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 웹 2.0에 접속하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18
강원택 지음 / 책세상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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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곧 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다른 말일 것이다. 지배와 피지배 개념으로서 인간의 특징을 정의하는 말일 수도 있고 수평적 개념으로서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을 수직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말일 수도 있다. 사회적 관계를 정교화하고 법과 제도가 개입되어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제도가 정치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인간은 한 순간도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모든 행위가 정치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는 현실 생활과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정치인들의 행위를 통해서나 신문이나 방송 등 언론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선거 행위를 통해 실제 생활 속에서 우리가 정치인들을 만들어내지만 스스로 만들어가는 참여 행위가 아니라 간접적이고 대의적인 수단으로 이용되기 때문에 선출된 정치인들의 행위를 굳게 믿어야하는 상황이 대부분이다. 생업에 종사하다 보면 직접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기 어렵다. 왕정이나 군주정을 통해 민주정이 자리를 잡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정치가 멀게만 느껴진다.

  한국 정치의 일천한 역사를 돌아보면 국민들의 참여와 의식은 더욱 소극적이며 수동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당 정치가 자리 잡지 못하는 있는 우리의 현실은 계보 정치나 지역에 기반을 둔 토호 정치가 맹위를 떨쳤고 정책 중심의 정치가 아니라 인물 위주의 정치가 자리를 잡고 있다. 어떤 정부나 정당이 집권을 해야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한 고민보다 이 사람이라면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정치는 국민을 위한 봉사라는 생각보다 권력이며 자본이라는 믿음은 여전히 굳건해 보인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의 의식이 발달해 가면서 한국의 정치는 일대 혁신을 맞이한다. 그 주역은 바로 인터넷이다. 웹 2.0 시대를 맞이하여 바야흐로 한국 정치는 진일보 했으며 그 위험서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목소리와 직접 민주정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 놓았다. 인터넷은 이제 우리의 현실 생활은 물론 멀게만 느껴지던 정치까지도 각 가정까지 파고 들었다.

  그 출발은 물론 2002년 대선이었다. 노무현의 당선은 불가능해 보이던 현실 정치의 벽을 넘어 선 축제처럼 여겨졌다. 누군가의 표현대로 노무현의 최대 업적은 ‘당선 그 자체’에 있는 지도 모른다. 월드컵의 열기와 효선, 미선을 위한 촛불 집회를 거쳐 노무현의 당선으로 마무리된 현상들은 21세기의 새로운 변화를 예감했다. 그것은 참여와 소통 그리고 연대 가능성에 대한 희망이었다. 국민들의 열망과 달리 참여 정부가 보여주었던 실망스러움은 접어두고라도 개혁과 변화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믿음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2008년 대한민국의 정치가 어떠하든, 경제라는 실체가 불분명한 괴물의 모습이 어떠하든 웹 2.0 시대의 한국인들은 과거의 정치 형태와 권력자로서 정치인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미 정치 권력은 ‘시장’이 아니라 ‘시민’에게 넘어 왔다고 믿고 싶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 갈 힘이다.

  강원택의 <한국 정치 웹 2.0에 접속하다>는 바로 이러한 한국의 정치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서다. 인터넷을 통해 대의민주주의의 단점들이 어떻게 보완될 수 있는지 살펴본다. 인터넷을 통한 참여의 한계와 문제점들은 당연히 지적될 수 있다. 하지만 변화하는 정치 환경에서 웹 2.0에 대한 현재와 미래는 결코 가볍게 취급할 수 없는 대상이 되었다.

