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론 한길그레이트북스 144
볼테르 지음, 송기형.임미경 옮김 / 한길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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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이후 벌어졌던 참혹한 살육과 잔인한 복수는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제노사이드의 기원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그리고 유대교는 모두 하느님을 섬깁니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식들 간의 처절한 증오와 절멸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동이라고 믿을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이 수없이 벌어졌습니다. 야만의 시대를 지나 이성의 빛이 스며듭니다. 볼테르는 ‘이제 그만!’이라고 외칩니다. “고마 해라, 마이 묵읏다 아이가.” 영화 <친구>의 대사가 생각났습니다. 철저한 가톨릭 신자인 볼테르는 개신교를 이해할 수도 수용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던 거죠. 그러나 생각이 조금 다르다고 해서, 하느님을 믿는 방법이나 성경 해석 몇 줄 때문에 폭력과 살인을 계속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이성적 호소이자 애타는 절규입니다. “진짜 그만들 하라고!!!”

물론 볼테르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한 사람의 목소리가 세상을 울리고 한 사람의 행동이 변화를 일으키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타인의 공감과 변화를 이끌어내는 건 설악산 흔들바위를 옮기는 일보다 어렵습니다. 지지하는 정당을 바꾸고 응원하던 프로야구 팀을 바꾸는 일보다 훨씬 힘듭니다. 그러니 그만 싸우고 이제 나만큼 너도 중요하다는 사실만큼만 인정하자. 이해할 수 없어도 서로 죽이지는 말자. 맘에 들지 않는다고 칼로 찔러서야 되겠느냐.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의견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말할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 볼테르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볼테르의 이 말 한마디가 똘레랑스tolérance의 본질이 아닌가 싶습니다. 민주주의의 기본질서는 획일과 강요가 아니라 다양성에 대한 존중입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토론과 타협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1534년 마르틴 루터가 독일어로 신약을 번역 출간합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불의 발견, 직립보행, 농경으로 인한 정착생활 이후 가장 강력한 혁명적 변화였습니다. 지식의 독점 시대가 종말을 고했습니다. 라틴어로 된 성경을 읽고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해주던 성직자들의 충격보다 다이렉트로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 된 사람들의 감동이 훨씬 컸습니다. 그러니 이제 누구나 자기 생각과 믿음을 갖는 시대가 열립니다. 종교적 도그마는 종파와 무관하게 한 개인을 넘어 집단적 무의식으로 자리잡습니다. 신들린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이성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볼테르는 지난 역사를 돌아보며 피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칼라스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써내려간 이야기는 한숨과 울분이 뒤섞여 있고 이성과 감정이 엉켜 있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종교를 떠나 현재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입니다. 모임에 참석하신 분들이 들려주신 이야기들이 각자의 상황과 위치에서 어떻게 타인과 세상이 작동하고 있는지 간접적으로 설명해 줬습니다. 특히 자본주의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경제사범이나 유아 성범죄에 대한 불관용, 편견과 불안은 인정욕구에 대한 부작용이라는 지적,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생존 수단으로서의 의도적 냉소와 본능적 구별짓기 등에 대한 이야기가 가슴 한켠을 두드렸습니다.

관용은 남의 잘못 따위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똘레랑스와는 맞지 않는 번역어입니다. 개념 자체가 다르니 새로운 한국어 단어를 만들거나 번역어를 그대로 사용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컨실리언스consilience라는 개념을 ‘통섭’으로 설명한 최재천과 이후의 논쟁들이 대표적입니다. 잘못 사용되면 ‘용서’ 혹은 ‘너그러운 태도’ 쯤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똘레랑스는 상대방을 향한 존중입니다. 타인의 생각과 태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내가 존중받는 건 불가능합니다. 전제조건은 아니겠으나, 개무시 당하지 않으려면 어느 누구도 어떤 이유로도 무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별, 종교, 인종, 나이, 직업, 학력, 장애, 성적지향, 출신지역에 따라 ‘차별’하는 마음과 태도가 내안에 숨어 있다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하고 티나지 않게 숨겨야 하는게 세상을 살아가는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기본 도리이며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입니다.

