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어두운 저편 창비시선 308
남진우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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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내 그대에게 사랑을 고백함은
입속에 작은 촛불 하나 켜는 것과 같으니
입속에 녹아내리는 양초의 뜨거움을 견디며
그대에게 보이는 것과 같으니

아무리 속삭여도
불은 이윽고 꺼져가고
흘러내린 양초에 굳은 혀를 깨물며
나는 쓸쓸히 돌아선다

어두운 밤 그대 방을 밝히는 작은 촛불 하나
내 속삭임을 대신해 파닥일 뿐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의 시간을 가질 때 우리는 흔히 촛불을 켠다. 그대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거울어 비추어볼 때도 촛불을 켠다. 사람들은 흔들리는 촛불에 자신을 투영하는 것이다. 내 속삭임을 대신해 파닥이는 촛불을 들여다보고 싶은 시간이다.

  남진우의 『사랑의 어두운 저편』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내밀한 고백이다. 수없이 말해왔지만 한 번도 말해 본 적이 없는 것같은 그 ‘사랑’에 대하여. 어떤 대상에 대한 몰입과 거리두기는 서로 모순된 듯 싶지만 팽팽한 긴장의 끈을 유지할 수 있다면 지속적인 영원한 사랑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서편 하늘을 물들인 저녁 하늘은 생의 이면을 반추케한다.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고단한 길을 걷다가 잠시 쉬어야하는 나그네처럼 사람들에게 시는 한 모금의 약수처럼 생기와 탄력을 불어 넣는다. 눈에 보이는 세계의 현란한 영상을 잠시 차단한 채 내면의 울림에 귀 기울여보는 시간이 바로 시를 만나는 시간일 게다.



누런 먼지 날리는
사막 입구에서 문득
뒤돌아보며 너는 물었다
얼마만큼 걷고 걸으면 출구가 나올까

전갈 한 마리 소리없이 네 발뒤꿈치에 다가와
가만히 물고 지나갔다

사막 입구 쓰러진 네 몸 위로
둥근 달이 떠올랐다
멀리 출구에서 불어온 한줄기 바람이
네 귀에 뭐라고 속삭이고 지나갔다


  출구없는 생. 입구는 더더욱 찾을 수 없을만큼 걸어왔다. 문득 고개 들어 주위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외로움 너머에 고독의 진저리. 둥근 달이 너에게 뭐라고 속삭였든 나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한줄기 바람처럼 고즈넉한 시간이 흐르고 나면 한 생은 찰나였음을 짐작하겠지.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2막 3장 Tableau Ⅲ. 액자속의 그림처럼 정지 화면들이 스치는 시간도 금방 올 것만 같다. 얼마나 많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나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는 메모를 들여다 보는 시인의 심정을 헤아리는 순간이 오리라 믿는다.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날
낡은 수첩 한구석에서 나는 이런 구절을 읽게 되리라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랬던가
너를 사랑해서
너를 그토록 사랑해서
너 없이 살아갈 세상을 상상할 수조차 없어서
너를 사랑한 것을 기필코 먼 옛날의 일로 보내며 보내버려야만 했던 그날이
나에게 있었던가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한사코 생각하는 내가
이토록 낯설게 마주한 너를
나는 다만 떠올릴 수 없어서
낡은 수첩 한구석에 밀어넣은 그 말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 말에 줄을 긋고 이렇게 새로 적어넣는다
언젠가 너를 잊은 적이 있다
그런 나를 한번도 사랑할 수 없었다


  그런 순간이 온다면 한 번도 나를 사랑할 수 없었다는 자기 부정이 지독한 역설로 들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언제나 먼 곳의 그리움을 가슴에 담고 그대 가까이! 손 닿을 수 없는 너의 몸을 향한 열망과 안타까움이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생은 그렇게 아쉬움과 한숨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깨달으며 하루하루를 감사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나는 사라진 너를 찾아 몸을 돌리지 않겠다.

