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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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세상은 얼마나 견고한가. 어쩌면 점점 단단해지는 구조물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기득권을 가진 자와 그것을 지키려는 자들을 위한 철옹성이 되어간다. 이념적 성향을 떠나 이기적 욕망이 앞서고 다수를 위한 사회가 바람직한가에 대한 고민은 식후의 디저트처럼 항상 2차적이고 부수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 현재 누리고 있는 것을 확고하게 다질 수 있고 더 많이 가질 가능성을 열어둔 상태에서 주변을 돌아볼 수도 있다는 태도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 과연 현재와 같은 상태가 꾸준이 이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인류는 독재와 파시즘, 식민지 등 암흑과 같은 시대를 견뎌내기도 했지만 지금 현재 우리 사회는 매우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문학은 이 견고한 구조물에 계란을 던지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건물 안에 사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우스꽝스런 건물의 외관을 비웃기도 한다. 또한 너무 익숙해서 이상하다고 생각지도 못하는 구조와 설계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장애물을 두고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기도 한다. 이대로 좋은가? 과연 우리는 제대로 살고 있는가? 얼마나 견딜 수 있으며 어디까지 참아야 하는가?

  <인간에 대한 예의>를 통해 공지영을 처음 만났었는지 기억이 가물거린다. 이 소설가에 대한 다양한 평가와 소설 외적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만 작가는 항상 그저 소설로 말할 뿐이다. <도가니>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들>를 잇는 그녀의 장편소설이 가진 힘을 보여준다. 포털 Daum에 연재했던 소설이라는 발표 형식상의 특징이 내용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 같지는 않다. 그녀 특유의 섬세하고 비유와 구체적인 표현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저리들은 독자들을 몽롱한 안개 속으로 안내하기에 충분하다. 너무 깔끔하고 정돈된 솜씨로 유려하게 읽히는 소설의 문장들은 때때로 불편하기까지 하다.

  이번에는 실화를 바탕으로 사회복지시설에서 벌어진 성폭행 사건과 그 처리 과정을 그려낸다. 사형 문제에 이어 장애인의 문제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과 우리 사회에서 그것이 처리되는 과정을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니, 작가가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애써 외면하고 싶은 불편한 구조적 모순들과 우리 안에 잠재된 ‘광란의 도가니’에 대해 이야기한다.

  도가니의 사전적 의미는 ‘쇠붙이를 녹이는 그릇’이라는 뜻이다. 흥분이나 감격 따위로 들끓는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쓰인다. 작가는 소설 속 공간인 ‘무진(霧津)’을 그렇게 부른 것이다. 모든 것이 모호하고 구별되지 않는 안개의 특성은 진실과 거짓이 뒤엉킨 채 우리들의 사고와 가치판단조차도 흐리게 만드는 듯하다. 가장 추악한 인간의 모습과 이기적 욕망들이 결합된 도가니는 무진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마음속에 오롯하다.

  이 사회의 흉측한 몰골을 여실히 드러내는 무진시의 기득권층은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다.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모습은 우리 사회의 다양한 모습들을 간략하게 묘사한다. 단순한 스케치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핵심적인 문제들을 거론하며 윤리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에 대해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이 질문들에 대답을 할 수 있는 것인가. 게다가 문제는 답을 알고 있으면서 외면하고 생활에서 실천하지 못하거나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가치의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답이 없을 것 같은 모호한 이야기가 아니라 너무나 선명하고 확고한 진실 앞에서도 우리들은 다르게 반응한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 가진 자의 손에서 무언가를 뺏어내는 일은 그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어려울 수 있다. 목숨을 걸고 자기 것을 지키려는 자가 쉽게 손가락에 힘을 빼지는 않는다. 선악의 문제로 단순화할 수 없는 문제일 경우 더욱 그렇다. 그래서 사립학교법은 도로아미타불이 되었고, 미디어법은 목숨을 걸고 통과시키려하고 있다. 세상은 그런 곳이다.