사회심리학자 고든 올포트는 “관용의 한 중요한 요인은 우리가 그리 잘 알지 못하는 어떤 능력이다. 이 능력은 때때로 공감empathy이라고 불리는데, ‘다른 사람을 파악하는 능력’, ‘사회적 지능’, ‘사회적 감수성’이라고 할 수도 있고, 풍부한 의미가 담긴 독일어 단어를 비리자면 ‘인간 이해Menschenkenntnis’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공감하지 못하면 차별과 편견이 생기고 똘레랑스와도 멀어집니다. 말하자면 사회적 감수성은 인간의 본능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한 인간의 능력에 해당하므로 부단히 노력하고 꾸준히 학습해야 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키케로는 “Cui bono(누가 이득을 보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지 살피라는 말입니다. 이해관계에 따른 관용과 불관용이 결정된다면 이기적 욕심과 똘레랑스를 착각하는 일일 겁니다. 모임에 참석하신 분의 지적대로 똘레랑스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박해’하지 않는 정도의 합의도 이뤄지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일상생활은 물론 정치,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불관용의 정신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사람들이 인식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튜브 알고리즘에 길들여져 점점 좁고 깊은 자기만의 프레임 속에 갇혀 살게 됩니다.

19세기 말에도 볼테르처럼 용감하게 ‘나는 고발한다’라고 외친 에밀졸라는 드레퓌스 사건을 다시 한번 세계사의 중심으로 끌여들입니다. 프랑스의 지적 전통과 지식인들의 단호한 목소리가 부러울 따름입니다. 홍세화의 『나는 파리의 텍시 운전사』(1995)가 출간된지 30년이 다 되어 갑니다. 당시 똘레랑스에 대한 관심만큼 우리의 생각, 말과 행동은 조금 나아졌을까요. 우리 사회는 나와 다른 타인의 생각과 태도를 ‘인정’하고 대화하며 타협하는 문화를 갖게 됐을까요. 기득권의 카르텔에 침묵하며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눈감고, 주변 사람들과 내 일상에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면 우리가 사는 내일은 또 어떤 모습일까요. 일요일 밤 늦은 시간까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이런저런 생각에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오늘 아침 모두들 각자의 삶 속으로 또 치열하게 달리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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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 - 사회심리학으로 본 편견의 뿌리
고든 올포트 지음, 석기용 옮김 / 교양인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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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랫동안 중립과 객관에 대해 생각했다.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판단과 선택은 누구에게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가장 합리적 선택을 위해 노력하지만 결과에 따라 자기 선택을 평가한다. 자신을 객관화하고 신중하게 상황과 맥락을 파악하려는 ‘태도’는 삶의 모든 장면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인생은 결국 그 선택의 총체적 결과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무언가를 듣고 보고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배우지 못하거나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몰라서 저질렀던 실수와 달리 알면서 반복하는 말과 행동은 한 인간의 됨됨이를 결정한다. 인지부조화를 겪으며 자신을 합리화하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자기 성장을 통한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얻지 못하면 타인과의 비교, 경쟁에서 이겨야 성공한 삶이라고 착각한다. 이는 자신뿐 아니라 타인의 삶을 평가하는 잣대로 기능한다는 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사회심리학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고든 올포트의 『편견The Nature of Prejudice, 1954』은 편견의 뿌리를 파헤친다. 언제나 그렇듯 당대의 문제를 반영한 역작들은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고 미래를 준비하는 데 혜안을 제공한다. 인종의 용광로인 미국의 가장 큰 힘은 ‘다양성’에서 나온다. 무지개처럼 어울려 저마다 다른 빛깔로 조화를 이루는 세상은 상상만으로도 아름답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고 기득권을 거머쥔 계층과 계급의 사다리 걷어차기는 혁명을 꿈꾸는 자들의 의지보다 굳세다. 백인과 흑인은 단순히 피부색의 차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인종 차별의 역사를 극복해온 과정이 인류의 문명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 장애인, LGBT 등 현대판 흑인에 대한 차별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우리에게 ‘편견’은 심각한 사회 문제이기 전에 개인의 심리 문제다.

