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의 시대 창비시선 495
장이지 지음 / 창비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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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손 편지를 쓴 게 언제일까. 편지의 시대라는 제목 때문에 한참 기억을 더듬었다. 파란색 펜으로 대각선으로 쓰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던 시절은 구한말쯤 되나. 키보드를 두드리고 엄지족으로 진화(?)하는 동안 내가, 아니 우리가 잃어버린 건 아날로그 감성만은 아닐 것이다. 레트로를 찾고 추억 마케팅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일도 어쩌면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아니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리라. 좋은 삶, 즐거운 생활이 아니라 견뎌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지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자주 든다. 일관성과 걱정은 상상력 없는 자들의 한계일까.

당신에게 쓰는 시는 언제나 나를 다치게 하네 쓰면 쓸수록 나는 죽음에 다가가네 수많은 통점으로 뒤덮인 글쓰기, 편지, 당신에게 쓰는 시…… 나의 수많은 기절!

_「사랑의 폐광」중에서

시집을 읽지 않으면 산소 없는 공기를 흡입하듯 활자에 질식할 수 있다. 텍스트의 안과 밖을 살피지 못하고 저자와 씨름하거나 논리의 정교함을 다투다 여유를 잃게 된다. 삭막한 마음은 메마른 모래처럼 쩍쩍 갈라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금세 봄비가 그리워지다가 신발 밑창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질척이는 흙을 떼어내곤 한다. 읽는 인간에게 시가 필요하듯 시인과 소설가는 사랑으로 숨쉬는 게 아닐까.

줄리언 반스의 소설보다 먼저 읽은 편지의 시대 탓일까. 소설의 한 구절을 오래 곱씹었다.

시인들은 나쁜 사랑–이기적이고 비열한 사랑–을 훌륭한 사랑의 시로 전환시킬 수 있는 듯하다. 산문 작가들은 이러한 놀라울 정도의 부정직한 변형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나쁜 사랑을 나쁜 사랑에 대한 산문으로 전환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인들이 우리에게 사랑을 이야기할 때 질투심(그리고 약간의 불신감)이 생긴다. - 『10과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 줄리언 반스

장이지도 그랬을까. 사랑의 폐광에 갇힌 사랑은, 편지의 시대를 돌이켜 나쁜 사랑을 훌륭한 사랑으로 전환시킨 걸까. 줄리언 반스의 내심은 질투일까 불신일까. 아니 그보다 읽는 사람들 마음에 남은 그 사랑의 흔적들은 상처일까 추억일까. 물론, 그게 궁금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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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각본
김지혜 지음 / 창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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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가 사람을 망친다. 대개 인간관계(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하는 2차적 관계인 사회자본뿐만 아니라 1차적 관계인 가족관계는 우선 인격 형성, 사회화, 보험, 복지 기능을 담당한다. 뿐만 아니라 문화자본의 전수와 경제 자본의 세습을 통해 한 인간의 삶을 결정한다. 그 단단한 체계를 거부하고나 변화시키는 건 생각보다 대단히 어렵고 복잡한 일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문화적 전통이 형성되고 관습적 사고로 굳어지면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사물과 사태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변화는 두렵고 번거롭다. 따라서 보수적 성향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디폴트 값으로 DNA에 새겨진 본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적극적인 노력과 의지는 직접 경험과 학습을 통해 각성할 때 벌어지는 예외적 상황이 아닐까.

