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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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 ‘오죽’해도 사람이 다 그런 건 아니다. 그러니까 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는 너그러움과 태도는 고아리의 아버지 개인적 성향이다. 그것을 사회주의자가 인간을 향해 갖고 있는, 혹은 가져야 하는 민중에 대한 믿음과 사랑일 수는 없다. 바보처럼 순진하고 따뜻한 사람의 면면이 드러나 보는 사람의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이 소설의 실제 주인공 ‘아버지’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소설을 읽는 동안 내 아버지가 떠올라 눈물이 났다.

그(?) 시대를 다른 방식으로 견뎌야했던 분들의 신산한 삶이 어디 소설 한 두권 안되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우리 현대사의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6.25 전쟁을 겪은 분들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오로지 생존을 위해, 유일하게 군대에 보내지 않기 위해 아들을 사범학교에 보낸 할머니 덕에 내가 존재한다. 희박한 비율의 생존확률을 뚫고 살아남은 아버지 덕에 그분의 삶을 전하는 빨치산의 딸 정지아도 자기 존재의 근원을 밝히려 이 소설을 쓴 건 아닐 게다. 절절한 사부곡思父曲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 이유는 그 어떤 이데올로기의 갈등도 좌우대립도 올곧은 신념도 아닌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가 바탕을 이루기 때문일 것이다.

여전히 빨갱이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한국 사회는 아무렇지도 않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대통령을 향해 빨갱이나 간첩이라고 짖어도 될만큼 민주화된 시대를 살고 있다. 그 이면에 숨은 두려움과 공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 원한과 감정 너머 현실을 살필 합리성이 결여된 비난들이 나는 오히려 더 무섭다. 이념에 매몰된 시선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고 그 이념이 지향하는 목적지를 상실하기 마련이다. 겨우 장만한 집 한 채 세금을 덜 내고 싶어 투표했다는 후배나 집값이 너무 올라 화가나서 투표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당선된 대통령의 능력과 됨됨이에 국한 문제가 아니다. 또 다음에 누가 대통령이 되든, 내년에 어느 쪽이 다수당이 되든 마찬가지다.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가 결정된 사람들의 단단한 논리를 깰 능력은 아무에게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 길에 이르는 개인적 경험, 합리화 과정도 제각각이다. 소설은 관계의 단절을 가져오는 종교와 정치 이야기와 무관하게 사회주의자 ‘뽈갱이’였던 한 아버지의 삶을 돌아본다.

장례를 치르는 3일동안 찾아오는 사람들과 아버지의 인연 그 머나먼 현재와 과거의 이야기가 긴 조사弔詞처럼 딸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슬픔과 고통을 웃음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민족답게 해학으로 가득한 표현 속에 정지아의 슬픔은 더욱 짙게 배어나온다. 모든 자식이 부모에게 갖는 마음이 같지 않듯, 모든 부모도 자식에 대한 마음이 같지 않다. 본능은 관계 속에서 다른 형태의 감정을 만든다. 부모와 자식 관계도 서로에 대한 말과 행동과 태도에 따라 각자 다른 모습으로 형성된다.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로 고아리와 아버지의 관계를 규정할 수 없다. 그 관계의 특별함이 이 소설의 독특한 아우라를 빚는다.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의 삶을 구술한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를 읽다가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한 기억이 떠올랐다. 1955년에 수감되어 1991년에 석방될 때까지 무려 36년간 세상에서 배제된 한 인간의 신념과 이데올로기 따위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동시대인으로 헌법에 보장된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억압한 시대를 함께 살아온 동시대인의 참담함 때문이었다. “나는 당신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그것을 말할 권리는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지켜내겠다”고 외쳤던 볼테르의 말에 대한민국은 동의하지 않는다, 여전히. 지식의 가장 큰 죄는 침묵이다. 이런 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으나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뽈갱이’에 대한 적개심과 ‘전라디언’에 대한 혐오를 버리지 못하는 외눈박이로 살아간다. 그들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구별짓기는 계층 사회의 보이지 않는 거리두기가 아니라 뼛속까지 스며든 무지의 오류이거나 극단적 편견의 전형이다. 차별하는 사람은 반드시 차별받기 마련이다. 아니 차별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차별하기로 실천하는 비겁함은 아닐까.

