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
김희경 지음 / 푸른숲 / 200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된다.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삶은 계속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들이 모여 한 생애를 이루고 그것들이 미래를 만들어 간다. 하지만 우리는 내일을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 불안하게 흔들리고 애매하게 행동한다. 산다는 것은 과정을 즐기는 일이라고 하지만 종교적 믿음이나 확고한 신념이 없다면 거의 불가능한 경지이다.

  삶을 여행에 곧잘 비유한다. 마라톤에 비유하기도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 조금씩 나아간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시간 앞에서 우리는 때때로 겸손해지고 죽음 앞에서 경건해지게 마련이다. 인생이라는 긴 여행에서 승자도 패자도 있을 수 없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왔는지 뒤돌아 볼 때 미소 지으며 행복했노라고 그리고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혼자 있는 시간이면 가끔씩 명상에 잠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생명이 태어나고 또 죽어간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으며 어떤 길을 따라 걷고 있는지, 서로 다른 길을 걷다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는지 말이다. 길은 어디에나 있지만 아무데로나 걸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더욱 난감하기만 하다. 편견에 사로잡힌 많은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길이 옳다고 주장한다. 중립이 있을 리 없건만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한쪽만 바라보며 격렬하게 증오한다. 삶이 길에는 정답이 없지만 모두 같은 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걸어간 흔적들이 남아있고 그 발자국과 땀방울들은 우리에게 훌륭한 이정표가 된다. 먼저 간 사람들에게 배우고 익히지만 사람은 여전히 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용서받고 또 상처를 주고받으며 함께 걸어간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우리는 쉽게 알지 못한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어렴풋이, 조금씩 깨닫기 마련이다. 그래서 항상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이 남게 된다.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곳으로 떠난다는 것은 귀가를 전제로 한다. 여행은 분명한 출발과 도착이 있다. 일상에서 벗어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 물론 떠나기 전과 돌아온 후에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기대하기도 하고 여행 자체의 즐거움을 기대하기도 한다. 그렇게 유목과 정착을 반복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여행은 어디로 떠나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중요하다.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결국 인생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고 정의하는 사람이 있다.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에게 인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관계 맺음의 연속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정해진 관계와 굳건한 틀 속에서 지내는 안정감이 나쁘지는 않겠지만 모든 사람이 거기에 만족하는 것도 아니다. 새로움과 낯설음에 대한 동경, 설레임과 기다림이 주는 두근거림은 여행을 떠나는 목적 가운데 하나이다. 여행의 목적에 따라 장소와 방법과 일행이 결정되겠지만 그 모든 여행은 항상 떠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김희경의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은 낭만적이지도 행복해 보이지도 않는 여행 이야기다. 저자는 프랑스의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800km를 걷는 순례코스를 걷는다. 카미노라고 불리우는 그 길은 한쪽 방향으로만 걷는다. 노란 화살표를 따라 걷는 순례자 혹은 여행자들의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게 펼쳐진다.

  혼자서 먼 길을 여행하면서 저자가 만난 것은 자신의 내면이 아니라 낯선 사람들이다. 이 길을 걷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걷는 목적은 저마다 달랐겠지만 걸으면서 만난 것은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스스로를 발견하고 자신을 풀어놓고 가슴속에 돌덩이 하나씩을 내려놓는다. 저자는 동생을 잃었다. 특별한 상황과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떠난 혼자만의 여행이다. 카미노를 걷는 여정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신선하기 보다는 그 길 자체가 가진 힘이 놀랍다. 종교적 믿음과 무관하게 걷는 무슬림도 있었고 일행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자처럼 혼자 걷는 사람도 물론 많았다. 그들은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과연 그 길에서 수많은 깨달음을 얻고 내면의 변화를 겪었을까.

  중요한 것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걷는 행위 자체가 여행이고 길이며 목적이다. 한 달이 넘도록 마냥 걸으며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과 길가에 나무와 풀과 하늘과 바람이 저자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저자는 이 책에 다 적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직접 걸어보지 않는다면 그 말들을 어찌 전해들을 수 있을까. 여행에 관한 책이 가진 태생적인 한계이다. 가이드 북이나 참고 도서는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 아닐까.

