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사피엔스와 과학적 사고의 역사 - 돌도끼에서 양자혁명까지
레너드 믈로디노프 지음, 조현욱 옮김 / 까치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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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려는 욕망과 능력을 함께 가진 유일한 존재이다. 그것이 우리를 다른 동물보다 돋보이게 만드는 가장 큰 재능이다. 그 덕분에 생쥐와 기니피그가 우리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들을 연구한다. 20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순응하는 인간과 저항하는 인간, 나서는 자와 숨는 자. 지키는 사람과 깨트리는 사람, 생각하는 인간과 행동하는 인간 , 머리가 큰 사람과 가슴이 큰 사람, 솔직한 자와 가식적인 자, 변하는 인간과 고집스런 인간, 앞장서는 사람과 뒤처지는 사람, 살려는 자와 죽으려는 자…….

 

인류의 역사는 호모 사피엔스의 지난한 변화의 과정이었다. 제아무리 젠체하는 인간이라도 숭고한 신의 형상을 닮은 게 아니라 한낱 털 없는 원숭이에 불과하다는 자명한 진리 앞에선 미진微塵한 존재에 불과하다.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의 호모 사피엔스와 과학적 사고의 역사는 과학사의 눈으로 바라본 인류지성의 발달사로 읽힌다.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물질문명을 발전시켜 왔는가에 대한 질문 자체가 놀랍다. 개인적인 취향이겠으나 이렇게 근본적이고 원론적인 호기심에 답하는 책이 좋다. 이 질문들은 대부분 답이 없거나 아직 밝혀지지 않았거나 너무 복합적이어서 정답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부단히 대답 없는 질문을 던지며 호기심을 탐구해왔다. 구원은 신의 몫이나 자연 질서에 답이 신의 영역을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과학기술은 눈부시게 발달한다. 이 책은 특이하게도 인간과 세상 즉, 자연과 물질 그리고 생명에 관한 철학적 질문으로 시작해서 최첨단 과학에 도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과학사이며 인류사이고 문명사이며 철학사에 해당하는 거대한 빅히스토리.

 

저자의 노고와 집중력에 경의를 표하고 싶은 책이다. 이 책의 원제인 ‘THE UPRIGHT THINKERS’는 기나긴 한글판 제목과 무관하게 이 책의 성격을 간명하게 드러낸다. 좋은 책은 간명한 제목과 적절한 부제가 뒤따른다. 상당한 분량의 과학책을 마치 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읽은 이유는 당연히 작가의 스토리텔링 능력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하이젠베르크까지 인간의 역사에서 과학적 사고가 어떻게 발전해왔는가? 사회적 상황, 문화적 전통, 개인적 성향은 물론 종교의 교리와의 갈등은 무엇이었을까?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혁명적 발상의 전환과 혁신적 사고는 어떤 조건에서 왜 일어났을까? 이 책은 과학자의 생애는 물론 시대별 과학계의 이슈를 통해 그 가능 조건을 제시한다. 개인의 능력과 과제에 대한 몰입 정도는 물론 개인적 탄생 배경, 집안의 재력, 시대상황과 사회적 요구가 결합되어 놀랄만한 과학적 발견통찰이 증명된다.

 

이 책은 인간의 특성과 호기심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 이야기가 문화, 문명, 이성을 거쳐 과학적 사고의 토대를 다지고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놀랄 만큼 탄탄한 구성과 사실에 대한 고증 뿐 아니라 과학에 대한 이슈를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하는 능력은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의 능력이다. 세계사의 새로운 서술방식으로 유발하라리의 사피엔스가 있다면 이 작가는 과학계의 유발 하라리다.

 

이 책이 무엇보다 흥미를 끈 이유는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의 창의성에 대한 꾸준한 관심이다. 발상의 전환을 통해 과학계의 이론뿐 아니라 인류의 삶을 뒤흔든 과학자들, 과학적 발견과 발명 뒤에는 고정된 틀을 깨려는 개인의 노력과 기질, 꾸준하고 끊임없는 도전정신, 시대적 요구와 사회적 인정이 함께한다. 각 시대마다 명멸했던 천재적인 과학자들은 사실 천재가 아니라 엉뚱한 호기심과 괴팍한 발상, 남들과 다른 상상력을 갖춘 사회 부적응자들이 많았다.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면 관습적 사고로 해결되지 않았던 그 많은 과학적 난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흔히 부모님 말씀 잘 들어라, 학교가면 선생님 말씀 잘 들어라, 어른이 얘기할 땐 그만한 이유가 있다, 남들은 바보라서 그런 말과 행동을 하지 않겠느냐, 어디를 가든 중간만 해라(특히 군대에서), 모난 돌이 정 맞는다, 튀지 마라 좋은 게 좋은 거다와 같은 삶의 지혜를 전수받는다. 그러나 과학 혁명은 이런 말들에 정면으로 반박한 사람들에 의해 일어났다. 저자는 이 과정을 상세하고도 알기 쉽게 풀어낸다. 이론 물리학자의 말빨과 글 솜씨가 탁월했기 때문에 이렇게 훌륭한 책이 만들어졌으리라.