가족을 생물학적 혈연관계로 규정짓는 순간 소피 루이스의 『가족을 폐지하라』나 김지혜의 『가족 각본』은 현실에 수용될 가능성이 없다. 김희경은 『이상한 정상 가족』에서 개인 삶의 독립성을 보장하되 삶의 질은 집단적 책임에 달려있다는 ‘차가운 신뢰(국가주의적 개인주의)’를 주장했다. ‘개인-가족’ 중심의 미국과 달리 독일과 스웨덴 등은 ‘국가-개인’의 양상을 보인다. 우리는 어떤가. 이상한 가부장제, 남성들의 피해의식, 극단적 가족 이기주의가 버무려진 형태라고 하면 지나친 평가일까. 온정주의가 보여주는 긍정적인 면이 없지 않으나 공동체와 국가 차원의 윤리는 찾아보기 힘들고 개인과 가족 중심의 생존 전략과 경쟁에 골몰하는 풍토는 공포에 가깝다. 한 아이는 온 마을이 키운다는 말이 적용되기 힘든, 태어나는 순간 부모가 스펙이 되는 현실에서 세계 최저 출생률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사교육과 학벌주의, 특정 직군의 이기주의와 특혜와 카르텔의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그 집단에 편입하려는 욕망의 블랙홀이 사회적 윤리와 상상력을 모두 빨아들인다. 놀랍고 기괴한 풍경을 현실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라는 말로 포장하기엔 너무 멀리 왔다.

가족은 폐지할 수 없는 사회와 국가의 최소 단위라는 생각은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그 기원을 사유 재산에서 찾는다. 국가의 기원이 된 가족은 그 형태와 크기가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변해왔다. 국민 국가 시대에 가족을 폐지하라는 급진적 요구가 통할리 없다는 걸 소피 루이스는 몰랐을까. 그 모든 게 각본에 짜인듯 움직인다는 김지혜의 지적은 현실을 정확히 분석한 걸까. 양비론과 양시론으로 초점을 흐리고 논점 일탈의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면 집중력있게 문제의 본질에 천착할 필요가 있다. 세대를 막론하고, 여성 혹은 페미니즘이란 단어에 알레르기 반응을 이루 남성과 여성을 제외하면 가족에 관한 논의가 ‘여성’과 닿아 있음을 충분히 짐작하리라. 물론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이라고 성급하게 추측할 수도 있겠으나 문제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소피 루이스는 백인, 부르주아, 핵 가족에 관한 편견에 돌을 던진다. 다양한 가족 형태에 대한 고찰이 필요한 이유는 현대사회의 복잡성과 변화 가능성 때문이다. 전통 농경 사회의 가족은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와 그 의미가 전혀 달랐다. 그러나 1인 가구가 주류가 된 시대를 살면서도 우리는 이상적 가족 혹은 정상적인 가족의 형태에 편견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차별은 정상과 비정상을 구별할 수 있다는 착각과 그 기준에서 시작된다. 김지혜의 문제 의식은 ‘왜 며리리가 남자면 안 될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결혼과 출산의 절대 공식을 넘어, 성역할과 성교육 너머에 각본 없는 가족을 꿈꾼다. ‘외 않 되?’는 ‘why not?’를 비틀어 고정관념을 헤집고 편견과 차별을 흔든다. 정말 안 되는 걸까? 그러면 안 되는 일을 하고도 뻔뻔한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본 탓에 시대의 변화와 흐름과 무관한 수구적 태도를 점검하는 일이 오히려 더 힘겹게 느껴질 때가 많다.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야말로 가족이 아닌가. 거리 두기에 실패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양상은 이수지의 대치맘 패러디가 아니라도 차고 넘친다. 자녀 교육에 대한 목표와 방향, 삶의 가치에 대해 깊이 숙고하며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에서 나와 우리 가족만 별나게 살 수 없다는 항변은 타당한가. 성적순으로 지망하는 학과와 직업이 일치하는 사회는 정상인가. 가족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눈이 먼 맹목적 강요와 일방적 가스라이팅으로 유지될 수 없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관계다. 인생의 정답을 안다는 듯한 부모와 어떤 말도 소음과 잔소리로 여기는 자식 사이의 기싸움은 기본이지만 그 너머에 존재하는 신뢰와 지지, 존중과 배려가 없다면 잘 짜인 각본에 불과할 수도 있다. 동성 결혼과 비혼 출산을 인정하고 고정된 성역할을 극복하며 자녀와의 관계 양상을 재설정하지 않으면 현실 도처에 폭탄처럼 숨은 지뢰들을 피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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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드 오브 타임 - 브라이언 그린이 말하는 세상의 시작과 진화, 그리고 끝
브라이언 그린 지음, 박병철 옮김 / 와이즈베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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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의 단편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아름다움은 나를 멸시한다』 수록)은 아니었고...윤대녕의 단편이었나? 기억나지 않는다.(아시는 분 있으시면 알려주세요.) 진공상태의 우주에서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상대를 밀어주고 그 반작용으로 춥고 어둡고 아득한 먼 우주로 하염없이 멀어지는 우주인. 그 인상적인 장면이 어느 단편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칼 세이건의 『코스모드』를 읽을 때도 브라이언 그린의 『엔드 오브 타임』을 읽을 때도 머릿속에서 계속 맴도는 장면이다. 지구 반대편으로 떠난 그 우주인은 아직도 멀어지고 있을까, 언제까지 멀어지다가 우주의 끝에 도달했을까, 우주 공간에 끝이라는 개념이 적용될 수 있을까, 공간의 끝이 없다면 시간도 영원할까, 시간의 끝이라는 개념은 물리학의 이론으로만 존재하는 걸까, 실제 그 순간이 온다는 말인가.