혼자만 잘살믄 무슨 재민겨, 라던 전우익 선생의 말이 소설 속 아버지의 ‘항꾼에’에 담겨 있다. 너와 나는 다르다. 우리는 서로의 이익과 생각과 감정이 일치할 때만 성립되는 교집합이다. 혁명에 실패한 자들의 변명은 성공한 자들의 후일담보다 길고 지루하다. 각자의 ‘선’이 달라 참고 견디지 못하는 기준과 영역도 다르다. 그래서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에 의해 대개 세상이 움직여지고 인재임이 분명한 사고에도 책임은 아랫 것들의 몫으로 남는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을 응원하는 사람들이다. 일시적으로 부와 권력이 있을 뿐 미래의 권려과 부는 자기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일까. 그들은 왜 그들을 옹호하고 응원하는가. 놀랍지만 그 비밀을 아는 자들만 출세에 성공하고 미련스럽게 민중에 대한 믿음과 짝사랑을 앓는 사람들이 고아리의 아버지처럼 사회주의를 꿈꾸는 건 아닐까. 아니 그리 거창한 이념과 혁명이 아니더라도 더 나은 세상, 더불어 함께 잘 사는 세상을 희망하는 건 아닐까. 슬프고 재밌는, 눈물과 함께 읽은 나의 아버지와 고아리의 아버지 이야기가 혼재했던 이야기를 오래 잊을 수 없을 듯하다. 문학적 감동은 소설의 개연성과 핍진성이 아니라 독자 개인의 삶과 닿는 접점과 인물에 투사된 감정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끝까지 읽지도 못할 소설이 누군가에게는 눈물 범벅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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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 - 마늘에서 초콜릿까지 18가지 재료로 요리한 경제 이야기
장하준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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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지붕 혹은 텐트 천정에 쏟아지는 빗소리는 후라이팬 위에 기름이 튀는 소리를 닮았을까. 장마철 파전에 막걸리조차 건강을 걱정해야 할 것 같다. WHO가 인공감미료 아스파탐을 발암가능 물질로 분류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치킨에 맥주든, 와인에 치즈든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라는 원망과 분노가 전해지는 정호승의 시가 떠올랐다. 시인은 ‘술 한잔’은 사랑의 비유적 표현이라고 했으나 팍팍한 세상과 황당한 뉴스가 입맛을 쓰게 한다. 사는 일이 모두 먹고사니즘을 향한 맹렬한 전쟁이라면 음식 그 자체가 ‘경제’의 바탕일 것이다.

식탁 위의 세계사부터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까지 인간의 삶은 음식과 뗄 수 없는 활동이다. 생존을 위한 기본조건이며 생물학적 욕망의 근원인 식욕은 거의 모든 욕망의 근원이다. 가히 마늘의 민족이라 할만큼 전세계 어느 국가와도 비교불가인 한국인의 마늘 소비량. 그 알싸하고 냄새나는 마늘 이야기와 한국인의 식습관으로 시작하는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는 맛을 표현하기 어렵다. 달콤 쌉싸름하다가 쓰고 떫은 맛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요리에 진심인 경제학자의 18가지 재료와 요리 이야기는 읽을만하지만 그와 얽힌 지구 곳곳의 경제 이야기는 입맛을 돋우는데 실패한다. 재미와 의미를 함께 잡을 수 있는 독특한 책이지만 결국 문제는 경제다.

동종교배를 반복하면 환경 변화에 취약해진다. 미국 유학파 교수와 경제 관료들이 모여 신고전주의 경제학 이론으로만 대한민국을 요리하거나 자유 시장경제의 명암을 무시한 채 여전히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을 옹호하는 정치인들이 가득한 대한민국 사회는 성장, 발전 가능성이 그리 커보이지 않는다. 세계적인 경제학자 장하준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 이유와 그의 이야기가 대한민국 주류 경제학계에서 외면당하는 현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경제학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정치경제학으로 출발한 학문이라는 사실을 몰라도 경제는 정치와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정경유착이 문제니 정치와 경제는 멀수록 좋다는 착각은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황당한 논리가 성립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가 계속 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완벽한 시스템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제학은 자본주의 뿐만 아니라 다양한 경제 제도와 시스템을 들여다보고 정부 정책과 시장 개입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민한다. 결국 자기 이익에 충실한 개인들에게 경제를 안다는 것, 경제의 중요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장하준은 경제학이 “개인적이건 집단적이건 경제적 변수에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 다시 말해 우리 자신에 대한 규정 자체를 변화시킨다.”라고 말한다. 먹고 사는 문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 경제다. 정답이 없다면 토론과 타협이 필요하고 우리 사회가 나아갈 지향점을 고민하는 데 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보태야 한다. 노조를 해체하고, 실업급여를 폐지하면 경제가 살아날까. 낙수효과의 희망고문과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신화는 이루어졌는가. 선별복지와 보편복지의 논쟁의 전제 조건인 ‘복지의 필요성’은 어디까지 합의가 된 건가.

