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
프레데리크 그로 지음, 백선희 옮김 / 책세상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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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어로 아이도스aidos, 라틴어로 푸도르pudor라 불리던 수치심의 어원은 중요하지 않다.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채 모든 인류가 알고 있는 그 감정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아니, 어쩌면 ‘수치심’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레시피를 쓰고 싶었거나 지나친 수치심이 자기 모멸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람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 목적이 무엇이든 저자는 우리에게 각자의 수치심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고 오래도록 응시하라고 재촉한다. 무엇이 부끄러운가, 아니 그 부끄러움의 원인이 무엇인가.

부끄러움은 왜 나 혹은 우리의 몫인지에 생각한 본 적이 있다면 프레데리크 그로의 “수치심의 진영이 바뀌어야 한다!”라는 외침에 동의할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철학자는 무엇이 다를까. 제국주의 중심에 서 있으나 세계 경제, 문화, 사상을 이끄는 국가에 서서 바라보면 미국과 아시아 남미와 아프리카의 현실이 조금 달리 보일까. 이렇게 좁은 대한민국에도 자기가 가진 것들-이를테면 자본, 권력, 명예, 인맥 등등-에 따라 전혀 다른 감정을 ‘소유’하고 ‘학습’하게 된다. 상식과 법률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활용될 뿐 공동선을 추구하거나 사회적 합의와 다수의 의견조차 필요에 따라 달리 해석한다. 비단 정치인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느 자리에 있는지에 따라 관점이 달라지고 자기만의 논리와 주장으로 합리화한다. 인류 문명사의 변하지 않는 특성이지만 진영에 따라, 서 있는 자리에 따라 그것을 공정과 정의라고 외치거나 상식과 합리라고 주장하니 ‘수치심’이 설 자리가 없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모든 관계에 적용되는 말이다. 거리 두기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부모자식, 형제자매뿐만 아니라 친구, 연인, 선후배, 직장동료에 이르기까지 마찬가지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혈육이라서, 사랑하니까, 친한 사이라는 이유로 ‘선’을 넘는다. 각자의 선이 다르니 문제가 생긴다. 인간관계는 교집합이다. 여집합의 욕망이 선을 넘게 하고 관계를 망치며 범죄를 저지르게 한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배움과 가르침도 중요하지만 서 있는 자리와 이해관계가 우선인 듯하다. 사회학적 상상력, 성인지감수성, 예의 바른 무관심을 입으로 주어섬겨도 일상적 ‘관계’에 적용하고 실천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다. 물론 이 앎과 삶의 간극이 수치심을 유발하지만 그조차 인식하지 못하면 수치심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듯하다. 남 탓하기 바쁘고, 자기변명에 심혈을 기울이며 내 사전에 반성과 성찰은 없다고 항변한다.

이 책은 수치심의 중요성에 대해 독자 개인의 앎과 삶을 돌아보라고 재촉한다. 수치심의 종류와 성격을 지식으로 담아둘 필요는 없다. 어차피 육화되어 변화, 성장하지 못한다면 ‘감정’에 관한 숱한 철학적 담론과 심리학적 토대는 무용지물이다. 물론 이해한 만큼 공감하고, 공감도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나 수치심은 조금 다른 영역이다. 다양성의 존중은 합의된 질서의 존중 아래 가능한 분명한 공적 책무다. 다수가 항상 옳은 건 아니듯 개인차의 존중도 틀린 건 아니다. 그 불문명한 공백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지에 대한 분분한 의견은 사람과 조직마다 많이 다르다. 갈등은 거기서 시작된다. 대개 수치심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으로 구별할 수 없고 그 대상과 상황에 따라 뻔뻔함으로 무장하는 사람이 생길 뿐이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건 성격과 습관뿐만 아니라 삶의 태도와 방법의 차이다.

* 속옷 차림의 여성의 뒷모습을 담은 에곤 실레의 표지 그림은 저자가 말하는 '수치심'과 무관하여 당혹스럽다. 출판사의 의도와 표지디자인에 딴지 걸고 싶지 않으나 의도적 오류라 해도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라는 제목과도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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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간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600
시의 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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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시인선 뒤표지 박스 안의 글이 좋아 서점에 가면 우선 시집을 뒤집어 먼저 읽어보고 내용을 살핀 적이 많다. 나만 그랬을까. 600권 기념호가 창비 500권 기념호와 비슷한 시기에 출간됐다. 이번에는 501~599권에 실린 시 모음 기념 시집이 아니다. 시인의 말, 아니 시의 말이라 명명한 뒤 표지 글을 모았다.

