이고 나는 또 어떤 현실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바로 나의 생각과 행동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110424-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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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배신 - 긍정적 사고는 어떻게 우리의 발등을 찍는가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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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긍정’ 신드롬. 컵에 물이 반쯤 남아 있으면 반밖에 안 남은 게 아니라 반이나 남아 있다고 생각하라는 가르침. 어려서부터 귀가 따갑게 들어왔던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그 거짓된 신화로부터 잠을 깨는 일은 쉽지 않다.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들에게 돌아오는 비난. ‘넌 왜 그렇게 부정적이야?’, ‘왜 매사에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지?’, ‘그래서 대안이 뭔데?’, ‘왜 빨간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는 거야?’, ‘그래봐야 네게 득 될게 없잖아?’, ‘왜 인생을 그렇게 살아?’, ‘좋은 게 좋은 거 아냐?’, ‘세상 모나게 살지 마’, ‘적을 만들어서 좋을 거 없잖아?’ 주변에서 흔히 들어본 이야기거나 남에게 충고한 말들이 아닐까?

연초에 일본인 작가가 쓴 『긍정의 심리 스위치』에 대해 혹평을 하자 담당 편집자가 덧글을 남겼다. 읽지 말라고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맞는 말이다. 침묵하고 외면하면 내게 불이익이 돌아오지 않고, 적어도 적을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선택은 잔인한 법.

우리는 평생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교육받는다. 어느 교실 책상 이름표마다 ‘positive mind’라고 써있다. 담임선생님이 권유하는 생각의 방식이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지만 ‘비판적으로 사고하라’는 주문은 교육과정이나 국어교과서에서 ‘비판적으로 읽기’를 제외하면 찾아보기 힘든 단어다. 여기에 주의해야 할 것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긍정’이 ‘희망’으로 치환되는 지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암묵적으로 긍정적이라는 말은 희망적이라는 말로 전환되며 비판적이라는 말은 부정적이라는 뉘앙스로 인식된다. 과연 그럴까?

유방암 판정을 받고 온통 미국식 긍정주의를 경험한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긍정의 배신』은 너무 늦게 나온 책이다. 알맹이 없는 『생각버리기 연습』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현실은 사람들에게 치열하고 깊은 고민 대신 운명에 순응하고 내가 어쩔 수 없는 세상사를 외면하며 내 마음의 평화를 찾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싶은 사람들의 열망이 반영된 결과이다.

끝없이 확대 재생산 되는 ‘긍정주의’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 용기를 내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보았기 때문에 생긴 용기일까. 저자는 이 책에서 ‘긍정’은 일종의 자기최면이나 마약에 비유한다. 정말 마음이 달라지면 현실도 달라질까? 냉정한 자기 분석과 합리적인 상황파악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준비와 계획조차도 ‘긍정’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것일까.

『시크릿』,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마시멜로 이야기』 종류의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나로서는, 네가 마음먹기에 달렸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며 스스로 조금만 노력하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고 성공이 보장된다는 믿음이 마치 또 하나의 종교처럼 보인다. 손해 볼 건 없으니 어차피 똑같은 결과라면 마음이라도 편안하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왜 나쁜가, 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그 불안과 공포에 기댄 긍정이 과연 우리 삶을 어떻게 바꿔 놓고 있는지 꼼꼼하게 살펴본다.

