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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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

많은 소설가들이 짧게 쓸 시간이 없어 길게 쓴다. 클레어 키건의 첫 소설을 인상깊게 느꼈다. 읽었다고 표현하기 보다는 담았다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번역문장이 이러하니 원문을 읽는 독자들이 어떻게 흔들렸을지 짐작이 간다. 단단하고 반짝이는 작은 칼날처럼 예리하게 벼려진 문장들. 힘겨운 일상과 반복적인 일상에 파문을 일으키는 불가해한 힘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1980년대 아일랜드에서 벌어진 실화를 사실적으로 고증할 필요는 없다. 일제 강점기 대부도 선감원은 1982년까지 복지시설로 운영됐으며, 대한민국의 삼청교육대도 1980년대의 일이다.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은 어떤가. 머나먼 유럽 어느 나라의 시대적 사회문제를 들여다보기 위해 이 소설을 읽는 한국인은 많지 않았으리라. 소설을 능가하는 오늘의 현실은 영화보다 극적이고 드라마보다 커다란 반전이 계속된다.

그래서, 어쩌면 1980년의 영국이 아니라 2025년 한국으로 치환해도 부족함이 없다. 개별 사건과 상황들을 차치하더라도 거대한 권력 혹은 종교 혹은 기득권 앞에서 무기력한 개인을 들여다 본다. 과연 그것은 사회 구조와 제도의 문제일까, 아니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개인들의 노력과 용기의 문제일까.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처럼 긴장한 단어와 문장들은 나른한 봄날 오후의 햇살처럼 반복적이고 평화로운 일상과 대비된다. 잠시도 멈출 수 없는,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빌 펄롱과 아내 아일린에게 세라는 전혀 다른 존재였을 것이다. 소설의 결말이나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 소설은 문체가 보여주는 힘을 극대화하여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중편 소설에 장편보다 긴 여운을 새겼다. 5% 미만의 체지방을 유지한 군더더기 없는 몸을 상상했다. 불필요한 수사, 감정적 형용사와 부사가 아니라 주인공의 갈등과 사건의 본질에 접근하는 단순한 서사가 오히려 자극적이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포기할 수 있는 용기는 가능한가. 아니, 이토록 중요한 본질을 외면한 채 삶은 계속될 수 있을까.

황동규는 「즐거운 편지」에서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라고 썼다. 사소한 일은 위대한 일의 다른 이름이다. 사소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함이다. 이처럼 사소한 일은 이보다 소중한 일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이름으로 명명되든 이 소설을 읽는 모든 독자에게는 구체적 진술이 아니라 자기 삶에 대한 상징적 암시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소설가 존 맥가헌은 좋은 글은 전부 암시이고 나쁜 글은 전부 진술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 저는 두 번 읽어서 결말 부분이 앞으로 밀려와 다시 서사가 한 바뀌 돌아가기 전에는 이야기를 다 읽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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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의 기록법 - 읽고 싶은 콘텐츠를 만드는 에디터 10인의 노트 자기만의 방
김지원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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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미술관에 가면 《초현실주의와 한국근대미술》 전시를 볼 수 있고(~2025.07.06.),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는 《모네에서 앤디워홀까지》를 감상할 수 있다.(~2025.08.31.) 올 봄에 두 전시를 보면서 세심한 기획과 전시의 효과를 다시 확인했다. 대개 큐레이터, 북코디네이터 등 분야별로 깊이와 넓이를 갖춘 사람이 필요하다. 대상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정보는 기본이고 깊은 이해와 관찰이 요구된다. 무엇보다도 ‘안목’과 ‘관점’이 재미와 스토리를 만들고 관객의 감동을 배가시킨다는 점에서 좋은 전시로 기억한다.