고든 올포트는 편견은 모든 나라에서 모든 세대에 걸쳐 존재해 왔으며 편견은 사실상 심리 문제에 해당한다고 분석한다. 도덕적 분노가 어느 정도 유발되느냐 하는 문제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부정적 행동의 강도는 ‘1. 적대적인 말antilocution 2. 회피avoidance 3. 차별discrimination 4. 물리적 공격physical attack 5. 절멸extermination’의 순서로 전개된다. 편견을 구성하는 두 가지 기본 요소는 ‘잘못된 일반화와 적개심’이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기인한 적개심과 분노는 단단한 고정관념으로 굳어진다. 개인적 경험을 일반화하고 간접 경험과 관찰의 결과를 토대로 위험을 회피하고 생존했던 습관은 공정한 세상, 민주적 태도와 거리가 멀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습성을 옹호하고 무엇이든 힘들게 얻을 것을 내놓기 싫어하는 손실회피 경향을 가진 인간의 공동체 질서를 바로잡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누구든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을 전제로 정책을 입안하고 법률을 입안하며 판결을 내리기 어렵다. 삼권 분립은 이상일 뿐이며 가정과 직장 혹은 어떤 조직이든 자기 이익에 충실한 욕망을 제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의 속성에 해당하는 편견은 순기능과 역기능을 함께 지닌다. 생존을 위해 위험을 외피하고 안전을 담보하기 위한 진화생물학적 습성이 기인했을 수도 있다는 온갖 실험과 본능에 절망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배우고 익히며 세상을 살아가고 한발씩 앞으로 나아가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믿고 있지 않은가. 자유, 평화, 평등 같은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인류가 흘린 피와 땀을 떠올리면 폭력과 절멸 전 단계에 해당하는 편견과의 싸움이 왜 현재진행형인지 깨닫게 된다. 나 혹은 우리와 달라 품게되는 적개심 그로 인한 회피와 단절은 일상에서도 반복된다. 그것이 개인의 평온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나쁘지 않은 방법일 수 있으나 타인과 사회를 향한 태도, 즉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는 순간 ‘문제’가 된다. 주변을 돌아보라, 정답을 말하는 사람과 나만 옳은 사람과 해봐서 안다는 사람과 누구보다 확신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편견의 반대편에 놓은 소중한 가치가 관용이다. 관용적 태도를 갖기 위해서는 ‘공감 능력’이 필요하다. 저자는 ‘다른 사람을 파악하는 능력’, ‘사회적 지능’, ‘사회적 감수성’이라고 할 수도 있고, 풍부한 의미가 담긴 독일어 단어를 빌리자면 ‘인간 이해Menschenkenntnis’라고 할 수도 있는 태도가 바로 관용이라고 설명한다. 개인의 심리 역동을 살피고 역사, 사회문화적 요소들을 점검하며 편견과 차별의 뿌리와 작동방식은 물론 그 해결방법까지 제안하는 과정은 놀랍다.

개인은 물론 사회 공동체가 발전하는 과정에는 이렇게 꾸준하고 진지한 고민이 디딤돌 역할을 한다. 어느 방향을 위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논의하는 시간이 절실하다. 대증요법으로 던지는 정치인들의 생각없는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함께 읽고 생각하며 신중하게 토론하는 과정에서 편견을 바로잡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건 불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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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하는 인간 - 확증편향의 시대, 인간에 대한 새롭고 오래된 대답
박규철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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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건한 믿음과 단단한 신념의 반대편에 끊임없는 질문과 합리적 의심이 앉아있다. 시소게임을 하듯 시대정신과 맥락에 따라 어느 한쪽으로 무게 중심이 기운다. 이는 단순히 근대 이후 과학의 발달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라고 오해하기 쉽다. 중세 신분질서의 붕괴와 이성의 빛을 따라 걷는 개인의 탄생이 인류 문명의 변곡점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몇몇 사람은 호모 두비탄스homo dubitans, 즉 의심하는 인간으로 살았다.

