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의 진화 - 자기정당화의 심리학
엘리엇 애런슨.캐럴 태브리스 지음, 박웅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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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남을 속이기 위한 의식적 거짓말과 자신을 속이기 위한 무의식적 자기정당화 사이에는 매혹적인 회색 영역이 존재한다. 이곳을 순찰하는 것은 미덥지 못하고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는 역사가, 곧 기억이다. 기억은 종종 과거 사건의 윤곽을 흐리게 하고, 범죄성을 호도(糊塗)하며, 진실을 왜곡하는 자기고양편향(ego-enhancing bais)에 의해 재단되고 형성된다. - P. 16

시간이든 돈이든 노력이든 불편이든 결정의 대가가 클수록, 그리고 그 결과를 물릴 수 없는 정도가 높을수록 부조화는 커진다. 더불어 자신이 내린 결정에 따르는 좋은 것들을 과도하게 강조함으로써 부조화를 줄일 필요성도 커진다. - P. 39

부조화 줄이기는 자동 온도 조절 장치처럼 작동한다. 우리의 자존감을 계속해서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자기정당화에 둔감한 것이다. 우리가 실수를 하고 어리석은 결정도 내린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게 하는, 우리 자신에게 하는 작은 거짓말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 P. 50

당신의 행위가 변했음에도 당신의 맹점과 자기정당화 때문에 당신의 지적 ․ 직업적 성실성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변함없이 그대로이다. - P.83

편견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가하고 싶은 못된 짓을 정당화한다. - P. 98

내 기억이 ‘내가 그것을 했다.’라고 말한다. 내 자존심은 ‘내가 그것을 했을 리가 없다.’라고 말하며, 요지부동이다. 결국 기억이 굴복한다. - P. 109

기억에 관한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제시한다. 첫째, 그때의 감정과 세세한 내용까지 담고 있는 생생한 기억이 명백히 틀리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참으로 난감한 일이라는 것이다. 둘째, 어떤 기억의 정확성을 절대적으로 확신한다 해도 실제로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셋째, 기억의 착오가 현재의 감정과 신념을 지탱하고 있다는 것이다. - P. 110

나약한 인간들이라면 누구나 빠져 있는 터널시는 시정하기가 좀 더 수월하다. 우리들 대다수가 자기교정이 어렵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맹점이 교정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방해하기 때문에, 인간이 불가피하게 저지르는 과오를 시정하고 똑같은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을 낮추기 위해서는 외적인 절차의 개입이 불가피하다. - P. 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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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
케빈 패스모어 지음, 강유원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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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력을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랬다. 보름 남은 2007년 때문이 아니라 대통령 선거 3일전이다. 총선과 달리 비례 대표도 없다. 한 놈만 정해서 찍어야 한다. 2002년과 다르다. 다시 5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놈현과 비교될 만 한 놈도 없다. 이제 정치도 개인의 역량과 능력보다 시스템과 제도 그리고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보는 데 그렇게 될 수는 없다. 4천만이 한 마음이라면 그게 어디 사람 살만한 사회인가. 어쨌든 선택과 결정의 순간이 다가오지만 감동도 희망도 없는 선거가 돼 버린 지 오래다. 콘크리트 지지층의 결집은 불을 보듯 뻔하다. 하긴 맹박이가 대통령이 된다고 해서 나라가 망하기야 하겠나. 아니 망해봐야 정신을 차리지. 한국노총이 맹박이 지지선언을 하는 꼴을 마르크스가 봤어야 하는건데. 희대의 코미디가 벌어지는 현실 때문에 더 이상 ‘개콘’이나 ‘웃찾사’는 빛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박정희를 파시스트라고 볼 수 있을까? 21세기에 다시 읽는 파시즘은 무엇으로도 바꾸기 힘든 인간의 욕망과 본성들이 내재해 있다. 대중들의 파시즘에 관한 심리를 가장 탁월하게 읽어낸 사람 중의 하나인 빌헬름 라이히는 <대중심리의 파시즘>을 통해 “파시즘이라는 용어는 자본가라는 단어가 욕설이 아닌 것처럼 욕설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특수한 종류의 대중지도와 대중적인 영향력을 특징짓는 개념이다. 즉 파시즘은 권위주의적이며, 일당체제이며 따라서 전체주의적이며, 또한 권력이 본질적 이해관계보다 우선하며,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사실이 왜곡되는 체제인 것이다.(P. 307)”라고 선언한 바 있다.