그동안 시는 나의 돛이자 덫이었다. 시가 부풀어 나를 설레게 했고 사해를 항해하게 했으며 닻 내릴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그리하여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글쓰기가 가능하도록 일깨워주었다. 그러나 때로 시는 나를 괴롭혔다. 버리기 싫은 덫처럼 말이다.

_방부제가 썩는 나라┃최승호┃문학과지성 시인선 514「시작 노트」, 24쪽

한 편의 시는 시집 한 권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비교할 수 없다. 시 한 편은 소비하지만, 시집 한 권은 소화해야 한다. 그래서 시인들은 시작 노트 일부를 꺼내놓기도 했고, 시집을 출간하며 느낀 소회를 적기도 했으나 시인의 말이 따로 있으니 이 글들의 성격이 모호해졌나. 한 권의 시집에 모여 사는 시들이 내는 목소리라고 해도 좋다. 시의 말이든 시인의 말이든 행간을 건너 뛰어 미처 내뱉지 못한 한숨이어도 나쁘지 않았다. 허술한 푸념, 아니 단단하게 벼리지 못한 성긴 의미라서 머리보다 가슴에 닿았는 지도 모른다.

시의 목표가 사랑이 아니라면 그런 시는 내게 필요 없는 존재다. 왜냐면 세상은 보기보다 잔인하고 외롭고 힘들기 때문이다. 시는 삭막한 세상에서 상처 치유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_천사의 탄식┃마종기┃문학과지성 시인선 545, 58쪽

시가 삭막한 세상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으리라는 의사 시인 마종기의 생각은 나이브하다. 아니 시의 목표가 사랑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시를 쓸 수 없으리라. 알면서 펼치는 시집의 첫 페이지 그 숱한 서시를 읽기 위해, 그 두근거리는 ‘첫’을 위해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건 아닐까.

누구에게나 꿈이 있다. 남의 것과 비교할 수도, 비교해서도 안 되는 자기만의 꿈과 사랑은 제각기 다른 모양과 빛깔로 빛난다. 획일화된 세상, 자본주의적 기준으로 재단할 수 없는 것을 무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시를 읽지 않을 테다. 아니 무용해서 아름다운 걸 아는 사람들이 여전히 시를 쓰고 그 소중함에 기꺼이 읽는 사람들이 있는 게 아닐까.

어떤 스무 살은 마흔 속에 가 있고

어떤 마흔은 스무 살 속에 와 있다.

_겨를의 미들┃황혜경┃문학과지성 시인선 568┃시 「핵核」에서, 85쪽

어쩌면 어떤 마흔 살은 예순 속에 가 있고, 어떤 예순은 마흔 살 속에 와 있다. 시간 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는 존재는 없다. 어떤 틈에 대하여 알고 싶다고 양자물리학의 원자와 핵 사이를 들여다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때때로 오늘 지는 해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과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는 사람도 많지 않다.

강동호는 발문에서 문지시인선 뒤 표지의 글들을 “하나의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글이면서 동시에, 일종의 음악적 코다(coda)처럼 시집의 종결을 고지하는 자기 지시적 텍스트”라고 규정한다. 일종의 종결사라는 의미일 텐데, 나는 미련과 아쉬움이거나 그다음 시집의 서시를 고민하는 글로 읽힌다. 마지막이 아니라 미리 온 처음이라고 생각한다. 시간 앞에 한 인간의 죽음이 역사의 종말을 의미하는 게 아니듯이. 개별적 존재로서 하나의 우주와 같은 한 사람의 소멸이 세상의 끝이 아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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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착각 - 뇌는 어떻게 인간의 정체성을 발명하는가
그레고리 번스 지음, 홍우진 옮김 / 흐름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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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함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안목과 신체적 능력을 표현한다. 보통 사람에게 발견할 수 없는 예민함과 날카로움 혹은 지적 상상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철학은 이제 뇌과학이나 신경과학에 자리를 내주기 시작한 걸까. 주체성, 자유의지, 자아의 문제까지 다양한 주제가 ‘과학’의 영역과 중첩된다. 인공지능이나 챗GPT에게 내줄 수 없는 고유한 인간의 영토가 점점 줄어든다면 최후의 순간까지 ‘나’를 나라고 주장할 수 있는 ‘나’는 무엇일까.

