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사는 세계 - 책, 책이 잠든 공간들에 대하여 페트로스키 선집
헨리 페트로스키 지음, 정영목 옮김 / 서해문집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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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부터 본격적인 독서를 시작한다고 가정해 보자. 일주일에 한 권씩 1년에 50권, 70세까지 한 주도 거르지 않는다면 60년간 겨우 3,000권이다. 책이 그렇다. 공부도 그러하다. 뭔가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 죽을 때까지 노력해도 안 된다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패배 의식이 아니다. 그래서 겸손은 태도나 예의가 아니라 절망적 필연이다. 개인차가 있겠으나 3년에 1만 권을 읽었다는 무의미한 자의 자기 자랑을 제외하면 선구안의 중요성이 더더욱 절실해지기 마련이다.

어쩌다 책을 가까이 한 자들은 책에 관한 책을 놓지 못하고 남의 서가에 꽂힌 책등을 흘깃거리거나 읽은 책 목록을 기웃거리거나 책과 관련된 에피소드에 탐닉한다. 헨리 페트로스키는 책이 사는 세계, 즉 ‘책꽂이’ 이야기로 책 중독자들을 매료시킨다. 북엔드부터 도서관 서고에 이르기까지 책이 놓인 자리와 방법에 관한 역사적 고찰은 그대로 책의 역사이자 인류의 지적 탐험기에 가깝다. 두루마리 파피루스에서 지금 우리가 보는 형태의 책까지 발전 과정은 문명 발달사와 그 궤를 같이 한다.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책등이 보이게 책을 세워 꽂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 전 이야기가 아니다. 놀랍다. 도서관의 설계와 책꽂이의 설계와 서고의 수서 방식에 관한 이야기들은 덕후들의 뒷담화에 가깝다. 전혀 ‘안물안궁’인 사람들에겐 폭력에 가까운 책일 수도 있겠다.

근대 이전까지 책을 읽고 쓰는 사람은 한정적이었며 일종의 계급적 특권에 가까웠다. 읽고 쓰는 일은 아무에게나 허락된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지식이 권력이었던 시대를 기억조차 못하는 세대다. 차고 넘치는 정보와 지식의 홍수 사이에서 허우적거리며 모두 읽고 누구나 쓰는 시대다. 그래서 책이 사는 세계는 오히려 향수에 가깝다. 물성을 가진 책은 얼마나 유지될까. 마치 종이돈을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사라진 것처럼, 종이책을 들고 읽는 사람은 특별한 취미를 가진 소수로 분류될 날도 멀지 않았을까 싶다.

책에 미쳐도 평생 겨우 몇천 권이 전부다. 코끼리 뒤꿈치를 더듬다 끝난다. 분야별로 줄기와 흐름을 파악하는 데도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덤벼들면 눈이 침침해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짧다, 인생이. 알라딘의 ‘so many books, so little time’이 새겨진 굿즈로 스스로 위로하는 방법 외엔. 그래도 책장을 넘기는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씩 계속 나아갈 수 있지 않은가.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 분들에게 일독을 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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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연 정암고전총서 플라톤 전집
플라톤 지음, 강철웅 옮김 / 아카넷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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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취가 가시기 전 다시 술자리에 앉은 아재들은 전날 과음을 핑계로 술잔을 앞에 놓고 치열한 드립 대결을 펼친다. 사랑에 관한 철학적 논쟁 혹은 에로스에 관한 역사적 고찰 혹은 현실적 욕망에 대한 각자의 시선들. 우리는 여전히 ‘사랑’ 없는 인생을 생각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것은 남녀 간의 사랑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사랑, 사물과 자연에 대한 사랑, 학문과 지혜에 대한 사랑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와 분야는 차고 넘친다. 뿐만 아니라 자본과 권력에 대한 사랑, 출세와 성공에 대한 사랑 등을 포함해서 그 모든 관심과 열정과 집착과 몰입을 통칭해서 사랑이라 부른다. 사랑 아닌 것이 없다.


