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속는 이유 - 똑똑한 사람을 매혹하는 더 똑똑한 거짓말에 대하여
대니얼 사이먼스.크리스토퍼 차브리스 지음, 이영래 옮김 / 김영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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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속는 건 속이는 사람이 나쁘지만 두 번 속는 건 속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는 지적은 타당한가. ‘속는다.’라는 우리 말에는 사기, 착각, 오류 등 다양한 상황을 함유한다. 살다 보면 사기꾼에 속거나 보이스피싱을 당하고, 스스로 상황을 오판하기도 하고, 단순한 실수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사람과 상황에 속거나 자기 자신을 속이거나 결과는 다르지 않아도 해석과 대책은 명확히 구별해야 한다. 인지 심리학자 대니얼 사이먼스와 크리스토퍼 차브리스는 이와 같은 인간의 ‘심리’를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대상은 ‘속는 사람들’이다. 속이는 사람이나 속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니다. 속는 사람들의 속성과 심리 상태 분석은 평범한 일상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고민과 자책의 실마리를 덜어준다.

속임수의 출발은 ‘진실 편향truth bias’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처음 보는 사람을, 그 사람의 말을 믿는다. 디폴트 값인 인간의 각종 ‘편향’은 생존을 유리하게 진화했을 거라는 추정들에 힘이 실린다. 말콤 글래드웰은 『타인의 해석』에서 “우리는 이 결정이 아무리 끔찍한 위험을 수반하더라도 진실을 기본값으로 놓는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으면 사회가 굴러가지 않는다. 그리고 신뢰가 결국 배신으로 끝나는 드문 경우에 진실을 기본값으로 놓은 것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비난이 아니라 동정을 받아 마땅하다.”라고 진단한다. 이것은 “진실기본값과 거짓말의 위험 사이의 상충 관계trade-off는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하다. 이따금 거짓말에 취약해지는 대가로 우리가 얻는 것은 효율적 의사소통과 사회적 조정이다. 이득은 대단히 크고 그에 비해 비용은 사소하다. 물론 가끔 기만을 당한다. 이는 일처리의 비용일 뿐이다. - Timothy R. Levin, Duped: Truth-Default Theory and Social Science of Lying and Deception(University of Alabama Press, 2019), Chapter 11.”라는 주장에 대한 단순한 해석이 아니다. 인류 사회의 문명을 이룩하며 숱한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에서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속성이었다. 그래서 투명성은 일종의 신화라고 일갈한다. 인간 사회에서 공정성과 투명성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양궁 국가대표 선발시스템을 어디에나 적용할 수 없다니 안타까울 따름이지만 사기와 속임수는 진실편향에 대한 일종의 일처리 비용이라고 주장을 반박하기는 어렵다.

지나치게 많이 받아들이고 너무 적게 확인하려는 우리의 성향을 점검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저자들은 사기를 당하는 사람의 인지심리, 즉 우리 모두를 취약하게 만드는 사고와 추론의 패턴을 설명한다. 누구나 가끔은 속는다는 전제다. 빈도의 차이일 뿐 속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습관과 후크가 그것이다. 습관은 집중, 예측, 전념, 효율의 문제이고 후크는 일관성, 친숙함, 정밀성, 효능의 문제다. 어느 쪽이든 덜 받아들이고 더 확인하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관습적 사고가 큰 재앙을 부른다. 비판적 사고가 결여된 개인과 사회에는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위정자들에게 속는 국민이 문제이듯, 맹목적 수용 태도가 비판 기능을 상실하게 한다. 긍정적 사고, 낙관적 태도의 위험은 ‘진실 편향’과 다르다. 인지 심리학으로 분석할 수 없는 개인차가 심하다. 학습과 토론, 사유하는 능력은 가방끈의 길이로 좌우되지 않는다. 인간의 속성을 넘어 사회심리학으로 확대 발전시킬 수 있는 연결고리가 조금 아쉽다.