  이 책에서는 의제 설정의 민주화, ‘대중의 지혜’, 선거와 프로슈머 유권자라는 핵심 개념들을 알기 쉽고 간단하게 진단하고 있다. 한국 정치의 진화를 위해서 법과 제도를 살펴보고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과연 한국 정치는 진일보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정치 행위에 참여하는 네티즌의 참여와 선거를 통한 정치 행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쉽게 정치인들을 욕하고 안주삼아 씹어대지만 내가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지는 반성하지 않는다.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내 생각이 과연 어디에서 왔으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이기적 욕망인지 대다수를 위한 방법인지 깊이 고민하지 않을 때가 많다. 누구나 그렇다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인터넷을 통한 정치 지형의 변화를 쉽게 기대할 수만은 없어 보인다. 그곳에도 소수의 활동가와 다수와 눈팅족과 무뇌충의 저항들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건전하고 올바른 방향으로만 모든 사람들이 질주할 수는 없어도 현재 상황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내 행동에 대한 책임은 분명하다. 어쩌면 세상은 소수의 정치인이나 권력가, 자본가에 의해서 굴러간다는 패배의식에서부터 변화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서 있는 여기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반성과 작은 실천들이 모여야 한다. 그것이 웹 2.0시대를 열어가는 우리들의 바람직한 모습은 아닐까 싶다. 정치는 정치일 뿐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웹의 영역을 확장하고 즐거운 놀이의 공간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변화는 시작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081025-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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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립자
미셸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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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울한 환상과 성적 자극들이 모여 빚어내는 회색빛 소묘. 미셸 우엘벡의 <소립자>는 최근의 내 감정 상태만큼 극도로 불안하고 우울한 무채색으로 가득하다. 그 원인은 차치하고 내면의 풍경을 드러내는 방식과 현실에서 발현되는 모습들이 무성영화 시대의 흑백필름을 보는 듯했다. 우엘벡의 이 소설이 낳은 수많은 논란은 지극히 당연하다. 누가 이 소설의 의미를 제대로 읽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끝없이 복잡한 미로를 찾아 헤매는 사람은 출구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어 오히려 행복할 것이다. 마음의 갈피 사이로 난 오솔길들, 상처 난 길섶의 들풀들, 흐린 하늘 아래 비추는 한 줄기 해살과 같은 형언할 수 없는 이미지와 숨결들이 배어나오는 소설이었다. 어떤 작품이든 마찬가지겠지만 독자의 감정이 이입되거나 영혼이 투영되거나 이도저도 아니면 고개를 끄덕이며 동경한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다양한 효과를 나타내고 상반된 평가를 받기에 충분할 것 같다.

  작가의 말대로 이 책은 삶의 대부분을 20세기 후반기에 서유럽에서 보낸 한 남자의 이야기다. 최고 수준의 생물학자 미셸 제르진스키가 실종된다.

그리하여
오늘 처음으로,
우리는 옛 시대가 어떻게 종말을 고했는지 돌이켜보고자 한다.


  는 말로 프롤로그가 끝나면서 한 남자가 이야기는 시작된다. 형이상학적 돌연변이를 대표하는 이 인물은 기독교로 설명될 수 없는 시대정신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20세기 말의 특별한 인물 유형을 보여준다. 아버지가 다른 미셸의 형 브뤼노는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통해 자라난 아이가 아니다. 동생 미셸 또한 한 어머니에게서 서로 다른 아버지의 아이들이 태어났으니 평범하다고 볼 수 없는 삶을 예고한다. 그들 형제는 만나게 되고 서로의 생을 위로하기도 하고 바라보기도 하며 고독과 우울 속에서 생을 버텨낸다.

  어린 시절 기숙사에서 당한 브뤼노의 모욕도 그토록 사랑했던 아나벨을 잡지 못하는 미셸도 결국 다른 몸에 숨어 있는 두 개의 영혼처럼 보였다. 그들이 드러내는 삶의 방식은 우리에게 너무도 낯설다. 68세대와 그들의 공동체 그 안에서 벌어지는 허위의식과 개인의 부조리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남겨준다. 길가에 떨어진 동전 지갑을 줍듯 탄핵사태에 대한 반발과 분노로 국회의원이 된 386들의 정치 행태가 떠 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정치적인 것은 아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색적인 소설이다.

  적확한 심리 묘사와 내면 풍경은 기막힌 묘사와 적절한 어휘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오힐 냉정하고 객관적인 사실들을 건조하고 냉랭한 목소리로 독자에게 뱉어내듯 한다. 프랑스 소설에서는 보기 힘든 장면들로 기억될 것이다. 우엘벡이 의도적으로 논란을 예고했는지 알 수 없으나 성적인 부분에 대한 묘사나 등장인물의 취향뿐 만 아니라 그 원인과 삶의 과정들이 때론 불편하게 때론 어색하게 소설 속에 녹아 있다.

