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 영혼 문학과지성 시인선 616
김복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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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듬한 시선

어린애인가

어린 여자애 맞나

저해상도 흑백 화면이 반사하는 것은 내 얼굴과

소녀처럼 작은 여자의 움직임

뭐 하는 거야

저 여자

카메라의 움직임을 따라

보니

원숭이가 여자 얼굴 가면을 쓰고 있었다

매끄러운 머리카락 젊은 처녀의 고요한 얼굴

가면을 씌운 것만으로 원숭이는 신비로운 어린 신 같았다

원피스를 입은 원숭이의 두 팔이

벌거숭이 아기 인형을 안고 흔든다

인형은 잠든 것처럼 얌전하고

죽은 것처럼 안전해 보인다

가면이

창밖을 비스듬히 내다보다 소파 쪽으로 천천히 돌아왔다

움직임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다르다

내면으로 가라앉지 않기 위해

여자와 소녀와 아기와 원숭이를

섞지 않기 위해

화면에

섞은 채

얼굴을 얹고

얼굴을 중심으로

비스듬히 앉았다 일어선다

*Pierre Huyghe, 「Untitled(Human Mask)」(2014).

가면을 쓴 원숭이들이 진화한 세상은 비극이다. 아니, 창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애처롭다. 천국과 지옥과 천사와 악마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다가 문득, ‘여자와 소녀와 아기와 원숭이’를 확인하는 찰나. 인생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거나 스스로 옭아맨 몇몇 프레임으로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더라도 시작과 끝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전에 자신을 속여 감옥에 갇히고 또 누군가는 풀려나 새로운 세상과 다시 만난다. 현실 속에서 마주치는 개별적 인간이 아니라 내 안에 숨어 있는 원숭이와 박쥐를 다시 만나는 순간, 그때가 오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이제 시집을 펼칠 만큼은 여유가 생긴 거라는 위로 정도면 충분하다.

박쥐들은 어디에 살아요?

빈 집에 드는 빛

빛은 낙원 밖에도 있지

빛에 야위는 것들은 무엇인지?

죽은 나무를 흔드는 바람

소리에 없는 마음과

마음에 없는 소리가

표정이 없는 대답과

대답을 잊은 표정이

절망과 물정을 아는 희망이

죽은 것처럼 보이는 나무에

걸어놓은 이름표를 읽듯이

노을 지나 내려앉는 박쥐들을 센다

저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 안 해요

박쥐들은 여기 살아요

이 몸속에는 뼈도 내장도 없고요

박쥐들이 옮겨 다녀요

손대볼래요? 뼈처럼 내장처럼 딱딱하거나 물컹할걸요

비명이 나올걸요

사람 귀에는 안 들릴 거지만서도……

죽은 것처럼 보여도 이 몸은 절대로 병원에 보내지 마세요

박쥐들을 위험하게 만들고 싶지 않거든요

천천히 나는 그 몸을 만져보았다

만지기 싫었지만

만져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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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망상의 시대 - 자기기만의 심리학
어맨다 몬텔 지음, 김다봄 옮김 / arte(아르테)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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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드 모파상의 「목걸이」나 『여자의 일생』을 읽었다면 그녀의 인생이 달라졌을까.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타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한 인간의 지나친 ‘욕망’은 범죄다.

합리성에 관한 판단을 넘어서 견고하게 자리한 판단 기준은 때때로 개인과 사회를 위험에 빠뜨린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직 종사자, 소수 권력자와 정치인들이 오히려 확증편향의 우를 범한다. 다양한 인지 편향cognitive bias을 인정하는 것이 자기 객관화의 시작이다. 사람과 상황을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던 지난 시간을 떠올려 보지만 여전히 쉽지 않다. 관점을 바꿨고, 시선이 달라졌으나 그것이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와 실천으로 이어졌다고 단언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그것이 인지적 무의식으로 작동하며 새롭고 낯설게 대상을 바라보고 상황을 파악하는 연습으로 이어져 질문과 의심을 멈추지는 않고 있다.

