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어의 속살 - '모국어의 속살'에 도달한 시인 50인이 보여주는 풍경들
고종석 지음 / 마음산책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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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살아 있는 어느 날 어느 길 어느 골목에서
너를 만날지 모르고 만나도 내 눈길을 너는 피할 테지만
그날, 기울던 햇살, 감긴 눈, 긴 속눈썹, 벌어진 입술,
캄캄하게 낙엽 구르는 소리, 나는 듣는다
- 이성복, ‘연애에 대하여’,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중에서

  지금까지도 가슴에 깊이 박혀 가슴을 울렁이게 한다는 고종석의 고백이 가슴을 덥혀준다. ‘내 나이에 좀 주착스럽’다고 말하는 그의 멋쩍은 표정을 상상하는 일은 잔잔한 미소를 만들어 낸다. 시는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비실용적인 장르 중의 하나이다. 어디에도 써먹을 데 없는, 먹고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시詩’를 읽어주는 남자 고종석의 마음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는 서문에서 시는 사람이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장신구라고 말한다. 이것이 시를 읽을 충분한 이유가 된다는 주장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의 동의를 얻어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을 펼쳐든 독자들의 기본적 관심을 전제로 한다면 그의 유혹(?)을 쉽게 떨치지 못할 것이다. 시는 실용적이진 않지만 인간이라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가장 화려하고 사치스런 예술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모국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축복을 우리는 충분히 즐기며 살아가지 못한다. 눈에 비춰지는 감각적 이미지와 시각적 아름다움은 1차적이지만 영혼에 투영되는 사유의 즐거움은 언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다. 시는 그 한 복판에 우뚝 서서 홀로 외롭다. 그 성스러움과 상스러움의 가장 자리에서 우리는 주변과 경계만을 기웃거려도 나의 즐거움이 사라지진 않는다. 산책과 명상 그리고 독서로 가득한 삶을 꿈꾸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한 권 읽어 보라. 우리말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의 진경을 보여주는 50권의 시집은 고종석의 주관적 판단으로 넘겨버리기엔 그 부피와 중량이 만만찮다.

  <모국어의 속살>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시집 한 권, 한 권의 서평에 가까운 가벼운 내용으로 가득하다. 길이 않은 글 속에 한 시인의 특징과 시세계를 적확하게 짚어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래 벼려온 우리 말에 대한 애정과 감각들이 살아 숨쉬는 글을 만들어 내는 일이 어떻게 쉬울 수 있겠는가. 고종속의 <모국의 소살>은 현대시 100년을 돌아보는 기념비적인 대작도 아니고 대표작가의 대표작품을 섭렵하는 어설픈 교양주의와 가벼운 문학 특강도 아니다. 이 책이 성공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당연하게도 저자의 시에 대한 안목과 나름의 기준과 분석, 그리고 개성적인 문장에 있다. 고종석 스스로 우리말의 ‘속살’에 대한 활용 능력이 뛰어나다. 부드럽고 단정하면서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말투가 쉽지 않다는 것을 독자는 이내 눈치 챌 것이다.

  시인 공화국의 시민들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염두에 둘 것은 선발 과정이다. 김소월부터 얌전하고 지극히 당연하게 시작하는 것 같지만 김정환, 김영승, 노향림에서부터 오규원, 김지하, 김기택에 이르기까지 시인들의 살고 있는 연대와 마을을 짐작하기 어렵다. 그만큼 현대시의 막과 장을 나누지 않고 종횡무진 내키는 대로 또는 마음 가는대로 선별하고 그 시집들을 읽어주고 있다. 어느 한 쪽에 기울어 있거나 치우친 느낌이 없다. 다만 ‘시’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이 존재하는 것인가를 살펴야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지만 고종석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이 관문을 통과한 듯 보인다. 물론 순전히 개인적인 역량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에 후한 점수를 주지 않을 수 없다.