우주의 기원, 세상의 저편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시절이 따로 있었던 게 아니라 여전히 하늘을 쳐다보는 이유가 혹시 무의식에 남은 유년시절의 기억들 때문일까.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나 데이비드 크리스천의 『시간의 지도』를 읽을 때의 개인적 감동은 오롯이 상상력에 기반한 나만의 세계였을 것이다. 과학의 시선은 실제계에서 벌어지는 객관적 사실을 향하고 있으나 그 결과에 대한 해석은 과학자의 몫이 아닐 수도 있다. 브라이언 그린도 물리학이라는 도구로 우주와 생명을 포함한 세상의 기원과 작동 원리를 들여다보면서 끊임없이 인문학을 끌어들인다. 철학과 문학적 소양은 일반인에게 적절한 설명 도구로 유용할 뿐 아니라 결국 앎이 삶이 되어야 한다는 소리 없는 웅변처럼 들렸다. 안다고 달라지는 게 별로 없다. 아는 것과 이해한다는 건 다른 문제다. 시간의 끝,이라는 개념은 오히려 개인의 죽음에 닿아 있다. 눈을 감으면 모든 게 사라진다. 사후 세계의 믿음이나 내세와 무관한 물리적 현상으로서의 죽음이 시간이 끝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제외한 타인의 삶, 지구의 종말, 우주의 끝에 대한 호기심과 과학적 상상력은 왜 필요한가.

자유의지가 있느냐 없느냐는 논쟁이 이어지며 일요일 밤 3시간이 넘도록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우주는 무엇이며 그것은 각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아니 그 호기심으로 얻은 얇은 지식과 생각들은 어떤 태도로 현실에 반영되어 어떤 방향으로 우리를 이끄는 걸까. 명쾌하고 분명한, 논란이 없는 수학과 과학도 환원주의 관점으로 회귀하지 않으려면 거시 세계의 인간을 돌아볼 수밖에 없다.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나는 누구인지 매일 묻지 않으면 단 하루도 견디기 어려운 세상이다. 세계를 바꿀 수 없다면 내가 변해야 한다는 적응과 실용적 자기계발식 금언이 아니다. 어차피 우연의 우연의 우연이 겹쳐 필연을 가장한 존재와 관계라고 해도 선택의 문제, 의지의 표상이 우리를 괴롭힌다. 인간이 ‘위대한 존재’인지 ‘먼지같은 존재’인지 논쟁을 하다가 ‘위대한 먼지’로 타협했다는 분의 이야기가 새삼스러웠다. 우리는 ‘위대한 먼지’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스크린 속에 이미 펼쳐져 있든, 무한한 순환 고리로 연결되어 있든, 연쇄적인 반응의 결과이든 상관없다. 곧 봄이 온다는 소식이 들리고 인간의 삶은 바늘로 찍은 점보다 짧은 찰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정도만 자각할 수 있어도 충분하겠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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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수업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다산초당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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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채플린의 말이나 행복한 가정의 공통점과 불행한 가정의 다양성을 간파한 톨스토이만큼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의 글은 행간에 숨은 의미를 애써 찾으려는 헛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막힌 프랑스 국경 앞에서 절망했던 발터 벤야민과 브라질에서 자살한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음을 헤아릴 방법은 없다. 어차피 타인의 고통은 추론적 감상에 불과할 테니.