스스로 생각하고 분석하며 자아라고 믿는 대상이 망상에 불과하다는 도발적인 발언은 심리학자, 신경과학자, 정신과 의사인 저자의 탁월한 분석일까. ‘나’는 과거의 서사에 바탕을 둔 기억의 집합일 뿐이다. 그것도 수많은 사건 중에서 특정 부분을 편집하고 맥락을 이어 붙인 ‘나에 대한 편집된 이야기’. 그러면 끊임없이 현재를 살며 이야기를 만들고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상황에 대처하고 일상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나’는 누구일까. 연속선상에서 과거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추론은 가능하지만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같을 리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순간도 시간 위에 머물지 않으며 변화, 발전, 성장하거나 후퇴하고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유동하는 자아에 대한 확신은 용감한 오해가 아닐까.

내가 너를 잘 안다는 착각보다 내가 나를 잘 안다는 믿음이 더 위험해 보인다. 기억나지 않는 장면이나 모호한 기억 속에서 내가 그랬을 리 없다는 확신, 다른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사실 나는 다른 존재라는 주장, 그보다 너는 너를 잘 몰라도 오래 너를 지켜본 내가 너를 잘 안다는 생각들이 모두 ‘망상’에 불과하다는 주장의 이면을 들여다보라. 자아가 뇌의 발명품이라면 믿음과 확신은 사전적 의미가 바뀌어야 하는 게 아닐까.

수만은 다중인격에 관한 드라마와 영화들이 떠올랐다. 서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한다면 편집된 자아에 불과한 나는 누구일까. 진화는 개인주의를 싫어하기 때문에 나의 선택이라는 착각이 만들어진다. 만들어진 ‘신’을 주장하는 리처드 도킨스보다 만들어진 ‘나’를 주장하는 그레고리 번스의 주장이 낯설다. 하지만 이 주장의 이면에는 ‘내가 원하는 나’와 ‘내가 믿는 나’ 사이의 간극에 대한 고민이 놓여 있다. 우리가 가진 몸은 분명한 실체가 있으나 그 안에 깃든 자아는 불안정하며 다양한 면을 갖는다. 자아 정체성이라는 개념이 뇌가 만들어낸 허구라면 ‘나’라고 말할 수 있는 무엇은 실체가 없다. 무수히 많은 자아가 내 안에 숨어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라고 노래하던 가수의 노랫말이 떠올랐다. 분명하고 구체적인 ‘나’ 하나로 규정할 수 있는 ‘나’는 착각과 망상에 불과하다면 진짜 나의 모습을 찾으려는 노력보다 지금, 이 순간에 나에 집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무엇을 선택하든 그 결과의 총량이 각자의 인생이다.

결국 이러한 노력은 후회를 줄이고 변화를 지향하며 미래를 준비하기 위함이다. 저자가 안내하는 우리의 마음, 생각, 뇌의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는 강박과 불안, 후회와 갈등에서 조금 자유롭기 위한 노력이라고 생각했다. 정답 없는 문제집을 푼 적이 없는 학창 시절을 거치고 세상에 나가면 단 하나의 정답도 찾을 수 없는 순간들, 그 결과를 책임져야 하는 선택지들이 만기가 도래한 어음처럼 우리를 기다린다. 내가 해봐서 안다는 충고도 도움이 되지 않고, 고전과 철학에게 물어도 답이 없으니 현대인의 혼란과 번뇌는 계속된다. 각자 정답을 외치는 세상에서 목소리 큰 사람이나 쉽고 빠른 비법을 파는 사람에게 속기도 쉽다. 자연과학이나 예술 분야의 책이 진정한 자기계발서라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하는 건 뇌가 착각한 ‘나’처럼 인생의 의미나 성공한 삶에 대한 망상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책은 책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현실로 고개를 돌리면 또 다시 책 속에서 길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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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망계급론 - 비과시적 소비의 부상과 새로운 계급의 탄생
엘리자베스 커리드핼킷 지음, 유강은 옮김 / 오월의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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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대한민국의 교수와 경제관료들은 토마 피케티나 장하준 등 유럽 경제학자들의 이론과 주장을 귀 기울여 듣지 않는 듯하다. 폴 크루그먼 등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유력한 경제학자들의 주장과 이론을 인용하거나 정책에 반영한 사례도 듣지 못했다. 대개 하이에크와 프리드먼 등 시카고 학파의 경제 이론이 ‘그들’의 지적 토대를 이룬다. 자본주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비주류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 계급론』이 여전히 영감을 주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건 슬픈 일이지만, 일레자베스 커리드핼킷은 ‘야망 계급론’으로 유한 계급론을 오마주한다.

