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를 잡는 아버지 창비청소년문학 18
현덕 지음, 원종찬 엮음 / 창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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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정생이나 이오덕 선생님을 진짜 선생님이라고 상찬하는 이유는 뜻과 삶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 땅의 모든 선생님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선생님들이다. 잘 가르치는 교사는 많지만 훌륭한 선생님은 많지 않은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참 스승을 만나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행복한 일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아이들이 선생님과 만들어가는 관계 속에서 참 스승은 만들어진다. 모든 학생에게 좋은 선생님은 없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은 나쁜 사람이듯이. 그래서 사제지간도 결국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일 뿐이다.

  아이들의 성장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부모와 친구다. 그 다음이 선생님이 아닐까? 보고 듣는 대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사회화 과정은 가정에서 끝난다. 2차적인 사회화가 친구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양보와 배려를 배우고 자아 정체성이 형성되기도 하며 세상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기도 한다. 학교에서 만나는 교사는 독특한 위치에 놓여 있다.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교무실에 놀러오는 학생들이 있고 친구처럼 장난을 치기도 하지만 여전히 지적 토대를 형성하는 기초 과정에는 선생님의 역할이 중요하다. 나와 타인과의 관계를 배우고 개인과 사회를 경험하며 간접 체험을 통해 세상을 알아간다.

  다매체 사회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소설의 의미는 예전에 전래동화와 많이 다르다. 세계 형성의 기초 역할을 했던 이야기가 이제는 지루하고 따분한 충고에 불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 읽었던 재미있는 책 한 권이 가치관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특별한 경험으로 추억이 되기도 한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풍부한 정보와 자료가 제공되는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이야기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여전히 독서를 통해 형성된 세계와 상상력의 공간은 어떤 매체보다도 중요하다.

  1909년에 태어나 1950년에 작고한 월북 작가 현덕의 이야기는 특별한 맛과 즐거움을 지닌다. 1930~40년대가 주로 소설 창작의 시대적 배경이 되기 때문에 시대의 기록물로도 손색이 없다. 이번에 창비에서 발간된 소설집 <나비를 잡는 아버지>는 현덕 소설집은 특별한 청소년문학 시리즈의 하나가 되었다. 현재 활발하게 활동 중인 작가의 작품들이나 외국작가의 작품들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이 책은 시원한 샘물처럼 맑고 깨끗하다.

  유아, 아동, 청소년으로 세분화되어 있는 출판시장에서 중학생에게 적당하게 읽힐 만한 책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현장의 목소리들이 많다. 지적 발달 수준이 다르고 배경 지식에 따라 독서 수준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모든 학생들에게 적합한 책이 나오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사춘기를 전후한 질풍노도의 시기에 알맞은 책들이 많지 않다. 일명 성장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청소년 문학이 존재하지만 현덕의 소설처럼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막 입학한 남자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이야기는 많지 않다.

  이 책은 2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는 단편소설들을 묶어 놓았다. 소설의 배경이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시대다. 가난해서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친구 이야기는 지금 아이들이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고개를 갸우뚱거릴 만하다. 소년들 사이의 우정, 가난한 농촌 현실 등이 실감나게 그려지고 있는 ‘나비를 잡는 아버지’, ‘군밤장수’, ‘고구마’, ‘월사금과 스케이트’, ‘집을 나간 소년’, ‘모자’ 등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 70~80대가 되신 분들이 읽는다면 아련한 향수에 젖을 수 있는 내용들이다.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의 결들이 잘 묘사되어 있고 현실감 있는 이야기들이 정확한 문장으로 표현되어 있어 재미있다.

  지금 사용하지 않는 어휘들이 그대로 살아있어 가독성을 떨어뜨리지만 당시의 풍속이나 색다른 문체를 통해 당시의 이야기를 듣는 듯한 현실감은 더해진다. 어휘 문제는 아래에 주석을 달아놓아 해결했기 때문에 의미를 몰라 책을 읽기 어렵지는 않다. 아이들의 심리와 실제 상황을 재현한 듯한 묘사가 두드러져 재미뿐만 아니라 엮은이 원종찬의 구분처럼 소년소설의 참맛이 우러난다.