사기가 판치는 시대, 속임수에 말려들지 않는 법이라는 부제는 후크다. 똑똑한 사람을 매혹하는 더 똑똑한 거짓말에 대한 사례가 이 책에 충분히 설명되어 있다. 지식과 정보가 부족해서 속는 게 아니고, 전문지식이 부족해서 사기를 당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믿음은 욕망과 기대에 근거하며 자기 자신조차 속이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늘 곁에 있다는 게 문제다. 선과 악, 빛과 어둠, 거짓과 진실은 법정 다툼에서 실체적 진실을 따질 때나 구별해야 하는 이분법적 논리가 아니다. 우리가 겪는 일상은 매 순간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으며 하얀 거짓말과 사기의 거리를 가늠하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개인의 삶에 레드팀을 운영할 수도 없고 외부인의 객관적 조언을 수시로 요청할 수도 없다. 인간의 인지심리를 안다고 해서 덜 속을까 싶기도 하다. 아주 오래된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에 관한 이야기로 명성을 얻은 저자들은 연장선에서 지극히 인간적인, 너무나 당연한 사고 패턴과 인지 편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교묘하게 활용하는 기업, 이용하는 개인과 사회에 속지 않으려는 노력은 필요하지 않을까. 그것이 아마도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작은 바람이겠으나 저자의 조언대로 “수용과 확인 사이에의 적절한 균형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속이기 힘든 사람이 된다는 것은 모든 속임수를 피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속임수가 언제 발생할 수 있는지 인지하고 중요한 순간에 그것을 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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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어질수록 행복해진다 - 관계 지옥에서 해방되는 개인주의 연습
쓰루미 와타루 지음, 배조운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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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행복이 관계에 있다고들 하지만, 삶의 근원적인 슬픔이나 외로움이 관계로 해소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는 관계망에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에요.”


나는 인간의 행복이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고통은 관계에 있다. 삶의 근원적인 슬픔과 외로움은 인간의 존재 조건이다. 연인, 친구,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의지하며 관계를 맺고 행복과 기쁨을 나누지만 모든 고통과 슬픔 또한 이 관계에서 비롯된다. 우연히 나눈 대화의 한 마디를 오래 곱씹었다. 인간관계가 각자가 원하는 욕망의 교집합을 넘어서는 순간 원망과 분노, 슬픔과 고통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겠으나, 대부분 사람들은 지나친 기대 혹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경계를 허문다. 타인의 기준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감정과 선택으로. 그렇다면 인간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서로에 대한 신뢰 관계를 유지하면서 예의를 지킬 수 있는 거리는 어떻게 측정 가능한가. 서로의 기준과 욕망이 다를 때마다 대화와 합의를 통해 결정될 수 있는가.