저자는 미국의 현실을 이야기하지만 우리의 현실도 크게 다를 바 없다. 토론과 창의성을 키우는 대신 오지 선다와 정답을 요구하는 수능시험. 획일적 사고와 체제 순응적인 교육의 틀은 다양성을 억압하고 비판적 사고와 합리적인 문제제기를 ‘버릇없음’, ‘교사에 대한 권위 도전’, ‘삐딱한 시선’ 등으로 치부한다.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내용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물론 문화적 환경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정작 가르쳐야 할 것은 잘못을 외면하고 나의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아니라 객관적인 판단력과 냉정한 비판의식 그리고 스스로 움직이는 실천의지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은 낙관주의의 어두운 뿌리를 들여다본다. 역사적 배경을 통해 불평을 금지하고 긍정심리학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기업, 종교, 학계에서 이것을 어떻게 이용하고 산업화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동전의 양면처럼 모든 일에는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이 있다는 적당한 판단은 미뤄두고 어떤 현상에 대해 합리적으로 판단해 보자. 우리는 비합리적인 마음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뇌’는 늘 거짓말을 하고 생각은 오류에 빠지기 쉽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낙관과 긍정의 힘이 인간의 삶을 오히려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저자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책의 말미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우리가 종교처럼 받들고 있는 돈의 힘, ‘경제’가 무너질 수도 있다. 그러니 어찌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한 권의 책이 어떻게 신화처럼 굳어진 긍정과 낙관을 물리칠 수 있겠는가. 그것이 그렇게 나쁜 것인지, 문제가 있는 것인지 논란과 의심의 대상으로 만들어 주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저자의 말대로 ‘긍정적 사고는 모든 사람에게 부여된 의무가 되었다’(140쪽)고 생각하는 시대에 경종을 울리는 이 책은 모든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거꾸로 문제의식을 갖거나 왜라는 의문을 갖는 사람들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꾸는 게 아닐까. 나의 성공과 이익을 위해 긍정과 낙관으로 무장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고통스런 현실을 잊기 위한 방편으로 혹은 미래에 대한 근거 없는 희망으로 자신을 내모는 것도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이 책을 통해 가슴이 아닌 머리가 하는 이야기도 들어보자. 머리로만 살 수 없어도 맹목적으로 가슴만 따라갈 수는 없지 않은가.


110419-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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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독자들은 이렇게 읽었다! -
    from 도서출판 부키 2011-04-26 16:52 
    긍정의 배신 독자 리뷰 모음 독자들은이렇게 읽었다! 긍정? 혹은 부정? 편집자 주 : 책이 출간되면 가장 기다려지는 건 독자들의 반응입니다.긍정의 배신의 경우판매량이 매우 높음에도 불구하고독자들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내심 애를 태우기도 했습니다.왜긍정의 배신은 독자 리뷰가많지 않은 거지? 하며간단한 논의를 하기까지 했어요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창비시선 326
천양희 지음 / 창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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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를 달리는데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던 무언가가 ‘툭’ 끊어지는 미세한 감각이 발 끝에 전해진다. 그러더니 속도가 줄고 엑셀이 말을 듣지 않는 낭패. 다행이 차량이 뜸했고 금방 갓길에 세울 수 있었지만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엔진의 피스톤 운동시 밸브의 타이밍을 조절하며 연료를 조절해주는 벨트가 끊어진 것이었다.

예기치 않은 견인. 누가 10분 후를 예측하며 살 수 있단 말인가. 인터체인지 입구 카센터에 내려 길가에 심어 놓은 수선화를 한동안 들여다본다.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정호승의 시구절이 떠올랐다. 봄햇살을 받으며 노란 꽃을 피운 수선화에게 인사를 건네고 하릴없이 다음 일정을 조정하며 오랜만에 무료한 정적 속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는 천양희의 시를 오랜만에 맛보는 귀한 시간이었다. 세상에 많은 시인이 있으니 수많은 시가 명멸하고 읽히지도 않고 스러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에서 천양희 시인은 축복받은 시인이 아닌가 싶다. 시대정신을 담아내는 시부터 서정시 본연의 자리를 지키는 시에 이르기까지 이 시대에도 시는 여전히 제 갈길을 걸어보지만 독자의 귀에 들리는 소리는 조금씩 달라질 수밖에 없다. 시는 언제까지 쓰고 읽히게 될까, 문득 궁금해진다. 미국에서 전자책의 매출이 종이책을 처음으로 앞질렀다는 충격적인(?) 소식 때문일까, 시는 더욱 아득해진다.

