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지성이란 무엇인가 - 우리는 나보다 똑똑하다
찰스 리드비터 지음, 이순희 옮김 / 21세기북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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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과 창의성은 개개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간의 적절한 상호작용에서 나온다. 리더십은 함께 일하는 것을 재미있게 여기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 P. 165

  내가 틀릴 수도 있다. 물론 당신의 생각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대화를 나누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노력한다. 공동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순조롭게 협의가 되고 많은 아이디어가 나온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수록 더 좋은 방법이나 해결 방안이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삶의 한 양식으로 채택했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항상 정답일 수는 없지만 과학적 논쟁이 아닌 한 소수가 정답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다수결이 가진 문제점은 인권과 상식의 차원에서 배려하고 나눌 만큼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고 인류는 역사적으로 발전을 거듭해 왔다.

  정치 제도가 아닌 일상적 문제 해결 방식은 더욱 그러하다. 나보다는 우리가 옳다. 하나는 보잘 것 없지만 집단이 가진 힘은 쉽게 무시하지 못한다. 그래서 막강한 권력이나 독재자도 개인이 아닌 집단 앞에서는 끝까지 버텨내지 못하는 것이다. 배려하고 연대하고 함께 참여하는 일은 역사의 교훈으로부터 이끌어 교훈이다.

  웹 2.0 시대를 맞이한 우리들의 생활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전자 민주주의 시대와 정치 그리고 웹 2.0 시대를 맞이하여 대한민국 정치는 그 판형이 뒤바뀌고 있다. 그러자 이제 그 숨통을 조이기 위한 올가미가 우리를 덮친다. 표현의 자유는 억압되고 방송통신위와 미디어법은 민주주의의 싹을 자르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다. 정치와 사회는 제도보다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의지가 매우 중요하다. 상식과 시대를 거스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오래 버텨낼 수 있을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다시 한번 확인된 국민들의 뜻을 외면하는 정권의 말로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다만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다. 인터넷이 없었다면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생활 속에서 ‘집단 지성’의 위력을 실감했고 그 이후에도 미국산 수입소에 대한 완강한 거부의 뜻을 촛불로 표현했다. 시대를 읽어내지 못하는 정부 때문에 분노하기 보다는 차분하게 대응책을 마련하고 현실 개선의 의지를 밝혀야 할 때다.

  찰스 리드비터의 <집단지성이란 무엇인가we-think>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선거 과정이 소개되어 있다. 더 성능 좋은 자동차와 보다 안락한 집을 경험했는데 이명박 정부에서는 그것을 빼앗았다. 과거로 돌아가는 일은 강물을 거꾸로 돌리는 일만큼이나 어렵다. 그런데 현 정부는 그것을 시도하고 있다. ‘집단지성’에 귀 기울이지 않고 독단과 특정 집단의 이익에 복무하는 사람들이 언제까지 버텨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웹을 넘어 경제와 실생활을 지배하는 집단 지성의 모든 것을 밝히고 있는 이 책은 ‘집단 지성’ 방식으로 집필되었다. 웹에서 벌어진 난상토론과 댓글들을 내용에 반영하고 아이디어를 얻어 책으로 묶어다니 책 내용의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획기적이다. 인터넷의 미래에 대해 예견하는 수많은 추측들이 난무하지만 공유하는 ‘공유하는 인간’의 미래는 어둡지 않다.

  ‘집단 지성’이라는 말은 즉시 위키디피아를 떠올린다. 네이버의 ‘지식in’도 집단 지성을 대표한다. 전 국민의 상식을 초등학교 수준으로 하향 평준화했다는 혹평을 듣기도 하지만 여전이 ‘식인’(지식인)이 형과 ‘이버’(네이버)형에게 물어보는 사람들은 늘어간다. 가장 손쉽게 다른 사람들의 지식을 공유하고 나의 앎을 나눌 수 있다는 발상은 신선하다. 앞으로 또다른 형태로 진화, 발전할 것을 믿는다. 모든 국민이 기자가 될 수 있다는 ‘오마이 뉴스’ 또한 집단 지성의 대표적 사례로 이 책에 등장한다. 기사의 선택과 편집 자체가 사람들의 생각을 재단한다. 그것 자체가 언론 권력이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오마이 뉴스’의 시도는 새로운 언론과 미래 언론의 청사진을 제시한다. 비록 완전하지 않더라도 집단 지성의 물결은 끊임없이 동심원을 그리며 확산될 것이다. 우리의 모든 아이디어가 공유된다면 미래는 어둡지 않다고 믿는다.