  2부 남생이는 연작 소설의 형태로 이어진다. ‘경칩’과 ‘남생이’는 당대 농촌 현실을 적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소작농의 애환과 서민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읽어내는 일은 마음이 심란스럽다. 21세기에도 부재지주의 형태로 남아 있는 토지 문제는 사회 문제라고 보아야 한다. 토지 경작의 문제를 놓고 벌어지는 이웃 혹은 친구 사이의 문제는 생존과 직결된다. 현덕 소설의 정수를 보여준다. 마지막 ‘두꺼비가 먹은 돈’은 평화로운 농촌 풍경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어린 아이의 마음을 따라 가며 순수한 웃음을 만들어준다.

  현덕은 동화, 소년소설, 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들을 남겼다. 어느 한 부분도 격이 떨어지거나 수준미달의 작품이 없어 보인다. 카프(KAPF) 해체 이후 등단해서 직접 영향을 받지는 않았지만 리얼리즘 소설의 전형을 보여준다. 문학에 뜻을 둔 후 김유정과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고 하는데 서로의 소설에서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작품 세계나 다양한 작품들이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하는 일보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현덕의 작품을 읽고 그의 소설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 우리들의 현실과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듯 보이는 이 신선하고 특별한 소설들은 아이들에게는 물론 어른들에게도 색다른 재미와 애틋함을 전해 준다.


09061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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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휘의 속삭임 문학과지성 시인선 352
정현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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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력 있고 살아 숨 쉬는 문장은 만들어지는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 태어나는 것일까. 글을 쓰는 행위는 어느 정도 노력과 훈련에 의해 가능하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하다. 시인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라는 생각 또한 그러하다. 어지간한 시인은 부단한 노력과 다듬기로 만들어지겠지만 감탄을 자아내는 시 한 편을 쓰기 어렵다. 두보와 이백처럼 스타일이 전혀 다르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근원적 언어의 한계를 절감할 때가 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인식의 힘
   절망한 자들은 대담해지는 법이다 -니체

도마뱀의 짧은 다리가
날개 돋친 도마뱀을 태어나게 한다.


  정현종의 시 ‘섬’과 최승호의 시 ‘인식의 힘’을 보는 순간 느꼈던 전율을 잊을 수가 없다. 언어를 부려 쓰는 사람의 능력은 무한하지만 그것을 적절한 상상력과 창조적 표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는 상상력이나 대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힘을 갖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잠 못 이루던 밤이 있었다. 무엇이든 지나친 욕망은 사람을 지치고 병들게 한다.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언어의 힘에 압도 되었던 시절을 아름답다고 말하려는 치졸한 욕망 또한 부끄럽기도 하다.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는 말이 있다. 천사의 옷은 꿰맨 흔적이 없다는 뜻으로, 일부러 꾸민 데 없이 자연스럽고 아름다우면서 완전함을 이르는 말이다. 이것이 문자에 사용된다면 최고의 찬사가 된다. 오래전 백발이 되어버린 황동규나 정현종의 시를 보며 떠 오른 말이다. 오규원의 마지막 시집 <두두>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단순히 나이 탓만은 아니겠지만 나이와 무관하지도 않은 듯하다.

꽃 시간 1

시간의 물결을 보아라.
아침이다.
내일 아침이다.
오늘 밤에
내일 아침을 마중 나가는
나의 물결은
푸르기도 하여, 오
그 파동으로
모든 날빛을 물들이니
마음이여
동토는 그곳이여.


  힘을 주지 않아도 저절로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써지는 득도의 경지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자연스런 시간의 물결이 보이지 않으면 정현종의 <광휘의 속삭임>은 밋밋하다. 그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평론가의 눈이 아닌 독자의 판단에 맡겨져야 한다. 단순하지만 긴장이 있고 편안하지만 허술하지 않다.

  광휘(光輝)는 환하고 아름답게 빛난다는 뜻이다. 표제작 ‘광휘의 속삭임’은 이 시집의 특징을 적절하게 드러내고 있는 말이다. 눈부시지만 화려하지 않고 어렵고 난해하지도 않다. 주장을 내세우지도 웅변을 하는 것도 아니다. 작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노인의 목소리처럼 정갈하고 부드럽다.

