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교실 혁명 핀란드 교육 시리즈 1
후쿠타 세이지 지음, 박재원.윤지은 옮김 / 비아북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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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선택의 십계

-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 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 한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얼마 전 이웃 블로거를 만나 즐겁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통과 교감은 오래 된 친구를 찾은 것처럼 유쾌한 일이었다. 그가 다닌 학교의 ‘직업선택의 십계’의 내용은 널리 알려져 있어 새삼스럽지 않지만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종교적 신념이나 특별한 삶을 선택한 사람이 아니면 이런 직업선택의 기준을 참고할 리 없다. 물론, 선언적 의미가 강하겠지만 지나온 내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조금 부끄러웠다. 나는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무엇을 배웠으며 어떻게 살았을까 때때로 돌아보지만, 지나간 모든 것은 아름다웠노라고 미화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100년이 넘은 서울의 평범한 사립 고등학교를 졸업한 내가 그가 생각하는 교육과 삶과 세상의 가치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책이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얄팍한 지식 나부랭이를 배우러 가는 곳이 학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한 완고한 대한민국의 학교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박재원과 윤지은이 번역하고 비상교육 공부연구소장 박재원이 해설을 붙여놓은 후쿠타 세이지의 <핀란드 교실혁명>을 읽었다. 읽는 동안 가슴이 답답했다. 견고한 현실의 벽 때문이었다. 눈물이 날 뻔 했다. 수많은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울했다. 나의 미래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외치고 싶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을 읽어보라고.

  이윤창출과 무한 경쟁의 논리를 벗어날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 체제를 변화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질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교육제도는 모두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은 인정했으면 좋겠다. 이념의 문제도 정치적 논리도 이기적 욕망도 이 기본적인 상식을 벗어날 수는 없다. 내 자식만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는 태도와 고등학교 성적이 평생을 좌우하는 사회와 직업선택의 첫째 조건이 ‘돈’이어야 하는 미래에서 우리의 꿈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지난달에 수능이 끝나고 지난주에 성적표를 받아든 아이들의 얼굴은 복잡해 보인다. 새학기가 되면 대학 이름과 합격생 수를 적어 현수막을 내건다. 서울대에 합격한 학생들은 특별히 학과와 이름까지 적어 따로 교문 위에 걸어둔다. 정든 교정을 떠나는 아이들,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 그리고 부모들에게 학교는 패배감과 두려움을 선물한다. 이름이 내걸리지 못한 모든 아이들은 좌절감을 맛본 채 스무 살의 봄을 맞이해야 하는 것일까? 이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에게는 단 하나의 목표만을 강요해야 하는 것일까? 이것이 현실이다. 무한 경쟁 체제인 대한민국의 교육은 1% 승리자를 위해 모든 시스템이 가동된다. 똑같은 머리, 똑같은 교복, 똑같은 공부, 똑같은 목표, 똑같은 생활, 똑같은 꿈!

시험을 향해 짜여진 교육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배울 것인지에 대해 규칙을 정해버리기 때문에 교육의 본래 목적인 능력향상을 제한하는 시스템으로 변질되어버린다. - P. 22

“핀란드의 학교는 잘못하는 아이들을 끌어가긴 하지만 잘하는 아이들은 그냥 둡니다. 왜냐하면 잘하니까요.” 이것이 바로 핵심이다. 자율적으로 배우도록 키우면 아이들은 교사나 어른을 뛰어넘어 뻗어나간다. - P. 54

우수한 학생들을 따로 모아놓고 가르쳐야만 제대로 수월성 교육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오히려 득보다 실이 많다는 판단에 주목해야 한다. - P. 55

다른 학생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수월성 교육이 아니라 동반 성장하는 수월성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핀란드 방식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필요하다. - P. 55