선악을 명확히 구분하는 확신과 신념은 때때로 ‘합리적 망상’이 된다. 인지 편향의 가장 주된 원인은 엄청나게 늘어난 정보다. 대학생 수준(chatGPT-3)에서 이제 박사(chatGPT-4) 수준으로 업그레이드 됐다는 인공지능을 24시간 뇌의 일부로 활용하며 사는 현대인들은 더욱더 자기 확신에 빠질 위험이 높다. “모른다”는 진술은 회피와 외면의 변명이 아니라면 내뱉을 일이 별로 없는 시대를 맞이한 게 아닐까. 조금만 찾아봐도 검색과 요약으로 핵심을 전달받을 수 있다면 누가 누구에게 뭔가를 가르치고 설명하는 일도 필요 없어질지 모른다. 학교의 기능, 학습의 형태, 공교육의 체계, 자격증과 전문성을 가늠하는 기준에도 상상할 수 없는 변화가 올 날이 멀지 않다.

어맨다 몬텔이 ‘주술적 과잉 사고’라고 명명한 개념은 유튜브에 절인 뇌를 가진 대다수 현대인에게 ‘잠시 멈춤!’이라고 외친다. 심리학에서 주로 다뤘던 11가지 인지 편향은 익숙한 개념들이다. 그러니 이 책 또한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렴풋한 문제를 선명하게 들여다보는 과정이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현상을 분석하는 대개의 저자들이 그러하듯 몬텔도 명쾌한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제시했더라도 모두에게 적용될 리 없다. 편향의 항목과 정도가 다를 테니 당연한 일이겠으나 모든 독서는 개별화 작업이다.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이 편할 리 없고, 남들 눈에 좋아 보일 리도 없다.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숭고하던 시절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이제 철 지난 추억담으로만 남았다. 문해력은 텍스트 뿐만 아니라 미디어를 넘어 사람과 상황에까지 적용돼야 한다. 무엇이든 읽어낼 수 있는 분석 능력과 그것들의 인과 관계를 파악하고 전체 맥락을 이해하는 종합적 통찰력을 기르지 않는다면 합리적 망상의 시대를 온몸으로 즐기는 사람이 될 것이다.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합리적 의심이 전제되지 않은 생각들, 아니 ‘의견들’은 하나의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옳다고 변명하거나 확신에 찬 신념으로 확정한다면 이름 없는 자기 종교에 불과할 것이다. 믿음에 관한 논쟁은 불가하니 서로를 존중하면 그뿐이지만 이들은 대개 타인의 생각과 판단은 ‘틀렸다’고 선언하기 일쑤다. 몬텔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 가득한 시대를 합리적 망상의 시대라고 명명한다. 편향을 인정하지 않는 다수의 사람들이 모인 집단, 그러한 시대는 공포스럽다.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가졌던 원시 시대 인류보다 폭력적이고 위험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그것이 아마도 이 책의 저자가 현생 인류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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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땅의 야수들 - 2024 톨스토이 문학상 수상작
김주혜 지음, 박소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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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시계 안에서조차 영원히 시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 아니 삶은 어떤가. 사물과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더구나 공시적 상상력은 저절로 만들 수 없다. 삼십 대 초반의 한국계 미국인 김주혜는 아홉 살에 이민 간 이방인이다.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강조하고 있으나 역사를 들여다보며 문학적 상상력을 키워낸 시간과 노력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한국인에게 다소 식상한 호랑이라는 문학적 알레고리는 오히려 세계 문학으로서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여전히 동방의 작은 나라, 그 전통과 문화가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의 이야기에 주목한 사람들보다 그 이야기를 잘 풀어낸 작가의 역량에 박수를 보낸다.