우리가 다른 동물과 달리 자연을 극복, 지배하게 된 계기는 호기심과 상상력 덕분이다. ‘why not?’이 주는 창조적 혁신이 문명 발달의 초석이 됐다. 여전히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들 건너편에는 생각한 대로 사는 소수가 앉아 있다. 누가 맞고 틀렸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과 태도의 문제다. 어떻게 살 것인지에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 고민의 이유와 방법,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은 조금씩 다르다. 근대 이전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이런 고민을 할 이유가 없었다. 태어나는 순간 직업이 결정됐고 삶의 길은 정해져 있으니 오히려 불안과 고독이 아닌 안정과 행복을 누렸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철학자들은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의심을 멈추지 않고 깊이 생각하며 프레임을 리프레임하기 위해 노력했다. 알은 하나의 세계다. 그 알을 깨고 나오는 고통의 쾌락을 모든 사람이 원하는 건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종교와 과학의 대립과 갈등은 서로 영역 다툼을 멈춘지 오래지만 접경지역에선 여전히 날선 논쟁이 그치지 않는다. 확고한 진리를 찾아 헤맨 인간의 갈급한 욕망도 여전히 계속되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사실만 확인하는 중이다. 니체는 그조차도 ‘사실fact은 없다. 다만, 해석이 있을 뿐.’이라며 인정하지 않는다. 평생 공부하고 생각한 결론이 겨우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 하나만은 알고 있다고 한 소크라테스의 ‘무지無知의 지知’는 여전히 유효할까.

박규철은 확증편향의 시대에 필요한 인간형으로 『의심하는 인간』을 제시한다. 이 책은 마치 거대한 ‘의심의 계보학’처럼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으로 시작된 아카데미 학파의 회의주의와 피론학파 그리고 중세의 아쿠스티누스와 근대의 몽테뉴에 이르는 의심 철학을 역사를 샅샅히 뒤적인다. 회의주의자들은 현실에 적응하기 어렵고 사람들에게 환영받기 힘들다. 어느 조직의 리더로도 적합하지 않다. 회의주의자의 건너편에는 독단주의자가 앉아 있다.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다. 상황에 따라 회의주의와 독단주의를 오가며 제 잇속만 챙기는 이기주의자는 이 책에서 다루지 않는다.

논의의 중심은 아카데미 학파와 피론 학파의 회의주의다. 아카데미 학파의 아르케실라오스, 카르네아데스와 피론 학파의 아네시데모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논리 싸움은 흥미진진하다. 두 학파의 차이를 확인하기 위해 이 책을 읽을 이유는 없다. 일반 독자라면 21세기에 소환된 고대 회의주의가 근대적 인간에게 미친 영향과 21세기에 다시 소환된 이유를 고민하는 정도면 충분해 보인다. 몽테뉴 이후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회의주의적 방법론’, 존 로크의 라이프니츠의 계몽주의, 프리드리히 니체의 《안티 크리스트》에 영향을 미친 회의주의는 삐뚫어진 시선, 부정적 관점과 거리가 멀다. 아이러니하게도 회의주의자로서 피론이 가장 강조했던 개념은 ‘마음의 평안’이었다. 아타락시아ataraxia를 위해서는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의심하고 질문하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진실에 대한 탐구는 그 전까지 ‘진실’이라고 믿던

모든 것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시작된다. - 프리드리히 니체, 3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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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의 방 - 내가 사랑하는 그 색의 비밀 컬러 시리즈
폴 심프슨 지음, 박설영 옮김 / 윌북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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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었을 때 까마득한 나이였지만 얼른 서른 일곱이 되고 싶었다. 혼란과 방황에서 벗어난 진짜 어른이지만 세상에 찌들지 않은 냉소적 태도로 당당하게 홀로 설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나이처럼 보였다.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책장을 넘기면서 내용과 상관없이 바다와 하늘을 섞어 놓은 색이라고 상상했다. 투명하게 맑은 민트를 떠올렸을까. 그렇게 회색으로 가득한 10대를 지나 초록과 파랑 같은 20대가 떠올랐다. 폴 심프슨의 『컬러의 방』은 지난 삶을 돌아보게 하는 기이한 미술책이다. 색의 연대기 같은, 빛의 역사를 기억하는 책은 어떻게 쓰게 된 걸까.

‘색은 영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색은 건반이고, 눈은 해머이며, 영혼은 수많은 현을 가진 피아노’라는 바실리 칸딘스키의 말에서 색의 자리에 그림 혹은 그, 그녀라는 단어를 놓아 보았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신념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자각의 순간을 위해 예비 된 절망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귀와 눈이 예민한 만큼 코와 입이 둔한 나는 가끔 흑백으로 세상을 본다는 개의 눈을 부러워한다. 미혹함이 없이 명암의 이분법적 세계가 오히려 분명하고 정확한 판단에 도움이 될 듯하다. 예민한 감각은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흡수하고 영혼을 쉽게 지치게 한다. 백색 소음 너머에 떠도는 말의 뉘앙스와 태도가 보이고 보이는 것 너머에 현상과 분리된 본질이 드러나는 순간은 생각보다 참담하다.

