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부조화 이론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82
레온 페스팅거 지음, 김창대 옮김 / 나남출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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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부조화 이론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심리적으로 불일치하는 두 개의 인지 요소(아이디어, 생각, 믿음 등)가 사람들에게 있을 때 부조화가 발생하며, 사람들은 행동이나 인지를 수정하거나 새로운 인지 요소를 추가함으로써 부조화를 감소시키려고 한다는 이론이다. 1957년, 레온 페스팅거는 주장은 이전에 보상과 강화로 인해 인간의 행동과 태도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강화이론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인지부조화를 줄이려는 노력이 인간을 변화시킨다는 주장은 어떤가.

범죄자가 인지부조화를 극복하는 방법은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정치인들이나 처벌받지 않은 권력자도 마찬가지다. 이는 신포도 기제나 달콤한 레몬 기제와 같은 합리화의 일종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레온 페스팅거는 비일관성inconsistency 대신 논리학적 의미가 덜한 부조화dissonance, 일관성consistency이라는 용어 대신에 중립적 용어인 조화consonance라는 개념으로 인간의 생각과 행동과 태도를 설명한다. 부조화 이론의 기본 가설은 다음과 같다.

(1) 부조화의 존재는 심리적 불편함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부조화를 감소시켜 조화를 달성하려는 동기를 유발할 것이다.

(2) 부조화가 발생하면 그것을 감소시키려 할 뿐만 아니라, 부조화를 증가시킬 가능성이 있는 상황이나 정보를 적극적으로 회피하고자 할 것이다.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라는 것은 마치 배고픔이 배고픔의 감소를 지향하는 행동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부조화의 감소를 지향하는 행동을 유발하는 선행조건으로 볼 수 있다.(20쪽) 부조화가 조화를 지향한다는 전제에 동의하지 않으면 인지부조화 이론을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론이 성립하지 않거나 틀린 건 아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합리적 판단, 논리적 과정을 비난하기 쉽다. 인지부조화 때문이다.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타인이 틀렸거나, 세상이 글러먹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조화는 모든 인간의 내면적 평화를 가져오지만 옳고 그름이나 도덕적 기준에 부합하는 건 아니다.

심리학의 제반 영역들이 경제학, 법학, 철학, 정치학, 인류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철학적 질문에 답을 주기 시작한 건 불과 100여 년에 불과하다. 최근 뇌과학의 발달로 인체의 마지막 신비가 밝혀지는 듯하다. 모든 게 유전자 혹은 호르몬 탓이라는 농담과 함께 진화 생물학과 진화 심리학의 관점에 대한 비판이 뒤섞여 ‘나’의 생각과 감정이 어떻게 내 것이 되었는지, 그 근원은 어디에서 출발하는지 다시 한번 살폈다. 다양한 실험을 담은 논문을 정리한 이 책은 사회심리학 분야의 기념비적 이정표를 세웠다. 타인을 향한 자신의 태도와 감정 조절, 행동의 동기와 추동력은 오로지 확고한 신념이나 의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많은 사유의 시간 대신 페스팅거의 주장에 귀 기울여봐도 좋겠다.

당신, 아니 그들은 왜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가. 인간은 일관성 있는 기계나 로봇이 될 수 없다. 어차피 모순된 말과 행동과 감정에 허우적거린다. 그 과정에서 겪는 내적 고통과 인지부조화를 극복하는 방법은 배울 필요가 없다. 본능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기적 존재인 개인은 마음의 평화와 안정, 자존심과 인정 욕구 때문에 끊임없이 노력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의 생각과 행동과 태도가 아름답고 행복하게 태어난다고 믿던 시절은 행복했을까. 우리는 모두 아이였다. 여섯 살 아이의 눈과 다섯 살 아이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 수 없으니 각자 자기 위로와 변명으로 일관하며 객관성과 합리성에 기대는 대신 인지부조화 극복에 골몰하는 건 아닐까.