 

과학뿐만 아니라 철학사에 대한 이해와 흐름 역사의 변천과정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 이 책 곳곳에 녹아있다. 어떤 과학자의 생애를 요약할 때도, 과학적 성과와 이론을 설명할 때도 균형감을 잃지 않고 전후좌우 맥락을 잘 살핀다. 세상에는 글을 잘 쓰는 사람과 못 쓰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생각이 깊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뿐이다. 전공, 직업과 무관하게 깊이 고민하고 넓게 사유하며 자기만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의 책에서는 향이 난다. 시류에 영합하고, 트렌드를 쫓으며, 팔기 위해 쓴 책은 비린내가 난다. 그러나 이 책은 말할 수 없이 은은한 향으로 과학책을 읽어야하는 이유를 보이지 않게 설득하는 힘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 지식의 진보는, 세상을 아주 약간 다른 방식으로 볼 능력이 있던 사람들이 했던 공상이 계속 이어진 덕분에 가능했다. - 404

 

집안은 부유하고 저명했지만 찰스(안철수 아니다-.-;;)는 학업성적이 나빴으며 학교를 혐오했다. 그는 판에 박힌 학습에 대한 나쁜 기억을 가지고 있으며 특별한 재능이 없었다.”는 평가를 받은 다윈은 학교 부적응, 학계의 비주류, 사회적 고립자였다. 당신이 어떤 자리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 성공을 향한 불나방이 아니라면, 돈과 권력에 올인한 사람이 아니라면 나름대로, 각자의 방식의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음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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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려는 욕망과 능력을 함께 가진 유일한 존재이다. 그것이 우리를 다른 동물보다 돋보이게 만드는 가장 큰 재능이다. 그 덕분에 생쥐와 기니피그가 우리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들을 연구한다. 20

 

질문을 제기하는 행위는 우리 종에게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인류가 사용하는 언어들에는 보편적인 지표가 있다. 모든 언어는 성조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막론하고 질문을 할 때, 뒷부분의 억양이 비슷하게 높아진다. 일부 종교에서는 의문 제기를 불안의 최고 형태라고 본다. 과학과 산업분야에서 제대로 된 질문을 제기하는 능력은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재능일 것이다. - 36

 

1903년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자신의 학생에게 해준 조언은 과학이나 시 모두에 진실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네 마음속에서 해결되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해서 인내심을 갖지라. 그리고 그 의문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라.” “그 의문을 품고 살아라.” 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은 올바른 질문을 제기하는 능력이다. - 98

 

과학의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언어로 수학을 사용하도록 처음으로 인류에게 도움을 준 사람은 피타고라스(570년경~490년경 기원전)라고 전해진다. 그는 그리스 수학의 창시자이며 철학(philosophy)”이라는 용어의 발명자이며 전 세계 중학생들의 저주의 대상이기도 하다. a 의 의미를 배우느라 휴대전화 채팅을 오랫동안 중단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 100

 

탈레스는 자연이 질서 있는 규칙을 따른다고 말했지만 피타고라스는 한발 더 나아가서 자연이 수학적 규칙을 따른다고 단언했다. 우주의 근본적인 진실은 수학법칙이라고 그는 설법했다. 숫자는 실재의 본질이라고 피타고라스 학파는 믿었다. - 102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의 특징은 목적을 찾는다는 점이다. 이 점은 그 이후 인류의 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탓에 그는 기독교 철학자들에게 대대로 사랑을 받게 되지만 과학의 진보는 거의 2,000년 동안 방해를 받았다. 목적주의는 오늘날 우리의 연구를 이끄는 과학의 강력한 원칙들과 양립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다. 두 개의 당구공이 충돌하면 그 다음 일어나는 일을 결정하는 것은 뉴턴이 처음으로 제시한 법칙이지 그 뒤에 숨어 있는 원대한 목적이 아니다. 113

 

실용적 가치로부터 독립된 새로운 가치가 부여되자 과학적 탐구가 올바른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윽고 진리에 대한 교회의 소유권이 잠식당했다. 성경 및 교회 전통과 경쟁관계인 진리가 나타난 것이다. 자연이 드러내는 진리 말이다. - 127

 

사실 오늘날의 6학년생은 14세기의 가장 뛰어난 과학자보다 수학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다. 28세기의 어린이와 21세기의 과학자의 관계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 134

 

우리는 과학의 발전이 일련의 발견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지적인 거인이 비범하고도 분명한 비전을 가지고 외롭게 노력한 결과들이 하나하나 이어진 것으로 말이다. 그러나 지성의 역사에서 위대한 발견을 해낸 사람들의 비전은 분명하다기 보다는 흐릿한 경우가 더 많았으며, 그들의 업적은 친구와 동료, 그리고 운에 더 큰 빚을 지고 있었다. - 152

 

과학은 최고의 아름다움을 가진 주제이다. 과학의 진보에는 아이디어의 교차 수정이 필요하고 이는 오직 다른 창조적인 사람과의 교류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의 고립 또한 필요하다. 이 고립은 사교 활동을 하지 않으려 하거나 심지어 고립된 생활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뚜렷한 장점을 제공할 수도 있다. - 166

 

