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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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글쓰기의 전범

조지 오웰은 1인 미디어다. 현장 르포에 능한 기자처럼 온몸으로 자신의 글을 밀고 나갔다. 버마, 파리, 카탈로니아의 현실을 묘사했고 20세기 초 그가 살던 시대정신을 충실하게 전달했다. “우리 시대에는 ‘정치와 거리를 두는 일’ 같은 건 있을 수 없다. 모든 문제가 정치 문제이며 정치란 본래 거짓과 얼버무리기, 어리석음, 반목, 정신분열증의 집합체인 것이다.”(『나는 왜 쓰는가』, 271쪽)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듯 글쓰기를 정치적 행위의 도구로 삼았다. 피를 토하며 생애 마지막 역작으로 남긴 『1984』는 소설이라기보다 ‘과두 정치적 집산주의의 이론과 실제’에 관한 보고서다. 

모름지기 글쓰기는 현실에서 공중 부양한 채 대증요법으로 실현된 자기만족이나 달콤한 현실 도피와 거리가 멀다. 우리는 낭만적 사랑과 원초적 고독에 대한 글들이 넘치는, 자기 삶이 당면한 현실에 대한 외면과 회피에 급급한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조지 오웰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지금-여기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현실 너머에 숨은 인간의 욕망, 세계의 본질에 천착한다. 그것은 물론 정치 체제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서 비롯된다. 대안이 없다고 해서 아쉬울 일이 아니다. 작가는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니 대안과 정답을 요구하는 건 무리데쓰.

사랑과 이별조차 그 원인은 지극히 정치적이다. 정치 아닌 것이 없다는 정치 만능주의에 거부감을 느끼더라도 할 수 없다. 광의의 개념으로서 정치는 인간의 삶에 투영되지 않는 곳이 없다. 인간의 말과 행동, 생각과 사유 자체가 정치 행위이기 때문이다. 결국 지극히 사적인 글쓰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일기조차 사실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또 다른 윈스턴과 줄리아처럼 체제가 반영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전체주의에 대한 비명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반유대주의’와 ‘제국주의’가 전체주의의 발원지라고 지적한다. 20세기 ‘나치즘’, ‘파시즘’, ‘스탈린주의’는 현대 사회의 가공할 폭력 장치를 작동하는 기원이 되었다.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은 사라졌으나 그들의 그림자와 망령은 세상을 떠돌고 있다. 학습된 무기력과 이중사고doublethink는 자기 삶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활용된다. 개인과 집단의 갈등은 사라지지 않는다. 자기 이익을 배반하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없다는 착각이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집단적 무의식과 맹목적 팬덤 현상으로 나타나는 건 아닐까. 전체주의에 대한 유혹은 오히려 85% 프롤에게 더 큰 추억으로 남은 게 아닐까. 

오세아니아의 내부자와 외부자는 누구일까. 빅브라더보다 임마누엘 골드스타인을 따라가 보자. 미셸 푸코가 날카롭게 분석한 『감시와 처벌』을 이 소설에 적용하면 그 대상은 프롤이 아니다. 애정부의 오브라이언 말대로 사상은 통제, 감시, 조정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전체주의는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굴종과 예속, 복종과 열망으로부터 시작된다. 마동석에게 수없이 데려갔을 ‘진실의 방’은 ‘101호’와 전혀 다른 공간이다. 폭력 앞에 굴복한 범죄자들의 자백은 빅브라더를 사랑하게 된 윈스턴의 고백과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 자신을 잊고 완전히 동화되어 지난 40년간의 투쟁이 부질없었음을 자인하는 윈스턴 스미스의 눈물이야말로 전체주의의 기원을 날것 그대로 드러낸다. 

