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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각본
김지혜 지음 / 창비 / 2023년 8월
평점 :
관계가 사람을 망친다. 대개 인간관계(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하는 2차적 관계인 사회자본뿐만 아니라 1차적 관계인 가족관계는 우선 인격 형성, 사회화, 보험, 복지 기능을 담당한다. 뿐만 아니라 문화자본의 전수와 경제 자본의 세습을 통해 한 인간의 삶을 결정한다. 그 단단한 체계를 거부하고나 변화시키는 건 생각보다 대단히 어렵고 복잡한 일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문화적 전통이 형성되고 관습적 사고로 굳어지면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사물과 사태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변화는 두렵고 번거롭다. 따라서 보수적 성향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디폴트 값으로 DNA에 새겨진 본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적극적인 노력과 의지는 직접 경험과 학습을 통해 각성할 때 벌어지는 예외적 상황이 아닐까.
가족을 생물학적 혈연관계로 규정짓는 순간 소피 루이스의 『가족을 폐지하라』나 김지혜의 『가족 각본』은 현실에 수용될 가능성이 없다. 김희경은 『이상한 정상 가족』에서 개인 삶의 독립성을 보장하되 삶의 질은 집단적 책임에 달려있다는 ‘차가운 신뢰(국가주의적 개인주의)’를 주장했다. ‘개인-가족’ 중심의 미국과 달리 독일과 스웨덴 등은 ‘국가-개인’의 양상을 보인다. 우리는 어떤가. 이상한 가부장제, 남성들의 피해의식, 극단적 가족 이기주의가 버무려진 형태라고 하면 지나친 평가일까. 온정주의가 보여주는 긍정적인 면이 없지 않으나 공동체와 국가 차원의 윤리는 찾아보기 힘들고 개인과 가족 중심의 생존 전략과 경쟁에 골몰하는 풍토는 공포에 가깝다. 한 아이는 온 마을이 키운다는 말이 적용되기 힘든, 태어나는 순간 부모가 스펙이 되는 현실에서 세계 최저 출생률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사교육과 학벌주의, 특정 직군의 이기주의와 특혜와 카르텔의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그 집단에 편입하려는 욕망의 블랙홀이 사회적 윤리와 상상력을 모두 빨아들인다. 놀랍고 기괴한 풍경을 현실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라는 말로 포장하기엔 너무 멀리 왔다.
가족은 폐지할 수 없는 사회와 국가의 최소 단위라는 생각은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그 기원을 사유 재산에서 찾는다. 국가의 기원이 된 가족은 그 형태와 크기가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변해왔다. 국민 국가 시대에 가족을 폐지하라는 급진적 요구가 통할리 없다는 걸 소피 루이스는 몰랐을까. 그 모든 게 각본에 짜인듯 움직인다는 김지혜의 지적은 현실을 정확히 분석한 걸까. 양비론과 양시론으로 초점을 흐리고 논점 일탈의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면 집중력있게 문제의 본질에 천착할 필요가 있다. 세대를 막론하고, 여성 혹은 페미니즘이란 단어에 알레르기 반응을 이루 남성과 여성을 제외하면 가족에 관한 논의가 ‘여성’과 닿아 있음을 충분히 짐작하리라. 물론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이라고 성급하게 추측할 수도 있겠으나 문제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소피 루이스는 백인, 부르주아, 핵 가족에 관한 편견에 돌을 던진다. 다양한 가족 형태에 대한 고찰이 필요한 이유는 현대사회의 복잡성과 변화 가능성 때문이다. 전통 농경 사회의 가족은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와 그 의미가 전혀 달랐다. 그러나 1인 가구가 주류가 된 시대를 살면서도 우리는 이상적 가족 혹은 정상적인 가족의 형태에 편견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차별은 정상과 비정상을 구별할 수 있다는 착각과 그 기준에서 시작된다. 김지혜의 문제 의식은 ‘왜 며리리가 남자면 안 될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결혼과 출산의 절대 공식을 넘어, 성역할과 성교육 너머에 각본 없는 가족을 꿈꾼다. ‘외 않 되?’는 ‘why not?’를 비틀어 고정관념을 헤집고 편견과 차별을 흔든다. 정말 안 되는 걸까? 그러면 안 되는 일을 하고도 뻔뻔한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본 탓에 시대의 변화와 흐름과 무관한 수구적 태도를 점검하는 일이 오히려 더 힘겹게 느껴질 때가 많다.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야말로 가족이 아닌가. 거리 두기에 실패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양상은 이수지의 대치맘 패러디가 아니라도 차고 넘친다. 자녀 교육에 대한 목표와 방향, 삶의 가치에 대해 깊이 숙고하며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에서 나와 우리 가족만 별나게 살 수 없다는 항변은 타당한가. 성적순으로 지망하는 학과와 직업이 일치하는 사회는 정상인가. 가족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눈이 먼 맹목적 강요와 일방적 가스라이팅으로 유지될 수 없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관계다. 인생의 정답을 안다는 듯한 부모와 어떤 말도 소음과 잔소리로 여기는 자식 사이의 기싸움은 기본이지만 그 너머에 존재하는 신뢰와 지지, 존중과 배려가 없다면 잘 짜인 각본에 불과할 수도 있다. 동성 결혼과 비혼 출산을 인정하고 고정된 성역할을 극복하며 자녀와의 관계 양상을 재설정하지 않으면 현실 도처에 폭탄처럼 숨은 지뢰들을 피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