그대에게 가까이

너의 몸은
내 손으로는 가닿을 수 없다
바로 지금 내 앞에 있는 이렇게 미소짓고 있는 너를
나는 만질 수도 껴안을 수도 없다

점점 푸르러지는 달빛 한가운데
너는 서서 내게 말한다 나는 추워…… 너무 추운 곳에 있어
바람 한점 없는 고요 속에서
너의 옷자락은 쉴새없이 펄럭이고
한 걸음 너를 향해 옆으로 돌린 채
너는 더욱 아득한 거리로 멀어져갈 뿐
서리처럼 네 몸에 차갑게 입혀진 달빛을
나는 걷어낼 수가 없다

나는 추워…… 너무 추운 곳에 있어,라고 속삭이는
네 입가에 가느다란 피가 흐르고
약속처럼 멀리서 종소리가 울려퍼진다

무성한 달빛을 헤치고 나는 마침내
네 곁에 다가선다 두 손으로 너의 얼굴을 감싸고
두 팔을 벌려 너를 가슴에 가둔다
내 팔에 감겨들었다가
달빛과 함께 부서져 손가락 사이로
덧없이 흘러내리는 네 얼굴 네 가슴

지상에서 가장 추운 곳
너무 추워 하얀 입김조차 얼어붙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나란히 쓰러져 눕는다
점점 푸르러지는 달빛 저편
물무늬로 아른대는 너의 미소를 떠올리며
나는 사라진 너를 찾아 몸을 돌린다



09123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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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읽기의 혁명 2 - 경제를 읽어야 정치가 보인다 신문 읽기의 혁명 2
손석춘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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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균형잡힌 지식인. 사람마다 꿈이 있고 희망이 있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고 사회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균형을 잃지 않는 통찰력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나로부터 시작해서 타자와 세계의 관계망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을 둘러싼 역사적 인과관계와 사회 현상에 대한 학습은 반드시 필요하다. 토대를 구축하고 나면 종횡무진 누빔과 가로지르기가 가능해질 것이다. 진정한 지식과 혜안은 하루 아침에 얻어지지 않으며 거시적인 관점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다.

  사람의 생각은 지극히 편협할 수밖에 없다고 전제하면 역지사지가 가능해지고 똘레랑스가 위력을 발휘한다. 모두 내 생각과 같을 수 없고 판단의 근거가 합리적이고 논리적일 수도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가끔 벽에 부딪치기도 하지만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닐 때가 있다. 책을 읽고 사람을 읽고 세상을 읽는 것은 우리 삶의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지난한 고통과 한숨, 좌절과 절망이 기다릴 때도 있고 벅찬 감동과 희망찬 미래를 만날 때도 있다. 그 길이 즐겁고 행복하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함께 걸어갈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믿음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세상을 읽는 중요한 도구 중 하나인 신문은 여전히 우리의 의식을 규정한다. 어느 신문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볼 것이냐가 문제다. 손석춘은 『신문 읽기의 혁명』1권에서 편집된 신문지면을 해체해서 재구성하라고 주문했다. 신문은 편집이다. 어떤 기사를 선택해서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신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문 기사의 내용은 편집 방향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수많은 독자들에게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이 책의 2권이 13년에 출간되었다. 1권의 핵심이 ‘편집’이었다면 2권의 중심에는 ‘경제’가 놓여있다. ‘경제를 읽어야 정치가 보인다’는 부제는 책 전체를 요약한다. 정치와 경제를 분리해서 섹션별로 신문을 구성하는 방법이 보편적이지만 저자는 경제를 통해 정치를 읽어야 한다는 논리다. 경제가 수단이고 정치가 목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통합적이고 유기적인 신문읽기를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2009년 12월 28일은 UAE에 47조원에 달하는 원전을 수출한 내용이 주요기사다. 하지만 조선일보와 한겨레의 사설은 서로 다른 시각에서 이 문제를 바라본다. 조선일보 사설의 제목은 사설 ‘우리 기술과 정상 외교 기량이 만나 일군 47조 원전 수출’이지만, 한겨레는 ‘원전 수출이 달갑지만은 않은 이유’라는 제목의 사설을 싣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외교력과 경제적 효과에 초점을 맞춘 내용과 지속가능한 에너지로 볼 수 없는 원전에 대한 우려를 담고 있는 내용이 그것이다. 경제라는 잣대로 개발과 환경 문제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두 신문의 관점은 서로 다르다. 이에 대해 오마이 뉴스는 ‘불안한 한국형 원전, 위험까지 수출?’로 표현하고 있으며, 미디어 오늘은 각 진영의 논쟁을 ‘원전수주 반대한 한겨레 폐간하라’로 정리하고 있다.