우리는 희한한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좀 가질 필요가 있다. 사실 뉴턴이 그런 사람이었다. 흑사병 기간 중에 그처럼 상서로운 출발을 해놓고도 그는 잘못된 아이디어를 추구하는 데에 삶의 다음 단계의 많은 부분을 허비했다. 그의 업적을 연구한 후대의 많은 학자들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한 아이디어 말이다. - 178

 

뉴턴이 자신이 시작한 일의 끝장을 보았을때 당초 9쪽이었던 궤도를 도는 물체의 운동에 관하여3권짜리 프린키피아가 되었다. 이 책의 정식 이름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이다. - 195

 

창조하기 위한 투쟁에서 승리하려면 엄청난 끈기가 필요한 것이 보통이다. 심리학자들이 불굴의 투지(grit)”라고 부르는 이 속성은 인내와 완고함뿐만 아니라 열정이라는 지금까지 우리가 이 책에서 보아온 모든 인물이 가진 자질과 연관이 있다. “장기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오랜 시간 노력하는 성향이라고 정의되는 이 성향은 결혼생활에서부터 미군 특수부대에 이르는 모든 분야의 성공과 관련되어 있다. - 245

 

갈릴레오가 달의 경치를 보고 토성의 고리를 발견하고 크게 기뻐했다면, 레이우엔훅은 자신의 렌즈를 통해서 작고 기괴한 존재들의 새로운 세계를 관찰하는 데에서 똑같은 기쁨을 누렸다. - 268

 

집안은 부유하고 저명했지만 찰스는 학업성적이 나빴으며 학교를 혐오했다. 그는 판에 박힌 학습에 대한 나쁜 기억을 가지고 있으며 특별한 재능이 없었다.”고 나중에 썼다. - 273

 

무작위성이 어떤 역할을 하다는 깨달음은 과학 발전에서 중요한 이정표를 상징한다. 다윈이 발견한 메커니즘 때문에 진화는 신의 설계라는 사상, 그리고 실질적으로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 어떤 사상과도 서로 어울리기 어렵게 되었다. 물론 진화라는 개념 자체가 성서의 창조 이야기와 상반된다. 그러나 이제 다윈의 특정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와 전통 기독교의 견해를 정당화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무심한 물리법칙이 아니라 목적에 의해서 사건이 전개된다는 견해 말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일상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다윈이 끼친 영향은 갈릴레오와 뉴턴이 무생물계를 이해하는 데에 끼친 영향과 같다. 종교적 심문이나 고대 그리스 전통으로부터 과학을 뿌리째 결별시킨 것이다. - 282

 

1910년 철학자이자 심리학자 겸 교육학자인 존 듀이는 썼다. 비판적 사고에는 정신적 불안 및 동요 상태를 기꺼이 견뎌낼 의사가 흔히 포함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판적 사고에 대해서만 아니라 창조적 노력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예술에서든 과학에서든 선구자들이 편안하게 지낸 예는 없다. - 305

 

과학에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질문을 제기하는 보통 사람이 다수이며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잘 살아간다. 그러나 가장 성공한 연구자는 이상한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인 경우가 흔하다. 아무도 생각하지 않은 질문, 혹은 다른 사람들이 흥미롭다고 보지 않는 질문들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천재로 인정받는 시기가 오기 전까지는 이상하고 괴짜이며 심지어 미쳤을지도 모른다는 평가를 받게 마련이다. - 311

 

화학에서 종신교수 제도가 그토록 소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연구에 실패해도 안전할 수 있게 보장해주는 것은 창의성을 키우는 데에 필수적이다. - 342

 

놀랍게도 당시 나는 물질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덕분에 알게 된 것들이 스스로를 냉담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나에게 힘을 주었다는 사실을 느꼈고, 그것은 내가 슬픔을 딛고 일어서서 고독감을 덜 느끼도록 도움을 주었다. 나는 어떤 더 큰 것의 일부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우리 존재의 경이로운 아름다움에 눈을 떴다. 우리 각자에게 허용된 세월이 얼마이든지 말이다. 아버지는 심지어 고등학교를 다닐 기회도 없었던 분이지만, 물질세계의 속성에 대해서 커다란 감탄과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어린 시절 거실에서 아버지와 대화할 때 그에 대한 책을 언젠가 쓰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마침내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바로 그 책을 낸다. - 402

 

어떤 의미에서 인간 지식의 진보는, 세상을 아주 약간 다른 방식으로 볼 능력이 있던 사람들이 했던 공상이 계속 이어진 덕분에 가능했다. - 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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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애주가의 고백 - 술 취하지 않는 행복에 대하여
다니엘 슈라이버 지음, 이덕임 옮김 / 스노우폭스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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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독한 사랑의 시작, 나 역시 술과 헤어지기로 결심한 날보다 술과 사랑을 시작했던 날들이 훨씬 근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깊은 관계를 나눈 대상과의 이별은 오래 걸리게 마련이다. 오랜 시간 유지해 온 관계를 깨지 못해 붙잡고 있는 연인처럼. - 11

 

모든 중독은 치명적일수록 아름답다. 그 끝을 모르고 질주하는 맹목. 부딪쳐 깨질 때까지 달리는 속도감. 좌우를 돌아보지 않고, 이성적 판단이 마비된 채 점점 헤어 나올 수 없는, 아니 헤어 나오기 싫은 아득함.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소주 한 병 이상의 술을 1년쯤 마시고 나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반주가 없으면 목이 메어 밥 한 술도 넘기기 힘들다. 다니엘 슈라이버는 어느 애주가의 고백에서 알콜중독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모든 중독이 그러하듯 알콜 중독은 가장 이성적인 인간의 가장 비이성적인 식습관 중 하나다. 세트메뉴로 엮인 담배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어느 쪽이 더 건강에 해롭고 무엇이 더 현명한 선택인지 조언하는 도덕 교사가 아니다.