맑은 날

날빛이 밝고 맑아
이마가 구름에 닿는다

바람결은 온몸에
무한을 살랑댄다

기쁨은 공기 중에
희망은 날빛 속에


  구름이 두어 점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떠 있는 날이어도 좋고 그저 푸르게 푸르게 청정한 날이어도 좋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맑고 깨끗한 생각들로 가득 찰 수 있다면 말이다. 짧고 간명한 표현과 여운이 남는 어떤 상태를 지향하는 듯하다. 우리의 삶이 구차할지라도 결국 공기와 빛으로 스러질 운명이라면 맑은 날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바쁜 일상 속에서 마주치는 모든 순간들이 어느 한 점에 모아지기도 한다. 모든 것이 정지하는 그 순간이 느껴진다. 찰나의 아름다움이 곧 영원이다. 우리의 삶도 그러하다고 믿는다. 지금 이 모든 순간이 점묘법으로 흩어진다. 그리고 이내 바쁜 듯이 그렇게 부대낀다.

바쁜 듯이

1

정말 바쁘지는 말고
바쁜 듯이.
그것도 스스로에게만
바쁜 듯이.

2

한가한 시간이 드디어
노다지가 될 때까지 느긋하게
느긋하게 바쁜 듯이.


  그리하여 매일 아침 ‘운명 같은 건 없다’고 외쳐본다. 저녁도 밤도 아닌 아침에 운명을 외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남은 하루가 너무 길고 햇살이 눈부셔 오로지 우리에게 희망만을 이야기한다. 알 수 없는 미래지만 무엇이든 꿈꿀 수 있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아침 이미지를 ‘운명’에 맞춰 우리 삶의 탄생과 죽음으로 치환하고 있어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저 그런 생각들과 특별하지 않은 시선들이 모여 한 편의 시를 이루었지만 ‘직관’과 만난다. 낯설고 신선하지 않은 정현종의 시가 우리에게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패기와 도전이 아니라 통찰과 무위다. 억지스럽지 않으면서 밋밋하지 않은 것은 언어의 긴장과 도약을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침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있는 건 오로지
새날
풋기운!

운명은 혹시
저녁이나 밤에
무거운 걸음으로
다가올는지 모르겠으나,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여자를 잘 안다고 말하는 시인의 의뭉스러움은 여자 그 자체에 있지 않다. 여성성은 자연과 닿아있고 부드러움과 따스함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결국 우리들 삶의 원형이며 죽음의 종착역이라는 깨달음! 그래서 우리는 여자를 잘 알아야 한다. 비약하자면 삶이란 여자를, 여성성을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여자

나는 여자를 잘 안다.
즉 여성성이 뜻하는 걸 잘 안다.
여자는 자연이다.

우리의 자연,
잃어버렸다는 낙원의 현현을
반짝이지 않을 수 없다.
역사 이전
문명 이전
나 이전
너 이전

원초
또는
앙드레 브르통과 더불어
“모음들로 넘쳐흐르는 화관(花冠).”


  한국어의 모음들이 화음을 이룬 듯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정현종의 시집은 비오는 저녁이나 햇살이 눈부신 휴일 아침에나 펼쳐들 수 있을 것 같다. 고요를 듣고 내 삶의 자취를 잠깐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어울린다. 때때로 시를 통해 그럴 수 있다는 것은 작은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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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는 왜 혼자인 여자가 많을까? - 스스로 행복해지는 심리 치유 에세이
플로렌스 포크 지음, 최정인 옮김 / 푸른숲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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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두려움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모든 여성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자유에는 두려움이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집단 무의식 속에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고, 두려움의 주술이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파고들어와 있기 때문이고, 또 그러한 두려움은 우리 대부분이 구체적으로 느끼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 P. 289

  남성과 여성은 단순한 성별의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성 역할의 차이는 내면화되고 길들여지는 문화적 관습을 통해 완성된다. 생물학적 차이가 아니라 사회적 차별로 계급적 차이가 발생한다. 우리 사회에서도 장애인과 외국인 노동자처럼 여전히 여성은 사회적 약자에 해당된다. 결국은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목적지향적인 화성에서 온 남자와 관계지향적인 금성에서 온 여자가 만나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지금까지 세상에 나온 책 중의 절반은 아마도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이야기들일 것이다. 그것이 문학이든 철학이든 역사든 말이다. 유전적으로 차이가 나는 부분들을 다루었던 진화생물학의 역저, 데이비드 버스의 <욕망의 진화>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털 없는 원숭이>만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어쩔 수 없이 그 차이를 인정해야 하는 여성과 남성의 본성은 사회적 관계와 둘 사이의 양상을 전혀 다른 형태로 이끌어간다. 지구상의 인구 수 만큼 다양한 형태로 관계가 만들어지겠지만 넓은 의미에서 일반화시킬 수 있는 패턴이 존재한다. 여성이 남성보다 조금 더 의존적이라는 한 가지 사실은 엄청난 차이를 초래한다.