폴 크루그먼과 나심 탈레브, 토마 피케티와 장하준을 통해 거시적 관점에서 경제 문제를 조금 다른 시각으로 살펴보는 지혜를 가질 수는 없을까.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학자의 이야기든 유럽의 경제학자든 우리가 다함께 잘 살 수 있는 의견과 방법을 제시한다면 귀 기울여 들어봐야하지 않을까. 이 책은 편견 넘어서기, 생산성 높이기, 전 세계가 더 잘살기, 함께 살아가기, 미래에 대해 생각하기로 나뉘어 경제학을 더 잘 먹는 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머리말에 놓인 마늘만큼 지독한 냄새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식탁에 모여 경제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게 한다. 학문적 성과 뿐 아니라 대중적 글솜씨가 최고인 경제학자 장하준의 책은 기다리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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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행복한 이유 워프 시리즈 1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 허블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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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에 실린 단편 「완전한 은둔자」를 읽었을 때 충격이 떠올랐습니다. SF는 개인적인 취향이 아니라서 잘 읽지 않습니다. 쥘 베른의 소설 같은 고전은 좀 읽었으나 김초엽의 소설도 읽다 덮을만큼 어느 구석에 닿지 못하나 봅니다. 독서모임의 장점 중 하나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을 책과 분야의 경계를 허무는 일입니다. 망설이다 끝까지 읽었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단편인 「적절한 사랑」(1991)과 「100광년 일기」(1992) 때문이었습니다. 남편의 뇌를 자궁에 품을 수 있다는 상상은 충격적입니다. 아마 이 소설을 읽었다면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모티브를 얻었을 듯 싶습니다. 어쨌든 상상력엔 한계가 없으니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달을 목도하는 현대인에게 불가능한 미래는 거의 없을 겁니다. 공동체의 윤리와 개인의 선택 사이에서 충돌하는 지점이 아마 가장 큰 걸림돌이 되겠지요. 바닷속을 여행하고 하늘을 나는 꿈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장기를 갈아 끼우는 건 일도 아닌 세상이니, 뇌를 리부팅하거나 다른 몸에 이식해서 영생을 꿈꾸는 일도 현실이 될지 모릅니다. 두려운가요, 아니면 기대되나요?

순전히 ‘나’의 판단과 선택이라고 믿는 모든 일들이, 미래는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착각은 아닐까요.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택 문제는 종교와 철학의 분야가 아니라 뇌과학과 심리학의 영역으로 넘어온지 오랩니다. 그렉이건의 『내가 행복한 이유』(1995)에는 11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인터넷이 일상에 활용되어 네트워크 세상을 사는 우리에겐 조금 진부한 용어나 개념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번역자 김상훈의 해설대로 하드 SF를 읽는 일은 피학적 독서를 즐기는 분이 아니라면 생소하고 고통스런 경험일 수 있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최신 과학, 의학 이론이 주인공, 즉 인간 존재와 삶의 의미에 천착하는 과정의 도구이자 장치라고 생각하기엔 분량과 스타일이 넘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주제에 매몰된 1인칭 주인공의 사변적 고백이 ‘지루함’을 만들었습니다. 철학적 고민은 독자의 몫이어야 하는데, 주인공이 스스로 갈등과 번민에 빠진다면 곤란합니다. 주인공은 사건을 만들고 갈등을 일으키는 ‘말’과 ‘행동’에 치중해야 하는 게 소설의 고전전 문법이 아닐까요. SF 소설 매니아들이 들으면 쌍욕을 먹을 만한 볼멘 소리일까요. 읽는 재미가 덜해지는 이유는 자명하게도 긴장감이 떨어지는 스토리 전개와 지나치게 고뇌하는 미래 주인공들의 현실적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소설의 목적과 의도, 작가의 주제의식이 대개 사회과학, 과학철학, 윤리학의 문제라면 이미 그 분야에서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을텐데 굳이 소설이라는 도구가 필요한가 싶었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소회와 달리 SF소설을 좋아하는 분들의 평가는 전혀 달랐습니다. 독서 모임의 목적이 공감과 위로가 아니라 다른 관점과 낯선 시선 때문이니 경청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테드 창과 그렉 이건의 차이, 김초엽을 비롯하 최근 경향까지 알게됐지만 찾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매력적인 설득을 당하지는 못했습니다.