 

지독한 사랑, 온라인 게임, 러너스 하이, 선거와 권력... 우리 삶에서 중독 아닌 것이 있을까. 중독의 기준은 무엇일까. 몰입과 중독은 어떻게 다른가. 하루에 커피를 몇 잔 마시면 중독인가. 모든 사람이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고 종교의 교리를 따르고 도덕과 윤리에 어긋나지 않는 금욕적 삶을 통해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다니엘 슈라이버는 모든 중독자의 증상대로 자신이 알코올 중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거의 매일 술을 마시며 필름이 끊겨 기억이 사라지고 다음 날 아침 두통과 무거운 몸을 지탱해야 하는 날들이 이어진다면 중독이다. 이 책은 술에 쩔어 인생이 위태로웠던 한 남자의 갱생기가 아니다. 1935년 시카고에서 시작된 A.A(alcoholics anonymous) 홍보 책자도 아니다. 술이 우리 삶을 어떻게 뒤흔들 수 있는지 살펴보면 충분한 책이다. 자기 고백적 에세이는 항상 변곡점에 초점이 맞춰진다. 어떤 계기로, 왜 그런 결심을 했으며 그 과정은 어땠을지에 대한 호기심이 책장을 넘기게 한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자기 경험에 기반한 주관적(?) 관점과 맥락을 드러낼 뿐이다. 술을 끊기 이전과 이후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마치 신앙 간증처럼 간절하진 않지만 술 자체에 대한 깊은 고민은 없다. 모든 술은 위험한가. 술의 순기능은 없을까. 일반적으로 음주 문화의 역기능에 주목하면 세상은 거대한 수도원이 될지 모른다. 내가 마신다고 해서 마시지 않는 사람들을 불편해하거나 마시지 않는 사람이 마시는 사람을 비난하는 일은 올바른 태도일까. 사람마다 식성이 다르다. 좋아하는 음식도 다르다. 기호 식품도 각자 취향이 있다. 술은 타인과의 관계, 개인적인 기호 양면에서 따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느 애주가의 고백은 술 마시는 모든 사람에게 죄책감을 주고 하루라도 빨리 금주를 실천하라는 자기계발서가 아니다. 내게 이 책은 중독에 관한 보고서로 읽혔다. 술 대신 쇼핑, 게임, 미드, 운동, 재테크, 부동산투기, 권력지향, 명예욕, 그루밍족, 각종 덕질 등 한 가지에 매몰된 사람, 신념이 강한 사람, 고집을 꺾지 않는 사람도 중독의 한 증상이 아닐까. 당신은 무엇에 중독되어 있는가? 어디에 중독되고 싶은가?

 

알코올과 술은 언제나 슬프거나 지루하거나 화난 사람들에게 출구가 되어 줬다. 가혹한 삶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고, 더 잘 견딜 수 있게 하며, 불안한 미래와 마주할 수 있는 힘을 줬다. 망각 속으로의 탈출은 인간 본능의 특징이다. -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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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병 - 가장 가깝지만 가장 이해하기 힘든… 우리 시대의 가족을 다시 생각하다
시모주 아키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살림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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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데, 타인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배우자 역시 타인이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타인이다. - 18

 

가족을 이루는 최초의 개인은 타인이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장 끈끈한 관계는 아이러니하게도 낯모르는 타인과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의식주를 해결하는 최소 단위, 사회 보험 기능을 담당하는 가족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부부, 부모와 자녀, 형제자매 이 관계는 국가, 지역, 종교, 민족, 인종, 문화에 따라 그 관계 양상이 조금씩 다르다. 자식들은 부모에게 인간과 세상의 질서를 배우고 생존 방식을 터득한다. 세계관과 가치관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부모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부모의 생각, 관점, 식성, 문화적 소양을 직간접적으로 학습한다. 따라서 대화가 없는, 소통하지 않는 부부, 부모와 자녀, 형제관계는 남보다 못하다. 생물학적 혈연 관계를 끊을 수는 없으나 서류상의 관계일 뿐.

 

그러니 가족을 구성하는 일은 애초부터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가장 가까운 사이라서 가장 잘 안다는 생각은 착각이 아닐까. 부모가 자식을 안다는 말은 직립보행을 시작하면 하지 말아야 한다. 더구나 자식은 부모를 이해할 수 있을까.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은 환상에 불과하지 않을까. 행복한 가족은 누군가의 희생과 인내, 굴욕과 분노 위에 세워진 신기루 같은 게 아닐까.

