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 - 생각하는 인간에서 놀이하는 인간으로 창조와 상상력의 원천으로서의 놀이 탐구
스티븐 나흐마노비치 지음, 이상원 옮김 / 에코의서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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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놀아보지 않은 사람은 놀 줄 모른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그보다 우선 우리는 놀이가 무엇인지 모른다. 아니 잊고 산다. 가끔 어린아이를 통해서 놀이를 재발견한다. 기억의 한계 때문에 우리는 놀이의 즐거움에 대한 기억을 잊은 것이다. 유년 시절을 거쳐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놀이가 죄악시 되는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놀이보다 일이 우선시되는 사회는 피곤하다. 살아남기 위해서 달려야 하고 남들보다 앞서 달여야 한다는 강박관념!

  끊임없는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 생존경쟁이라는 말이 지상 목표인 삶은 암울하기만 하다. 대충 살자는 말이 아니라 꼭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삶의 목표가 달라지고 방법을 조금 바꾸면 나라가 망하고 사회가 유지되지 않는 것일까? 지구상에 대한민국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놀이를 놓친다면 지루하고 딱딱한 결과물이 나올 것이다. 성스러움을 놓친다면 우리가 딛고 선 대지와의 연결성이 상실되어 버린다. - P. 17

  스티븐 나흐마노비치의 <놀이,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free play>은 놀이와 우리들의 삶을 연결시켜 예술의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딱딱한 예술론 책은 물론 아니다. 편안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빡빡한 현실에서 벗어나 모든 걸 ‘놀이’의 관점에서 바라볼 순 없을까 싶은 생각을 하게 한다.

  창조성은 놀이에서 출발한다. 예술적 감성과 상상력은 저절로 만들어지거나 천재적 감성에 의해 돌출되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다. 물론 개인차가 존재하지만 그것을 즐길 수 있는 마음과 열린 환경이 만들어내는 조화로움이 아닐까 싶다. 놀이는 인간의 본능이다. 알타미라 동굴에 벽화를 그리던 인류의 조상부터 현생 인류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늘 놀기 위해 일했다. 일하기 위해 노는 불행한 인류의 모습은 얼마나 비참한가.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창조성과 상상력은 호모 루덴스의 본능이며 특권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이자 목표이다. 놀이에서 출발하는 이 모든 즐거움을 우리는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보다 더 많은 부의 축적과 승리를 위해 맹목적으로 달리는 경주마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똑같이 반복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우주의 역사 속에서 모든 것은 단 한 번 일어날 뿐이다. - P. 41

  놀이의 원천, 과정, 극복, 결실이라는 네 개의 주제로 풀어낸 저자의 글을 풀어내는 솜씨는 탁월하다. 각 장마다 인상적인 선언들과 함께 열정, 의식의 흐름, 직관, 영감, 황홀경, 중독, 실수, 배움, 성숙, 확장, 생명, 예술에 관한 다양한 설명들이 설득력 있게 전개된다. 공부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신선함으로 읽어내려 갈 수 있다.

  21세기에는 생각하는 인간이 아니라 놀이하는 인간이 살아남지 않을까? 창조와 상상력의 원천은 놀이에서 출발한다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한다면 내 삶의 방식이 달라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수정되어야 한다. 내가 하고 일을 즐기고 행복한 마음을 열수 있는 능력은 나와 타인을 위한 배려이며 놀이를 위한 전제 조건이다. 세상은 넓고 하늘은 푸르다.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바라보면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웃을 수 있다. 소유데 대한 욕망을 버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선택한다면 인생은 더없이 풍요로워진다. 시간은 흘러가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때때로 사는 게 별로 즐겁지 않을 것 같다는 드는 사람이 많아 보인다. 즐긴다는 건 단순히 돈이 있어야 충족되는 즐거움이 아닌데도 말이다. 관점과 방식의 차이일 뿐! 그것은 어쩌면 선택의 문제이고 보이지 않는 안타까움이다.