  한 인간에게 있어 고통이란 숙명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잘 견디지 못하고 극한적인 반응을 드러내기도 한다. 자살을 하기도 하며 과장된 목소리로 울부짖기도 한다. 그러나 섣불리 그만큼의 고통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비교가 불가능하며 실존적 고민의 깊이는 개인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아픔과 상처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에게 우리는 오히려 연민을 느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거 회상과 현재의 삶을 연결시키는 연대기적 서술에 의존하면서 미래 사회까지 진단하는 이 소설을 쉽게 규정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통해 보여준 미래 사회를 이 소설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그 탁월한 예지력은 이 소설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는데 재미있는 것은 1998년에 출판된 이 책의 미래는 불과 몇 달 앞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10년 만에 커다란 기술의 진보나 생물학적 변화를 예고 했다기 보다는 현대 사회의 패러다임 자체가 변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시인으로 데뷔한 작가라고 하는 데 읽어 본 적이 없으니 뭐라 말 할 수는 없지만 서사와 사건 중심의 소설이 아니라 섬세한 개인의 내면 묘사, 때때로 과거의 기억을 들추는 건조한 목소리가 오히려 읽는 사람을 답답하게 만든다. 땀과 태양이 엉겨 붙은 바람 한 점 없는 바닷가의 적막감. 작가는 이 소설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독자는 소설의 한 복판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당장 책장을 덮고 시원한 맥주를 목구멍에 들어붓고 싶은 욕망을 느끼게 하는 그 무엇이 이 소설의 백미다.

  이 책은 시간의 모래 속에 사라져갈 우리 모두에게 경의를 바친다. 우리의 삶이 어떤 형태로 이어질 것인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한 인간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서 그 삶의 결들이 보여준 무늬들을 통해 짐작해 볼 수는 있다. 제르진스키가 사라진 곳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돌아보는 것이 작가의 의도일 것이다. 우엘벡이 무엇을 보려주려 했든지 이 책은 내게 고통과 우울의 진한 페이소스를 안겨주었다. 자, 이제 밤하늘을 향해 기지개나 한 번 켜볼까?


08102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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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 問 라이브러리 5
강수돌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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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자생존의 논리는 인간의 유전자에 내면화 되어 있는 것일까?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삶의 방법일 지도 모른다. 자연 상태에서 벗어난 인간이 생존의 본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상태로 사회를 유지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나 오래된 일일까? 아니 어쩌면 지금도 태어나는 순간부터 생존하기 위한 몸부림은 계속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본능만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는 보다 더 낳은 삶의 조건을 유지하기 위한 경쟁이 끊임없이 계속된다. 그것은 물질과 문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무한 경쟁 체제에 온몸을 내맡긴 채 끝없는 욕망을 재생산한다.

  삶의 목적과 방법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사람이 사는 사회마다 시대적 가치가 있고 거대한 흐름이 존재한다. 그것을 만들어가는 주류의 흐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사는 방법도 있고 <꽃들에게 희망을>을 준다고 믿는 애벌레처럼 끝없이 남을 밟고 올라서는 경쟁에 뛰어드는 삶도 있다. 우리는 어디쯤 걸어가고 있을까? 그 흐름과 방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 과연 몇이나 되는지 궁금하다.

  신안1리 마을 이장 강수돌이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 되는가>라고 질문을 던진다. 최근에 생각의 나무에서 問라이브러리 시리즈 5권으로 펴낸 책부터 손에 집힌다. 짧은 분량에 많은 내용을 함의하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스러웠지만 제목부터 강렬하다. 하지만 책장을 펼치기도 전에 강수돌 교수의 이전 책들의 내용을 바탕으로 제목의 의미를 고민해 본다. 어렵지 않게 답이 찾아진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정보와 지식만을 확인하는 책읽기를 고집할 수도 없다. 읽기도 전에 책의 내용을 짐작한다는 것 또한 건방지지만 말이다.

  끊임없는 경쟁으로 얼룩진 한국사회와 한국인의 삶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쓰여진 이 책은 21세기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우리들의 삶과 일에 대한 이야기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일중독 벗어나기>에서 보여주었던 우리 사회의 우울한 자화상에서 출발한다. 자아실현을 일에서 찾고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는 논리가 사회 전체를 지배하지만 과연 일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해 보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마르크스의 사위 폴 라파르그가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고, 버트런드 러셀이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이야기하지만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근대화 사회로 이행과정에서 게으름은 악이고 근면은 선이었다. ‘새마을 운동’으로 잘살아 보세를 외쳤지만 그 혜택이 모두에게 돌아가지는 않았다. 전체의 파이를 키워 함께 나눠 먹자는 달콤한 유혹은 계속되지만 신자유주의 물결 이후 양극화는 심화되고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가정에서 발원한 부모들의 교육 방식과 대학의 서열화 사교육을 통한 무한 경쟁 체제는 적자생존의 자연법칙이 유효한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다. 80은 20에게 지배당하고 교묘한 논리로 정당화된다.