이성애가 본능적 욕망의 문제가 아니라는 전제로, 당대 아재들의 소년 동성애 옹호를 위한 기나긴 변명을 현대인들이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미소년들을 향한 아재들의 욕망(에로스)과 기나긴 논박을 위해 벌인 ‘심포지엄Symposion’은 소문으로만 전해진다. 아폴로도로스가 향연에 참석했던 아리스토데모스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니 기억의 오류는 물론 오해와 합리화도 곁들여졌을 터. 플라톤이 기록한 향연의 내용은 결국 소크라테스와 디오티마의 대화를 향해 나아간다. 파이드로스, 파우사니아스, 아리스토파네스, 에뤽시마코스, 아카톤의 이야기는 에로스의 기원과 유래 그 의미와 역할에 대한 부조扶助, eranos에 해당한다. 각자의 지식을 공유하고 서로 다른 관점을 점검하여 에로스에 관한 진지한 성찰에 이르는 주제 토론은 흥미진진하다. 앎이 아름다움이다. 에로스를 넘어 절제와 정의와 용기를 지나 아름다움을 향해 걷는 인간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인생은 진선미眞善美로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분의 이야기는 플라톤의 의도에 부합하는 듯 진한 여운을 남겼다. 우리는 끊임없는 탐진치貪瞋癡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대다수 현대인이 겪는 불안과 허무는 자기 삶의 지향점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남녀 간의 에로스를 넘어 아름다움으로 나아가려는 기원전 아재들의 철학적 깨달음에는 도달하지 못할지라도 어렴풋이 우리가 사는 이유와 방법에 대한 고민은 계속되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아마 일요일 저녁에 모인 사람들 마음속에 똬리를 튼 각자의 욕망이 아닐까 싶었다.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서경덕도 아니고 알키비아데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소크라테스라니! 플라톤의 의도가 무엇이든 욕망을 절제하라는 지극히 단편적이고 교훈적인 목적은 분명 아닐 것이다. ‘에로스는 아름다운 자, 그래서 사랑받는 자가 아니라 아름다움과 추함 사이에 있는 자, 그래서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자’라는 정의가 그렇다. 에로스가 아름다운 몸을 사랑하는 단계를 지나 절제와 정의를 위한 용기로 나아가는 과정이라면, 그곳에 이르지 못해도 못해도 좋다. 그 어딘가, 저 너머에 무엇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호기심과 질문, 그것을 향한 탐구와 열정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오늘-여기 하루의 삶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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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 우리가 놓치는 민주주의 위기 신호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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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관계가 망가지는가. 행복이 인간관계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다만 그 관계를 유지, 개선하는 방법을 모를 뿐이다. 각자의 욕망과 태도가 관계를 결정한다. 부모, 형제자매, 친구, 연인은 물론 사회적 관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처방전은 동서양을 망라한 고전의 화두다. 정치와 경제, 전쟁과 평화, 행복과 미래가 모두 관계망 안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타인’을 향한 기대와 요구, 인간에 대한 예의, 관계 형성의 의지 등 다양한 이유로 관계는 유지, 발전되거나 무너지고 단절된다.

이와 유사한 정치체제가 바로 민주주의다. 다수의 뜻이 하나로 모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개인을 무시하거나 집단 착각에 빠진 상태 등을 예외로 한다면 ‘국론 분열’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5천만 대한민국 사람의 생각이 ‘통일’된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 사회를 좀먹는 태도는 분열이 아니라 절멸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 너는 틀렸고 나만 옳다는 맹목, 그때는 틀렸고 지금은 맞다는 착각, 누가 되든 너만 아니면 된다는 증오, 특정인과 상대 진영을 향한 혐오가 폭력과 제노사이드를 탄생시킨 역사를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 우리는 왜?

조슈아 컬랜칙은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Democracy in Retreat』에 설명했지만,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민주주의가 어떻게 무너지는지How Democracies Die 분석했다. 2018년 출간된 미국 이야기다. 당연히 그 중심에는 ‘트럼프’가 놓여 있다. 양당 체제가 굳건하고 국가의 기원과 출발부터 다르니 미국을 반면교사로 삼는 건 매우 곤란하지만, 헌법 기능이 작동하지 않거나 무시당하는 현실을 톺아보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망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들이 미국 민주주의에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비공식적 규범은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라고 짚어낸다. 모든 성공적인 민주주의는 비공식적인 규범에 의존한다는 지적에는 모든 실패한 민주주의는 비공식적인 규범을 무시하는 데 있다고 읽을 수 있다.

1973년 피노체트 육군 참모총장이 아옌데 대통령 정부를 전복시킨 군사 쿠데타의 사례를 설명하면서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방법과 절차에 대한 살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역사적 교훈을 얻기 위해서다. 이것은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진보와 보수의 힘겨루기도 아니다. 상식과 이성으로 결정한 비공식적 규범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들은 이것을 연성 가드레일이라고 표현했다. 서로 다른 생각들이 부딪칠 때 최소한의 완충 장치가 법률이다. 사회적 규범을 어기는 자들도 형법과 민법으로 어느 정도 제재가 가능하지 않은가.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다. 그런데 이제 그 법을 가지고 논다. 판사, 검사, 변호사 출신 국회의원들의 정치적 이해관계는 말할 것도 없지만 종교와 결합한 경제적 이해관계까지 곁들여져 ‘설마’가 등장했다. 전설에나 등장하는 ‘해태’상이 놓여있는 광화문에 서로 다른 생각이 아니라 반지성과 무지가 넘친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향한 목소리들일까.

