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그말리온 열린책들 세계문학 176
조지 버나드 쇼 지음, 김소임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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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비법은 나쁜 매너, 훌륭한 매너 또는 어떤 특별한 매너를 지닌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똑같은 매너를 보여 준다는 데 있다. 마치 3등칸이 없는, 한 영혼이 다른 영혼과 똑같이 소중한 천국에 와 있는 것처럼 말이지.”

성격과 매너를 바꿀 수 없는데 말투와 억양을 바꿀 수 있을까. ‘미션 임파서블’의 에단 헌트처럼 무모한 도전에 내기를 거든 히긴스와 피커링의 승자는 누구인가.

신화는 인류의 꿈이자 희망이며 현실 너머 환상의 세계다. 불안과 두려움 없는 인생은 불가능하듯, 고난과 좌절을 겪지 않는 신화는 없다. 현실원칙을 넘어 쾌락원칙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누군가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에 또 다른 이야기가 보태져 거대한 신화의 세계가 탄생했으리라. 그래서 신화는 영원히 이루지 못한 꿈으로 아쉬움과 미련을 남기리라.

“우물쭈물 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묘비명으로 유명한 극작가 조비 버나드 쇼가 소환한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는 희곡의 주인공 헨리 히긴스가 꽃파는 소녀 일라이자 둘리툴과 전혀 다르다. 목적과 태도 뿐만 아니라 개연성과 핍진성을 논할 수 없다. 신화는 신화이고, 희곡은 희곡일 뿐! 그러나 인간에겐 유사성을 토대로 비유와 상징을 즐기고 메타포의 감동을 즐길 줄 아는 DNA가 숨겨져 있다. 그것이 비록 왕의 DNA는 아닐지라도 신산스런 일상을 견디고 예술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본능적 유전자에 해당한다.

피그말리온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키프로스의 조각가다. 나그네들을 박대한 키포스의 여인들이 아프로디테의 저주를 받아 몸을 팔게 되었고 피그말리온은 이를 탄식하며 독신으로 살았다. 현대판 전신인형의 탄생을 예고하듯 피그말리온은 상아로 아름다운 여인을 조각해서 함께 생활한다. 갈라테이아라는 이름까지 붙이고 옷도 갈아입히고 키스도 하고......진짜 연인처럼 살았으니 인터넷 가십뉴스에 나올만한 이야기다. 심지어 아프로디테 축일에 참가해서 진짜 여자로 변하게 해달라는 불가능한 소원을 빈다. 그러나 신화가 아닌가. 그 소원은 이뤄지고 백년해로하며 아들까지 낳았다는 이야기.

형식은 로맨스를 예상하지만 사족처럼 붙은 후일담에서 밝히듯 이 작품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는 인간의 헛된 꿈과 욕망을 실현하며 대리 만족을 느끼게 하지만 조지 버나드 쇼는 신랄한 풍자와 비판의 대가다. 당대 영국의 신분 제도와 교육, 경제 문제 등을 다룬 이 연극이 뮤지컬, 영화 등 다양한 장르로 변용되어 사랑받는 이유는 빈민가 소녀를 통해 런던 상류 사회를, 인간의 허위의식과 사회적 가면을 폭로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언어학자인 히긴스는 끝까지 거리에서 꽃 파는 소녀 리자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관객의 기대와 예상을 벗어나지만 그것이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며 사적인 로맨스를 넘어 당대 사회에 대한 풍자와 해악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 판소리처럼 걸쭉한 입담과 19금 개그가 난무하지는 않지만 히긴스의 냉소적 태도와 무례함이 피커링의 매너와 비교되어 상류사회의 빛과 그림자를 들여다보는 듯하다.

리자의 아버지 둘리틀은 중산층 도덕률에 대해 묻는다. 비보호대상 빈민에 해당하는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며 히긴스에 속물근성을 드러내지만 그것이 둘리틀 개인의 인성이 아니라 영국사회의 구조적 문제라는 점을 조지 버나드 쇼는 분명히 드러낸다. 보편적 복지와 차별적 복지의 프레임 전쟁으로 시끄러운 진영논리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복지란 무엇인지, 그 지향점과 목적지를 분명히 점검해야 하는 상황의 대한민국의 오늘을 돌아보는 데까지 나아가면 지나칠까.