나치즘과 파시즘, 스탈린주의로 이어지는 당대 현실에 대한 환멸을 조지오웰은 이 한 권의 거대한 성인용 우화를 통해 냉정하게 곱씹는다. 애초에 희망 따위를 기대할 수 없으나, 노동자로 대표되는 프롤에게 미래를 엿보는 건 ‘자유’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건강한(?) 사상, 아니 순수한 자연 상태의 동물적 욕망 때문이 아닌가. 거추장스러운 제약과 상황 혹은 주어진 여건, 타인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자기 욕망에 충실한 삶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면 주저할 이유가 없다. 각자의 삶이 모여 전체를 이룬다. 같은 조지 오웰이 다르게 읽히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네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다


구어와 신어의 대비가 보여주는 언어의 세계는 다소 혼란스럽다. 조지 오웰은 언어 분석철학자가 아니다. 허나, 세계 인식의 도구는 ‘언어’일 수밖에 없고 그것을 해명한 순간 철학의 제문제는 모두 해결했다고 선언하며 철학계를 떠난 비트겐슈타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신어newspeak는 오세아니아의 공용어다. 마치 영어가 이제 만국 공통어가 되듯이. 인간은 언어로 사유한다. 영어의 어순, 단어, 표현은 한국어와 다르다. 사물에 대한 인식, 관계 양상에 영향을 미치는 건 개인적 성향과 태도가 아니라 언어일 때가 많다. 사상죄thought-crime, 2분 증오Two Minutes Hate, 표정죄facecrime, 독생ownlife, 선사적goodthinkful, 선사자goodthinker, 범죄 중지cirmestop 등 신어는 시대 정신을 반영하며 집단적 무의식을 형성하고 암묵적 질서와 자기검열을 실행한다. 

몸은 본능을 번역하고 말은 세계를 인식하며 글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의 끈이다. 조지 오웰에게 언어는 세계를 인식하는 도구에 불과한 게 아니라 세계 변혁을 위한 무기다.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로 나타나는 개인의 울타리를 과감하게 허물 수 있는 방법 또한 타인의 글을 통해 세계를 확장하고 좋은 책을 골라 인식의 힘을 기르는 일이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라는 주장을 우리는 매일 확인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한 글자에 기대 시스템을 바꾸고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일들을 찾아낸다. 누군가는 박수를, 또 누군가는 비난의 화살을 쏜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아이러니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선언 앞에 독자들은 침묵한다. 자신이 이중사고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이중사고가 아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기 신념으로 굳은 생각, 바뀌지 않는 태도가 이중사고다. 인지부조화를 극복한 확증편향과 내로남불의 확장판이 이중사고다. 언어가 담은 모순과 그 의미를 포작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내 안의 불편함을 제거하고 완전한 행복에 이르는 최음제가 바로 이중사고다. 

자유와 행복, 그 모순된 양가 감정

이 소설에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스물네 번 등장한다. 디스토피아에 대한 우울한 자화상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가독성이 떨어지는 이 노잼 소설에서도 행복은 여전한 키워드다. 빅브라더가 지켜보는 행복과 원시상태의 자유라는 선택지 앞에서 인간은 어느 쪽을 택할까. 감시와 통제가 일상화되고 자유에 제한을 가하더라도 안전과 평화를 제공받는다면 다수의 사람들은 자유를 포기하고 행복을 선택할 거라는 생각은 착각일까. 혼란과 불안이 계속되는 불행을 감수하더라도 한없는 자유를 보장받고 싶은 사람이 더 많을까. 

현대판 빅브라더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구글 창은 모든 걸 알고 있다. 네이버 검색창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다. 인터넷 쇼핑, 교통 카드, 위치 정보, 쿠키 정보 …… 일일이 나열할 필요도 없이 현대인은 모두 빅브라더의 흐믓한 미소 앞에서 말할 수 없는 행복과 편안한 일상을 즐긴다. 20세기 중반 조지 오웰이 바라본 현실과 오늘이 크게 다르지 않다면, 아니 오히려 빅브라더가 더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시대, 개인의 취향과 일상이 알고리즘을 통해 낱낱이 까발려져 자신의 욕망조차 통제받고 조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자유의지 따위는 잊은 지 오래다. 오늘도 우리는 행복하고 자유롭다는 이중사고로 무장한 채, 긴 장마와 폭풍 뒤의 고요함과 밝은 햇살을 즐기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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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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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뢰딩거 방정식의 물리적 측면을 곱씹을수록 혐오감이 커진다네. …… 슈뢰딩거의 글은 도통 이치에 맞지 않아. 개소리라는 생각이 든단 말일세.” 