일본 논픽션 작가들의 특징은 쉽고 간단하게 객관적 사실들을 요약 정리하고 간명하게 제시한다는 점에서 접근이 용이하나 깊이와 넓이가 확보되지 않는다는 단점을 함께 갖는다면 지나친 일반화일까. 대표적으로 사이토 다카시의 숱한 저작들이 그렇다. 쓰루미 와타루 역시 『멀어질수록 행복하다』는 제목으로 눈길을 끈다. 『책을 읽는 사람만이 손에 넣는 것』이라는 후지하라 가즈히로의 책처럼 날카로운 통찰과 선명한 주장이 담겨있으나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충분한 사유의 즐거움이나 깊은 통찰에 닿지는 못한다. 책을 읽는 목적과 방법에 따라 차고 넘칠 수도 있으나 대개 한 권의 책으로 얻으려는 기준에 부합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에서 해방되는 개인주의 연습’이라는 부제는 선명하고 매력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저자는 이를 “‘개인주의’란 자신과 타인을 명확하게 분리하는 태도를 말한다. 결코 제멋대로 군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건 이기주의다. 진정한 개인주의란 모든 개인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남을 배려하고, 동시에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 굳건할 때, 건강하고 대등한 관계 맺기가 비로소 가능해진다.”(212쪽)라고 정리한다. 나밖에 모르거나, 내가 옳다고 착각하거나, 내가 원하는 걸 상대도 원할 거라고 생각하는 이기주의는 타인의 기대와 욕망, 생각과 감정에 대한 배려가 없다. 웨인 다이어는 『행복한 이기주의자』가 되자고 역설했으나, 이는 확대된 개인주의에 가깝다. 타인에 대한 말과 행동을 성찰하지 않으면 스스로 ‘선’을 잘 지키는 사람으로 착각하기 쉽다. ‘나와 너는 다르다’는 전제에 동의하지 않으면 사랑 혹은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동일시하기 쉽다. 다른 건 잘못이 아니고, 비난의 이유도 아니다. 착각은 자유지만 그 고통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피해를 준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심리학자 아들러의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라는 문장 하나가 이 책의 출발이다. 저자는 ‘아무에게나 곁을 내어주지 말 것, 가족이란 이름의 지옥에서 해방될 것, 짝이 있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것, 어디서나 내 마음을 편안한 곳에 둘 것’을 강조한다. 이 충고를 각각의 장으로 구별하여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소제목과 문장은 명쾌하여 실용적 목적의 독서에 부합한다. 구체적인 행동 지침이나 워크북 형태의 자기계발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대로 실천할 수만 있다면 관계 지옥에서 벗어날 수도 있겠다. 독서가 시간과 장소의 문제는 아니지만 여행, 휴가, 카페에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시원한 표지 디자인은 여름과 잘 어울린다. 물성을 가진 종이책은 그 자체로 인간에게 위로가 되기도 한다.


잊지 말자. 거리를 두지 않으면 함께 멀리 갈 수 없다. - 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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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법 - 생존을 위한 두 가지 요건에 관한 이야기
장혜영 지음 / 궁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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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은 법과 질서를 바로 세우고 국민의 안녕과 인권을 지키는 최고의 법집행기관이자 인권보호기관”이라는 검찰청 홈페이지의 소개글이 현실에 부합하는가. “검사는 국민에 대한 봉사자이며 공익의 대표자로서 범죄를 수사하고 공소를 제기하여 피고인에게 그의 범죄행위에 합당한 형이 선고되도록 합니다.”라는 검사의 업무는 어떤가. 국민이 합의한 국가공권력을 위임받은 기관들의 역할과 의무는 이상에 불과한가. 수임료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변호사의 직업윤리는 논외다. 법조인들이 가진 도덕적 의무와 역할을 기대하기 어려운 시대는 불행하다.

17년 넘게 검사로 일하다 변호사로 변신한 장혜영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지 않다. 글쓴이 개인에 대한 관점과 태도는 매우 중요하지만 직업인으로서, 생활인으로서 개인은 영화에서 배역에 충실한 배우의 사생활을 들추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변호사 홍보용, 정치권에 줄을 대기용, 직업상 취득한 범죄 사례와 피해 사례를 각색한 책들과 거리가 먼 법조인의 글을 만나기 힘들다는 점에서 장혜영의 『사랑과 법』은 짧지만 결코 가볍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대체로 검사 시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나 개별 사건과 사례를 중심으로 자기 경험에 지나치게 몰입한 직업인의 애환과 다른 측면이 눈에 띤다. 그것은 인간과 세상을 ‘사랑’과 ‘법’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카테고리로 엮는 관점 때문이다. 어떤 직업을 갖고 세상을 살아가든 결국 삶을 대하는 태도와 방법이 한 인간의 깊이와 넓이를 결정하고 각각의 인생을 규정한다고 믿는다.