  우리의 삶은 어느 순간부터 행복해 질 수 있을까? 명문 대학에 입학 하는 순간, 대기업에 취업하는 순간, 고시에 합격하는 순간, 강남에 아파트를 구입하는 순간? 죽을 때까지 경쟁의 덧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것을 내면화하기 위해 이제 지자체와 국가가 앞장선다. 초등학생을 한 줄로 세우기 위한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일제고사의 망령은 다시 부활했다. 가진 자를 위한 국제중, 특목고는 확산되고 건설과 토목만이 살길이라는 믿음은 여전하다. 삶과 사랑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일과 직업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사치에 불과한가.

  이른바 ‘팔꿈치 사회’라는 섬뜩한 표현으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자기소외가 시작되는 경쟁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소통과 연대가 대안이 된다는 저자의 주장을 도대체 현실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때때로 책장을 덮고도 막막해진다. 실천적 대한이 아니라 한낱 이상적 주장에 불과한 것인가 하는 자괴감이 든다. 눈을 들어 현실을 보면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를 얹어 놓은 것 같다.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인 속도로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우리는 어디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것인지.

  저자가 주장하는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 열 가지’는 우리를 아프게 한다. 결국 경쟁은 학교에서 내면화되고 가정에서 공고화된다. 혹자는 학교의 실정을 잘 모르는, 학부모의 요구를 잘 모로는, 무한 경쟁시대에 큰 일 날수 있는, 지나치게 부정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자. 우리의 아이들이 학교에 무엇을 배우러 가는지.

  첫째, 공부의 궁극적 목적이 행복한 삶이란 것을 일관되게 가르치지 않는다.
  둘째, 대학이란 그 자체로 공부의 끝이 아니라 비로소 ‘큰 공부(大學)’를 시작하는 곳이라는 점을 가르치지 않는다.
  셋째, 우리 사회가 ‘상중하’라는 사다리 질서로 되어 있고, 우리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가 깨 놓고 보면 결국은 상층부로 진입하여 기득권을 많이 차지하려는 것이라는, 삶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넷째, 학교와 부모는 아이들이 ‘인재’가 되고 ‘영재’가 되고 ‘천재’가 되는 것을 바라지만, 이런 인재, 영재, 천재와 같은 말들이 결국은 아이들을 삶의 주체가 아니라 누군가 써먹기 좋은 자원, 즉 수단으로 보는, 잘못된 철학에 기초해 있음을 가르치지 않는다.
  다섯째, 초중고에서 수백 번 반복하며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지만, 진정으로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기 위해 몸과 마을 바치는 구체적 방법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는다.
  여섯째, 초중고 학생들도 단지 아직 어른이 아니라는 뜻에서 미숙한 학생이 아니라, ‘나날이 자라는 과정에 있는 하나의 인격체’임을 가르치지 않는다.
  일곱째, 각종 시험에 대해 무조건 잘 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실상 이런 시험문제야 시간이 흐르면 대부분 잊어버릴 것이고 나아가 참된 삶에 별로 필요도 없는 허황된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가르치지 않는다.
  여덟째, 입시 경쟁이 결국은 기업들이 써먹기 위한 노동력 경쟁으로 연결되고, 노동력 경쟁은 결국 상품 경쟁, 생존 경쟁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학교는 가르치지 않는다.
  아홉째,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타인에 대해 친절하고 우애와 환대의 정신을 갖는 것이 교과서 내용을 외우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학교는 일관성 있게 가르치지 않는다.
  열 번째, 개인적으로 정직하고 우애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 것을 넘어, 사회질서 자체가 더 이상 사다리 질서가 아니라 ‘원탁형 질서’로 되어야 사람이 참으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학교는 가르치지 않는다.

  <학교 없는 사회>의 저자 이반 일리히를 직접 만났던 저자의 경험담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이야기, 앙드레 고르와 도린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오래 기억될 만하다. 특히 나비처럼 날아가신 어머니의 임종에 관한 이야기는 누구나 경험했거나 경험하게 될 일이기 때문에 ‘경쟁’과 무관하게 진한 감동을 남긴다.