  진보적 교육 운동가의 해설이었다면 그러려니 하고 책을 집어 던져도 좋다. 하지만 사교육의 첨병에 서 있는 박재원의 문제제기와 후쿠타 세이지의 핀란드 교실 관찰은 우리에게 뼈아픈 반성의 시간을 제공한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면서 현실이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말해서는 안된다. OECD회원국의 학력을 알아보기 위한 PISA의 통계를 보면 객관적 자료를 통해 각국의 학력과 핀란드 교육의 우수성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저자는 일본 교육의 문제를 지적하고 교훈을 얻기 위해 이 책을 썼겠지만 우리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수월성 교육 문제의 핵심에 놓인 특목고와 외고 사태, 교원평가의 본질과 방법, 대학입시 제도와 대학교육의 문제 그리고 교육을 통해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것에 대해 대한민국 모든 국민은 교육 전문가다. 저자가 핀란드 교육 현장을 통해 얻은 것과 해설을 쓴 사교육의 첨단에 서 있는 박재원의 단상을 통해 대한민국 교육의 문제를 다시 한 번 돌아보자. 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우리교육이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충분히 꿈을 펼칠 수 있는 능력과 바른 인성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수능 성적표 앞에서 눈물 흘리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할 말이 없어진다. 혁명이 주는 어감이 싫다면 혁신을 사용하라. 교육혁신은 교실혁명으로부터 시작된다. 핀란드의 모든 시스템을 받아들이자는 맹목적인 추종이 아니라 우리 교육의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면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09121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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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의 이틀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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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숲과 길이 있는 곳
그곳에 구월이 있다 소나무숲이
오솔길을 감추고 있는 곳 구름이 나무 한 그루를
감추고 있는 곳 그곳에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이 있다

- 류시화의 「구월의 이틀」중에서


  나의 이틀은 언제였을까? 내 인생의 이틀은 지났을까? 아직도 오지 않은 것일까? 사람은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듯이 성인이 될 때까지 성장배경을 선택할 수 없다. 따라서 온전하게 자신의 선택과 의지로 인생을 산다고 볼 수 없다. 운명론적 세계관을 가진 건 아니지만 어쩌지 못하는 운명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말이다.

  인생은 ‘선택’이 뿐이라는 오만함을 가진 사람은 행복할까? 인간은 운명을 타고 태어나기 때문에 그것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행복할까? 환경과 유전의 관계를 놓고 벌이는 지루한 논쟁을 떠올리는 것은 우리들 인생에 대한 모호함 때문이다. 과연 어디서 어디까지 노력과 선택으로 변화 가능한 것인 인생일까? 또 찰나에 불과한 인생에서 ‘구월의 이틀’은 언제였을까? 언제 찾아올 것인가?

  장정일의 『구월의 이틀』은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책 없는 질문이 떠오르게 한다. 어떤 부모를 만나 어떤 지역에서 자랐는가에 따라 인간의 의식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 의식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고 또한 그 변화를 촉발한 사건이나 사람 혹은 계기를 고민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대한민국처럼 좁은 땅에서도 남과 북으로 갈리고 동과 서로 나뉜다. 지역적으로 특색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에 우열이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에는 우열이 있다.

  이 소설은 두 세계의 분열과 통합 과정을 꼼꼼하게 고찰하고 있다. 정과 반 그리고 합으로 변화해가는 세계의 변증법적 결합 방식을 보여주는 듯하다. 주인공 금과 은은 정이며 반이고 합이며 그 합은 또다시 정이 되고 반이 되며 합이 될 것이다. 그들이 성장한 환경과 사회적 배경은 단순하게 설명되지 않는 역사적, 정치적 함의를 담고 있다. 광주의 시민운동가 출신 청와대 보좌관 아들 금. 부산의 실패한 사업가 아들 은.

  소설은 각자 다른 사정 때문에 광주와 부산을 떠나 서울로 이사하는 두 집안을 연결시킨다. 고속도로 휴게소 커피 자판기 앞에서 처음 마주치는 금과 은. 질긴 운명처럼 혹은 계속되는 우연으로 같은 대학에 입학했고 교양 과목 시간에 처음 서로를 인식하게 된다.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이들의 대학생활은 동아리 선택 문제, 여자 문제, 진로 문제로 고민한다.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비서관이 된 시민 운동가 출신, 금의 아버지는 자살을 선택하고, 사업에 실패하고 어머니 봉양을 대가로 큰 형 집에서 외제차를 굴리며 생활하던 아버지는 가정부와 바람이 났다가 가족을 본 후 쓰러진다. 아버지 세대의 몰락은 지위와 사회적 위치와 무관하게 다음 세대에게 눈을 돌리게 한다. 은의 작은 아버지는 뉴라이트 교수다. 올드 라이트를 소개받은 은은 새로운 대학생 우파 조직에 가담하게 되고 금과 은은 우정을 넘어 사랑을 나눈다. 늙은 올드라이트 퇴직 교수와 몸을 섞는 은의 모습은 동성애와 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넘어 실제 모델을 떠오르게 한다.