  개나 소나 시와 관련된 에피소드와 내가 좋아하는 시를 뽑아 책을 내는 것은 출판계의 오랜 장사속이다. 고르는 기준과 안목을 가늠하는 것은 당연히 부당하다. 지극히 주관적인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들이 아니라 그 시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의 삶에 관심을 갖는 방법은 절대로 옳지 않은 시읽기 방법이다. 시는 그저 아름다운 우리말의 ‘속살’을 훔쳐보는 두근거림이 있어야 한다. 시가 말하는 방식이 항상 우아하거나 아름답지만은 않다. 욕설과 비속어가 난무하기도 하고 공허한 말장난으로 독자들을 우롱하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는 시인을 욕할 필요는 없다. 시가 전하는, 언어가 가진 독특한 아름다움의 언저리를 따라갈 뿐이다. 그러다 보면 시를 보는 눈도 달라지고 시인들이 말하기 전에 느껴지기도 한다. 그 언어는 머나먼 나라의 외국어가 아니라 일상에서 늘 사용되고 있는 우리말이다. 우리말의 표피와 껍질을 벗겨 낸 속살의 다양한 층위를 맛보고 감상하는 즐거움을 어디에 비할 수 있을까?

허위는 허위를 유포하는 자가
살아있 한 죽는 법이 없다
진실은 진실을 유포하는 자가
죽어도 죽는 법이 없다
- 김남주, ‘공식’, <조국은 하나다>중에서



06042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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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독 - 유목적 사유의 탄생
이정우 지음 / 아고라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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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에 관한 수많은 책들은 특별한 장르로 분류하거나 묶어낼 수가 없다. 개성에 따라, 독서를 통해 얻은 지식과 사유의 방식 그리고 그 결과물들을 쏟아내기 때문이다. 책에 관한 책만큼 다양하고 많은 책들이 책을 읽은 후의 책들이다. 학자들의 경우 연구 저작물의 형태나 해설서, 주석서 혹은 평저 등 다양한 방법으로 결과물을 정리한다. 인류가 남긴 지적 재산이라고 불릴만한 책들에 대한 이야기는 넘쳐난다. 단 한권의 책에 수많은 연구 논문과 다양한 해석이 따라 붙기도 하고 논쟁이 벌어지다가 전혀 다른 형태의 이론가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렇게 인류의 지성사는 발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선 시대에 대한 부정과 반발 한 분야의 대가에 대한 도전들은 반드시 필요하며 정의와 진리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전제하에 그 모든 행위들은 발전과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용인된다.

  읽은 책의 종류와 내용들, 그리고 책을 읽는 목적과 방법들은 책을 읽는 사람 수만큼 다양할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인 철학자 이정우의 책읽기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책이 <탐독耽讀>이다. 대안 철학학교인 ‘철학 아카데미’를 이끌고 있는 이정우의 서재와 책읽기에 대한 호기심은 당연한 일이다. 학부에서 공학과 미학을 공부한 후 대학원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로 석사학위를, 푸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 이정우는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4년만에 사임했다. 그의 책읽기는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유목적 사유’라 이름 붙일 수 있다.

  자연과학, 사회과학, 역사, 문학의 여정을 거쳐 ‘철학’이라는 종착역에 다다른 저자의 ‘사유의 방식과 흐름’을 따라가 보는 일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부러움과 시기심, 극단적인 질투를 만들어낸다. 이정우의 유목적 사유는 크게 두 개의 축으로 전개된다. 소은 박홍규 선생의 영향으로 촉발된 ‘존재론’이라는 축과 푸코에 빚지고 있는 윤리적 ․ 정치적 문제에 대한 사유가 그것이다. 사회문화적 관심은 철학자에게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현대사회에서 철학을 ‘한다’는 의미를 제대로 짚어보고 철학자의 역할과 의미를 고민해본다면 앞으로 전개될 저자의 저작들이 기대된다. 단순히 인류의 지성사에 대한 깊은 연구와 개인적인 사유의 내밀한 성과들이 학문적 성과만으로 끝난다면 이정우는 훌륭한 학자나 연구자로서 허명을 남길지도 모를 일이다. 너무 섣부른 판단과 기대가 될 지 모르겠으나 그가 말한 ‘유목적 사유’의 끝은 예측하기 어렵지만 그 여정을 지켜볼 용의는 있다.