물론 1899년 소스타인 베블런이 비판했던 유한계급은 엘리트 계급으로 바뀌었고 중간 계급이 두터워졌으나 능력주의에 대한 맹신과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규범에 대한 믿음이 오히려 또 다른 문제를 양산한다. 계급 재생산에 몰두한 ‘그들’을 저자는 물질적 소비보다 자신의 지위를 구별짓는 ‘야망계급’이라 명명한다. 야망계급의 소비 문화에 대한 비판은 날카롭다. 나름 피시한 사람들과 의식 있는 소비자로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경고는 뼈아프다. 이 책을 읽는 독자 중 상당수는 바로 자신의 이야기임을 직감할 터. 저자는 왜 야망계급의 소비 문화가 과거 유한계급의 소비문화보다 훨씬 더 유해한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을까.

새로운 야망계급은 소득수준이 아니라 문화수준으로 묶인다. 물질적 재화가 아니라 사회와 환경을 의식하는 가치관, 삶의 철학과 표지가 뚜렷한 교양과 문화자본으로 무장한 계급이 오히려 더 위험하다는 경고는 타당한가. 저자의 분석은 야망계급의 구별 짓기가 아니라 ‘비과시적 소비’에 초점을 맞춘다. 육아, 교육, 의료 등 비가시적이고 암묵적인 소비는 상당한 정보와 돈이 없으면 모방하기 어렵다. 단순히 돈으로만 해결되지 않는 지식과 정보와 취향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분명하다. 과거 유한계급보다 은밀하고 심각한 계급 격차의 원인은 단순한 과시적 소비가 아니라 과시적 생산, 과시적 여가, 비과시적 소비에 있다. 이는 불평등은을 은폐하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단순한 경제적 격차가 아니라 문화적 격차를 포괄하는 삶의 태도 전반을 아우른다. 이를 선택할 수 없는 중간계층이나 자신의 지위 표지를 식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일상과 태도는 다소 모호하다. 미국 사회를 분석한 저자의 이야기가 한국 사회와 동떨어져 있지는 않으나 다양성보다는 대개 ‘소득’으로 수렴하며 거대한 욕망이 일방향으로 흐르는 우리와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속성과 본능은 베블런의 지적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100년이 훌쩍 넘는 간극에도 불구하고 사회 변동과 수정 자본주의가 계층과 계급의 ‘차이’를 바꾸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설국열차의 맨 앞칸과 꼬리 칸은 시간이 흘러도 바뀌지 않고 앞칸으로 이동하려는 욕망도 변하지 않기 때문일까. 야망계급이든 소비 계급이든 희망 계급이든 모호한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의 구별 짓기가 더 두려울 때가 많다. 지금 우리는 괜찮지 않다. 아니 어쩌면 괜찮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상상하며 꿈꾼 사회를 이룬 적이 없으나 여전히 멈추지 않고 꿈을 꿀 수밖에 없는 걸까. 저자의 명쾌한 분석도 ‘과거’와 ‘현재’일 뿐 ‘미래’를 전망하거나 대안을 제시하진 못한다. 아니, 그걸 한다고 해도 현실이 될 수는 없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다는 정도면 충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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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
프란츠 카프카 지음, 권혁준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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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죄가 없습니까?” 그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K가 말했다.

자신의 모든 유고를 불태워달라는 카프카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던 막역한 친구 막스 브로트 탓에 우리는 카프카의 장편을 읽는 고역을 감내하는 걸까. 도대체 왜?, 라는 의문은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 책장을 덮고서도 해결되지 않는다. ‘내가 널 안다.’, ‘내가 그걸 이해했다’라고 생각한 순간 오해가 시작되어 스스로 불신을 만들고 배신감에 몸을 떨기도 한다. 스스로 자신의 원고를 태울 용기가 없었거나 미련을 남긴 카프카에게 요제프 K가 묻는다. 미완의 소설을 통해 독자에게 하고픈 말은 아도르노의 분석대로 “모든 문장이 ‘나를 해석해보라’고 하면서 어떤 문장도 그것을 허용하려 하지 않는다.” 이게 뭥미?