한국 사람이 아니라면 이 소설을 어떻게 읽을까, 라는 생각으로 끝까지 읽었다. 시대순으로 나열된 역사적 사건들, 익숙한 이름으로 번역된 인물들의 성격, 이야기의 구조와 스토리 전개는 개인적으로 흥미를 끌지 못했다. 이제 너무 많은 책들 사이를 헤매며 중첩되고 반복되는 사실, 구조, 캐릭터에 노출됐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새로움보다는 ‘낯설게 하기’에 성공한 책들이 반갑다는 점에서 작은 땅의 야수들은 한국인의 여집합에 해당하는 독자들에게 적당해 보인다. 아니다, 이 시대를 들여다보지 않은, 이제 막 역사와 소설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당대를 들여다보게 하는 촉매가 될 수도 있겠다.

1918년에서 1964년에 이르는 연대기적 서술에 부합하는 사건들은 꼼꼼한 고증과 디테일에 신경 쓴 흔적이 눈에 띈다. 87년생 미국인이 쓴 소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 몰입을 방해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2024년 톨스토이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접하지 않았다면 읽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대체로 일제강점기 조선의 현실을 담아낸 소설이다. 1964년을 그린 4부는 후일담처럼 읽힌다. 수많은 소설과 드라마와 영화에서 반복하는 시대라서 식상한 게 아니다. 잊을 수 없는 시간, 다시 경험하기 어려운 상황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을 것이다. 다만 그때, 그 사람들을 해석하고 바라보는 관점은 계속 변할 것이다. 무용하고 아름다운 걸 좋아한다는 말에 매혹됐던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이나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 같은 책들 사이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퍼즐을 맞추고 시간과 공간을 재현하며 과거가 현재로 이어지는 다리를 잇는다.

인간의 삶이, 아니 인류의 역사를 거대한 ‘흐름’으로 이해한다면 모든 텍스트는 입체적으로 구성되어 각각의 자리에서 유기적인 고리를 형성한다. 그것이 문학이든 역사든 철학이든 과학이든 예술이든.

김주혜는 한 겨울 흰 눈과 호랑이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한반도의 고난과 시대적 비극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각각의 인물이 누구를 닮았든 중요하지 않으며 외교관의 아내가 남편 친구와 불륜을 저질러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나혜석의 이야기가 뒤섞여 등장해도 사실과 픽션을 구분하는 대신 하나의 커다란 변화와 흐름으로 읽어내는 정도면 충분해 보인다. 실존 인물과 작은 시기적 오류를 따지는 건 소설을 재미없게 읽는 좋은 방법 중 하나다.

유미리의 『가족 시네마』, 이민진의 『파친코』처럼 외부자의 시선으로 그려낸 소설들은 자전거를 타고 국경을 넘는 유럽 작가들의 상상력과 차이가 많다. 건널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즐거움이 현실적 비극과 닿아 있다. 그것은 아마도 은실과 단이, 옥희와 연화, 정호와 한철, 김성수와 이명보, 야마다 겐조와 이토 같은 인물들 사이에서 오늘을 만든 근원을 확인하는 실존적 고통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겨우 백여 년 동안 우리에겐 무슨 일들이 벌어졌는가. 아니, 지금은 또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루가 일생인 하루살이만큼 찰나에 불과한 각자의 생은 무엇을 향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소설가는 시간의 갈피를 접어 새로운 공간과 인물을 창조하여 독자들에게 녹슨 청동 거울을 들이민다. 흐릿한 형체를 둘러싼 배경 혹은 확신에 찬 자신을 다시, 오랫동안 들여다보라고. 어떤 형태로든 시간은 흐르고 모든 사람은 무덤을 향해 전력 질주를 멈추지 않을 것이며 세상은 어떤 일이 벌어져도 앞으로 나아가며 밤이 찾아오고 또 해가 뜰 것이다.