  그래도 이 책의 저자는 담담하고 편안한 문장으로 여정과 감상을 상세하게 전달하고 있다. 세심하게 메모한 듯 만남과 이별, 대화 내용, 에피소드는 물론이고 적절하게 삽입된 사진과 이정표가 여행의 기록으로 손색이 없다. 읽는 사람에게 그곳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다면 성공한 책이 아닐까 싶다.

두려움(Fear)이란 ‘실제처럼 보이는 가짜 증거(False Evidence Appearing Real)’의 약자라는 말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가짜 증거’ 때문에 마비된 채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두려움이 진화 과정에서 인간을 위험에서 보호하기 위한 신호기제로 신경에 장착되었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의심스러울 때가 더 많았다. 내 미천한 경험으론, 정말 두려운 일은 아무런 전조 없이 찾아왔다. 멀쩡하고 평온했던 어느 날, 느닷없이 남동생을 잃었던 경험이 그런 경우였다. - P. 251

  유사한 경험을 했던 내겐 그냥 흘려버릴 수 없는 문장이었다. 여행은 결국 두려움을 없애기 위한 인간의 몸부림은 아닐는지. 복병처럼 숨어있는 불행, 감당할 수 없는 공포, 체험을 통한 고통. 여행은 그 모든 것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누구나 여행을 떠나야 하는 건가. 책 몇 권 짊어지고 가볍게 떠날 수 있는 자유만 허락된다면 행복하지 않을까?

090526-04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멸의 신성가족 - 대한민국 사법 패밀리가 사는 법 희망제작소 프로젝트 우리시대 희망찾기 7
김두식 지음 / 창비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전직 대통령의 자살. TV를 보지 않는 내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은 평화로운 토요일 아침에 장난질처럼 누군가의 문자로 전해졌다. 희망돼지 노무현의 파란만장한 삶과 정치 역정이 우리 사회의 축소판처럼 스쳤다. 가난했지만 그리웠던 고향땅, 권양숙 여사와 함께 자란 봉하 마을로 돌아왔으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바위아래 낭떠러지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우리는 그렇게 전직 대통령을 보냈다.

  주말 아침에 대한민국은 쇼크를 받았다. 9.11 테러가 미국인에게 준 충격보다 훨씬 심각한 충격이었다. 할 말은 많지만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안타까움을 주고 그는 떠났다. 남겨진 사람들을 비웃듯 그렇게 자유를 찾아 허공에 몸을 던질 것일까? 이제 모든 것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맡겨졌다. 우리의 삶은 어쨌든 계속될 테니 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법시험에 합격하지 않았다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가난했던 수재가 현실을 극복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판검사가 되는 것이다. 7개월만에 판사직을 그만두고 변호사가 되었지만 노무현의 인생에서 사법시험은 인생역전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대한민국 사법패밀리의 일원이 되어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에게 법은 새로운 인생을 주었으며 종국에는 생을 마감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김두식의 <불멸의 신성가족>의 책장을 덮은 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살을 했다. 가족이 감당해야 하는 슬픔과 애통함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노무현이라는 자연인이 느껴야 했던 불만과 고통, 압박과 자괴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누구나 유사한 심리 상태에 빠져 본 적이 있을 것이고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고 싶은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과 끝까지 지키고 싶었던 신념이 무너진 후의 참담함이다.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아니 왜 견뎌내지 못했을까. 누구를 탓하기 앞서 인간적인 연민과 안타까움에 목이 멘다.

  대부분 사람들은 법과 무관하게 살지만 일평생 무관할 수는 없다. 어떤 형태로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법과 마주하게 된다. 반응은 다양하지만 대부분 상처받고 좌절한다. 법앞에 만인이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대한민국의 법은 그 적용에 있어 절대 평등하지 않다. 그것은 법을 지켜야 하는 국민들도 잘 알고 있고 법을 적용하는 법조인들도 잘 알고 있다. 그렇게 때문에 사람들은 항상 아는 사람을 찾고 청탁을 한다. 그것이 말이든 돈이든 그 무엇이든.

  희망제작소의 ‘우리시대 희망찾기’ 연구 프로젝트의 하나로 발간된 이 책은 시의적절하다. 우리 사회의 희망을 찾기 위한 연구 프로젝트가 이렇게 시의성까지 출판된 것은 우연이라기보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법의 문제는 항상 초미의 관심이라는 말이 옳을 것이다. 촛불 집회 당신 서울지방법원 법원장이었던 신영철 대법관의 재판 배당 문제와 이메일의 내용은 제5의 사법파동이라고까지 이야기될 정도로 전체 판사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더불어 언론플레이로 여론의 추이를 지켜보며 수위를 조절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태도는 자살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여론의 역풍을 맞고 있다.