  저자의 인생과 더불어 중학교 이후 대학 입학시절까지 이어진 문학 서적들에 대한 유목, 학부시절의 과학에 대한 유목, 대학원 시절 이후 철학에 대한 유목이 연대기처럼 펼쳐진다. 물론 살아온 과정과 시기에 특히 주목하고 관심을 가진 분야의 책을 집중적으로 읽어나간 시기들이 있겠지만 저자의 경우는 그 이력과 독서의 과정이 재미있다. 단순히 다독가이거나 높은 학문적 성취를 이룬 사람의 이야기로 읽어서는 안된다. 사회적으로 이름을 날린 명망가의 서재를 들여다 보는 호기심도 제외된다. ‘인간’을 주제로 철학을 ‘하는’ 한 인간의 방랑과 유목에 대한 고백을 진지하게 들어 볼 만하다.

  국어 교사인 아버지 덕에 문학과 동양 고전에 파묻혀 지낼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출발하는 이정우의 책읽기는 책을 통해 하나의 인격체로서 사유하는 인간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얻는다. 책을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책읽기를 소개하는 저자의 속마음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탐독>을 읽어나가면서 저자 이정우와 나누는 대화의 시간들, 내가 읽은 책들에 대한 저자의 감상과 견해들, 잊고 있던 책들을 기억 속에서 꺼내보는 즐거움, 읽지 않은 고전들을 이제라도 시작해야겠다는 마음까지 덤으로 얻는다.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책을 읽을 수는 없지만 나름의 방법과 틀을 갖추어 나가는 사람들의 방식을 넘겨다보는 일은 나를 돌아보게 하는 좋은 방법이다.

  나의 책읽기와 사유의 방식은 무엇을 따라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그 지향점은 꼭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했으나 저자의 말에 공감할 뿐이다. 독서를 통해 그저 나를 풀어놓고 자유롭게 유목하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지적 희열과 사유의 즐거움을 책이 아닌 어느 곳에서도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그것을 찾는 순간, 러셀의 반어적 표현을 실행에 옮길 것이다. 더 이상 책을 읽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내가 철학자라고도 또 다른 무엇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사유하는 사람, 저작 활동과 교육 활동을 하는 사람 정도라고 생각할 뿐이다. 오랜 시간 옛?유목을 해왔기 때문에 이제 와서는 유목이 특별히 유목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내 사유가 흘러가는 대로 사유하고 글을 쓸 뿐이며, 그런 가로지르기의 사유, 유목의 사유가 내게는 오히려 더 편안하고 친숙한 것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이 갈라놓은 범주들은 내게는 의미가 없다. 오직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문제, 다루고 있는 주제에 따라 관련되는 연구와 사유를 할 뿐이다. 내 학문은 다음 한마디로 압축할 수 있다. ‘선택하지 말고 창조하라.’ - P. 285


060423-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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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ptic 2006-10-30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좋은 책 많이 만들어 주세요.
 
강산무진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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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삶에 대한 부족한 통찰력 때문이다. 살아보지 않은 인생에 대한대리 경험과 비록 유추의 방법이긴 하지만 타인의 인생을 경험해 보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소설을 읽는다. 물론 그 욕망은 단순한 소설 읽기를 통한 재미와 감동을 넘어선다.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궁극적인 고민과 애정이 바탕이 되어 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야트막한 산의 나무의 빛깔이 햇빛에 반짝이는 순간, 나는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러나 이내 ‘삶이란 무엇인가’하는 아주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에 부딪힌다. 대략 난감하다. 언제부터였는지, 혹은 언제까지일지도 모르는 이 부질없는 생각과 고민들은 어쩌면 모든 순간들을 견뎌내게 하는 힘이고 현재를 확인하는 바로미터가 된다.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확인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나는 소설을 선택한다.