새가 있던 자리

잎인 줄 알았는데 새네
저런 곳에도 앉을 수 있다니
새는 가벼우니까
바람 속에 쉴 수 있으니까
오늘은 눈 뜨고 있어도 하루가 어두워
새가 있는 쪽에 또 눈이 간다
프리다 칼로의 「부서진 기둥」을 보고 있을 때
내 뼈가 자꾸 부서진다
새들은 몇 번이나 바닥을 쳐야
하늘에다 발을 옮기는 것일까
비상은 언제나 바닥에서 태어난다
나도 그런 적 있다
작은 것 탐하다 큰 것을 잃었다
한수 앞이 아니라
한치 앞을 못 보았다
얼마를 더 많이 걸어야 인간이 되나*
아직 덜 되어서
언젠가는 더 되려는 것
미오나이나 미로 같은 것
노력하는 동안 우리 모두 방황한다
나는 다시 배운다
미로 없는 길 없고 미완 없는 완성도 없다
없으므로 오늘은 눈 뜨고 있어도 하루가 어두워
새가 있는 쪽에 또 눈이 간다

* 밥 딜런의 노래에서.


모든 문학은 개인적 상황과 감정에 이입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문학이 문학인 이유는 현실 밖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배설구가 아니라 또 다른 세계를 인식하는 창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천양희의 시를 읽다가 문득, 호흡을 가다듬고 한동안 상념에 빠지거나 처음부터 다시 읽어본다. 그리고 소리 내어 되새긴다. ‘비상은 언제나 바닥에서 태어난다’

세상에 참 좋은 말은 얼마나 많은가. 풍성한 말잔치를 통해 그럴듯한 이미지와 언어유희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결국 시는 독자의 직, 간접적 경험과 조우하는 순간 오롯이 가슴에 새겨진다. 시를 읽는 즐거움은 다양하다. 시집 한 권을 통해 시인의 생각과 세월의 흐름을 읽을 수도 있고 한 편의 시에서 단 한 구절이 평생 가슴에 남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시가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참 좋은 말

내 몸에서 가장 강한 것은 혀
한잎의 혀로
참, 좋은 말을 쓴다

미소를 한 육백개나 가지고 싶다는 말
네가 웃는 것으로 세상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
오늘 죽을 사람처럼 사랑하라는 말

내 마음에서 가장 강한 것은 슬픔
한줄기의 슬픔으로
참, 좋은 말의 힘이 된다

바닥이 없다면 하늘도 없다는 말
물방울 작지만 큰 그릇 채운다는 말
짧은 노래는 후렴이 없다는 말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말
한송이의 말로
참, 좋은 말을 꽃피운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란 말
사라지는 것들은 위에 여백을 남긴다는 말
옛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꾸 온다는 말


우두커니 봄이 가고 여름이 올까? 그리고 내년이 오고 십년이 흐를까?
나는, 우리 모두는 어처구니가 아닐까?

어처구니가 산다

나 먹자고 쌀을 씻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꽃 다 지니까
세상의 삼고(三苦)가
그야말로 시들시들합니다

나 살자고 못할 짓 했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잘못 다 뉘우치니까
세상의 삼독(三毒)이
그야말로 욱신욱신합니다

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욕심 다 버리니까
세상의 삼충(三蟲)이
그야말로 우굴우굴합니다

오늘밤
전갈자리별 하늘에
여름이 왔음을 알립니다


나이와 세월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시도 있다. 아니, 젊다면 쓰지 않을 시도 있는 법이다.