현대인의 불안과 고독은 치유해야 할 질병이 아니다. 누구나 겪는 삶의 전제 조건이다. 자유를 누리며 불안이라는 세금을 내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다. 누군가 곁에 없어 고통스러운 외로움과 달리 타인에게 기대지 않는 고독을 즐길 수 없다면 홀로 선 단독자로 살 수 없다. 한 인간의 깊이와 넓이를 측정할 수는 없으나 사람 다 거기서 거리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심리적 태도와 본능적 욕망을 알고 대처하는 방식과 태도가 한 인간의 삶을 결정한다. 무엇이 옳은가, 더 나은 것은 어떤 것인가, 보다 중요한 질문인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성찰이 없는 한 어떤 외부적 시선과 조건으로도 극복되지 않을 것이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지 않는다면 즐거운 일상이 언제 어떻게 슬픔과 고통으로 바뀔지 알 수 없다. 지옥은 어딘가 구멍을 파고 기다리는 함정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영혼의 감옥일 뿐이다. 하루를 견뎌 내일을 맞이하는 평범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타인과 세상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가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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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읽는 정신분석 - 김서영의 치유하는 영화읽기 일상인문학 2
김서영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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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과 현상은 무관할까. 대한민국 감독 중 유일하게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수상한 김기덕의 영화는 감독의 삶과 분리될 수 있을까. 2007년 초판이 나왔고 2014년 개정판을 읽었다. 그리고 독서 모임 현장에서 책 두께를 비교하며 목차를 비교했고, 김기덕과 봉준호의 영화 등 무려 90쪽이 삭제된 또 다른 2021년 판본을 확인했다. 17년간 한 명은 나락으로 떨어져 코로나로 객사했으며 한 명은 흥행과 작품성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감독으로 성장했다. 김서영의 평가는 현실과 상반됐고, 개정판을 거쳐 사라진 텍스트 안에서만 숨 쉬고 있을 터. 물론 모임에서는 두 감독에 대한 평가나 영화 이야기보다 인간의 심리와 정신분석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은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감각이다. 주체적으로 보고 듣는 행위와 구별된다. 같은 영화를 보면서 보고 듣는 것이 다르다. 같은 코스를 여행해도 전혀 다른 걸 보고 듣고 맛보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은 그렇게 제각각 흐르며 정서적 반응을 통해 이성을 뒤흔들기도 한다. 합리적 판단과 논리적 분석은 그래서 때때로 공허하다.

모임 전 《조커 2》를 함께 보았다. 고담시의 어둠과 음산한 분위기를 압도하는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어떤 표현으로도 담아내지 못할 듯싶다. 한 배우의 존재감이 서사를 지배한다. 뮤지컬 형식에서 호흡을 맞춘 레이디 가가조차 점으로 만들어 버리는 느낌이다. 지나친 재능은 독이 되고 타고난 외모와 분위기가 연기의 한계를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을 극대화하거나 뛰어넘는 영화를 만나기도 한다. 내용, 전개, 구성, 시각적 효과 등과 무관하게 조커의 몸짓과 표정에 집중했다. 부모의 양육 태도, 유년 시절의 트라우마가 한 인간의 인생을 좌우한다는 운명론적 세계관에 동의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몇몇은 그 상처가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 수도 있으나 대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며 시간은 상상할 수 없이 많은 것들을 먹어 치운다. 프로이트의 리비도, 융의 집단 무의식으로 조커라는 캐릭터를 분석하는 일은 헛되고 헛될 수도 있다. 우리의 관심사는 언제나 ‘나’의 지금-여기다. 상징계에 머물며 상상계를 살지만 실재계를 추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영화는 여전히 현실도피의 공간이 아니라 충족하지 못한 욕망의 탈출구이거나 실현할 수 없는 걸 알면서도 꿈꿀 자유를 확인하는 시간이다. 물론 조커를 보며 공감과 몰입을 하는 관객도, 안도와 샤덴프로이데를 느끼는 관객도 있었을 것이다. 같은 영화, 다른 생각들이 결국 라캉이 말한 주이상스를 확인하는 방법이 아닐까.