‘빨강의 방’으로 시작해서 노랑, 파랑, 주황, 보라, 초록, 분홍, 갈색, 검정, 회색, 하양 등 이 책에는 모두 11개의 방을 소개한다. 어느 방이 마음에 드는지 어느 방을 싫어하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각각의 방에 잠시 머물러 그 방의 색이 내는 소리를 들어보자. 소리가 보이고 색이 들리는 경험은 비현실이 아니라 초현실적 체험이다. 저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색의 역사와 의미를 단편적으로 소개한다. 거대한 벽에 다양한 에피소드와 사물들의 꼴라주. 저자는 형형색색 어지럽게 전시된 세상을 색으로 분류한다. 과거와 현재, 사람과 사물, 이미지와 상징, 상상과 현실을 뒤섞어 놓는다. 단편적인 이야기가 나열되지만 파편화된 조각이 아니라 같은 색을 향한 나름의 질서를 갖고 있다.

자연과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은 학습된 개념과 언어를 도구 삼아 구별된 방에 정리된 장난감처럼 뒤죽박죽인 경우가 많다. 매우 기능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외부 세계를 감각하고 인지 영역을 확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흘러가는 물처럼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사람도 많다. 관심과 재능에 따라 달라지는 개인의 취향 혹은 타고난 감각과 재능의 차이다. 절대음감이나 미각처럼 절대 시각이 있다면 색의 채도와 명도를 구별하는 능력이 아니라 각각의 색이 드러내는 아름다움과 비명을 구별하는 타고난 능력이 아닐까.

폴 심프슨은 사람들이 각자 좋아하는 색의 비밀을 가르쳐주려는 의도보다 사회적, 개인적 상징으로 기능하는 색의 역할과 의미를 나열하는 데 재미를 붙인 듯 수많은 이야기를 쏟아낸다. 역사, 종교, 스포츠, 비즈니스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색’과 연관된 스토리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래서 무슨 색을 좋아하시나요? 아니, 그래서 왜 그 색이어야 하며, 그 색은 왜 그런 의미를 갖게 되었는지 찾아 헤맨다.

이 책은 고흐, 모네부터 나폴레옹, 비틀스까지 수많은 사람이 등장한다. 지난 시대의 추억은 오늘을 사는 나, 혹은 우리의 삶을 위해 전제 조건이다. 영상과 사진의 시대다. 개인이 브랜드가 되고 차별화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현대사회에서 색에 얽힌 이야기들은 인간의 심리와 욕망뿐 아니라 대중문화와 놀이 문화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지식과 정보에 해당한다. 어느 분야든 그러하듯 타고난 재능과 감각에 지식과 노력을 더하면 빛을 발한다. 눈부시지 않아도 자기만의 방, 내가 좋아하는 색으로 가득한 방 하는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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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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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칼의 날카로운 칼날을 넘어서기는 어렵나니.

그러므로 현자가 이르노니, 구원으로 가는 길 역시 어려우니라. - 카타 우파니샤드

해석의 다양성을 열어 놓았더라도 ‘면도날’이 인간 구원의 가능성일 수는 없지 않을까. 그 날카로움보다 예리한 간극을 넘어서는 삶의 구도 행위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다. 서머싯 몸이 래리를 통해 말하고 싶은 궁극의 진리 혹은 삶의 불가해함을 이해하더라도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엘리엇과 이사벨로 대표되는 평범한 삶은 어떻게 수용 혹은 거부해야 하는가.

