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러운 세상 인연의 배를 띄워 - 최척전 국어시간에 고전읽기 (나라말) 7
황혜진 지음, 박명숙 그림 / 나라말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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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바다를 헤매는 일은 인류의 축적된 삶의 양식에 대한 최고의 인식 방법이다. 특히 우리 고전 문학은 선조들의 삶의 모습에 대한 적나라한 표현이며 삶의 재현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우리가 살아온 과정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에 낄낄거리며 때로는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조선 후기에 급속히 발달하는 소설 문학의 양상은 한국 문학의 전통을 풍요롭고 다채롭게 해 주었다. 자생적인 문학의 전통이 일천했던 것이 아니라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 통지로 근대 문학으로 개화하기 전에 많은 풍랑을 겪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눈에 띄는 성과는 오롯이 한국 소설 문학의 전통이 된다.

그 대표적인 작품 중에 하나가 바로 조위한의 <최척전>이다. 이 소설은 조선후기의 전쟁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임진왜란(1592년) 이후 정묘재란(1597년)이 일어날 무렵부터 시작해서 난이 평정된 1600년경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500여년에 이르는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혹독했고 참혹한 시련을 겪었던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최척전>은 민중들의 삶이 모습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주인공 최척과 옥영을 내세워 두 사람의 사랑과 기구한 운명을 사건의 중심축으로 삼고 있지만 두 남녀간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로만 볼 수 있는 소설이 아니다. 전쟁 중에 헤어져 안남(베트남)에서 해후하는 장면이나 이역만리 중국땅에서 살다가 고향인 남원에서 재차 상봉하는 장면은 질긴 운명과 인연을 내세운 한 편의 휴먼 드라마로 읽힌다. 그러나 이런 기막힌 우연과 운명 뒤에 배경처럼 깔린 어두운 전쟁의 그림자와 민중들의 애끊는 사연들은 한숨을 자아내게 한다.

역사 속에서 전쟁은 언제나 승리자의 입장에서 지배자의 입장에서만 서술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객관적 사실조차 왜곡되는 역사에서 평범한 백성들의 눈물과 한숨을 전달하는 것은 문학의 몫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참혹하게 왜적에게 도륙당하고 불태워지는 장면은 그 어떤 역사보다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 후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우리 민족의 정서를 부정적인 한의 역사라고 일컫는 이유를 이 소설을 통해서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나라말 출판사의 ‘국어시간에 고전읽기’ 시리즈 중 하나로 출판된 이 책은 ‘지러운 세상 인연의 배를 띄워’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다른 어떤 판보다 내용이 충실하고 문장이 바르다. 황혜진의 글은 현대적인 감각을 살려 고전문학의 분위기를 전하면서도 현대소설같은 긴장감이 느껴진다. 박명숙의 그림 또한 적절하게 삽입되어 다소 지루하고 딱딱하게 전개될 수 있는 부분의 분위기를 살려준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정보 쌈지 부분이다. 책 중간에 ‘정유재란과 남원함락, 전쟁 포로 이야기, 강홍립은 역적이다와 충신이다. 최척전의 우연성, 지로로 보는 최척전, 작가 인터뷰’ 등 여섯 개의 도움글이 들어 있다. 각각 두 페이지를 넘지 않는 분량이지만 고전을 읽는 재미를 배가시키며 소설의 이해를 돕는 충실한 도우미 역할을 한다. 고전은 어렵고 딱딱하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 학생들이나 일반들이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특별한 장치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나라말의 ‘고전읽기’ 시리즈는 가장 뛰어난 고전소설 시리즈라고 평가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추천한다면 자신있게 추천해도 될 만하다.