순서가 없다

늙음도 하나의 가치라고
실패도 하나의 성과라고
어느 시인은
기막힌 말을 하지만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마음을 잡아야 한다고
어느 선배는
의젓하게 말하지만

마음은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것
마음은 잡아도 잡아도 놓치고 마는 것
너무 고파서 너무 놓쳐서
사랑해를 사냥해로 잘못 읽은 사람도 있다고
나는 말하지만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점에서
고통은 위대한 것이라고
슬픔에게는 누구도 이길 수 없다고
다시 어느 시인은
피 같은 말을 하지만

모르는 소리 마라
몸 있을 때까지만 세상이므로*
삶에는 대체로 순서가 없다

*황지우의 시「피크닉」에서.


한 호흡이 아니라 긴 호흡으로 읽어야 하는 책이 있다. 시집은 한 시간만에 읽는 짧은 책이 아니라 두고두고 오래오래 곱씹어야할 의미로 가득해야 한다. 천양희 시인의 시들은 무엇보다 오래오래 생각하며 읽게된다. 나만 그런가?

생각은 강력한 마약

생각은 구름처럼 뿌리가 없다
생각하다 흩어진다
생각이 화근이 된 뒤부터
가끔 생각 없이 하루쯤 지나간다
지나간 것은 지나갈 수밖에 없는 것
생각 어디에 고비가 있는 것도 같다
세상에 생각처럼 강력한 마약이 있을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생각의 중독
생각하다 사람들의 깊이 괴로웠으므로 웃음을 고안했고
깊이 생각했으므로 신은 죽었다고 폭탄선언한 사람도 있다
생각을 껌처럼 씹다 뱉고
생각이 우산처럼 폈다 접힐 때
생각 끝에 나는 겨우
백사장에 생각 짧은 치욕을 썼다 지웠다
한줌 모래가 어찌
하루에도 천년을 사는 생각만 할까
생각해보면
나를 살게 한 건 생각 끝에 나온 생각이다
너를 생각한 것이 나를 살렸다 시여!
생각에 기대 시를 생각해내는 밤
생각은 오늘 나의 다짐이니
생각은 나를 따르고 시를 뒤따른다
바닥까지 생각의 허리 구부리고
이제 막 시 한짐 밀고 갈 시간이다
생각에는 먼 것이 있고
나에게는 생각이 있다


오늘도 옷깃을 여미며 하루를 살았다. 기약 없는 내일이 다가온다.

옷깃을 여미다

비굴하게 굴다
정신차릴 때
옷깃을 여민다

인파에 휩쓸려
하늘을 잊을 때
옷깃을 여민다

마음이 헐한 몸에
헛것이 덤빌 때
옷깃을 여민다

옷깃을 여미고도
우리는
별에 갈 수 없다



110417-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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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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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작가들에게 주어진 숙명같은 질문이다. 문학의 숲에 발을 들여놓은 작가들에게 이것은 가장 본질적이며 궁극적인 화두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탄생처럼 작가도 자신이 속한 시대와 인종과 국가를 선택할 수 없다. 자신의 삶을 통해 터득한 경험과 사유의 과정이 곧 문학이 되고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현실을 반영한다.

공시적, 통시적 관점에서 문학의 보편성은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탐구에서 비롯된다. 문화적 특수성은 소설의 바탕을 이루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관계, 사회적 존재로서의 행동, 역사적 사건에 반응하는 태도, 삶의 의미와 목적을 고민한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은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내밀한 탐구이며 작가의 삶에 대한 아픈 성찰이다. 20세기 초 일본에 태어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다자이 오사무는 이 소설을 통해 모든 인간의 속성을 되묻고 있다. 독자들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제각기 다른 방식을 보이겠으나 나는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며 타인과의 관계망 속에서 그 의미를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의 성격과 취향, 신체적 특징과 속성은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선택이 아닌 운명처럼 삶의 조건을 가지고 태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첫 번째 비극이지만 출생 이후의 조건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폭넓은 선택적 삶은 인생을 흥미진진하게 만든다. 서로 다른 생김새와 기질,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인생은 고칠 수 없는 한 편의 드라마를 만들어간다. 우리는 오늘 어떤 단막극을 만들었는지 돌아보자.

