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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 다가온다 -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 ㅣ 프런티어21 3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서원 옮김 / 길(도서출판) / 2006년 8월
평점 :
레닌에게 있어 ‘혁명’은 어떤 의미였을까?
철지난 유행가를 부르듯 어쩌자고 슬라보이 지젝은 레닌을 들고 나왔나. 궁금하고 의아스럽다. 전위적(?) 철학자 슬라보이 지젝이 분석하는 레닌이 궁금해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레닌도 궁금했고 지젝의 분석도 구미가 당겼다. 이 책은 재밌고 흥미로운 주제가 아니지만 지젝다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지젝답다는 말은 대중 문화 특히 영화에 관한 깊은 이해와 분석으로 독자의 이해를 도와가며 스스로의 논리에 동조를 구한다.
충분히 매력적인 글이고 다면적인 측면의 시각과 분석이 드러나는 책이다. 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가 문제가 되지만 지젝은 유럽의 변방 철학자로 분류된다. 라캉과 마르크스, 헤겔에 빚지고 있는 지젝의 글들은 쉽게 전달되지 않는다. 철학적 개념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하다면 그의 논리와 체계를 따라가기 힘들다. 라캉의 실재계, 상상계, 상징계에 대한 이해 없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역사적 사건들을 따라가기가 어렵다.
그러나 지젝의 매력은 풍부한 상상력과 다양하고 폭넓은 문화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이 책에서도 많은 영화를 인용해서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적절하고 그럴듯한 분석과 인용은 내용과 개념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현실 상회에서 벌어졌던 역사에 대한 분석이 이 책의 전제이기 때문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철학자가 바라보는 역사 깊이 읽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역사적 사건과 상황을 분석하는 일과 이 책은 무관해 보인다.
그렇다고해서 레닌이라고 하는 한 개인을 바라보는 철학적 관점이 역사, 사회적 상황과 무관할 수는 없다. 독일에서 벌어졌던 홀로코스트를 비롯해서 911 테러에 이르기까지 현실 상황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바라보는 지젝 특유의 관점이 나타난 이 책은 ‘레닌에 관한 13가지 연구’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레닌을 통한 현실 읽기로 보아도 무방하다.
당연하게도 지젝의 관심은 과거 역사 속의 레닌에게 있지 않다. 이 책의 제목 <혁명이 다가온다>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 하지만, 90여 년 전의 붉은 혁명을 오늘에 되살리자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레닌이 성공시켰던 1917년의 10월 혁명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에 대한 조명 작업을 지젝이 할 리가 없다. 혁명의 핵인 레닌에 관한 다양한 분석과 해석을 통해 오늘을 바라보는 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과연 혁명은 다가오는가? 지젝은 분명하게 결론을 말하는 대신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반문하는 형식을 취한다. 하나의 개념에 대한 분석과 해석을 통해 독자들의 상상력과 이성의 힘을 이끌어 내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좌파인 지젝의 말에 귀기울이는 많은 사람들과 변죽을 울리는 철학과 문학의 짬뽕을 떠올리는 독자 사이에 간극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은 독자의 몫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존재에 대한 욕망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무척 ''폭력적''이라는 것은 명백하지 않은가? 열정이란 정의상 대상에게 ''상처''를 준다. 그리고 심지어는 수신인이 기꺼이 승인할지라도, 그 혹은 그녀는 항상 두려움을 갖거나 놀라면서 이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 P. 111
완전한 사랑은 사랑받는 대상에 대해 전적으로 무차별적이다. - P. 116
사랑이란 종교적 믿음과 같다. 나는 당신의 긍정적인 특징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서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서 사랑의 시선으로 당신을 바라보기 때문에 당신의 긍정적인 특징을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 P. 122
‘레닌은 이웃을 사랑했는가’에서 지젝이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근본적으로 ‘사랑’이라는는 것도 일종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하는 것같다.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서 보여주었던 대상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논리적 접근은 일반적 견해에서 벗어나 신선한 감각으로 다가온다. 어떤면으로든 그의 글들은 독특한 매력이 있다.
철학에 관한 깊이 있는 논의가 아카데미즘에 갇힌 박제된 논리라면 지젝의 글들은 다시 야생으로 돌아온 사자와 같다. 좌파의 길에 언급하는 그의 확언들은 그것이 비록 세상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눈에 불과하더라도 새롭게 여겨진다. 그가 말하는 ‘좌파의 제3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이 책 <혁명이 다가온다>의 궁극적인 목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좌파의 제3의 길이라는 꿈은 악과의 협정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오케이, 혁명 없이, 우리는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성공한 방식인 것을 받아들이지만 최소한 우는 복지사회의 성과를 구해내고 거기에 더해 성적, 종교적, 인종적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관용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다. - P. 207
061012-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