_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볼프강 파울리에게 보낸 편지


생각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보다 이성적 사고의 결여가 감정적 대응보다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문제다. 나는 어떤 부류에 속할까. 타인을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사물과 사건, 즉 세상은 이해 가능한 영역이다. 아니 어쩌면 모두 주관적 해석에 불과할 수도 있다. 지극히 일시적 잠재태에 불과한 현상들을 우리는 세계 이해의 토대로 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현실은 초월적 세계를 반영하지 못하고, 미지의 영역은 늘 불안을 잉태한다. 그래서 대개 사람들은 가시적인 범주에 머문다. 확정적 사실을 지지하고 가능성을 신뢰하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아니 그 노력마저 포기할 때 인간은 비루한 존재로 전락한다. 


그것이 수학과 과학으로 이루어진 진리의 영역이어도 별반 다르지 않다. 경험적 추론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사람들도 나름의 근거를 제시하고 자신의 ‘감’이 휴리스틱에 기반한 블링크의 법칙이 적용된다고 믿는다. 문제는 이에 대한 반론 가능성을 차단하며 합리적 판단과 논리적 근거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가르치려 들거나 삶의 목적과 가치, 윤리적 판단에 정답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흔하다. 항상 고민하고 끊임없이 사유한다는 착각이 불러오는 편견과 오류가 작동하는 방식은 대개 그러하다.


심지어 수학이나 과학의 세계도 별반 다르지 않다면 사회, 정치, 종교, 문화, 예술 등 인간의 주관적 해석과 가치 판단의 영역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분법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종류의 인간과의 거리두기는 자기 삶의 질적 향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거르고 잘라내야 하는 게 암세포만이 아닐 터. 벵하민 라바투트는 독특한 방식으로 세상, 아니 인간에 한발 다가서기를 시도한다. 모두가 거리두기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문학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려는 자들의 수고는 애처롭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아주 조금 이해할 가능성이 커진다. 그들이 활용하는 도구와 그들의 관점을 잠시 빌릴 수 있는 기회는 오로지 몰입의 독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책을 읽을 수 있는 권리, 아니 좋은 책을 골라 읽어야 하는 능력은 자기 삶의 유한성에 기반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 애써 노력하고 훌륭한 텍스트를 선별하고 깊이 사유하며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깨닫는 과정이 자길 삶의 등급을 결정한다고 믿는다. 


때때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심리학과 생물학, 인류학과 사회학이 동원된다. 그래도 번번이 실패하는 건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에 비해 세상을 이해하는 데는 관찰과 실험이 필요하다. 지식과 관점이 세상을 이해하는 척도다. 수학과 과학은 물질계를 바라보는 프레임을 제공한다. 단편 「프라시안 블루」는 허구의 문장이 단 하나밖에 없다는 고백이 놀랍지 않다. 현실이 소설을 능가하는 놀라움을 매일매일 전하고 있지 않은가. 반지하에서 숨진 일가족의 뉴스를 능가하는 픽션이 가능한가. 20세기에 벌어진 인류의 참상과 21세기의 일상이 겹친다. 누군가의 절규는 여전히 누군가의 돈과 권력과 맞바뀐다.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소설은 역사적 진실, 과학적 사실 사이와 사이의 공백을 메운다. 현실을 비틀어 소설을 만드는 대신, 과거를 뒤적여 빈틈을 이어붙이는 과정 또한 훌륭한 이야기가 아닌가. 


슈뢰딩거와 하이젠베르크, 슈바르츠실트와 모치즈키 등 세계사에 족적을 남긴 천재 수학자와 과학자를 기릴 목적의 소설들은 아니다. 인류가 살아온 과거를 돌이켜 보는 건 현재의 원인을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 때문이다. 어쩌면 그보다는 미래를 내다보고 싶은 욕망 때문일까. 드라마틱한 과학사가 소설로 읽히는 느낌은 나비가 꿈을 꾸는 현실을 보여주는 장자의 상상력이 재현되는 듯하다. 소설은 소설일 뿐 현실이 아니다. 현실은 현실일 뿐 소설이 아니듯. 그렇다면 현실같은 소설, 소설같은 현실은 어쩌란 말인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비극은 비로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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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 - ‘신이 죽은’ 시대의 내로남불
허경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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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옳은 것만큼이나 잘못된 것을 진실하게, 진심으로, 열렬히 믿을 수 있다. - 182쪽

객관적 ‘사실’에 대한 확신,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진실’이라고 믿음 앞에서 계속 흔들린다. 각자의 기준과 판단으로 선택하고 결론 짓는 일이 반복되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다른 생각 앞에서 당황한다.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인정하겠다는 똘레랑스의 정신을 실제 삶에 적용할 생각은 별로 없다. 옳고 그름, 선과 악, 밝음과 어둠, 좋음과 나쁨의 경계선이 분명하게 보이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 