‘삶의 어느 한 때를 가리켜 인생이라고 할 뿐, 일평생이 인생은 아니다.’ - P. 133

  소설의 제목은 인생의 어느 한 순간을 의미한다. 삶의 어느 한 때를 가리켜 인생이라고 한다면 나의 인생은 언제였을까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상념에 빠진다. 내 존재를 규정할 수 있는 의식을 결정했던 이틀은 언제였을까? 소설의 주인공 금과 은은 도대체 어느 순간, 어느 이틀을 만나게 된 것일까. 소설을 읽어나가다가 그 순간을 만나게 되면 고개를 끄덕여 자신의 삶을 돌아보거나 다가올 순간을 준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우연한 만남, 현실의 필연적 관계를 넘어 한 인간이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이념적 지향이나 인식의 틀을 형성하는 계기를 보여준다. 지독한 현실에 대한 반어와 풍자로 읽히기도 하고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대한 한숨과 냉소로 읽히기도 한다. ‘작가후기’에서 장정일은

그런 뜻에서 내가 가장 공들였던 인물인 은에게는 앞으로 많은 기대를 해도 좋다. 어떤 면에서는 야비하기도 하고 이중인격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은에게는 다른 인물에게는 없는 자기개발의 특성과 사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반성 능력이 있다. - P. 336

라고 말한다. 하지만 많은 기대를 하지는 않는다. 자기개발의 특성과 사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반성 능력을 나는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건강한 보수, 진정한 우파를 갈망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올드라이트나 뉴라이트가 아닌 새로운 기대화 희망을 걸어볼 만한 인물을 상상한다는 것은 그리 나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상적 좌파만큼 어려운 이상적 우파를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이분법적 시각으로 사회를 보는 것은 위험하다. 두 주인공을 통해 이 소설은 두 개의 대척점에 놓인 사람들을 그려놓고 있다. 금의 아버지나 거북 선생은 이제 금과 은으로 화하여 어떤 미래를 보여줄 것 같기는 하지만 궁금하지는 않다. 작가의 의도처럼 금과 은이 하나로 통합되거나 새로운 자각을 통해 끊임없이 발전하는 모델은 상상하기 어렵다. 허생의 ‘섬’이나 홍길동의 ‘율도국’ 만큼이나 부질없다.

  10년 만에 나온 장정일의 소설에서 읽어낸 것은 금과 은이 함께 들은 문학 강의 첫 시간(아마도 작가의 강의 경험 그대로일 것인 그것)이 주는 울림이 전부다. 본문에 나와있듯 ‘좋은 책이란, 나한테 절실한 책’이다. 깊은 성찰의 결과이거나 뚜렷한 지향점이 보이지 않아 내겐 혼란스럽게 좌충우돌하는 치기 어린 19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주인공에게도 작가에게도 기대와 희망을 꿈꾸지는 않는다.


091209-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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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정복
버트란트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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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복’이란 말이 내게 만들어준 이미지는 청마 유치환의 「행복」이라는 시의 첫 구절이다. 통영여중에서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진 청마. 딸 하나를 둔 채, 스물 한 살에 청상이 된 이영도를 사랑하게 된 청마. 그는 철벽같은 현실 앞에 좌절했을까? 건널 수 없는 강 같은 그리움에 행복했을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니라’는 기막힌 아이러니는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는 정호승의 「또 기다리는 편지」조차 청마의 「행복」에 대한 변주로 들린다. 우리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

  해가지고 을씨년스런 겨울 하늘과 아파트 지붕의 경계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떼들의 날개짓을 바라보는 이 푸른 시간이 어쩌면 내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루시드 폴의 ‘날개’를 들으며 밝음과 어둠의 경계를 내다볼 수 있는 이 작은 평화 외에 무엇이 필요할까?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은 ‘행복이 당신 곁을 떠난 이유’와 ‘행복으로 가는 길’을 알려준다. 플라톤은 ‘고통이 없는 상태’라는 최소한의 조건을 제시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행복은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것일 게다. 탁월성을 획득하는 데 아주 불구이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종류의 배움과 노력을 통해 행복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로 작은 배움과 노력으로 성취할 수 것이 ‘행복’이라고 말했다.