책의 말미에 ‘최척전 깊이 읽기’는 감동적인 인간 드라마를 현대적 의미에서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차분한 설명이 더해진다. 읽지 않아도 그만이지만 우리가 고전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쯤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우리 땅 남원에서 시작해서 일본과 중국, 베트남 등 동아시아 전반을 무대로 한 최척과 옥영의 고된 여정은 우리 민족의 신산스런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이 소설이 다른 소설과 구별되는 가장 뚜렷한 특징은 방대한 스케일과 기막힌 우연성에 있지 않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믿음과 신뢰로부터 출발한다. 최척이 만났던 명나라 장수 여유문과 주우, 옥영을 도왔던 일본사람 돈우 등 국적과 인종을 불문하고 관계를 맺어간다. 일본과의 전쟁 문학이라면 민족적 자존심을 세우거나 비현실적 요소가 강하게 드러나는 한풀이 소설이 될법하지만 <최척전>은 그렇지 않다. 인간적 연대감이 형성되고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관계망이 이렇게 기막힌 감동 드라마를 만들어 낸 것이다. 소설보다 기막힌 작가 조위한의 기막힌 삶과 주인공 최척의 유사한 상황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덤으로 얻게 된다.

시대가 달라지고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가치는 무엇일까? 21세기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유랑민과 평등, 인권 측면에서 살펴봐야하는 전쟁의 의미는 이 책을 통해 비추어 보아야 할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침략적 제국주의와 폭력을 앞세운 헤게모니 전쟁은 끊이질 않는다. 인간의 역사는 오늘도 되풀이 되지만 영원한 평화와 공존의 시대는 요원하기만 한 슬픈 시대를 살고 있다.


061025-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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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6-10-25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도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많은 생각할 점을 남겨주죠. 리뷰 잘 읽었습니다. 오늘 하루도 좋은 일만생기시기를........

sceptic 2006-10-29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도 즐겁고 행복한 책읽기 계속 되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 우리시대의 논리 2
하종강 지음 / 후마니타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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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붉은 혁명이 성공하면서 사회주의는 현실이 되었다. 1991년 구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74년간 지속된 인류의 또 하나의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충격은 한 국가의 패망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문제였다.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국가 건설이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은 실망을 넘어 사회주의 진영을 공황에 빠뜨렸다. 60년대는 물론 70년대와 80년대라는 질곡의 시대를 지나왔지만 90년대의 전망은 불투명하기만 했고 21세기에 들어서도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은 요원하기만 하다.

특히, 노동 운동에 관한 한 대한민국의 특수성을 전제로 하더라도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노동자나 노동조합 같은 말은 곧바로 빨갱이를 연상시켰던 야만의 시대를 지나왔다고 생각하지만 뿌리깊은 부정적 뉘앙스와 잘못된 인식의 틀은 쉽게 사라지거나 바뀌지 않고 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낳은 또 하나의 비극이 비정규직의 확대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확대해석일까. 여전히 우리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과 살아가고 있다. 아니 서로 다른 상식을 소유한 채 살아가고 있다.

이런 시대를 걸어가면서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하종강은 행복한 사람이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몇 안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개인의 가족주의적 행복과 경제적 이기주의에 바탕을 두지 않은 채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노력이라는 데 하종강이 지니는 의미의 본질이 있다. 한 개인이 시대를 대표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실 자살한 전태일 열사는 노동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고 단병호로 대표되는 민주노총은 이제 당당히 국회에 진출했다. 현실적 한계와 역량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을 수 있으나 역사는 늘 현재 진행형으로 발전한다고 믿어야 한다. 그것이 희망의 다른 모습들이므로.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하종강은 1년에 300회가 넘는 강연을 하며 항상 현장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만나는 일을 한다. 그러니 그의 강연과 글은 이론적 틀이 아니라 살아있는 현장감이 무기가 된다. 그래서 어렵지 않은 말로 한 줄 한 줄 써내려간 그의 글들은 읽는 사람의 손을 잡아 버린다. 이성적 판단과 이념의 진정성을 넘어 날것 그대로 따뜻한 피부처럼 온몸으로 안겨온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설득의 글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감성에 기대는 그의 글쓰기는 그래서 더 무섭다. 이 감성이 유치한 감상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노동조합 투쟁의 현장과 비정규직 문제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노종조합이 왜 우리의 삶과 직접 연관되어 있는지 확인시켜 주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아직도 억압과 고통속에 살아가는 수많은 노동현장의 울부짖음과 차라리 경건하기까지 한 노동자들의 삶의 모습들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하종강의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노동자들의 필독서다. 자신이 노동자인 줄도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 권해주고 싶은 책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하종강의 토막글들을 커다란 주제로 묶어 일관된 흐름을 가지고 읽을 수 있도록 거칠게 편집된 책이지만 글의 길이와 주제와 상관없이 전달되는 감동은 단순히 내가 노동문제에 대해 관심이 있고 없고를 떠나 노동운동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전해 줄 것이다. 오랫동안 현장에 서 활동하지 못하고 야만의 시절에 겪었던 개인적인 경험들을 하종강은 ‘부채감’이라고 표현한다. 이 부채감이 20년이 넘도록 그를 지탱하게 해 주 힘이라고 스스로 말한다. 우리 모두는 이 부채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자유로워도 안 된다고 외치는 그의 목소리는 날선 칼날이 아니라 촉촉한 부드러움이라서 더 큰 울림을 준다.