암묵적 합의, 우리는 보통 이것을 침묵의 카르텔이라고 한다. 말없이 서로를 위해 복무하고 정교한 그물처럼 짜인 세상에서 변화는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그것을 달가워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나와 무관해도 그 피해정도와 여파를 고민한다. 세상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사람들은 좌절하고 쉽게 포기하며 타협하고 손을 내민다. 그들만의 리그에 편입하기 위해 때로는 목숨을 걸기도 하는 삶이 시작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선택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결정적 순간에 직면했을 때 사람들은 엄청난 경우의 수를 측정하기도 하고 자신의 이익을 계산하기도 한다. 그렇게 살지 않은 사람은 자기만 손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평범성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더 불행할까? 이 소설 속 주인공의 마지막 선택은 고뇌의 흔적이 별로 없다. 무진을 떠나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과정이 순탄치 않지만 김승옥의 <무진기행>의 주인공처럼 무진을 떠난다. 하인숙을 떠난 윤희중처럼 서유진을 떠난 강인호는 도피라고 볼 수 있을까. 또 다른 현실과 진실 사이의 고뇌와 갈등의 결과일까. 이 소설의 결말은 독자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강인호였다면?

  광주 인화학교 사건은 노무현 정권 말기에 5년형이 구형됐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사건이다. 단순히 ‘용서’의 문제가 이 소설의 주제는 아니다. 김승옥의 소설에서 차용한 구조는 현실 밖의 이야기라는 뜻이 아니다. 동떨어진 머나먼 장소에서 끈적하고 답답한 분위기를 가져왔지만 그것은 무진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의 이야기다. 2009년의 현실이 무진 아니겠는가? 그래서 서유진은 이렇게 외쳤는지도 모른다.

“세상 같은 거 바꾸고 싶은 마음,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다 접었어요. 난 그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 것예요.” - P. 257


090708-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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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ia 2009-07-08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날카로우시네요..
난 그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거에요. 이 문장에 가슴을 벤 듯 아려요.
기다리는 것도 방법이라는 진실하나로 버텨가기에 하루하루 힘겨운 나날들.

sceptic 2009-07-10 23:01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러고 있다고 생각하고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시원한 주말 보내세요.
 
지구 위의 작업실
김갑수 지음, 김상민 그림, 김선규 사진 / 푸른숲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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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만의 세계는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타인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아니 이해하더라도 접근 불가능한 고유한 세계가 있다. 나는 그것을 ‘동굴’이라고 부른다. 자의식이 강하고 내성적인 사람, 치유 불가능한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 비현실적 인생관을 지닌 사람,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사람들은 현실 도피의 공간이 필요하다. 그것은 현실 속 어느 장소이거나 나름의 행동과 습관이거나 특별한 취미이거나 개별적인 방법으로 나타난다. 어떤 형태로든 모든 사람들에게 ‘동굴’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외향적이고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해서 항상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가면과 본질적 자아 사이의 괴리감은 사회생활을 통해 누적되는 피로로 나타난다. 가족 내 역할과 사회적 지위에 따라 한 개인의 삶은 결정된다. 그러다보면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외치게 된다.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나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본질적인 자아를 위한 몸부림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나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기적인 삶이라고 볼 수 없으면서도 자신의 의도와 취향과 목적이 뚜렷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쉽지 않다. 신념처럼 위험한 것도 없지만 가치관이 뚜렷하고 일반적인 삶의 패턴에서 조금 벗어나지만 그런 사람들은 행복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상의 소소한 기쁨과 구별되는 몰입의 즐거움을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을 위해 왜 사는지에 대한 기준은 저마다 다르다. 그 기준만큼 방법은 인구 수 만큼 많은 종류가 있을 것이다.

  시인, 문화평론가, 방송인 등 다양한 타이틀을 달고 있는 김갑수는 클래식 애호가이자 매니아로 정평이 나 있다. <지구 위의 작업실>은 책 전체가 자기 소개서다. 신변잡기를 궤변으로 엮어 미용실 아줌마들의 뒷담화처럼, 사우나실 아저씨들의 수다처럼 격이 없고 친근하다. 형식도 내용도 자유롭고 거침이 없다. 시원시원한 문장과 편안하고 자유로운 문장은 책 속으로 빨려들게 한다. 그것도 취향의 문제라면 나는 김갑수의 문장을 매우 유쾌하게 읽었다.