  플로렌스 포크의 <미술관에는 왜 혼자인 여자가 많을까?>는 심리 치유 에세이다. 20여 년간 심리치료를 통해 얻은 경험을 편안하고 침착하게 풀어 놓은 책이다. 저자 스스로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을 경험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혼자’에 관한 이야기를 잘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하듯 알기 쉽고 현실감 있게 쓴 책이다. 이 책의 주제는 물론 철저하게 ‘여성’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남성과 다른 여성의 가장 큰 차이점은 ‘혼자’라는 데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남성들이 혼자 있는 것을 즐긴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여성에 비해 독립적이고 목표 지향적이며 심리적으로 과감하고 결단성 있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대체적인 차이지만 실제 남녀 간의 관계에서 커다란 차이를 가져온다. 진화생물학적 차이일 수도 있고 사회적 성 역할이 내면화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차이일 수도 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매우 중요한 사실은 경제력의 차이에서 온다. 얼마 전 발표된 2008년 3월, 남성 정규직과 여성 비정규직의 임금 비율은 100대 39.1이다.

  여자 혼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은 자조나 푸념이 아니라 현실이다. 남성 혼자 사는 경우도 있지만 그 비율이 극히 드물고 경제력이나 제반 조건을 고려할 때 여성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시대가 변했고 사람들의 의식도 달라졌다. 이제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책임지는 여자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남성의 태생적 권력과 역할은 줄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술관에는 왜 혼자인 여자가 많을까?

  혼자라는 건 삶의 방식일 뿐이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다. 독신이든 이혼이든 한국이든 미국이든 혼자 산다는 건 일반적인 것에서 벗어나 있는 혹은 정상에서 벗어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스스로 선택한 삶의 형태를 사람들은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람들의 의식을 한 번에 바꾸고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혼자 사는 사람들보다 먼저 생각을 바꾸어야하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선택이든 어쩔 수 없는 상황이든 다양한 삶의 형태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렇게 힘든 것일까?

  저자의 말대로 자유에는 두려움이 포함되어 있다. 여성들은 자유를 얻기 위해 용기가 필요하고 두려움을 극복할 자신감과 스스로에 대한 사랑이 필요하다. 혼자라는 사실 자체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타인의 시선을 이겨내고 스스로 ‘혼자’라는 사실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밖으로 나가고 ‘고독’을 즐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별이나 이혼이 주는 ‘상실’을 이겨내야 한다. 프로이드의 말처럼 죽음만큼 커다란 고통이 뒤따르겠지만 가족과 친구를 통해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홀로서기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애도와 멜랑콜리아Mournig and Melancholia>라는 책에서 “대부분 상실에는 죽음뿐만 아니라 상처받고 무시당하고 실망하고 애정을 받지 못하거나 낙담하는 상황까지 모두 포함된다”고 했다. - P. 115

  연대와 소통은 여성들에게 매주 중요한 덕목이다. 그것이 남성보다 큰 여성의 장점이라고 믿는다. 함께 더불어 산다는 말은 오로지 ‘결혼’을 통해서만 가능한 가족이기주의와 거리가 멀다. 자신을 찾고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것은 남성이나 여성이나 모두에게 중요하다. 사랑과 섹스, 자유와 행복에 대한 심리 치료 사례들과 저자의 충고는 우리들에게도 귀담아 들을 내용이 많다. 문화적 토양이 다르고 ‘독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다를 것 같으면서도 어느 사회나 유사한 측면이 있어 놀랍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본질적으로 혼자인 인간이 결혼을 통해 둘이 될 수는 없다. 삶의 형태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고 그것이 영원할 수도 없다. 남편과 아이들이라는 환상과 행복한 가정의 파수꾼으로 자처하는 모든 여성들에게 한번쯤 찾아올지도 모를 위기에 대해 저자는 ‘위기의 주부들’처럼 살 것인가 ‘혼자’ 살 것인가 묻고 있다.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의 형태라 할지라도 스스로 행복할 권리가 있음을 깨닫고 혼자라는 사실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충고는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혼자 있음은 선물이다. 혼자 있음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게 해주기 때문이다. 혼자 있는 것을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두렵더라도 가슴을 열어 맞아야 한다. 또한 혼자라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는 먼저 두려움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두려움이 사라짐에 따라 자신의 삶을 살 기회를 얻게 된다. 살면서 맺는 모든 관계는 가르침을 준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무엇을 주고자 하는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혼자 있는 시간은 나 자신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거울과도 같다. - P.200  