  경제면을 넘어서야 경제가 보이고 광고를 읽어낼 수 있어야 본격적인 신문읽기가 시작된다. 정치와 경제는 우리 사회를 받치는 두 개의 기둥이다. 신문의 품격은 결국 ‘진실’의 문제로 귀결된다. 정치와 경제 논리로 정파적 신문 읽기를 유도할 수는 없다. 그 함정에 빠질 때 독자들은 바보가 되고 개인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을 혼돈하고 국가의 이익이 결국 누구의 이익인지 헛갈리기 시작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신문 깊이 읽기의 세 지층으로 세계화, 민중, 이해관계를 제시한다. 현실적인 신문읽기의 잣대를 들이댄 것이다. 오늘 신문은 내일의 역사가 된다. 매일매일 쏟아지는 뉴스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어떤 기준으로 신문을 꼼꼼히 살펴야 할 것인가는 독자의 몫이다. 인터넷 신문의 약진, 신문재벌의 방송진출 등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을 제대로 읽을 수 있으려면 스스로 학습하는 길밖에 없다. ‘카더라’ 통신에 바보가 되지 않으려면 주권시대의 신문 읽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책을 끝맺는다.

  우리 개개인이 누군가가 정해놓은 틀 속에서 평생 살아가는 게 아니라 주체가 되어 자아를 더 풍요롭게 실현해가는 주권혁명 시대를 우리는 맞고 있다. 신문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평생학습의 무기가 될 수 있다.
  자신의 경제생활을 단순히 ‘취업’이나 ‘호구지책’으로 여길 게 아니라 정치생활과 연결 짓는 다리로 신문을 읽으며 새로운 사회의 주체로 자기를 창조적으로 형성해갈 때, 그때 신문 ‘읽기의 혁명’은 곧 ‘혁명 읽기’다. 그때 신문 읽기는 예술이다. - P. 280



091228-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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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거짓말 창비청소년문학 22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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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 - 오래두고 사귄 벗. 영화 <친구>에서 준석과 동수처럼 적이 될 수도 있는 사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친구는 추억의 섬에서 언제든 불러낼 수 있는 기억의 창고 같은 존재다.  이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림자처럼 평생 함께 할 수 있는 관계가 친구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보다 시간을 견디고 오래 곁에 있는 벗에게 말할 수 없는 신뢰를 갖는다. 허물없는 친구 두엇만 있으면 그렇게 사람이 그립지 않다.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깊이가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관계가 바로 친구다.

  그러나 가끔은 친구와 싸우기도 하고 배신을 당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 친구는 더욱 그렇다.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도 달라지고 서로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적어지면 멀어지는 경우가 있다. 자주 만날 수 있고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친구라야 오래오래 우정을 만들어갈 수 있다. 혹자는 동성에 대한 사랑이 우정이라고 말했지만 어떤 의미에서 우정은 사랑보다 넓고도 깊은 감정이다. 하지만 사소한 감정의 대립, 시기와 질투로 친구 관계도 깨질 수 있다. 그래서 그 모든 상처들을 견뎌내고 오래 사귄 벗을 친구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2008년 청소년 소설 분야에서 돌풍을 몰고 온 『완득이』의 작가 김려령. 새 소설 『우아한 거짓말』에서 작가의 목소리는 조금 가라앉았다. 가볍고 즐거운 시트콤 같은 『완득이』의 성공 요인은 경쾌함이었다. 이상적인 담임 ‘동주’의 인간적인 면과 복합적 사회 문제의 결정체 ‘완득이’의 만남은 웃음과 감동의 비빔밥이었다. 널리 사랑받는 작품이 갖추어야 하는 요소를 적절하게 갖춘 소설이라는 말이다. 그에 비해 『우아한 거짓말』은 조금 진지하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 왕따 문제를 다룬 소설들은 아주 많다. 이 소설도 왕따라는 소재의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먼저 한 부모 가정의 자매 중 동생이 자살하고 그 자살의 원일을 찾아가는 과정은 새로울 것이 없는 방법이다.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대안을 찾는 것이 소설의 미덕은 아니지만 이렇게 구체적인 사례 중심의 소설은 감동도 크지 않고 사회적 의제도 던지지 못한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진 않지만 대체로 화목한 가족이기 때문에 언니의 무관심이 자살의 원인 중 하나로 지적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결국 자살의 가장 큰 원인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전학 오면서 친해진 화연이다. 집단적이고 직접적인 따돌림이 아니라 화연의 은근한 놀림과 주변 아이들의 동조와 방관. 어느 또래 집단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쉽게 넘어갈 수는 없지만 성적도 우수하고 자기 생각도 분명하지만 ‘착한’ 아이가 자살할 정도로 심각했다는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하고 작은 일로도 사람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소설의 주인공인 천지는 언니 만지와의 관계나 화연, 미라와의 관계만으로 우울증에 시달렸고 자살을 하게 되었다고 하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넓은 의미에서 이 소설은 성장 소설보다 심리소설로 볼 수도 있다. 전학 후에 절친한 친구에게 당한 모멸감의 누적과 심리적 고통, 우울증으로 인한 불안 등이 자살의 원인이었다면 학교 폭력이나 왕따 문제를 다룬 청소년 소설이 아니라 청소년기의 심리적 갈등과 그 원인을 탐구하는 소설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느 쪽이든 작가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벌어질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어 독자들은 마음이 불편하다. 주인공 천지의 심리가 직접 서술되고 엄마와 언지 만지, 옆집 아저씨 오대오(별명), 화연과 그의 부모, 미라와 미란 자매 그리고 아버지 곽만호와의 관계가 그물처럼 얽혀있다. 인물들 사이의 관계는 철저하게 천지를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으며 모든 것이 천지의 자살 원인을 밝히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소설 첫머리에서 죽음을 던져 놓은 작가의 모험은 성공적으로 보인다. 수렴적인 방식으로 모든 인물들의 심리와 사건들이 하나로 모아지기 때문이다.