놀이는 우리를 속박에서 해방하고 행동 영역을 넓혀준다. 놀이를 통해 반응이 풍부해지고 유연한 적응력도 길러준다. 이는 놀이의 진화적인 가치이기도 하다. 현실을 재해석하고 새로운 시각을 얻음으로써 우리는 고정된 사고에서 벗어난다. 놀이는 자신의 능력을 재확인시키고 전례 없는 방식으로 그 능력을 사용하도록 한다. - P. 65

  고정관념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으로 오히려 강박증에 시달리던 시절이 있다. 모든 억압과 순종적 사고 방식으로부터 자유롭게 사유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아니 그 안락함으로부터 먼저 벗어나야 한다. 창조성과 상상력은 바로 그 지점에서 비롯된다. 놀이는 진정한 자유의 출발이며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누구나 예술가가 되고 싶어하진 않지만 모든 사람은 놀고 싶어한다. 그 놀이의 의미를 어디서 어떻게 풀어내는 가는 개인적 취향뿐만 아니라 인간관계, 사회적 환경에도 영향을 받는다. 이 책에서는 그것을 창조성과 상상력이라는 키워드로 묶어 냈지만 예술과 무관한 일상에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이며 충분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과연 우리는 어떤 과정을 거쳐 이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이렇게 역설한다. 이 단계를 연습하자는 말이 아니라 성장과 진화를 통해 얻은 ‘창조의 자유’를 즐겨보자는 말이다. 자, 한번 놀아보자. 제대로!

창조의 자유는 성장과 진화가 가져다준 열매다. 창조적인 삶의 순환에서 우리는 최소한 세 단계를 거친다. 순수(혹은 발견) 단계, 경험(혹은 몰락) 단계, 통합(혹은 회복) 단계다. 탄생, 장애, 돌파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과정은 물론 단순하지도 선형적이지도 않다. 각 단계는 인생 전체에 걸쳐 복잡하게 전환되고 서로 얽힌다. - P. 239


08093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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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청소년에게 - 2.0세대를 위한 기성세대의 진실한 고백 대한민국 청소년에게 1
강신주 외 지음 / 바이북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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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 2.0세대. 신인류가 다가온다. 세대를 뛰어넘는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말이 있다. 각 세대의 특징을 한 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렵지만 21세기의 주역이 될 새로운 세대에게 적용되는 첫 번째 특징은 웹 2.0세대라는 말일 것이다. 대한민국의 청소년은 2008년을 기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참여’와 ‘개방성’을 특징으로 한 세대의 진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역사는 촛불집회의 의미를 기억할 것이며 이명박 정권의 검역 주권 포기와 근현대사 역사 교과서 왜곡시도, 경쟁 지상주의 교육 정책으로 인한 황폐화된 공교육의 책임을 물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지만 국가는 항상 대다수 국민의 뜻을 외면했고 기득권 세력의 집단 이기주의에 복무했으며 그들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정책을 일관되게 펼쳐왔다.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지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 되었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이를 외면하고 왜곡 보도와 지배 이데올로기에 세뇌 당한 채 자신의 계급적 위치와 국가의 정책 목표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그러나, 희망은 발랄하고 즐거운 상상력으로 무장한 청소년들에게 있었다. 지식과 정보의 무한한 확장과 공유가 가능한 세대에게 웹을 통한 진화 속도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청소년에게>라는 책은 기성세대가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에게 바치는 축사와도 같다. 어설픈 충고와 비전의 제시가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에게, 현실에 눈을 뜨고 억압과 순종의 관습적 사고에서 벗어날 것을 호소하는 간곡한 당부와 진심어린 충고들이다.

  관점과 세대에 따라 그들을 바라보는 눈이 다를 것이다. 유모차를 밀고 나온 엄마들에게까지 시비를 거는 사법 권력은 법이라는 보호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그 칼날을 겨누고 있다. 국가는 폭력이므로 국가에 저항하라는 톨스톨이의 말이 떠오르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 때문만은 아니다. 미래의 주역이 될 청소년들은 과연 이 시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진화하는 청소년들의 시선과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지 못하는 기성세대의 판단과 대책은 불쌍하기까지 하다.

  아직도 머리카락이나 치마의 길이로 학생들을 억압하는 교사들과 규율와 질서라는 미명아래 기존 질서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시스템이 건재하는 한 즉흥적이고 창의적 상상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19세기 교실에서 20세기 교사들이 21세기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 대한민국의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교사들조차 무비판적인 사고 방식으로 과거의 틀을 답습하고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으며 복지부동과 매너리즘에 길들여져 있는 한 대한민국의 청소년에게 할 말이 없어진다. 그것은 교육이 아니라 훈련과 훈육에 불과하다.