이 책에는 일곱 편의 글이 실려 있다. 변사, 책임, 사기, 학대, 합의, 중독, 시효와 관련된 이야기를 ‘사랑’으로 엮었다. 물론 이 사랑은 파토스와 로고스 그리고 에토스의 세계를 넘나들며 죄와 벌을 묻고 인생의 길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대개 좋은 글들은 어떻게 살 것인지, 무엇을 위해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지 묻는다. 정답 없는 인생이니 좋은 글에는 이정표 대신 물음표와 질문만 넘친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과 『남아 있는 나날』을 소개하는 저자의 목소리는 크지 않으나 단단하다. 시를 읽는 장혜영은 다양한 인문학적 소양을 자랑하지 않되 곳곳에 생각의 깊이와 넓이를 확보한 출처를 밝힌다. 그러면서 “사회를 구성하는 토대이자, 사람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두 가지 요건”을 사랑과 법이고 규정한다. 어느 하나를 결여한 사회가 제대로 작동할 리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아니 부족한 건 무엇일까. 사랑이라면 누구를 위한, 어떤 방식의 사랑이 필요할까. 법이라면 입법 취지와 목적 그 시행 과정과 결과가 만족스러운가. 대한민국 법률 체계와 헌법 정신에는 큰 문제가 없다. 어느 분야나 그러하듯 시스템이 아니라 그 자리에 놓인 ‘사람’이 문제를 일으킨다. 법 위에 서려는 자는 범죄자 뿐만 아니라 법을 다루는 자를 포함한다. 사랑이 부족하거나 사랑을 외면하는 자가 저지르는 범죄와 같이.

저자의 능력주의meritocracy 비판이 신선하다. 생각의 균형추는 현실 정치의 이쪽을 넘나들며 이념 논리에 갇히지 않을 때 작동한다. 능력주의에 대한 문제는 이쪽과 저쪽의 문제가 아니다. 재앙에 가까운 저출생 문제부터 세금과 부동산과 주식 문제가 모두 양궁 대표선수 선발 시스템처럼 공정하고 투명할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을 쓰려는 시늉 정도는 하려는 세상이 돼야 하지 않을까.

독자로서, 변호사가 된 장혜영에게 기대하는 건 없다. 다만, 이 책에서 보여준 관점으로 의뢰인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또 다른 관점으로 살필 수 있다면 좋은 글을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어느 자리에서 무엇을 바라보는지, 어디를 향해 어떤 태도를 갖는지에 따라 앞으로 나올 책을 기대하거나 실망하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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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폴리스
마르얀 사트라피 지음, 박언주 옮김 / 휴머니스트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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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남부의 고대 유적 도시 페르세폴리스는 지명 그 자체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오리엔탈리즘만큼 위험한 옥시덴탈리즘이 서양 혹은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듯 한 몸처럼 움직이는 이스라엘에 대한 편견을 드러낸다면 중동 혹은 이슬람 문화에 대한 구별 없는 편견은 또 우리 안에 어떻게 자리잡고 있을까.

이란 여자 마르얀 사트라피의 그래픽 노블 『페르세폴리스』는 크게 두 개의 층위를 드러낸다. 중동을 부분과 전체로 구별해야 하는 관점, 중동 안에서 또 다른 개체인 여성 차별의 관점. 이란의 ‘강남좌파’라 할 수 있는 테헤란 북부 좌파 마르지(작가)는 혁명과 전쟁 혹은 여성에 대한 차별을 피해 유럽으로 도피(유학)할 수 있는 재력을 가진 여성이다. ‘3루’에서 태어났으나 히잡을 쓰고 홈베이스를 향해 슬라이딩을 해야 하는 불리함을 극복하는 정도라고 하면 지나칠까.