  나치의 상징이었던 하켄크로이츠를 인간이 얽혀 있는 성적 상징으로 읽어 낸 라이히는 성경제학과 가족 내의 억압 구조를 통해 대중들의 파시즘에 경도되는 현상을 간파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처음 사용했던 ‘파시스트fascist’라는 용어는 보수와 진보 어디에도 기댈 수 없었던 정치 세력과 20세기 초 근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민족주의와 결합되어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도 했으나 상황과 시기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로 발현되었다. 제 1, 2차 세계 대전을 통해 개혁과 혁명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개별 국가들의 정치 상황과 맞물렸던 파시즘은 투표를 통한 민주주의의 실현과 여성의 정치 참여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유럽을 강타한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 페미니즘과 민주주의 등 다양한 ‘이즘ism’들의 향연 속에서 파시즘은 강렬한 유혹으로 대중들을 사로잡는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보수 세력에게는 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물결이 유럽을 뒤덮고 있던 시기, 바야흐로 혁명의 후폭풍에 시달리면 세상은 불안한 동거가 계속되었고 이탈리아와 독일을 비롯한 나라들에서 서서히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다.

  홀로코스트로 대표되는 히틀러의 광기는 단순하게 우생학과 인종주의로 설명될 수 없다. 유대인의 절멸만이 게르만 민족국가의 완성이라는 단순한 이데올로기는 히틀러나 괴벨스의 개인적 성향의 문제로 귀결될 수는 없다. 케빈 패스모어의 <파시즘>은 유럽에서 자생한 ‘파시즘’의 기원을 추적하고 있으며 본격적으로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파시즘의 광풍이 일어나기 전의 파시즘에 대해서도 고찰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 본격적으로 보수주의와 결합한 파시즘의 현상을 되돌아보며 이것이 민족과 인종과 어떤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지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다. 젠더와 계급과의 관계도 빼놓을 수 없는 관점 중의 하나이다.

공산주의 초기의, 파시즘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의는 1935년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서 나온 것인데, 그것에 따르면 ‘권력을 장악한 파시즘은 가장 반동적이고 쇼비니스트적이며 제국주의적인 금융자본주의 요소의 개방적이고 테러적인 독재체제’다. - P. 35

이 관점은 경제적 관점에서 자본주의 관점에서 바라본 파시즘의 대한 정의이긴 하지만 파시즘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앞서 언급한대로 더더욱 놀라운 것은 파시즘도 결국은 “민주적인 사회를 조직하기 위한 선거와 기술적 수단이 없었다면 파시즘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P. 72)”라는 저자의 주장이다. 결국, 파시즘도 우리들의 선택이었다는 전제가 가능해진다. 이 책은 파시즘의 역사와 변천 과정 현실 정치와 현실과의 관계를 고찰하면서도 여전히 ‘here and now지금-여기’에 초점을 두고 있다.

  폭력과 대응 폭력은 미국의 패권적 제국주의와 이슬람문화와의 갈등 관계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이 무한 순환 구조는 권위주의의 출현과 더불어 파시즘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민족적 대중주의’가 파시즘의 부활을 예고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노파심은 기우에 불과하기를 바랄 뿐이다. 저자는 이것이 단순한 걱정과 우려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언제든지 다시 부활할 수 있는 강력한 흡인력을 지닐 수도 있다고 경고하는 듯하다. 민주주의 제도의 우월성과 단순한 믿음만으로 인류의 역사를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광기와 폭력은 친구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007년의 현실은 어디쯤 위치해 있는 것일까? 하늘 위로 올라가 내려다보고 싶다. 아득한 태초에서 출발해서 보이지 않는 미래로 여행 중이라면 좀 더 멀리 내다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긴다. 아니 지금 현재의 모습보다 먼 미래의 모습보다 짧은 미래라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불안한 미래에 대한 우리들의, 아니 타인들의 희망에 대해 살펴보고 싶다. 그래도 2008년은 시작될 것이고, 우리의 삶도 계속되겠지만 파시즘이 여전히 ‘가능한 선택지’라는 저자의 목소리는 사람들을 공포 속에 몰아넣기에 충분해 보인다.