하늘은 하얗고 땅은 검었다. - 첫 문장

언어 자체가 옥희를 유혹했다. 옥희는 특정한 단어들을 특정한 순서로 나열하면 자기 내면의 모습도 마치 가구를 옮기듯 달라진다는 것을 깨닫고 한 마리 춤추는 나비처럼 언어 속을 누볐다. 내면에 쌓이는 단어들이 계속해서 그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 가는 데도 외부에서는 누구도 그 차이를 감지할 수 없었다. - 68쪽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두 종류로 나뉘며, 대다수는 그중 첫 번째 범주에 속한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자신이 현재의 상태에서 성공을 향해 더 나아갈 수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한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 그러고 나면 자신의 삶에 주어진 운명을 합리화하고 그 자리에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 두 번째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인생을 마감할 때까지 자아의 상승과 확장을 조금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 말이다. - 388쪽

모두가 꿈을 꾸지만, 그중 몽상가는 일부에 불과하다. 몽상가가 아닌 다수의 사람들은 그냥 보이는 대로 세상을 본다. 소수의 몽상가들은 그들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달, 강, 기차역, 빗소리, 따스한 죽 한 그릇처럼 평범하고 소박한 것들도, 몽상가들은 여러 겹의 의미를 지닌 신비로운 무엇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에게 세상은 사진이라기보단 유화여서,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가장 바깥쪽에 있는 색깔만을 바라볼 때 이들은 영원히 그 아래 감춰진 색깔을 바라본다. 몽상가가 아닌 사림이 유리를 통해 보는 풍경을, 몽상가들은 프리즘을 통해 바라보는 셈이다. - 415쪽

연화는 거침없이, 결의에 차서 울었다. 다시 만들어지기 전에 먼저 흔적도 없이 녹아버려야 하는 사람처럼 울었다. - 536쪽

옥희는 생각했다.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작별을 고한다 해도 떠나는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서로가 수평선 너머 점이 되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상대를 향해 멈추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 540쪽

노년이란, 인생의 모든 행복이 앞으로 다가올 날들이 아닌 이미 지나간 날들에서만 발견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 552쪽

삶을 위해 지불하기에 죽음은 아주 작은 대가였다. - 552쪽

삶은 견딜 만한 것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잊게 해주기 때문에. 그래도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다. 사랑이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기 때문에. - 603쪽

살아가면서 처음으로, 그 어떤 것에 대한 소망도 동경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마침내 바다와 하나였다. - 마지막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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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는 인간을 먹고 자란다 - 인공지능 신화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노동자들
마크 그레이엄.제임스 멀둔.캘럼 캔트 지음, 김두완 옮김 / 흐름출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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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형 AI에서 에이전트 AI 시대로 넘어간다. 극소수 과학기술 종사자들이나 개발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터넷의 대중화를 넘어선 파도가 밀려온다는 희망 섞인 기대 혹은 일자리에 대한 공포가 혼재한 현실은 산업 혁명 시절 러다이트 이래 반복되고 있다. 이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면 마크 그레이엄과 제임스 멀둔, 캘럼 캔트의 이야기에도 귀 기울여보자.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가든 현실 적응 문제는 개인의 삶을 지배한다. 취향과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 생활의 문제로 진입한 AI 이야기다. 우간다의 데이터 주석 작업자, 영국의 머신러닝 엔지니어, 아이슬란드의 기술자, 아일랜드의 예술가, 영국의 물류 노동자, 미국의 투자자, 나이지리아의 노조 활동가 등 일곱 명의 ‘노동자’의 삶을 밀착 카메라로 들여다보는 이유는 자명하다. 곧 나와 너, 우리들의 모습일 예정이기 때문이다. 직종과 세부적인 업무가 달라도 AI가 미치는 거대한 파고를 넘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인류가 지난 200여 년 동안 자본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의 삶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해왔다면 이제는 AI로부터 소외될지도 모르는 인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일곱 명은 대표자가 아니라 사례에 불과하다. 전문직부터 단순 노무직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사회 변동은 인류의 삶, 인간의 생각과 태도를 일순간에 바꿔버린다. 전통적, 아니 각자의 세계관, 인간과 세상은 그러할 것이라는 일종의 관성적 태도와 믿음에 균열이 발생하는 건 오랜 학습과 사유의 과정을 거치기보다 충격적 경험과 하나의 사건 때문일 수도 있다.