하드 SF(자연과학 기반) : 휴머니스트 SF(심리학이나 인류학 등 인문과학)

󰀻

*1960년대 뉴웨이브 : 문학적, 인문학적으로 세련된 SF 지향

*1970년대 하드 SF : 다수의 고전 걸작 양산

*1980년대 사이버 펑크 : 스타일을 중시하면서도 정보과학과 생명과학을 위시한 첨단 과학의 내재화 강조

*1990년대 포스트 사이버 펑크 : 바이오테크놀로지BT, 인포메이션 테크놀로지IT, 나노 테크놀로지NT 등

신세대 하드 SF(테드 창, 그렉 이건 등)

󰀻

첨단기술에 대한 전문지식 : 실존하는 현실의 하부구조를 밝혀내는 성배 탐색에 준하는 행위

김상훈의 해설을 정리해봤습니다. 그렉 이건은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SF계의 뱅크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답니다. 텍스트는 미술, 음악 분야의 감각적 인상과 다릅니다. 읽고 쓰는 사람들의 공통된 관심사는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주에서 인간존재란 무엇인가’와 같은 주제로 모아지지 않을까요. SF 소설도 그렇다고 하는데 개인의 정체성, 자유의지가 정치와 경제, 즉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적 프로파간다를 견딜 수 있는 개인이 있을까 싶은 우려는 저만의 생각이 아닐 겁니다. 사색하고 공부하라는 루쉰의 호통이 죽비처럼 현대인의 어깨를 내리칩니다. 소설이 소설로 끝나지 않고 현실과 인간의 삶으로 연결된다면 SF가 아니라 휴머니즘이 되겠지요.

「내가 행복한 이유」(1997)와 「내가 되는 법 배우기」(1990)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오갔습니다. 결국 모든 독서는 ‘나’에게 닿는 머나먼 여행이기 때문입니다. 「블랙 미러」시리즈를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영상으로 보는 포스트 사이버 평크 SF에 해당하는 건가 싶습니다. 다가올 미래, 아니 이미 당도해 있는 미래인 오늘, 겨우 1.4킬로그램 밖에 안되는 뇌의 사용법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봅니다. 존 레이티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아니 나는 온전히 나로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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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세미나 - 체제 이행기의 사유와 성찰
김규항 지음 / 김영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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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지만 ‘정답’을 찾을 수는 없다. 사람 사는 일에 정해진 길이 있다면 누가 인생을 어렵다고 하겠는가. 통시적 관점에서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지금, 여기가 보인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절대왕정을 거쳐 신분제가 철폐되고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한 민주주의 세상을 만든 과정에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진한 피냄새가 배어 있다. 원시 공산제와 고대 노예제를 거쳐 중세 봉건제를 지나 자본주의에 이르는 길에도 숱한 이들의 땀과 한숨이 스며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사는 오늘의 ‘현실’은 어떤가.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개인의 작은 노력들이 모여 역사를 추동하는 힘이 된다. 함께 모여 이야기하고 어깨 겯고 걸어온 길들 위에 꽃이 피었다. 돌아보면 보이는 것들이 힘겨운 현실과 험난한 길을 걸을 때는 보이지 않는 법이다. 김규항이 걸어 온 길, 그가 힘주어 이야기하는 자리에도 꽃이 피었을까. 오랜만에 읽는 김규항의 문장마다 힘과 결기가 느껴진다. 여전히 흔들리며 걷는 사람들 발자국마다 자본주의라는 보이지 않는 괴물의 그림자가 스친다. 고정 불변하는 체제는 없다. 자본주의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디를 향해 어떻게 걸어야 하는 것일까. ‘체제 이행기’의 사유와 성찰이라는 부제가 이 책의 성격을 말해준다. 아나톨 칼레츠키가 자본주의 4.0 시대를 선언한지 10여년이 흘렀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지나간 자리에 서서 반성하는 수많은 경제학자들과 정치인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충돌하며 대한민국 사회에도 빛과 그림자를 만든다. 자유 시장경제 체제와 복지사회의 꿈이라는 상충하는 우리들의 꿈은 어떻게 화해할 수 있을까. 누구를 위한 자유이며 누구를 위한 복지일까.