우리는 아이디어를 공유해야 한다. 그것만이 아이디어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다. 아이디어를 공유하면 아이디어는 점점 늘어나고 자라나서 아이디어를 더욱 강화하는 순환고리를 이룬다. 우리는 무엇을 갖고 있느냐뿐만 아니라 무엇을 공유하고 있느냐에 따라서도 규정된다. 이것은 우리가 앞으로 백년 동안 신조로 삼아야 할 가치관이다. - P. 296

  미래 사회를 점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그 흐름을 거시적 안목에서 살펴본다면 변화의 큰 틀을 볼 수 있다. ‘공유’는 시대의 사명이 될 것이고 성공 조건이 될 것이며 새로운 사업 모델이 될 것이다. 그 실제 사례들과 전망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는 이 책은 단순히 현상에 대한 나열이나 미래에 대한 예측이 아니라 집단 지성이 지닌 힘과 미래를 살펴볼 수 있는 지도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집단 지성’이 만병 통치약일 수는 없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공존할 수 있다. 민주주의와 평등 그리고 자유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는 이 책이 제시하는 미래의 청사진이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천할 것인가는 물론 우리들의 몫이다. 집단 지성의 미래에 대해 공유, 인정, 참여 그리고 자율규제로 마무리하고 있는 저자의 목소리는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함께 생각하라’는 맺음말을 다시 한번 함께 생각해 보자.

  향후 수십 년 동안, 우리는 두 세계 사이의 투쟁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한 세계는 익숙하기는 하지만 기능장애가 심한 장애 세계, 즉 우리를 위해서 결정이 내려지고 우리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행동이 이루어지는 세계다. 또 다른 세계는 갓 출현하여 혼란을 일으키기 쉽고, 혁명적인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세계, 즉 함께 사고하고 함께 일하는 세계다.
  ‘함께’의 아이디어는 다양한 형태로 변형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웹이 창조하는 세계로 들어갈 방안을 아주 간단한 방법을 구상하고 싶다면 ‘함께’ 생각하라. - P. 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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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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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각이 없다는 인간은 살 수 없다. 시간 앞에 드러나지 않는 진실이 없는 것처럼. 오늘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이다. 소아마비 장애인으로 평생을 혼자 살아야 했던 사람이 어디 한 둘 일까마는 남의 일 같지가 않다. 40일간 뇌사상태에 빠져 사경을 헤매던 동생이 깨어났을 때 담당 의사는 기적이라고 말했다. 사고 당일부터 며칠 동안 앉은 자리에서 물 한 모금 목에 넘기시지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하고 눕지도 못하는 어머니를 지켜야하는 일이 더 큰 고통이었다. 일생을 살면서 기적이라는 말을 실감한 것은 40일만에 동생의 부활이었다. 이제는 잊었다고 믿고 싶다.

  이제는 머나먼 미국 땅, 장영희 교수가 박사과정을 밟았던 대학에서 박사과정 공부를 하고 있는 동생을 잊고 산다.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책날개에 적힌 장영희의 양력을 읽다가 문득 동생이 떠올랐다. 희망은 때때로 인간에게 고문이 되기도 하지만 더 이상 버릴 것이 없는 사람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마지막 빛이다. 덤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생을 바라보는 마음의 갈피는 복잡하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다녀온다는 인사를 잘 하지 않는다. 모든 순간이 안녕이다. 매순간 생의 마지막처럼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여의도 성모병원 응급실에서 가졌던 절망과 간절함을 애써 외면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생은 그렇게 늘 예기치 않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불행을 던져 놓는다. 운명에 순응하며 인생이 결정되어 있다는 믿음이 생긴 것은 아니지만 그때부터 난 늘 운명 앞에 겸손해졌다.