  이 책은 2008년 촛불집회를 계기로 웹 2.0 시대를 당당하게 열어젖힌 청소년 세대에게 던지는 기성세대들의 말잔치에 불과하다. 세대 간 통합이나 연대, 교육에 대한 기본적인 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채 청소년들에게 올바로 자라주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들은 슈퍼맨이 아니며 스스로 자가 증식하는 아메바가 아니다.

  인문학 정신을 기대하는 강신주, 홍세화, 김성동, 김조년, 고은의 발언들은 이름 모를 불특정 다수인 청소년들에게 말을 걸고 있으나 그들이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얼마나 현실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들의 글과 말이 빚어낸 슬픔이 아니라 대한 민국의 경쟁적, 억압적 교육 현실에 대한 반성과 성찰 없이는 미래도 있을 수 없다는 냉정한 현실 인식에 기인한다.

최열, 박승옥, 김낙중, 김규동은 생명과 평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환경과 문화라는 21세기의 거대 담론에 대해 과연 청소년들이 고민할 시간과 기회가 주어지기는 하는지 의심스럽다. 부정적 현실에 바탕을 둔 삐딱하게 보기가 아니라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의 마련과 현실 타개의 모색이 필요하다. 내일의 역사를 담당할 청소년들에게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판단 능력과 다양한 관점의 세상을 보여줘야하는 것은 기성 세대의 의무이며 책임이기도 하다.

  이 책의 마지막에서 ‘2.0 세대와 시대정신’이라는 제목으로 이이화, 우석훈, 권오성, 기세춘, 하종강, 이현주의 글을 싣고 있다. 각자의 입장에서 그리고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바라보는 비판적 관점에서 이들은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걸고 있는지도 모른다. ‘열정’이라는 젊음의 특권을 포기하지 않고, 이기주의와 왜곡된 물신주의에 저항하며 어떤 세상을 만들어 가는지는 지금 기성세대의 치열한 고민에서 비롯될 것이다.

  책임을 미루듯이 그들에게 맡기는 태도는 비겁한 기회주의에 불과하다. 이른바 좌파 지식인들에 해당할 만한 사람들의 글을 모아 한 권의 책을 만들고 그 작은 열망과 신념들이 모여 미래의 희망을 만들어 갈 수만 있다면 이런 책을 얼마든지 쏟아져 나와도 좋다. 하지만 그들의 희망대로 청소년들이 이런 종류의 책을 얼마나 읽어 줄 것인가? 누가 이 책을 읽힐 것인가? 그들의 부모와 교사들을 과연 이 책을 읽힐 만 하다고 판단할 것인가?

  기성세대의 생각이 어떠하든 그들은 지금도 진화하고 있으며 참여와 연대를 경험하고 있다. 개방적이고 상호 작용이 가능한 그들의 힘은 결코 그 크기를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지금과는 달라야 하고 그들이 만들어 갈 세상은 ‘더불어 함께’ 갈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이라는 좁은 사회에서 벗어나 보다 넓고 큰 세상을 바라보고 인류가 걸어온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다시 세웠으면 좋겠다. 세대가 교체되고 미래 사회의 아젠다가 다시 설정되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즐겁고 명랑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이라는 믿음조차 없다면 현실은 견디기 힘들다.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순종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혼동하면 안된다. 이기적인 욕망과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희생을 현대적 삶의 길이요 진리라고 인식해서도 안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어디로 걸어가고 있는가? 청소년들에게 매일 던지고 싶은 질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제, 마음의 눈으로 거울을 볼 시간이다.


08092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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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다보면 문득 창비시선 291
정희성 지음 / 창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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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의 흐름을 확인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나는 시인들의 나이듦을 통해 내 나이를 확인하고 세월을 절감한다. 가끔씩 그들의 사진을 통해 변해가는 모습을 확인한다. 나도 그렇게 변해갈 것이다. 눈에 보이는 나이가 아니라 시를 통해 확인되는 변화의 흐름은 가슴이 아리도록 슬프기도 하고 때로 낄낄거리기도 하고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

  정희성의 <저문강에 삽을 씻고>(1978)를 대하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1991)를 거쳐, <詩를 찾아서>(2001)을 다시 꺼내 뒤적여 본다. 책꽂이에 먼지가 쌓여가고 시인은 나이를 먹는다. 오랜만에 시집을 읽다가 웃었다. 편안하고 친근한 구절들은 결코 쉽게 나오지 않았다. 물론 단순히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주지 않지만 그만한 연륜과 여유는 또 젊은 시인들에게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어느 쪽이든 날카롭고 첨예한 감각만큼 중요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이제 내 나이의 무게 때문이기도 하다면 지나치게 주관적 판단일까 모르겠다.