 

이렇게 건조하고 냉소적인 그러나 내 생각과 일치하는 작가의 책을 읽는 일은 지나치게 반갑다. 시모주 아키코는 가족이라는 병에서 가족의 의미를 독자에게 되묻고 있다. 1936년생이라는 작가의 나이를 고려하면 가족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치부하기 어렵다. 가족은 그녀에게 함부로 안다고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구성원 각각의 내면을 들여다 보지 않는다면 우리가 아는 가족은 상상의 공동체에 불과하다.

 

친소여부를 떠나 가족을 화제로 올리는 사람들은 불편하다. 시모주 아키코의 말대로 가족 이야기는 자랑 아니면 험담이기 때문이다. 또한 가족 이야기만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남의 가족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다. 가족 이기주의의 극단을 보여주는 사례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뉴스와 일상에서 매일 접한다. 이 책은 가족에 대한 한국인의 태도와 생각을 점검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2차 세계대전 패망으로 일본 육사출신 아버지와 순종적인 어머니 그리고 오빠와의 관계에서 작가의 이야기는 출발한다.

 

성인이 되어 반려伴侶를 만나 한 평생을 살지만 자식을 낳지 않고 자기 삶을 꾸려온 시모주 아키코는 인간은 늘 혼자라는 것을 인식하고, 고독을 즐길 수 있어야 비로소 상대의 기분을 가늠하고 이해할 수 있다. 가족이나 사회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다. 가족은 사회의 축소판이 아닌가.”라고 말한다. 지나치게 기대는 관계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모래알처럼 각자 사는 가족 또한 가족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함께 밥을 먹지 않고, 대화를 나누지 않으며, 눈을 마주치지 않는 가족은 생활 공동체에 불과하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을 넘어 이제는 다양한 주거, 가족 형태가 등장했다. 반려견이 자식을 대신하고 비혼자들의 쉐어하우스, 1인 가구의 주거 공동체도 심심찮게 소개된다. 스트레스와 상처를 주는 가족보다 서로 존중하고 생활의 편의를 추구하는 공동 주거가 전통적인 가족 형태를 대체하고 있다. 가족이라는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가족 구성원 개인에 대한 이해가 우선이다. 전체가 아닌 부분을 들여다보고 각자 따로 또 같이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자식이니까 언제까지나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착각, 끝나지 나를 지켜줄 거라는 오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휘두르는 폭력은 대부분 가족 안에서 이루어진다.

 

지나친 기대와 믿음도 위험하지만 침묵과 증오도 가족을 해체하는 결정적인 요소다. 이 책은 가족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담고 있다. 한 평생을 살면서 작가가 경험한 가족 이야기를 바탕으로 주변 사람들이 가족을 대하는 태도를 비판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가족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가족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할까. 정답은 없지만 나는 시모주 아키코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서로 기대고 힘이 되어주는 가족을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러나 그 웃음과 기쁨이 유지되기 위한 희생과 노력은 누가 얼마만큼의 비율로 나눠가져야 하는 걸까. 보이지 않는 무수한 폭력과 상처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가족은 왜 필요한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오빠까지 떠나보낸 작가는 4부에서 그들에게 비로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 그들의 인생을 보여주고 자신과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가족을 객관화한다. 한 인간에게 가족은 삶의 행복이며 존재 이유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벗어나고 싶은 굴레와 영혼의 감옥일 수도 있다. 사회적 지위, 부와 명예는 복권처럼 손에 거머쥔 가족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또한 가족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인생의 희로애락을 설명하기 어렵다. 수많은 문학 작품에서 다루는 인간의 관계양상은 사랑 혹은 가족의 다른 이름이다. 그것이 사회적 관계로 어떻게 전환되는지에 따라 우리 삶은 천국 혹은 지옥이 된다. 당신은 어떤 가족과 함께 살아왔는가, 아니 어떤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가?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나, 어둡고 먼 길을 홀로 걸어왔던 것처럼 마지막에는 결국 혼자라는 것을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되뇌면서 말이야. -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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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란하고 화목한 가족이라는 환상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의 인격을 되찾는 것, 그것이 진정 가족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름길이 아닐까 한다. - 13

 

자신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데, 타인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배우자 역시 타인이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타인이다. - 18

 

거짓은 화목하지 않은 가정보다 화목한 가정에 있다. 솔직한 심정으로 마주하면, 부모와 자식은 대립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나는 겉으로 화목해 보이는 가족보다는 사이가 나빠 뿔뿔이 흩어진 가족을 선택할 것이다. 42

 

가족 사이에는 산들산들 미풍이 불게 하는 것이 좋다. 상대가 보이지 않을 만큼 지나치게 밀착하거나 사이가 너무 벌어져 소원해지면 가족만큼 까다로운 것도 없다. - 66

 

우리는 평생을 살면서 무수한 일을 화제로 삼는데, 그중에 삼 분의 일이 남 얘기다. 삼 분의 일은 남자와 여자에 관한 얘기, 그리고 나머지 삼 분의 일이 필요한 애기라고 한다. 즉 삼분의 이는 하나 마나 아무 상관 없는 애기라는 뜻이다. 가족 얘기는 어디에 속할까. 남 얘기다. 삼 분의 일이나 그런 화제에 할애하다니 놀랍다.

