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위한 과학
토머스 루이스 외 지음, 김한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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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속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사랑’이라는 말을 대하면 떠오는 사람, 사물 그리고 감정을 생각해 본다. 지금도 그렇지만 늦은 사춘기를 보내던 시절 읽었던 김수영의 시가 먼저 떠오른다. 김수영에게 ‘너’는 연인일 수도 조국일 수도 있었겠지만 사춘기 소년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게 이 시는 ‘어둠’과 ‘불안’으로 기억되었다.

  이성에 대한 사랑이든 가족에 대한 사랑이든 감정을 분석하려는 헛된 욕망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했다. 그러나 이제 그 욕망은 실현 단계에 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사랑을 위한 과학>은 정신분석가, 생물학적 심리치료사의 만남으로 과학의 대상이 되었다. 사랑과 과학의 만남이라니, 일단 뜨악한 표정을 바꾸기 어려웠다. 가능하다는 믿음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이 놀랍다.

  심리학적 접근이나 정신 분석이 절대적인 믿음으로 인식되던 시대도 이제는 옛 추억이 될 수 있겠다. 뇌과학의 발달로 신비스런 인간의 마음이 어디에서 어떻게 생겨나는지 왜 변화하는지 밝혀지고 있다. 그렇다면 과학은 진짜 ‘사랑’이 어떤 것인지 왜 그런 ‘사랑’이 생기는지 말해 줄 수 있을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한 진지한 고민과 방법에 대해 이 책은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다. 불가능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류가 쌓아온 정신 영역과 뇌의 역할에 대해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과학이 사랑을 만나서 나누는 이야기는 딱딱하지도 감상적이지도 않다. 우리가 믿어 왔던 사랑에 대해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사랑에 대해 과학적으로 말하고 있다.

  사랑은 가슴이 아니라 머릿속에 숨어 있다.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아주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여왔고 방법을 찾아 헤매 왔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별하고 나서는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이 책은 그것에 관해 과학적으로 말하고 있다. 아이에게 어머니는 어떤 존재이며 인간에게 사랑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설명해 주고 있는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책장을 덮으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서부터 삶에 대한 기본적인 회의까지 다양한 질문들만 남겨진다. 결국 과학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아주 작은 부분이다. 작다는 표현은 의미가 없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어쩔 것인가에 대한 판단과 반응, 행동과 수용은 전적으로 개인에게 맡겨진다. 다만 그것을 위한 준비단계를 우리는 과학에게 기대야 할 지 모르겠다.

  암흑처럼 어둡고 불안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감정에 대해 잘 안다는 것은 작은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알랭 드 보통은 그 만남의 우연성에서 출발하고 있다. 결코 운명이 아니라 복권 당첨보다 작은 우연으로부터 시작되는 사랑이 우리에겐 때로 전부가 되어 버리고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꾸게 만들기도 한다. 그 신산스런 과정이 삶은 아닐런지.

  저자는 정신분석이나 심리학에서 잘못 다루어진 ‘사랑’에 대해 과학의 잣대로 비판하고 정확한 설명을 시도한다. 신피질과 변연계라는 물질이 존재하는 포유류의 '사랑‘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파충류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감정이다. 사랑의 신경 네트워크에 오류가 생겨 파충류의 뇌로 전환하기까지는 인간의 숙명이다. 사랑은.

  ‘A General Theory of Love사랑에 관한 일반 이론'이라는 정내미 떨어지는 원제를 가지고 있지만 오로지 과학의 입장에서 사랑을 논하고 있는 책은 아니다. 정신 영역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하며 오히려 이성과 과학이 보여줄 수 있고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 얼마나 작은 것인지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결국 인간에게 사랑은 생명이며 삶의 원천이라는 자명한 이치와 만난다. 그런 감정이 본능적인 것인지, 어디에서 생기는 것인지,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되는지에 대해 사람들은 늘 호기심을 갖고 있다. 이 책은 그 호기심에 대한 충실한 답안지에 해당된다. 상황에 따라 조언과 충고를 해주고 어줍잖은 판단과 분석을 해주는 연애 상담과는 한참 거리가 멀지만 객관적으로 자신의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참고서가 된다.