  유방암을 극복하고 척수암을 이겨내며 강인한 삶의 의지를 보여주었던 장영희 선생님의 죽음은 평범하다. 다만 그녀가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주었던 희망의 메시지를 기억할 뿐이다. 삶은 기적이며 찬란한 눈부심이고 평범한 일상의 지속이 가장 큰 행복임을 깨닫는 과정일 뿐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장영희 글들은 소박하고 담백한 숭늉같다. 음식에 비유하자면 자극적이고 강렬한 기억을 남길만한 소스도 메뉴도 없다. 밋밋하고 평범한 시골 밥상같지만 포만감을 느끼며 아주 잘 먹었다는 생각을 들게한다. 그런 음식은 다시 찾게 마련이다.

  그녀의 마지막 책이 되어버린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은 김종삼의 시에서 빌려온 제목이다. 간결하고 절제된 언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던 김종삼의 시세계와 닮아있는 장영희의 산문들은 정갈하고 깔끔하다. 그녀 삶의 이력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것같아 읽는 내내 마음이 신산스러웠다.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며 좋은 이야기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주며 성취감과 행복감을 느끼기에 충분했겠지만 나는 어쩐지 ‘짠한’ 마음이 들었다. 개인적인 감정이니 탓할 사람은 없겠지만 긴 한숨과 안타까움이 깊었다.

  영문학 박사 장왕록의 딸이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장애를 극복하며 미국 유학까지 마치고 대학교수로 살아갈 터전이 마련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부모를 만나 태어나느냐하는 것은 복권과 같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렇게 경쟁과 자본의 힘이 막강한 나라에서 출발선이 다르면 결과도 다르다. 사회적 계급이 고착화되어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강화되고 양극화가 심화될수록 장영희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도 복잡해진다. 장애인의 삶과 문인으로서 삶을 함께 걸었던 그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는 독자들의 몫이다.

  ‘나, 비가 되고 싶어’라는 프롤로그에서부터 ‘희망을 너무 크게 말했나’는 에필로그까지 정일 화백의 그림과 어우러져 책 전체가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내용도 그림도 가장 선하고 평화롭고 부드러운 것들로 가득하다. 일상에서 길어올린 깨달음과 겸손이 곳곳에 묻어있고 배려와 따스함은 덤으로 놓여있다.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철학 이야기도 아니고 어렵고 딱딱한 이론도 없다. 저자의 삶에서 배어나온 자잘한 일상들과 너무나 인간적인 약점들이 녹아있어 더 애틋하고 편안하게 읽힌다.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다.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일상이나 단점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게는가. 저자는 그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숨기지 않는다. 신체의 장애가 있어 겪는 불편함이나 결혼하지 않은 여자로서 겪어야하는 아쉬움들이 일상의 에피소드로 그려진다. 과장하는 몸짓도 애써 치장하는 언사도 없다. 담담하게 느낀 그대로 편안하고 낮은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웃집 아주머니의 이야기같다.

두 개의 독에 쥐 한 마리씩을 넣고 빛이 들어가지 않도록 밀봉한 후 한족 독에만 바늘구멍을 뚫는다. 똑같은 조건 하에서, 완전히 깜깜한 독 안의 쥐는 1주일 만에 죽지만 한 줄기 빛이 새어 들어오는 독의 쥐는 2주일을 더 산다. 그 한 줄기 빛이 독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되고, 희망의 힘이 생명까지 연장시킨 것이다. - P. 232 ‘에필로그’중에서

  이미 이승에서의 삶을 마감한 저자의 이야기가 가슴 뭉클하게 들리는 것은 삶과 죽음의 일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모두 영원히 살 것처럼 욕심을 낸다. 그것이 돈이든 권력이든 명예든 말이다. 먼저 갈다간 사람들이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모아 놓는다면 그렇게 많은 말들이 필요할 것 같지 않다. 담담하고 평화로운 일상들,과 상식이고 합리적인 행동들, 타인을 배려하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마음들이 모여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사람과 즐겁게 할 수 있는 일과 내일의 희망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한다. 세계를 비극적으로 인식해도 늘 나는 행복하다고 자위하며 내일 죽을 것처럼 살 수 있는 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살아온 것도 살아갈 것도 어쩌면 모두 기적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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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관타나모 다이어리
마비쉬 룩사나 칸 지음, 이원 옮김 / 바오밥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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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문제는 결국 철학적 사유로 귀결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키고 다른 동물은 물론 같은 인간끼리 서로 학대하고 살인한다.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인간 본성의 문제는 사회와 국가의 문제로 확대되며 평화와 화해인가 무력과 전쟁의 논리인가는 결국 선택의 문제가 된다. 사람들의 생각은 간단하게 정리되지 않고 쉽게 타협하지 않으며 상대를 인정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인간의 행동 패턴과 사유 방법은 유전적으로 결정되는 것인지 사회화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두 가지 모두 영향을 준다고 해도 의문은 남는다. 인간은 왜 그런 행동을 제어할 수 없는가?