진리는 없고, 관점만이 존재한다. 또는 진리는 없고, 해석만이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사실은 없고 관점만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니체의 전매특허가 아니다. 복잡, 다변한 세상에서 사실과 진리는 순간에 머문다. 일시적 현상에 불과한 듯 세상은 혼란스럽고 목소리 큰 놈들의 아우성에 귀가 아프다. 허경이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신경 쓸 것 없다. 왜 우리가 각자의 내로남불과 편향성을 수정하지 못하는지,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니 어쩔 수 없다는 면죄부가 가능한지, 문명 발달과 이성의 힘으로 합리적인 토론과 공론의 장에서 합의가 불가능한 이유가 무엇인지 쉼없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럴 수 있을까. 승리가 선이고, 성적이 모범이며, 재산이 인격인 사람들의 태도는 바뀔 수 있을까. 사람들의 관점, 편견, 인식틀은 어떻게 형성됐을까.

마르크스의 말대로 ‘무지는 논증이 아니다.’ 논점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의 믿음이 타당함을 주장하는 사람을 종종 만난다. 어떤 사건, 사태에 관한 누군가의 믿음이 얼마나 견실한가의 문제와 그 사람이 믿는 내용이 옳은가의 문제는 전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근대 이후 과학과 철학 분야에서 사라진 ‘객관적 사실’ 운운하며 자신의 생각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심지어 타인을 설득하고 수용하지 않는 상대를 비난한다. 

이렇게 심각한 상황을 연인, 가족, 친구, 동료, 이웃과의 대화에서 매일 마주하지만 웃으며 넘어가고 애써 외면하거나 그저 서로 다른 것 뿐이라며 위로한다. 과연 그런가.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와 “너는 맞고 나는 틀리다”는 동어반복에 불과할까. 허경이 풀어내는 <2021년 대한민국 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내가 믿는)는 ‘일반적 인식론의 무의식적 대전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려는 의도>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로운 건 사람들은 왜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하는지, ‘신념’에 가득한 채 세상을 살아가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내로남불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판단과 남의 행위에 대한 판단에 일관성이 결여된 경우를, 곧 ‘자신의 행동과 타인의 행동을 재는 잣대가 다른 경우’를 도덕적으로 비판하는 담론이다. 내로남불 담론의 한복판에 선 정치권의 주류 세력인 보수와 진보, ‘국민의힘’과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날리는 펀치가 허공을 스칠 뿐일 수도 있다. 진영논리에 갇힌 사람들에게 의심하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과정을 기대하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감정적 선동에 익숙한 사람들, 무비판적 뉴스 소비자들, 팬덤 정치의 수혜자들은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라는 생각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이 좀더 진실에 가깝고 그것을 위해 열심히 싸운다는 도덕적 정당성으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윤리적 기준ethical standards, 자유freedom의 평등equality, 공정fairness과 정의justice은 ‘누가,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그 기준을 정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저자는 이 지점을 톺아보기 위해 칸트의 정언명령, 홉스의 리바이어던, 로크의 통치론, 존 롤스의 ‘무지의 베일’, J. S. 밀의 자유론을 들고 나왔다. 성인중심주의자, 19세기 백인 유럽중심주의자, 제국주의자, 오리엔탈리스트인 밀의 한계에도 불구하고(물론 다른 고전의 한계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쉽지만 시대 상황과 사상가들의 환경을 고려해서 이 부분은 다루지 않는다) 현재 우리 사회의 갈등과 분열 양상을 고찰하는데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물론 이 이야기는 오히려 개인과 개인사이의 대화 국면, 삶의 목표과 가치에 대한 개인의 선택, 동일한 사건과 상황에 대한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는 장면에서 더욱 필요해 보인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가 맞을까. 아니,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나인가. 나는 왜 어떤 기준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판단하고 선택하며 살아갈까.