  시가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운 진경 속에서 길어 올린 맑은 시들이 언제나 그의 시를 기다리게 했다. 다작은 아니지만 나올 때마다 충분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시에 흠뻑 취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올해 읽은 최고의 시집으로 주저없이 이 시집을 꼽겠다.

희망

그 별은 아무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 별은 어둠속에서 조용히
자기를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의 눈에나 모습을 드러낸다

  서시의 힘은 강렬하다. ‘희망’이 무엇인지 간결하게 말한다. 희망은 원하는 자의 눈에서나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눈 속에 주관적이고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희망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말이지만 희망은 별이다. 별은 어둠 속에서만 빛나며 찾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특별한 존재이다. 살아가면서 그 별은 눈에 보일 수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을날

길가의 코스모스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나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
선득하니,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 그림자가 한층 길어졌다


  이 시를 읽고 내가 철렁했다. 미래를 예견하는 듯한 작가들의 글을 읽는 것은 불편하다. 오규원이 그랬고 이청준도 그랬다. 세월의 흐름 속에 사람이 죽어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지만 그것을 예견하거나 스스로를 돌아보기만 하는 시는 섬뜩하기까지 하다. 서글픈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시로 읽혔다.

  이 가을에 코스모스 그림자가 길어지면 예사롭게 보이지 않겠다. 벌써 피어있을 코스모스를 보지도 못하고 가을을 보내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 하루가 다르게 찬바람이 분다. 또 하늘빛이 달라졌다.

해골

저 몸서리치는
캄캄한 눈구멍이
이를 악물고
세상을 내다보고 있다
한때는 저 눈에
별이 빛났으리


  가슴이 철렁했다가 이제는 아득해지는 법이다. 시간의 풍화작용. 우리는 언젠가 무화無化된다. 존재는 소멸하고 마는 법이다.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릴 육신의 허망함이여. 이를 악물고 세상을 내다보지 말고 허허로운 눈빛으로 한 세상을 짊어지고 가자. 거기 그렇게 놓여있는 채로.

  누구나 해골이 되어 만난다. 허무혼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아주 먼 미래에 대한 후일담으로 읽었다. 한 때는 모든 사람의 눈에도 별이 빛났으리라. 살아있는 지금도 눈에 별 하나 없는 사람들과 더불어 오늘도 우리는 저 험한 정글을 향해 뛰어가고 있다.

희망공부

절망의 반대가 희망은 아니다
어두운 밤하늘에 별이 빛나듯
희망은 절망 속에 싹트는 거지
만약에 우리가 희망함이 적다면
그 누가 이 세상을 비추어줄까


  그래도 희망공부를 멈출 수는 없다. 여전히 시는 희망이며 시를 쓰고 읽는 일은 희망공부와 다름없다. 어두운 곳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별처럼 희망은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법이다. 이 세상을 비춰줄 마지막 불빛은 희망이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공부해야 한다. 잠시도 쉬지 말고 게으르고 누추한 곳에서 벗어나 희망을 비춰줘야 한다.

  그 희망이 때로는 먼 미래의 시간일 수도 있고 가까운 사랑일 수도 있겠다. 까만 밤하늘에 오늘도 별이 빛나는 이유는 아득한 그리움 때문이거나 보이지 않는 희망에게 기대기 위해서일 것이다. 모은 아픔과 상처를 보듬어줄 어둠에게 속삭여 본다. 작은 희망들이 모여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어 밤하늘의 별이 되고 은하수가 될 것이라고.



가까이 갈 수 없어
먼발치에 서서 보고 돌아왔다
내가 속으로 그리는 그 사람마냥
산이 어디 안 가고
그냥 거기 있어 마음 놓인다


  산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은 산이 아닌 것처럼. 그냥 거기 있는 사람은 영원이라는 기준으로 보면 찰나에 불과하다.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뭉스런 몸짓을 하는 것은 시인의 넉살이거나 정교한 희망이거나.

  주위를 둘러봐도 산은 보이지 않고 그저 야트막한 능선들이 이어져 있다면 또, 그 아니 즐거운가. 산이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것도 놓일 것이 없으므로.