  70년 전에 러셀은 ‘경쟁, 권태, 자극, 피로, 질투, 피해망상, 죄의식, 여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행복이 우리의 곁을 떠난다고 이야기한다. 그에 비해 ‘열정, 사랑, 일, 폭넓은 관심, 노력’ 등이 우리를 행복으로 안내한다고 말한다. 어찌보면 단순하고 간단한 행복론이다. 그러나 러셀의 이야기는 시대에 뒤떨어졌거나 뻔한 관점으로 말할 수 있는 깊이와 넓이를 뛰어넘는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종교적인 계명에 순종하거나 세상의 기준에 맞추어서는 행복할 수 없는 자명한 진리에 도달한다. 자신의 욕구와 관심에서 벗어나서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불행의 원인을 ‘세상’에서 찾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나의 생존을 지탱해주고 나에게 행복의 기회를 제공하는 외부세계에 대한 열정과 관심을 통한 교류 없이는 행복한 삶은 불가능하다.

  당신은 행복한가? 우리는 한 번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배운 적도 없고 훈련을 받은 적도 없다. 평생 우리를 지켜줄 행복에 대한 관점을 만들고 가치관을 세우는 일이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네모난 틀에 갇혀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경쟁에서 이긴다고 해서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가 바로 행복하게 사는 것에 대한 고민이다.

  러셀은 이 책에서 어려운 철학적 용어를 사용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수다스런 말로 행복해지는 법을 달콤하게 말하지도 않는다. 깊은 자기 성찰과 세상에 대한 통찰로부터 길어 올린 사색의 결과는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과 감동을 전해준다.

행복한 인생이란 대부분 조용한 인생이다. 진정한 기쁨은 조용한 분위기 속에만 깃들기 때문이다. - P. 75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은 과로라고 하지만, 실제로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은 과로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걱정이나 불안이다. - P. 82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을 완전히 인식하면서 느끼는 행복이야말로 진정한 충족감을 주는 행복이다. - P. 119


  문장 하나하나가 벽에 붙여두고 음미할 만한 금언처럼 읽히는 책이다. 수학자이며 철학자로 행동하는 지성으로 진보적인 지식인으로 세상의 모순과 문제점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냉철하게 인식했던 20세기의 가장 명민한 인간이었던 러셀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만큼 이성과 감성을 갖춘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준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과 타인과의 관계, 세상과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나에게 러셀이 전해주는 불행의 원인과 행복의 조건은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것을 권유한다. 하루에 3천 단어 이상을 사용해서 매일 글을 썼다는 러셀의 글은 깊고 아름답다. 나를 돌아보고 삶을 반성하게 하는 『행복의 정복』은 누구에게나 권할 만한 책으로 손색이 없다. 깊은 겨울, 한 해를 돌아보고 다가올 새해를 맞이하면서 사색의 시간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꼭 필요한 책이 아닐까 싶다.

올바른 기분 전환 방법은 사고 작용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를 새로운 방향으로 돌리거나 적어도 현재의 불행과는 거리가 먼 방향으로 돌리는 것이다. - P. 246


091208-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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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독서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유시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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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와 『장정일의 독서일기』가 내 책읽기의 등대였다.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책을 읽는 과정과 방법을 배운 책이었다. 깊이와 넓이를 아우르는, 진지한 사유와 성찰이 밑바탕이 되는 책읽기의 세계는 내가 만난 어떤 세상보다도 매혹적이었으며 아름다웠다.

  세상에는 책읽기의 고수가 많다. 하지만, 양과 질적인 측면에서 골고루 책읽기에 성공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아 보인다. 책읽기에서 ‘성공’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고, 그 목적과 방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이긴 하지만 단순히 한 분야의 책 읽기 고수는 책읽기 고수라 하지 않고 그냥 해당 분야의 학자나 연구자 혹은 전문가라고 한다. 정확한 개념이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정의한다.