생의 마지막 2년 동안 쓴 아홉 편의 글은 아이러니하게도 온기와 희망을 담고 있다. 그러나 고통스런 현실이 배제될 수고 절망하지 않았다면 자살하지 않았을 거라는 어설픈 결론에 도달했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가 무너진 시대를 온몸으로 겪은 이들의 글을 읽을 때마다 오늘의 대한민국과 비교한다. 또 다른 방식의 반지성과 무논리와 비이성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정치적 이념과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의 문제가 아니다. 경청과 소통의 부재가 폭력을 양산했던 유럽의 그때 그 시절을 닮아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면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에밀 시오랑의 오래된 금언을 반복하며 기다리면 될까. 어두울 때에야 보이든 것들이 있다는 걸 슈테판 츠바이크가 아니면 모를까. 우리는 새벽에, 어둠 속에서 무엇을 보는가. 아니, 낮과 밝음은 시간이 해결해 주는 걸까. 인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시대를 반복하면서도 우리는 사랑 혹은 신의 이름으로 현실은 견디며 살아간다. 희망이 고문이 아니었던 시대가 있었을까.

누군가는 니힐리즘으로 누군가는 실용주의로 ‘지금-여기’를 견디라고 충고한다. 1940년에 쓴 몇 편의 글이 주는 교훈 혹은 감동이 현실을 바꿀 수는 없다.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한다는 믿음 이외에 오늘과 내일을 견뎌야 하는 우리에게 다른 길이 있을까. 지구 반대편까지 기나긴 여정을 겪으며 슈테판 츠바이크가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특별하지는 않다. 어쩌면 수없이 반복되었거나 새로울 것 없는 삶의 지혜들이다. 누구나 알고 있어도 아무도 실천하기 어려운 것들.

아주 얇은 책, 적은 분량에 그림을 곁들여 부담을 덜고 읽는 호사를 느끼게 해주기 좋은 도구. 읽는 사람이 특별한 게 아니라 어두울 때에야 무언가 보이는 눈을 뜨게 해주는 텍스트의 행간에 머무는 시간이 중요하다. 하늘이 맑고 푸르고 누군가의 생이 마감되어도 또 누군가의 삶은 계속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떠난 자가 남긴 기록은 과거를 소환하는 대신 현실을 톺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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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별짓기 -상 -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21세기총서 3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최종철 옮김 / 새물결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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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 지난 유행가는 시간을 반추하는 대신 낡은 현재를 반증한다. 아직도 계급이냐고 묻는 사람들에 대한 항변이 아니다. 불평등과 불공정이 사회적 화두가 아니었던 적이 있을까. 어느 시대에나 평등한 세상을 외쳤지만 누구도 그런 세상에 살아 본 적이 없다. 어쩌면 불가능한 유토피아를 향해 인류는 쉼 없이 달려온 게 아닐까. 가깝게는 정치체제와 경제 제도의 사회적 대타협이 이루어진 유럽의 사민주의와 북유럽의 복지 모델, 전세계로 파급된 68운동, 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 등은 현실의 세세한 결을 만들고 켜켜이 쌓인 상식의 토대를 이뤘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나 영화 《프라하의 봄》이 아니어도 급진적 사회 변동으로 인한 파급 효과를 우리는 온몸으로 겪으며 살고 있다. 6.25전쟁의 후폭풍을 경험한 세대가 생존해 있으며 5.16과 10.26과 12.12를 거쳐 5.18과 6.29를 기억하며 1997년 IMF의 후유증이 남아 있다. 21세기 들어서도 2008년 금융위기를 거쳐 2017년 박근혜를 탄핵한 후에도 비상계엄의 시대를 맞이했다. 끝날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요기 베라의 말은 야구 경기가 아니라 인류의 삶에 대한 경고처럼 떠오른다.