전체 5막으로 구성된 희곡은 서문과 후일담이라는 사족이 길다. 연극이라는 제한적 장치로 다 드러내지 못한, 자신의 생각과 의도를 자세히 설명하는 TMI가 너무 많다. 하지만 희곡은 지루하지 않으며 내용은 진부하지 않다. 여전히 세련된 작품으로 읽고 볼 수 있을만큼 시대를 앞선 듯 인간의 욕망과 내면을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신화에서 이름과 모티프를 가져왔으나 피그말리온이나 갈라테이아의 재해석이 아니라 그들과 전혀 다른 인간 세계의 히긴스와 리자 이야기라서 더욱 매력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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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와 자본주의
베르너 좀바르트 지음, 이상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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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과 사치품을 구별해야 할 필요는 없다. 밴드왜건 효과의 극대화가 유행을 만들고 ‘인싸’와 ‘아싸’를 구별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놉 효과를 노리는 사람들만 명품을 소비하는 건 아니다. 고가의 물건은 나름의 효용 때문에 그만한 값을 지불하고 구매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지 않으면 팔리지 않는다. 그것이 타인의 부러움과 시샘이든 자기 만족과 인쟁 투쟁이든.

자유와 평등이 보장된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치’는 왕과 귀족의 전유물이었다는 철지난 유행가 같은 소리에 한번쯤 귀 기울여보는 건 어떤가. 1913년, 베르너 좀바르트는 사치가 자본주의를 촉발했다는 신박한 주장을 내 놓는다. 인간의 허영심과 상위 계급에 대한 모방이 사치를 조장했고 그것이 서민들에게 유행하면서 자본주의에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주장은 초기 자본주의 모델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참고가 될 만하다. 장에 가는 어머니의 에코백과 영부인의 명품백은 장소와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때로는 마트에 들고가는 명품백과 대통령 전용기에 오르는 에코백이 자리를 바꾼다. 계급과 계층에 따른 소비와 자본주의적 욕망에 시비를 걸 사람은 많지 않다. 아니,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는 이를 흠모하며 삶의 목적과 보람이 되기도 한다. 100년도 지난 베르너 좀바르트의 사치와 자본주의가 새롭게 읽히는 건 숨쉬듯 편안한 자본주의의 출발과 중세 계급 사회의 사치가가 근대사회로 전환되면서 어떻게 일반적인 생활방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는지 살펴보는 생각의 실마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중세와 근대의 강은 넓고도 깊다. 자본주의가 확고하게 자리잡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우리가 아는 자본주의는 시대와 국가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해왔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과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은 본질적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궁정에서 출발한 사치는 시민의 부와 새로운 귀족, 즉 신흥자본가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저자는 16~18세기를 집중적으로 조망한다. 대도시의 발생은 사랑을 세속화했고 고급 창녀의 등장 배경이 되었다. 1~3장은 4~5장을 위한 사적 전개 과정이다. 사치가 어떻게 자리잡게 되었으며 사치에서 자본주의가 배태된 배경을 추적한다. 그러면 이 책의 제목이 된 ‘사치’란 무엇일까.

“사치란 필요한 것을 넘어서는 모든 소비이다. 이것은 분명히 상대적인 정의이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때에만 명료한 내용을 지닌다. 이것을 확실하게 하는 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우선 그것을 주관적으로 어떤 가치판단(윤리적인 것이든, 심미적인 것이든, 또는 그 어떤 조류의 것이든지 간에)에 근거할 수 있다. 아니면 그 필요한 것을 잴 수 있는 어떤 객관적인 척도를 찾으려고 시도할 수 있다.” 좀 당황스런 기준이지만 주관적 가치판단과 객관적인 척도를 살피자는 주장이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필요한 것을 넘어서는 모든 소비’라는 간단한 정의도 문제다. ‘필요’의 기준과 수준이 다르다.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상식’이 서로 다르듯, 필요는 ‘욕망’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베르너 좀바르트는 이 기준을 저 멀리 왕과 귀족에서, 가깝게는 도시생활에서 찾는다. 순수한 사치산업과 혼합산업, 사치소비의 혁명적인 힘으로 마무리되는 일련의 과정은 근대 자본주의를 추동하는 힘으로서 사치의 역할과 힘을 보여준다.