  수많은 심리학자들의 심리실험을 통해 인간의 행동과 심리를 연구해왔지만 악을 제거하기 위한 해결책은 없어 보인다. 상상할 수도 없는 악의 평범성은 우리 안에 내재한 시한폭탄처럼 여겨진다. 언제든 상황만 만들어지면 누구든 타인의 인권을 유린하고 학대하며 심지어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다. 전쟁은 그 모든 것들을 정당화 한다. 군인의 존재 이유가 그것이다. 군복을 입는 순간 우리는 전혀 다른 생물체가 되는 것일까?

  전 세계의 큰 형님이 되어버린 미국은 지구상의 어느 나라에나 시비를 걸 수 있다. 맘에 들지 않는 이유는 만들면 된다. 시비는 괜히 거는 게 아니라 자국의 이익과 직결된다. 경찰국가로 나서 지구의 평화를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원하지 않는 개입과 간섭은 곧바로 전쟁으로 이어진다. 하긴 광우병를 취재한 <PD 수첩>의 기자에게 반미 종북주의자로 몰아붙이는 대한민국의 검사의 뇌구조도 궁금하다. 미국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가?

  아랍계 미국인 마비쉬 룩사나 칸이 쓴 <나의 관타나모 다이어리>는 미국의 이면을 폭로한다. 이미 잘 알려져 있던 사실들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 책이 갖는 의미가 새로움에 있지는 않다. 하지만 구체적이고 적나라하게 그들의 추악한 본질을 드러내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북한의 인권을 말한다. 어느 사회나 모순이 있기 마련이고 문제가 있고 개선해야 하는 부분들이 있다는 일반론에는 동의하겠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아랍인들에 대한 미국인들의 행태는 9.11 테러에 대한 복수에 다름 아니다.

  불특정 다수에게 쏟아지는 횡포는 견디기 어렵다. 힘 있는 소수와 힘없는 다수의 싸움만큼 처절한 것도 없다. 미국과 아랍인 전부와의 싸움으로 비쳐지기도 하는 관타나모 이야기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끔찍한 야만의 기록으로 남겨질 것이다. 신성한 미국 영토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그들은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지 모르겠다. 테러리스트 처벌을 위한 명분으로 죄 없는 사람들을 인간 이하로 취급해도 되는 것인가.

  이 책은 마이애미대학 로스쿨에 재학 중인 여성이 쓴 일기다. 보고 듣고 숨 쉬고 느낀 모든 것들을 열심히 기록한 이야기들은 바로 당신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세상의 모든 불행으로부터 비껴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책은 또 하나의 질문을 던져 줄지도 모른다. 상황은 다르지만 억울한 탄압이나 폭력에 시달리는 대한민국의 비정규직, 노조, 철거민, 외국인 노동자들도 넓은 의미에서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지나친 확대해석일까? 그렇지 않다. 그녀의 이야기는 바로 이 시대의 증언이며 현실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외치는 비명이다.

  단순한 일기가 아니라 시대의 기록이며 미국의 본질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돋보기가 될 수 있는 책이다. 관타나모에서 만난 사람들은 평범한 아랍인이 많다. 실제 테러를 저지르고 많은 사람들을 죽거나 다치게 한 사람도 있겠지만 상금에 눈이 멀고 물건처럼 팔려온 사람들도 많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안타깝게도 제대로 된 재판 한 번 받아 보는 것이다. 이유도 모른 채 몇 년씩 갇혀 있어야 하는 사람들의 심정과 상황은 끔찍하다.