071216-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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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8-11-27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깐 옮겨가도 되겠죠. 지금-여기의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sceptic 2008-11-28 21:59   좋아요 0 | URL
2008년 대한민국의 현실이 저는 무섭습니다. 분노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눈물로 씁니다
박홍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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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런 종류의 책은 어디에 분류해야 할 지 난감하다. 합치고 아우르는 것이 어려운 만큼 나누고 가르는 일도 쉽지 않다. 박홍규의 책 중에서 직설적인 감정이 많이 우러나온 책이다. 감정은 내면이나 의식에서 배어나오는 이성의 작용이다. 이 감정은 사랑이나 우정과 같이 조건 없이 인간관계를 통해 확인되는 감정이 아니다. 사회를 바라보는 태도, 사람들이 가진 삶의 조건, 인생의 가치와 일상의 모습 등을 통한 이성적 작용의 결과물이다. 내면에서 외부로 표출되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정서적인 감정이 아니라 외부 세계를 투과한 감정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거대한 명칭은 듣기에도 부담스럽다. ‘대한민국’은 ‘대영제국’을 모방한 명칭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무튼 위대한 나라 ‘대한민국’의 모습은 어떠하며 정체성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인구수만큼 많은 논의가 이루어질 것이다. 박홍규의 <대한민국을 눈물로 씁니다>는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거울은 사물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비춰주지만 인간의 시선과 관점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주관적 시선을 뒷받침하는 사상과 이념은 객관적인 평가와 이성적인 논의가 가능하다. 우리 사회의 지향점이나 삶의 가치가 다를 경우 저자의 이야기는 허황된 이야기로 들린다. 하지만 우리가 얻는 것보다 잃은 것이 돌아보지 않는 삶은 의미가 없다. 저자는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과연 우리는 단기간에 얼마나 많은 발전과 문명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눈이 부시다는 표현이 과언이 아니다. 빛의 속도만큼 빠르게 과학기술이 발달했고 인간의 생활은 편리해졌다. 물론 비교의 기준은 20세기 이전을 말한다. 그러나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이다. 시속 150km가 넘게 속도를 내면 시야가 좁아진다. 주변의 사물이나 자연 풍경을 감상할 여지가 없어진다. 김광규의 시 ‘젊은 손수 운전자에게’ 처럼 우리는 많은 것들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게 된다. 시간과 속도의 경쟁은 무한하다.

  그렇게 살다보니 타성에 젖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들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다. 시골에서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는 박홍규의 모습이 어떻게 비춰질까? 초등학생들도 들고 다니는 핸드폰 없이 세상을 향해 쓴 소리를 뱉어내는 모습이 과연 불만과 불평을 토해내는 것인가? 개인적인 편협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견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알 수 없는 것은 이런 사회 비평 서적이 나와도 눈여겨보고 자신의 모습이나 우리들의 현재를 반성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늘어나느냐의 문제이다. 항상 결론은 실천이다.

  무엇을 어디에서부터 손대야 할 지 모른다는 것은 자각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는 할 수 없다. 또 한 가지 알면서도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견해는 어떻게 할 것인가. 물욕에 오염된, 돈으로 분단된, 힘으로 왜곡된, 공공이 상실된, 인조로 추악한, 획일로 위기인 대한민국을 어떻게 할 것인가?