흔들림없는 편안함. 어느 침대 회사의 광고 카피다. 인간은 흔들리는 존재의 가지 끝에서 불안을 느낀다. 그 불안은 자유를 위해 마땅히 치러야 하는 세금 같은 것이다. 처음 바닥을 찍을 때 견디지 못하면 그 다음 바닥이 불안하다. 어차피 파도는 밀려온다. 아무리 발버둥 우아한 자유형으로만 헤엄칠 수 없다. 때로는 숨을 참고 수면 아래로 내려가 고요한 잠영을 해야 할 때가 있다. 바닥을 발을 딛고 힘차게 떠오르고 싶을 때까지 그대로 있는 순간은 즐길 수는 없을까. 소리가 없는 세상, 침묵과 정적이 주는 편안함이 수면 위의 소란한 세상과 맞닿는 지점의 경계는 분명한가. 너는 맞고 나는 틀릴까. 

나는 ‘철학이 건강한 불편함을 지향한다’고 믿는다. - 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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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과학 - 혐오 범죄를 일으키는 인간 행동의 어두운 비밀
매슈 윌리엄스 지음, 노태복 옮김 / 반니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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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과 사회학에 관한 대다수 연구가 ‘평균적인’ 백인 중산층 소년, 또는 더 일반적으로 서양의Western, 교육을 받은 Educated, 산업화된Industrialized, 부유하고Rich, 민주적인Democratic 사회―WEIRD 사회―의 구성원들이 인간 행동에 관한 과학 연구의 주된 피실험자들이다. 그래서 인간 행동에 관한 지식의 대부분은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없고 WEIRD 사회의 구성원들만을 대변한다는 주장이 나왔다.(J. Heinrich er al., ‘The Weirdest People in the World?’, Behavioral and Brain Sciences 33(2010), 61-83.) 실험심리학의 아버지 분트부터 프로이트를 거쳐 최근의 다양한 심리실험에 이르기까지 대상은 주로 WEIRD가 아닐까. 단순한 의심을 넘어 대체로 우리 사회의 주류(술 좋아하는 아재들?)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한국 사회의 기준이 될 수는 없지 않을까. 586으로 과대 상징되는 50대가 그렇다.(신진욱은 『그런 세대는 없다』에서 이 문제를 적확하게 짚어낸다. 1~2%에 해당하는 80년대 대졸 엘리트 5060세대와 2030 세대와의 갈등의 본질일 수 없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혐오, 불평등, 공정과 정의에 대한 숱한 논쟁과 주관적이고 감정적 해석들이 대체로 그러하다. 우리 사회의 갈등 구조가 단순히 성별과 세대로 표현될 수는 없다. 경제적 세습을 넘어 문화, 상징자본의 격차, 세대 내 교육 환경, 비정규직, 노인 빈곤, 에너지와 환경 문제 등 심각한 사회 문제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혐오’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게 아닐까. 

범죄학 교수 매슈 윌리엄스는 대학 졸업 즈음에 게이 바 앞에서 혐오 폭행을 당한 경험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공격은 깊고 고통스런 상처를 남긴다. 선택할 수 없는 모든 생래적 조건에 대한 비난과 폭력은 자기검열과 자기부정으로 이어질 만큼 위험하다. 여자, 아재, 노인, 성 소수자, 인종, 장애, 지역 등 거의 모든 차이가 차별로 이어지고 혐오로 표현되는 과정은 ‘왜?’라는 본질적 의문을 남긴다. 인간이 그런 존재로 태어나는지, 사회화 과정에 의한 편견일 뿐인지 그 논쟁은 여전히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우리가 가진 혐오 능력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는 특질이다. 진화를 통해 얻은 신체적, 심리적 구조가 그러하다. 다만 이 속성이 촉진되는 요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게 저자의 관심사다. 어느 사회, 어느 시기에 혐오에 노출되어 편견이 혐오 범죄로 이어지는지 살피는 과정은 내 안의 나와 또 다른 나를 이해하는 일과 다름없다. 