가족 얘기는 왜 하나 마나 한 시시한 얘기일까. 그래봐야 자랑이거나 불평이며, 발전성이 없어서다. 대화를 나누는 사람끼리 가족 얘기를 하면 서로의 상처를 위로하든지,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는 패턴이 반복된다. 어느 쪽이든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76

 

나이를 먹으면 화제가 빈곤해진다. 관심의 범위가 좁아지는 탓이 클 것이다. 병이나 건강에 관한 얘기,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보나 마나 가족 얘기다. - 77

 

가족 얘기를 늘어놓는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기 가족 외에는 전혀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다른 일에는 관심이 없다. 자기 가족만 좋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가족 이기주의다. - 78

 

가족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다. 반대로 가족이 없어서 불행하냐 하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을 것이다. - 114

 

인간은 늘 혼자라는 것을 인식하고, 고독을 즐길 수 있어야 비로소 상대의 기분을 가늠하고 이해할 수 있다. 가족이나 사회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다. 가족은 사회의 축소판이 아닌가. - 129

 

무슨 일이 생기면 상대를 배려하고 돕는 것이 가족이다. 진정한 가족은 핏줄로 이어진 가족을 뛰어넘는 곳에 존재한다. - 174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나, 어둡고 먼 길을 홀로 걸어왔던 것처럼 마지막에는 결국 혼자라는 것을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되뇌면서 말이야. -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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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 숙녀 여러분, 가스실로 - 폴란드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타데우쉬 보로프스키 외 지음, 정병권.최성은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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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겨울방학에는 어머니가 가끔 고구마를 쪄주셨다. 동치미 국물 혹은 잘 익은 김장김치와 함께 먹었던 기억이 난다. 시골에서 어머니가 드셨던 맛 그대로인지 알 수 없으나 옛날에는 구황작물인 감자, 고구마가 끼니를 대신했으리라. 자라면서 김동인의 감자를 배웠고,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을 보면서 생존, 가난, 죽음을 어렴풋이 짐작하기 시작했다. 가까운 역사였음에도 관찰자, 방관자의 위치에 선 자들의 게으름은 내내 부채감으로 남는 법이다. 폴란드가 가해자(나치)와 피해자(유대인) 사이에서 관찰자 혹은 방관자로 남은 것처럼.

 

폴란드의 근현대 단편소설을 모은 신사 숙녀 여러분, 가스실로는 아프게 읽힌다. 18세기 후반부터 1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120여년이나 외세의 지배를 받았던 나라에서 기쁨과 행복의 코드를 찾기는 쉽지 않다. 잔혹한 전쟁은 위정자들의 세력 다툼일 뿐이다. 국가의 경계, 민족의 구분 따위는 어느 동물 종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인간만의 분열 도구다. 만물의 영장으로 자부하지만 인간은 그저 스스로 만든 상상의 공동체속에서 허우적거린다. 유발하라리는 상상 속의 질서를 통해 협력하고 사회적 규범과 공통의 신화를 창조했다고 주장했으나 그 환상은 21세기에도 여전히 계속된다. 인간의 존엄을 주장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표방하면서도 국가의 경계를 넘어 그 범위를 확대하고 온 인류의 평화와 화해가 이루어지기는 요원해 보인다.

 