  기본적으로 인문학에 바탕과 뿌리를 두지 않은 책읽기는 사상누각과 같다. 모든 문제는 결국 ‘인간’의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인간의 삶과 사상의 흐름, 사회의 변화 과정을 인식하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면 무릇 책읽기는 그저 고급한 취미와 젠체하기 좋은 겉멋에 불과하다. 그래서 특히 젊은 시절의 책읽기는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형성하며 나와 타인의 관계를 조망하는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다.

  책읽기 고수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성인이 되기 전 이미 책의 바다에서 자유롭게 유영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책과 무관한 분야는 없다. 안철수와 박경철 같은 유명인을 비롯하여 체 게바라와 같은 혁명가에 이르기까지 활동 분야를 전문분야와 활동 분야를 막론하고 책은 모든 영감의 원천이며 행동의 출발이고 사상의 은사라고 할 수 있다.

  나이 오십쯤 되어 내 인생의 책을 정리하고 싶은 욕망이 나에게도 생길지 모르겠지만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를 읽는 내내 말할 수 없는 공감과 감동의 물결이 밀려왔다. 지식소매상을 자처하는 사람답다. 겨우 열네 권을 추렸지만 그의 책읽기와 글쓰기 내공은 씨줄과 날줄처럼 촘촘하고 정교한 그물처럼 짜여있다. 한 사람의 내밀한 영혼의 지도를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뼛속까지 드러내는 일이다. 작가의 구석구석을 탐욕스럽게 샅샅이 훑어내는 나의 시선이 오히려 섬뜩하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까지 다시 읽어내면서 유시민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의 ‘청춘’이 궁금한 게 아니라 지나온 시간과 흘러간 세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가치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인간이 지켜야할 진정한 가치와 고전의 눈부신 문장들을 함께 읽어보고 싶었다. 수많은 책에 관한 책 중에서도 『청춘의 독서』가 빛을 발하는 이유는 바로 냉정하고 합리적인 이성과 날카로운 비판정신 그리고 따뜻한 감성이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이제 갓 세상에 나가 길을 찾는 딸에게’ 바쳐진 이 책은 험한 세상에 첫 발을 내딛는 딸에게 들려주는 아버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면바지 차림으로 국회에 서서 양복쟁이 국회의원들에게 신고식을 당하던 유시민의 어색한 표정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를 조금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그런 그가 이제 오십이 넘었고 그의 딸은 스무살이 되었다. 그렇게 옳은 말을 말을 그렇게 싸가지 없게 할 수 있는 그의 소신에 박수를 보냈지만 정치적 행보와 색깔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유시민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가 교차한다. 하지만 스물 여섯에 감옥에서 쓴 ‘항소이유서’를 읽으면서 그의 글을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리영희 선생은 말한다. 진실, 진리, 끝없는 성찰, 그리고 인식과 삶을 일치시키려는 신념과 지조. 진리를 위해 고난을 감수하는 용기. 지식인은 이런 것들과 더불어 산다. 선생의 글을 다시 읽으니 선생이 내게 묻는다.
너는 지식인이냐. 너는 무엇으로 사느냐. 너는 권력과 자본의 유혹 앞에서 얼마나 떳떳한 사람이었느냐. - P. 48


지적 활동 중단 선언을 하신 리영희 선생님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다시 읽고 스스로 던진 질문이 아프게 와 닿는다. 평범한 생활인인 내가 가져야하는 부담과 고민만큼만 다른 사람도 가질 수 없을까 싶은 생각을 했다. 오래된 청춘의 지도를 들여다보는 작가 옆에서 그 지도를 함께 들여다보는 즐거움으로 며칠을 보냈다. 고마울 따름이다.