마르크스의 『자본론Das Kapital』(1867)이 출간된지 150년이 훌쩍 지났다. 인류 역사에서 모든 체제, 즉 인간이 만든 사회 제도와 시스템은 시대정신을 반영하며 끊임없이 생성, 변형, 소멸의 과정을 거쳤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대로 만물이 유전하듯panta rhei,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사람도 세상도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생존과 적응에 매몰된 다수와 달리 조금 다른 시선으로 미래를 고민하거나 현실의 문제를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있다. 학문적 관점에서든, 사익 추구를 위해서든, 인류애와 호기심 차원이든 ‘현상’을 넘어 ‘본질’에 집중하고 거시적 관점에서 변화의 흐름를 읽어내려는 노력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아주 조끔씩 바꿔왔다. 반복적 일상에 균열을 발견하는 일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의무가 삶의 태도가 아닐까.

매일 숨쉬는 공기처럼 우리는 자본주의를 호흡한다. 욕망을 들이마시고 한숨을 내뱉는다. 주식, 코인, 부동산, 취업, 노후 준비에서 환율, 경상수지, GDP까지 실물경제에 대한 관심이 곧 현대인의 삶이다. 권력은 시장에 넘어간지 오래고 자본이 정치를 지배하는 걸 모르는 사람도 없다. 그러니 오늘의 일상과 내일의 행복을 좌우하는 자본주의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봐야 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18개의 주제로 펼쳐지는 세미나는 200쪽이 안 되는 이 책의 분량과 무관하게 깊고 넓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물론 케인스와 신자유주의의 명암을 찬찬히 살핀다. 우리가 간과한 것은 무엇일까. 1997년, 2008년은 모두 기억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생활의 변화를 넘어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충격을 줬기 때문이다. 그래도 자본주의는 여전히 안녕한가.

갈고 닦고 조이며 자본주의를 고쳐쓴지 오래다. 김규항의 세미나는 새로운 경제 체제를 도입하거나 혁명적 변화를 통해 자본주의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려는 의도가 없다. 문제의 본질을 살피지 못하고 현상에 급급하며 체제 자체의 모순을 간과하는 태도를 성찰한다. 신축아파트에 물이 새고 벽에 금이 가는 건 시공의 문제일 수도 있으나 설계 자체의 결함이 은폐됐을 수도 있다. 또한 건축 이론과 공법이 모든 지형과 기후에 적용될 수는 없다. 자본주의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각국의 역사와 문화에 따라, 시대정신을 좇으며 새로운 얼굴로 탈바꿈해온 자본주의는 우리의 미래를 든든하게 지켜줄 수 있을까. 구조적 모순과 근본적인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까. 대개 그러하듯 이 세미나에 참여한 독자들 개인의 생각과 행동의 변화,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각 장마다 권민호의 그림이 환기 장치로 활용된다. 마지막 장에 소개된 그림과 제목이 인상적이다.

Karl Marx+Quo Vadis, 29.7×42cm, 2013

새로운 사회는 현재의 사회 안에서 자라납니다. 우리가 노쇠한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바꿔 말하면 새로운 사회가 생겨나는 시기에 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행기’를 살고 있습니다. 이행기가 어떻게 전개되고 어떤 일정을 갖게 될지 말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 이행기의 성격을 고려할 때, 그 주역은 선구자나 지도자와 함께하는 군중이 아니라 스스로 사유하는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로서 노동을 사유하는 최초의 개인들 말입니다. 유토피아는 없지만, 최소한의 사회는 있습니다. - 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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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 -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불편한 공존
마이클 샌델 지음, 이경식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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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식의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 of citizenship’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지혜로운 결합에 대한 고민이다. 정치는 경제에 예속된지 오래다. 경제는 정치를 지배하지만 자유와 평등을 고민하지 않는다. 공정과 정의는 민주주적 가치로 자본주의 이념과 거리가 멀다. 어떤 가치가 우선이냐에 따라 정책 방향이 달라지고 시민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2010년 국내 출간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정의란 무엇인가』(2009)는 시대정신을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치, 윤리적 의미의 정의와 경제적 정의는 결이 다르다. 마이클 샌델은 근대현대 윤리학과 정치철학에 해당하는 공리지주의, 자유주의, 공동체주의를 둘러싼 쟁점을 짚는다. 경제민주화의 열망, 사회 윤리적 갈등이 첨예하던 시기에 저자는 숱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15년쯤 흐른 우리의 현실, 대한민국의 ‘정의’는 안녕한가.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1996)의 원제는 ‘민주주의의 불만’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보다 먼저 마이클 샌델은 미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톺아본다. 겨우 200여년 남짓한 미국의 짧은 역사는 그 나름의 명암이 교차한다. 맨땅에 세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국가답게 고민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있다. 철학자의 눈에 비친 미국 민주주의의 현실은 출발점과 너무 달라졌다. 능력주의의 환상이 심어지고 기회의 땅이라는 수식어가 오늘의 미국을 오해하게 만든 건 아닐까.