  유시민이 <대한민국 개조론>을 한 달 만에 썼다고 했는데 박홍규도 이 책을 일본에서 한 달만에 썼다고 한다. 전혀 다른 관점과 다른 방식으로 쓰여진 두 책을 비교하는 것도 흥미롭다.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고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일등 공신 역할을 했던 유시민과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는 일리히의 책을 번역하고 실천에 옮기며 살아가는 박홍규는 무엇이 다른가를 비교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가는 모습은 어느 쪽이며 똑같이 진보적 가치를 내세우면서도 얼마나 다른 진보와 개혁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지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늘의 별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가치관과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며 세상을 판단하는 가치와 기준도 다르다. 아니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현재와 생활에 이끌려 내 삶을 거기에 끼워 맞추듯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떤가?

  2007년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비현실적으로 해석한 책이 아니다. 우리가 당면한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사상, 가치 등에 대한 총체적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고 여긴다면 읽어볼 만한 책이다. 아니 이 책을 통해 무엇이 문제인가를 한번쯤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면 이 책은 충분한 의미를 지닌 책이 될 것이다.


071215-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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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태의 스토리 철학 18
남경태 지음 / 들녘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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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습관적인 독서가 되지 않도록 경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다. 책이 주는 지적인 이미지와 교양을 좋아하는 것인지, 책을 읽는 행위 자체를 좋아하는 것인지,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특별한 즐거움을 좋아하는 것인지, 책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고유한 무엇을 좋아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아니 그것들을 구별하는 것조차 모호할 수도 있다. 책이 인간에게 주는 기능과 역할을 진부하게 나열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한 권, 한 권 책을 읽어 나갈 때마다 헤어나지 못하고 책 속으로 숨어버리거나 도피하고 싶은 자신을 발견할 때도 있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새로운 책의 표지를 접어놓아야 불안하지 않은 상태는 중독이다. 알면서 고치지 못하고 누가 크게 나무라지 않으니 더욱 큰일이다. 책만 읽는 바보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때때로 쓰고 싶은 헛된 욕망이 생기기도 한다. 나무에 대한 예의를 지킬 수 있을 때가 오려는지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가장 어려운 일은 책을 쓰는 일보다 책을 고르는 일이다. 쉽게 가자면 고전을 섭렵하면 된다. 그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맞는 말이다. 현실에 대한 해석과 고전에 대한 새로운 주석에 불과한 책들이 하루에도 수십 권씩 쏟아진다. 나무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 쓰레기는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책 속에서 길을 잃고 책 속에서 길을 찾는다. 그래도 읽는 행위를 멈출 줄 모르는 나는 활자중독증이다.

  중독의 쾌락은 느껴 보지 않은 사람에게 설명할 수 없다. <남경태의 스토리 철학 18>과 같은 길고도 엽기적인 제목의 책이 내게 그런 즐거움을 준다. ‘18’을 ‘씨팔’로 읽은 것은 나의 오독인지 아니면 남경태의 의도적 오류인지 모르겠다. 남경태가 이번에는 철학에게 ‘서사구조’의 옷을 입혔다. 스토리가 있는 철학은 대중화의 또 다른 신 개발품이다.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고 쉽고 간단하게 전달하기 위한 노력들이 어찌 보면 눈물겹기까지 하다. 철학의 대중화를 위한 몸부림에 가까운 책들 중에 독자들은 보기 좋은 몸부림을 선택하면 된다. 내게 남경태의 저작들은 보기 좋고 입에 달며 읽는 즐거움을 충분히 만족시킨다. <개념어 사전>이나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철학>과 같은 맥락이다. 똑같은 제품도 소비자에 따라 만족도는 다른 법이다. 내게는 아주 매력적인 제품들이었다.