편역자 정병권과 최성은은 낭만주의 시대부터 2차 대전 이후의 문학까지 시대별로 문제작을 엄선해 번역했다. 거의 5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이지만 작품 수는 많지 않다. 여섯 명의 작가, 열 작품을 선보인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헨릭 시엔키에비치의 등대지기부터 마렉 흐와스코의 노동자들까지 중, 단편이 뒤섞여 있지만 대체로 호흡이 길다. 시엔키에비치의 등대지기를 읽다가 우리나라의 등대지기를 검색하니 경쟁률이 상당한 공무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파도와 싸우는 일, 혼자 견디는 일이 낭만적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원하는 사람이 그리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등대지기는 거의 죄수와도 같은 생활을 했다.’는 표현처럼 당대의 등대지기와 지금 등대지기의 생활이 같을 수는 없지만 색다른 일임에는 틀림없다. 폴란드의 국민시인을 통해 모국어와 애국심에 호소하는 작품이 낯설다.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 뿌리내리지 못한 삶의 고통이 모든 사람에게 슬픔을 주진 않는다. 디아스포라 문제는 오늘도 계속된다. 미국 대사관 이전 문제로 인한 유혈 충돌을 보면서 미국이라는 나라, 트럼프의 역할이 새삼스럽다. 북미회담 성사여부, 결과와 무관하게 핵폭탄을 손에 쥐고 너는 갖지 말라는 오만함, 이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대다수 국가들의 역할과 국제관계가 이론적 모순이다. 세계사의 흐름을 함부로 짐작할 수 없으나 폴란드처럼 동서 유럽의 교량적 위치에 있는 국가의 역할은 한반도와 유사하다. 전쟁, 외침, 가난, 죽음, 개혁 등 문학적 자양분은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눈물과 고통을 먹고 자라는 소설의 속성상 더없이 좋은 환경이다. 하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독자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블레스와프 프루스의 파문은 되돌아온다, 모직조끼에 이어 마리아 코노프니츠카의 우리들의 조랑말로 넘어가면서 슬픔은 절정을 이룬다. “움푹 꺼진 그의 뱃속에는 허기만이 가득할 뿐이었다.”(우리들의 조랑말, 마리아 코노프니츠카, 180)는 단순한 문장의 여운이 길다. 1920년대 한국문학의 키워드인 가난과 죽음이 폴란드의 단편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특히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그려낸 우리들의 조랑말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더없이 투명하게 드러낸다. 단순히 가난이 주는 고통의 크기를 그려내기보다 한 가족의 겪는 일상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가 느껴진다. 끝까지 순수함을 잃지 않는 3형제의 모습이 훈훈하지만 슬픔은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 야로스와프 이바시키에비츠의 빌코의 아가씨들자작나무숲은 폴란드의 전통을 잘 묘사한다. 사랑이라는 보편적 정서를 다루고 있으나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 빛깔과 향기는 제각각이다.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욕망과 갈등은 세계문학을 읽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죽음을 앞둔 동생 스타시를 바라보는 형 볼레스와프의 속내는 복잡하다. 아내를 자작나무 숲에 묻은 상태에서 시한부 동생을 바라보는 심정은 어떨까. 소설을 읽는 동안 인제의 자작나무 숲이 떠올랐다. 사유지를 가꾼 사람은 무엇으로 그 시간을 견뎠을까. 막국수의 시원한 국물이 떠오른 건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다. 표제작 타데우쉬 보로프스키의 신사 숙녀 여러분, 가스실로는 프리모 레비의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떠오르게 한다. 인류의 트라우마를 넘어서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에 도달하게 한 유대인 학살은 불가해한 사건이다. 수많은 제노사이드 중에서도 유독 아우슈비츠가 도드라지는 이유는 그 원인과 방법과 결과가 특별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다양한 방식으로 분석하고 해석하고 설명하지만 언제나 새롭다. 영화 더 리더를 최근에 다시 보았다. 한나는 마이클을 사랑한 적이 있을까. 한나와의 만남이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버린 마이클과 달리 한나에게 아우슈비츠는 일상적 직업 공간이었다. 읽을 줄 모른다는 건(읽지 않는다는 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인공 한나는 현상을 파악하고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고,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를 혼동하며, 감각을 통해 인지의 결과를 합리적으로 해석하지 못한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악의 평범성은 무지와 침묵의 동의어다.

 

선한 의도가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 오지 않는다.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과 이익을 따라가는 사람의 이율배반적 태도는 역겹다. 입으로는 가치를, 일상은 이익을 따라간다. 그걸 확인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페르소나는 누구에게나 필요하지만 이중적 태도는 혐오감을 불러온다. 사람은 누구나 그렇지 않느냐는 변명, 세상은 다 그렇고 그렇다는 핑계도 지겹다. 그래서 토마스 아 켐피스는 내가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더 나은 곳은 없더라.In omnibus requiem quaesivi, et nusquam inveni nisi angulo cum libro.’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책이 있는 구석방 밖은 이불밖 보다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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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산문의 길, 스타일 - 품격 있는 글쓰기 지침서의 고전
F. L. 루카스 지음, 이은경 옮김 / 메멘토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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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완벽하게 정확할 수 있으나 그만큼 지루하거나 단조로워질 것이다성패를 떠나서나는 그보다 더 일반적이고 긍정적인그러나 그만큼 답을 찾기가 힘든 질문에 답하려 노력했다그 질문은 바로 구어든문어든언어에 설득력 내지는 힘을 부여하는 속성은 무엇인가이다. - 22
  
문체는 작가의 지문이다같은 내용도 사람마다 다른 방식으로 쓴다출발지와 도착점이 같아도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방법을 선택한다효율성을 추구하는 사람은 시간거리비용을 계산한다내비게이션포털의 길찾기 서비스가 이를 대신해 준다하지만 이 방법은 건조하고 지루하다조금 시간이 걸려도 나는 버스를 탄다지하철의 답답함과 부딪침을 견딜 수 없고 무엇보다도 시선이 자유스럽지 못하다버스 창가에 앉아 편안히 책을 펼칠 수 있다면 시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환승보다 가까운 거리는 걷는 쪽을 선호한다시골 영감처럼 두리번거리고 새로 지은 건물을 올려다 볼 때도 있다사람에게 관심이 적은 대신 사물에 호기심을 갖는 성향 때문이기도 하다목적지를 향하는 수많은 방식 중 글을 쓰는 사람이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는 중요하다선호하는 방식이 반복되면 개성과 문체가 된다짧게는 단어의 선택과 문장의 구조부터 길게는 단락의 구성과 글의 흐름까지 모두 글을 쓰는 사람의 성향과 특징을 드러낸다
  