잡지와 출판 분야는 에디터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관련 분야의 정보를 수집, 축적하는 일보다 동일한 재료로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콘텐츠가 만들어진다. 똑같은 재료로 맛이 다른 요리를 만드는 것처럼. Crtl+C와 Crtl+V, PrtScr 등 입력과정이나 사용하는 어플, 저장과 분류 방법이 아니라 연산과 출력 과정이었다. 당연하겠으나 자기만의 빛깔과 향을 내는 방법 말이다. 다양한 분야의 웹진 에디터부터 글을 쓰는 작가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콘텐츠를 만들고 전달하는 방법에 관한 노하우는 설명하거나 가르쳐주는게 쉽지 않다. 기껏해야 눈에 보이는 도구에 불과한 것들의 나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같은 책을 읽고 서로 다른 문장에 밑줄 치거나, 같은 문장에 감탄해도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고 반응하는 것처럼.

오래 전부터 책 표지에 편집자의 이름을 병기해야 한다는 생각했다. 엉성하고 조악한 초고에 생명과 기를 불어넣는 작업을 하는 편집자의 역할을 결코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탈자나 비문을 잡아내는 교정교열의 기능적 역할이 아니라 책이라는 꼴을 갖출 수 있도록 선명한 주제와 방향을 설정해주고 때때로 결정적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편집자는 그만큼 중요하다. 결정적 오류를 잡아내고 경주마처럼 몰입하고 집중하느라 살피지 못한 조언을 아끼지 않고, 맹점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래서 에디터의 생각과 방법과 태도가 궁금했다. 직업인으로서 편집자의 어려움이나 노하우를 담은 책도 많지만 가끔 무심한 말 한마디에서 차이를 발견하는 즐거움 때문에 편집자의 글을 읽곤 한다. 이제 재무, 회계는 물론 디자인과 편집 분야에서도 AI가 강력한 힘을 발휘할테지만 여전히 인간을 가장 잘 이해하고 뭣이 중헌지를 판단하는 건 인간의 몫이다. 기획서와 보고서, 레포트와 논문을 쓰는 사람이 AI를 피해갈 수는 없고 법률과 의학 분야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하여 지식과 정보의 생산보다 편집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시대다.

열 명의 에디터가 풀어낸 업무와 일상 이야기 안에는 개성을 드러내는 습성과 디테일이 숨어 있다. 그걸 발견하고 이해하거나 적용하고 활용하는 일 또한 또 개별 독자의 몫이다. 이제 다시, 읽고 쓰고 걷는, 익숙하고 단순한 날들의 루틴 속으로 다시 걸어들어갈 수 있겠지. 그렇게 또 시간이 흐르고 다 지나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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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AI와 공부한다 - 우리가 알고 있는 교육의 종말
살만 칸 지음, 박세연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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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뎀으로 PC 통신에 접속하던 기억은 인터넷과 스마트폰 시대로 말끔히 지워졌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거쳐 유튜브가 지식과 정보의 유통 패러다임을 바꿔놓아고 이제 생성형 AI 활용 단계에 접어들었다.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으니 관심을 가져야한다는 의무감도, 시대에 뒤처지는 게 아닌가 싶은 불안감도 아닌 적응과 필요의 문제가 되었다. chatGPT나 Gemini가 인간의 삶을, 아니 인간의 사고와 감정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예측하기 어렵다. 아날로그의 추억을 공유한 마지막 세대가 21세기에 마지막으로 생존했었다는 기록이 먼 훗날 어떻게 읽힐까.

살만 칸은 세계적인 수준의 교육을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교육재단의 설립자다. MIT에서 수학과 전기공학, 컴퓨터과학을 전공학고 하버드경영대학원에서 MBA 를 취득한, 방글라데시 부근 벵골 사람 살만 칸이 보는 AI는 활용해야할 도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교육의 동반자다. 좋은 질문이 좋은 답을 얻는 방법이다.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이 어떤 식으로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학습을 가능하게 할까. AI는 이제 획일적이고 수동적인 공교육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기능을 갖췄다. 단순히 교사들의 수업자료 제작에 도움을 주고, 업무를 덜어주는 차원이 아니라 맞춤식 개별학습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꿈을 꾸게 한다. 그랜드 투어를 시키며 개인 교습을 시키던 유럽의 귀족들이나 도제식 수업으로 될성부른 나무의 떡잎부터 가르쳤던 양반교육은 근대이후 국민교육 제도 안에서 경쟁과 서열화의 어두운 그림자를 남겼다.