1899년 소스타인 베블런은 『유한 계급론』을 통해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에 새로운 안목을 보탰다. 개인적으로 매우 인상깊었던 관점 중의 하나다. 주류 경제학자들이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은 정치가 배제된 형태의 통계와 결과론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미 벌어진 현상에 대한 해석은 현실을 이해하고 다가올 미래를 예측하는 데 생각보다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만약 그랬다면 노벨 경제학상 수장자를 대통령이나 경제관료로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 여전히, 경제학 전공자들이 실물 경제를 움직이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으나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경우는 드물고 불황과 공황을 예측할 수도 없었다. 정치와 심리가 경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각종 지표들로 무장한 예측들이 난무하지만 ‘인간’의 삶을 중심으로 생활밀착형 경제학을 들고 나온 사람은 많지 않다. 아마르티아 센이 불평등과 빈곤에 대해 깊이 고민했으나 ‘자유로서의 발전’은 여전히 요원하다.

이제 다시, 아니 언제나 그러하듯 왜곡된 자본과 개인의 이기적 욕망은 비정상적인 괴물을 양산해왔다. 합리적 선택과 이성적 판단으로 작동하지 않는 경제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난무한다. 오래 전 베르너 좀바르트도 자본주의의 ‘현재’를 고민하기 위해 통시적 관점으로 과거를 돌아보며 미래를 전망했으리라. 현재는 과거의 결과다. 도미노처럼 쓰러지는 시간의 연속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 우리는 현재의 결과로서 미래를 맞이할 뿐이다. 지금, 여기서 우리는 어떤 선택과 행동으로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이 개인의 노력과 한계라고 해도 흐름을 짚어내고 전체를 조망하는 안목이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니지 않은가.

이렇게 해서 그 자신이 ―이미 우리가 본 바와 같이―비합법적인 사랑의 합법적인 자식인 사치가 자본주의를 낳은 것이다. - 2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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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우리를 구원한다면 - 우리 시대의 구루, 마틴 리스의 과학 에세이
마틴 리스 지음, 김아림 옮김 / 서해문집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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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류에 닥친 곤경은 끓는 물 속 개구리의 상황과 비슷하다. 스스로를 구하기에는 너무 늦을 때까지, 따뜻한 수조에서 만족하며 지내는 것이다. - 14쪽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 위기는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산화탄소와 온실 기체 방출, 화석 연료 사용, 산림 벌채 등이 원인으로 지목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탐욕이 오늘을 만들었다. 어제와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 더 문제다. 지구는 공유지다. 다음 세대, 인류의 미래가 지구다. 티핑 포인트에 닿기 전에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지금 당장 행동에 옮겨야 할 일들이 한둘이 아니지만 인간은 눈 앞에 놓인 자기 이익을 포기하거나 절제할 줄 아는 동물이 아니다. 비극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폭염과 홍수, 가뭄, 해수면 상승, 열대 저기압 등 기후 변화가 우리 삶에 끼치는 영향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 될 것이다. 생존을 위협하는 위기 앞에서 누구도 책임을지지 않으려는 이유는 책임 분산 효과 때문이다. 정치, 경제, 산업, 일상 등 어느 분야, 어떤 사람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함께 움직이지 않으면 문제 해결은 요원하다. 책임은 희생과 고통이 따른다. 각자 불편과 손해를 감수해야는 부분이 생긴다. 자기 몫을 회피하면 공유지의 비극은 계속 될 것이다.

과학은 ‘기술과 공학을 수용하기 위한 공공 담론의 일반적인 관행과 실천’이라는 마틴 리스의 정의는 의미심장하다. 철학적 기반이 없는 과학기술이 발전이 가져온 부작용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경험했고 현재 그 문제들을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이 인간을 여기까지 데려왔으나 지속 가능하지 않은 삶을 고민하지 않으면 결과는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영국 왕립학회 회장과 상원의원을 지낸 저자의 화려한 이력보다 중요한 건 과학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제목처럼 ‘만약if’ 과학이 우리를 구원한다면, 아니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 과학자들의 역할은 어떠해야 할까.

생물권에 대한 위협, 기후 위기와 에너지 위기, 생명공학, 컴퓨터 · 로봇 · 인공지능 등 네 가지 주제로 미래 세대를 위한 과학의 역할을 다시 살펴보자. 무엇보다 중요한 과학자들과 과학 공동체의 세계는 현실과 과학, 즉 정치와 과학, 경제와 과학 등 공동체와 과학의 관계를 다시 점검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교육이다. 협소한 과학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창의성, 연구 기관, 시스템, 불평등에 이르기까지 과학의 발전과 현실과의 접점이 이뤄지는 부분들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 동안 과학은 우리를 구원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여전히 그 가능성과 희망은 불분명하다. 낙관론을 펼치는 사람들의 생각과 대안에는 ‘쿠이보노Cui bono’가 숨어 있다. 고통 분담없는 해결책, 이익을 줄이고 손해를 감수하려는 노력이 없이 가능할까 싶다.