혐오에 대한 범죄학 지식의 상당수는 편견에 관한 연구에서 나온다. 편견은 고정관념, 즉 조잡한 일반화와 범주 나누기를 바탕으로 한 개인 또는 사람들의 집단에 부여된 특징을 먹고 자란다. 편견은 어떤 이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감정이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을 바탕으로 결정될 때 생겨난다. 그러므로 편견은 심리학 용어로 외집단(‘그들’)과 내집단(‘우리’)에 초점을 맞춘다. - 29쪽

저자 스스로 경험한 혐오에 대한 물리적 폭력만큼 보편적인 혐오의 형태는 외면과 냉소와 침묵이다. 구별 짓기가 생존을 위한 유전적 본능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은 이 책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하며 실험결과를 통해 입증된 태도를 설명한다. 그러나 그것이 맹목적 내집단에 대한 충성과 우월감으로 자리 잡는 순간 편견과 혐오가 무럭무럭 자란다. 성별, 세대, 지역, 종교, 인종 등 그 분화 과정과 미묘한 차이에 따른 심리적 거리는 분류나 증명이 불가능하다. 지극히 개별적인 데다 미묘하고 복잡한 요소가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차이와 다름의 다른 표현인 편견과 혐오는 어쩌면 인간의 본능에 영역에 속한다는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옥시토신은 혐오 범죄 발생에 관여할지 모르는데, 특히 가해자가 그걸 생성해낼 가능성이 높을 때(가령, 어린 아이를 돌보는 부모일 때) 그리고 이질적 외집단(가령, 다른 인종)한테서 위협을 느낄 때 그렇다.”(181쪽)라는 지적이 이를 증명한다. 호르몬에 내재된 생존 본능에서 촉발된 혐오가 정당화될 수 있을까. 태어난 그대로, 본능적 자연인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은 없다. 혐오의 과학은 사실 부단한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문명사회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다. 

야만의 시대를 지나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의 토대가 마련된 민주주의는 차별을 넘어 자유와 평등, 정의와 진리, 공정과 상식을 추구하려 애쓴다. 저마다의 옳고 그름이 분노와 증오와 차별과 폭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혐오가 벌어지는 실세 상황을 통해 뇌에서 벌어지는 현상뿐 아니라 개인과 집단의 혐오를 면밀하게 들여다본다. 그런 다음 ‘촉진제’에 집중한다. 무엇이 혐오 폭력을 일으키는 촉진제 역할을 하는가. 왜 일부만 그 폭력을 실행에 옮기는가. 이는 물리적 혐오와 폭력에서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댓글로 빚어지는 키보드 워리어들의 혐오문화를 성찰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나는 맞고 너는 틀릴까. 

저자가 제시하는 혐오를 멈추게 할 해결책 일곱 가지가 추상적으로 들린다. 핵심은 ‘관심’이다 의식적 노력 없이 변화는 불가능하다. 혐오는 고정관념과 편견에서 싹튼다. 관습적 사고 습관적 행동이 무의식적 혐오에 동조하는 방법이 아닌가.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삶은 얼마나 편안하고 안전한가. 물이 흐르는 대로 따라갈 줄 몰라서 매슈 윌리엄스가 평생 혐오 범죄에 매달렸을까. 불편과 불안은 타인이 아니라 내 안의 무엇이 만든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자주 잊고 산다. 

혐오를 멈추게 할 일곱단계

1. 가짜 경보를 알아차려야 한다.

2. 우리와 다른 이들에 대한 섣부른 판단에 의문을 던져야 한다.

3.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 접촉하는 것을 꺼려서는 안 된다. 

4. 시간을 내서 ‘다른 사람’의 처지가 되어보아야 한다. 

5. 분열을 조장하는 사건이 우리를 노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 

6. 필터 버블을 터뜨려야 한다.

7. 우리 모두는 혐오 사건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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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 시대의 사랑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7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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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의 마들렌처럼 마르케스의 소설에선 아몬드 향이 진하게 배어 있다. 