  독재정권 시절 인권이라는 단어조차 잊고 살았던 우리에게 이 책은 아픈 상처를 기억나게 할지도 모른다. 권력 유지 수단으로 국민들에게 가했던 폭력과 고문과 공포가 되살아나는  듯한 현실에 분노하며 이 책이 주는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아들인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관타나모에는 그나마 무료 변론을 위해 찾아오는 변호사들이 있다. 더 끔찍한 상황들과 비교하면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다행스럽게도 집으로 돌아갔지만 소아과의사 무소비, 알자지라 방송국 기자 알 하즈, 염소치기 청년 하즈 등 많은 사람들에 관타나모에 왜 끌려 온지도 모른다. 그들은 분노하고 억울하고 좌절하면서 세월을 견뎌냈다. 하지만 보상은 없다. 다만 집으로 돌아온 것을 감사하게 생각할 따름이다. 이 책을 쓴 저자는 아프가니스탄계 이민 2세로 파쉬툰어를 구사할 줄 안다. 통역으로 그들을 만난 저자의 생각과 느낌은 문화적 이질감을 넘어 무한한 신뢰와 공감대를 이끌어 낸다. 제한적인 변호업무도 맡게 되고 증거 수집을 위해 위험한 아프가니스탄으로 단신 출장까지 다녀오는 그녀의 흔적들이 이 책의 곳곳에 배어 있다.

  ‘태러와의 전쟁’을 통해 체포된 사람들을 기소도 하지 않은 채 무기한 잡아둘 수 있는 관타나모. 법학도로서 그리고 이민자의 딸로서 과감하게 뛰어든 저자의 용기에 박수를 보낼 수 밖에 없다. 그녀가 몸소 겪은 관타나모의 실체는 어느 누가 쓴 관타나모 이야기보다 현실감 있게 읽혔다. 객관적 사실과 그녀의 특수한 문화적 토대가 결합되어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신선하다. 잘 아는 사람이 그들을 바라보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감정에 치우쳐 동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지도 않았고 객관적 사실들의 나열에만 그치지도 않았다. 아주 특별한 논픽션을 읽어나가면서 중요한 글쓰기의 방법과 태도를 배울 수도 있다.

  이 책의 첫 페이지에 적힌 예언자 모하메드의 글이 새삼스럽다.

“배고픈 이를 먹이고 아픈 이를 돌보아라.
억울하게 갇힌 이를 풀어주고 억압받는 이를 도와주어라.”



090619-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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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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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오래된 기억 속의 몇 장면. 서울역 앞에 전경 버스가 불타고 서울 시내는 온통 태극기와 손수건의 물결로 뒤덮였다. 광화문 근처의 빌딩이나 건물마다 사람들이 손을 흔들고 넥타이를 맨 아저씨들까지 거리마다 넘쳐났다. 버스 뒷좌석에 앉아 창밖의 비현실적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알 수 없는 두근거림과 열정을 보았다. 대학생들의 외침도 토할 것 같은 최루탄도 사라졌지만 그때의 기억은 선명하게 남았고 내 의식을 규정하는 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낯선 풍경은 버스가 마포대교를 넘어 자주 거닐던 한강 둔치를 지날 무렵 테니스장의 한가로운 사람들이었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평화로운 모습을 연출하던 아저씨들의 여유 또한 기억 속에 선명하다. 그 때의 일을 쓴 ‘제 8요일의 일기’라는 글이 영등포 여고 교지에 실렸었다. 책장 한 구석에 먼지 묻고 빛바랜 교지 한 권이 그 때를 기억하며 꽂혀있다.

  학교에는 좋은 선생님들 계셨지만 아무도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존경하지는 않게 되었다. 대학에 입학해서 페퍼포그나 지랄탄의 위력을 알아갈 무렵 87년을 이해하게 되었고 박종철이나 이한열의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게 되었다. 벌써 10년도 훌쩍 넘은 이야기니 6월 민주항쟁이나 6.29선언은 사람들의 먼 기억 속에만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2009년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왜 그 시절을 다시 떠올리고 있는 것일까?

  <십시일반>이나 <사이시옷>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즐겨 권하는 만화책이다. 창비에서 새로나온 <100℃>는 6월 민주항쟁의 뜨거운 기억을 만화로 엮었다. 평소 만화를 잘 보지 않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널리 알려진 만화도 잘 모른다. 하지만 만화의 역할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공감과 응원을 보낸다. 이 만화책을 보면서 몇 번 울컥했고, 몇 번쯤 아련했으며, 몇 번은 한숨을 쉬었다.