  법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지만 공평한 법 집행도 상상하기 어렵다. 왜 그런지 궁금한 사람들에게 정확한 상황을 설명해 주는 책이 바로 <불멸의 신성가족>이다. 김두식은 <헌법의 풍경>을 통해 널리 알려진 법조인이다. 거꾸로 이 책이 보고 싶어졌다. 스물 세 명의 인터뷰라는 질적 연구 방법을 통해 얻은 결과물인 이 책은 가장 적나라하게 대한민국의 법조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많은 사건과 인터뷰 등 현재까지 진행됐던 재판이나 개인 사례들을 모아 분석해도 좋은 책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법 시험에 합격하고도 스스로 이류 법학자로 말하는 김두식의 이야기는 인터뷰이들의 내용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으며 나름의 기준과 잣대를 가지고 현실을 보여주며 희망을 제시한다.

  판사, 검사, 변호사는 물론이고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 여직원, 법원 공무원, 브로커, 기자, 경찰, 마담뚜까지 법과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생생한 고발이며 고뇌에 찬 자기 성찰이고 대한민국 법조계에 대한 경고이고 비난이며 변명이고 자아반성이다. 생동감 넘치는 그들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이며 대한민국의 사법시스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일반인들이 법조인들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은 순전히 추체험에서 비롯되며 실제 자신의 경험이 바탕이 된다. 책의 제목이 된 ‘불멸의 신성 가족’들은 대한민국에서 ‘사법 패밀리’가 되어 살아간다. ‘우리가 남이가?’로 통용될 만한 그들의 문법과 규칙과 시스템이 있는 것이다. 어느 조직이나 마찬가지이겠으나 저자는 그 안에서 ‘원만함’이 갖는 위험성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조직 문화를 형성하고 그 파장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가에 대해 실증적인 사례와 인터뷰를 통해 면밀히 분석하고 있다. 돈과 청탁, 평판을 둘러싼 그들의 고유한 문화를 살펴보고 신성가족의 제사장으로 불리는 ‘브로커’에 대해 이야기한다.

  법조인이 이겨내야 하는 여덟 가지 유혹과 그 대안이 이 책이 핵심이 될 것이다. 새로운 언어, 결혼시장, 서열경쟁과 관료제, 판사양성 시스템, ‘원만함’의 한계와 권위주의, 변호사 개업, 법조기자 등이 그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오케스트라처럼 조직적이고 기민하게 하나의 시스템으로 움직인다. 실로 통탄할 일이지만 ‘희망’을 버릴 수는 없다. 궁색하지만 저자는 ‘시민이 희망이다’는 한 마디로 억지로 희망을 찾는다. 내부적 시스템의 변화와 사법 개혁을 요구하지 않는 것은 법조인 출신인 저자의 한계이기도 하겠지만 “이쯤되면 막가자는 거지요?”로 상징되는, 대통령도 끝내 이루지 못한 사법 개혁은 ‘불멸의 신성가족’에겐 어불성설일 것이다. 그래, 시민만이 희망이다. 더디고 고통스럽더라도 나를 믿고 우리의 힘을 믿을 수밖에. 역사는 그렇게 발전할 것이라고 믿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변호사 출신의 전직 대통령도 자살하게 만드는 ‘사법 패밀리’의 힘이 가히 두렵지 않은가? 이 책은 모든 국민들이 읽어둘 필요가 있는 책이다.


090524-04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황의 경제학
폴 크루그먼 지음, 안진환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미국이 경제의 중심이 된 것은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는 명성만으로도 최근 각광받는 폴 크루그먼이 한국을 방문했다. 이 학자는 앞으로 불황이 L자형으로 4~5년간 지속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내 놓았다. 그의 전망이 적중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발언이 지속적으로 주목받는 이유는 그간 그가 보여준 냉정한 판단과 분석 그리고 정확한 미래 예측 때문이다.

  급변하는 경제 환경이 어떻게 달라질지 예측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원숭이와 펀드매니저의 수익률 분석처럼 아무리 정교한 이론으로도 예측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 대한민국의 경제, 세계 경제의 흐름이 우리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지만 그것을 읽어내는 눈을 갖는 것은 매우 어렵다. 폴 크루그먼의 <불황의 경제학>은 그 눈을 대신 할 수 있는 좋은 안내서이다.