누구나 홈스쿨링에 투자할 만한 시간과 노력을 갖출 수 없고, 학교교육의 문제를 인식했다고 1:1 개인 학습으로 전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살만 칸은 AI의 활용여부에 따라 개인의 발달단계와 학습 능력에 따른 ‘공부’가 가능한 방법들을 제시한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12년간 전국의 동갑내기들이 기계처럼 1년에 한번씩 계단식으로 학습능력이 향상하거나 모든 과목에서 고루 흥미를 나타내는 건 불가능하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운영되는 국가수준의 교육과정과 학년제를 모두 무너뜨릴 수도 없다. 이제 무엇을 상상하든 실현가능한 현실의 토대가 마련되었으니, 남은 숙제는 과감한 선택과 방법의 변화다. 중지를 모으고 고민하며 합의하고 실천하는 데까지 또 얼마나 많은 갈등과 충돌이 벌어질까. 그렇지 않으면 늘 그러하듯 ‘지금 이대로!’

AI 시대에 인간에게 남겨진 일은 얼마나될까. 아니 ‘나’는 무엇으로 나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인강 시대에 접어들었으나 수백억 연봉을 받는 1타 강사가 셀럽이 되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살만 칸은 어떻게 바라볼까. AI보다 똑똑하거나 잘 가르칠 수 있는 교사가 있을까. 물론 기본 전제는 학습자 개인의 자발성이다. 상상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시대를 살면서도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관습적 사고에 젖어 있다면 AI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 교사와 협력하는 AI, 교육의 목적과 방법을 뒤바꿀 AI, 시험과 진학과 자격증에 근본적 문제를 일으킬 AI,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무력화시킬 AI, 일자리와 미래 전망을 뒤흔들 AI에 대해 이제 조금 진지하고 적극적으로 생각할 시점이 되었다. 아니, 더이상 외면할 수 없는 시간이 찾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술의 이면, 눈부신 인공 지능 시대를 살아내는 힘은 여전히 인간다움이다. 오랜 시간을 견딘 인류의 지혜와 삶의 문제들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방법과 태도를 변화시키는 건 도구의 활용보다 근본적인 질문과 철학적 고민들이다. 켜켜이 먼지쌓인 고전과 역사적 과정을 살피는 혜안은 기막힌 요약과 음성 대화로 즉답을 내놓는 퀴즈식 지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제 인류가 지향해야할 읽기와 쓰기의 미래도 혁명적 변화가 도래했음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어느 시대에나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막막해진다. 변화를 감지하고 흐름을 읽으려는 이유가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경쟁에서 낙오하지 않기 위해서일까.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너머를 고민하는 ‘공짜 공부’, 고민의 출발지점이 달라 살만 칸의 이야기에 힘이 실린다. AI 시대의 자기계발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 언젠가 겪어야할 변화의 과정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선택할 것이냐의 문제를 담고 있고 있는 인문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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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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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한 소수의 작가보다 고요한 다수의 작가에 주목하는 독자들이 많다. 존 윌리엄스와 헷갈릴만큼 줄리언 반스의 목소리는 반옥타브 낮다. 적어도 내겐 그렇게 들린다. 우연히 소설과 미술책 몇 권을 읽다가 제목에 ‘우연’이 들어 있어 손이 갔다. 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보다 같은 제목의 황인숙 시집을 먼저 읽은 것처럼 닐이 시간을 거슬러 엘리자베스 핀치를 추억하며 그의 삶을 추적하자 문두스가 파라두를 따라 가는 여정이 먼저 떠올랐다. 어차피 소설이 누군가의 삶, 어느 순간의 진실, 어떤 공간에 비밀을 밝히는 것이라면 인간과 시간과 공간이 어떻세 서로 다르게 조합되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여기-나’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대학에서 ‘문화와 문명’을 가르치는 엘리자베스 핀치Elizabeth Finch(EF)는 독신으로 살다 세상을 떠난다. 강의를 듣던 닐은 EF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년 간 일년에 두 세번쯤 75분 정도 점심으로 파스타를 먹는다. 두 번 이혼했으며 자식이 셋인 닐은 EF가 세상을 떠나고 자신에게 그녀가 책과 기록을 남겼다는 사실을 알고 EF의 오빠 크리스토퍼 핀치와 친구들에게 EF에 관해 묻는다. 그러다 율리아누스와 에픽테토스를 만난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인용하며 서른 한 살에 죽은 J(율리아누스)의 삶을 추적하는 과정은 액자 속의 액자처럼 소설의 중층 구조를 이룬다. 그가 살던 시대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인류의 역사를 톺아보는 이야기는 EF의 생각을 추론하는 형식으로 작중 화자 닐이 서술한다.