책을 읽는 동안 몇 번이나 목울대가 울컥거리고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난감했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한참동안 허공을 올려다보며 긴 한숨을 내뱉는다고 당장 세상이 뒤바뀌지는 않는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가장 큰 위험이 이러한 문제들과의 거리감이다.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노동운동을 해야 읽은 것을 실천한다고 착각하는 것은 더 위험하다. 지하철노조의 파업으로 내가 당장 불편하더라도, 1억이 넘는 연봉을 받는 조종사들이 파업을 해서 내가 당장 비행기를 못 타더라도 문제의 본질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출발점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다 같이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하종강은 이 책에서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다름 아닌 ‘노동운동’이라고, 그것이 희망이라고.


060706-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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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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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없는 소설은 거의 불가능하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랑이 배제된 소설은 향기 없는 꽃과 같다. 그 향기가 목적인가 아닌가가 문제일 뿐. 그래서 소설을 읽지 않거나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도대체 이 시대에 사랑이라니? 아직도 영원한 사랑을 믿는다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사랑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출발해서 사랑까지도 필요한 사랑을 하는 현실과 만나게 되는 일을 비참하기까지 하다. 21세기의 사랑법은 어떤 것일까?

백년 쯤 전에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으며 그 사람들에게 사랑은 어떤 것일까를 궁금해 하는 일은 당연하지만, 굳이 찾아 읽을 필요는 없다. 오다가다 우연한 만남처럼 선별과정을 넘어선 우연을 만나면 그때 읽으면 된다. 책을 선별하고 읽고 되새기는 과정이 기계처럼 정밀하게 이루어질 수는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우연에 기댈 때도 있는 법이다. 일본의 근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는 그렇게 만났다.

1909년에 신문 연재 소설로 쓰여진 이 소설은 20세기 초 일본의 부유층 자제인 다이스케는 안개처럼 몽롱한 인생을 살아간다. 친구 히라오카와 그의 부인이자 대학시절 친구의 누이였던 미치요와의 사랑이 이 소설의 골격이다. 식모와 서생을 데리고 서른이 넘도록 직업도 없이 아버지에게 생활비를 얻어쓰는 주인공은 형과 형수, 조카들과 아버지가 살고 있는 집에 가끔 들러 결혼 재촉을 받기도 한다. 결혼 후 먼 지방에 살던 절친한 친구 히라오카가 다시 그를 찾아오면서 미치요와 재회한다. 이 소설의 등장 인물의 사건은 이것이 거의 전부다.

장편이 가질만한 복잡한 갈등도 사건의 번잡함도 없다. 구성이 탄탄하지도 않고 물 흐르듯 주인공의 의식과 갈등을 지루할 만큼 길게 서술하고 있다. 한국문학사에서 보면 신소설이 등장했던 개화기에 해당된다. 사건의 우연성과 감정의 과잉토로 등 유치할 정도의 사건전개를 보여주던 것에 비교하면 일본 문학의 예민한 감수성과 집중력있는 문체가 돋보인다. 질풍노도와 같았던 한국 근대사를 떠올릴 필요는 없지만 참으로 한가해 보일만큼 정적이고 차분한 소설이다.