  이 책은 현상을 표현하는데 치중하지 않고 그 현상의 분석을 위한 책이다. 분석은 대안을 위해 필요하다. 책머리에 밝히고 있듯이 지금까지 벌어졌던 위기들은 왜 벌어졌는지, 피해를 입은 나라들은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지, 앞으로 이런 일이 반복적으로 발생하지 않지 위해서는 어떻게 예방할 것인가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 책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례연구의 이론을 개발하는 것, 다시 말해 이 문제에 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밝혀내는 것이다.

  분석을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과정을 설명해야 하고 현상을 보여줘야 한다. 책을 쓰는 목적이 뚜렷하고 방법도 명확하다. 내용은 차치하고도 글쓰기의 방법에 있어서도 배울 점이 많은 책이다.

소위 전문가들이 심각한 주제는 반드시 심각하게 접근해야만 한다고 믿고 있다. 어려운 이야기일수록 이에 걸맞은 어려운 언어로 표현해야 하며, 가벼운 말이나 쉬운 설명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새롭고 생소한 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아이디어들을 ‘갖고 놀’(play) 준비가 돼있어야 한다. 내가 ‘갖고 논다’는 표현을 쓴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경제학이든 다른 분야에서든 별난 기질이 없는 엄숙한 사람이 신선한 통찰력을 발휘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 P. 15

  누구나(?) 한 번 쯤은 고민해 보았을 문제다. 폴 크루그먼은 어쩌면 천재가 아니라 즐기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천재는 즐기는 사람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려운 문제를 쉽게 풀어낼 수 있는 물리학자였던 리처드 파인만처럼 저자는 어려운 경제문제를 알기 쉽게 분석하고 그 분석을 통해 자연스럽게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경제의 핵심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니,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정치와 경제는 복잡해지고 예측가능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정치경제학이 정치로부터 분리된 후 오히려 정치를 이끌고 있다. 항상 문제의 핵심에는 ‘경제’가 놓여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경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구소련의 붕괴는 단순한 정치 체제의 붕괴나 한 국가의 파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가장 의미 있는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될 구소련의 붕괴는 자본주의라는 경제 체제의 승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승리한 자본주의가 완벽한 제도이거나 훌륭한 시스템이기 때문에 사회주의적 경제 시스템을 붕괴시킨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내의 산적한 문제는 1930년의 대공황을 포함해서 라틴 아메리카의 위기, 일본의 장기 침체, 아시아의 IMF 구제금융으로 이어지면서 해결되지 않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저자는 부적절한 정책과 헤지펀드의 실체를 파헤치며 이러한 결과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고 향후 대책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한다. 미국, 아니 세계의 경제 대통령으로 일컫던 그린스펀을 거품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근거는 경제에 관한 역사적 관점에서 가장 정확하고 타당한 판단을 내리고 있다.

  그림자 금융, 공포의 총합에서 보여주는 비판적 관점은 지나온 과거에 대한 뼈아픈 반성이며 날카로운 지적이다. 돌아온 ‘불황 경제학’을 설파하는 저자가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부정적 전망을 내놓았다면 미네르바처럼 허위사실 유포로 구속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최근 개성공단을 놓고 이명박과 김대중, 박지원과 정몽준이 보여주는 관점의 차이는 옳고 그름을 떠나 경제적 관점이 아니라 정치적 관점의 차이이다. 경제대통령을 표방하고 나선 대통령의 이념과 태도는 훨씬 급진적이다. 그간의 상식과 합리를 뒤엎는 발언들과 가진자들을 위해 노동자들을 법으로 다스리겠다는 발상을 어떻게 보아 넘겨야 할지 모르겠다.

  다시 문제는 경제가 되겠지만 정치와 뗄 수 없는 관계인만큼 불황의 경제학을 정치로 풀어내야한다는 압박은 당연하다. 불황의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의 자세와 태도는 중요하지 않다. 시스템의 문제이며 금융 정책과 제도의 문제이고 정책의 문제로 귀결된다. 개인은 방관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시장이 경제를 주도하고 개인의 경제적 활동과 행동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게 아니라 개인은 전체 시스템의 구성원일 뿐이다.