김서영은 정신분석을 공부했다. 영화는 분석의 대상이자 도구다. 프로이트와 융, 라캉과 지젝을 앞세워 정신분석과 분석심리, 히스테리와 강박을 설명하고 상징계와 상상계와 실재계의 구조를 파악하려 애쓰지만 그 개념조차 생소한 독자들에겐 낯설기만 하다. 영화를 보는 다양한 관점은 존중되어야 마땅하고 각각의 관점과 준거 틀이 충돌하는 지점을 들여다보는 일은 흥미롭지만, 영화를 ‘재미와 감동’ 이외의 수단으로 삼지 않는 대부분의 관객들에겐 시집 뒤에 붙은 해설, 소설 뒤에 붙은 비평만큼 헛되고 헛될 수도 있다.

지나간 영화를 떠올리며, 새로운 영화를 소개받으며 인간의 ‘심리’에 대해 들여다보는 기간의 텍스트로는 부족함이 없었다. 영화는 때때로 소설처럼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하니까. 어떤 자세로 영화를 보든, 실존 인물이 아닌 영화 속 캐릭터에 몰입하든 돌아보는 건 결국 ‘나’와 관계들 그리고 현실과 미래일 테니까.

꿈의 조각을 항상 한 주머니에 넣고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을 보살피는 방법입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생활의 어딘가에 마음을 기쁘게 하는 일이 놓여 있다면 우리는 이로부터 삶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 3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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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학 / 시학 - 그리스어 원전 번역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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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서는 이쯤 해두자.’

놀랍게도, 각 장마다 반복되는 ‘이쯤 해두자’는 마지막 문장 앞에서 한참을 서성인다. 아리스토텔레스조차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했고, 모두 설명하거나 일일이 밝힐 수 없는 것은 다음을 기약했다. 이것은 대충 마무리하자는 태도와 전혀 다르다. 최선을 다해 정교하게 분석하고 사례를 들어 증명한 후에도 이해되지 않는다는 독자 혹은 상대를 위한 마무리다. 안되면 될 때까지,라는 불굴의 정신은 무모함 혹은 집착일 수도 있다. 이쯤 해두자는 건 더 쉽게 설명하거나 구체적으로 알려줘도 넌 알 수가 없을 거라는 포기와 조롱이 아니다. 제 나름의 경계와 기준을 설정하지 않으면 길을 잃기 쉽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늪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경고처럼 들린다.

