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의 변증법 - 철학적 단상 우리 시대의 고전 12
테오도르 아도르노 외 지음, 김유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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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사유라는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계몽은 예로부터 인간에게서 공포를 몰아내고 인간을 주인으로 세운다는 목표를 추구해왔다. - 21쪽

과학기술과 이성의 발달은 인류의 문명을 한 단계 도약시켰다. 산업혁명 이후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고 다양한 문화 예술이 장밋빛 미래를 예견했다. 이성의 발달과 르네상스를 지난 계몽주의는 벨 에포크 시대로 접어드는 통로였다. 그러나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총성과 함께 20세기는 야만의 시절로 회귀한다. 폭력과 갈등은 민족주의와 파시즘으로 꽃을 피운다. 그 절정에 아우슈비츠가 놓여 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예술가들은 다다를 거쳐 기존의 모든 질서와 체계를 부정하는 초현실주의로 나아갔다.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에서 교수 활동이 금지되자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1933년 미국으로 망명한다. 그들에게 미국은 천국이 아니라 문화적 충격이었다. 상류계급 시민이 누린 지적, 문화적 소양이 오히려 유럽 사회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됐을까. 이 책은 두 번의 세계대전을 치른 인류의 암울한 반성문이다. 문명발달의 과정은 진보의 역사다. 역사는 한발씩 앞으로 나아가며 야만의 세월에서 벗어났다는 믿음은 원자폭탄과 함께 터져버렸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아니 인간의 역사는 야만의 세월을 넘어설 수 있는가. 과학기술의 발달이나 생활 수준의 향상과 무관하게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폭력성, 야만성을 증명해왔다. 숱한 제노사이드, 다양한 방식의 차별, 전쟁과 살육의 과정은 희망 따위를 언급할 수 없다. 아도르노의 말대로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적이다. 낭만적 사랑과 희망찬 미래는 개에게나 던져줘야 하는 게 아닐까.

이 책은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를 밝히기 위한 총체적, 역사적 해석을 시도한다. 그리스의 고전 오디세우스를 소환하고 사드의 소설에서 줄리엣을 증인으로 내세운다. 18세기 이후 서양을 지배한 이성과 합리주의는 스스로 무너졌다. 문명은 실패했다. 문명의 진보는 신화와 계몽주의의 변증법적 관계에 불과하다.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자연을 제압하고 인간을 계몽한다. 재난의 공포, 운명의 선택 앞에 인간은 언제나 신에게서 답을 얻었다. 신화에서 벗어났다고 믿는 오만한 인간의 모습이 두 번의 세계대전을 통해 드러난 게 아닐까. 인간이 스스로 신화를 창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비이성적 세계로 인류를 퇴행시켰다. 게르만족이 앞세운 민족적 우월성이 바로 그것이다. 창조된 신화로 계몽된 사람들의 집단적 광기는 히틀러에게 합법적 권력을 부여했다. 스탈린의 강제 수용소도 다르지 않다. 20세기와 함께 신화가 무너진 자리에 계몽주의는 새로운 신화를 창조했고 그 신화는 또다시 인류를 계몽하며 신화를 만들어 갔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진리를 역사적 운동에 대치되는 어떤 불변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역사성을 부여하는 이론”이 되고자 하는 방법론적 원칙을 내세운다. 계몽의 한계를 드러낸 반유대주의적 요소들을 통해 계몽의 변증법이 인류 문명사를 관통하는 흐름임을 강조한다. “끊임없는 진보가 내리는 저주는 끊임없는 퇴행이다.”라는 문장 앞에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건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문장과 논리를 무너뜨릴 만한 증거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1947년 미국에서 쓴 이 책의 개정판 서문은 1969년 4월 프랑크푸르트에서 쓰였다. 20여 년이 자났지만 수정에 인색한 이유를 밝히며 여전히 ‘관리되는 세계’로의 발전을 촉진시키기보다는, 자유는 지키고, 전개시키고, 확산시키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스케치와 구상들’은 특정 주제에 집중하지 않고 다양한 현상들에 대한 단상이다. 거대한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불변하는 진리를 주장하거나 이론을 내세우는 이야기보다 반성적 회의주의자들의 이야기에 꽂히는 이유는 지극히 주관적인 취향일 터.