  그러나 책장을 덮고 나서도 ‘사랑’이 무엇인지 말할 수는 없다는 사실은 기억할 것.


080811-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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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에서 20세기 말까지 사랑에 관한 주된 설명에는 생물학이 빠져 있었다. 신경학이 공중에 성을 쌓아 정신병 환자들을 살게 하면, 정신과 의사들이 집세를 걷는다는 말이 유행처럼 돌았다. 그러나 정작 허공에 떠 있는 이론의 성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정신과 의사들과 심리학자들이었다. - P. 15

사랑을 구성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모른다면 마음의 수수께끼를 풀려는 희망은 물거품이 될 것이다. - P. 32

인간의 사고 능력은 신피질에서 생성된다. 그러나 이 능력 때문에 보다 신비스러운 다른 정신 활동들이 쉽게 망각된다. 실제로 인식은 대단히 분명한 현상이라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내 존재는 생각이다>처럼 인식이 전부라는 오류를 낳기도 한다. - P. 52

감성의 재료를 언어로 번역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변형 과정을 요구한다. 그래서 강렬한 느낌을 언어적 표현으로 구속하는 일에는 긴장과 무리가 뒤따른다. - P. 54

우리 사회는 감정의 중요성을 경시한다. 신피질과 굳게 결탁한 우리 문화는 직관보다는 분석을, 감정보다는 논리를 조장한다. 지식은 부를 낳을 수 있다. - P. 57

감정을 반복적으로 침전시키는 가장 일반적인 요소는 인식이다. 사람들은 특정한 사건이 지나간 후에도 그것을 다시 생각하고 그 경험을 환기시키면서 자신의 감정을 다시 자극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실제로 그 사건이 재발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 P. 69

진화의 과정에서 출현한 포유동물은 새로운 종류의 뉴런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다시 말해 사랑을 정신적으로 친밀하게 수용할 줄 아는 생물이었다. - P. 75

두 사람이 한 방에 있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목적도 없이 몇 시간을 함께 보내보라. 그러면 두 사람 사이에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인류가 시작되기 오래전부터 작용했던 힘들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이다. - P. 95

단기적 격리는 항의라는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반면, 장기적인 격리는 절망이라는 생리적 상태를 유발한다. - P. 112

실연 당한 연인이 작성하는 비탄의 편지는 새끼 쥐의 찍찍거림과 동일하다. 그것은 주파수만 조금 낮을 뿐 같은 노래이다. - P. 113

애착 형성이 한 개인을 어떻게 조각하는가를 이해하려면, 기억이라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기억은 뇌가 경험을 통해 구조적인 변화를 겪는 과정이다. 기억은 일직선으로 진행하지 않으며, 인간의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 P. 143

새로운 스캐닝 기술이 개발되어, 인지와 상상이 동일한 뇌 부위를 활성화시킨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우리의 뇌는 경험으로 기록된 것과 마음속에서 지어낸 환상을 확실히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같다. - P. 151

기억에 관한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를 보면, 직관이 이해를 월등히 앞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 눈에는 결코 보이지 않는 또 다른 태양이 강렬한 빛으로 우리의 삶을 비추고 있다. 반복적인 경험에 직면했을 때 우리의 뇌는 무의식적으로 그 기초에 놓인 규칙들을 추출한다. - P.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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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 창비시선 286
문인수 지음 / 창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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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한 단면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하나의 장면과 인상을 풀어내는 능력, 간결한 언어로 응축시켜내는 힘은 저절로 길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인수의 시들을 읽으면서 세월의 힘과 삶의 무게, 그것을 바라보는 예리한 시선에 감탄하다. 수천년 아니, 수만년 동안 지속되어 온 인간의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생은 한마디로 정리될 수 없다. 어차피 찰나의 인상에 불과하다. 나는 물론 우리들 모두의 삶은 그렇게 지리멸렬하지만 무엇가를 찾으려는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은 더욱 어렵다. 모든 것을 손에서 놓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장면들을 바라보려는 것도 또다른 욕심일까?