  외면하고 싶은 진실 앞에서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다. 누가 죽었는지 어떻게, 왜 죽었는지 궁금할 뿐이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천지의 언니 만지는 화연에게 화해와 용서의 손길을 내민다. 천지의 죽음을 통해 진실이 무엇인지 가려내는 것보다 어쩌면 살아남은 사람들의 상처와 앞으로의 삶에 무게를 둔 것 같기도 하다. 그 의도야 무엇이든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그 관계에서 생긴 고통은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다만 그것들을 보듬고 시간에 맡겨 모른 척 가슴에 묻어두기도 하는 것이 생의 진실은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그저 우리 아이들의 미래의 희망이라는 판에 박힌 찬사만 늘어 놓는다. 왜 그들이 우리의 미래인지 그 미래가 어떠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는 것 같지는 않다. 내 아이의 미래만 중요한 부모와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남는 사회에서 우리 아이들은 오늘 어떤 모습으로 생활하고 있으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반성해 보자. 한 아이의 자살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은 작가는 결국 ‘우아한 거짓말’이 아니라 소박한 진실을 들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 불편한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은 바로 우리 아이들의 현재와 우리 교육의 미래를 성찰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으로 읽혔다. 가족의 울타리 너머 조금만 더 넓게 그리고 멀리 내다보면 참 많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 아이를 바라보던 눈을 들어 주변의 아이들을 돌아보자. 그러면 내 아이의 진실이 보일지도 모른다.


09122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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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의 말할 권리를 지지한다 - 불통의 시대, 소통의 길을 찾다
정관용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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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컵에 물이 반밖에 안 남았네’와 ‘컵에 물이 반이나 남았네’. 어렸을 때 긍정적인 사고방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누군가에게 들었던 문장이다. 이 문장은 여전히 사용된다. 두 문장은 동일한 현상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반 ‘밖에’와 반 ‘이나’는 주관적 판단이다. 객관적으로 반이 남아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태도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이 전개된다.

  ‘밖에’는 불안하고 초조하다. 부정적 사고방식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비판적인 관점에서 미래를 준비해야 하며 물이 없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물을 대신 할 수 있는 것은 없을까 고민도 하고, 물이 줄어들지 않도록 절약하고 지속 가능한 삶에 대해 생각도 해야 한다.