  자기만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아니 그것이 곧 자신의 삶이고 행복이며 실존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랄 것인가. 꼭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것을 찾아야 하는 것일까. 친한 사람이 없다면 행복은 불가능한가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친하다는 것은 자기 확장 의지를 뜻한다. 그러나 가망 없는 시도가 아닐까. 타인에게서 나의 일부를 발견하고자 하는 행위는 횡포다. 순수의 이름으로 사람과 사람이 적나라하게 닿는 일은 일종의 작은 폭력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지금 나는 인간 혐오, 관계 혐오, 대인 기피증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굳이 규정하자면 타인 의존을 통한 자기 방기가 끔찍하다는 말이다. - P. 88

  세상에는 수많은 대책 없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서 대책이란 자본과 경쟁에서 비껴 서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행복의 수치로 환산되지 않는 이것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 아파트 평수와 종합주가 지수와 적금 액수와 수능 점수와 연봉의 공통점은 수치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자 되세요’가 덕담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과연 행복한 삶은 돈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일까. 방송과 강연과 인세로 평범한 사람 이상의 수입을 올리고 있어 스스로 ‘불쌍’과 거리가 멀어져 버렸다는 저자의 고백과 무관하게 그의 작업실은 낭만이며 행복이고 자아 확장의 공간이다.

만일 낭만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섬세함에서 온다. 그것은 괴로움에 짓눌려 끙끙거리며 자라나고 좁다란 밀실에서 아른아른 피어난다. 낭만이라는 것이 만일 있다면, 낭만은 바라보는 자의 몫이지 낭만가객 자신의 몫은 전혀 아니다. 그래서 낭만을 가장 혐오하는 것이 타고난 낭만주의자들이다. - P. 116

  마포 37평 지하실에는 빛과 소리가 완벽된 김갑수의 작업실이 있다. 여기에서 저자는 음악을 듣고 커피를 끓이고 책을 읽는 작업을 한다. 한 마디로 ‘논다’. 아무나 이런 놀이 공간을 가질 수 없다는 자괴감 보다는 부러움과 부끄러움이다. 작은 작업실 하나를 마련하기 위해 물질적인 공간과 돈만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에 몰입할 수 있는 즐거움을 맛본 사람이라면 LP 3만장, CD 4천장이 들어 찬 작업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했다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상상을 초월하는 오디오 작업의 세계는 나열된 어휘조차 이해 불가능이다. 커피에 대한 공력은 그의 작업실이 무엇을 말하는지 말해준다. 아나키스트 김갑수를 이해할 수 있고 그의 작업실이 부러운 사람이라면 그와 비슷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일 것이다.

아직도 근육과 정신이 근절거리는 혈기방장 젊은 나이였다면 나는 아나키스트가 됐을 것이다. 프루동이나 바쿠닌처럼 무시무시한 강골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국가는 폭력이다”라고 외친, 그래서 세금이며 노역이며 국가가 요구하는 것은 모조리 거부하자고 주장한 톨스토이식 온건 아나키즘쯤에 닿았을 것 같다. 아니, 아니다. 무슨 ‘이즘’ 따위로 거창하게 나가지 말고 단순소박으로 이 ‘나라 지겨움’의 속마음을 헤아려보자. - P. 127

  어린 시절 끔찍한 폭력과 친구의 화실을 전전하던 지독한 가난이 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잠시 언급하는 대목에서 잠시 목이 메인다. 짧은 문장이지만 스스로를 진단하는 이야기가 그를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하기도 한다. 음악을 듣는 ‘일’이 그의 삶이라면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오디오 작업을 하는 행위는 음악을 위한 준비운동일까? 누구에게나 작업실이 필요하다. 오랫동안 꿈꾸었던 공간을 만들어 살고 있는 김갑수의 인문학적 교양, 몰입의 즐거움에 공감을 하는 사람이라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나도 김갑수를 부러워만 하다가 죽고 싶지는 않다. 미쳐야 미친다. 다만, 간절하게, 두려움없이 미쳐가고 싶다.

나는 멀쩡한 사람들에게 작업실을 권유하고 싶다. 미쳐달라고. 텅 빈 우물 속에서 제발 조금씩은 미쳐버려달라고. 다만 간절하게, 두려움없이. - P. 279

090705-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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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71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김재범 옮김 / 책세상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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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다보면 가끔씩 무모한 도전을 할 때가 있다. 뻔히 질 줄 아는 게임을 하기도 한다. 무모한 도전이지만 신념과 가치 때문에 개인적 이익과 안전을 포기할 때도 있다. 인간적인 갈등이야 없을 수 없지만 부끄럽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책도 마찬가지다. 가끔 무리수를 둘 때가 있다. 주로 철학책이 그러하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서문>이 그랬고, 비트겐슈타인의 <청갈색 책>이 그랬다. 하지만 끓어 넘치는 호기심과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다. 번번히 보기좋게 나가떨어져도 포기할 수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그래도 좀 나았는데, <형이상학>은 얼마나 이해하고 그 핵심을 만져보기나 했는지 의심스럽다. 책에 대한 평가는 어불성설이고 아리스토텔레스와 직접 만난다는 설렘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완역판이 아니라 발췌본을 먼저 대할 생각으로 가벼운 분량의 책세상문고 ‘고전의 세계’ 시리즈를 선택했지만 역시 만만치 않았다.