  우리가 맞고 있는 ‘불황의 경제’ 시대에는 공급이 아닌 수요중심 경제학이 전개된다. 그 분석과 대안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에 맞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미국의 경제학자가 던지는 한국 경제의 화두는 성장과 분배의 문제가 아니라 불황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이다.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를 외치며 부시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 빌 클린턴이 있지만 이명박도 오바마도 비슷한 말을 외치며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경제를 대하는 방식도 해법도 각기 다를 것이다.

  손 놓고 앉아 기다릴 수만은 없겠지만 허리띠를 졸라매자는 같지도 않은 말을 주워섬길 수도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문제는 경제지만 그것을 어떻게 풀어 낼 것인가는 수만 가지 방법이 있다. 우리는 폴 크루그먼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 볼 수 있지 않을까? 그게 누구의 의견이든 상관없지만 우리의 방향과 태도를 먼저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그게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090520-04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밤 0시 5분
황동규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로 시작되는 ‘즐거운 편지’를 버스에서 중얼거리며 등교하던 고등학교 시절이 까마득하다. 시에 처음 눈뜰 무렵부터 읽어 온 그의 시는 여전히 낯설지 않고 살갑다. 표지 사진이 세월을 말해주는 듯 노시인의 눈빛이 깊고 부드럽다.

  <겨울밤 0시 5분>을 통해 황동규의 근작들을 음미한다. 시인에 대한 믿음과 연륜이 어우러져 언어의 축제를 벌이는 듯하다. 화려하고 장엄한 풍경을 노래한다는 뜻이 아니라 정겹고 자연스러운 의미가 명확하게 전달된다. 여전히 긴장감 넘치는 표현과 신선한 감각이 살아 있다. 이번 시집의 특징을 뭐라고 이야기하든 황동규의 시에 흐르는 따뜻한 서정과 생의 대한 감각적 통찰은 여전하다.

  자연에 묻혀 생을 이야기하고 순간순간 마주하는 인상들과 이미지들을 풀어놓는 솜씨는 거침이 없고 물 흐르듯 편안하다. 개인적 서정의 극한을 보여주려는 듯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대상들을 언어로 표현하여 한 편의 시가 완성된다. 그의 시는 환하고 따뜻하다. 하지만 때때로 외롭고 쓸쓸하다.

어느 초밤 화성시 궁평항

비릿한 냄새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이맘때가 정말 마음에 든다.
황혼도 저묾도 어스름도 아닌
발밑까지 캄캄, 그게 오기 직전,
바다 전부가 거대한 삼키는 호흡이 되고
비릿한 냄새가 기다리고 있었다.
유원지로 가는 허연 시멘트 길이
검은 밀물에 창자처럼 여기저기 끊기고 있었다.
기다릴 게 따로 없으니
마음 놓고 무슨 색을 칠해도 좋을 하늘과 바다
그리고 살아있는 이 냄새,
밤새 하나가 가까이서 끼룩댔다.
쓰라리고 아픈 것은 쓰라리고 아픈 것이다!
혼자 있어서 홀가분한 이 외로움,
외로움 아닌 것은 하나씩 마음 밖으로 내보낸다.
속에 봉해뒀던 사람들은 기색이 안 좋지만
하나씩 말없이 나간다.
쓰라리고 아픈 것은 쓰라리고 아픈 것이다!
비릿한 냄새가 기다리고 있었다.
더 비울 게 없으면 시간이 휘는지
방금 읽고 덮은 휴대폰 전광 숫자가 떠오르지 않는다.
선창에서 배 하나가 소리 없이
집어등을 환히 켰다.


  시간과 장소가 어우러져 낮과 밤의 경계를 건너는 순간을 보여준다. 눈에 보이는 모든 이미지가 언어로 되살아난다. 시각과 후각으로 감지되는 저녁 어스름을 시인은 궁평항에서 온몸으로 맞았으리라. 하지만 그 속에 나는 없고 대상과 풍경만 존재한다.

  아득하게 모든 것이 무화되는지 시인은 집어등과 함께 사고의 흐름을 멈춰버린다. 혼자 있어 홀가분한 외로움이 아니라 환한 집어등에 대한 동경으로 읽혔다. 무엇엔가 마음을 빼앗기면 생의 감각은 벅차오르기 마련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겨울밤 0시 5분

별을 보며 걸었다.
아파트 후문에서 마을버스를 내려
길을 건너려다 그냥 걸었다.
추위를 속에 감추려는 듯 상점들이 셔텨들을 내렸다.
늦저녁에 잠깐 내리다 만 눈
지금도 흰 것 한두 깃 바람에 날리고 있다.
먼지는 잠시 잠잠해졌겠지.
얼마 만인가? 코트 여며 마음 조금 가다듬고
별을 보며 종점까지 한 정거를 걸었다.