  읽었던 책은 다시 읽고 미처 읽지 못했던 몇 권의 책은 당장 읽고 싶어졌다. 책이 우리에게 전하는 말들을 얼마나 귀 기울여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나는 그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같은 책을 읽고 같은 학교를 다니고 같은 직장을 다녀도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과 삶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중요한 삶이 되기를 희망한다. 시간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보수주의는 사회의 부유하고 명망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기 때문에 영예로운 장식적 가치를 얻는다. 이것이 더 심화되면 우리의 관념 속에서는 보수적 견해를 고수하는 것은 당연히 존경받아야 할 대상으로 평가된다. (……) 보수주의는 상층계급의 특징이기 때문에 품위가 있는 반면, 혁신은 하층계급의 현상이기 때문에 저속(vulgar)하다.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사회적 혁신을 외면하게 만드는 그 본능적 반발과 비난의 가장 단순한 요소는 사물의 본질적 비속성(vulgarity)에 대한 관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혁신자(innovator)가 대변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그가 치유하려는 악이 시간적 ․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거나 개인적으로 접촉할 가능성이 없을 때 이런 경우가 생길 수 있다.) 그 혁신자는 교제하기에는 불쾌한 인물이며 무릇 그와 접촉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혁신은 나쁜 것(bad form)이다. - P. 244(『유한계급론』, 179쪽)

  읽지 않은 책 중에 가장 읽어 싶어진 책 중의 하나다. 보수와 진보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태도를 이렇게 적확하게 짚어낼 수 있을까 싶다. ‘혁신자는 교제하기에는 불쾌한 인물이며 무릇 그와 접촉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는 사실’을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뼈아픈 지적이지만 ‘혁신은 나쁜 것’이라는 말은 지루한 세상에 던지는 불타는 구두같은 말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풍자가 지나치면 눈물을 자아낸다.

  혁명 전사도 투사도 아닌 내가 이 책을 읽는 동안 몇 번이나 가슴 밑바닥부터 아려왔다. 지치고 힘들 때, 포기하고 싶을 때, 나약해지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두고두고 생각해 볼 책이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믿지 않는다면 시대를 견딜 힘조차 내겐 없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가끔 두렵고 외로운 밤이 찾아온다.

“역사와 사회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어떤 자동적인 또는 불가피한 진행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인간 능력의 계속적 발전에 대한 믿음”(E. H. 카, 『역사란 무엇인가』중에서)이라고. 이 믿음만 있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그의 격려를 받아들여야 할까? - P. 312


09120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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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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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유동이 바로 모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절대로 한곳에 머물지 않는…… 물 속에서도 공기 속에서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그래서, 살아 있는 생물은 보통 모래 속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것입니다…… - P. 32

  자연은 영원히 예술의 고향이다. 안타까움과 그리움의 감정으로 자연을 바라보기도 하고 자연이 주는 경건함을 표현하는 예술은 어쩌면 수없이 반복되는 과거일 뿐이다. 내가 알고 있는 대상에 대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일반적인 편견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특별한 혜안을 갖고 있지 않다면 산도 바다, 하늘과 강, 나무와 꽃도 피상적인 모습으로만 우리에게 인식된다.

  모래의 생명이 유동이란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유목적 특성을 가진 모래는 언제나 자유롭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위대한 문학은 정신이 번쩍들게 하는 각성을 준다. 그런 면에서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는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사춘기에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까뮈의 『이방인』만큼 특이하고 인상적이다. 번역서가 가지고 있는 한계, 문장에 대한 의심을 떨쳐버릴 만큼 단숨에 책장이 넘어갔다. 이 책을 소개해 준 겨울님께 감사한다.(세상에 얼마나 많은 좋은 책이 있는 줄도 모르고 죽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안타까운 일인데 책을 권해주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바닷가 사구의 한 마을로 곤충채집을 하러갔던 한 사내. 그는 모래 속에 사는 여인의 집에서 하룻밤을 신세지게 된다. 그러나 그는 영원히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사내의 실종. 도대체 그는 모래로 된 굴 속 같은 집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낼 수 있는지 상상해보자. 모래로 뒤덮여 있는 곳에서 혼자 살고 있는 서른 남짓의 여인. 하룻밤을 신세 지게 된 남자가 다음 날 그녀는 전라의 몸으로 얼굴에 수건을 덮고 잠들어 있다. 기이한 광경일 수밖에 없다. 남자도 곧 익숙해지고 그 이유도 알게 된다. 살기 위해 모래를 퍼올리고 또 그렇게 생존하는 일상을 터득하게 되는 주인공.

