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투를 빈다 - 딴지총수 김어준의 정면돌파 인생매뉴얼
김어준 지음, 현태준 그림 / 푸른숲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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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은 외친다. ‘껍데기는 가라’고! 언제 어디서든 본능에 충실하고 솔직하게 말하는 직설 화법이 김어준의 트레이드 마크다. 에둘러 표현하거나 복문으로 길게 빼지 않는다. 쨉과 스트레이트 전문이다. 기교파가 아니라 파이터다.

  한겨레를 보다가 김어준이 ‘충고’하는 코너라는 사실을 알고 일단 웃었다. 이후에 여러명이 돌아가며 인생상담을 해 준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딴지일보와 인생상담과 연결시킬 수가 없었다. 상담이나 충고는 일단 진지하기 때문이다. 김어준과 진지함을 연결시키기 어려웠다. 그만큼 내게 김어준에 대한 인상은 강렬했다. 철저한 아웃사이더로만 보였다.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했고 깊은 공감으로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던 딴지일보와의 만남을 잊을 수가 없다. 카타르시스였고 유쾌, 통쾌, 상쾌함의 극치를 맛보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첫 만남이 강렬했던 만큼 자주 찾지는 않았지만 이후에도 김어준과의 간접적인 만남은 계속됐다.

  신문에서 몇 번 읽다가 나중에 책으로 나오면 읽어야겠다 싶던 코너가 책으로 묶여 나왔다. <건투를 빈다>가 그 책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김어준이 쓴 책이 아니라 상담을 의뢰한 사람들이 쓴 책이기도 하다. 물론 김어준의 판단과 충고가 들을만한 것인지 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 책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다면 그들도 그러했을 것이라고 믿을 수 밖에.

  상담 사례를 묶어 놓은 책이 대게 일반화 시킬 수 있는 것들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특별하고 예외적인 상황이나 감정들도 다루어지지만 많은 사람들이 처할 수 있는 상황들이 대부분이다. 유사한 사례들이 주변에 허다하기 때문에 우리는 눈여겨보게 된다. 우리는 언제든 그런 감정이나 상황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내담자의 편에서 상담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김어준의 불친절한 상담자다. 하지만 솔직하고 편안하다. 상담의 기본이 래포(rapport)형성이지만 김어준은 상대를 다독여 줄 마음이 없다. 내담자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입장에서 상황을 풀어나가는 일반적인 방식의 상담이었다면 5분만에 졸거나 책을 집어 던졌을 것이다. 김어준은 가장 삐딱한 상담자다. 내담자가 아니라 상담자가 판단과 기준으로 충고한다.

  한마디로 냉정하고 객관적이며 직설적이고 강렬하다. 간결하고 명확하다. 좋은 게 좋은 거라든지 대충 타협하라는 말 따위는 나오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지언정 돌려 말하거나 예쁘게 다듬지 않는다. 복문이 없을 만큼 짧고 명쾌한 문장들은 속이 시원하다. 적절한 비유와 예화들은 김어준식 상담의 꽃이다. 스스로의 경험들을 드러내고 진심으로 충고하기 때문에 내담자는 쉽게 그 진정성에 동화될 수밖에 없다.

  인생은 선택이다. 누구나 걸어보지 않은 길에서 망설인다. 멘토는 누구에게나 필요하지만 선택과 결정은 스스로의 몫이다. 누가 대신 살아줄 수 있단 말인가. 내담자들은 어쩌면 답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심약한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자신감을 얻고 격려 받고 싶은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우리들 모두는 매일 매일 경험한다. 그러한 순간들을.

  대한민국 고민의 최소공배수가 이 책에 모여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21세기형 질문들이 모여있다. 이 책은 시대를 읽어내는 또 하나의 생활의 역사가 되겠다. 먼 훗날 이 책을 뒤적이며 이 시대에는 이런 고민들을 했구나 하는 풍속사적 자료가 될 만도 하다. 여하튼 지루하지 않게 타인의 고민을 나의 그것들과 결부시켜 보기도 하고 걱정과 한숨을 나누기도 했으며 공감과 이해의 폭을 넓히기도 했다.