법과 정치는 범위와 기준이 다르다. 연성 가드레일이 무너진 자리에 들어선 각자의 법률 해석은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있다. 사회적 대타협과 합의가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계급적 이익에 충실하든가 아니면 민주주의의 기본 절차에는 충실해야 한다는 ‘기본’은 지켜야하는 게 아닌가. 그걸 마음대로 해석, 조정 가능하다는 오만과 만용이 민주주의를 망가지게 한다. 물론지지 정당과 무관하게 어디에나 있는 그런 자들에게 표를 주는 주권자의 책임이 가장 크다는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데 부끄러움의 원인이 놓여 있다. 대한민국은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게 돼 있다는 시니컬한 조언은 아주 오래 전 알렉시스 토크빌이 한 말이 아니라는 팩트체크 기사도 있으니 출처보다 그 말의 진의에 고개가 절로 숙여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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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의지는 없다 -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자유 의지의 허구성
샘 해리스 지음, 배현 옮김 / 시공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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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자유 의지Free Will’가 없다니 무슨 말인가. 독서 모임이나 종교와 과학 논쟁에서 심심찮게 반복되는 ‘자유 의지’는 철학의 영역을 벗어나 각자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설명하기 시작한지 오래다. 숱한 심리 심리실험과 진화 심리학이나 진화 생물학에 뇌과학이 가세해서 논란을 증폭시킨다. 이게 다 ‘호르몬’ 탓이라는 의학적 태도만큼 위험해 보이는 샘 해리스의 ‘자유 의지는 없다’라는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철학과 신경 인지과학을 공부한 저자는 단호하게 “자유 의지란 단연코 환상이다. 우리의 의지는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고와 의도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도 없는 배경 원인으로부터 발생한다. 우리는 스스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유를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말한다. 앨프리드 R. 밀러는 현대 과학이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한 이유를 설명했으니 논쟁은 진행 중이라 할 만하다. 신경과학과 심리학은 인간의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 두 사람은 똑 같이 생리학자 생리학자 벤저민 리벳Benjamin Libet의 실험을 소개한다. “인간이 자신이 움직이기로 결심했다고 느끼기 300밀리세컨드 전부터 뇌의 운동피질에서 활동이 나타난다는 것을 뇌파검사EEG를 사용하여 보여준 것으로 유명하다. 또 다른 연구소에서는 기능성 자기공명영상장치fMRI를 사용하여 이 연구를 확장했다. 피험자들은 스크린에 나타나는 무작위 순서의 글자들로 구성된 ‘시계’를 보면서 두 개의 단추 중 하나를 눌러야 했다. 그들은 어떤 단추를 누를지 결정하는 순간 어떤 글자가 보이는지 보고했다. 실험자들은 피험자들이 그 결정을 의식적으로 내리기 ‘7~10초’ 전에 어떤 단추를 누를지에 관한 정보를 포함하는 뇌 부위 두 군데를 발견했다.” 샘 해리스는 이 실험을 근거로 자유 의지가 없음을 선언한다. 과연 그런가. 인간의 행동은 무의식과 사회심리학에서 주장하는 상황 논리가 인간의 행위를 촉발한다면 인간의 선택과 갈등은 이미 결정된 행동에 이르는 과정 혹은 예비 단계에 불과하며 우리는 각본대로 인생을 연기한단 말인가.

자연법칙과 우연은 자유 의지와 무관하다. 그러나 생각과 의지 그리고 적극적인 노력과 선택의 문제를 자유 의지와 무관하다고 설명할 방법은 없다. 그것은 자유 의지의 의미와 범주에 대한 이해가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만약 자유 의지가 없다면, 범죄자의 도파민을 감옥에 가두고 자유 의지가 없는 대통령의 계엄령은 처벌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해야 한다. ‘자유 의지가 없다는 환상은 그 자체가 환상이다.’