소설에서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분명하게 들린다. EF와 닐 그리고 크리스토퍼 핀치와 닐의 친구들 몇몇이 등장하지만 소설의 주인공은 EF도 닐도 아니다. 두터운 액자 속에 엽서만한 그림처럼 율리아누스가 놓여 있다. 저 머나먼 과거의 이야기, 인류의 역사를 뒤흔들만한 작은 사건과 한 인간에 대한 오해. 가정법으로 후회를 곱씹는 어리석음이 인간의 숙명이라면 줄리언 반스는 EF를 통해 율리아누스 혹은 이후의 수많은 닐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보다.

안다고 달라지나. 모른다고 불행한가. 활자를 따라 걷는 사람들에게 아주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를 들려주는 작가들에게 매료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흔들림없는 편안함은 침대가 과학이라 외치는 어느 가구 회사의 슬로건이 아니라 불안과 공포를 숙명처럼 안고 사는 현대인의 꿈인지도 모른다. 이미 정해진 길을 걷고 싶다면, 이미 결정된 미래를 알고 살던 시대를 우리는 이미 통과하지 않았던가. 자유를 누리려면 불안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법이다. 배교자로 낙인찍힌 율리아누스의 이야기가 아니라 왜 타인을 향한, 아니 다른 종교에 대한 분노와 멸절을 누가 가르쳤을는지 묻고 있는 줄리언 반스의 목소리는 크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반종교,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위해 쓰여지지 않았다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EF와 닐의 이야기로도 충분하고 율리아누스가 아니어도 소설은 성립한다.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EF 삶이든, 고대 로마의 황제 이야기든, 남은 생을 또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는 닐이든 상관없다. 비온 뒤에 해가 떴고 우리도 또 내일을 살아야 할 테니, 소설 속의 인물들과 현실을 살아내야 하는 우리는 별반 다르지 않은 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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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 -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불편한 공존
마이클 샌델 지음, 이경식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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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소비자일 뿐만 아니라 민주적 시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 개정판, 서문

 

이 한마디를 깨닫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자본주의는 숨 쉬는 공기와 같습니다. 달콤한 사탕과 과자를 먹으려면 종이 지폐와 동전을 내밀던 시절을 지나 요즘 아이들은 엄카를 들고 편의점에 갑니다. 방법이 달라졌지만 의 중요성은 가르치지 않아도 자기 욕구 충족을 위한 필수 조건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심각한 문제에 부딪치지 않으면 그 중요성을 간과하며 살아갑니다. 경제 시스템인 자본주의와 정치 제도인 민주주의가 사실 한 몸이라는 걸 이해해도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해석은 전혀 달라집니다. 마이클 샌델이 1996년에 성장분배문제를 처음 들고 나온 건 아닙니다. 2023년 개정판 서문에 다시 한번 이 문제를 들고나온 건 30년이 지난 오늘도 해결이 난망하기 때문일 겁니다. 국가의 역할과 개인의 자유는 상충합니다. 모든 개인이 가진 조건과 상황이 다르고 공동체의 관점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 아닐까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시대를 지나면서 부의 편중 현상과 공동체의 의식이 어떻게 붕괴됐는지 살피는 건 철학자의 관심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국가 공동체를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거대 국제금융 자본의 등장, 국경이 무의미한 다국적 기업과 초부자의 탄생은 능력주의와 결합해 현대판 계급제를 내면화하는 원인이 되었을 겁니다.