  ‘이나’는 여유있고 행복하다.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라고 배웠다. 하지만 다양하고 폭넓은 사고가 부족하고 단순하고 좁은 시야를 갖기 쉽다. 대책없이 낙천적인 태도가 가져올 위험은 부정적 사고보다 훨씬 심각하다. 치밀하고 정교한 계획없이 남은 물을 과신하다보면 정작 필요한 순간에 물을 사용하지 못하고 낭패를 당할 수가 있기 때문에 보다 신중하고 거시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밖에’와 ‘이나’가 만나 토론을 나눈다고 가정해 보면 서로를 이해하기 어렵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흔히 TV를 통해서 지켜보는 토론 프로그램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담고 있는 정관용의 『나는 당신의 말할 권리를 지지한다』는 우리 사회의 대화와 토론 문화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담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토론 프로그램 진행자로 일해온 저자는 참 할말이 많은 듯하다. 손석희라는 스타급 진행자에 가려 그 인지도나 인기 면에서 조금 떨어지지만 그의 중립적인 진행자의 자세와 진행 솜씨는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이 책에는 손석희의 추천사가 붙어있다. ‘자아갈등을 넘어 소통으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곧 나올지 모를 손석희의 토론 책도 기대한다.

  실제 가정이나 직장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상대를 인정하는 것이다.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전제, 내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가정은 얼마나 어려운가. 열린 마음이란 바로 이 생각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 사회에서 2차적인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최소한 ‘똘레랑스’는 필요하다.

  똘레랑스는 대립하는 주장과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주장을 위해 서로 격렬하게 논쟁한 후 도저히 상대의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없다고 여겨지면 별수 없이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논쟁으로 풀리지 않는 상대방의 확고한 의견이나 생각을 굳이 바꾸려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똘레랑스는 다분히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관용이다. - 하승우,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 39페이지
 
  ‘토론’이란 하나의 주제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주장을 펼치면서 합의를 이루거나 공통의 이해 기반을 넓혀 가는 과정이다. 이렇게 하주 간단한 정의지만 토론에 관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러나 ‘합의’까지는 아니더라도 공통의 이해 기반을 넓혀가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절감하고 있다. 특히 정치인들의 토론은 지켜보는 사람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칠 우려가 있다.

  귀를 막고 자신이 준비해 온 이야기만 하는 토론자, 상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실수를 찾는데 혈안이 돼있는 시청자 그 누구도 ‘합의’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매체의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 시청률과 형평성에 목을 맨 토론 프로그램을 잊어야 진정한 토론이 시작된다. 그래서 저자는 방송토론을 잊으라고 주문한다. 왜 대한민국은 불통 공화국이 되었는지 짚어보고 적대적 공존관계에 빠진 한국 정치와 언론의 문제점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소통하는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정관용이 제시하는 대안들이 바로 이 책의 핵심이 될 것 같다. ‘회색지대’에서 미래를 찾자는 사례 한 가지라도 고민하며 들어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진다. 여러 가지 방법론은 우리의 척박한 토론 문화에서 필요한 도구들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소통의 구조 안에서 그리고 인간관계의 틀 속에서 고민해야 하는 문제들이다. 조금 더 넓고 깊게 들여다보려는 인식의 힘보다 조금 더 많이 낮게 가슴을 열어야 한다. 공정한 말과 열린 가슴이 아니라면 토론은 시작부터 불가능하다. 소통의 벽을 넘는 곳에서 사회의 발전은 시작된다고 믿는다. 볼테르의 말처럼 제발 이제는 최소한 ‘말할 권리’ 만이라도 갖고 살고 싶다. 어쩌면 소통과 토론은 그 다음의 문제다. 1차적인 권리조차 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주변을 돌아보자. 아니, 그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또한 얼마나 많은가.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그 말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지키기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다. - 볼테르(1694~1778)


091218-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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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성장의 유혹 - 글로벌 식품의약기업의 두 얼굴
스탠 콕스 지음, 추선영 옮김 / 난장이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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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 자동차 타지 않기를 실천해 옮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년에 세운 유일한 계획 중 하나는 자전거 많이 이용하기다. 직장이 자전거로 출퇴근하기 적당한 거리에 있는데도 자동차를 포기하지 못하는 건 순전히 게으름 탓이다.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는 이반 일리히의 말을 실천하려는 게 2010년의 계획이다. ‘책읽기는 실천이다, 지식은 실천이다’라고 외치면서도 지키지 못한 것들을 이제는 행동에 옮겨야 한다.