  ‘철학아카데미’나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배우고 익히고 싶다는 생각은 현실을 핑계로 훗날로 미루고만 있다. 함께 생각하고 앎을 나누는 공동체는 현실에 있음에도 쉽게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나의 게으름 탓이리라. 살아가는 이유와 방법은 어쩌면 선택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될 수도 수단이 될 수도 있다. 나에게 철학은 도대체 무엇인가.

  사물을 바라보는 것은 내가 있음으로 시작된다. 나와 대상이 있다면 있음은 본질과 형상으로 구분된다. 보여지는 것의 실체와 운동 개념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를 설명한다. 내 존재의 근원과 삶의 가치를 성찰하기 위해 가장 밑바탕이 되는 사유의 토대를 마련한 사람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이고 그 생각의 과정을 논리적으로 서술한 책이 <형이상학>이다.

  사물의 실체는 형상과 질료로 구성되며 그것은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처럼 분리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유를 통해서만 그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는 스승의 한계를 뛰어넘으로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실재론과 유명론 사이에서 접점을 찾고자 하지만 내게는 아직도 손에 잡히지 않는 구름처럼 모호하고 아득한 개념들의 유희들로 비춰진다. 철학을 한다는 것이 개념을 밝히고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인데 추상적 사고를 위한 사고 훈련이 턱없이 부족한 탓일 게다.

  겸손한 마음으로 보다 잘 소화된 2차 저작들을 먼저 섭렵하고 다시 도전해 볼 일이다. 책을 통해 얼마나 지적 훈련과 사유의 폭을 넓힐 수 있을지 알수 없으나 스스로 노력하는 만큼의 성과는 분명히 얻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가끔씩 삶의 목적이 모호하고 분명하지 않은 미래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맥없이 허공을 바라보며 ‘존재의 근원’에 대해 성찰하고 싶은 욕망이 넘칠 때 또다시 도전하게 될지도 모를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뒤로 미룬다.

  ‘들어가는 말’에서 이 책을 옮긴 김재범의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아 중간에 책장을 덮을 수가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이 책을 내놓은 저자의 노력과 학문적 열정 그리고 삶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가 나를 이끌었다. 짧지만 진정성이 묻어나는 모든 저자와 번역자의 수고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세상 만물의 근원과 본질에 대한 호기심 내 존재에 대한 질문들은 곧 우리들 삶에 대한 질문이다.

  ‘A. 원리와 원인에 관한 앞 철학자들의 이론’이라는 첫 장은 최초의 철학사라고 불린다. 제 1 장 앎에 관한 탐구 첫 문장은 ‘모든 인간은 본성상 알고 싶어하는 속성을 지닌다. 그리고 감각적인 앎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함이 이것을 입증한다’는 문장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의 출발점이다. 서로 생각이 다른 철학자들의 주장은 눈에 보이는 형상과 그것의 재료 사이의 관계와 운동 사이에 놓여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가진 감각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시도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철학적 삶의 태도가 아닐지도 모른다. ‘왜 사냐건 웃지요’라고 말한 어느 시인의 말처럼 그것은 철학적 사유나 언어 이전의 문제일질도 모른다. 종교적 관점에서 살펴볼 수도 있겠으나 밤하늘에 떠 있는 희뿌윰한 달빛처럼 모호할 뿐이다. 내가 사는 이유와 방법이 타인에게 강요될 수 없다는 자명한 진리 앞에 우리는 번번이 절망한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도 깨우치지 못한 삶의 진리 혹은 존재의 근원에 대해 외면하지 않는 자세일지도 모른다. 어쩌겠는가 여기까지가 나의 한계인 것을. 그리고 그 한계를 뛰어 넘으려는 자세만큼은 유지하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만이라고 자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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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심리학 - 가르치는 사람들을 위한 행복한 치유
토니 험프리스 지음, 안기순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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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이란 말은 듣기만 해도 겸손해져야 한다. 무지의 상태에서 앎의 세계로 나를 이끌어 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먼저 살았던 사람이라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가진 사람을 뜻하는 게 아닐까? 교사는 많지만 스승은 찾기 힘들다는 말들을 쉽게 한다. 여기서 교사는 단순하게 지식을 전수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고 스승은 깨달음을 준 존경의 대상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교사와 학생은 많지만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아득하기만 하다.