마틴 리스의 과학 에세이는 객관적 사실들을 나열하고 다양한 경험과 현실을 토대로 문제를 지적하며 대안을 모색한다. 이성과 감성이 적절히 어우러진 쉽고 편안한 글이다. 좋은 글은 관점을 넓히고 가슴을 아프게 한다. 복잡한 이론과 획기적인 연구 결과로 장밋빛 미래를 꿈꾸게 하는 자극적인 뉴스를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나와 현실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고 훈련이 필요하다. 생각도 연습이 필요하다. 사고 훈련은 각자의 선택과 노력을 통해 현실을 바꿀 수도 있다. 변화의 방향과 목적지는 늘 그러하듯, 사람마다 시대마다 천차만별이다. 우리 시대의 과학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까. 과학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려깊고 헌신적인 시민들의 작은 모임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마세요. 실제로 지금까지 그들만이 유일하게 그렇게 해왔습니다. -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Margaret Mead, 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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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의 지배 - 디지털화와 민주주의의 위기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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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한병철의 글을 읽었습니다. 아포리즘처럼 한문장씩 꾹꾹 눌러쓴 책이니 얇은 분량이라고 만만하게 볼 책은 아닙니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거리가 멀고 행간의 의미가 채워지지 않으면 앞으로 나가기 힘이 듭니다. “자유와 감시가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 지배는 완성된다.”라는 문장이 책 전체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정보화와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부제는 이 책이 현대인이 겪는 불안과 위기의식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그 이유를 탐구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경제와 정치, 아니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한몸으로 움직입니다. 어울리지 않는 커플처럼 어색하지만 헤어질 수 없으니 불편한 동거가 계속됩니다. 한병철은 이를 “정보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의 권력 기술을 터득한다.”라고 지적합니다. 여전히 신자유주의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몇몇 정치인이나 경제학자들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정보’와 ‘데이터’로 요약되는 미래 산업의 화두가 우리 삶-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점검하는 생활철학이자 사회학적 고찰입니다.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말과 사물』, 구스타프 르봉의 『군중심리』,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변동』,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 플라톤의 『정치학』 등 100쪽에 불과한 분량의 글에 사회학의 고전과 철학적 담론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에 발터벤야민이나 조지 오웰, 올더스 헉슬리까지 다양한 고전과 인문학적 교양이 진입장벽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연구자들의 특성상 일반대중을 향한 말과 글의 난이도 조절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실패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문턱일텐데 용어와 개념을 친절하게 풀어 설명하거나 쉬운 말로 바꿔 쓰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나 지나친 친절은 독서의 깊이와 확장성을 가로막을 수 있으니 선택은 독자의 몫이라고 하겠습니다.

정보체제, 인포크라시, 소통행위의 종말, 디지털 합리성, 진실의 위기 등 다섯 가지 주제로 정밀하게 써내려간 현대사회의 자화상을 통해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것 또한 독자의 몫입니다. 문제를 인식하고 자각하는 역할로 철학자와 사회학자들의 역할은 충분합니다. 저는 해법과 대안까지 한세트로 구성된 완벽한 책을 원하지 않습니다. 현실에 뛰어든 정치, 경제, 사회학 연구자들의 면면을 우리는 수없이 경험했고 지금도 지켜보고 있습니다. 학문적 이론이 어떻게 현실에 실현될 수 있는지, 그 실패의 원인이 무엇인지 무수한 시행착오를 모르지 않습니다. 특히 ‘교육’ 분야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사람들어 육아, 교육 전문가로 자처하며 특단의 대책과 기막힌 해법을 내놓습니다. 추종자가 생기고 반대를 위한 반대자도 나섭니다. 장하준이나 한병철처럼 영어나 독일어로 쓴 글들을 통해 대한민국의 현실은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요.