다시, ‘생존’이 시대정신으로 평가될 시간을 견뎌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1979년 출간된 피에르 부르디외의 저작은1996년에야 번역 출간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를 지나온 한국사회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계층 갈등과 계급 투쟁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장하성이 『왜 분노해야 하는가』라고 물었듯 미국보다 지독하고 철저한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우리 사회의 민낯을 ‘취향’ 따위로 구별짓는다는 발상은 한가로워 보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취향에 대한 사회적 비판, 실천의 경제, 계급의 취향과 생활양식 등 3부로 나눠 설명하는 흙수저 피에르 부르디외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스스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듯하다. 여기는 어디이며, 나는 누구인지 확인하려는 욕망은 성찰과 결핍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빌파리지, 게르망트, 베르뒤랭 부인의 집에 출입 가능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피에르 부르디외가 지적한 ‘문화귀족’의 사례가 될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도 문화자본은 가정에서 ‘상속’되거나 학교에서 ‘획득’된다. 공화정이 실시되면서 보편적 공교육이 자리 잡은 이후에도 차별적 교육은 상존한다. 귀족학교는 ‘학비’로 판명된다. 국제학교, 사립학교 등 유치원과 초등학교 시절부터 노는 물이 다른 현대판 귀족은 사회관계 자본을 대물림하며 끼리끼리 논다. 경제자본이 학력자본과 문화자본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2025년 대한민국 사회에서 구체적인 사례를 떠올릴 필요도 없다. 상징 투쟁으로서 ‘차별화의 감각’을 익힌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입고 들고 타고 사는 곳이 실시간으로 생중계되는 네트워크 시대는 구별짓기가 공고화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신분질서가 무너진 근대 이후 현대인의 삶은 경제자본으로 거의 모든 게 ‘구별’ 지어진다. 이런 현실에 대한 평가와 대응방식을 개인의 태도로 환원할 수 없다. 삶의 목표와 가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철학의 빈곤은 앞으로도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게 현실이다.

생활양식은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에 시간축(통시적 관점)이 더해져 입체적으로 살아 숨쉰다.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고 오늘-여기를 사는 사람들의 ‘취향’, 즉 문화는 구별하고 차별한다. 문화는 섬세한 상징폭력이라는 저자의 말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현실은 사회학 이론보다 차갑고 단단하다. 정치적 격변기를 거쳐 사회변동이 가능할 수도 있으나, 계급 이익과 무관한 이념 투쟁과 진영 논리의 벽이 허물어지지 않는 무지성의 시대를 감내해야 하는 건 고스란히 우리들의 몫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사다리를 기어오르는 수많은 개인을 향한 비난이 아니라, 근본적인 구조를 바꾸고 사회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정치적 대증요법 앞에서 길을 잃는 위정자를 냉정하게 평가해야 하는 게 우선이 아닐까. 그래도 봄은 오고 우리는 현실을 살아낼 것이다. 바람보다 빨리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서는 풀처럼.

*사족 : 20년 넘게 개역판을 내지 않고 책값만 내는 출판사와 조각 초역으로 완성한 번역자의 무책임 등등에 대한 이야기는 할많하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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