080925-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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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5
이권우 지음 / 그린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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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아직도 유효한가? 각종 위기설 속에서 책의 위기는 하루 이틀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문학의 위기는 곧 책의 위기를 의미한다. 눈부신 기술의 발전과 영상 매체의 진화 속도는 지식과 정보의 수단을 보다 편리하게 만들었다. 시간과 노력을 줄이고 보다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한 방법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책이 가진 가치와 위력에 대적할 만한 것은 아직 찾기 힘들다.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상상력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은 인간의 지적 능력과 통찰력 그리고 사유의 범위를 무한하게 팽창시킨다. 인간의 사고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책을 읽고 생각하고 토론하고 글을 쓰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어쩌면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방법을 우리는 에둘러 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보다 쉽고 간단한 방법을 찾아보지만 요령부득이다.

  책 좀 읽는다는 무림의 고수 중에 이권우라는 사람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은 책을 내 놓았다. 그린비에서 인생역전 프로젝트 시리즈로 출판되어 <호모 쿵푸스>와 <호모 루덴스>에 대한 좋은 추억으로 별 고민 없이 주문했다. 책은 단순하게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왜 읽어야 하는가’, 2부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이다. 가장 단순하지만 책에 관한 본질적인 물음에 답하고 있다. 간단하고 알기 쉽게 풀어내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독자들은 책을 읽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그럼 아주 잘 쓴 책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읽는 방법까지 제시한다. 기존의 상식을 뒤집는 이야기들을 통해 진짜 책읽기가 무엇인지 그런 방법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설득하고 있다.

  이 책의 목적은 단순해 보인다. 책을 읽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1차적인 목표는 달성한 듯 하지만 중요한 것은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내가 항상 딜레마에 빠지는 문제는 안 읽어도 되는 사람들 즉, 책벌레들이 이런 종류의 책에 관심과 흥미를 보인다는 것이다. 읽으면서 깊이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짓는다. 정작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얼마나 읽을 것인가 그것이 궁금하다.

  저자가 말하는 바,  책을 읽는 이유와 목적 그리고 방법론을 거의 그대로 따라하는 나 같은 종류의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지킬 수 없는 방법들이란 결국 이상적인 방법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을 처음부터 모두 해 보자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상황과 업무 혹은 관심과 목적에 따라 다양하게 변형할 수 있다. 결국 한 권의 책을 읽고 토론하고 겹쳐 읽으며 확장시키고 글쓰기를 통해 정리하는 삶은 풍요로울 수밖에 없다. 전문가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결코 아니다. 누구나 즐겁고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우리의 교육 환경과 구조가 그것을 가르치지도 배울 수도 없게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책의 말미에 ‘책 읽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는 제목을 보다가 깊은 한 숨을 내쉰다. 참으로 척박한 대한민국의 학교 현실 때문이다. 부모들의 요구 사항이나 학생들이 책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심 정도를 감안하고 대학 입시와 결부되어 고민하면 절대 답이 나오질 않는다. 논술 광풍이 몰아쳐 초등학생용 논술 대비 도서가 출판될 정도이니 무한 경쟁과 생존의 본능을 위한 책읽기 외에 다른 대안이 제시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쓰기 위한 읽기 교육을 향해’라는 에필로그는 벌떡 일어나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한 두 사람의 교사나 그에 뜻을 같이 하는 학부모 몇 명이 모여 대안 학교를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너무 오버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학벌없는 사회’를 지향하고 ‘대학평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참으로 멀고도 험한 길이며 이상적이고 꿈같은 목표이기도 하다. 2008년 대한민국의 현실을 직시하면 이 책은 참으로 불온하다.

  표정훈이나 조희봉을 통해 고수들의 일면을 들여다 본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서 그리 큰 호기심이나 특별한 충격을 받을 일은 없다. 다만, 구체적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책을 다루는 법에 대해 공감하고 이해하며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부분들에 대해 고개를 끄덕일 정도의 책으로 읽을 수 있겠다. 책의 목적 자체가 읽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니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다.

  나는 혼자 생각한다. 인문학 분야에 두루 통달한 사람이 초보들을 위해 철학, 역사, 문학, 사회,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안내서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수준과 내용을 일괄해주고 분야별로 정리해주며 차근차근 기본적인 특징과 방법을 설명해 주는 책은 없을까? 출판 관계자가 계시다면 혹 여쭙고 싶다. 그런 저자를 하루 빨리 발굴하고 탁월한 기획과 편집으로 하루 빨리 그런 종류의 책을 만나고 싶다고 말이다.