원제는 ‘Feeding the Machine’는 AI가 인간을 먹고 자란다는 제목만큼 공포를 느끼게 한다. 일종의 사회적 경고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보통 사람들에게는 막연한 두려움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미래를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노동 환경의 변화에 대해서는 예의주시해야 한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구조와 기능은 이 역사적 변화를 모두 견디며 잉여가치를 몰빵 해왔다.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듯하지만 손 놓고 기다릴 수만은 없는 현실이다. 실제 노동 현장에서 겪는 고충, 우리가 겪어야 할 미래, 변화에 대처하는 태도가 모두 개인의 몫일 수도 없다. 다만 커다란 변화의 흐름을 읽는 안목과 비판적 사고는 언제나 나를 나로 살게 하는 기본적 덕목이다.

장밋빛 전망, 디스토피아적 경고를 넘나들며 조금 더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적응과 실천의 문제라면, 모든 일이 그러하듯 생각하고 준비하고 실천한 만큼 자기 인생에 변화를 가져온다.

비봉출판사에서 출간한 『자본론』을 완역한 김수행 교수가 정년 퇴임한 후 서울대에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자를 임용하지 않았고, 경제학과에 과목조차 개설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다. 류동민 교수의 책을 몇 권 읽으면서 척박하지만 새로운 시선과 활력을 불어넣는 관점이 유지된다고 생각한 건 순전한 착각이었다. 일명 ‘서마학’에서 여름학기에 개설한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입문 강의가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다음 주에 종강이다. 메시지만큼 메신저의 매력도 중요하다는 점에서 아주 조금 아쉽지만, 오랜만에 온라인 강의를 들으며 현실에 필요한 이야기들을 다시 곱씹는 중이다. 노동자로 살면서 노동조합을 비난하거나 그 중요성과 필요성을 간과하는 사람들은 AI와 무관하게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문제나 해결책을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기 어렵다. 정답 없는 세상에서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거나 내일을 꿈꾸는 우리에게 AI와 카를 마르크스는 가까이하기에 너무 먼 주제일까. 그렇지 않다.

이 책에 등장하는 AI 관련 노동자들도 어디에서 일을 하든 어떤 일을 하든 결국 비슷한 상황과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혐오와 배제를 무기로 극단으로 치닫는 사람들이 넘치게 된 이유를 정치 유튜버에게만 돌리는 것은 매우 손쉬운 진단이다. 저자들은 마지막 8장에서 ‘인공지능 시대의 노동전략’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AI와 무관하게 인간의 문제로 환원된다. 기계가 아닌 사람에 대한 고민이 언제나 바탕을 이룬다. 그들의 결론과 나의 결론 그리고 너의 결론이 다를 수는 있으나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는 이론이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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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c² -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방정식의 일생
데이비드 보더니스 지음, 김희봉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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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통과 구토로 이틀을 앓았다. 2개의 모임과 캠핑 여행을 취소했다. 인간의 몸은 때때로 내, 외부적인 힘의 작용으로 에너지를 소진한다. 질량에 속도가 결합하여 상상을 초월하는 에너지를 발휘하는 E=mc²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 인생이다. 당황스러운 타인의 정신적, 신체적 가해, 예측하기 어려운 교통 사고, 미리 알 수 없는 건강 이슈, 뉴스 같은 지인들의 인생사가 직, 간접적으로 현재를 만들고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 어쩌면 인간과 세상에 관한 이 불가해한 일들에 대한 호기심과 질문이 과학 발전의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자유의지는 없다’고 선언하며 저항하고, 또 누군가는 저 머나먼 별빛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궁금해하고, 또 누군가는 휜 시간과 공간을 상상하기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원자 폭탄 등에 관한 영화 『오펜하이머』, 다큐멘터리 영화 『아인슈타인과 원자 폭탄』등이 E=mc²에 대해 설명해 줄 수는 없다. 다만 이론 물리학이 어떻게 현실을 지배하는지, 인간의 삶과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고민이 계속될 뿐이다. E=mc²에는 아무 잘못이 없다. 숫자와 기호로 환원되어 자연의 질서가 밝혀지든, 원시 시대처럼 온갖 두려움과 경외감으로 무지의 상태를 유지하든 사실 하루하루 우리가 사는 인생에 그 영향을 성찰하거나 삶의 태도에 영향을 받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우리 인간은 생각보다 단순하고 짐작보다 무지하다.