왜 아니겠는가. 당시에 수사학은 청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설득의 기술이자 출세의 수단이었으니 긍정과 부정, 두 개의 시선이 교차했다. 소피스트와 플라톤이 그랬다. 상대를 설득하는 대화법은 인간관계, 처세술, 비즈니스 등 세상을 살아가며 꼭 필요한 능력이다. 하지만 합리적 이성을 바탕으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면 감정에 호소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있으나 사람의 마음을 얻기 어렵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고 하지만 대개 감정으로 판단을 흐리고 합리적 선택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이 숱한 심리학 실험과 경제학 이론으로 확인됐다. 특히 대화와 토론에 개입되는 상대방에 대한 호감 정도, 감정적 판단, 정치와 종교적 신념 등은 수사학을 무용지물로 만들기 쉽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도 3권으로 나누어 기술하는 수사학 중에서 2권에 ‘감정’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테크닉을 가르치는 대신 수사학이 학문으로서 정착될 수 있는지 점검한 후 구성요소를 확인하고 필요성을 역설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심의용, 법정, 과시용 등 연설을 세 가지로 나눠 설명하고 정체에 따라 수사학의 역할과 의미를 설명하며 모든 연설의 공통 근거로 ‘예증’과 ‘생략삼단논법’을 제시한다. 싸움의 기술, 연애의 기술처럼 특별한 팁을 주거나 쉽게 배울 수 있는 비법을 전수하는 대신 인간의 이성과 감정을 살펴 합리적 이성의 지평을 넓힌 것이다. 심리적 편향과 숱한 오류로 허우적거리는 평범한 사람들의 말싸움과 자기주장과 감정의 배설을 우리는 매일 경험하며 산다. 그렇다고 수사학이 특별한 사람들을 위한 논리 도구라는 의미는 아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가 아니라 어떤 선택이 합리적이며 공공선에 부합하는지 살펴야 한다. 시대정신에 걸맞은 목적과 가치에 합의하는 길은 멀고도 험하지만 포기할 수 없다. 수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토록 강조하고 싶었던 말은 ‘이쯤 해두자’가 아니라, 아직도 그쯤에 머물러 있는지에 대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아주 오랜만에 다시 읽는 ‘시학’은 새삼스럽다. 서사시와 극의 차이를 확인하기 위해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시학’은 그리스 고전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과 오딧세이, 일리아스를 읽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특히 필연성과 개연성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말하는 듯하다. 황당한 서사보다 견디기 어려운 건 ‘마침 바로 그때’ 같은 사건의 우연성과 개연성 없는 허구다. 여전히 통용되는 원칙들이니 고전을 반복해서 읽는 이유는 결국 보편성 때문이다. 통시적 관점에서 일관되게 적용되는 기본들. 시간을 견딜 수 있는 건 생각보다 많지 않다. 고전의 힘은 결국 깊은 사유와 장기적 안목 그리고 이성에서 발원한다.

“비극의 즐거움은 ‘연민과 공포’에서 비롯되며 시인은 모방으로 이런 즐거움을 산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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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착각 - 인간 본능이 빚어낸 집단사고의 오류와 광기에 대하여
토드 로즈 지음, 노정태 옮김 / 21세기북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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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큰 소수가 집단 전체를 잘못 대변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다. - 15쪽

『평균의 종말』에서 토드 로즈가 보여준 탁월한 통찰을 잊을 수가 없다. 최초의 발견이거나 새로운 발명이어서가 아니다. 이론을 뒷받침하는 사례와 그간의 연구 성과를 비교 분석하는 엄밀함, 인간의 삶과 현실에 적용하려는 태도 때문이다. 한 사람의 모든 책이 후질 수 있으나 훌륭한 책을 사람의 모든 책이 좋을 수도 없다. 그래서 믿을 만한 저자, 믿고 보는 작가가 내게는 없다. 책 선택의 어려움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독서는 시간과의 싸움이며, 밥벌이를 위한 노동처럼 자기 삶의 일부와 맞바꾸는 행위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누군가를 위해 시간을 내어주는 행위는 무언가를 하기 위한 노력만큼 숭고한 일이다.

저자의 이력이 순탄하지 않은 건, 배우가 삶의 경험을 연기에 녹여내는 상황과 유사하다.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생각과 감정이 반영되고 지향점과 방향이 색다르기 때문이다. 평범한 저자들의 책이 모두 평범하다는 말은 아니지만, 연구자의 태도 또한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정교하고 엄정한 결과에 대한 해석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면에서 토드 로즈의 관점과 태도는 우리에게도 충분한 울림을 준다. 집단 착각에 빠진 현대인을 향한 저자의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강렬하다. 침묵하는 다수에 대한 경구, 휘둘리는 당신을 위한 세네카의 조언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관습적 사고에 젖은 사람, 밴드 왜건 효과에 익숙한 사람, 필터 버블로 에코 탬버에 갇힌 사람을 위한 도구다.