  프롤로그로 시작되는 반공소년의 모습은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이었다. 웅변대회의 주제는 공산당을 때려잡고, 북괴를 무찌르자는 내용이었다. 그 당시는 북한도 아니고 북한 괴뢰군의 준말로 지칭했다. 경제적, 군사적 차이를 통해 체제 우월성이 판가름 난 이후에도 우리는 6.25의 트라우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아직도 그 상처와 후유증은 서로의 생채기를 후벼파며 대립과 갈등을 조장한다. 그래서 현재 우리 사회의 갈등과 모순의 일부는 아주 오래된 과거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치유되지 않고 극복하지 못한 일들은 해결이 아닌 외면으로 일관되어 왔다. 앞으로도 그것이 지속 가능한 사회의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까?

  시골에서 대학생이 되어 서울에 올라온 대학생들의 내적 갈등, 애타는 부모의 심정은 이제 책 속에서나 만나게 되었다. 이념을 넘어 실용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취업과 생존 경쟁에 내몰려 있는 88만원 세대를 양산하고 있다. 이대로 좋은가?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사회적 모순을 깨닫고 지는 싸움이지만 도전하던 청년 정신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일까?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사람의 한걸음이 더 중요한 이유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공감하던 시대는 다시 올 것이다. 이 책의 제목처럼 지금은 99℃라고 생각하며 늘 100℃를 향해 조금만 더 실천하고 연대하고 배려할 수 있다면 좋겠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투표가 아니라 우리들의 생각과 실천에서 출발한다.

부록으로 실린 시민교육센터(http://www.civiledu.org)에서 강사로 활동중인 이한 선생님의 <청소년을 위한 민주주의 강의교안>을 바탕으로 각색하고 재구성한 ‘그래서 어쩌자고?’는 부록 이상의 의미를 전해준다.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는 것은 스스로 찾아서 배워야 한다. 열심히 배우고 익혀야 하는 이유는 상급학교 진학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준비해야 하는 미래는 공부하는 사람들의 것이 된다. 영어 단어를 암기하고 수학 문제를 푸는 공부가 아니라 현재 상황을 이해하고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민주주의는 과연 어떤 것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주인은 누구인가. 우리들의 권리와 다수결의 모순은 어떻게 극복되어야 하는가. 공부는 계속되어야 한다.

  만화로 된 이 책은 만화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87년 6월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에게는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주며 항쟁의 중심에 서 있는 세대에게는 새로운 힘과 연대의식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3%의 소금이 바다를 썩지 않게 한다. 전 국민이 모두 한마음 한 뜻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저자의 말대로 옳다고 말할 순 없지만 더 마음에 드는 무언가가 소수가 아닌 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증명될 수 없는 취향의 문제지만 가치란 매우 소중하다. 그것이 누구를, 무엇을 위한 가치인가에 따라서 말이다.

가치란 것은 증명될 수 없고 단지 취향의 문제일 뿐이라서, “내가 옳다고 말할 순 없지만 난 이게 더 마음에 들고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라는 상대주의적 태도밖에 취할 수가 없다면 민주주의란 그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의 엉거주춤한 동거를 견디며 끝없이 제 편을 늘려가는 머릿수 싸움의 반복일 수밖에 없다. - P. 210 ‘작가의 말’ 중에서


090616-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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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년 전 악녀일기가 발견되다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6
돌프 페르로엔 지음, 이옥용 옮김 / 내인생의책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공정무역 커피 ‘안데스의 선물’을 마시기까지 과정을 생각해 본다. 남미의 커피 농장에서 땀 흘려 일한 노동자들에게 조금 더 보답할 수 있다는 말을 믿을 뿐이다. 커피의 진한 맛과 향을 음미할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는 않다. 또한 해결 불가능해 보이는 자본의 횡포와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에 무감각하게 지내기도 어렵다. 공정무역 커피 몇 잔을 마신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생각하고 행동하는 작은 실천들이 모여, 배려하고 연대하는 움직임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길 바랄 뿐이다.

  200여 년 전 노예들의 생활이나 커피 농장의 생산 방식을 알게 되면 커피라는 음료수를 마시기 어렵다. 다국적 기업 나이키 등 스포츠 브랜드가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에 거주하는 아동들의 노동력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200여 년 전 커피농장의 농장주와 다를 바 없다. 그들에게 작은 기회와 임금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고 그것조차 막는다면 그들의 생계는 누가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는 반론도 가능하지만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엎드려 침묵하는 것은 악의 편이라는 말은 옳다.