090607-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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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오바디스 한국경제 (이준구) - 이준구 교수의, 이념이 아닌 합리성의 경제를 향하여
이준구 지음 / 푸른숲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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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눈은 두 개다. 한쪽 눈을 감아보면 다른 한 쪽 눈의 중요성을 금방 알게 된다. 시야가 좁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거리 측정이 잘 안 된다. 정확하게 사물의 윤곽을 유추하기도 힘들뿐더러 입체적인 느낌이 사라지고 평면으로 보이기도 한다. 가끔 윙크하듯 한쪽 눈을 번갈아 감고 두리번거리는 장난을 한다. 그러고 나면 두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든다.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두 개의 눈은 건강하지 못하다. 그것을 진보와 보수라고 부르기도 하고 좌익과 우익이라고도 한다. 새는 한 쪽 날개만으로 날지 못하니 좌익과 우익이 균형을 이루고 서로 견제하며 문제점을 보완하고 서로 경쟁한다면 가장 이상적인 사회가 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상과 거리가 멀다. 진흙탕에서 뒹구는 개처럼 서로 물어뜯고 죽도록 싸우며 공멸의 길을 걷는다. 양비론과 양시론을 주장하는 것처럼 나쁜 평가도 없지만 그렇다고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줄 마음도 없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이념과 무관하게 작은 행복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상식과 행복이라는 것도 기준이 다르고 방법이 천차만별이다. 부자의 이기주의와 가진 자의 욕망은 절제되지 않는다. 없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권력과 자본을 소유한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만들어간다. 과연 그것이 지속 가능한 행복을 약속해 줄 것인가? 역사는 그렇게 진화하고 발전해 왔다고 믿는 것일까?

  세상을 통찰할 수 있는 눈과 타인을 배려하고 ‘더불어 함께’ 걷는 길을 택하는 것은 개인의 인성으로만 돌릴 문제가 아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바라지도 않는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사를 돌아보고 근대화 과정을 되짚어보면 높은 사회적 신분을 획득했거나 많은 돈을 축적한 사람들을 정당한 노력과 땀의 결과로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런지도 모른다.

  끊임없는 생존 경쟁과 승자 독식의 잔인한 현실을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보다는 승리자가 되기 위한 모든 수단과 방법이 동원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체로 돈이 많은 경우 승리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경우는 그 정도가 상식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인과 관계도 없고 합리적인 생각도 아닌 그들만의 요구와 이기적 욕망들이 정책을 결정하고 사회를 디자인하고 있다. 기존의 외국어 고등학교나 과학고는 물론이고 자립형 사립고등학교의 확대 실시는 무엇을 말하는가. 심지어 국제중학교의 신설은 평준화의 문제점을 보완하겠다는 선의를 말하기조차 부끄럽다. 3불 정책의 근간을 뒤흔들던 바람몰이가 조금 잠잠해진 듯 하지만 그들만의 리그는 계속된다.