  이 시리즈의 부제처럼 따라 붙은 ‘책읽기의 달인’은 필요 없다. 한글만 알면 누구나 읽는다. 문맹이 아니라 책맹이 늘어가는 세상에서 도대체 왜 아직도 책 타령인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억지로 읽힐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세상에 수많은 즐거움 중에 책도 한 자리 할 수 있다는 공감 정도는 얻어내야 할 것 아닌가. 책읽기의 달인은 아니어도 많은 사람들이 그 달인을 부러워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아닌가 말이다.

  막연하게 책을 읽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정작 필요성과 방법을 모르는 동생에게, 책보다 재미있는 것이 훨씬 많은 세상에서 왜 굳이 책을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친구에게, 책만 보면 알러지 반응으로 얼굴이 벌개지는 후배에게, 드라마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는 어머니에게, 지금 이 나이에 책은 무슨 책이냐고 말하는 할아버지에게 은근슬쩍 선물해 볼 수 있는 유쾌한 책이다. 

  책읽기는 기본적으로 혁명이다. 지금 이곳의 삶에 만족한다면 새로운 것을 꿈꿀 리 없다. 꿈꿀 권리가를 외치지 않는 자가 책을 읽을 리 없다. 나를 바꾸려 책을 읽는다. 애벌레에서 탈피해 나비가 되려 책을 읽는다. 세상을 바꾸려 책을 읽는다. 우리의 삶을 억압하는 체제를 부수고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려 책을 읽는다. 그러하길래 책읽기는 불온한 것이다. 지배적인 것, 압도적인 것, 유일한 것, 의심받지 않는 것을 희롱하고, 조롱하고, 딴죽 걸고, 똥침 놓는 것이다.
  변신을 꿈꾸는가. 그렇다면 책을 읽어야 한다. 다른 세상을 상상하고픈가. 그렇다면 책을 읽어야 한다. 보라. 혁명전선에 뛰어든 체 게바라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지 않은가. - P. 76


080923-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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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9-23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는 이책 서평단으로 받아서, 읽어야 되는데... 또 왠지 손이 안가고 있어요. 인식의 힘님 리뷰 덕에, 읽을 마음이 좀 나네요 ^_^

sceptic 2008-09-25 19:18   좋아요 0 | URL
그냥 편안하게 읽히던데요...^^ 손대면 금방 책장 넘어갈 거예요.
 
찔레꽃
정도상 지음 / 창비 / 2008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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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붉게피는 남쪽나라 내고향
언덕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자주고름 입에물고 눈물 젖어져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믿을 사람아,

달뜨는 저녘이면 노래하던 동창생
천리객창 북두성이 서럽습니다
작년봄에 모여앉아 배긴사진
하염없이 바라보니 즐거운 시절아.


  인터넷을 뒤적거려 패티 김과 백난아가 부른 ‘찔레꽃’을 들었다.

엄마의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하나씩 따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밤깊어 까만데 엄마 혼자서
하얀 가루 아프게 내려오시네
밤마다 꾸는 꿈은 하얀 엄마꿈
산등성이 나무로 내려오시네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초가집 뒷산길 어두워질때
엄마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이어서, 정하나와 이은미가 부른 ‘찔레꽃’을 들었다.

  정도상의 연작소설 <찔레꽃>은 처음부터 익숙한 찔레꽃의 선율이 떠올랐다. 다만 ‘찔레꽃 붉게피는 북쪽나라 내고향~’이라고 가사를 바꾸어 부른다면 이 소설에 더욱 잘 어울린다. 고향과 어머니는 도시의 삶에 익숙한 우리들에게도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을 전해준다. 언젠가 어딘가로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는 사람은 그리움을 안다. 파편화된 삶의 조각들이 또 하나의 퍼즐처럼 연결된 곳에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최소한 물질적 풍요로움을 누리게 때문이다.