다양한 소설가들과 만나는 일은 공허한 울림의 대화보다 농밀한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지나치게 관심과 조명을 받아온 작가 ‘김훈’은 부담스러웠을거라는 짐작을 해 본다. 환갑을 눈 앞에 두고 그의 첫 소설집이 나왔으니 그의 문학적 성과와 무관하게 평범하지는 않은 일이다. 국내의 권위있는 상들을 휩쓸며 문학적 성과를 검증(?) 받은 김훈의 소설집을 읽고 나서야 김훈이 제대로 보인다. 지금까지 김훈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그의 문체만을 즐겼다. 특히 <현의 노래>의 경우 내용과 상관없이 아무 데나 펼쳐들고 읽어도 눈부신 그의 문장과 만나게 된다. 그저 아름다운 문장 속에 빠져들다 보면 내용은 허공을 맴돈다. 정확하고 살아있는 수식과 표현들은 한국어의 또 다른 영역을 보여주는 소설들로 기억될 것이다. 소설가에게 문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김훈을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소설집 <강산무진>은 여덟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소설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들은 선명하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에 대한 탐구 정신이다.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든 없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대기업 중역이든 택시기사이든, 복서든 등대 수로직 공무원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 직업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정확한 묘사가 압권이다. 직업의 속성과 성향을 단순한 관찰만으로 그려내는 방법은 옳지 않다. 그 직업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보여 줄 것인가가 사실 더 어려운 작업일 것이다. 김훈은 일단 철저한 취재와 관찰로 직업의 속성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상황과 직종이 가져올 사건들을 내용 속에 기막히게 녹여낸다. ‘머나먼 속세’처럼 링 위에서 권투를 하는 선수의 눈을 통해 1인칭 시점으로 상대방을 읽어내는 내면 서술은 1라운드가 끝나고 2라운드가 이어지듯 불연속적인 소설의 흐름을 보여준다. 복서의 상황이 아니라 그가 걸어온 시간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와 함께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른 상황과 시간 속에서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새롭다.

주인공들은 대개가 중년 이후의 삶을 보여준다. 인생의 저물녘에 서 있는 사람들의 심리는 서늘하고 쓸쓸하기보다 공허하다. 젊은이의 열정이 보여주는 삶의 활력이 아니라 그로테스크한 삶의 비애가 주인공들을 통해 담담하게 그려진다. 그 적확한 묘사와 서술에 감정은 배제된 채 ‘개연성 있는 허구’인 소설을 오히려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그려내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모든 죽음과 이별에 ‘돈’이 개입된다. ‘언니의 폐경’, ‘강산무진’ 등에서 보여주는 죽음은 모두 ‘돈’으로 정리된다. 일상과 현실을 지나치게 세밀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그의 방법들이 오히려 불편하다. 환상과 욕망의 실현이 아니라 현실과 구체성의 철저한 보여주기에 충실하다. 김훈의 매력은 문체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미시적 관찰과 정확한 관찰에 있다.

중년 이후의 삶에서 사람들은 인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생활을 보여주고 일상을 이야기한다. 죽음을 향해 치닫고 있는 우리의 삶을 김훈은 ‘허무’하게 바라본다. 그 시선에는 감상도 준엄함 심판도 없다. 인생은 이것이다라는 전언도 없다. 그저 담담하게 삶의 순간들과 지루한 일상과 비루한 죽음과 인간의 본질을 담아낸다. 그것을 담아내는 김훈의 방식은 낯설고 각박하다. 소설들의 결말은 죽음이나 허무에 대한 김훈의 태도를 보여준다. 극적 반전과 긴 여운에 대한 유혹을 이겨낸 냉정하고 단호한 결말이 오히려 긴 울림을 준다.

<칼의 노래>와 <현의 노래>를 통해 시간과의 대화를 시도했던 김훈이 이제 <강산무진>을 통해 ‘지금’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분명히 매혹적이거나 아름답지 않다. 생의 단면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담아내는 것이 단편의 미덕이라면 김훈은 장편 뿐만 아니라 단편에 좀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할 것이다. 그의 단편이 더 읽고 싶다. 다작과는 거리가 먼 작가이기 때문에 기다림에 값하는 그의 다음 작품을 또 기다린다.

걸출한 대가의 탄생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선입견을 갖지 않고 김훈을 읽는다면 참 많은 것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다음 작품을 기다릴만한 작가를 갖게 되는 것은 독자에게도 큰 기쁨이다.