소설 도입부를 읽다 내려놓은 책들이 꽤 많다. 어디 소설뿐인가. 첫인상에 기대 선입견을 갖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모든 텍스트는 저마다의 역할이 있고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독자에게 발화되는 지점이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읽었다는 만족감을 위해, 또 누군가는 문제를 해결하고 색다른 방식의 위로를 받으려고, 그리고 누군가는 망각과 도피의 수단으로 책 속에 숨기도 한다. 목적이 무엇이든 내게 50쪽을 넘기는 책은 나와의 인연이 없다고 판단한다. 카프카의 『소송』을 꺼내 다시 읽기 시작한 건 필연을 가장한 우연일 테다. 인생 전체가 우연히 휘말린 소송에 불과하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고, 아무 상관없이 욕을 먹고, 영문도 모른 채 불이익을 감내하며, 남의 잘못으로 손해를 보는 게 인생이라면 지나치게 부정적일까. 낭만적 사랑과 긍정 에너지를 뿜어내는 사람 곁에 머물러야 행복도 전염된다면 요제프 K 같은 사람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아야 한다. 바틀비는 물론.

소송의 원인을 알지 못한 채 소설이 끝난다. 공소장을 확인하지도 못한 주인공은 건물 꼭대기층 다락에 설치된 법정을 기웃대며 이들의 피를 빠는 훌트 변호사와 법원 중재인 화가 티토렐리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다소 그로테스크하고 초현실적인 장면들이 이어지는 음울한 분위기의 소설을 읽는 내내 식은땀으로 젖은 속옷을 벗지도 못하고 뜨거운 선풍기 바람이 오히려 온몸에 열기가 올라오는, 바람 한 점 없는 여름밤에 읽지 말아야 할 소설 맨 윗자리에 올리고 싶은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주의로 흘러가는 현대 관료 체제는 매일 뉴스를 통해 목도한다. 상식과 합리에 바탕을 둔 판단과 선택과 거리가 먼 경찰과 검찰과 법원의 판단이 오로지 증거와 법리에 따라 선악을 결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듯싶다. 원고와 피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모두 억울하다고 아우성인 세상에서 요제프 K가 선 법정은 종교 혹은 인간 존재에 대한 은유로 읽히기도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 혹은 종교적 가르침에는 인과관계가 성립할까. 비인간화된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느끼는 소외와 불안은 법정으로 상징되는 권위, 가치, 규범들이 내면화된 죄의식을 만들어 낸다.

1883년 체코에서 태어나 1924년 겨우 40년을 살다 간 프란츠 카프카는 파혼으로 인한 죄책감, 자기 증오, 자기 처벌의 심정으로 이 소설을 썼을 것이라는 추론은 그의 생애와 무관치 않다. 제1차 세계전을 일으킨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와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를 ‘빌렘’과 ‘프란츠’로 등장시켜 우회적이고 은밀한 방식으로 1914년의 세계를 반영했다는 해석도 일리가 있겠다. 그러나 세계가, 아니 우리 삶 전체가 법정과 다름없다는 설정은 공화정 아래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에 산다고 믿는 근대 이후 인류에게 던지는 카프카의 질문이다. 넌 괜찮으냐고, 과연 그게 맞는 거냐고.

“개 같군!” 그가 말했다.

그가 죽은 후에도 치욕은 살아남을 것 같았다.


* 등장인물

요제프 K : 서른 번째 생일을 맞은 은행 재무담당 부장, 주인공 화자

감독관 : 요제프를 감독

프란츠, 빌렘 : 감시인

그루바흐 부인 : 하숙집 주인

뷔르스트너 양 : 타이피스트, 건너편 방 거주자

라벤슈타이너, 쿨리히, 카미너 : K의 은행 동료들

엘자 : 술집 여종업원

법정 정리, 그의 아내 : 법정이 열리는 장소를 제공하며 살아감

베르톨트 : 법학 전공 대학생, 예심판사 밑에서 일하며 법정 정리의 아내를 짝사랑

알베르트(카를) : 요제프의 숙부

에르나 : 사촌인 숙부의 딸

훌트 변호사 : 숙부의 동창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대변자

레니 : 홀트 변호사의 시중 드는 아가씨

사무처장 : 홀트 변호사의 지인

티토렐리 :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이자 비공식적 법원 중재인

블로크 : 상인으로 변호사의 의뢰인

*

체포

그루바흐 부인과의 대화 이어서 뷔르스트너 양

첫 심리

텅 빈 법정에서 / 대학생 / 법원 사무처

태형리

숙부 / 레니

변호사 / 제조업자 / 화가

상인 블로크 / 변호사와의 해약

대성당에서

종말

**미완성 장들

B의 여자친구(몬타크)

검사(하스테러)

엘자에게로

부행장과의 싸움

관청

어머니에게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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