  쉰이 조금 넘은 나이에 자선사업에 올인하며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직을 은퇴하는 빌 게이츠, 전재산의 85%에 달하는 수선 수십조에 이르는 재산을 빌게이츠 재단에 기부하는 워렌 버핏을 우리는 길러낼 수 없는가. 상속세 감세안에 진심으로 반대하는 그들을 보며 최소한 그 정도 폼나는 부자를 우리 사회는 길러낼 수 없냐고 우리 교육에게 묻는다.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이준구는 왜 사회비평을 시작했을까? <쿠오 바디스 한국 경제>를 읽으며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경제학자의 사회비평은 넓이과 깊이 면에서 색다르지도 않고 새롭지도 않다. 문장과 비유가 탁월한 설득력을 발휘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의 사회적 위치가 이미 하나의 메시지다. 그가 이명박 정부를 비판한다면 무언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기 쉽다. 그것이 바로 지식인의 책무이다. 사회적 발언이 가져올 파장과 의미를 고려하여 상식에 부합하고 미래를 위한 제언들이 필요하다.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사회비평의 붓을 들다’는 프롤로그를 읽기 시작했다.

  흡인력 있는 문장도 아니고 기막힌 비유나 감각적인 표현도 없지만 이준구의 사회비평은 학자다운 면모를 고루 갖추고 있다. 우선 차분하고 냉정한 사유 방식이다. 흥분해서 외치는 비명은 옳은 말이라도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경제학적 관점에서 관련 분야의 정책이나 사회 현상을 설명할 때 상식을 넘지 않는 분석과 비판의 날을 세운다. 스스로는 과격하다고 표현했지만 난장에 가까운 싸움판에서 보자면 양반의 말투다. 깊은 학문적 토대나 이론적 잣대를 들이밀지 않아도 사람들은 상식을 이야기하면 쉽게 알아듣는다. 이준구의 한국 경제를 위한 제언들은 그래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대운하로 촉발된 토목공화국 논란은 이미 우석훈에 의해서 신랄하게 비판 과정을 거쳤다. 좌우를 넘어 건강하고 행복한 대한민국을 위해 우리 사회가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야할지 고민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필독서로 꼽아주고 싶다. 주택시장 문제와 종부세에 관한 오해와 진실은 슬픔에 가깝다. 언론이라고 볼 수도 없는 조중동의 거짓말과 위선은 안타깝기까지 하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연민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진짜 ‘아마추어’ 정부의 모든 면을 보여주는 이명박 정부에는 영혼이 없다. 교육과 시장 모두 실패한다면 그들에 대한 평가의 가혹함을 넘어 우리 사회의 미래가 암울해진다. 복지부동하고 정권의 눈치를 보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둘 목소리를 낼 준비를 하고 있다고 믿는다. 서울대 교수들의 ‘민주주의 후퇴’ 시국선언 준비 뉴스는 우리 사회의 상식이 살아있음을 반증한다. 이 책을 통해 이준구 교수가 말하고 싶었던 것도 거창한 경제 이론이나 국민들을 위한 학문의 대중화가 아니다. 건강한 상식을 가지고 보다 많은 국민들을 위한 사회로 나아가야 할 대한민국의 지표에 관한 이야기다. 도대체 한국 경제는 어디로 가고 있단 말인가.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잘못된 길에 들어선 한국 경제에 대한 애정 어린 충고이자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미래 사회에 대한 고민이다.


09060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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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서울 - 미래를 잃어버린 젊은 세대에게 건네는 스무살의 사회학
아마미야 카린, 우석훈 지음, 송태욱 옮김 / 꾸리에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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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삶은 비루하다. 끝없는 욕망과 도덕의 싸움. 이드와 에고는 오늘도 전쟁중이다. 자신을 속이고 타인에게 속고 거짓 희망을 노래한다. 일요일 아침 봉준호 감독의 <마더>를 통해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과 어미의 마음과 한 인간의 고통과 죽음을 보았다. 기억과 망각 시스템의 절묘한 조화가 없다면 인간은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미래를 위한 필요충분 조건이다.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려거든 현재를 돌아보아야 한다. 과거 속에 현재가 있고 현재는 미래를 말해주는 법이니. 앞선 세대는 다음 세대의 거울이 되기도 하지만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 따라 같은 세대의 문화를 전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히 경제적 여건이나 정치적 상황, 문화적 토대가 달라지면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는데 앞선 세대는 젊은 세대가 살아갈 세상의 미래를 만든 사람들이다. 말하자면 기성세대는 젊은 시대의 책임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시장 우선주의, 경쟁과 효율의 제고를 우선적 가치로 내세운 한국 경제 혹은 정치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결과는 젊은 세대에게 미래를 빼앗았다. 이탈리아의 ‘1000유로 세대’는 한국의 ‘88만원 세대’에게 영감을 제공하고, 한국의 ‘백수’는 일본의 ‘다메렌’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은 전 지구적 현상으로 확산되는 위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에게는 더 이상 미래가 없는 것일까?