여전히 유효한 통찰 중 하나는 ‘문화 산업’을 대중 기만으로서의 계몽이라고 주장한 부분이다. “대중 매체가 단순히 ‘장사business’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아예 한술 더 떠 그들이 고의로 만들어낸 허섭스레기들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사용된다.”라는 주장은 다양한 문화 현상들이 ‘장사’로 통합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반어적 표현이다. 정신 문화라곤 찾아볼 수 없는 미국 현지의 사정도 저작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겠으나 미국으로 표상되는 자본주의 문화 산업에 대한 황량함이 전통적인 유럽 지식인에 비친 모습은 한심함을 넘어서는 수준이었으리라. 다만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의 간극이 존재하던 시대에 꼰대같은 소리로 비칠 수 있으나 우리 현실에도 유효한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다.

오래전 읽기를 포기했던 책들이 새롭게 읽히고 감동을 주는 문장으로 뒤바뀌곤 한다. 나이와 세월의 장점은 이것만이 아니다. 키케로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가끔 하늘이 맑고 푸르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다. 독서의 목적과 가치를 오해하는 사람들을 가끔 본다. 새로운 도전과 다양한 방법이 나쁘지 않으나 본질에서 멀어질수록 목적이 수단으로 전락한다. 지식과 정보는 도구로 활용돼야 하지만 우선 내 안에서 잘 수용된 후에 겨우 변화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닌가. 독서의 변증법 또한 신화와 계몽 사이에서 길을 잃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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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필연 궁리하는 과학 6
자크 모노 지음, 조현수 옮김 / 궁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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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연과 필연의 열매다. _데모크리토스

17세기 과학 혁명은 인간의 사고체계뿐만 아니라 예술과 문화 구조를 변동시켰다. 신 중심의 세계관이 무너지고 합리와 이성의 시대가 도래했다. 어떤 결과를 초래한 원인이 밝혀지면 필연적인 이유가 설명됐다. 종교가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은 분명히 한계가 있다. 인간의 사유 방식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전체가 아닌 부분에 천착했다. 집단이 아닌 개인, 외부가 아닌 내면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미시적 세계관은 거시적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피력했다. 20세기에 눈부신 성과를 거둔 분자생물학은 『생명이란 무엇인가』(에르빈 슈뢰딩거)를 밝혀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단백질을 구성하는 겨우 20종의 아미노산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의 몸을 구성하는 기본단위라는 사실은 양자역학이 증명하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관한 놀라운 비밀을 신의 영역까지 침범한 것으로 오인하게 한다.

자크 모노의 논리는 명확하다. 미시세계의 우연이 거시세계의 필연을 만든다는 주장이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가 복잡한 구조의 생명체를 만들어냈으나 생명체의 본질은 불변적인 자기복제의 실현에 있다. DNA에 의한 정교한 자기복제의 과정에서 ‘요란’스런 일이 벌어진다. 즉, 변이라 불리는 우연에 의해 진화가 이루어지지만 종족 보존과 증식이라는 필연적 의도에 대한 저항 능력이 바로 변화, 즉 진화를 이끈다. 세대를 거쳐 자기 구조를 복제하는 불변적 태도야말로 생명체의 본질이며 필연적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돌연변이가 발생하고 일단 한번 일어난 변이는 또다시 돌처럼 DN에 새겨져 자기복제로 이어지는 철저한 순환구조는 확실성에 기반한 필연의 세계다. 그렇다면 ‘불확정성 원리’에 따른 우연한 변이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도대체 어떤 의도로, 누가 일정한 방향의 변이를 용인하는가. 진화의 비밀은 자연선택에 있고 수많은 변이 중에 선택받은 변이가 다음 세대의 DNA에 기록되는 방식으로 생명체의 진화가 계속됐다는 이야기는 어떤 신화보다도 아름답고 신비롭다.