미성숙하며 조작 가능한 ‘투표 가축’이라는 표현은 양극화를 부추기고 담론 분위기에 독극물을 뿌린다는 저주에 가까운 우려가 뼈아프게 느껴집니다. 생각이 다른 주장을 ‘가짜 뉴스’로 치부하는 양극단의 진영 논리도 어이 없지만 실제 사실관계를 따지기 보다 자기 생각과 감정에 맞는 정보와 데이터만 수용하는 필터 버블과 디지털 동굴이 바로 지금 우리가 겪는 소통행위의 종말 현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점점 더 넘치는 정보의 감옥에 갇혀 스스로 선택하고 판단하는 대중은 그 정보 자체의 출처와 관점을 비판적으로 살피지 않습니다. 미성숙한 어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바라보는 한병철, 아니 우리들의 시선은 어떤가요. 그들은 친구, 연인, 가족, 이웃, 동료들입니다. 아니, 또 다른 ‘나’의 모습입니다.

트럼프 당선이 촉발한 ‘대안 사실들alternative facts’은 서사적 연속성과 정합성 결여, 탈이데올로기화된 정보체제를 의미합니다. 가짜 뉴스를 대안 사실이라뇨. 정말 놀라운 발상입니다. 어느 초등학교 교사의 극단 선택이 종북주사파가 추진한 대한민국 붕괴 시나리오라는 발언이 실제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의 발언일까요. 아니면 가짜 뉴스일까요. 유색인종에 대한 혐오 등 미국 사회에 어둔 그림자를 드리운 트럼프 당선의 의미를 이제 다시 살펴볼 필요가 없을까요.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인류는 실수를 반복하는 법입니다. 한병철이 들고나온 민주주의의 위기는 단순히 정보를 지배하는 현대사회의 시스템을 비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길들여지되 길들여지는 줄 모르고 판옵티콘에 갇혀 자유를 외치는 죄수같은 형국을 인식하지 못하는 현대인을 향한 경종입니다. 딸랑딸랑~ 여러분 정신차리세요~

모임에 참석하신 분들이 대부분 진실의 위기가 인상적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새로운 가치 허무주의가 자리잡는 현실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공론장에서 대화와 타협을 시도하고 합리적 토론이 이어질 수 없다면 ‘정보’라는 이름으로 쇠뇌시키는 미확인 카톡들, 유튜버의 뇌피셜들만 문제가 되는 건 아닙니다. 거대한 구조적 모순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세상 전부로 착각하는 우리는 정보의 집에 갇혀 사는 ‘소비 가축’은 아닐까요. 탈정치화는 새로운 미성숙을 만들고 디지털 커뮤니티는 하나의 상품commodity으로 전락한 현실에 대한 한병철의 비판이 정치적 해위 능력 없음을 자인해야 하는 우리에게 어떻게 들리는지 모르겠습니다. 간만에 귓가에 울리는 매미 소리가 여름이야~ 라고 외치는 듯 싶습니다.

데이터주의는 이데올로기 없는 전체주의다. -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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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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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 ‘오죽’해도 사람이 다 그런 건 아니다. 그러니까 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는 너그러움과 태도는 고아리의 아버지 개인적 성향이다. 그것을 사회주의자가 인간을 향해 갖고 있는, 혹은 가져야 하는 민중에 대한 믿음과 사랑일 수는 없다. 바보처럼 순진하고 따뜻한 사람의 면면이 드러나 보는 사람의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이 소설의 실제 주인공 ‘아버지’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소설을 읽는 동안 내 아버지가 떠올라 눈물이 났다.

그(?) 시대를 다른 방식으로 견뎌야했던 분들의 신산한 삶이 어디 소설 한 두권 안되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우리 현대사의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6.25 전쟁을 겪은 분들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오로지 생존을 위해, 유일하게 군대에 보내지 않기 위해 아들을 사범학교에 보낸 할머니 덕에 내가 존재한다. 희박한 비율의 생존확률을 뚫고 살아남은 아버지 덕에 그분의 삶을 전하는 빨치산의 딸 정지아도 자기 존재의 근원을 밝히려 이 소설을 쓴 건 아닐 게다. 절절한 사부곡思父曲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 이유는 그 어떤 이데올로기의 갈등도 좌우대립도 올곧은 신념도 아닌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가 바탕을 이루기 때문일 것이다.