  사르트르는 체 게바라를 가리켜 21세기의 완전한 인간이라고 말했다. 그말의 함의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완전한 인간은 없다. 인간은 누구나 단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다. 기준과 해석을 달리하면 교사나 스승이나 그저 평범한 범부일 뿐이다. 다만 가르침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무엇을 배웠고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교사가 될 수도 스승이 될 수도 있다. 가르치는 사람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래포(rapport)가 형성된 후에야 관계가 형성되고 신뢰가 쌓이며 지식 너머의 전 인격적 합일과 동화가 이루어진다. 가르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스승이 될 수 없다.

  꽃으로도 아이들을 때려서는 안 되고 학생들의 인격과 인권 또한 교사의 그것과 똑같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스승과 제자 사이가 돈독한 관계가 형성되기란 좀체로 힘들다. 학생들은 발달 단계나 성장과정의 측면에서 다각도로 관심을 가진다. 심리적 태도와 성장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점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연구되고 있다. 하지만 교사들의 역할과 현장에서 겪는 어려움, 다양한 심리 상태에 대해서는 사회적 관심이 부족하다. 그래서 토니 험프리스의 <선생님의 심리학>은 눈에 띠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가르치는 사람들을 위한 행복한 치유’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교사는 물론 학생과 학부모가 함께 읽어야 할 책이다. 예상 독자가 선생님이기 때문에 학교에서 벌어지는 문제 상황과 심리상태를 교사에 맞추고 있다. 학생, 동료, 관리자와 부딪히는 수많은 문제와 그때 느끼는 심리상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이며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관한 조언과 충고를 얻을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 교사는 ‘철밥통’으로 불린다. 일반인들은 심리적 스트레스와 갈등과 긴장을 짐작하지 못한다. 일부 타성에 젖은 교사들로 인해 불신 받는 전체 교사들은 대한민국 전체 교사들의 모습과 많이 다르다. 하지만 교사들은 행복할까? 이 책에서 말하는 ‘선생님은 왜 스트레스를 받는가, 자부심이 높은 선생님은 흔들리지 않는다, 교무실에서 즐거운 선생님 되기’ 등 각 장의 제목은 매력적이다. 그 원인을 진단하는 저자는 직접 중등학교 교사로 재직했고 수많은 교사들의 심리치료를 통해 쌓은 해결방안까지 제시한다.

  결국 선생님과 학생을 위한 치유의 심리학은 관점과 관계의 문제로 요약된다. 저자는 부적응 행동이 언제나 옳다는 발상의 전환을 촉구한다. 한국의 교육환경은 나름의 독자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문화가 다른 서양의 관점이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근대 이후 탄생한 ‘학교’라는 공간과 교사, 학생은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명의 교사가 40명의 학생들을 상대로 이루어지는 수업과 여전히 개선되지 않는 업무는 학교 환경 자체의 한계를 말해준다. 그 속에서 교사 자부심을 갖고 거의 완전한 인격체가 되어 어떤 종류의 학생이든 맞춤식 교육과 상담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언제나 학교가 불행한 곳만은 아니다.

  꿈꾸는 아이들과 그들이 믿는 선생님이 존재하는 한 희망을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행복한 교실은 교사와 학생이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교육의 최전선에서 완전한 인간으로 학생들을 지도하고 때로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야 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매우 힘겨운 삶이다. 업무 곤란도와 스트레스의 정도를 명시적으로 측정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겪는 어려움과 심리적 고통에 대해 관심을 갖는 데서 교육 문제를 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바라는 원만한 학교는 가능한가? 저자는 효과적인 학교, 효과적인 지도자, 시스템에 대해 제안하지만 대한민국의 현실과는 거리가 멀어 공허한 울림으로 들린다. 하지만 철저하게 교사들의 반성과 성찰을 촉구하는 책으로 읽혀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그들을 치유하기 위한 심리학이 아니라 평소 생활에서 당연히 지켜져야 할 행동지침으로 여겨할 내용들이 각 장마다 조목조목 항목화 되어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내용들이다.