 

대한민국의 정치 상황은 한 번도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줍니다. 자고 일어나면 계엄령이 선포됐다가 해제됐다는 뉴스를 듣게 되고, 하룻밤 사이에 대선 주자가 교체되기도 합니다. 검찰과 사법 기관의 착각을 지켜보면서 기득권과 거대한 이익 카르텔이 얼마나 견고하게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지 확인합니다.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은 교과서에나 배우는 유토피아일까요. 현실에서 실현 불가능한 가치일까요. 마이클 샌델이 사는 미국의 건국 정신과 자본주의 발달의 역사는 대한민국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문화와 전통, 각자의 욕망이 다르고 삶의 목적과 지향점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비슷하다 해도 도달하는 방법과 태도는 많이 다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궁합이 잘 맞지 않는 민주주의는 여전히 삐그덕거리며 세계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정치와 경제가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 정치경제학이 실제 삶의 지배원리라는 걸 안다고 해도 의 삶이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바뀌어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아주 오랜만에 개정판을 낸 이유는 7무엇이 잘못되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1990년 이후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살피는 건 오늘 우리들의 문제를 이해하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한국인은 미국을 준거집단으로 삼고 있으니까요. 선진국의 사례를 운운하는 관료, 학자 등 전문가 집단은 대개 미국식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들이댑니다. 영국, 독일, 프랑스와 북유럽 등 사회주의가 결합된 복지국가 모델이나 수정 자본주의는 빨갱이들의 주장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의 신념은 종교적 믿음보다 강고합니다. 자신의 정치적 이념이 아니라 경제적 이해관계나 삶의 질을 따져보면 생각이 조금 바뀔까요? 마이클 샌델은 오바마와 트럼프를 거쳐 바이든 정부에서 개정판을 냈습니다. 또 다시 트럼프가 집권하리라는 생각은 해 본적도 없었을 겁니다. 그것이 미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세계 질서와 민주적 가치를 어떻게 훼손하고 있는지에 대해 또다시 고민하며 후속편을 쓰고 있을까요.

 

마이클 샌델이 말하는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의 핵심은 경제 문제일 겁니다. 돈 문제와 상충하는 민주적 가치들, 개인의 욕망과 부딪치는 공동체의 질서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까요. 미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상황입니다. 중도우파 정당인 민주당이 진보, 좌파라는 평가를 받고 극우 이익집단인 국민의힘이 충돌하는 대한민국의 미래는 어떠할까요. 거대 양당에 대한 지지여부와 무관하게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동거는 대한민국에서 어떤 형태로 지속 가능할까요. 비 오는 토요일, 책 한권을 마주한 사람들의 속내는 제각각이었을 겁니다.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든 반대하든 미국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현실의 문제를 더 깊이 고민했을 테지만 정답과 결론은 언제나 난망합니다. 길이 정해져 있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었을까요. 대부분의 사람은 없는 길을 만드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러 선택지 앞에서, 자기 삶의 방법과 태도를 돌아볼 뿐입니다. 그 작은 변화가 보이지 않는 파문을 일으키고 동심원의 바깥으로 퍼져나가며 또 다른 물결과 부딪치며 앞으로 나아가리라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여기는 언제나 끔찍해 보입니다. 희망없이 살아갈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대안을 찾는 게 아니라 작은 관심과 참여가 변화를 가져올 거라는 작은 믿음은 지나치게 나이브한 생각일까요.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책의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불편한 공존이라는 부제처럼 어차피 우리는 수많은 불편한 상황, 불편한 사람, 불편한 미래와 마주해야 합니다. 그 불편함을 인식하는 지점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다음 모임에는 대통령도 국무총리도 있는나라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듯싶습니다.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변화무쌍한 민주주의가 불편한 자본주의를 어떻게 바꿔나가는지도 눈여겨볼 차례입니다. 아니, 자본주의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이끌어가는지도 살펴야 합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오랫동안 불편하게 공존했다. 자본주의는 개인적 이익을 위한 생산적 활동의 조직화를 추구하는 반면, 민주주의는 시민의 자치 참여를 위한 권한의 부여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시민의식의 정치경제학은 두 개념을 조화롭게 만들겠다는 의도로 등장했다. -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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