  철학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독학의 한계는 극복하기 어렵다. 개별 철학자들의 주저들을 한 권씩 섭렵하기도 하지만 씨줄과 날줄처럼 정교하게 엮이지도 않고 퍼즐처럼 한 조각씩 제자리를 찾는 것도 아니다. 그럴 때 이 책을 보면 고개를 끄덕이며 읽을 만하다. 요슈타인 가아더의 <소피의 세계>가 ‘소설’의 옷을 입고 등장한 ‘서양철학사’라면 남경태의 ‘스토리 철학 18’은 주제별 철학 개념 사전에 가깝다. 18개의 철학적 기본 개념들을 가지고 주체, 인식, 타자, 지식에서부터 행복, 매체, 텍스트, 언어, 사랑, 욕망, 이념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누비고 다닌다. 기본적인 철학적 개념에서 시작해서 일상에서 마주하는 현대적 개념에 이르기까지 철학의 주요 개념들과 핵심 쟁점들을 선별한 후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이 열여덟개의 ‘스토리’에 있다. 14세기 수도원에서 수도원장과 수도사, 젊은 수사가 미래의 종교와 정치에 대해 토론하는 가상 시나리오가 등장하기도 하고 저자와 편집자, 기자와 방송국 PD의 푸념이 등장하기도 한다. 연애 편지가 등장하기도 하고 일기 형식의 나레이션과 독백이 이어지기도 한다. 철학을 소개하는데 있어서 다양하고 파괴적인 형식들이지만 독자들의 깔깔한 입맛을 돋우는 진미 역할을 한다. 결코 가볍고 식상한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저자의 노력과 고민이 여실하게 드러내는 대목이다. 하나의 스토리가 정리되면 뒤이어 이에 대한 저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명쾌하고 잘 정돈된 느낌이다. 군더더기 없고 깔끔하다.

  하지만 항상 문제는 남는다. 철학도 어쩔 수 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이다. 주체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든 대상을 관찰하든 그 관계에 대한 인식론이든. 그렇다면 가치가 개입될 수밖에 없고 저자에 의해 선별되고 편집된 개념만을 전해 들어야한다는 한계가 있다. 모든 책의 한계로 치부한다면 속 편히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이긴 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요약정리에 있다. 하나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한 명의 철학자 혹은 한 시대의 철학을 간단히 전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호기심과 궁금증 혹은 오해와 단정을 피하기 어렵다. ‘더 읽을 책’ 목록으로 아쉬움을 달래기는 했지만 갈증은 심해진다. 저자의 의도가 바로 그거였다면 대 성공이다!

  저자의 말대로 철학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물론 생각하고 세상을 해석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혁시키는 것이겠지만 일단 내가 생각하는 방식과 사물과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 그리고 나에 대한 주체성을 확립하고 행동으로 내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이 책을 읽는 궁극적인 목적이다. 거창하게 접근했는지 항상 모든 이데올로기의 종점은 행동이다. 그래서 나는 얼마나 변했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오롯이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진다.


07121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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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는 지켜야 할 자존심 인터뷰 특강 시리즈 4
진중권.정재승.정태인.하종강.아노아르 후세인.정희진.박노자.고미숙.서해성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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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존(自尊)은 자존(自存)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자존(自存)이라는 것이 쉽게 규정하기 어렵다. 인식하는 주체로서 스스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자아 존중감이 형성될 수 있다. 세계 혹은 대상에 대한 나의 태도와 인식 방법이 자존심의 출발이다. 마음은 자아 정체성과 주체성을 바탕으로 한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사물에 대한 인식 태도는 타자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만든다. 결국 자존심은 타자와 세계가 나를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반대의 경우 우리의 삶은 불안해지고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며 흔들리는 촛불처럼 위험해진다. 내가 삶을 이끌지 못하고 생각한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

  세상이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한 개인을 나타내는 정체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시대와 불화하며 자존심을 지켜나간 사람들은 존경을 받는다. 신영복의 말처럼 세상을 자신에게 맞추는 우직한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는다. 세상에 자신을 맞추는 ‘현명한 사람’이 되고 싶은 이기적 욕망을 이겨낸 사람들의 고뇌 앞에 우리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시대를 고민하고 세상을 걱정하는 척하는 정치인들의 혐오스런 모습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들과 사소하고 당당한 실천만이 조금 더 살만 한 세상을 만드는 것은 아닌가 싶다.