인간은 아주 오랫동안 자연을 지배하며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해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필연성이 지배하는 세계는 예측 가능한 삶을 꿈꾸게 한다. 안전하고 편안한 미래는 확실성의 세계다.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 모두 인간은 고귀한 존재이며 이 땅에 태어난 필연적 이유와 의미를 설파한다. 철학 또한 다르지 않다. 존재론부터 형이상학에 이르기까지 정교한 논리를 따라가며 인간의 존재 이유와 사유 방식을 점검한다. 필연적 인과관계가 지배하는 과학의 세계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생명체의 출현, 인류의 탄생이 우연한 사건에 불과하다는 자크 모노의 충격적 선언은 그 여파가 아직도 진행 중이 아닐까.

1970년에 나온 이 책은 노벨의학상을 수상한 분자생물학자 자크 모노의 ‘반과학’ 선언이다. 생명의 기원과 진화 과정이 모두 필연이 아닌 우연의 결과라니! 그럼 인간의 삶은 어쩌란 말인가! ‘너에게는 우연이나 나에게는 숙명이다’라는 정호승의 시구절 따위는 개에게나 줘야 할까. 그 혹은 그녀의 만남이 운명이 아니라니 말인가. 한 인간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숭고한 과정이 불확정성의 원리에 따른 우연일 뿐이라면 인간의 의지와 노력, 삶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가. 혼돈과 대환장 파티로 인류를 초대한 자크 모노의 용기가 부러운 게 아니라 철학, 종교, 정치, 윤리, 문화 등 모든 학문과 사유의 영역에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한 관점의 새로움이 놀라웠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다. 그 세계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과 사유의 틀로 짜인 고유한 우주라고 생각한다. 자유와 평등, 인권 같은 개념이 인류 보편적 가치로 통용되는 이유는 여기에 바탕을 둔다고 하면 과언일까. 어쨌든 개별적 존재로서 인간의 삶은 물론 공동체의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점검과 성찰에도 ‘우연’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부모가 스펙인가, 장애는 선택인가, 여성은 운명인가, 나이는 벼슬인가……. 심리적 귀인 이론은 단순히 비합리적 태도가 아니라 우연과 필연에 대한 외면, 불안과 무지에 대한 공포가 아닐까. 우리가 사는 세계의 일부로서 인간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한편의 거대한 우연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지나치게 냉소적인 태도일까. 자크 모노의 이야기가 과학과 기술에 대한 성찰을 넘어 인류 사상사를 개척한 고전으로 읽히는 이유를 번역자 조현수는 이렇게 말한다.

“저자는 그 어느 시인보다도 인간의 불행과 정신적 방황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으며, 그 어느 구도자보다도 경건하고 열정적인 자세로 진리를 추구하고 그 어느 철인보다도 밝은 혜안으로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제시한다. 예술과 종교와 철학, 이 모든 것을 죽인 곳에서, 이 모든 것의 감수성과 경건함과 지혜를 합쳐 보다 더 커다란 진실 속에서 함께 완성되도록 하는 것, 이것이 저자가 누누이 강조하고 스스로가 실천한, 진정한 과학의 힘일 것이다. 진정한 과학이란 무엇보다도 인간의 진정한 의무를 수행하는 길이다.”(옮긴이의 말)

마그리트가 삽화를 그린 로트레아몽 백작의 <말도로르의 노래>(1948)에는 “재봉틀과 해부용 탁자 위의 우산이 우연히 마주치는 것처럼 아름다워”라는 구절이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좋아했다는 이 구절은 곰표 맥주처럼 전혀 연결고리가 없는 대상의 콜라보레이션이 창조적 미학을 드러낸다.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관습적 사고를 버릴 때 인간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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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왜 끝나나 - 사랑의 부재와 종말의 사회학
에바 일루즈 지음, 김희상 옮김, 김현미 해제 / 돌베개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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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이라는 말은 진실에 얼마나 근접할 수 있을까. 울리히 벡과 엘리자베트 벡 게른샤임이 분석한 근대적 사랑에 대한 고찰은 낭만적 사랑에 대한 환상을 여지없이 깨뜨린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유를 떠올려보자. 세속적 사랑과 순수한 사랑이라는 따로 있다고 믿고 싶은 사람에게 에바 일루즈가 묻는다. 사랑은 왜 끝나느냐고. 근대 이후 자유연애가 가능해진 인류에게 성과 사랑은 자본주의와 현대 문화를 통해 변형되고 왜곡된 지 오래다.