…… 중 략 ……

별 하나가 스르르 환해지며 묻는다.
‘그대들은 뭘 기다리지? 안 올지 모르는 사람?
어둠이 없는 세상? 먼지 가라앉은 세상?
어둠 속에서 먼지 몸 얼렸다 녹이면서 빛 내뿜는
혜성의 삶도 살맛일 텐데.’
누가 헛기침을 했던가,
옆에 누가 없었다면 또박또박 힘주어 말할 뻔했다.
‘무언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 곁에서
어둠이나 빛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별들이 스쿠버다이빙 수경(水鏡) 밖처럼 어른어른대다 멎었다.
이제 곧 막차가 올 것이다.


  사람냄새 나는 시다. 버스 종점에서 막차를 기다리며 별을 바라보는 시인과 낯선 사람들. 그들에게 시인은 ‘무언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 곁에서 어둠이나 빛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을까? 그건 아마도 스스로에게 하는 말일 게다. 무엇이 집 앞에서 종점으로 그를 이끌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독자라면 마음 한 구석에 쓸쓸함이나 외로움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행동과 말들 저편에 생의 부조리와 허허로움이 서 있는 듯하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혹은 바닷가에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사람마다 다를까? 복잡한 현실의 문제를 풀어내지는 않을 것이다. 아주 작은 존재가 되었다가 무의미한 존재가 되기도 한다. 삶의 의욕을 얻기도 하고 허무한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겨울밤은 그리고 0시 5분 그런 시간이다.

낯선 외로움

자기만의 길이와 폭과 분위기를 가지고 살면서 풀에겐들
왜 저만의 슬픔과 기쁨이 따로 없으랴.
마주 앉아 찻잔 비울 때까지
속으로 삭이고 삭여야 할 생각 왜 없으랴.
삭이고 일어설 때 사방에 썰물 빠지는 적막, 속의 황홀!

학교 식당 건물과 땅 틈새에 배죽 나온 저 풀,
오늘은 노란 꽃대 하나 조그맣게 내밀었다.
손가락 끝으로 얼굴 들어보니
쬐끄만 꽃잎과 꽃술들이 오밀조밀 한 모양을 이루고 있다.
조금 싸한 냄새까지 한 모양을.
왜 한 뼘쯤 앞으로 기어 나와 좀 편히 살지 않을까,
거기도 인간의 발길 채 닿지 않는 곳인데.
풀에게도 끼가 있는가?
기차게 고달파도 제 본때로 살아보겠다는?
말이 없어서 그렇지
몸을 온통 졸이는 황홀한 낯선 외로움이?

  누구에게나 그리움이 있듯이 풀에게도 황홀한 낯선 외로움이 있다. 사람도 저마다 제 자리가 있듯 풀이 돋아난 자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운명을 거부하기도 하고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산다는 일이 어쩌면 잘못 삐져나온 꽃대처럼 신산스럽기만 하다. 한 뼘만 벗어났다면 좀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을, 사람도 그리 하지 못한다.

  내 것을 다른 대상에게 발견할 때 우리는 낯설어한다. 외로움도 그렇다. 실체없는 감정이나 존재의 상태를 이르는 말이지만 타인이나 사물을 통해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생경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 외로운가?

잠깐동안

잠깐!
삶이 잠깐 동안이라는 말이 위안을 준다.
잠깐이 몇 섬광(섬광)인가?


  외로움도 그리움도 사랑도 슬픔도 잠깐 동안이라는 사실만 잊지 않는다면 견딜 만하다. 삶이 섬광처럼 지나가버린 듯 노년을 맞은 시인은 잠깐이 몇 섬광이냐고 되묻고 있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깨달음일 것이다. 현재를 살지만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일까 안타까움일까.