『팔레스타인의 눈물』을 통해 70여 년간 이어진 분쟁의 실상을 실감나게 표현했던 작가들과 달리 마르지는 자신의 ‘경험’을 그대로 보여준다. 흑백의 담담한 그림체는 선과 악, 남성과 여성, 부자와 빈자, 유럽과 중동, 근본주의와 민주주의 등 양립할 수 없는 이란 사회의 갈등과 충돌을 이분법으로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1969년생 외동딸이다. 그리 많지 않은 나이의 동시대인이지만, 어떤 인생은 그 자체가 그대로 한 편의 소설이며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미국의 무역센터가 무너지는 장면을 생중계로 시청한 세대에게 각인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폭력’을 이해시킬 수 없는 것처럼, 한 이란 여성의 일상과 경험으로 중동의 문화와 전통, 종교와 차별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훌륭한 한 편의 자전적 그래픽 노블은 내밀한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르지는 “일단 한계를 넘어서면,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는 유일한 방법은 그냥 웃어넘기는 것이다.”(275쪽)라는 말로 개인의 무력감을 표현한다. 목숨을 건 일상적 혁명과 종교적 도그마에 매몰된 근본주의자들의 만행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을까. 이념과 종교로 포장된 권력과 정치세력은 놀랍게도 다수 대중의 지지를 받기도 한다. 명분으로 챙긴 실리 때문일지 모르겠으나, 더디게 한발씩 앞으로 나아가도 어느 순간 도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경우를 우리는 수없이 목도했다.

마르지는 단순히 현상의 나열에만 그치지 않는다. 4년 동안 경험한 서구문화는 이란의 전통문화와 충돌을 일으키며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온다. 일반적인 사춘기 소녀와 다른 시간을 통과한 마르지의 경험이 단순히 부모의 사랑과 올곧은 태도로 극복될 수는 없다. 모든 인간은 단 한 번의 인생을 산다. 타인의 그것을 대리 경험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누구나 공평하다. 각자 처한 상황에 맞게 목적과 방향을 가늠하지만 태도를 결정하는 건 쉽지 않다. 페르세폴리스를 통해 이슬람 문화와 전통을 조금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마르지의 선택과 고민이 어디를 향하는지 눈여겨볼 수도 있다. 물리적 공간만 다를 뿐, 어쩌면 전쟁 같은 일상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혁명은 자전과 같아서 바퀴가 멈추면 끝장이다. 인생도 크게 다르지 않다. 넘어지면 깊은 상처를 감당해야 하며 남은 길은 어떻게든 스스로 페달을 밟아 나가야 한다. 아무도 대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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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팬지 폴리틱스 - 권력 투쟁의 동물적 기원
프란스 드 발 지음, 장대익.황상익 옮김 / 바다출판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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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亡者에 대한 슬픔은 나이에 반비례한다. 어디 눈물 없는 장례식이 있을까마는 숱한 죽음들, 무덤과 화장터 사이를 떠도는 회한悔恨은 인간의 숙명이니 극복이 아니라 수용과 성찰이 필요하다. 한 시대가, 아니 한 계절은 잠시 머물다 떠난다. 하지만 우리 삶은 매 순간 어느 시대 혹은 어느 계절의 복판에 서 있다. 지금이 절정이다. 지나간 모든 것이 아름답지 않듯, 남은 시간이 두렵지만은 않기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정치’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면 인류 문명은 정치 발달의 문화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주정에서 민주정으로 ‘발전’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각자의 욕망과 기대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 행위의 반복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 아니겠냐는 말이다. 우주에 발자국을 남기고, 인공지능 시대를 산다고 해도 인간은 어쩌면 ‘털없는 원숭이’에서 한발도 더 나아가지 못한 건 아닐까. 진화를 거듭한 현생 인류의 모습이 침팬지의 군집생활과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은 놀랍지 않다. 충분히 예상하고도 남을 만큼, 사회뉴스 정치인들의 정치 행태, 끔찍한 사회뉴스가 매일매일 이를 증명하지 않는가.

햄릿은 ‘to be or not to be’를 고민했으나 오늘의 한국인들은 이쪽이냐 저쪽이냐로 정의와 공정과 상식과 현재와 미래까지 판단하며 선택한다. 망국적 극단적 전체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될 만큼 필터 버블이 작동하는 알고리즘에 반성은 없는 듯하다. 혹시 프란스 드 발의 『침팬지 폴리틱스』조차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으려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으나 저자의 의도, 책 내용과 무관하지 부디 댓글만 남기지 않기를.