  세월의 골을 따라 존재의 무게감을 느낄 수 있는 문인수의 <배꼽>은 만만치 않은 중량감을 느끼게 한다. 가벼움의 시대, 키취 세대를 즐기던 90년대를 넘어 이제는 우리 시대를 무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이념도 실존도 더 이상 시가 되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는 건 아닐까? 항상 책 속에서 길을 잃고 끝없는 질문 속에서 허덕인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바람부는 날 길가에 떠 다니던 검은 비닐봉지를 바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입구도 출구도 모른 채 바람을 잔뜩 머금고 일방적으로 질주하는 바람의 맹렬함 덕분에 하늘로 날아 오를 수 있었던 비닐봉지에게 묻는다. 우리들은 도대체 무엇을 향해 떠올랐다가 힘없이 가라앉는 것이냐고.

비닐봉지

차들이 검은 비닐봉지 하나를 연신 치고
달아난다. 비닐봉지는 힘없이 떴다 가라앉다 하면서
찢어질 듯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지만 도통
소리가 없다. 연속으로 들이닥치는 무서운 속력 앞에, 뒤에, 두둥실
웬 허공이 저리 너그러운지.

누군가의 발목에서 떨어져나온 그림자, 그늘인 것 같다. 과거지사는 더 이상 다치지 않는다. 이제
적의 멱살도 박치기도 없는 춤, 검은 비닐봉지 하나가 또 잔뜩
바람을 삼킨다. 대단한 소화능력이다. 시장통,
거리의 밥통이다. 금세 홀쭉하다.


  때로는 우연에 기댈 때도 있다. 박태환처럼 뚜렷한 목표와 결승점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물에게 온몸을 내맡기고 전력을 다해 손이 닿는 순간 이제 그는 어디로 가야할까? 경쟁도 없고 확인된 적도 없는 싸움을 계속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은 아닌지. 그래서 거리의 밥통은 금세 홀쭉해지는 것인지.

배꼽

외곽지 야산 버려빈 집에
한 사내가 들어와 매일 출퇴근한다.
전에 없던 길 한가닥이 무슨 탯줄처럼
꿈틀꿈틀 길게 뽑혀나온다.

그 어떤 절망에게도 배꼽이 있구나.
그 어떤 희망에도 말 걸지 않은 세월이 부지기수다.
마당에 나뒹구는 소주병, 그 위를 뒤덮으며 폭우 지나갔다.
풀의 화염이 더 오래 지나간다.
우거진 풀을 베자 뱀허물이 여럿 나왔으나
사내는 아직 웅크린 한 채의 폐가다.

폐가는 이제 낡은 외투처럼 사내를 품는지.
밤새도록 쌈 싸먹은 뒤꼍 토란잎의 빗소리, 삽짝 정낭 지분 위 조롱박이 시퍼렇게 시퍼런 똥자루처럼
힘껏 빠져나오는 아침, 젖은 길이 비리다.


  ‘그 어떤 절망에게도 배꼽’은 있다. 태초에 탄생이 있으니 소멸이 있고 삶이 있으니 그 종착역은 죽음이 될 것이라는 자명한 사실 앞에 우리는 조금 겸손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내 영원히 살 것처럼 욕심부리며 산다.

  ‘그 어떤 희망에도 말 걸지 않는 세월’이 얼마나 많은가? 아니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절망의 종착역이 희망은 아니다. 희망을 담보로 절망이 찾아온다면 견딜만 하겠지만 절망은 또 다른 절망으로 치닫고 희망은 그저 생을 유지하기 위한 보이지 않는 신기루에 불과할 때가 더 많다. 헛된 희망 고문으로 환상 속에 현실을 방기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도 그것조차 없다면?

  우리 모두는 도망자가 되는 것이다.