  창밖에 당도해 버린 어둠처럼 죽음도 그렇게 우리에게 어김없이 찾아온다. 단 한 번은. 살아있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매일매일이 안타깝게 느껴질 수 있도록 치열하게(?) 혹은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삶은 아직 멍청합니다―편지

얼굴이 많이 까칠해졌습니다.
허나 감기 타듯 암벽 타듯 해온 삶
손보지 않겠습니다.
삶은 아직 멍청합니다.
딸인가 눈 지그시 감은 아이 옆에 세워놓고
손 벌린 눈먼 사내에게 천 원으로 알고 내민 만 원
깡통에 떨어트리고
천 원짜리로 알았겠지? 아쉬워할 만큼
삶은 아직 멍청합니다.

기억의 화면에는 온갖 것들이 무작위로 뜹니다.
산책길에 굴러 내리다 간신히 자리 잡았던 돌이
또다시 구릅니다.
싸락눈 흩날리는 뜰에 혼자 핀 꼿이
겁 없이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
왜들 그러는지 모를 만큼 멍청합니다.

오늘은 마을 공터에서 아이들이 날리는 배드민턴 콕을
재치 있게 피했지요.
언젠가 이런 편지 쓰는 일마저 싫증나면
마음 한가운데 생짜 공터가 생기리라는 생각이
마음 설레게 합니다.

생각나시면, 지난해 새끼줄로 칭칭 동여맨 나무들
두 번째 봄비 내릴 때 풀어주십시오.


  그리고 얻은 결론이 삶은 아직 멍청한 하다는 말이다. 누군가에게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고 노래하던 ‘조그만 사랑 노래’의 시인이 이제는 ‘삶은 아직 멍청합니다’고 말한다. 생의 보편적 진리를 깨달을 것일까 아니면 생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일까. 그것이 무엇이든 이제 그 모든 순간의 연속이 삶이며 미리 알고 정할 수 없다는 생각쯤은 어렴풋이 할 만하다.

  황동규의 시를 읽으며 욕심이 사라지고 생의 감각이 살아나고 깨달음을 얻을 만큼 마음이 맑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살아 숨 쉬는 존재의 이유에 대해서는 잠시 고개 숙이고 다시 생각해 보았다. 멍한 눈길로 허공을 바라보듯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의 시에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사람이다. 메마른 가슴도 아니고 감각이 무딘 것도 아니지만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거나 힘겨워 고통스런 사람은 없고 시인 홀로 외롭고 쓸쓸하다. 대상에 부딪치는 모든 감각들은 싱싱하게 살아있는 촉수를 뻗고 있으나 그 촉수가 사람에게 가 닿지 않는 것 같아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모든 것들이 육화되어 뿜어져 나오는 정제된 언어임에는 틀림없다. 정갈하고 깨끗한 신새벽의 맑은 정한수처럼.


090517-04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늑대 - 제6회 채만식문학상, 제10회 무영문학상 수상작
전성태 지음 / 창비 / 200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반경 수십 리를 벗어나지 않았던 아주 먼 과거의 삶은 어떠했을까? 답답해서 견디지 못했을까? 넓고 넓은 세상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이 얼마나 대단했을까? 프루스트의 ‘가지 않은 길’처럼 사람들은 항상 기회비용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을 남긴다. 그것을 후회라고 부르기도 한다. 용기와 결단력이 없어서 현재의 삶을 이어간다고 볼 수는 없다. 우리는 항상 변화를 모색하며 새로운 삶을 꿈꾼다. 안정적이고 편안한 인생이 모두의 꿈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미래 혹은 희망의 이름으로 다가올 시간들을 기다린다. 그 불안함, 예측 불가능한 상황들을.

  정착 생활을 시작하면서 안정을 추구하며 예측 가능한 생활을 시작하게 된 인류에게 유목적 삶은 시원의 바다처럼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누구나 훌쩍 떠나고 싶어한다. 바다를 동경하고 고래를 꿈꾸는 것은 본능에 가까운 생명의 근원적 속성인지도 모른다. 전혜린의 말처럼 ‘먼 곳에의 그리움(Fernweh)!’이 숨어 있는 우리들 가슴 속에 작은 불씨는 꺼지지 않는다. 오늘도 나는 떠나고 싶었다.

  전성태의 소설집 <늑대>는 몽골을 배경으로 한 연작들이 주를 이룬다. 낯설고 생경한 풍경, 신산스런 삶의 형태를 통해 우리들의 그것을 돌아보게 한다. 이국의 풍경이 동경과 호기심으로 그려지거나 이질적인 차이만을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복잡 미묘하다. 그들의 나라 몽골은 어떤 삶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곳인가 살펴보자.