  교육은 가치 중립적인가? 그게 가능하긴 한 걸까? 가치 지향적인 인간이 어떻게 가치 중립적 태도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 교육의 방법과 교사의 태도를 넘어 교사와 학생간의 관계에만 초점을 맞추고 교사가 겪는 심리치료용 도서로 충분해 보인다. 그러나 그 근본적인 원인과 제도적 모순들에 대한 분석은 전혀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어쨌든 이 책에서 주장하는 저자의 몇 가지 이야기는 귀담아 듣고 새겨두어야 한다.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든 당신은 누군가의 선생님이고 당신 아이들의 영원한 선생님이므로.

교실에서 선생님의 부적절한 행동

선생님과 학생 사이의 의사소통

- 학생들에게 소리 지른다.
- 학생들에게 명령하고, 학생을 지배하고 통제한다.
- 통제의 수단으로 야유하고 빈정거린다.
- 학생들을 비웃고, 꾸짖고, 비난한다.
- 학생들에게 ‘어리석다’, ‘둔하다’, ‘약하다’, ‘게으르다’ 등의 꼬리표를 붙인다.
- 신체적으로 학생들을 위협한다.
- 학생들을 떠민다.
- 학생에게 폭력적이다.
- 학생을 서로 비교한다.
- 일부 학생을 좋아하지 않는다.
- 눈에 띄게 총애하는 학생이 있다.
- 학생들의 이름을 외우지 못한다.
- 학생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 지나치게 엄격하다.
- 수업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에게 짜증을 낸다.
- 학생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기대한다.
- 학생들이 공부를 하든 말든 개의치 않는다.
- 학생들에게 어떤 애정도 느끼지 않는다.
- 실수와 실패를 처벌한다.
- 학생이 학업에 어려움을 느껴도 도와주지 않는다.
- 실수를 해도 결코 사과하지 않는다.
- 학생에게 공손하게 말하지도, 감사하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 문제 행동에 대해 일관성 없고 예측할 수 없는 반응을 보인다.

수업에 대한 선생님의 태도

- 시간을 낭비한다.
- 수업을 흥미롭게 진행하지 않는다.
- 수업 준비를 하지 않는다.
- 수업 시간 중간에 교실을 나간다.
- 지난 시간 수업내용을 습득하지 못한 학생을 배려하지 않고 다음 수업을 진행한다.
- 학생 중심이 아닌 프로그램 중심으로 수업을 진행한다.

선생님 자신의 정서적 상태

- 자주 화를 내고 우울하다.
- 가르치는 일을 싫어한다.
- 자신의 교수 능력을 의심한다.
- 학급 통제권을 잃을까 봐 두려워한다.
- 동료가 자신을 어떻게 볼지 걱정한다.
- 학생이 자신을 좋아해주길 바란다.
- 자부심이 낮다.
- 학생을 무서워한다.


교실에서 선생님의 긍정적인 행동 점검목록

1. 각 학생과 조건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2. 자부심이 학습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한다.
3. 사람과 행동을 분리해서 생각한다.
4. 학습이 능력의 지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5. 성공과 실패가 상대적인 개념으로 생각한다.
6. 실수와 실패를 학습 기회로 사용한다.
7. 성과보다는 노력을 강조한다.
8. 학습은 긍정적인 관련성만을 갖는다고 확신한다.
9. 자신의 필요를 학생에게 투사하지 않는다.
10. 학생의 문제 행동을, 선생님에 대해서가 아닌 학생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11. 항상 차분하고 긴장을 푼 상태를 유지한다.
12. 모든 학생에 대한 반응이 공정하고, 일관성 있고, 예측 가능하다.
13. 학생들을 자주 칭찬하고 격려한다.
14. 학생을 통해 드러나는 대처하기 힘든 문제에 긍정적이면서도 단호한 태도를 취한다.
15. 모든 입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16. 수업 준비를 잘 한다.
17. 학생에게 명령하지 않고 요청한다.
18. 프로그램 중심이 아니라 학생 중심으로 수업을 진행한다.
19. 부적응 행동을 보이는 학생과 갈등을 빚지 않는다.
20. 언제 도움이 필요한지 알고 있다.