  스탠 콕스의 <녹색성장의 유혹>을 읽으면서 인간답게 살 권리에 대해 생각했다. 둘 이상이 모여 사는 모든 사회에 발생할 수밖에 없는 권력 관계와 기득권에 관한 단상을 적어볼까 하다가 살아 있는 동안 건강하게 그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엉뚱한 생각의 흐름이지만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최소한의 ‘선택’ 문제라고 생각했다. 자연의 위대함에 비춰보면 정말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오만함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만일 그 계획이 성공한다면, 높아진 에너지 효율성은 경제 확장에 기여해서 결국 더 많은 에너지 소비나 더 많은 탄소 배출로 이어진다는 제본스 패러독스Jevons Paradox를 입증하는 또 하나의 사례로 기록될 것입니다. 사실상 이러한 시도는 구시대적이고 무모한 산업 확장을 녹색 페인트와 첨단 기술로 포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 한국의 독자들에게

  과연 이것은 이념의 문제일까? ‘저탄소, 녹색성장’을 주창한 이명박 대통령의 녹색 거품에 대한 저자의 경고는 단호하다. 바이오 연료, 태양전지, 원자력 에너지, ‘친환경’ 자동차, LED 전구를 아우르는 정부 주도의 계획들은 과연 제본스 패러독스를 극복할 수 있을까? ‘녹색성장’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녹색과 성장은 합쳐질 수 없는 바탕을 갖고 있다. 다만 현실적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항변할 수 있지만 본질적인 문제를 외면한 채 눈감고 머리만 낙엽에 처박은 꿩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환경과 생태 문제는 이념과 무관한 듯 무관하지 않다.

  성장과 개발론자들이 ‘녹색’으로 포장하는 위장 전술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4대강 사업의 본질, 세종시 논란의 핵심은 자연이냐 인간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 보자. 이기적 욕망을 부정할 순 없지만 지역 이기주의와 국가 대계 그리고 환경과 개발 사이의 위험한 줄타기는 오늘도 계속된다. 결국 적당한 타협과 포기로 귀결될 것이 뻔하다.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위로와 자책도 쏟아질 것이다. 조금 더 멀리 내다보자. 환경 자체가 이념이 되어야 한다. 제본스 패러독스를 기억하자.

  ‘글로벌 식품의약기업의 두 얼굴’이라는 부제는 낯설지 않다. 전 지구적 양아치적 행태에 대해 모르는 바 아니고 오로지 자본과 성장의 논리로 저개발국에 가하는 폭력(?) 수준의 기업 행태를 하루, 이틀 접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다만 이런 현실이 어떻게 지속 가능하며 저지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는 고민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만이라고 널리 알리고 싶어졌다.

  공정무역이나 공정거래 커피, 공정 여행에 관한 인식이 점차 싹트고 있는 현실에서 병원산업이나 제약회사의 탐욕과 두 얼굴에 대해 직시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의사들의 기득권과 제약회의의 약 팔기 권법 그리고 끊임없이 환자를 생산하고 불안 마케팅을 통해 병원과 약의 노예가 되어야 하는 현대인들의 관계는 암울하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질병 부풀리기와 환자와 의사를 상대로 한 영업 전략을 통해 글로벌 식품의약기업의 생태를 고발한다.

  전체 10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주제는 하나로 모아진다.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결국 건강한 우리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지속가능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는 스스로 반성할 필요가 있다. 하루의 생활을 돌아보자. ‘환경’을 보존하고 지키려는 노력까지는 아니어도 더 많이 파괴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물론 이 문제가 개인의 도덕에 의존할 문제는 아니다.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선진국이 나서지 않는다면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미국과 중국은 전세게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40%를 내뿜고 있다. 건강한 지구인의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문제로 귀결된 것이다.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다가 이유진(녹색연합 기후에너지 국장)의 칼럼 ‘지구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일주일’이 목에 걸렸다.

  사회적 의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바쁜 생활인의 입장에서 보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곧 내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내 삶을 좌우할 수 있는 현실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자각해야만 한다.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완고한 현실의 벽이 조금씩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를 인식하는 순간 이미 변화는 시작된다고 믿는다. 그것을 외면하고 개인적 이익을 계산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다. 하지만 조금 만 더 생각해보면 그것이 결국 커다란 손해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녹색은 성장과 한 이불을 덮을 수 없다. 아무리 유혹해도 녹색은 성장을 사랑할 수 없는 슬픈 운명이다.


091215-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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