  이 책은 크게 다섯 가지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삶에 대한 기본 태도를 고민하는 수많은 ‘나’에 대해,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가족’에 대해, 선택의 순간에 고민하게 되는 ‘친구’에 대해, 개인과 조직의 갈등인 ‘직장’에 관해 그리고 영원한 고민과 갈등의 주제인 ‘연인’에 대해서.

  각각의 장들은 물론 편의상 주제별로 묶였다. 상담 내용과 관련하여 김어준의 짧은 글들이 중간 중간 삽입되어 있는데 내담자의 요구 없이 이 글만으로도 충분히 개인적인 문제들에 대한 시원한 답이 되기도 하겠다. 연재했던 내용을 묶어내면서 전체가 하나로 엮이지 못하는 단점이 보이기 마련이지만 이 책의 경우 특별히 문제없이 한 권의 책으로 묶였다.

  상담은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내고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이지만 편들어주기가 좋은 상담은 아니다. 그래서 친구와 가족은 좋은 상담자가 될 수 없는지도 모른다.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판단해줄 수 있는 사람이 때론 필요한 것이다. 사람이 바른 길로만 해서는 안 되는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다. 인간은 신이 아니다. 그래서 갈등과 고민의 순간을 만난다. 후회할 줄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하는 게 사람이다. 그것이 인생의 딜레마다.

  가끔 김어준 같은 사람에게 따끔한 질책과 충고를 받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과 상관없이 살더라도 말이다. 살아가면서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든 그렇지 못하든 멘토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물론 성격과 상황에 따라 멘토의 필요성도 달라진다.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와는 다른 사람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가족, 연인, 소울메이트, 멘토 -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기 전에 생각해 보았다. 나는 그들에게 누구인가?

다들, 건투를 빈다. 졸라. - 김어준.


090126-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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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비타 악티바 : 개념사 1
최현 지음 / 책세상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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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기본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다.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생득적 권리를 우리는 인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기본적인 권리에 대해 생각하며 살아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실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나 권력에 의해 이 권리들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그러한 권리가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억압과 순종을 내면화한다. 근대 이후 국가나 사회 차원이 아니라 개인 중심적인 가치관이나 철학이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여전히 인권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와 먼 추상적 가치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대한민국의 학교에서는 여전히 신체의 자유를 구속받는다. 자신의 머리카락 길이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으며 체벌과 폭력이 질서와 규정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국가차원에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인권에 대한 의식을 일깨우는 일은 특정 단체의 몫으로 돌릴 수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 단일한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인종이나 민족 문제로 확산되지는 않지만 민주주의가 절차적으로 발전해 오지 않은 까닭으로 여전히 진보적 가치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나의 권리만큼 타인의 권리도 소중하고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리 보편적인 것 같지 않다.

  앞서 말한 대로 나이, 소속, 상황에 따라 고유하고 기본적인 권리가 얼마든지 제한될 수 있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내면화하며 살아왔다. 그것은 단순히 고유한 문화적 차원이 아니라 인권에 대한 생각과 고민 자체가 일천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개인주의보다 충과 효를 앞세운 공동체나 국가주의가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해 보인다.

  그러나 이제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 문제에 대해 누구든지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권은 보편적 가치이며 당위적 가치라는 사실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현실에서 시민권 차원으로 접근하려는 노력은 조금 부족해 보인다. 모두가 인정하는 천부적 권리라도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의한 것이다. 인권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현실 생활의 방법론으로 자리잡아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책세상’에서 Viva Activa(‘실천하는 삶’이라는 뜻의 라틴어) 시리즈 개념사 1권으로 최현의 <인권>을 펴냈다. 기존의 책세상 문고의 분량이지만 판형을 바꾸고 사진을 삽입해서 편집을 새롭게 한 정도의 책이다. 주요 개념이나 사건들에 대한 주석을 달고 분량에 대한 부담을 덜어 쉽고 가볍게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 책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인권의 역사를 조망하고 있다.