  단편 ‘목란식당’은 북에서 운영하는 식당이다. 이곳은 남과 북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누구든 드나들 수 있는 음식점의 풍경을 통해 작가는 체제의 허구를 드러낸다. 이념의 대립으로 분단은 고착화되어 있고 현실 공간에서 남과 북은 달나라만큼 멀어지고 있다. 그러나 제 3국에서는 자연스럽게 음식을 나누고 서로를 바라보고 대화를 나누며 그 실체를 확인한다. 이념의 대립을 다룬 소설도 아니고 몽골의 풍속을 위한 소설도 아니지만 그 모두를 절묘하게 담고 있기도 하다.

  표제작 ‘늑대’는 몽골 초원을 배경으로 인간의 탐욕과 원시성의 만남을 잘 그려내고 있다. 우리들은 삶의 경계를 벗어나지 않기 위해 몸부림을 치기도 하고 그 경계 너머를 동경하기도 한다. 단편 ‘늑대’에서 보여주는 작가의 시선은 문명과 자연의 대립을 넘어선 자리에 서 있다. 인간의 탐욕과 문명은 자연의 순수성을 훼손하지 못한 채 파괴와 죽음을 부른다. 의외의 결말이 신선하기보다는 의도된 소설의 구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남방식물’과 ‘코리언 쏠저’는 몽골로 이식된 한국인의 삶을 보여준다. 토착민이 아닌 이방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디든 마찬가지다. 그것이 뿌리 뽑힌 삶이든 잠시 머물기 위한 임시 방편이든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몽골에서 잘 자라는 고구마처럼, 시적 감수성을 되찾기 위해서 머물렀지만 결국 코리안 쏠저가 되어야 하는 상황처럼 말이다. 우리에게 삶은 때때로 불가해한 질문들을 던진다. 예기지 않은 상황과 부딪치고 원하지 않는 길로 접어들고…….

  ‘중국산 폭죽’은 몽골의 아이들을 통해 사회주의적 삶의 비극성을 보여준다. 이념과 정치체제의 비판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몽골의 현실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소설로 읽었다. 뉴스나 외신을 통해 접하는 낯선 소식이 아니라 우리들의 과거와 겹쳐지는 장면들이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런 의미에서 ‘강을 건너는 사람들’은 탈북자들의 상황이 몽골 아이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막다른 길에 서 있는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을 포기한다. 기본적 삶의 조건을 상실한 사람들의 모습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것이 한반도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조차 어렵다.

  모두 열편의 단편 중 여섯 편이 몽골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일곱 편이 ‘지금-여기’를 넘어선 시간과 공간을 무대로 삼고 있다. 경계를 넘는 일은 불안과 공포일 수도 있고 희망과 설렘일 수도 있다. 작가가 무대로 삼은 몽골은 대자연을 무대로 과거의 영광과 상처가 남아있지만 근대적 삶의 조건들이 아직 갖추어지지 않은 불안한 모습으로 흔들린다. 우리는 낯선 세계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 우리의 삶을 반추한다. 나는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누구 내 구도 못 봤소?’는 작가의 전혀 다른 면을 보여준다. 가장 토착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주인공을 통해 그와 그 주변 사람들이 쏟아내는 구수한 사투리의 향연은 우리말을 엮어내는 작가의 솜씨를 감탄하게 한다. ‘아이들도 돈이 필요하다’는 기억 저편의 과거를 보여준다. 시대극을 보여주듯 저자의 유년 시절 한 토막을 구경하는 듯하고 에피소드를 통해 당대 현실을 기막히게 재현하는 듯하다. ‘이미테이션’을 통해 뿌리깊은 사회적 편견과 삶의 조건을 점검하기도 하는 작가의 관심은 한 곳에 모아지지 않는다.

  이 소설집은 한 호흡으로 읽어낼 수 있는 책이 아니다. 한 시대를, 한 세대를 아우르는 것도 아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당대 현실을 적확하게 그려내며 삶의 조건을 확인하고 현재의 상황을 점검한다. 소설이 무엇인지, 소설가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에 답하고 있는 듯하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낯선 곳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고 싶다면 초월적 공간을 경험해 보고 싶다면 읽어 볼만한 소설이다.


090515-04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