  하지만 주인공은 끊임없이 탈출을 꿈꾸고 실제로 마을 밖으로 탈출할 뻔 한다. 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벗어날 수 없는 운명 같은 게 있다면 인생에서 발버둥쳐 봐야 소용없는 노릇이다. 숙명은 믿지 않지만 자신의 한계와 상황은 믿는다. 인연도 우연일 뿐이지만 그것이 자신의 삶이 되기도 하며 한 곳에 머물지 않는 모래가 가장 자유롭게 떠돌고 싶은 영혼을 가둘 수 있다는 아이러니! 이 소설의 기이함은 등장인물들의 태도가 아니라 모래의 속성같은 인간들의 관계에 있는지도 모른다.

모래  암석 파편의 집합체. 때로 자철광, 주석, 그리고 간혹 사금을 포함하고 있다. 직경 1/16~2mm.

  본문에 적혀있는 가장 객관적이고 사전적인 모래의 정의가 오히려 생경하다. 작가는 이 모래의 힘과 흐름을 모래의 기본적인 속성과 정직함을 따라간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사막이 끈적하게 피부에 달라붙는 땀방울과 한여름의 뜨거운 모래와 쉴새 없이 그 사이를 파고드는 바람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입안에서 서걱이며 씹히는 모래알갱이의 참을 수 없는 이물감처럼 낯설고 공포스런 주인공의 변신이 벌레로 변해버린 그레고르 잠자보다 우울해 보였다.

  이 소설의 매력은 모래와 여자 그리고 평범한 일상을 벗어난 교사인 남자의 관계에 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모래를 받아들이고 모래에 순응하며 새로운 기대와 희망을 버리지 않는 여자, 타의에 의해 여자와 동거하게 된 남자의 몸부림.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서 두 사람의 태도는 사뭇 진지하다. 모래는 여자에게 생활이며 고통이고 숙명이자 삶이다. 그러나 남자에게는 구속이며 죽음이고 욕망이자 소멸이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무엇을 말하려 했든 나는 맨 처음 까뮈가 떠올랐다. 앞서 말한 대로 『이방인』, 『시찌프스의 신화』의 강렬함이 생각났다. 하지만, 책장을 덮고 책 뒤표지를 보고 웃고 말았다. 그런 생각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던 듯. 영화로 만들었다는데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뒤적거려보거나 찾아봐야겠다.

어쩌면, 형태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야말로, 힘의 절대적인 표현이 아닐까……. - P. 36

  절대적인 힘은 어떤 형태를 갖고 있지 않다는 통찰력 있는 문장이 눈에 들어온 것은 최근의 상황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를 지켜내는 힘과 의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가치에 대한 판단 기준이 아니라 행동과 신념에 대한 기준은 스스로 지켜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아니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중요하다는 걸 알지만 내게 그런 역량까지 주어지진 않은 모양이다.

  모래 구덩이에서 세상에서 가졌던 직업에 대한 소회를 밝히는 장면이 나온다. 교사였던 주인공이 선생들에 대해 평가해 놓은 장면이다. 매우 인상깊다. 그리고 적확하다.

실제로 선생들만큼 질투의 화신에게 매달리는 존재도 드물다……. 학생들은 해마다 강물처럼 자기들을 타고 흘러가는데, 선생들만 그 흐름의 밑바닥 깊이 박혀 있는 돌멩이처럼 남아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에게 희망이란 타인에게 얘기하는 것이기는 해도 스스로 꿈꾸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기를 쓰레기 같은 존재라 여기고 고독한 자학 취미에 빠지든지 아니면 타인의 일탈을 고발하는, 의심 많은 도덕군자가 된다. 자유로운 행동을 공경하는 나머지 자유로운 행동을 증오하지 않을 수 없다……. - P. 78

  스스로 꿈꾸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 한 군데 뿌리박힌 돌멩이는 되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럴 바엔 차라리 직업을 바꾸어야 하지 않겠는가. 적어도 선생이란 직업이 먹고살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되는 게 아닌가 말이다. 선생이 모래의 남자가 되어 원초적인 삶을 살게 되었을 때, 말과 행동이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 구경하는 즐거움은 다분히 가학적이다.


09120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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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09-12-02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고는 그의 작품이 너무 궁굼해졌었는데요. 유감스럽게도 읽을 수 있는 책이 많지는 않더군요.<타인의 얼굴>도 아주 재미있었어요.

sceptic 2009-12-08 20:07   좋아요 0 | URL
권해주신 책도 읽어봐야겠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