그는 플로렌티노 아리사를 통해 사랑의 유효기간이 53년 7개월 11일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사랑(혹은 사람)이 어떻게 변하니?” 남자의 외침이 허공에 흩어지는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이 공허하게 흩어진다. 심수봉의 말대로 사랑밖에 난 모른다고 고백하듯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낭만적 사랑과 연애의 결정판을 보여준다. 근대 이전 인류의 최고 발명품이 종이, 화약, 나침반이라면 근대 이후 최고의 발명품은 자유연애와 낭만적 사랑이다. 개인의 삶에 주어진 자유와 인간 평등사상은 누구든 자기 욕망과 의지에 따라 짝짓기를 시도할 수 있는 원시시대로의 회귀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칠까. 상대가 누구든 내가 어떤 사람이든 우리에겐 사랑할 자유가 권리가 있다. 물론 그 사랑을 거절하고 이별할 수 있는 티켓을 손에 쥐고 있다는 사실도 잊지 않는다. 페르미나 다사의 특별함이 서사의 중심을 이룰 수 없다. 이 소설은 후베날 우르비노와 플로렌티노 아리사 그리고 페르미나 다사의 삼각 관계와 거리가 멀다. 각자가 맺은 관계양상은 전혀 다른 형태와 의미를 지니며 삶의 시기에 따라 독립적 형태로 나타난다. 만약 후베날 우르비노가 아니어도 플로렌티노 아리사와 페르미나 다사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노년의 재회에는 큰 영향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모든 사람은 자기 삶의 과정과 결과를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절반의 필연과 절반의 우연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 식민지였던 콜롬비아는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다. 1819년 독립한 후에도 금과 은 같은 보물을 스페인으로 보내고 아프리카 노예시장으로 번성했던 선명을 기억을 항구도시 카르타헤나에 새겨져 있다. 아마도 마르케스는 카리브해의 뜨거운 태양과 조국의 역사와 문화가 짙게 드리운 공간을 배경으로 전근대 사회의 모순과 식민지 시절의 고통, 낭만적 사랑과 열정을 에로스적 욕망으로 풀어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인간의 본능과 배치되는 모든 규범과 질서에 대한 저항은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분명한 기준이다. 집단과 전체주의적 삶에서 벗어난다는 건 가부장적 질서와 여성의 질곡으로부터 자유를 의미한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첫발을 내디딘 남아메리카의 관문에서 ‘늙음’을 거부하고 예순이 되기 전에 자살한 제레미아 드 생타무르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소설은 아이러니하게도 칠순이 넘은 다음에야 비로소 사랑에 눈을 뜨는 플로렌티노 아리사와 페르미나 다사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소설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뒤집으면, 사랑은 “우리 목숨이 다할 때까지.”(마지막 문장)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첫 문장)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영화 『세렌디피티』에서 케이트 베켄세일이 자신의 이름과 연락처를 적어 헌책방에 판 책이 바로 이 소설이다. 존 쿠삭의 ‘지폐’와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운명적 사랑과 낭만적 연애로 포장된다. 우연을 가장한 음험한 욕망은 반드시 현실을 능가한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세기말(19세기말)과 새로운 시대(20세기)를 시대의 사랑은 콜레라만큼 치명적이고 사회적 질병으로 다뤄져야 할만큼 혼란스럽다. 전통과 문화는 단단한 보수적 이데올로기와 관습적 사고에 불과한 고정 관념이다. 선악의 판단이 불가능한 선택적 기호와 취향의 결과물이다. 우르비노의 계급과 계층, 종교적 태도가 만든 사랑과 결혼은 육체적 욕망과 부딪쳐 혼란스런 결과를 초래한다. 겉으로 페르미나 다사와 쇼윈도 부부로 원만하고 평온한 삶을 유지하지만 페르미나의 개인적 태도와 아버지의 욕망이 투영된 결혼은 결코 ‘행복’과 거리가 멀다. 플로렌티노 아리사에게 622라는 숫자에 아로새겨진 여인들은 어떤 의미일까. 페르미나 다사에 대한 사랑은 광기와 집착을 넘어 진정한 사랑이라고 명명하고픈 낭만주의자들의 바람은 이루어진 걸까. 

1927년생 마르케스가 58세가 되던 1985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와 전혀 다른 성격의 소설이다. 팬데믹을 진지하게 다루며 인간의 실존적 의미를 묻는 카뮈와 달리 마르케스는 수인성 전염병인 콜레라 6차 대유행의 끝물을 경험한 세대에게 과연 사랑의 본질은 무엇이며 에로티즘은 사랑의 어떤 표정에 해당하는지 묻고 있는 듯하다. 100년 쯤 지난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코로나 시대의 사랑’을 묻는다면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 환멸, 연민, 추억, 후회로 점철된 소설 속 주인공들의 사랑과 체스, 사진관, 앵무새, 망고나무, 가지, 테레빈유, 돈 산초 호텔의 거울에 투사된 마르케스의 열망은 어떻게 읽어내야 할까. 낭만적 사랑의 개막 혹은 종말은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변비처럼 꽉 막힌 채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소설의 알레고리가 마르케스가 경험한 시대에 대한 향수이든 현대 사회의 사랑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든 상관없다. 뜨거운 태양과 마그달레나 강의 축축하고 끈적한 분위기가 시원한 배설이 불가능한 변비의 고통을 생생하게 전한다. 