<산시로>와 <그 후> 그리고 <문>을 묶어 나쓰메 문학의 삼부작이라고 한다.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동경제대 영문학 교수라는 탄탄한 사회 경제적 지위를 지닌 그가 발표한 소설은 일본 근대문학의 출발로 평가 받고 있다. 한국문학사의 <무정>과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근대적 지성의 소설이라는 점에서 눈여겨 볼 만하다. 여러 가지 평가와 논의는 비평가들과 학자들의 몫이고 독자의 입장에서는 일본 근대 문학의 풍경을 살펴 볼 수 있는 작품 정도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다이스케와 미치요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대화와 짙은 백합 향기는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다. 추억을 기억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며 감각적 이미지이다. 몸이 기억하는 과거는 잊을 수가 없는 법이다. 그 향기를 잊지 못하는 다이스케와 미치요의 사랑과 그것을 확인하는 방식들이 너무 더디다. 치밀하고 탄탄하지 못한 구성의 한계 때문이지만 그것이 1909년에 발표된 소설에 대한 평가의 잣대로는 적절치 않다. 후반부에, 급격하게 그리고 열정에 가까울 정도로 두 사람이 사랑만을 확인하고 제각각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들은 공감하기 어렵다. 두 사람의 사랑을 미치요의 남편과 다이스케의 가족들이 모두 알아 버린 후 형이 찾아와 경제적 지원은 물론 가족간의 절연을 선언한다. 아버지의 분노와 부모간의 의절을 전한 것은 물론이다. 직업을 구하기 위해 거리로 뛰쳐나온 다이스케의 눈에 비친 온통 붉은색의 세상이 두 사람에게 어떤 의미로 인식될 것인지 ‘그 후’는 독자의 상상에 맡겨진다. 긴 여운과 다양한 결말을 의도한 제목이라기보다는 나쓰메 특유의 ‘대충’ 혹은 ‘무의미’한 제목 붙이기로 볼 수 있다.

고전으로 분류된 문학의 현재적 의미는 개개인에게 강요할 수 없다. 문학의 본령은 여전히 내 삶에 미치는 영향과 반성적 인식의 틀이다. 감동과 교훈이라고 하는 지극히 교과서적인 소설의 의미를 떠나 진부한 ‘사랑’과 ‘인생’에 대한 쉼표와 같은 것이 소설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그 후>는 교양으로서가 아니라 일본 근대 문학에 대한 호기심과 당대 한량의 사랑과 인생에 대한 관심으로 읽으면 된다. 그 밖의 것들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방식으로 전달될 것이다.


060709-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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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연습
조정래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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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붉은 혁명이 성공하면서 사회주의는 현실이 되었다. 1991년 구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74년간 지속된 인류의 또 하나의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충격은 한 국가의 패망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문제였다.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국가 건설이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은 실망을 넘어 사회주의 진영을 공황에 빠뜨렸다. 60년대는 물론 70년대와 80년대라는 질곡의 시대를 지나왔지만 90년대의 전망은 불투명하기만 했고 21세기에 들어서도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은 요원하기만 하다.

얼마 전에 읽었던 하종강의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의 서평 시작부분이다. 우연하게도 조정래의 <인간연습>은 이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남북 분단 문제의 완결판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인류에게 풀리지 않는 숙제인 ‘이념’의 문제가 그 중심에 놓여 있다. <태백산맥>과 <아리랑> 그리고 <한강>으로 이어지는 현대사를 대하소설로 일단락 지은 조정래의 <인간 연습>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의미를 지닌다. 첫 번째는 외적 지향의 거대담론에서 내적 지향의 미시담론으로의 변화이다. 한국인에게 현대사의 질곡은 견뎌내기 힘든 집단적 트라우마였다. 그러나 개별적 인간에게 부여된 의미와 상처가 어떤 식으로 드러나는지 세부적인 부분을 확인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래서 <인간 연습>은 작가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이 조정래 분단문학의 마침표로 읽어도 좋겠다. 두 번째는 사회적 관점의 이념과 역사가 아니라 개인적 관점으로의 이행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 연습>은 한 인간이 사회적 신념 속에서 겪어야했던 내면의 본질적 갈등이다. 본능과 이기적 욕망을 이겨낼 수 있었던 이념과 신념에 대한 질문들로 가득하다. 길이가 중요한건 아니지만, 이 소설을 장편으로 보기엔 길이도 내용도 부족하다. 단편과 장편 중간쯤 된다.