도망자

밤새 눈 내려덮였다.
저 일격이 날 때려눕힌 것일까
세상 모든 길, 길을 풀고 돌아가버렸다.

일생이 전면, 불문에 붙여진 것 같다.
사라진 기억들이 삼엄하다.

누가 또 밖에 나가고 싶으랴,
나가고 싶지 않으랴.

낯선 곳에서 창을 열고 멀리 내다보는
흰 복면의 죄, 말없다.


  사라진 것을 우리는 ‘기억’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라진 기억’은 모순이다. 하지만 삼엄하긴 하다. 하늘은 먼저 가을을 예감한다. 지상의 뜨거운 열기를 비웃듯 뭉게 구름은 한가롭고 푸른 하늘은 여유있다. ‘낯선 곳에서 창을 열고 멀리 내다보는’ 여유를 찾아 헤매는 것이 우리들의 먼 미래의 희망이다. 아닌가? 여전히 말없이 그것을 내다 볼 밖에.

  손에 잡힐 듯이 눈앞에 떠 있는 흰 구름이 소리도 없이 사라지고 다른 모습으로 헤어졌다 다시 만난다. 목적 없이 그렇게 흘러가는 아주 오래된 기억이 배꼽이다. 생의 근원이며 절망의 출발이고 다시 돌아가야 할 침묵의 바다이다. 가만히 내 배꼽을 들여다본다.


080810-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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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하게 나를 죽여라 - 이덕일의 시대에 도전한 사람들
이덕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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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을 나는 ‘신념’에서 찾는다. 먹이와 생존에 대한 본능이 해결된 이후의 상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목숨을 걸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건 어쩌면 다른 의미의 ‘행복’일 수도 있다. 조선 후기의 소론 강경파였던 아계 김일경은 경종을 독살했다고 믿은 영조에게 “시원하게 나를 죽이라”고 외쳤다.

  물론 그 결과는 참혹했다. 경종에게 충신이었으나 영조에게는 역적이 되어 그의 자식들마저 절멸됐다. 연좌제의 전통은 끔찍하기만 하다. 그것을 알면서도 “시원하게 나를 죽이라”고 외칠 수 있었던 한 인간의 고뇌 혹은 고집은 ‘신념’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리라. 가족의 입장에서 다르게 보일 수도 있으나 역사적 관점에서 그와 같은 행동과 입장들은 두고두고 회자된다. 단순히 그들이 불행했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대에 도전했던 사람들은 한 두명이 아니지만 우리 역사에서 그들의 행적을 돌아보는 일은 현실을 돌아보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누구나 말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시대에 도전하는 맑은 정신과 피 끓는 외침을 듣기는 더욱 어렵다. 백가쟁명의 시대에는 오히려 사람들이 영웅을 기다린다. 파시즘은 일종의 마약처럼 사람들을 유혹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6%의 지지, 강남 3구의 지지를 딛고 우뚝 선 강남교육감을 모시고 살아가는 시대에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세상이 어떻게 변하기를 바라는 걸까?

  그래도 세상은 돌아간다. 당장 나의 이익과의 관계만을 계산하는 것이 시대정신인가? 교육에 의해 계급은 재생산되고 그 체제는 더욱 교묘하게 공고히 굳어진다.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내 삶에는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엉뚱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모두가 나름의 가치와 판단대로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시대는 그렇게 흘러왔고 그 시대에 도전한 사람들에 의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씩 변화하기도 했다. 혁명을 경험하지 못한 역사를 갖고 있는 우리에게 혁명을 꿈꾸었거나 시대를 거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반면교사가 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에게 익숙했던 역사이며 바로 오늘 다시 되돌리려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다. 이덕일의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는 ‘시대에 도전하라’는 말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시대에 도전했던 사람들의 행적은 아프게 읽히고 반성적으로 돌아보아야 할 현실의 문제만 남긴다.