북부의 임금 노예와 남부의 흑인 노예 비교가 인상적이다. 끊임없는 가난과 불안 속에서 살았던 북부의 임금노동자는 남부의 노예보다 실제로 자유롭지 않았다. “남부의 노예는 적어도 나중에 늙고 병들 때 노예주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자본은 인간 노예주가 노예를 대하는 것보다 한층 더 강력하고 완벽하게 강제력을 행사한다. 자유노동자는 일하지 않으면 굶어야 하는 일상을 살아가지만, 노예는 일을 하든 하지 않든 간에 노예주가 먹여살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유를 누리는 댓가로 얻은 현대인의 불안은 임금노예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피할 수 없는 운명일까. 인간답게 살기 필요한 기본적인 권리, 즉 인권의 출발은 경제적 자유다. 마이클 샌델은 공화국 초기의 경제와 시민적 덕목을 살피고 자유노동과 임금노동의 차이를 설명한다. 자유주의로 일컬어지는 케인스의 이론은 절차적 공화주의 승리와 고난을 함께 선물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했던 국가의 역할, 즉 정부의 시장 개입에 필요성과 적절성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가장 첨예한 쟁점이다. 한쪽에서는 자유 시장경제를 목놓아 외치면서 입맛에 따라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고, 한쪽에서는 경제민주화를 부르짖으면서도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는 푸념을 하기 일쑤다.

더욱 놀라운 건 이를 지켜보는 시민들의 태도다. 사회주의를 적극 반영한 유럽선진국의 수정자본주의 국가를 부러워하면서 재벌과 기득권을 소수를 위한 정책에 박수를 보내거나 노동자, 농민들이 자기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과 정책을 반대한다. 루쉰의 말대로 “언제나 사색하고 공부하라. 그리고 열린 눈으로 시대의 현실을 직시하라.” 그렇지 않으면 눈뜨고 코 베인(커트 코베인 아니다)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며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라고 절규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루스벨트는 ‘진정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 경제적 권리에는 ‘만족스럽고 보수가 좋은 일자리를 가질 권리, 적절한 음식과 옷과 여가를 누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돈을 벌 권리, 모든 가족이 함께 괜찮은 주택에 살 권리, 적절한 의료 서비스를 받을 권리, 노령, 질병, 사고, 실업 등에 따른 경제적 두려움으로부터 적절한 보호를 받을 권리 등이 포함된다고 선언했다. 즉 개개인이 자기 삶의 목적을 스스로 선택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으려면 반드시 물질적 전제조건이 필요하다는 인식이었다.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이런 생각은 루스벨트의 1944년 마지막 국정연설 내용이다.

80년이 지난 미국은, 아니 우리는 루스벨트의 복지국가 의제를 현실로 만들었을까. 현실은커녕 의제 자체에 대한 사회적 합의조차 이루지 못한 상태다. 홉스의 만인의 투쟁 상태가 지속되는 것같은 느낌적인 느낌은 단순한 착시 현상이 아니다. 민주적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미래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또 현실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점검과 성찰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경쟁에서 이긴 자들의 승자독식체제가 용인되는 건 우리 사회의 작동방식에 대한 문제를 인식하기보다 발빠른 적응과 순응적 태도 때문이다. 다수 시민들의 이기적 욕망이 충돌하고 타인과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은 좀체 바뀌지 않는다. 능력주의에 대한 오해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차별적 시선은 결국 공동체 전체를 불행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걸 자각하지 못하는 걸까.


이 책의 초판이 나온지 27년이 지났으나 마이클 샌델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미국의 정치, 경제의 역사를 통해 현실의 문제를 살펴보는 데 집중하고 있으나 대한민국의 현실적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아 우리가 함께 고민해 볼 만한 쟁점들이기 도하다.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이듯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불협화음은 끊이지 않는다.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다. 다수 국민들을 위해서 혹은 소수 기득권을 위해서 정치인과 시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이기적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 전 국민이 화합하여 한 목소리를 내는 국론 통일은 생각만해도 끔찍한 전체주의다. 민주주의는 다양성에 기초한다. 여러 가지 목소리와 의견이 부분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 목소리들이 누구를 위하여, 어디를 향해 뱉어지는지 살필만한 안목과 통찰력은 길러워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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