사랑은 왜 아픈가(2011), 사랑은 왜 불안한가(2013, 원제: 하드코어 로맨스)에 이어 사랑은 왜 끝나나(2018)로 이어지는 에바 일루즈의 고민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하다. 인류 사회는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끝없이 계속해서 다른 형태의 사랑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사회학, 커뮤니케이션, 문화이론을 고루 연구했지만 저자의 논거는 대체로 사회학 이론에 집중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울리히 벡, 악셀 호네트, 앤서니 기든스 등 현대사회를 분석하는데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저작을 적용하며 ‘사랑’의 본질을 탐구한다.

전근대 사회에서 구애는 확정적 선언이었다. 썸을 타고 탐색하고 망설이는 과정을 거쳐 사랑을 고백하는 현대식 사랑과 정반대였다. 사랑을 흔히 ‘선택’의 문제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모와 능력으로 대표되는 우월적 지위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현대사회에서 사랑은 오히려 거래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마음이 움직이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련의 과정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만남과 구애와 고백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갈등과 망설임에 도사리고 있는 선택의 기준에 대한 현상들. 에바 일루즈는 ‘부정적 선택’이라는 개념을 통해 배제의 논리로 ‘선택하지 않음’의 사랑을 시작한다.

캐주얼 섹스의 일상화, 부정적 사회성이 초래한 혼란스러운 섹스는 자본주의와 결합한 몸의 가치를 돌아보게 한다. 존재론적 당혹감은 평가 기준의 변화로 이어지고 주체의 혼란스런 지위를 경험하게 한다. “전근대의 구애는 감정으로 시작해 섹스로 끝났다. 그리고 전근대의 섹스는 죄책감과 불안감으로 불러일으킬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현재의 관계는 (쾌락적) 섹스로 시작해 어디서부터 어떻게 감정을 가꿔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관계를 두렵게만 여기는 불확실성과 씨름한다. 몸은 감정을 표현하는 무대로 기능해왔다(“좋은 관계는 좋은 섹스로 표현된다”는 상투적 표현을 보라). 그러나 감정은 성적 상호작용과는 관계없는 것이 되었다.”라는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무한한 자유와 혁명적 남녀관계의 변화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사랑과 섹스의 문제가 어떻게 감정과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저자는 구체적 사례를 인용한다. 다양한 사람들의 대화와 인터뷰를 직접 인용하며 그들이 겪는 ‘혼란’, 즉 사랑이 왜 끝나는지에 대해 살피는 방식이다.

실제 우리에겐 무한한 자유가 주어질 수 없다. 누구나 평등할 수 없듯 사랑 또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상황에 따른다. 일반화할 수 없는 현대인의 사랑이 왜 끝나는지 궁금하다면 진지하게 시간을 들여 이 책을 탐독할 만하다. 변덕스러운 감정, 신뢰와 불확실성에 처한 연인들은 부정적 관계로서 헤어짐을 택한다. 사랑의 끝은 어떻게 찾아오며 이별의 서사구조는 어떠한가. 현대사회에서 섹슈얼리티는 사랑과 이별에 어떻게 작동하는가. 전 세계 곳곳에서 매일 쏟아지는 드라마와 영화를 보며 감정을 이입하고 자기 경험을 돌아봐도 고민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물론, 사랑이 끝나는 이유를 책으로 배울 수는 없다. 다만, “‘사랑의 끝남’ 과정 대부분에서 주체가 자신의 가치를 확보하려 홀로 투쟁하도록 버려진 것은 자본주의 사회 때문이라는 논제로 귀결된다. 가치는 서로 다른 네 가지 무대에서 성립된다. 바로 섹슈얼리티화, 소비 대상과 소비 실천, 관계로부터 탈출함으로써 자율성을 긍정하는 능력, 감정 존재론이다. 그리고 가치는 가정 내에서 사랑이 식어가는 그 방식에 의해 끊임없이 의문에 부쳐진다. 그러나 또한 관계를 시작하고 떠나는 행위는 강제적으로, 끊임없이 일어난다. 이로써 자존감은 갈수록 제로섬 구조에 포획된다. 결국 자아는 섹슈얼리티와 욕망과 소비 정체성과 감정적 확실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또 다른 상대에게 깊이 의존할 수밖에 없다. 친밀성과 결혼은 서로 상대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으로 체험된다. 그래서 얻어지는 놀라운 결과는 이별이나 이혼이나 다시금 자유를 회복하는 통로가 된다는 점이다. 대다수 인생에서 가장 아픈 경험 가운데 하나인 이별 또는 이혼은 결국 자유를 되찾을 탈출구가 된다.” 주체적 사랑, 섹슈얼리티, 욕망, 소비 정체성, 감정적 확실성은 사랑이 끝나는 이유이며 자유를 확보하려는 몸부림이다. 동양의 가부장적 문화와 전통적 가족 관계에 익숙한 우리에겐 먼 이야기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사랑은 사랑일 뿐 언젠가 끝나지 않겠는가.