  주로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시대정신’에 저항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분야별로 묶은 이 책은 먼저 중국에 항거한 사람들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북벌을 주장하고 주자학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들 중 양명학자 정제두가 인상 깊었다. 발해를 우리 역사에 편입시킨 유득공도 눈에 띤다. 정치 체제나 종교적인 문제로 자신을 버렸던 사람들, 사회제도나 신분제도에 도전한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이 책은 역사적 지식의 편린들을 머릿속에서 끼워 맞춰야 하는 불편함은 감수해야 하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이들이 주장했던 시대적 진실들이 과연 역사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그것이 훗날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역사 서술의 방법과 관점에 대한 동의는 쉽지 않을 것이다. 저자도 가끔 우리의 역사 교과서를 언급, 인용하고 있다. 그것이 아니라고.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지식의 문제를 넘어 관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 소개된 사람들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용기 있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개인적 용기를 넘어 사회적 진실이 되었을 때 역사의 흐름에 작은 변화가 생기는 법이다.

  책은 끊임없이 얽히고 교통하며 조화를 이루고 간섭한다. 바로 이전의 책에서 보았던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마라’는 이 책 3부의 제목으로 쓰였다. 4부의 제목 ‘내가 가면 길이 된다’는 당연히 노신을 떠오르게 한다. 어떤 분야의 책이든 합종연횡 되어 지식의 네트워크가 형성될 수 있기를 바라지만 만만치는 않다. 하나의 연결고리가 아니라 거대한 덩어리로 떠다니기도 하고 기억의 저편으로 가물가물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너무 소략하여 에피소드나 일화의 형식으로만 전해지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는 이 책의 한계이기도 하다. 여러 사람을 소개하고 있어 두루 살펴보는 즐거움을 위해 하나는 희생할 수밖에 없는 일이겠지만 엮이고 묶이는 의도와 방법을 따라가며 읽는다면 이덕일의 책은 나름대로 계통과 흐름을 따라 갈 수 있어 편리하고 재미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080805-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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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을 거부하라! - 노동 지상주의에 대한 11가지 반격
크리시스 지음, 김남시 옮김 / 이후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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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참 매력 없는 도시이다. 이웃 블로거 타다노부님의 말대로 사람들의 관계를 벗어나서 즐길 만하거나 사물과 대상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길러온 도시라고 보기 어렵다. 단순하게 말해 기능적인 면과 편의성 측면에서 탁월할 지 모르지만 그것 이상은 찾아보기 어렵다. 누구나 개인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 숨은 뜻은 공유하기 쉽고 말해진 것을 긍정할 수 있다는 것은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울은 차갑고 인위적인 도시라는 결론은 어렵지 않게 도출된다. 그것은 서울이 아니라 도시의 일반적인 특성이라는 강변이 가능하지만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전제 조건을 가진 도시들을 비교할 때 그러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끔 서울이 아름답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은 서울의 야경 때문이다. 한강 이쪽에서 저쪽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어둠과 찬란한 불빛이 만들어내는 환상을 본다.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도시의 어둠은 네온싸인으로 인해 더욱 웅숭깊은 비밀스러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인공위성에서 촬영한 사진을 보면 휴전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의 밤은 확연하게 구별된다. 지구 전체의 모습을 살펴보면 흔히 선진국과 후진국의 구별은 더욱 확실해진다. 밤을 지워버리는 자본의 힘은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인간에게 어둠은 더 이상 휴식과 안정의 시간이 아니다. 밤은 극복의 대상이던 시절은 이미 오래 전의 이야기이다. 낮과 밤은 물리적인 시간의 구분일 뿐이다. 활동 시간은 무한대로 연장되었다. 끔찍하게도 그 활동 시간은 전부 노동시간의 연장에서 비롯되었다. 자본의 유혹은 밤을 밝혀 소비를 부추긴다.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고 공부하고 일하며 즐기고 관계 맺는다. 밤은 더 이상 밤이 아닌 시간이 되어 버렸다.