  나를 알고 싶다면 가정과 사회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국가를 보면 된다. 통시적 관점에서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조망하면 우리는 씨줄과 날줄로 얽힌 거미줄 속에 살아가고 있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자포자기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 저자처럼 연대지향적 사회의 밑그림은 도저히 그릴 수 없는 것인가. 이제 우정과 환대의 사회는 영원히 불가능한 것인가?


081019-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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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0 07: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22 2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괴물의 탄생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4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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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지 않는 실체와 싸우는 것이 가장 힘겹다. 그것은 권력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침묵의 카르텔이라 명명하기도 하고 헤게모니라고도 한다. 표현 대상과 이름은 달라도 개인이 맞서기에는 불가항력적인 경우가 많으며 음험한 시선들과 드러나지 않는 시스템으로 작동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참여와 연대 실천과 행동이 뒤따르지 않으면 영원히 그것들의 파상 공세에 시달릴 것이며 다수가 피폐해지고 참혹한 결과를 가져온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그것의 이름을 ‘국가’ 혹은 ‘괴물’이라 불렀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표현했지만 우리는 그것을 정치권력 혹은 공인된 국가권력이라고 부른다. 홉스는 왜 그랬을까? 온몸으로 체감하면서도 너무나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방법으로 실제 생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실체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한국의 정치든 경제든 사회든 각 분야에 숨어 있는 치열한 헤게모니 전쟁은 집단의 크기와 상관없이 곳곳에서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가만 들여다보면 그 거대한 흐름을 떠나 우리의 삶을 생각할 수조차 없지만 쉽게 포기하거나 외면한다. 개인적 이기주의, 무임승차, 집단적 포퓰리즘 등 그 원인은 다양하게 진단할 수 있겠지만 결과는 예측하기 어렵고 그 해법은 이해관계에 따라 상충된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인 문제는 개인과 집단마다 첨예하게 대립된다. 보다 많은 돈을 벌어 잘 살고 싶다는 욕망을 기저에 둔 채 정책 결정과 사회의 시스템은 다양한 목소리로 울려 퍼진다. 대한민국의 과거와 오늘을 돌아보고 미래를 대비하는 거시적 관점의 목소리는 찾기 어렵다. 단기 처방은 난무하지만 정작 다수(?)를 위한 방편을 제시하는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안목을 마주하기는 어렵다.

  한국경제대안 시리즈로 시작된 우석훈의 경제 이야기가 4권 <괴물의 탄생>으로 마감됐다. 3권 <촌놈들의 제국주의>만 읽었으니 절반을 읽은 셈이다. 1권 <88만원 세대>로 주목받았으나 나는 정작 1권을 읽지 않았다. 이제 거꾸로 1권을 읽어볼 차례이다. 처음부터 읽지 않았어도 그의 이야기 속에 일관된 흐름은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관점이 이론을 뒷받침한다면 이 책들은 누구에게나 읽힐 만한 책은 아니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이거나 한나라당과 조선일보를 믿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화병(火病)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다음의 공식이 책 표지에 등장한다.



  누구의 입장에서 어떤 경제를 만들어 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는 경제학자마다 다르게 이야기 할 수 있다. 때로는 전혀 상반된 주장으로 듣는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기도 한다. 지금 우리나라의 경제 정책 기조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생각과 정책의 방향을 봐도 그렇고 과거의 정책과 방향을 보아도 그렇다. 최적의 선택은 어렵다. 하지만 최선의 선택은 필요한 것이 아닌가?

  우석훈은 이 책에서 그 대안들을 마무리 하고 있다. 인문학 과정 대학생과 대학원생 수준을 겨냥해서 쓴 책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그렇게 어렵고 지루하지는 않다. 저자 특유의 발랄하고 경쾌한 어법은 계속된다. 다만 내용 자체가 어둡고 무거워 앞선 시리즈를 본 독자들의 표현대로 ‘공포 경제학’으로 불릴 우려도 있다.

  세계 경제의 흐름과 경제 이론의 변화를 일괄하는 1부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1776)과 마르크스의 <자본론>(1876) 그리고 케인스의 <일반이론>(1936)을 축으로 강의 내용이 구성되어 있다. 세 권 모두 읽어 본 적이 없고 주워들은 풍월만으로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본다. 큰 흐름만을 짚어나가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이해된다. 현재 우리의 경제를 이해하는 데 총론격으로 긴요하게 읽혔다.