  기본적인 생활 여건으로부터 추방당한 사람들의 신산스러움을 겪어보지 않는 나로서는 공감의 능력만을 최대한 발휘해 볼 뿐이다. 6.25와 1.4후퇴를 기억하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후세대의 잘못은 아니다. 다만 동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현실에 대한 외면은 조금 다른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분단 50년 세월이 훌쩍 지났지만 남과 북의 관계는 지구상의 어느 곳보다 첨예한 대립을 유지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때문인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북 정책은 일관성을 잃었고 2008년 9월 현재 북한은 핵연료봉 폐기를 정지한 상태이다. 한반도의 문제는 여전히 우리의 손을 떠나있고 6자회담이라는 주변국들과의 역학 관계 속에서 풀어낼 수밖에 없다. 미국의 주도권 아래 나머지는 들러리에 불과하다. 이명박 정권은 한 술 더 뜨고 있다. 무조건적 퍼주기를 중단하겠다는 선언과 북한의 인권 문제를 거론하고 나섰다. 남북관계는 경색국면으로 접어든 지 오래고 평화와 화합의 노력은 중단된 지 오래다. 반목과 질시로 민족의 통일이 가능한지 궁금하다.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생존의 문제가 되어버린 남북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과 태도가 달라져야 하지 않은가. 위정자들이 바라보는 남북관계는 정책의 일관성 없이 5년마다 바뀌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국민들도 모두 동의하고 있는지 먹고 사는 일이 바빠 관심이 없는 것인지.

  황석영의 <바리데기>를 통해 독자들은 무엇을 읽어냈는지 모르겠다. 정도상의 <찔레꽃>은 우리에게 또 어떤 의미를 던져주었는지 알 수 없다. 단순히 탈북 여성 문제를 다룬 이색적인 소설로 비춰지는지 아니면 우리 형제와 부모들이 겪고 있는 진행형의 아픔인지. 단편들이 모여 연작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이 소설은 북한의 주민들이 겪고 있는 삶의 모습이 여실하게 드러난다. 작가의 직간접적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어 현장감 넘치는 묘사와 생생한 표현들이 소설의 긴장감을 더해준다. 겨울 압록강변에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충심이었다가 메이나였다가 소소였다가 은미로 탈바꿈하는 한 여성을 통해 이 시대의 비극을 극명하게 전달하고 있다.

  생존의 문제인 탈북자에게 정치적 이념과 종교적 시혜 문제로 접근하는 모든 주변 상황들을 비웃고 있기도 한 이 소설은 그들이 과연 한국 사회에서 어떤 사람들로 화합하는 지의 문제를 거론하기보다 현재 상황의 심각성과 그들의 과연 우리와 무관한 사람들인지 되묻고 있는 듯하다. 독자 일반의 각성을 촉구하는 프로파간다가 아니라 조금 더 넓은 시각과 열린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작가의 메시지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소설의 감동은 기발한 아이디어와 감칠맛 나는 문장으로 전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이렇게 시대현실을 투명하게 비춰주는 거울의 역할을 할 때가 더 많다. 정도상의 소설은 아프고 쓰린 생채기를 눈앞에 정면으로 드러내고 있어 독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그 불편함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부지런히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

  진정으로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생각한다면 21세기의 유랑민이 되어버린 그들의 삶과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한다. 정치적, 군사적 역학 관계는 미국의 패권주의의 들러리에 불과함을 직시해야 한다. 개방과 호혜의 원칙만이 우리 민족이 공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원칙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순진하고 이상적 대안이 아니다.

  반인권적 반평화적 행위를 서슴지 않는 정부와 국가권력이야말로 민족의 화합을 더디게 하며 더불어 함께 공존해야 한다는 당연한 진리로부터 국민들을 멀어지게 하고 있다. 한 권의 소설로 사람들의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작가가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우리들 삶의 중요한 부분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함께 고민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그것을 감동적인 소설로 형상화해내는 작업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정권이 바뀐 지 1년도 지나지 않았지만 모든 분야에서 우려할 만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근현대사 교과서가 좌편향이라 손을 봐야겠단다. 국민 대다수가 노동자로 살아가는 데도 노동자의 권리나 노동법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비정상적인 나라에서 이제 또 다시 국가 지배이데올로기의 망령이 살아나고 있다. 박정희, 전두환 시절의 부활이 멀지 않았다. ‘용비어천가’를 달달 외워 대학에 입학하고 신경림이나 김지하의 작품을 빨갱이의 시로 몰아 문학 교과서에서 삭제하는 날이 머지 않았다. 우리는 가만히 손놓고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저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리라. 오, 필승~ 대.한.민.국!

  10년 후에, 아니 지금 이 시대의 작가들은 도대체 무엇을 쓰고 있으며 이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것이 궁금해졌다. 갑자기.


08092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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