사랑의 본질과 의미에 대한 무관심은 낭만적 사랑과 환상에 시달리게 한다. 그 또한 주체적 사랑의 시작이며 일련의 과정을 거쳐 이별이 아닌 사랑의 끝에 도달하게 된다. 영원한 사랑을 꿈꾸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이 책의 독자로 적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와 현대사회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변형시키고 있는지 수십 년간 연구해 온 에바 일루즈의 노력에 값하는 깊이와 통찰로 가득한 책이다. 세심하게 고민한 흔적이 역력한 문장들은 단순히 현상을 나열하고 분석을 보태는 정도의 수고만 들인 책과 비교된다. 사랑은 왜 끝나나, 라는 질문에 한 마디로 답할 수는 없어도 자신의 감정과 욕망이 왜 변하는지 한 번쯤 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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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에 대하여 - 왜 사과는 생각보다 힘들고 복잡하고 어려운가
아론 라자르 지음, 윤창현 옮김 / 바다출판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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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입 베어 문 자국이 선명한 사과. 나의 첫 스마트폰인 아이폰 3 애플apple 로고를 한참 들여다본 기억이 난다. 분명 소비자에게 사과apology를 떠오르게 할 리 만무하나 한국어의 동음이의어는 기묘하게도 시원하고 단맛이 나는 과일과 미안하다는 의미의 사과는 같은 소리를 낸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만, 사과는 죽음을 면하게 할 수도 있다. 칭찬은 쉽고 사과는 어렵다. 칭찬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사과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왜 그럴까.

인간이 느끼는 자연스런 정서와 욕망과 행동에 대한 연구 결과는 늘 흥미를 끈다. 근본적인 원인을 알게 되면 타인과 세상을 조금 다르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칭찬에 인색한 사람뿐만 아니라 사과할 줄 모르는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자. 상황과 관계에 따라 다르겠으나 칭찬을 한 사람에게는 대체로 긍정적 효과가 나타난다. 손해보다 이익이 많다. 의외로 가성비가 뛰어난 처세술이다. 이에 비해 사과는 대체로 잘해야 본전이다. 오히려 부정적 효과가 나타나고 상황과 관계가 악화되기도 한다. 최근에 불거진 ‘개 사과’ 논란이 대표적인 예다. 개인이 개인에게, 개인이 집단에게, 집단이 집단에게 하는 사과의 내용과 형식에 따라 후폭풍이 거세지고 반작용이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 않으니만 못한 사과로 관계가 단절되거나 상황을 악화시키기도 한다. 아우슈비츠에 대한 독일의 사과, 종군 성노예에 대한 일본의 사과 등 국가 간의 사과는 여전히 진행형인 국제 문제다. 이렇게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사과는 사람들에게 큰 관심사가 아니다. 오히려 칭찬과 처세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사과에 대하여』 누구에게나 한 번쯤 일독을 권하고 싶은 주제다.