  이 책은 마치 실제 강의록을 준비하듯 쓰여졌으며 한 학기 분량인 열 세 강좌로 되어 있다. 네 번째 강의까지가 이론 부분인데 눈에 띠는 것은 ‘국가와 시장의 경쟁, 그리고 제3부문’이다. 제1부문인 공공부문과 제2부문인 기업에 이어 호혜, 증여, 이해, 믿음, 소통 등 경제학과 관련 없는 부분들을 어떻게 일반 이론으로 만들어 내고 그것을 1, 2 부문들과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어떻게 연계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저자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한국 자본주의의 형성과 위기를 ‘괴물의 탄생’으로 한국 경제의 대안과 3가지 과제를 ‘괴물의 해체’로 본문이 구성되어 있다. 과거에 해당되는 괴물의 탄생과 현재와 미래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괴물의 해체 모두 새로운 시각과 ‘대안’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관점들이다. 한국 경제의 새로운 전환을 위해 제3부문에 대한 고민을 풀어 놓은 열 두 번째 강의는 ‘괴물의 탄생, 실종된 제3부문과 파시즘’으로 엮은 여덟 번째 강의과 함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공공성을 강화하고 생태적인 부분과 같은 문화적 가치에 중점을 두어 교육 문제의 대안을 찾아가는 전방위적 사회 시스템의 변화 없이는 경제의 틀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의 부문들이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며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는 대한민국의 경제를 위해 ‘우리는 지는 법이 없다!’는 말로 마무리 한다.

  명랑하게 C급 경제학자임을 자처하는 우석훈의 경제 대한 시리즈는 현재와 미래의 우리 삶을 조망할 수 있는 분명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분별력 있는 신념과 용기는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합리적 이론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제시된 충고와 조언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나는 오히려 이 책의 문제점을 외면하고 싶어졌다.


081017-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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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 다치바나 식 독서론, 독서술, 서재론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언숙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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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순한 책벌레로 부르기엔 한 마디로 규정되지 않는 다치바나 다카시. 읽고 쓰는 사람이라는 모호한 표현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불러야겠다. 그렇다고 다치바나 다카시를 정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인지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내가 그를 인상깊게 바라본 것은 고양이 빌딩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 우연히 개인 전용 도서관이자 집필 공간인 고양이 빌딩을 보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도대체 얼마나 읽고 써야 하는 사람인지 궁금했다. 이후에도 간혹 그의 책을 읽었지만 그가 일하는 방식이나 그가 쓴 글들만큼 그의 생각이 궁금하기도 했다. 책에 관한.

  어찌 되었든지 이 책을 이제야 읽게 되었다. 책에 관한 책과 독서에 관한 책들은 앞으로도 계속 읽어나가겠지만 정답은 없어 보인다. 이 책도 결국 ‘다치바나식 독서론, 독서술, 서재론’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일반적인 방법은 없다는 것이 나의 잠정적인 결론이다. 나름의 목적에 따라 방법이 결정되고 실천적인 힘에 의해 변화를 모색하는 것만이 정답이다.

  이론적인 독서 모형은 공교육 기관에서도 적용시키기 매우 힘들다. 읽어 온 책의 이력이 다르고 배경지식이 제각각이며 모형의 적합성과 방법, 유형에 따라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누구에게나 두루 적용될 수 있는 방법들이 동원되긴 하지만 효과는 미지수이다. 특히 독서의 목적과 결과는 천양지차로 나타나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설 수도 없다.

  다치바나는 책읽기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지적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누구나 그렇듯이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나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체크하고 공감하고 이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한다. 나도 물론 그랬다. 충족되지 않는 욕심과 목적 없는 호기심은 넘쳐나지만 시간은 늘 부족하다. 지나치면 폐인모드가 되겠고 현실 생활이 불가능하다. 직업으로 삼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어버린 것 같으니 적절한 선에서 타협의 손길을 내민다.

  불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다시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에 들어간다. 강철 같은 인문학적 토대 위에 자연과학에 대한 호기심으로 끊임없이 책을 읽고 자료를 조사하고 전문가와 인터뷰하고 그것을 글로 쓴다. 가장 이상적인 지적 활동가라고 볼 수 있다. 편협한 분야의 깊은 연구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학원에 다니면서 느끼는 것은 분과학문을 뛰어넘지 못하는 교수들의 지루함이다.