여전히 빨갱이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한국 사회는 아무렇지도 않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대통령을 향해 빨갱이나 간첩이라고 짖어도 될만큼 민주화된 시대를 살고 있다. 그 이면에 숨은 두려움과 공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 원한과 감정 너머 현실을 살필 합리성이 결여된 비난들이 나는 오히려 더 무섭다. 이념에 매몰된 시선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고 그 이념이 지향하는 목적지를 상실하기 마련이다. 겨우 장만한 집 한 채 세금을 덜 내고 싶어 투표했다는 후배나 집값이 너무 올라 화가나서 투표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당선된 대통령의 능력과 됨됨이에 국한 문제가 아니다. 또 다음에 누가 대통령이 되든, 내년에 어느 쪽이 다수당이 되든 마찬가지다.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가 결정된 사람들의 단단한 논리를 깰 능력은 아무에게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 길에 이르는 개인적 경험, 합리화 과정도 제각각이다. 소설은 관계의 단절을 가져오는 종교와 정치 이야기와 무관하게 사회주의자 ‘뽈갱이’였던 한 아버지의 삶을 돌아본다.

장례를 치르는 3일동안 찾아오는 사람들과 아버지의 인연 그 머나먼 현재와 과거의 이야기가 긴 조사弔詞처럼 딸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슬픔과 고통을 웃음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민족답게 해학으로 가득한 표현 속에 정지아의 슬픔은 더욱 짙게 배어나온다. 모든 자식이 부모에게 갖는 마음이 같지 않듯, 모든 부모도 자식에 대한 마음이 같지 않다. 본능은 관계 속에서 다른 형태의 감정을 만든다. 부모와 자식 관계도 서로에 대한 말과 행동과 태도에 따라 각자 다른 모습으로 형성된다.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로 고아리와 아버지의 관계를 규정할 수 없다. 그 관계의 특별함이 이 소설의 독특한 아우라를 빚는다.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의 삶을 구술한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를 읽다가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한 기억이 떠올랐다. 1955년에 수감되어 1991년에 석방될 때까지 무려 36년간 세상에서 배제된 한 인간의 신념과 이데올로기 따위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동시대인으로 헌법에 보장된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억압한 시대를 함께 살아온 동시대인의 참담함 때문이었다. “나는 당신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그것을 말할 권리는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지켜내겠다”고 외쳤던 볼테르의 말에 대한민국은 동의하지 않는다, 여전히. 지식의 가장 큰 죄는 침묵이다. 이런 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으나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뽈갱이’에 대한 적개심과 ‘전라디언’에 대한 혐오를 버리지 못하는 외눈박이로 살아간다. 그들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구별짓기는 계층 사회의 보이지 않는 거리두기가 아니라 뼛속까지 스며든 무지의 오류이거나 극단적 편견의 전형이다. 차별하는 사람은 반드시 차별받기 마련이다. 아니 차별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차별하기로 실천하는 비겁함은 아닐까.

혼자만 잘살믄 무슨 재민겨, 라던 전우익 선생의 말이 소설 속 아버지의 ‘항꾼에’에 담겨 있다. 너와 나는 다르다. 우리는 서로의 이익과 생각과 감정이 일치할 때만 성립되는 교집합이다. 혁명에 실패한 자들의 변명은 성공한 자들의 후일담보다 길고 지루하다. 각자의 ‘선’이 달라 참고 견디지 못하는 기준과 영역도 다르다. 그래서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에 의해 대개 세상이 움직여지고 인재임이 분명한 사고에도 책임은 아랫 것들의 몫으로 남는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을 응원하는 사람들이다. 일시적으로 부와 권력이 있을 뿐 미래의 권려과 부는 자기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일까. 그들은 왜 그들을 옹호하고 응원하는가. 놀랍지만 그 비밀을 아는 자들만 출세에 성공하고 미련스럽게 민중에 대한 믿음과 짝사랑을 앓는 사람들이 고아리의 아버지처럼 사회주의를 꿈꾸는 건 아닐까. 아니 그리 거창한 이념과 혁명이 아니더라도 더 나은 세상, 더불어 함께 잘 사는 세상을 희망하는 건 아닐까. 슬프고 재밌는, 눈물과 함께 읽은 나의 아버지와 고아리의 아버지 이야기가 혼재했던 이야기를 오래 잊을 수 없을 듯하다. 문학적 감동은 소설의 개연성과 핍진성이 아니라 독자 개인의 삶과 닿는 접점과 인물에 투사된 감정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끝까지 읽지도 못할 소설이 누군가에게는 눈물 범벅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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