  이 책의 초점은 인권과 시민권의 상관 관계에 맞추어져 있다. 프랑스 혁명을 통해 주창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서 출발한 시민권은 근대적 의미의 인권을 확립했다. 자연법에서 이야기와는 조금 다른 의미이다. 사회적 상황과 맥락이 다르기 때문에 당연한 이야기지만 보편적 개념으로 확립될 만큼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고대의 시민권은 노예와 여성을 배제한 일종의 특권이었다. 그것이 보편성을 획득하는 과정이 바로 근대 인권 사상의 역사이다. 시민권 제도의 발전은 근대 국민 국가와 민족주의가 등장하면서 또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이 책에서는 홉스와 로크, 루소를 중심으로 근대적 의미의 인간관에 대해 그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작은 차이와 주장들이 결국 근대 시민권 제도를 발전시킨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논의조차 없었다는 사실이 아쉽기만 하다.

  인내천 사상 등 자생적인 개념들이 없진 않지만 그것이 충분히 논의되고 발전되지 못해 결국 유럽 중심의 사상사를 훑어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현대 인권은 시민권 이론의 발전과 그 궤를 함께 한다. 영국의 시민권을 중심으로 그 발전 과정을 살펴보고 여성의 인권과 시민권에 대해 살펴본다.

  특히 소수자의 인권이나 장애인의 인권, 다문화 시민권 등에 대한 최근의 관심은 현실에서도 중요하게 고민해 볼 부분이다. 외국인과의 결혼, 다문화 가정의 사회적 문제, 장애인과 성적 소수자, 신념에 의한 병역 거부 등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는 바로 우리들의 문제이다.

  저자가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있는 지구 공동체의 지구 시민권은 ‘꿈’이라고만 할 수 없다. 세계화는 경제적 측면에서 신자유주의를 뒷받침하기 위한 논리가 아니라 ‘인권’ 측면에서 확산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문화적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는 현대적 의미의 시민권이 확산되고 지구 공동체 차원에서 공감할 수 있는 그리고 지켜질 수 있는 개념들이 확산되는 것은 우리가 함께 꾸어야 할 꿈이 아닐까 싶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살필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모두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떤 목적을 위해 모든 수단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인권의 기준과 대상도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지만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당연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 제도와 질서, 사회적 합의를 통해 교묘하게 숨겨진 ‘인권’을 찾아보는 일이 우선이다. 나는 인간이며 내가 가진 최소한의 권리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그 다음이다.

  우리는 흔히 개념 없다는 말을 사용한다. 책 한 권으로 개념을 가질 수는 없지만, 이 책은 사유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 개념 있는 사람이 될 필요가 있다. 나만큼 소중한 타인을 위해서도, 타인만큼 소중한 나를 위해서도.


090123-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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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문학과지성 시인선 353
강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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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연히 모든 것이 완벽해지길 꿈꾼다
  ― 장뤼크 고다르


  프랑스 누벨바그(Nouvelle Vague)의 선두 주자였던 고다르의 말이 심상치 않다. <네 멋대로 해라>를 떠올리며 책장을 열게 하는 것은 다분히 시인의 의도된 장치일 것이다. 영화의 이미지와 시의 이미지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선명한 시각적 효과는 장면 이외에도 전달 방식에 따라 감독의 의도가 전달될 수 있으나 시에서는 철저하게 언어에 의해서만 독자들의 빈약한 상상력을 자극할 뿐이다. 의도된 오류는 고사하고 제대로 전달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시는 어쩌면 더 이상 이미지의 생경한 전달에 그치는 장르의 시대를 끝냈는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할 때 우연에 기대어 김경주의 <기담>에 이어 강정의 <키스>를 읽었다. 두 시인은 따로 또 같이 시를 쓴 것처럼 보인다. 내게 그렇게 읽혔겠지만 재밌는 비교가 가능하다. 기묘하게도 두 사람의 공통점은 현재 음악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특별한 연결고리나 교묘한 퍼즐로 엮어질 수는 없지만 언어를 가지고 논다는 측면에서는 동일하다.

  문학을, 시를 더 이상 진지하고 깊은 고민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는 듯하다. 가볍고 기괴한 말놀음에 그친다는 것이 아니라 엄숙주의에서 벗어나 즐기고 있다는 느낌이다. 시의 언어는 일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문학언어와 일상언어 사이를 오가며 의미를 포착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독자는 보수적인 관점에서 더 이상 시에 기대하는 것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철저하게 기존의 문법대로 시가 주는 안락한 감성을 주문하는 것일까.