  역동적으로 자가 발전하는 발전소처럼 다치바나는 스스로 지식을 가공하고 그것을 재생산하며 종횡무진 책의 세계를 주유한다. 그것이 직업이 되고 일이 되어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행복하고 기쁘게 즐길 수 있으니 얼마나 즐거운 인생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진다.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을 즐길 줄 알고 스스로 행복해지는 방법을 갖고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다치바다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이 책은 다치바나의 독서론을 소개하고 있으며 그의 서재와 작업실을 보여준다.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는 내용이 책의 핵심이 되겠지만 그 책의 제목이나 내용보다 과정들이 흥미롭고 경탄스럽다. 누구에게나 삶의 이력이 있듯이 읽어 온 책의 이력이 있을 것이다. 항상  실천과 변화에 방점을 찍고 있지만 사람을 표현하는 좋은 이력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그의 서재를 들여다보면 된다. 서재가 없다면?

  책에 미친 사람들의 농담이라도 좋다. 사방 책으로 둘러 쌓인 구석방에 처박혀 해가 뜨는 것도 달이 지는 것도 모르고 책장을 넘기다 기지개를 켜고 숲속을 산책하다가 또 다시 책장을 넘기면서 한 3년만 지낼 수 있다면 어떨까? 주변 사람들은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확인하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오해가 있었다. 다치바나 소설을 읽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고 속독을 권하는 이유가 알고 싶었다. 단편적인 이야기나 한 두 번의 인상으로 타인을 판단하거나 대상을 규정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문학을 통해 정신 세계를 형성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래도 사물을 보는 눈이 사려 깊지 못합니다. 사물이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식적인 경향을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문학이라는 세계는 처음 겉으로 나타난 것을 한 번 뒤집어 보면 다르게 보이고, 다시 그것을 뒤집어 보면 또 다르게 보이는 그런 세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표면만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가는 것이 문학인 것입니다. - P. 132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을 만큼 고전을 두루 섭렵했고 문학과 철학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보는 통찰력을 기른 그가 소설 무용론을 주장한 것이 아니다. 지금 그가 하고 있는 일과 관련된 책 읽기의 방법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산처럼 쌓인 자료와 관련 서적을 뒤적이며 필요한 부분을 속독하고 정리해야 하는 경우 당연한 독서법이다. 바로 이런 목적이라면 ‘실전’을 위해 다치바나의 충고를 눈여겨 볼 만하다.

‘실전에 필요한 14가지 독서법’

1. 책을 사는 데 돈을 아끼지 말라
2. 하나의 테마에 대해 책 한 권으로 다 알려고 하지 말고, 반드시 비슷한 관련서를 몇 권이든 찾아 읽어라.
3. 책 선택에 대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4. 자신의 수준에 맞지 않는 책은 무리해서 읽지 말라.
5. 읽다가 중단하기로 결심한 책이라도 일단 마지막 쪽까지 한 장 한 장 넘겨 보라.
6. 속독법을 몸에 읽혀라
7. 책을 읽는 도중에 메모하지 말라.
8. 남의 의견이나 북 가이드 같은 것에 현혹되지 말라.
9. 주석을 빠뜨리지 말고 읽어라.
10. 책을 읽을 때는 끊임없이 의심하라.
11. ‘아니, 어떻게?’라고 생각되는 부분(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을 발견하게 되면 저자가 어떻게 그런 정보를 얻었는지, 또 저자의 판단 근거는 어디에 있는지 숙고해 보라.
12. 왠지 의심이 들면 언제나 원본 자료 혹은 사실로 확인될 때까지 의심을 풀지 말라.
13. 번역서는 오역이나 나쁜 번역이 생각 이상으로 많다.
14. 대학에서 얻은 지식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 P. 83

  다치바나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슬로 리딩’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게 아니다. 독서의 목적에 따라 책은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상식 수준의 발언에 불과하다. 오독은 자유지만 오해를 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자각! 나는 왜 무엇을 읽고 쓰는가에 대한 반성적 성찰!

  책의 내용과 방법은 독서의 목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목적 없는 산책은 그것대로 방법과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과연 지속적으로 그것이 가능한가? 아무 목적도 없다는 것이 하나의 목적은 아닐까? 이 책은 독특하고 재미있는 다치바나식 독서법이지만 나는 질문만 늘어났다. 어디를 향해 어디쯤 가고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의 시간을 가져야겠다. 물론 계속 읽어나가면서.


081014-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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