  대학 신입생 시절 열심히 따라 불렀던 “일하지 먹는 자여, 먹지도 마라! 자본가여 먹지도 마라! ~~”가 떠올랐다. 옮긴이의 글 제목이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라는 도발적인 제목이다. <노동을 거부하라!>는 책은 제목부터 옮긴이의 글까지 전부 도발적이다. 노동지상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노동을 거부하라니?

  이제는 상식이 되어버린, 숭고하고 도덕적인 가치인 ‘노동’을 거부하라는 말은 헛소리로 들린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은 과연 제대로 된 상식인가? 생각의 틀을 뒤흔드는 일은 쉽지 않다. 강한 거부감이 들더라도 귀 기울여 가슴을 열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 볼 수 있는 사람은 이념적 지향을 떠나 존경스럽다. 이 책은 뉘른베르크에서 활동하던 좌파 연구 그룹인 ‘크리시스Krisis’가 발간한 책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았다.

  체제 전복적인 글도 아니고 국가 변란이나 내란, 음모를 모의하는 책도 아니다. 이 책은 독일의 정치, 사회적 상황을 고찰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노동하는 인간의 삶을 반성해보는 책이다. 지금까지 거론된 이론들을 점검하고 현실의 문제에 적용시키며 우리가 알지 못했던, 혹은 간과했던 ‘노동’의 문제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다.

  과연 인간은 일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 국가가 모든 국민을 먹여 살려야 할까? 아무도 일하지 않는 세상이 가능하단 말인가? 꼬리를 무는 의문부호는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조금씩 사라지고 11명의 이야기는 제각각 목소리를 높이며 혹은 차분하게 다양한 문제점들을 짚어 나가고 있다. 추상적 시간의 개념, 노동의 부패, 여성들의 노동, 저임금, 강제 노동, 노동 문화 등 하나의 주제를 둘러싼 주변을 점검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새롭게 인식된다. 자본주의 너머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책을 맺고 있는 이 책은 미래를 고민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된다.

  현실을 벗어나 과거를 돌아볼 수 없고 거꾸로 미래의 모습은 언제나 현실에도 드러나기 마련이다. 구체적인 책의 내용과 이론들은 독자들의 몫일게다. 아마도 다양한 반응과 논쟁이 가능한 책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 쉽게 권할 만하지는 않다. 일단 이론적 토대를 설명하면서 현실의 문제를 점검하고 있기 때문에 만만한 내용도 아니고 쉽게 재미있게 풀어쓴 교양서도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시간에 맞춰 일어나 노동하고 밤에도 노동하는 인간에 대한 모습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자본주의의 시대는 또한 ‘자명종’의 시대이기도 하다. 곧 사람들을 인위적으로 조명된 ‘일자리’로 몰아가기 위해 기괴한 시그널로 잠에서 깨우는 시계의 시대인 것이다.
……
야간 노동은 흔하지 않은 예외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런 시간의 고문을 인간 활동의 정상적인 척도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 자본주의의 ‘거대한’ 성과 중 하나다. - P. 52

  우리는 꿈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오래된 과거처럼 저절로 눈이 떠질 때 일어나고 졸릴 때 잠을 자는 인체의 시간을 말이다. 그나저나 책을 읽다가, 부지런함이 미덕인 사회에서 발칙하게도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던 마르크스의 사위 라파르그는 왜 아내와 함께 자살했을까 궁금해졌다.

  시계가 없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 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예전보다 ‘행복’해 졌을까? 더 여유있고 즐거워졌을까? 이렇게 바쁘게 정신없이 살아가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일까? 보다 희망찬 미래를 위해서? 책을 읽는 동안 의문 부호만 늘어간다.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현실 인식이 아니라 한번도 의심없이 받아 들이고 고민없이 믿었던 상식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책을 읽고 나서도 엉뚱한 맥락으로 레닌이 이 말이 긴 여운으로 머릿속을 맴돈다.

“자신을 무엇이라고 지칭하는 것과 실지로 그것인 건 서로 다른 문제다.”(레닌) - P. 247


080730-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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