090628-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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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 - 한두 줄만 쓰다 지친 당신을 위한 필살기 이만교의 글쓰기 공작소
이만교 지음 / 그린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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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글을 쓰지만 목적은 다르다. 아무나 글을 쓰지만 관심의 정도는 다르다. 어쩔 수 없이 써야 하는 글이 있고 자발적으로 쓰는 글이 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글을 쓰지 않거나 읽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이제 거의 불가능해졌다. 독해력은 단순히 문자나 언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매체가 다양해지면서 전통적인 글 읽기 능력과 구별되는 다양한 해석 능력도 요구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문자를 통한 의사소통과 읽고 쓰는 행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 목적이 다르고 관심사가 제각각일 수는 있지만 읽고 쓰지 않으면서 세상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최근들어 글쓰기에 관한 책이 다양하게 쏟아지고 있다. 대입에서 논술고사가 중요한 관문으로 부각되면서 ‘논술 열풍’이 불기 시작했고 초등학생용 동화책에도 ‘논술대비’라는 관용구가 따라 붙는다. 고전과 명작들을 짜깁기 하거나 요약본이 아닌 생략본 시리즈를 발간하며 청소년에게 독서의 즐거움과 고전의 참맛을 훼손하기도 한다. 물론 이 책들도 모두 ‘논술대비’다. 홈쇼핑에서도 책을 판다. 물론 ‘논술대비’용 도서라는 타이틀이 따라붙는다. 논술대비가 붙은 책이 모두 나쁜 책은 아니지만 글을 쓰기 위해 논술을 잘 하기 위해 따로 읽어야 하는 책은 없다. 무엇을 읽고 어떻게 쓸 것인가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생각해보면 대한민국의 입시와 논술은 괴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쉽게 알아차리게 된다. 문제를 알면서도 개선하지 않는 것은 청소년들에 대한 범죄다.

  입시나 각종 시험에 대비한 글쓰기는 관점과 방법이 사뭇 다르다. 정해진 규칙과 틀이 있고 ‘선발’을 위한 채점자를 위한 모범 답안이 존재한다. 즐거움과 무관한 글쓰기는 실용적 관점으로만 접근해야 한다. 이만교의 <글쓰기 공작소>는 이와 같은 글쓰기와는 지구 반대편에 있다. 소설가의 글쓰기 수업은 ‘연구 공간 수유+너머’의 강좌라는 사실만으로도 독특한 매력을 주었다. 물론 나의 개인적 취향이지만 직접 강좌에 참여하지 못하는 한을 풀기위해 출판되는 책으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 책은 글쓰기의 본질적인 측면에 대해 깊이있게 그리고 즐겁게 이야기한다. 작가 나름의 노하우를 전수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책이다.

  강자는, 진리를 단지 알고 있는 자가 아니라 좋아하고 즐기는 자여서, 자신보다 진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자들을 보면 참으로 측은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글쓰기 역시 마찬가지다. 감상적 · 도식적 · 윤리적 · 일상적 · 상투적 · 통념적 언어질서에 복종하는 글쓰기는 약자의 글쓰기다. 반면 스스로의 감각과 사유와 상상을 생성해 내고 즐기며 기성문법을 넘어서는 새롭고 낯선 소수언어를 만드는 자가 비로소 작가고 예술가다. 그런 점에서 글쓰기란 언제나 소수언어로서의 창작언어를 탄생시키는 일이다. 창작언어를 탄생시키는 일이란, 기성질서와 언어에 저항하고, 기성질서와 언어를 전복하고, 무엇보다 기성질서와 언어보다 더 강해지고 넉넉해진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창작언어는 자연스레 글쓴이의 개성이 묻어나는 언어니고 저항의 언어이고 전복의 언어이고 강자의 언어이고 난장(亂場)의 언어다. - P. 238


  저자가 말하는 글쓰기는 창조적 언어의 사용이다. 일상적 언어와의 만남이 아니라 명징하고 새로운 의미 부여가 글쓰기의 기본이라는 말이다. 하늘아래 새로운 언어를 창조해서 사용하는 일이 글쓰기의 시작이 아니라 사물을 낯설게 바라보고 감수성을 살린 표현과 언어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는 것이 글쓰기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글쓰기의 유일한 도구이자 무기인 언어 사용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글쓰기의 즐거움은 맛볼 수 없다. 저자가 말하는 글쓰기가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우선 자신이 글을 쓰는 목적과 방법에 대해 돌아볼 필요가 있다. 반성적 태도로 지금까지 습관들을 꼼꼼하게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답이 나온다.

  구체적이고 상세한 부분들에 대한 관심과 지적은 부차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근본적인 목적이나 방향 그리고 언어와 문장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글쓰기가 시작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 과정에 이르는 지난한 방법들을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설명한다. 실제 지도하는 과정에서 마주쳤던 습작들을 난도질하며 함께 읽고 고민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저자 스스로 공부하는 자세로 함께 고민해보자는 취지로 시작한 글쓰기 강좌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런지 꽤 두꺼운 분량이지만 책장은 쉽게 넘어가고 책을 읽는다기보다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편안하게 공감할 수 있었다.