물론, 그 정치 행위의 근간에는 ‘욕망’이 자리잡고 있다. 성욕과 식욕, 즉 생존과 관련된 침팬지의 모든 정치 행위는 선악의 저편에 놓여 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진화의 결과일 뿐이다. 그것을 인간의 관점으로 ‘해석’하려는 관찰자들은 다양하다. 제인 구달로 상징되는 1세대 동물사회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없었다면 출발이 조금 어려웠을지 모르지만 수많은 영장류를 통해 인간의 본능과 욕망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모르고 내 안엔 내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40여 년 전에 출간된 이 책의 핵심 내용은 단순하다. 침팬지의 사회구조가 인간과 다를 바 없이 인간사회와 매우 흡사하다는 결론을 향한 거대한 관찰의 기록물이다. 그것이 놀라운가, 아니면 반가운가. 그래서 어쩌자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어떻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우리 인간의 정체는 무엇인가”라는 질문만 또다시 남는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 침팬지와 인간의 유사성과 차별성에 논문은 과학자들의 몫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이에룬의 보안관 행동이나 마마가 가진 모성의 힘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해야 한다. 100층이 넘는 빌딩 꼭대기에 앉아 있어도 한 인간의 개인적, 사회적 욕망은 라윗과 니키 혹은 마마, 이미, 테펄의 그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뭐가 다르겠는가. 누구든 식욕과 성욕이 전부일 수 있으며, 누구든 더 큰 야망과 욕심의 허망함에 무너지지 않겠는가.

네덜란드 아른험에 위치한 뷔르허스 동물원Burgers Zoo(1971년 8월 개관)의 야외 사육장이 있다. 여기 사는 침팬지들의 이야기다. 집필시기는 1979~1980년(1982년 출간), 주요 침팬지는 수컷 에룬, 라윗, 니키, 단디, 암컷 마마, 호릴라, 프란예, 이미, 테펄, 파위스트 정도다. 이름으로 호명되는 각각의 침팬지의 행동은 인간과 다를 바 없다. 앞서 말했듯 이 책은 인간과의 유사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읽을 필요가 없다. 98%의 유전자가 인간과 동일한 침팬지의 행동이 인간과 비슷하리라는 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인간의 정치적 행위란 무엇인가, 그 기저에 깔린 본능과 욕망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가 등의 문제다.

권력투쟁과 기회주의, 호혜성, 전략적 삼각관계, 화해, 연합, 평화 협정, 중재, 분할 지배 등 인간사회에서도 매일 벌어지는 일들이 침팬지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놀랍다. 크든 작든 모든 관계와 조직과 공동체와 국가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마찬가지다. 침팬지 폴리틱스는 호모 사피엔스폴리틱스의 축소판이 아니라 오히려 현대사회의 원형prototype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는 게 쉽지 않다는 건 생존 혹은 정치(관계)를 일컫는다. 쉽고 재밌는 일이 더 많은 인생을 꿈꾸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오늘도 안녕하지 않은 일들로 가득 채운 하루를 보내며 사람들은 또 어떤 내일을 꿈꿀까. 부디 시간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일들에 매달리지 않기를. 자기 위로와 합리화를 위해 너무 애쓰지 않기를. 침팬지 폴리틱스도 협력, 호혜, 연합, 중재, 의존이 강력한 힘을 발휘할 때가 더 많다. 이해관계에 매몰된 걸 모두 아는데, 정의와 공정, 상식과 합리, 자유와 평화로 포장한들 사람들이 더 이상 속지 않는다는 걸 정치인들만 모르는 걸까. 아니면 우리는 알면서도 매번 속는 걸까. 이도저도 아니면 대안이 없거나 상상력이 부족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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