060425-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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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로서의 질병 이후 오퍼스 9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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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병과 고통은 생물학적 속성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자연의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는 당연하고도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죽음이다. 단 한 번의 생이기 때문에 소중하면서도 극적이다. 특히 질병과 그로 인한 고통은 물질적 존재로서 인간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 누구나 한 번은 병들고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는 이 절대 공평의 원리는 삶에 대한 비극성을 인식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원칙에 대한 확인이다. 죽음이라는 결론에 이르는 과정은 실로 다양하다. 어떤 병에 걸려 어떻게 죽느냐, 하니면 불의의 사고로 죽느냐에 따라 그 삶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까지 한다. 축복받는 죽음이 있는가 하면 모든 사람의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죽음도 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수잔 손택이 ‘은유metaphor’로서 ‘질병illness’을 분석한 책이 <은유로서의 질병>이다. 이 책은 ‘에이즈와 그 은유’라는 글과 묶여 합본으로 출판됐다. 10년의 간격을 두고 쓰여진 글 두 편이 연속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후 <타인의 고통>을 펴낸 손택은 사람들의 인생에서 질병과 고통 그리고 그것이 주는 이미지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확인하는 일관된 작업을 벌이고 있다. 그것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고 사회 속에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짚어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인간으로 태어나 질병으로 고통을 얻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는 실로 다양한 의미와 은유가 내포되어 있다. 의학의 발달과 더불어 점차 질병의 실체가 밝혀지는 과정에서 그 은유들은 점차 사라지는 듯 보이지만 ‘에이즈’라는 질병으로 과거로 회귀하는 듯하다.

  이 책에서 특히 관심을 갖는 질병은 결핵과 암이다. 저자가 두 번이나 암에 걸려 극복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 책은 관찰과 사유로 이루어진 책이 아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결핵으로 사망했다. 아버지의 죽은 이유조차 감추었던 어머니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녀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당시 ‘결핵’이라는 질병이 지닌 은유에 대해, 이후 그녀가 걸렸던 ‘암’이라는 질병이 지닌 은유에 대해 이 책은 다양한 시각과 방법을 보여주는 문학적 에세이로 판단해야 한다. ‘은유’라는 말은 문학적 용어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일상에서 부딪히는 은유는 유사성에 바탕을 둔 비유법이다. 손택은 은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은유라는 표현을 쓸 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간결한 정의,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내린 정의를 따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은유란 어떤 사물에다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용轉用하는 것이다.” 그것이-아닌-다른 것으로, 또는 그것이-아닌-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어떤 사물을 부르는 것은 철학이나 시만큼 오래된 정신 작용이며, 과학적 지식과 표현력을 포함해 각종 이해 방식을 낳은 기초이다. P. -129

  질병이 우리에게 주는 대표적 은유는 병의 원인에 있다. 어떤 사람이 어떻게 그 병에 걸리는가에 대한 문제가 질병에 대한 은유의 시작이다. 앞서 말한대로 의학 지식이 부족하거나 병의 증상이 보여주는 이미지가 그것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질병을 바라보는 방식이 치료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또한 개인적 차원의 치료를 넘어 주변 사람들과 죽음까지도 처리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죽은 사람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남은 생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에이즈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무지는 질병 자체보다 훨씬 더 격렬하게 환자들에게 다가온다.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시선들, 예를 들어 동성애자,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병역거부자 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 보다 오히려 더 크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에이즈 환자에 대한 시선일 것이다. 그 감염 경로와 치료 과정과 무관하게 널리 퍼져 있는 칼날같은 시선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다. 나와 무관하다는 안도감만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는 문제다. 페스트처럼 제 1차 세계대전의 희생자 수를 넘는 죽음을 불러온 질병들에 대해 인류는 속수무책이었다. 암의 정복 즉 질병의 정복은 단순히 생명 연장의 꿈이 아니라 질병에 대한 은유들을 제거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고통을 넘어 선 고통을 받는 ‘질병들’을 주의하고 조심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수잔 손택이 보여준 ‘질병으로서의 은유’의 역사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이다. 더구나 10여년의 간격을 둔 두 편의 글이 시간을 뛰어 넘어 하나로 읽힌다. <해석에 반대한다>를 읽기 위해 거슬러 올라가는 책읽기도 재미있었다.


060428-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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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한문화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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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일을 직업으로 갖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다. 글쓰기가 행복하냐고. 글을 쓰는 일이 직업일 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기거나 그 일에 매달리는 사람들은 다른 일과 다르게 적성과 취미가 맞아야 할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글을 쓰는 능력과 노력까지도 갖추어야 하니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글을 쓰는 직업은 작가 이외에도 많은 직종이 있다. 글의 종류에 따라 대상과 내용이 결정되면 한결 쉬울 수도 있을 것 같다. 작가에 비해서. 하지만 어떤 글이든 쓴다는 행위 자체가 두려움이 아닌 창조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공통점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추측이지만 다른 직업과는 달리 세상에 유일무이한 나만의 창조물이 남게 된다는 사실에 대한 느낌이 색다를 것 같다.