사회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아론 라자르는 우선 사과의 가치에 주목한다. 왜 우리가 사는 시대에 사과가 더욱 중요해졌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계급과 계층, 나이와 관계, 성별과 친소에 따라 사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시대와 문화에 따라 사과하는 방법과 의미도 달라진다. 아론 라자르는 “인간관계에서 가장 심오한 행위는 사과를 주고받는 것이다. 사과는 피해자의 모욕감과 원한을 해소하고, 복수에 대한 욕구를 제거하며, 상한 감정의 용서를 이끈다.”라는 말로 사과의 가치를 정의한다. 상식적 사과의 기본은 진정성이다. 거짓 사과는 오히려 부작용을 부른다. 그러면 사과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과는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①잘못에 대한 인정 ②해명 ③후회, 수치심, 겸허함, 진심 등을 포함한 태도와 행동 표현 ④보상이다. 개별 사과에 따라 사과 과정의 부분별 중요성, 필요성까지도 달라질 수 있다. 첫 번째 단계가 가장 중요하다. 인정할 수 있는 용기야말로 사과의 기본이고 시작이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어떤 실수를 했는지 인정하지 않고 모호한 말로 회피하거나 조건을 붙이거나 변명으로 시작되는 사과를 요즘 뉴스에서 자주 접한다. 자초지종을 해명하고 마음을 담은 태도와 행동을 보이며 그에 합당한 보상과 책임이 뒤따를 때 사과는 마무리된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사과가 가진 치유의 힘을 ‘1. 손상된 자존심과 명예 회복 2. 보편적 가치를 공유한다는 믿음 3. 피해자가 잘못 없다는 확인 4. 미래의 안전에 대한 확신 5. 가해자의 심적 고통을 목격 6. 손해에 대한 합당한 보상 7. 상처를 표현할 의미 있는 대화’라고 정리한다. 학문적 이론과 실험결과로 증명하는 게 아니라 숱한 사례를 통해 관찰하고 분석한 결과다.

잘못에 대한 인정을 위해 필요한 네 가지 요소는 ‘1. 사과를 받아야 하는 피해자, 피해에 책임이 있는 가해자 또는 관련자들을 정확히 판별하는 것 2. 잘못된 행동을 소상히 인정하는 것 3. 이러한 행동이 피해자(들)에게 끼친 영향을 인지하는 것 4. 피해가 당사자 간의 사회적 혹은 도덕적 계약을 침해했음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한다. 첫 번째 단추가 잘 끼워지면 후회 → 해명 → 보상으로 이어지는 단계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특히 “공적 사과에서 잘못의 세부 사항을 따지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과하는 쪽이나 사과 받는 쪽이 다수, 때로는 몇백만 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잘못이 세세하게 적시되지 않을 경우, 훗날 상충된 해석으로 인해 파국에 치닫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사과는 문서 형태로 성문화되어 당사자 모두의 역사에 편입되기 때문에, 가해자는 모호함 없게, 상호 이해된 바가 추후 정정될 여지가 없게끔 처음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라는 지적에 공감했다. 개인적인 사과는 관계와 상황에 따라 ‘진심’이 통할 수도 있고 거절될 수도 있으나 공적 사과는 그 형식과 방법에 따라 무거운 결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사과하는 방법, 우리가 사과하는 이유와 사과하지 않는 이유 그리고 사과하는 타이밍에 대해서도 사례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뭔 사과 이리 복잡하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세세하게 짚는다. 우리는 사과의 교과서를 공부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제대로 된 사과가 무엇인지 알 필요는 있지 않을까. 일상에서 부딪치는 서로 다른 생각들, 이성의 영역과 감정의 충돌, 숱한 인간관계에서 벌어지는 갈등이 어쩌면 ‘사과’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과를 개에게나 줘버리는 정도로 생각하다가 스스로 개가 될 수도 있다. 각자의 성향과 기질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으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사과할 수 있는 ‘용기’가 아닐까 싶다. 거짓말을 마음껏 할 수 있는 ‘만우절’도 있는데 그 많은 ‘~절’과 ‘~데이’ 중에 왜 ‘사과절’이나 ‘미안하데이’는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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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카멘친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53
헤르만 헤세 지음, 박종서 옮김 / 문예출판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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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신화가 있었다.