그러나 언제나 중요한 건 독자의 태도다. 스스로 자기 점검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책을 선택하기 어렵고, 선택한다 해도 자기 객관화 능력이 없다면 남의 얘기로 치부할 수 있다. 남들이 다 그렇게 말한다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경계와 선이 분명하며 나만의 기준이 확실하다는 판단과 선택의 오만함,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사회는 어떠해야 하는지 분명한 도덕적 기준, 자기 자신을 잘 안다는 착각에서 우리는 자유로운가. 자기 검열에 시달리며 지나치게 경계하고 끊임없이 살피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을까.

전체 3부 9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집단 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진영 논리와 정치적 이해관계를 점검할 수 있는 소중한 지침서다. 존 롤스의 ‘무지의 베일’이 전가의 보도는 아니지만 객관성을 확보하며 공론장에서 합리적 토론을 가능케 하는 지침이 될 수는 있지 않을까. 논리적 사고 훈련이 미흡하면 나이, 직업 등과 무관하게 ‘감정’에 휩쓸려 진실을 묻어버리고 자기 이익에 충실한 아비규환의 세상이 되기 쉽다. 우리가 문명사회로 한발씩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공동체의 합의, 타인의 감정과 생각에 대한 존중, 다른 의견을 말할 권리 등이 보장된 사회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기업, 학교, 국가 등 어떤 조직도 집단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지속 가능할 수 없다. 뒤처지거나 자연스럽게 도태되거나 자멸하는 지름길은 독단과 고집, 일방적 의사소통, 침묵과 순응 때문이다.

저자는 사회심리학적 질문을 아끼지 않는다. ‘다수의 무지Pluralistic Ignorance’, ‘집단 착각Colletive Illusions’, ‘동료 압박Peer Pressure’으로 인해 우리가, 아니 ‘나’가 얻는 것은 무엇이고 ‘우리’가 잃는 것은 무엇일까. ‘따라쟁이의 함정Copycat Trap’이 본능에 가까운 생존 전략이라면 집단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모방의 연쇄Copying Cascade’, ‘침묵의 나선Spiral Of Silence’ 등 이론과 개념을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렵다. 아니, 어쩌면 몰라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어차피 우리가, 현실에서, 수없이 부딪히는 문제들에 대한 명명법에 불과하니까. 문제는 언제나 해결책과 대안이다.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고치지 않으면 그대로다. 그래서 때때로 ‘읽는’ 행위 덧없음과 허무함이 밀려온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이대로 괜찮은가. 이 질문만 반복한다.

삶에서 어떤 처지에 놓여 있든 상관없다. 사적인 자아와 공적인 자아를 정렬하는 일은 언제 시작해도 늦지 않다. 조화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 헌신할 때,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더 나은 삶을 살게 된다. 그렇게 내면과 외면이 일치하는 이들은 집단 착각을 만들고 키워나가는 데 기여하지 않는다. 집단 착각에 빠져 있는 다른 사람들이 탈출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 3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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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판 사나이 열림원 세계문학 5
아델베르트 샤미소 지음, 최문규 옮김 / 열림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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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 인물이자 친구인 출판업자 에두아르트에게 보내는 샤미소의 편지도 모자라 푸케의 편지까지 덧붙인 ‘픽션’이라니. 이러한 장치들 – 액자 구성, 편지 형식 등은 소설의 한계, 어차피 서로 꾸며낸 이야기, 공상과 상상에 기댄 허구, 실제하지 않는 인물과 사건이라는 작가와 독자 사이의 암묵적 합의에 도전하는 장치다. 목적은 단 하나, 이 이야기가 진짜 거짓말인지, 거짓말 같은 진짜인지 헷갈릴수록 ‘재미’있기 때문이다. 신뢰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가 오랫동안 독자들에게 ‘실제’로 착각하게 하거나 적어도 실제일 수도 있다는 기대 혹은 의심을 갖게 했다면 충분한 효과를 거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회색 옷을 입은 사내에게 그림자를 파는 순간, 편지는 무용지물이 되고 개연성 없는 허구, 어른을 위한 우화라는 사실이 금세 드러난다. 노력에 비해 효과는 거의 없는 셈이다. 어쨌든 페테 슐레밀이 샤미소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고백과 하소연은 읽는 내내 독자들에게 먼 옛날 혹은 아주 먼 곳에서 실제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의문으로 자신을 속이는 효과를 얻는다.