프랭크 로렌스 루카스의 좋은 산문의 길스타일(1955)은 글 잘 쓰는 기술이라는 원제에 값한다스타일style은 문체라고 번역한다문학 이론에서도 마찬가지다하지만 스타일은 문체보다 그 의미가 넓고 크다장석주는 글쓰기는 스타일이다에서 글쓰기란문장의 예술이자 기술이며 제작이다누구나 훈련을 쌓고 연습을 하면 좋은 문장 쓰는 법을 익힐 수 있다그것은 배우는 데는 일생이 걸릴지도 모른다그렇다 할지라도 지레 포기하지 마라글쓰기는 우리 삶에 꼭 필요한 공부요평생 그것을 배울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일이다.( 107)”라고 말한다자기 스타일을 만드는 데 일생이 걸릴 수도 있다는 의미다루카스의 말하는 스타일도 크게 다르지 않다글을 잘 쓰는 기술 전체를 통칭하는 스타일이라는 말은 좋은 글을 쓰기 위한 고민과 노력의 지난한 과정이다
  
다음 달에 출간될 글쓰기 책 교정지를 늦도록 들여다보았다매번 겪는 고민의 순간이다교정교열 전문가의 빨간펜편집자의 의견이 정확한 표현과 문장’, ‘깔끔한 논리 구조에 부합한다하지만 문법책처럼 건조하고 지루한 책이 될 가능성이 크다같은 의미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재미없는 농담과장된 표현부적절한 비유주관적 판단이 때로는 빠르고 정확한 지하철이 아니라 버스와 도보를 섞어 걷는 여유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변명을 하고 싶었다에세이는 말하는 내용만큼 전달하는 방식도 중요하기 때문이다편집자와 때로 의견이 충돌하고 때로는 공감하며 1차 교정지를 넘겼다
  
어둔 버스 차창 밖으로 흐린 불빛이 흔들렸다누구나 읽고 쓴다방법을 몰라서 또 한 권의 글쓰기 책을 보태려 하는 것일까글쓰기는 과연 배움을 통해 얼마나 향상 될 수 있을까빠진 주어를 채우고어순을 바로 잡고문장을 고치면 나아질까루카스의 책이 한줄한줄 아프게 새겨진 건 아마도 읽고 쓰는 일 이외에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한없이 부족한 한 인간의 내면 때문일 것이다그는 우선 문체의 기초를 인격이라고 지적한다존경받을 만한 성품과 부드러운 말씨긍정적이고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가 아니어도 읽고 쓸 수 있을까.
  
이 책은 대체로 문학적 글쓰기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당대의 문장가와 영어라는 언어의 특성을 중심에 두고 있기 때문에 실수로 선택할 가능성도 많아 보인다늘 그러하듯이 저자의 약력출판사의 홍보 문구에 속지 말아야 한다그러나 내게는 바늘처럼 예리한 문장들이 많았다잠간씩 생각에 잠겨 필사를 하고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읽기를 반복했다
  
어떤 사람들은 시의 모호성을 찬양한다그러나 산문에서 모호성은 끝없는 저주가 될 수 있다.(28)” 글쓰기 책을 읽는 사람 중 몇 명이나 시인을 꿈꾸겠는가대체로 생의 도구로 활용되는 글은 산문이다이는 다시 픽션과 논픽션으로 나눌 때 논픽션일 것이다문학적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모호성ambiguity은 시를 읽는 가장 큰 즐거움이다그러나 산문에서 애매한 표현은 오해를 낳고 의심을 잉태한다정확하고 분명한 목소리와 논리적 전개가 기본이다법전과 문법처럼 건조하고 지루할 만큼 철저하게 훈련하지 않는다면 물 흐르듯 자연스런 문장을 쓰는 일은 불가능하다
  
글의 주제가 무엇이든읽기 수월한 문체는 가장 얻기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일 테다아나톨 프랑스는 자연스러움이란 가장 마지막에 보태진다.”라고 말한다또 미켈란젤로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가장 공을 들인 것은 마치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는 듯 성급히 던져진 것처럼 보여야 한다아니 진실과는 달리아무런 수고도 들이지 않은 것처럼 보여야 한다수월해 보이는 뭔가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무한한 고통이 따른다. - 379
  
루카스는 명료성뿐만 아니라 간결성과 다양성세련성과 소박함낙천절 기질과 유쾌함건강과 활력직유와 은유에 대해 조언한다책을 읽는 동안 글을 쓰는 사람이 갖춰야 할 기질적 특성과 조건 그리고 부단한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비록 논픽션에 초점을 맞춘 책이 아니라서 아쉬웠지만 이것이 글쓰기 비법이라고 울부짖는 글쓰기 방법론이나 글쓰기 비법을 소개하는 책과 달리 다양한 예문을 통해 읽는 사람 스스로 선택하고 그 기술을 터득하도록 자연스레 안내하는 방식이어서 좋았다
  
글은 형식에 따라 내용이 달라질 수 있고내용에 맞는 형식의 옷을 입힐 수도 있다책읽기든 글쓰기든 한번쯤 찾아올 빅뱅의 기회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부단한 노력과 자기반성을 통해 조금씩아주 조금씩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맹목적 열광도 처절한 좌절도 필요 없다목적도환상도희망도 없이 걸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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