헤르만 헤세의 첫 번째 소설 『페터 카멘친트』의 첫 문장이다. 태초에 빛이 있듯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신화를 갖고 있다. 『데미안』과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으며 싱클레어에 몰입한 사춘기, 헤르만 헤세는 내게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권했다. 신열에 들떠 골드문트가 되어 불면의 밤을 보내기 시작했고 질풍노도의 시기를 통과했다. 스무 살 무렵 헤세의 마지막 소설『유리알 유희』와 함께 오랫동안 헤세를 잊고 지냈다. 『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을 읽은 적이 있으나 헤세는 여전히 내 삶의 첫 신화에 온기를 불어넣은 작가다. 이제, 그의 첫 소설을 읽으며 아련한 추억들이 떠올랐으며 열병을 앓던 사춘기의 느낌이 되살아 났다. 그땐, 그랬었지.

가족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길을 떠나고 친구의 죽음과 실연의 상처로 방황하다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사랑과 연민을 통해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페터 카멘친트. 그는 모든 너고 오로지 나다. 체험의 깊이와 넓이가 한 인간을 완성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신화’에 해당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 삶의 목적과 가치가 제각각인 건 근대 이후의 일이다. 전통 사회와 달리 개인의 정체성을 찾아 방황하거나 자유의 현기증인 불안을 두통처럼 안고 사는 현대인에게 피터 카멘친트는 과거의 인류 혹은 현재 진행형으로 읽힌다. 우리는 여전히 어머니의 죽음과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성자 프란체스코에 감동하는 유형의 인간에게 몰입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 DNA에 새겨진 자연선택과 성숙의 과정은 진화생물학이나 진화심리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 기질과 개체의 고유한 특성에 기인한다. 인간은 비슷한 존재이면서 서로 다른 생명체가 아닌가.

페터 카멘친트는 목공의 딸과 불구자 보피를 통해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고 그들의 죽음을 수용하며 삶을 긍정한다. 젠알프스의 니미콘에서 태어나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를 거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전형적 원점회귀형 소설이지만 길 떠남은 단순한 소설적 장치가 아니라 한 인간의 도전과 용기를 상징하며 현대인의 불안과 고독에 대한 항변으로 읽힌다. 여전히 치유할 수 없는 외로움에 부들거리는 21세기 네트워크형 인간도 1904년에 발표된 소설의 주인공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전체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인물과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유년 시절(어머니) → 첫사랑(뢰지 기르타너) → 만남(리하르트/에르미니아) → 우정(리하르트) → 우울(엘리자베트) → 향수(아버지/나르디니) → 죽음(목공의 딸) → 우정(보피) → 귀향(아버지)’ 내용을 따라가며 주인공의 이동 경로를 따라가 보자. ‘니미콘 → 취리히 → 파리 → 바젤 → 아시시 → 취리히 → 니미콘’으로 순환한다. 타인과의 만남과 교류는 번번이 어긋난다. 사랑은 남의 일이다. 페터의 진심과 그녀의 생각은 다르다. 보피와의 만남으로 인간애를 느끼지만 그 역시 죽음으로 끝이 난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만남과 이별을 경험한다. 가족, 친구, 연인 등등. 긴 여행길에 스치는 사람은 기억조차 희미하다. 그들은 각각 다른 의미로 타인을 규정한다. 기억도 다르고 판단도 상이하다.

헤세는 그의 첫 소설에서 전통적인 교양소설Bildungsroman을 문법을 철저히 따른다. 괴테에서 토마스 만의 『마의 산』으로 이어지는 성숙한 인간에 대한 갈망이 헤세로 이어진다. 물질문명이 발달과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으로 지구인이 하나로 접속해 있으나 우리는 페터 카멘친트가 느낀 대자연의 신비와 경외, 인간에 대한 이해와 겸손으로부터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한 건 아닐까. 싱클레어와 골드문트의 방황과 고민을 여전히 계속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세상은 그런 곳이라고 사람은 그런 존재라고 믿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살아가는 건 아닐까.

꽃 같은 아름다운 시절도

덧없이 사라져버린다.

좋은 일이 있거든 마음껏 즐겨라

내일을 알 수 없는 인생이어니.

- 로렌초 메디치, 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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