이 소설의 1인칭 주인공은 타인과의 관계를 비극으로 파악한다. 불신가 본질이고 불안한 쇤뢰는 서로를 기만하는 삶의 처세술이라는 것이 작가가 말하는 인간의 관계 양상이다. 과연 그런가. 주인공은 기질적으로 숫기 없고 심약하지만 익살스런 행동과 출중한 외모로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본질적 속성과 거리가 먼 광대놀음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매일매일 어떤 거짓과 위선으로 상대를 속이고 자신조차 완전하게 기만했는가.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 27쪽

일반적인 기준으로 삶을 재단할 수는 없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를 스스로 선택했다면 그것이 비록 남루할지라도 연민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본질을 들여다 보아야 하는 순간이 온다. 나이를 불문하고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갖고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주인공 요조는 아주 어린 시절에 이미 자신의 실체를 알아챈다. 작가 자신이면서 인간 삶의 비루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소설의 주인공은 실존적 고민으로 생을 탕진한다.

위대한 고전에서 설파하고 있듯 ‘사랑’만이 생의 허무를 극복해 주는 유일한 희망이 될 수 없다. 요조는 가족을 벗어나 주변인물을 통해 새로운 삶을 선택하지만 그것은 선택이 아닌 운명처럼 파국을 초래한다. 누구의 잘못도 선택도 아닐 수 있는 인간의 삶은 도대체 어떠해야 하는 것일까. 욕망에 충실하고 자신을 속이지 않는 삶이 가능하단 말인가.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들은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게 된다.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고 있는가.

일본 작가의 중편소설 하나를 읽는 동안 보이지 않는 인간의 밑바닥과 사회적 관계 속에 숨어 있는 위선과 이기적 욕망들이 난마처럼 엉켜버린다. 누구 한번쯤 자신의 삶을 탕진하고 싶지 않았을까. 인간의 역사는 가장 냉혹한 전쟁이 아니었나. 그렇다면 끝없이 충돌하는 선과 악의 대립을 통해 우리들의 내면,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탐구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기적 본능과 이타적 욕망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는 철학적 탐구와 윤리적 잣대로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끝끝내 희망을 보이지 않고 마무리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의 나이는 스물 일곱. 정신병원에 갇혀 쇠창살 밖으로 내다보는 세상의 풍경은 마치 우리가 감옥에 갇혀 허우적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것 같은 담담한 고백적 문체는 오히려 쇠창살 안과 밖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마음의 감옥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요조들을 위하여 작가는 마지막으로 위로의 말을 던진다. 순수하고 진실한 것에 대한 갈망! 하지만 그 위로는 거대하고 암울한 그림자처럼 우리의 목을 조이는 듯하다. 이렇게,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 134쪽



110414-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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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의 거짓말 - 무엇이 우리의 판단을 조작하는가?
마이클 캐플런 & 엘런 캐플런 지음, 이지선 옮김 / 이상미디어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생각 없이 존재하는 것은 어리석음이 아니다. 그것은 짐승과 연체동물 그리고 신들의 달콤하고도 즐거운 어리석음일 것이다. 하지만 생각을, 그것도 어리석은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 앙리 드 몽테블랑 <타르네>