  진중권, 정재승, 정태인, 하종강, 아노아르 후세인, 정희진, 박노자, 고미숙 등 8명의 이야기를 들으며 올 한해도 저물어 간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2004년부터 매년 봄 특강을 하고 그해 가을이나 겨울에 책으로 묶어낸다. 2004년 <21세기를 바꾸는 교양>, 2005년 <21세기를 바꾸는 상상력>, 2006년 <21세기에는 바꿔야 할 거짓말>을 주제로 삼았고 올해는 <21세기에는 지켜야 할 자존심>으로 특강이 이루어졌다. 매년 이 책들을 읽으며 내년 봄에는 특강을 듣고 싶다는 생각만 4년째 하고 있다. 물리적인 시간이 나지 않는다는 핑계를 대면서 내년에도 책을 기다려야 하는 아쉬움이 있다.

  ‘자존심’이라는 키워드로 인문, 사회, 과학, 여성, 노동, 역사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는 전문가 혹은 지식인이라 명명될 만한 사람들이다. 활자라는 형식으로 읽어야 하지만 강연을 듣는 것 같은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 책이다. 특강이 이루어지고 청중과의 질의응답으로 마무리되는 형식은 예년과 같다. 인위적인 시대구분이지만 21세기도 이제 7년이 지나간다. 20세기와 다른 세기를 살아간다는 특별함이 느껴지진 않지만 세상의 변화 속도는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다. 근대화 이후 빛의 속도로 변화하는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비슷한 속도감을 경험한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우리는 쉽게 적응하거나 대처하지 못하는 많은 문제들을 안고 살아간다. 무엇이 잘못되어가고 있는지 관심을 갖지 않거나 알아도 고치려하지 않고 나와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하거 내 이익에 반하는 일이라면 더더욱 외면한다. 이기적 욕망을 자존심으로 착각하거나 자본과 권력의 부당한 침해를 알지 못하거나 타인의 삶에 무관심한 채 오로지 자신의 사회 경제적 지위만을 지켜나가는 자존심이 가능할까.

  다른 책을 통해서 한두 번 이상 만났던 사람들이지만 변화하는 과정을 통해 또 강연이라는 형식을 통해 듣는 이야기는 새롭다. 진중권, 정재승, 정태인, 고미숙 등 처음 이 특강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신선했고 각자의 분야에서 ‘자존심’이라는 주제로 엮어내는 이야기들은 결코 쉽지 않은 주제였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 나갔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다 자세한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특강을 찾아 들으러 가는 사람들보다 듣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에게 더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이다.

  진중권의 말대로 진짜 자존심은 자기가 자신을 존중하고 자기 삶을 배려하는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보여지는 나와 내게 돌아올 이익만을 생각하는 자존심은 이미 자신을 버린 것이다. 주변을 돌아본다.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 배가 불러야만 자존심도 지킬 수 있는 것일까. 나름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과 자신을 지켜나가는 방법이 다르다. 하지만 자존심까지 각자 다른 모양과 색깔로 규정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내가 나를 인정할 수 없고 스스로에게 부끄러워질 것 같아 용기를 내어 보거나 행동에 옮기다가 고민에 빠지는 일이 많다. 왜 나만 이러나, 내가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좀 더 쉽고 편한 길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좋은 사람, 문안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 왜 어렵겠는가. 자신의 이익을 챙기면서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일이 불편한 사람도 있는 법이다. 하종강의 ‘부채감’은 자신의 선택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인식하지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그 ‘부채감’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해결되지 않을 괴리감 때문에 고민할 정도의 나이는 지났지만 여전히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다. 타인과의 관계와 스스로에 대한 자존심은 양립할 수 없는 문제는 아니겠지만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상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 접점을 찾는 문제가 내게는 가장 힘들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마주치는 일보다 보다 먼 미래와 삶의 가치와 목표를 설정하며 고민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이야기들은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들이 아니다.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일들이지만 나와 한발 떨어져 있다고 생각되는 문제들에도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 책에서는 나와 직접적인 혹은 조금 떨어져 있는 일들에 대해 생각을 바꾸고 태도를 바꾸고 행동을 바꿔야 하는 이유와 고민들을 풀어내고 있다. 귀 기울여 보면 많은 화두가 던져진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항상 아주 작은 고민에서 출발한다. 나의 자존심은 내가 지켜나갈 수밖에 없으므로.


071209-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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