“내 생각엔 철학이나 종교 그리고 머리와 가슴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인생의 규칙 같은 것을 찾지 않았을까 하는데.”(349쪽) 철저하게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엘리엇 템플펀의 삶을 구술하듯 이야기하지만 사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래리 대럴이다. 실명으로 소설에 등장하는 작가의 목소리는 생경하지만 사실성과 신뢰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어떤 독자도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다만, 진지하게 호소하는 작가의 태도에 읽는 자세를 조금 고쳤을지도 모르겠다. 1944년 출간된 이 소설은 내게 비트 세대의 바이블처럼 읽히던 잭 캐루악의 『길 위에서』의 원조 혹은 유럽 버전으로 읽혔다. 두 작가 모두 헤르만 헤세의 『페터 카멘친트』를 읽었을지 모르겠으나 어느 시대든 청춘의 방황과 삶의 길 찾기를 다룬 이야기는 쉼 없이 양산된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어떤 시대에도 답을 찾은 사람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이후부터 1930년대의 프랑스 파리와 미국의 시카고 그리고 영국의 런던 등 유럽의 중심지역이다. 상류 사회의 위선과 속물근성을 대표하는 엘리엇 템플턴과의 연결고리가 그의 조카 이사벨, 이사벨의 연인 래리 등 주변 인물들과 관계로 넓혀진다. 20세기 초반 유럽이지만 신분 질서는 여전했고, 사회 계층 의식은 뚜렷했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세대의 이야기가 아니라서 보편적 공감을 이끌어내지만 당대 사회를 철저하게 반영하지 못해 아쉬움도 남는다. 의사의 길에서 벗어나 작가의 삶을 산 서머싯 몸은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내공을 쌓으며 ‘인간의 굴레’에 대해 고민한다. 달의 세계를 사는 래리와 6펜스의 세계를 사는 이사벨은 이수일과 심순애처럼 닿을 수 없는 곳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발 딛고 선 곳이 다르면 보는 풍경도 달라진다. 남녀 간의 ‘순수한 사랑’은 소설에서도 현실에서도 그 의미와 한계가 분명하다. 래리는 몸에게 “이사벨은 나쁜 여자는 아니지만 거짓말을 잘해요.”(39쪽)라고 말한다. 이사벨과 친해진 몸은 그레이와 결혼한 후 “거짓말은 그만두라고, 이사벨. 네가 래리를 포기한 건 다이아몬드와 모피 코트 때문이었잖아.”(343쪽)라는 말로 ‘현자 타임’을 갖게 한다. 그리고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 소피 맥도널드의 죽음에 대해 추궁하며 “거짓말은 그만하지, 이사벨.”(494쪽)이라고 지적한다. 세 번의 ‘거짓말’은 모두 이사벨을 향한다. 이상주의자 래리와 현실주의자 이사벨의 접점은 없다. 사랑도 삶의 일부지만 자기 삶에 사랑이 분명하게 놓일 자리는 현실이다.

면도날은 두 남녀 주인공을 예리하게 구분하고 현실과 이상의 거리를 획정하며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을 분명하게 나눈다. 또한 소설의 안과 밖을 이어보려는 서머싯 몸의 시도를 잘라버린다. 여전히 신과 인간의 문제, 즉 종교와 충돌하는 현실적 욕망을 들여다보는 듯한 기시감을 지울 수 없는 소설이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 읽었는지에 따라 모든 책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1874년생인 작가가 1944년 일흔에 출간한 소설은 자전적 경험과 구별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그만큼 인생을 살고 나면 굳이 지어내지 않아도 조금의 각색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한 권의 소설이 나올 만하지 않을까.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80쪽)라는 래리의 고백이 “그는 야망도 없고 명예욕도 없다.”(514쪽)라는 몸의 서술로 마무리 되는 소설이다. 한 인물에 대한 평가나 해석은 개별 독자의 몫이지만,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필경비 바틀비의 목소리만큼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래리의 목소리는 울림이 크다. 돈이 되는 일, 세속적 욕망을 달성하는 일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평생 먹고 살만큼의 돈이 있으니 배부른 소리를 하는 걸까. 래리는 결국 빈털터리로 뉴욕으로 향한다. 남은 삶이 어떠하든, 이 소설은 성자가 된 래리의 후일담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대개 누구나 그러하듯, 어떤 이야기를 듣고 나면 자연스레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분노하거나 위로를 받는다. 그 깊은 한숨의 의미는 각자 자기 삶의 목적지 혹은 방법과 태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구원을 향한 삶이 아니어도 자기만의 면도날은 무엇인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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