장기수 문제를 다루었던 영화 <송환>에 출현했던 노인 한 분을 떠올리며 읽었다. 현실과 소설을 중첩시키는 바보같은 방법이 통할만큼 사실적인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전향 장기수 윤혁 노인의 내면적 갈등과 방황이다. ‘사상의 조국’이었던 소련의 붕괴는 물리적 폭력에 의해, 정신이상 상태에서 전향해버린 윤혁, 박동건 두 노인에게 정신적 공황상태를 일으킨다. 더구나 북한의 굶주림에 대한 사실 확인 취재 기자에게 전해들은 후 박동건 노인은 숨을 거두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김형사의 보호감찰과 같은 방에 살았던 운동권 강민규의 도움으로 번역을 하며 살아가는 윤혁 노인은 수기를 쓰게 되고 부모없는 두 아이의 후견인 노릇을 하며 살아간다.

당과 조국을 위해 남파하던 순간의 아내의 얼굴. 그 얼굴은 윤혁 노인을 평생 따라 다닌다. 결정적인 순간에 당과 인민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얼굴이 떠오르는 인간적 고백이 더 아프다. 그렇다고 해서 이념과 사상에 의해 희생당한 한 인간의 고단한 삶을 보여주는 소설은 결코 아니다. 자신의 신념이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된 것 같은 시대적 변화에 충격을 받는 두 노인의 모습이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아픔으로 보일 뿐이다. 30년이라는 시간의 공백은 사회와 인간에 대한 판단을 흐리게 한다. 어쩔 수 없이 이 사회에 적응해가야 하는 전향 장기수의 삶은 비전향 장기수의 삶보다 오히려 더 비참하다.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과 편견에 가득찬 시선들, 사회적 냉대가 어우러져 견디기 힘든 세월이 된다. 민주주의를 국가의 정체로 내세우고 있지만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 않은 현실과의 부조화가 아이러니하다.

조정래라는 이름만으로 의심없이 읽게 된 소설이다. 소설 자체에 대한 평가를 넘어서 주제가 주는 무게와 깊이가 만만치 않다. 쉽게 답을 얻거나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되기 위해 연습이 필요할까? 이 땅에서 ‘인간’으로 대접받고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과연 윤혁에게는 없는 것일까? 끊임없는 회의와 질문들이 쏟아지게 하는 소설이지만 이 소설은 우리의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고민과 합의를 묻고 있다. 통일을 위한 우리의 마음가짐과 이념적 갈등에 대한 논의는 계속 되어야 한다. <태백산맥>과 <아리랑>을 밤새워 읽으며 작가 조정래 선생님께 느꼈던 마음이 이 책에서도 여전히 식지 않고 있음을 확인했다.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는 인간의 삶,
그것은 결국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연습’이다.


060710-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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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바이어던 - 국가라는 이름의 괴물 e시대의 절대사상 2
김용환 지음 / 살림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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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 더 힘센 자가 없으니 누가 그와 겨루랴!(욥기 41장 24절)”는 말처럼 국가와 교회를 통합하는 강력한 통치자의 출현을 홉스는 <리바이어던> 속에 담아내고 있다. 출판 당시의 표지 그림으로 나타난 리바이어던의 모습은 한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교구장을 들고 있다. 국가의 권력과 교회의 권위를 모두 담아낼 수 있는 그의 권능을 이보다 잘 묘사한 그림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현재의 국가는 그처럼 ‘괴물’의 모습으로 비쳐진다. 과연 국가는 괴물인가?