‘사람들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도 모자라 실수를 통해 무엇을 배우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면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이후에 어떤 내용이 전개된다 할지라도 평소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문장으로 표현한 작가의 글을 읽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지는 책들의 방향과 내용은 그 시대를 상징한다. 인간의 뇌와 심리에 관한 책들이 최근 몇 년간 출판의 한 축을 이루는 듯하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믿지 못하고 타인의 심리가 그만큼 궁금하다는 반증이다.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동물이라고 믿고 싶지만 인간의 판단과 행동은 그렇지 못할 때가 훨씬 더 많다. 컴퓨터처럼 논리적이고 정확하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싶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꾸준한 노력에 따라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합리적인 판단력과 이성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지만 훈련만으로 길러질 수 없는 능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뇌의 거짓말』은 인간의 수많은 ‘실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이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것이라면 심리 치료를 받아야겠지만 당황스럽고 어이없는 것이라면 원인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저자는 인류의 역사 자체가 ‘비이성’과 함께 해 왔다는 사실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철학의 역사를 들여다보아도 신뢰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끝없는 탐구와 의심으로부터 인간의 이성이 발달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는 곧 계몽과 희망의 길찾기였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진화심리학이나 행동심리학으로부터 경제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생각을 분석하는 데 더욱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완전한 인간은 생각할 수 없겠지만 이렇게 생각의 오류를 찾아 헤매는 동안 우리는 조금 더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인류가 저질러온 실수에 대해 반성의 기회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생각의 패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이해하고 그 함정을 살피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끝없이 이어지는 실수의 원인을 지적한다. 우리가 ‘실수’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일상적으로 하는 행동에 어떤 오류가 있는지 지적하고 그것의 원인이 무엇인지 밝히는 일은 실수를 통해 무언가를 배우기 위함이다. 인간의 생각과 행동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그것은 오랫동안 축적되어 온 경험에 근거한다고 믿지만 사실 그것이 그리 믿을만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 하지만 ‘뇌’는 늘 거짓말을 한다. 스스로를 속이고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러한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 이 책은 적절한 도움을 준다.

지식은 무지와 마찬가지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 - 206쪽

넘쳐는 지식과 정보 사이에서 우리는 때때로 길을 잃는다. 하루에 벌어지는 일과 쏟아지는 정보들은 한 순간도 우리의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한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를 읽어내고 발빠르게 적응하는 것이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시대가 되었다. 그렇게 정확한 정보와 통계자료, 축적된 노하우와 지식을 바탕으로 판단하여 어떤 일을 결정하고 인생을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의 함정에 빠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너무 똑똑해서 멍청해지기 시작한 듯 인간은 하루에도 몇 번씩 실수하고 후회하고 경험하고 배운다. 하지만 그 시행착오도 우리의 ‘비이성’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인지함정에 빠져 왜곡된 현실을 보고, 순간적으로 판단 착오를 일으키며, 집단적 편견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때때로 혼란스럽다. 도대체 어떤 것이 옳은 것이며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인가.

도덕적 가치 판단은 모든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삶의 태도와 방법을 결정짓는 것인지도 모른다. 신경과학, 행동경제학, 진화생물학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인간의 실패와 좌절을 반추하며 가장 ‘인간적인’ 인간의 모습을 조명하는 저자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냉정하다. 여러 분과학문에서 다루어진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조합해 놓고 있기 때문에 위에 언급한 분야의 책을 보았거나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챙겨보아야 할 책이다.

하지만 문제는 남는다. 현상에 대한 분석과 정확한 해석만으로도 충분한 경우가 있지만 인간의 문제만큼은 정답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로 올바른 길과 대책을 명확하게 제시하지는 못한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다양한 논의와 문제제기를 확인하고 우리의 모습을 성찰하는 것이 끝없이 반복되는 실수와 시행착오로부터 무언가 한 가지를 건질 수 있는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그 다음은 각자의 몫이다. 인류의 역사와 인간에 대한 저자의 맺음말은 그래서 새겨 둘만하다.

우리는 무언가를 추구하기 때문에 실수하며, 가장 멀리 도달하려고 애쓰기 때문에 오히려 쉽게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의 이야기는 신학이나 생물학을 통해서가 아닌 역사를 통해 전해진다. 역사는 우리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분야지만, 우리의 결론들이 진실하다는 걸 입증할 수 없는 분야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작위성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며, 그 세상에 의미를 주입하려고 해쓴다. - 386쪽


11041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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