그리하여,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이론 물리학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전공자를 위한 책이 아니다. 과학적 지식이나 특수 상대성 이론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서 재밌다. E=mc²그 자체의 자서전에 가깝다. E, =, m, c²각각이 탄생과 성장 그리고 이들의 결합 과정이 얼마나 지난했으며 또 때로는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는지 살피는 과정이 노잼일 리 없다. 스토리텔링은 식욕, 성욕 다음으로 강한 인간의 본능이 아닌가. 뒷담화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는 주변 사람들을 떠올려 보라. E=mc²에 관한 데이비드 보더니스의 끈적한 후일담은 독자들의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과 TMI(to much information) 본능을 충족시킨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김상욱의 『울림과 떨림』,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 등 기억할만한 과학 서적들이 가진 각각의 특징과 개성만큼 데이비드 보더니스의 글쓰기 방법은 강렬하고 매력적이다.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를 읽으면서 얼마나 고개를 끄덕였는지 모른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리처드 파인만과 스티븐 핑거, 리처드 도킨스, 최재천, 장대익, 슈뢰딩거, 제임스 크릭 등 과학자들이 쏟아내는 팩트fact가 문학에 절여진 픽션fiction의 뇌를 깨웠다. 천상 대문자 F인줄 알았으나 누구보다 강렬한 T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게 아니라 시간이 사람을 변하게 했을 수도 있지만 그때, 누군가 과학의 재미를 알려줬더라면 아마 다른 길을 걸었을 거라는 생각을 가끔 한 적이 있다. 지금도 자기 취향과 성향과 전공과 직업을 충분히 알아본 후에 진로를 선택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다. 대한민국에서 특권 계급으로 정부에서조차 인정을 준비 중인 의사나 판사 등 특정 직업의 선택에서부터 문, 이과 선택, 직종과 직업 선택의 순간까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그렇게 우리는 문과형 혹은 이과형 인간으로 불과 10대에 결정한 다음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는다. 마치 여자라는 이유로 리제 마이트너, 마리 퀴리 같은 여성 과학자들의 탁월한 성취가 묻힌 이야기들처럼. 아니 어떤 여성들은 과학에 접근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시대의 이야기들이다. 물론 초점과 거리가 먼 이야기지만 주인공 아인슈타인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권위에 의심을 품고 어느 것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하는 과학적 태도는 아인슈타인을 고립시킨다. 교수 자리를 얻고 안정적인 과학자의 길을 걸었다면 아인슈타인 뇌도 제도에 순응하며 기존 과학의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하지 않았을까. 고독한 천재가 아니라 현실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아인슈타인이 혼자 E=mc²를 어느 순간 불현듯 떠올렸다는 신화 혹은 영웅담과 거리가 먼 책이지만 결국 이 간단한 여섯 개의 기호를 나열하는 데 관여했던 수많은 과학자들과 기나긴 과학의 역사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질문들이 이 책 곳곳에서 미로찾기처럼 연결되어 있다. 수천 피스의 퍼즐을 맞추듯, 그렇게 역사는 수천 조각들의 우연과 필연이 결합한 사건이다.

영화 시나리오처럼 드라마틱하고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 능력에 인물들의 후일담은 쿠키 영상처럼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의미에 재미를 더한다. 좋은 책이 갖춰야 할 요소들을 꽉찬 육각형 모양으로 채운 듯하다. 과학은 지루하지 않다. 다만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쉽게 설명하지 못하는 건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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