  두 시인은 아랑곳없이 자신의 길을 간다. 강정의 <키스>는 낯선 이미지와의 접촉이며 일상을 비틀어보는 것과의 만남을 시도한다. 촉각적, 시각적 이미지의 범람이 아니라 온 생의 감각 세포들을 되살려내어 미세한 떨림까지도 포착하지 못한다면 금방 길을 잃고 헤매게 될 것이다. 그가 무엇을 의도했든지 말이다. 이 시집의 서시를 보자.

死後의 바람

오래전 한 편의 詩가 끝나고 바람이 불었다
사람들이 짐승의 거죽을 뒤집어쓴 채 민둥산의 태양을 끌어내렸다

불타는 시간들은 그대로 숲이 된다
인간이 인간 바깥으로 떠돌아 짐승의 마음을 허공에 쓴다


  불확실성 시대에 시는 더욱 불안하고 인간의 마음들은 허공을 헤맨다. 시인은 서시에서 불타는 시간의 숲에서 인간이 짐승의 마음으로 떠도는 이야기를 써나갈 것임을 암시한다. 시집 전체에서 일관되게 추구하는 타인에 대한 사랑, 그 매혹의 깊이에 대해 시인은 끊임없이 고뇌한다. 애무는 접촉이다. 관심이며 열정이고 몰입이며 안타까움이다. 나 혹은 우리는 그렇게 시간을 견디고 인생을 살아가며 삶을 가꾸어 나간다.

  너는 문을 닫고 키스한다 문은 작지만 문 안의 세상은 넓다 너의 문으로 들어간 나는 너의 심장을 만지고 내 혀가 닿은 문 안의 세상은 뱀의 노정처럼 굴곡진 그림들을 낳는다 내가 인류의 다음 체형에 대해 숙고하는 동안 비는 점점 푸른빛과 노란빛을 섞는다 - ‘키스’ 중에서

  아스라이 멀어지는 감각. ‘부드러움과 달콤함’이라는 관용적 표현으로 말해질 수 없는 느낌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감각적 이미지의 전달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전할 수 있는 이야기는 생경한 풍경과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세계로 표현된다. ‘문은 작지만 문 안의 세상은 넓다’고.

  시집 중간 중간 시인의 그림이 삽입되어 있다. 인간의 신체를 극단적으로 표현하여 부분이 극대화되고 생략된 신체는 기괴해 보인다. 온전한 모습으로 타인을 대하는 사람은 없다. 전면적인 접촉과 만남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도 도달할 수 없는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것이 우리들의 관계가 아닐까.

  그래서 시인은 지극히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고 언어가 만들어내는 불가능한 세계와 불편한 이미지를 재생산한다. 독자들은 그 안에서 어리둥절할 것이고 나름의 방법으로 현실과 이미지와 연결 작업을 시도할 것이다. 그것은 독자들의 몫일 뿐!

그렇지 않겠소?
어찌해도 당신은 내게 속아 넘어갈 뿐,
대체로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용서하지 마시오 - ‘자멸의 사랑’ 중에서


  추상과 상징의 세계는 결국 현실의 메트릭스일 뿐일지도 모른다. 왜 아니겠는가. 현실의 행복을 극대화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불가해한 현실 밖의 세계를 꿈꾸는 상상계의 일원이 되고 싶은 욕망을 어쩌겠는가. 어느 시인의 말대로 인생은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할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늘 그 너머에 눈길을 던져본다.

  그저 한 몸 등 따시고 배부른 인생을 위해 질주하는 저 수많은 인간 군상들 뒤로 피어 오르는 먼지구름 너머에 무언가 있을지도 모른단 말이다. 그것은 통속적인 사랑의 결실도 아니고 즐거운 인생이라고 믿었던 신기루도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단 한 번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너머에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걸 종교라는 이름으로만 포장하지 않는다면 용서할 수 있겠다. 또 그렇지 않으면 어떤가?