  일본의 아마미야 카린이 한국을 찾았다. 그녀의 이력은 특이하다. 작가이자 에세이스트이며 <주간 금요일> 편집위원이고 ‘반反 빈곤네트워크’ 부대표이다. 일본에서 신사회 운동의 기수로 알려져 있으며 극우파 펑크록 밴드의 보컬에서 빈곤과 생존을 요구하는 젊은 세대 운동에 뛰어든 활동가가 되었다. 레즈비언, 자살, 대학입시 실패 등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좌절과 굴곡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있으며 머리보다 가슴과 발로 현장을 찾아가고 실천적 운동가로 활약하는 그녀의 현재다.

  ‘88만원 세대’ 일본판의 추천사를 쓴 인연으로 두 사람은 시대를 함께 고민한다. 국경을 넘어 문제를 공유하고 카린이 한국을 방문하고 취재한 결과물이 <성난 서울>이라는 책으로 묶였다. 비정규직의 삶으로 대표되는 젊은 세대의 현재를 살펴보면 그들에게 ‘미래’는 없다.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구조적 모순 때문에 일자리가 없거나 비정규직으로 일해야 하는 상황은 일본도 마찬가지다. 빈곤과 불안은 계속되고 그들의 삶은 고통스럽게 이어진다. 기성세대가 책임져야할 부분도 있고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할 부분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완고하다. 기득권은 강화되고 양극화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자본과 교육은 불공평한 경쟁과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한 곳에 집중된다. 전체 사회로 볼 때 매우 심각하며 불행한 일이지만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 없이 서로가 경쟁에 몰입하고 승자가 되기 위한 제로섬 게임은 지속된다. 불행한 일이지만 이러한 현상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 자체가 더 심각한 문제이다.

  대한민국의 상황이나 일본의 90년대 장기 불황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카린은 ‘국제적 연대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그래서 카린은 “만국의 프레카리아트(불안정한precarious 프롤레타리아트)여, 공모하라!”고 외친다.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던 프로파간다의 패러디지만 역사는 순환하고 반복된다는 단순한 진리를 확인하게 된다. 상황이 달라졌고 계급을 가르는 기준이 조금 변했을 뿐이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은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고, 소유도 행복도 동일하다면 사람들은 그곳을 천국이나 유토피아라 부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고 하지 않는가. 다만 카린이나 우석훈의 비판과 고민은 불공정한 경쟁과 경쟁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최악의 상황에서 비롯된다. 이대로 지속가능한 사회가 가능하지 않다는 위기의식이 우리에겐 없단 말인가.

  계급과 일치하지 않는 투표결과, 나는 비정규적이 되지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 빈곤과 차별에 대한 왜곡된 시선 등이 모여 한 사회를 이룬다. 우리는 그 사회에 살고 있으며 때때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여유가 없어지고 행복하지 않으며 웃음이 사라지고 비관적이고 우울한 날들이 계속될 것 같은 상황은 계속된다. ‘희망고문’에 속지 말아야한다. 기업 광고를 통해 대한민국을 믿는다고 외치는 그들은 대다수 서민들의 고통을 먹고산다.

  작은 당근과 커다란 채찍에 길들여진 우리들은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고민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무조건 열심히 노력하고 허리띠를 졸라맨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냉철한 상황판단 능력과 부정적 현실에 댛나 비판 능력이 필요하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방송과 언론의 내용은 모두 옳은 것인지, 그것들의 숨겨진 의도는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현재의 위치에서 행동하고 반격을 시도해야 한다.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고 삶의 다른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의 수도를 <성난 서울>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적절한 비유다. 공교롭게도 제목처럼 달아오르고 있는 대한민국과 ‘성난 서울’의 미래는 대통령이나 위정자들이 아니라 우리 국민들이 만들어가야 한다.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한번쯤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주위를 돌아보고 타인을 배려하고 여럿이 함께 걸어갈 준비만 하면 된다. 나머지는 길 위에서 또 다른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갈 수 있는 길이 우리가 가야할 길이고 우리들의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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