샘 해리스의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자유로운 존재가 아닐뿐더러, 스스로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롭다고 느끼지 않는다.”라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살아가면서 겪는 선택의 한계, 무의식적 행동과 원치 않는 결과들, 발버둥 쳐도 바뀌지 않는 현실을 돌아보면 정말 의지와 노력 따위가 허망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결정론적 세계관을 받아들인다면 운명론자들의 말대로 태어나는 순간 정해진 삶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면 그뿐이다. 사회적 계급과 자기 삶의 역할에 충실하라는 중세적 세계관이다.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를 받아들이라는 역술가의 조언만큼 당황스런 자유 의지는 없다는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할 이유와 필요를 느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거의 모든 주장과 이론에는 반론이 존재한다. 없다면 곧 나온다. 정반합의 변증법적 사고와 패러다임의 전환에 대해 헤겔이나 토마스 쿤의 주장 그리고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 대한 칼 포퍼의 주장이 떠오른 건 아마도 21세기판 인간 말종론, 아니 종말론처럼 읽혔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이론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물리학의 끈 이론과 달리 밝혀지지 않는 뇌과학이나 심리 실험으로 ‘진리’를 주장하는 모든 논의는 진행ing 상태다. 듣지 않는 사람, 단언하는 인간, 나만 옳다는 인간 혹은 그 집단들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현대인의 질병은 불안과 고독보다 심각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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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 열린책들 세계문학 104
줄리언 반스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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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역사를 연구한 60대 류시현은 『역사를 읽는 법』 머리말에서 “계속 여러 책을 읽고 있다. 그렇지만 역사가 무엇인지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겠다. 게다가 역사가의 역할과 임무가 무엇인지에 관해 여전히 고민하게 된다.”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책을 마무리하며 맺음말에서 “생각을 유연하게 하고 싶다. 생각이 유연한 것은 균형 감각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삶, 나의 판단, 나의 결정 등을 정답이라고 주장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다짐한다. 한 생을 다해 역사를 통찰한 연구자의 말이라고 하기엔 자기 주장이 없어 겸손하게 들리지만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로는 지나치지 않다. 균형과 절제를 잃은 관점과 태도는 폭력과 증오를 낳고 상대를 인정하는 기본기를 상실하기 마련이다. 도대체 역사란 무엇인가.

줄리언 반스는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보태 소설적 ‘허구’를 빚어낸다. 한없이 자유롭고 무한한 가능성이 펼쳐진 소설과 달리 역사는 객관적 사실 여부를 고증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진실은 해석의 문제이나 사실은 합의의 과정이 아닐까. 이 책이 출간 당시 서점 역사 코너에 전시됐다는 웃지못할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줄리언 반스는 왜 소설의 제목을 세계 역사라고 했을까.

노아의 방주, 시오니즘과 테러, 체르노빌 원전 사고, 타이타닉호 침몰, 달 착륙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에서 소설처럼 떠오르는 장면에 숨을 불어 넣었다. 역사적 사실과 다른 소설적 진실이라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차치하더라도 독자에겐 호기심과 재미 이상의 무언가를 요구하는 듯하다. 이 글을 읽고 아무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게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라고 강요하듯 줄리언 반스는 역사의 한 장면을 미분하여 그 의미를 적분한다. 그 중에서도 제5장 「난파」가 인상적이다. 세네갈 원정대(1816.06.17.) 365명의 운명을 다룬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 1819>은 누구나 한 번쯤 보았던 그림이다. 영화나 드라마 보다 극적인 사건을 다룬 그림을 다시 생생한 소설로 묘사한 이유는 궁금하지 않다. 읽는 이에게 미적 황홀감을 주거나 역사를 환기할 목적이거나 현실을 재현하려는 욕망이거나 상관없이 줄리언 반스의 이야기는 과거를 소환해 현실을 살피게 한다. 물론 오래된 미래는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다.

“문학에 있어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전형으로 평가되고 있는 그의 소설과 단편들은, 무엇보다도 사실과 공상의 퓨전-매직 리얼리즘magic realism-소설이라는 포스트모던적 특징을 잘 드러낸다.”(역자 해설 「역사와 픽션을 오가며」에서, 신재실)라는 이야기를 귀담아 들을 필요는 없다. 대다수 독자에겐 이런 용어와 개념이 추상적 지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장면들을 콜라주한 줄리언 반스의 솜씨가 뛰어나 10과 1/2장의 심포니처럼 조화를 이룬 이야기들은 역사와 마찬가지로 소설도 허구에서 신화로 그것이 다시 우화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여주는 듯 신선하다. 불면의 밤을 지나 눈부신 대낮에 꿈을 꾸고 싶을 때가 있다. 현실을 부정하고 외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꿈같은 현실이 도무지 실감나지 않을 때가 많아서일까.

나는 꿈을 깼다는 꿈을 꾸었다. 꿈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꿈이었는데, 내가 방금 그런 꿈을 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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