  이 시집에서 시인은 끊임없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랑이라 무어라고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지 말란다. 서로를 속이는 감정의 게임에서 정답도 없고 정해진 길 따위는 더더욱 없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마주치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일 터.

무엇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해 보아도 보이는 건 안개처럼 희미할 뿐이다. 절대적인 것과 확실한 그 무엇은 아무것도 없다. 내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애무일 뿐! 애무하라 그리고 살아 있음을 확인하라! 고 시인은 외친다. 이에 동의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시집 해설에 간만에 밑줄 긋는다! 애무하기 좋은 밤이다.

애무를 넘어

  진정 사랑하는 사람과의 접촉에는 고민도 순서도 있을 리 없다. 애인의 부드러운 살갗에 매혹되고 혀의 촉감에 넋 나간 사람이 다음 순간의 손놀림이나 자세 따위를 걱정할 틈이 있겠는가. 생각하고 준비할 겨를도 없이, 순간순간의 느낌에 몰두하며 사랑하는 이의 몸을 더듬고 또 더듬을 뿐이다. 애무는 최종의 완벽한 만족을 위해 거쳐야 할 단계는 아니다. 애무는 그 자체로 목적이다. 사랑하는 대상을 결코 자기 수중에 거머쥘 수 없다는 사실을 은연중 감지했지만 쉽사리 그 불가능을 수용할 수 없는 자의 절절한 몸짓이다. - [해설] ‘애무의 윤리(조연정)’ 중에서


090119-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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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작은 발걸음 - 작고 쉬운 실천을 통해 인생의 목표를 이루는 지혜
앨 세쿤다 지음, 최유나 옮김 / 경영정신(작가정신)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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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뚜렷한 목표와 성취동기를 가진 사람은 행복할까?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몰입의 즐거움>에서 하루에 몰입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행복해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우리들의 인생은 해가 뜨면서 시작되어 해가 지면서 끝난다. 하루 단위의 삶을 이어가기 위해 혹은 생존을 위해 우리는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가는지. 새해가 되면 거창한 계획과 일 년간의 목표를 세우고 실천하기 위해 마음가짐을 새롭게 다진다. 매년 반복되는 일이지만 연초에 담배 판매량이 급격하게 줄었다가 다시 제자리가 된다.

  목표를 세우고 꿈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대충 사는 인생보다 값지다는 생각은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기원했을까? 성실하게 일하고 부를 축적하며 검소하게 사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믿었던 시대는 지금과 많이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삶의 본질적인 가치나 목표를 설정하는 것 자체에 대한 깊은 고민보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정과 방법을 알고 싶어 하는 것도 문제이기는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일에 서투르며 지속적이고 효율적으로 살아가는 데 익숙하지 않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꾸준한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지금까지 해보지 않은 일이나 자신 없는 분야의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새로움에 도전하고 보다 나은 내일을 꿈꾼다. 그때 누군가 먼저 실천에 옮긴 경험을 이야기해주거나 특별히 좋은 방법을 권한다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고 새로운 실천 의지를 다지게 된다.

  자기계발과 혹은 경제경영과 관련된 수많은 책들이 행복한 인생이나 즐거운 삶을 약속하고 보장하지는 않는다. 이런 종류의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원하는 목표를 설정하고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방법을 구체적이고 상세히 설명하여 경제적 이익의 극대화나 자신이 원하는 사회적 위치과 계급으로 진입하기 위한 방법을 설명하는 책이 그것이다. 또 하나는 단순히 경제적 이익이나 뚜렷한 성과를 중심으로 한 것이 아니라 저마다 소중한 꿈과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독려와 격려 수준의 책이다.

  알 세쿤다의 <위대한 작은 발걸음>은 후자에 속하는 책이다. 서점에 난무하는 각종 자기계발서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을 때가 많다. 개인적으로 무관심한 분야이기 때문에 거의 돌아보지도 않지만 <행복한 이기주의자>처럼 눈길을 끄는 제목이나 <위대한 작은 발걸음>처럼 역설적인 제목을 만나면 발을 멈추고 책장을 뒤적이게 된다. 이 책은 <몰입의 즐거움>에 가까운 책이다. 비슷한 아류라고 하긴 어렵지만 같은 종류의 책으로 분류할 수 있다.