글쓰기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글쓰기의 목적과 대상, 내용과 범위에 상관없이 기본적인 사실들을 나열하는 책부터 문학적인 글쓰기와 실용적인 글쓰기를 나누어 구체적인 방법과 기술을 전수하는 책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책들도 주관적인 또 하나의 창작물로 보인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소양과 배경지식 태도와 관점에 따라 쓰는 글은 천차만별이다. 사람의 생김만큼 다양한 글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로 다른 경험에 따라 글을 쓰는 목적과 방법에 따라 다른 글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독자들이 그런 종류의 책을 읽는 목적도 각기 다르다. 실용적 목적과 배움의 목적에서부터 단순한 호기심과 책을 쓴 사람에 대한 관심까지 책을 읽는 목적만큼 얻어내는 결과도 다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많은 글쓰기에 관련된 책들이 나올 이유가 없다. 결국 글쓰기에 왕도는 없다는 것이다. 비법도 없다. 그냥 쓰면서 스스로 익히고 다른 사람의 글을 읽으면서 배우는 방법이 최선이다. 그러면서 차별화시키고 개성을 만들어가는 것이 글이다. 그런 자세를 얼마나 진지하게 그리고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물론 타고난 재능은 양념이다.

미국의 작가 나탈리 골드버그가 쓴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는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자신의 한계를 확인해보지 못한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행복할 수 없다. 글을 쓰는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에게 쓸 능력은 있는지, 무엇을 쓸 것인지, 왜 써야 하는지 하는 근원적이고 기본적인 문제에 대해 해결될 때까지 글을 쓰지 않고 읽기만 하면 안 된다. 나탈 리가 말하는 방법은 자신의 글쓰기를 극한까지 몰고가라는 주문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써라’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무조건 써야 한다. 쓰면서 생각하라. 준비가 될 때까지 쓰지 않는다면 쓸 수가 없다는 평범한 진리에 부딪힌다. 저자가 주문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볼 때 아주 간단하고 명확하다. 그래서 더 깊이 고민하게 한다. 전체적인 전략과 신념이 문제인 것이다. 이 책은 개별 전술보다 목표와 방향을 설정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다.

짧은 단상들에 제목을 붙혀 놓고 있어서 쉽게 읽히지만 자신의 경험이 녹아 있어 실감나고 진지하다. 폭넓은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일단 전달이 쉬워야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확인한다.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이 책의 비결은 쉬운 표현과 명료한 전달에 있다. 독자들에게 명령형을 사용하는 일은 쉽지 않다. 더구나 제각각일 수 있는 글쓰기의 방법을 단정적인 어조로 말하는 것은 정말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이 책의 저자는 그렇게 했다. 그 방법이 거부감이 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을 담아 진심어린 마음을 전하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 다소 딱딱하거나 이론적인 내용이 되기 쉬운 글쓰기의 방법론을 이렇게 편안하고 쉬운 말로 써내려갈 수 있는 것도 물론 저자의 능력이다. 그래서 이 책은 글쓰기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학교 현장에도, 글을 쓰고 싶었지만 가슴 속에 꿈으로만 묻어둔 어른에게도 좋은 안내서와 지침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다. 주변 사람을 돌아보고 세상을 돌아보고 결국 다시 자신을 확인하는 방법이다. 시나 소설을 쓰는 전문 작가가 되기 위한 글쓰기가 아니라도 글쓰기는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어떻게 쓸 것인가는 문제보다 왜 쓰지 않고 버티는가하고 물어보는 편이 빠르다고 나탈리는 충고한다. 쓰면서 생각하고 정리하고 살아가라. 일단 쓰고 있다면 절반은 성공했다. 작가로서 성공이 아니라 인생을 성공하기 위해 글을 쓰라고 충고하고 싶어지는 책이다. 물론 그 충고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에게 먼저 해야 할 것이다.

06050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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