금화와 바꾼 그림자의 상징 혹은 알레고리를 두고 80쪽 가까이 해설해야만 했는지 찬반이 팽팽했다. 본문(130쪽)에 비해 해설과 보론의 분량이 너무한 거 아닌가. 정답을 찾기 위해 소설을 읽는 게 아닌데 그간의 해석과 논의들을 상세히 알아야 하는가. 개별 독자의 해석과 상상력 혹은 오독의 자유를 무참히 짓밟는 건 아닌가. 의도가 무엇이든,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든 대부분의 독자는 끝까지 읽었으리라. 그래서 ‘그림자’는 금화를 주고도 살 수 없는 혹은 팔 수 없는 것에 대한 교훈인가, 잃어버린 시간이나 양심일까, 공동체가 공유하는 암묵적 가치일까. 무엇 때문에 사는 동안 지켜야 하는 그림자보다 죽은 후에야 가져가겠다는 영혼을 지키려 하는가. 아니, 영혼은 무엇이며 사후세계는 존재하는가.

열두 명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각자의 생각과 추측 혹은 기대가 뒤섞이거나 무너지는 동안 각자 새로운 생의 감각들을 찾는 시간은 아니었을까. 오직 모를 뿐이기에 여전히 질문을 던지고 답이 없는 삶에 의문부호만 보태는 건 아닌가. 결국, 그림자를 되찾지 못한 슐레밀은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 나서거나 그 상처로 절망하는 대신 장화를 신고 세계를 누비는 호모 노마드의 삶을 택한다. 자연으로 회귀하는 인간의 숙명, 아니 물질적 순환 구조에 대한 순응, 그도 아니면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처럼 보이지 않는 무언가 있을 거라는 막연한 환상 혹은 희망 따위가 삶의 고통에서 구원해줄 환각제로 작용하는 건 아닐까.

메피스토펠레스처럼 영혼을 팔라고 유혹하는 회색옷 입은 사내는 악마가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는 보편적 현대인의 모습이 아니냐는 도발적 질문처럼, 자본주의 사회의 교환가치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우리들의 자화상이 악마를 닮았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낭만적 문제해결방법은 현실도피일까. 낭만주의 예술 동화이면서 19세기 본격적인 자본주의 태동기의 사회소설이라면 지나친 해석일까. 봉건 영주제가 물러나고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자리 잡는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는 반영론적 관점은 정호승의 『연인』, 안도현의 『연어』처럼 따뜻한 어른 동화로 읽으려는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 걸까. 프랑스 혁명으로 고향을 떠난 작가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대신 독일사회에 동화되어 경계인, 전달자, 매개인의 역할에 충실한 듯하다. 수많은 구전 동화, 신화와 전설과 민담들에서 모티프를 차용했다고 하더라도, 이야기의 통일성이 부족하고 장화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작동했더라도 우리에겐 여전히 현실을 견딜 수 있는 이야기가, 내일을 꿈꿀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냥 그렇게 때로는 꿈을 꾸며, 상상을 즐기고, 일탈과 변주를 즐기고, 비록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짜릿하고 아쉬운 설렘을 느낄 수 있다면 충분하지 않은가. 소설은,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기대를 줄이고 한계를 명확히 하면 실망 대신 고마움과 감사한 마음이 든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을 바라보는 건 금화가 없어도 되지 않은가. 어느 시인의 말대로 세계는 유한하며 그 인식의 한계는 개인의 앎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는 데 공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소설은 앎이 아니라 현실 원칙에서 벗어난 쾌락 원칙을 따른다.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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