  테니스 코치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입문서를 책으로 발간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경험한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방식은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이다. 경험만한 스승은 없는 법이다. 누구나 실패하고 좌절하며 또다시 시작한다. 이 과정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들을 풀어 놓은 책도 많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시작의 중요성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우리 속담에 ‘시작이 반이다’라는 속담이 있다. 망설이지 말고 지금 당장 시작하고 생각하고 또다시 실천하고 생각해보자는 책이다.

  저자는 그것을 ‘15초의 법칙’이라고 말한다. 하루에 15초씩 투자하며 시작하자. 스스로를 용서하며 그렇게 작은 시작을 통해 커다란 성과를 이끌어내자는 유혹이다. 어렵지 않다. 15초라니…….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아무나 실천할 수 없는 일이다. 행동에 옮기는 일이 수많은 경우의 수를 계산하는 잔머리보다 낫다. 하지만 문제는 목표와 꿈이다. 무엇을 위해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

  이후에도 내 안의 훼방꾼과 맞서라, 더 이상 낡은 지도로 헤매지 말자, 즐거워야 좋은 여행이다, 삶의 시나리오는 언제든 고쳐 쓸 수 있다, 행복한 달인 등 여섯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제목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각 단계에서 처음 대하는 방법이나 특별한 비법이 소개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것들을 어떻게 엮어 나갈 것인가, 삶에의 적용 방법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는 책이다.

  이루고 싶은 꿈이 없다면 인생은 얼마나 쓸쓸한가. 되는대로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는 삶이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꿈을 꾼다는 것은 모두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것을 포기한다면 우리의 삶에는 무엇이 남을까. 나이와 무관하게 이기적 욕망과 욕심만 가득한 비참한 인생이 있고 돈과 권력과 무관하게 행복하고 즐거운 인생도 있다. 그것을 단순히 선택의 문제만으로 환원할 순 없지만 자신의 가치관이나 인생관이 가져오는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먼저 경험해야 할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자연 속에서 산책하며 책과 함께 하고 싶은 욕심, 모든 욕망으로부터 조금 더 벗어날 수 있다면 나는 행복할 것이다. 버리고 또 버리고 읽고 쓰며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은 언제나 나의 꿈이었다. 불가능한 꿈도 아니지만 쉽게 이루어질 수도 없다. 뚜렷한 성과나 목표가 있는 꿈이 아니지만 더 이상의 꿈을 가져본 적도 없다.

  누구에게나 새롭게 혹은 자신만의 꿈을 가지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작은 발걸음은 계속되어야 한다. 열정과 인내와 집중! 우리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 아닐까 싶다. 작은 목표를 이루어내고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큰 목표를 이루어나가는 방법으로 우리들의 꿈을 이루어 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오늘도 작은 실천과 조용한 발걸음은 계속 될 것이라 믿는다. 소리 없이 주변의 발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


090117-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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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위의 신발
뱅쌍 들르크루아 지음, 윤진 옮김 / 창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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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은 늘 환상 속의 그림자에 불과한 지도 모르겠다. 동굴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현실의 그림자가 아니라 이데아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다고 플라톤이 말했다. 하지만 이데아의 그림자나 신기루는 그것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들이 믿고 있는 실체라는 것이 중요하다. 어쩌면 본질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믿는다. 대부분.

  하나의 사물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각을 소개하는 것은 예술의 본령이다. 음악이든 미술이든 문학이든 상관없이 어떻게 보느냐가 문제가 될 때가 많다. 방법과 시점에 따라 언제나 그대로인 대상은 갑자기 낯설게 느껴진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우리 주변에는 그런 종류의 일들이 종종 벌어지기도 한다. 예술가가 아니라도 어느날 문득 ‘낯설게 하기’가 가능해진다면 일상에서 벗어나 드디어 새로운 삶을 얻었다고 외쳐도 좋을 것이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답 없는 질문이 아니라면 나는 답을 찾아볼 용의가 있다. 물론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혹은 아직 답을 찾지 못해서 말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다양한 방식의 질문과 간섭들에 대해 작가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시비를 걸고 딴지를 걸며 비틀고 뒤집는다. 그것을 즐길만한 준비가 되어 있다면 우리는 항상 예술의 언저리를 기웃거리게 된다. 스스로 즐기고 타인의 시선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가장 가깝게 즐길 수 있는 소설이 우리에게 늘상 새로움만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거꾸로 우리가 소설에게 낯선 흥분만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시선과 상큼한 감각은 일차적이고 즉흥적이지만 여운과 생각의 찌거기를 남기지 않는다. 반면 생활 속에서 부대끼는 사소한 문제에서 출발했거나 거시적 관점에서 생의 의미를 탐구하는 이야기가 때때로 읽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그 많은 독자들의 취향 속에서도 변함없이 대중의 취향을 읽어내거나 커다란 호응을 받은 작가는 얼마나 행복한가.