  <200년 전 악녀 일기가 발견되다>는 어린이들을 위한 책이다. 형식과 내용이 쉽고 간단하지만 내용은 무겁고 진지하다. 열 네 살 소녀 ‘마리아’의 생일에 아버지는 쟁반에 ‘꼬꼬’라는 흑인노예를 선물한다. 200여 년 전 네덜란드의 식민지 수리남의 커피농장 주인의 외동딸 마리의 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아직 가슴이 봉긋 올라오지 않아 걱정이고 이웃집 오빠 루카스를 좋아하는 소녀의 눈에 비친 노예의 모습은 일상 속에 마주하는 ‘악의 평범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마리아에게 인종차별이나 계급의 문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일상이 된다.

  작가는 바로 이 지점을 선택했다. 인권이나 인종차별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룬 소설이나 이론서적은 감동의 깊이가 조금 다르다. 같은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태도도 달라진다. 더구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다면 그 형식과 내용을 조금 더 신경쓰고 내용의 깊이를 잘 조절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성공을 거두고 있다.

  바닥에 떨어진 케익을 핥아먹는 꼬꼬는 누구인가? 피부색이 다르다고 해서, 힘이 세다고 해서, 돈이 많다고 해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가. 아이들의 입장에서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은 그대로 자신의 가치관이 된다. 사물과 사회를 바라보는 인식의 틀은 자연스럽게 형성되며 반성하지 않은 한 그것이 옳다고 굳게 믿는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마리아라는 소녀의 일기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 소설은 짧은 분량, 쉽고 단순한 문장, 일상적인 표현으로 누구나 읽고 이해하기 쉽게 구성되어 있다. 어린이, 청소년, 성인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한번쯤 조금만 시간을 내면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감동과 여운은 오래간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실제로 가르치고 익혀야 하는 것들이 영어단어와 수학공식에만 있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그밖에 것들에 대해서는 매우 소홀하다. 우리가 가르치지 않는 동안 아이들은 무관심해지고 마리아처럼 어느 순간 그 방식에 익숙해질지도 모른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고 누구나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으며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할 기본적인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알게 되었나? 아이들은 사회시간에 교과서를 통해서 배우고 익히게 될까? 그것이 내면화되고 일상생활에서 피부색이 다르거나 장애를 가졌거나 직업이 다르다고 해서 차별하지 않게 되는 것은 시간이 가르쳐줄까?

  악녀일기라고 명명된 이 책은 어쩌면 우리 안에 숨어 있는 편견과 선입견들에 대한 부끄러운 반성문일지도 모른다. 외국인 노동자, 비정규직, 장애인, 성적소수자,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우리의 편견은 마리아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200여 년 전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로 치부하고 아주 먼 역사속의 에피소드라고 하기엔 이 책의 주제가 너무 무겁다.

  알면 사랑하게 된다. 무지는 용서될 수 없는 죄악일지 모른다.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불평등의 역사 속에 놓여있다. 아이들에게 그것을 깨우치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인권이나 사회적 평등, 노동자의 권리, 나눔과 배려, 평화와 행복에 대해 고민하도록 해야 한다. 무엇을 위해 살 것이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떤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가르쳐야 한다. 우리에게도 이런 소설은 절대로 필요하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고병권 박사는 추천사를 통해 “악녀일기는 노예주의 폭력과 위선, 광기에 대한 해맑은 고백이자 어른들 마음 속 인종주의의 추악함의 천진난만한 외양”이라면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체 일부를 사고 팔고, 피부색이 다른 이들을 차별하는 등 노예제와 인종주의의 온갖 변형들이 우리 옆에 있다.”고 말한다. 짤막한 소설 한 권을 통해 너무 무겁고 진지한 태도로 교훈을 주려는 것은 좋지 않다. 하지만 생각할 수 있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이 아이들에게 좀 더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200년 쯤 후에 누군가 이 시대를 기록하고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소설을 쓴다면 어떤 악녀가 등장할까? 과연 우리는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으며 그것을 알고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현재의 과거의 거울이며 미래의 토대가 된다. 오래된 미래는 지금-여기에서 출발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090614-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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