“난 절대로 노인이 되지 않을 거야.”라는 제레미아 드 생타무르의 절규와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은 나를 창녀로 만들어주었거든요.”라는 나사렛 과부의 고백보다 “공적인 생활의 과제는 두려움을 지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부부 생활의 과제는 지겨움을 극복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라는 페르미나 다사의 깨달음과 “훌륭한 결혼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 안정이오.”라는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조언보다 나이브하게 들린다. 우리는 각자 자기 삶의 주인공이다. 무엇이 어떠하든 자기 몫의 사랑, 욕망, 환멸, 추억, 후회, 연민, 환희, 절망을 남긴다. 

에바 일루즈는 『사랑은 왜 끝나나』에서 “19세기 구애의 대부분은 처음부터 사랑을 선포하고 이루어진 것이지, 남녀가 서로 사귀며 키운 감정이 아니었다. 구애를 시작하면서 사랑을 선포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감정의 불확실성을 덜어주었다. 아니, 더 나아가 사랑한다는 고백을 처음부터 듣고 시작하는 감정적 확실성은 여성이 남성을 만날 조건”이었으며, “20세기의 흐름과 더불어 우아함과 매력과 물질적 풍요와 애정 생활을 가꾸는 책임은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 되었다. 이런 프로젝트를 위한 중요한 문화적 자원은 소비문화가 제공한다. 그 제공 방식은 다양하다.”고 분석했다. 우르비노와 플로렌티노의 사랑은 19세기식 연애 방식이 종말을 고하지 않은 상태에서 20세기식 사랑법을 시도했기 때문에 페르미나 다사는 극도의 혼란을 느꼈을 법하다. 그리하여, “전근대의 구애는 감정으로 시작해 섹스로 끝났다. 그리고 전근대의 섹스는 죄책감과 불안감으로 불러일으킬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현재의 관계는 (쾌락적) 섹스로 시작해 어디서부터 어떻게 감정을 가꿔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관계를 두렵게만 여기는 불확실성과 씨름한다. 몸은 감정을 표현하는 무대로 기능해왔다(“좋은 관계는 좋은 섹스로 표현된다”는 상투적 표현을 보라). 그러나 감정은 성적 상호작용과는 관계없는 것이 되었다.”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낭만적 사랑과 에로티즘 사이의 혼란과 갈등은 콜레라 시대를 지나서는 좀체 찾아보기 힘든 선택의 영역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관점으로 플로렌티노 아리사, 후베날 우르비노, 페르미나 다사의 사랑법을 평가할 수는 없다. 그들은 전근대적 전통과 종교적 신념, 자본주의가 형성한 신흥 부르주와 계급 그리고 낭만주의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영원한 사랑’에 대한 꿈을 간직하고 있다.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 또한 이 소설을 읽으면서 ‘사랑’의 의미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고 토로한다. 기혼과 미혼이 바라보는 ‘결혼’이 달랐고 후베날 우르비노와 페르미나 다사의 ‘거의 사랑’에 대한 의견도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유, 결혼을 결심한 순간, 이별의 아픔과 그리움이 교차했을 터. 사람이 산다는 건 끊임없이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의 반복에 불과한 건 아닐까.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사랑을 광기 혹은 집착이라고 부르든 영원하고 순수한 사랑의 표본이라 생각하든 우리는 단 한 번 뿐인 인생에서 각자의 사랑에 대해 깊이 고민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어떤 사랑도 틀린 게 아니라 다를 뿐이다. 남의 사랑을 저울질하고 평가하고 판단하지만 않는다면, 조금 더 다양한 방식의 사랑에 대해 관대할 수 있다면 나사렛의 과부처럼, 사라 노리에가처럼, 아메리카 비쿠냐처럼 각자의 방식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한 여자가 없었던 까닭에, 그는 모든 여자들과 동시에 함께 있기를 원했다.’ 하지만 페르미나 다사가 아닌 여자들 입장에서는 아리사를 사랑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모든 작가와 독자에게 아직도 사랑에 대해 할 이야기가 남아 있어 다행이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사랑에 대해 아직도 할 이야기가 남아 있는 이유가 사랑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며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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