17세기 초반 유럽의 지성사를 뒤흔들었던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대한 평가와 견해는 다양하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인 것처럼 재해석되기 마련이다. 홉스 전문가 김용환의 견해는 당연히 <리바이어던>에 대한 애정과 긍정적 평가로 넘친다. 대부분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인 내용이지만 홉스가 과연 국가 권력에 대한 믿음과 종교적 권위에 대한 두려움을 이 책에서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국내에 <리바이어던> 완역본이 없다는 아이러니는 일반 독자들에게 논의 자체를 차단시킨다. 박영사에서 나온 유일한 완역본이 절판되었고, 이 책을 다 읽은 후에 검색해보니 3월에 나온 책이 있는데 완역본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저자의 말대로 홉스의 사상과 철학적 견해를 전부 이해하는 데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당시의 종교와 철학의 흐름이 홉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또 홉스는 로크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쉽게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홉스의 견해가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과 영향을 주는 까닭은 인간과 국가 그리고 종교에 대한 그의 깊은 사유 방식 때문이다.

김용환은 홉스가 잘못 이해되고 있는 부분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절대군주론자에 대한 그의 견해는 일견 타당해 보인다. 종래의 왕권신수설에 의한 무소불위의 절대 군주가 아니라 백성과의 계약 관계로 성립되었으며 절대권력을 휘두를 수 없는 부분이 있고 통치자가 계약 당사자라는 점을 들어 절대군주론에서 ‘유사 민주주의자’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는데 리바이어던 발췌 부분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밖에 유명론, 유물론자라는 사실과 로크와 더불어 자유주의자로서 그의 사상이 시대의 이단아처럼 보였던 것은 과학적 합리주의가 싹트기 이전 시대라는 상황을 감안한다면 <리바이어던>이 왜 고전의 반열에 올라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신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현재의 관점으로 상식이 통할 수 있는 합리적 사고와 인식의 틀을 제공하는 면면이 그의 생각들에 동의하게 하는 부분들이다.

그러나 “무한한 권력으로부터 많은 나쁜 결과가 생길 수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할지 모르나, 통치권이 없기 때문에 오는 결과, 즉 만인에 대한 만인의 끊임없는 투쟁이 훨씬 더 나쁘다.(P. 231)”는 말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끊임없는 투쟁’보다 ‘무한한 권력’이 훨씬 더 나쁜 결과를 보여준 사례를 우리는 수많은 역사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부분적인 인용과 반박이 무슨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현재의 관점에서 바라본 홉스의 견해가 모두 수용될 수는 없다. 당연한가? 어떤 사상과 철학이든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바뀌면서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재평가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홉스가 꿈꾸었던 세상은 “현실적인 힘을 소유한 사실적 통치자(de facto ruler)이자 사회계약을 통해 정통성을 획득한 합법적 지배자(de jure ruler)가 헌정 중단 시기의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이가 바로 진정한 리바이어던이다.(P. 154)”는 말처럼 ‘진정한 리바이어던’이 지배하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에서 항상 괴물의 모습을 드러냈다. 홉스 이전과 이후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이상적 정치와 국가를 꿈꾸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저 상상속에서만 존재한다. 이것은 비극적 현실 인식이 아니라 인간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욕망과 이기심에 대한 인정일 뿐이다.

자유는 외적인 방해(external impediment)가 없음을 의미하며, 방해는 사람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힘의 일부를 종종 앗아가지만 판단과 이성의 지시에 따라 남겨진 힘의 사용을 가로막을 수는 없다. - P. 112

홉스는 다양한 측면에서 논의될 수 있겠지만, 인간과 국가에 대한 그의 견해의 핵심과 가치는 ‘자유’에 있다고 믿고 싶다. 종교와 국가를 아우를 수 있는 절대 권능의 ‘리바이어던’이 ‘자유’와 상치될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 모두의 꿈일 것이다. 우리 모두가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는 말을 여전히 믿고 싶다. <리바이어던> 완역본을 읽어봐야겠다.


060712-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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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리바이어던 - 국가라는 이름의 괴물
    from 다르게 그리고 옳게 2008-01-07 22:55 
    리바이어던 - 김용환 지음/살림 홉스하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생각난다...면 ^^ 제대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게된 이유는 엉뚱한데...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서 무한의 리바이어스라는 것이 있다. 거기서 리바이어스가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 따왔다고 생각하고 보기 시작했다. 다 보고 나서 느낀 생각은 크게 틀리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성서에서는 괴물로 나오지만, 홉스는 그것을 국가권력을 묘사하는데 사용하였다. 조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