  문제는 천천히 운전하는 것과 여유있게 운전하는 것, 신속하게 운전하는 것과 조급하게 운전하는 것, 열심히 읽는 것과 초조하게 읽는 것, 깐깐하게 공부하는 것과 소심하게 공부하는 것, 치열하게 쓰는 것과 욕심을 부려 쓰는 것,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과 고지식하게 고민하는 것, 자부심을 갖고 행동하는 것과 자만심을 갖고 행동하는 것, 게으르게 시간을 지체하는 것과 여유롭게 때를 기다리는 것…… 등을 나누어 분별하기가 좀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이다.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생사가 갈린다고 했다. 숨 한 번 돌리자 사랑이 욕정으로 바뀌는가 하면 욕심이 노력으로 바뀌기도 한다. 숨 한 번 돌리는 사이에 무욕이 게으름으로 변하는가 하면 순정이 맹목으로 변하기도 한다. 딴엔 의식적으로 치열하게 열심히 읽고 썼지만, 그것이 다만 조급한 욕심에 불과한 것일 수가 있어서, 마치 <잠입자>의 ‘고슴도치’처럼, 스스로 속는 경우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참으로 많은 학생들이 그리고 나 자신조차도 참으로 자주, ‘열심히’와 ‘조급히’를 혼동하고, ‘최선을 다해’와 ‘욕심을 다해’를 혼동한다. ‘자기만의 생각’과 ‘자기만의 고집’을 혼동하고 ‘독장적인 글쓰기’와 ‘독선적인 글쓰기’를 혼동한다. ‘고독한 창작생활’과 ‘고립된 창작생활’을 혼동한다. - P. 365

  사소한 생각의 차이가 전혀 다른 인생을 만든다. MBC를 손보기로 마음먹은 조선일보를 읽다보면 MBC는 대한민국에서 사라져야할 방송국이다. 대통령과 정부 정책을 오해하고 개인적 감정 때문에 온 국민에게 거짓말을 한 방송이다. 하지만 <신문읽기의 혁명>을 읽어보고 집단지성에 소개된 ‘오마이 뉴스’를 살펴보면 또 다른 시각과 상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언론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과 역할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신문은 쓰레기다. 언론을 왜 사회의 공기라고 했을까? 질식사 하지 않으려면 판단력을 갖춘 뇌와 말할 수 있는 입과 행동할 수 있는 발이 필요하다.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글을 쓰기 위한 손이 필요하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그 사소해 보이는 차이들이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호흡을 가다듬어 보자.

  저자는 에필로그 ‘본질적 감수성’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생각과 행동의 거리. 너무 늦은 행동은 없다. 미래를 위해서 모든 행동은 빠른 것이다. 다만 후회만이 우리의 뒤를 따를 뿐이다. 후회 없는 삶을 위해 우리들의 본능적인, 본질적인 감수성을 기를 필요가 있다. 보다 많은 이웃과 건강한 사회를 얻기 위한 글쓰기가 참된 글쓰기다. 굶주린 아이들의 급식비를 깎기 위해 놀리는 세 치 혀가 아니라 그들의 만행을 역사에 기록하기 위한 글쓰기가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책읽기와 마찬가지로 글쓰기는 혁명이며 행동이고 우리들의 진정한 삶이어야 한다.

  우리의 글쓰기 역시 결코 늦은 것이 아니다. 늦은 것일 수 없다.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는, 지금 읽고 쓰고 성찰하는 우리 각자의 행동이 언제나 가장 빠른 길이다. 나는 나를 이런저런 망상에 빠트리는 이 문구가 너무 좋다. “모든 행동은 그것이 가져올 미래에 대해서는 늦지 않습니다. 언제나 후회만이 늦을 뿐, 행동은 결코 늦지 않습니다.”(고병권, <추방과 탈주>, 그린비, 2009, 194쪽)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첫 번째 행동은 아마 꿈을 꾸는 것이리라. 그리고 가장 빠른 첫걸음은 이제 읽고 쓰고 생각하는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리라. - P. 384

  혼자서 꾸는 꿈은 한갓 공상에 불과하지만, 모두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고 오늘도 믿고 산다.


090625-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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