  더구나 해외 작가의 소설일 경우 이미 알려진 작가와 달리 낯설고 새롭지만 그만한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시간과 돈과 노력이라는 위험을. 프랑스 작가 뱅상 들르크루아의 <지붕 위의 신발>은 문학적 상상력과 철학적 사유가 빚어낸 훌륭한 소설이다. 새롭게 소개되는 소설이 감내해야 하는 위험성을 무릅쓰고 읽을 만하다.

  장편소설이지만 9가지 이야기와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는 특이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제목에서 보여주고 있는 ‘지붕 위의 신발’을 중심으로 한 서민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복사기 판매원의 딸이 바라보는 ‘지붕 위의 신발’과 화가의 입장에서 바라본 ‘지붕 위의 신발’은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각각의 이야기들이 서로 연결된 구조로 되어 있다. 나는 이런 형식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하나의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거나 동일한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제시하는 방법을 즐긴다.

  영화든 소설이든 내게는 그 ‘차이’가 중요하게 받아들여진다. 동일한 것은 없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제각각 다른 의미로 다가가는 모든 요소들이 재미와 즐거움을 만들고 때로 슬픔과 눈물을 만든다. 소설은 작가의 상상력과 삶에 대한 가치관이 투영될 수밖에 없다. 억지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사유의 흔적이 배어난 작품들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독자와의 공감은 결국 작가의 영혼과의 대화를 의미한다.

  작은 이야기들이 마치 한 편의 단편처럼 완결성을 띠면서도 전체 장편소설로도 손색이 없다. 철학자들의 주저가 등장하고 환상적인 요소도 삽입되어 조금 산만하게 보이기도 한다. ‘진리는 아이들 입에서 나오는가?’에서부터 ‘미학적 요소’에 이르기까지 정교하게 이야기가 맞물리고 배치되어 있다. 이웃들과 개인의 관계를 돌아보기도 하고 전체와 부분의 의미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는 소설이다.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은 공통점 한 가지를 갖고 있다. 그것은 외로움이다. 고독한 존재로 세상을 살아가야하는 숙명을 지닌 채 태어난 것이 인간이라면 소설 속 주인공들은 그 의미를 깊이 새기고 있다. 서로 다른 성별, 나이, 직업,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고통스러울만큼 고독한 존재들임에 틀림없다. 당연히 그들은 우리들의 이웃이며 나의 가족이고 바로 나 자신이기도 할 것이다.

  현대인에게 개별적 존재 의미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겠다. 어차피 가족 이상의 전체를 고려해 보지 않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상의 에피소드도 소설이 될 수 있겠지만 이색적이고 평범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 그 사람들조차 결국 외면하고 싶은 우리들의 외로움을 드러내고 있다면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도 비슷한 마음과 생각의 갈피들을 짚어낼 지도 모르겠다. 국경을 넘어 동양에서도 서양에서도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비슷할 것이다. 신산스런 삶 속에서 우리가 마음을 닫고 살아야 하는 이유와 고독을 이겨내는 법을 배우고 싶어할 지도 모른다. 아니 우리 주변 사람들도 과연 그렇게 외로운가 궁금하기도 하다. 본질적으로 혼자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을 받아들인다면 사실 그것은 그리 고통스럽지는 않다. 무소의 뿔처럼 그저 혼자서 가면 되는 것이다. 좌충우돌하며 그렇게 가는 것이 인생 아닌가.


09011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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