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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에 반대한다 ㅣ 이후 오퍼스 7
수잔 손택 지음, 이민아 옮김 / 이후 / 2002년 9월
평점 :
품절
내용이란 어떤 것의 일별, 스쳐 지나가는 섬광입니다. 아주 작은 것이지요. 아주 작은, 내용 말입니다.(월램 드 쿠닝, 어떤 인터뷰에서)
외양으로 판단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얄팍한 사람들 뿐이오. 세계가 간직한 수수께끼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란 말이오.(오스카 와일드, 한 편지에서)
위와 같은 인용문으로 <해석에 반대한다>는 시작된다. 이분법적 흑백논리가 가지는 위험성에 대한 경고가 수잔 손택의 첫 번째 경고로 들리는 것은 극단적이 이 두개의 인용문 때문이다. 예술에서, 엄밀하게 문학에서 ‘내용’과 ‘형식’ 논쟁의 전제에는 그것을 분리 가능한 것으로 인식하는데서 출발한다. 하지만 수잔은 그것을 부정한다. 예술에서, 특히 문학에서 내용과 형식을 구분하고 그 특성을 ‘해석’하는 것이 지금까지(책이 출판된 1960년대)의 관행이었다. 문학 비평은 30년대 신비평주의자들에 의한 형식비평을 필두로 급격한 변화와 도전을 받게 되어 지금까지 숱한 변화와 주장들을 겪어 왔지만 여전히 ‘비평’의 존재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첨예한 시대에 수잔의 이 책은 그녀를 폭풍의 핵으로 만들었고 지속적인 논쟁을 불러 왔다. 또한 문학 비평에 대한 재인식의 기폭제가 된 것이 사실이다. 문제작이란 이런 책을 두고 일컫는 말이다. 이후 수잔은 사회적 목소리를 높혔으며 문학안에 머물지 않고 예술 전반과 그것의 모방 대상인 실제 현실에 직접 개입하게 된다.
60년대까지 이분법적으로 분리된 내용과 형식은 우선순위와 상호 배타적 우월성을 표방하는 논쟁들과 소모적인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석 자체를 반대한다는 도발적인 선언과 그 대안은 여류 비평가를 주목하게 하는 데 충분했다. 수잔은 이 책에서 단순히 문학과 예술에 대한 해석과 이해가 주는 무의미한 논쟁에 대한 종식을 선언함은 물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스타일’이다. 형식과 다른 개념과 용어로 설명하기 위해 번역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스타일’과 ‘스타일화’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적용이 제시된다. 스타일은 ‘투명성’으로 설명될 수 있는 개념이다.
투명성은 오늘날의 예술 - 그리고 비평 - 에서 가장 고상하고 가장 의미심장한 가치다. 투명성이란 사물의 반짝임을 그 자체 안에서 경험하는 것,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 P. 33
지금 중요한 것은 감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듣고, 더 잘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임무는 예술작품에서 내용을 최대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에서 있는 것 이상의 내용을 더 이상 짜내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예술에 대해 뭔가를 말하여 한다면 우리는 예술작품(그리고 거기에서 유추한 우리의 경험)이 우리에게 훨씬 더 실감나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비평의 기능은 예술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이 어떻게 예술작품이 됐는지, 더 나아가서는 예술작품은 예술작품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 P. 35
스타일을 논하는 것은 어떤 예술작품의 총체성을 논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총체성에 관한 담론이 으레 그렇듯이, 스타일에 관해 이야기를 할 때에도 은유에 기대야 한다. 그리고, 은유는 얘기를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 간다. - P. 39
위에 인용한 부분은 수잔이 ‘투명성’과 ‘스타일’에 대한 논의의 핵심을 말한 부분이다. 문학을 감상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전공자나 비평가의 몫일 뿐 실제 문학의 소비자인 독자들과 거리가 멀거나 아카데미즘의 고유 영역일 수 있다. 독자반응비평같은 주장이 제기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작가와 작품, 현실과 작품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하나의 축이었다면 작품의 내재적 의미만을 철저하게 분석하는 것이 또 하나의 작품 해석의 축이었다. 거기에 독자와 작품과의 관계를 점검하는 것을 중요한 요소로 삼았다. 그리고 이 책에서 수잔은 그 모든 형식과 내용에 관한 기본 틀을 제거할 것을 주장한다. 말하자면 문학 비평에서 패러다임 자체를 전환하자는 이야기다. 투명성과 스타일은 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다. 작품 스스로 빛을 내는 반짝임 자체를 이해하는 일, 그것이 작품을 경험하는 일이다. 그것은 엘리어트가 말한 “시는 이해되기 전에 전달된다”는 해석 이전의 문제로의 회귀를 뜻한다. 투명성을 경험한 독자는 작품을 보다 잘 느끼는 법을 알게 된 것이다. 해석을 전제로 한 이해가 아니라 총체적인 스타일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글인 ‘해석에 반대한다’와 ‘스타일에 대해’가 수잔 손택의 문학비평에 관한 핵심 주장이다. 나머지는 실제 작품에 적용을 여준다. 특히 기존의 해석과 방법과 다른, 혹은 영화에도 적용되는 다양한 방식을 통해 예술은 투명성을 확보하고 나름의 고유한 스타일을 찾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술을 보다 더 잘 보고, 듣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그녀가 요구한 예술에 대한 기본 자세이다.
하나의 예술 작품에서 받아 들일 수 있는 아우라를 총체성으로 이해하는 것은 지나치게 거친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요구한 예술의 투명성은 결국 독자들의 생생한 경험이어야 한다는 지극히 단순한 논리를 주장한 것이다. 지금은 당연해진 받아들일 수 있는 논리가 그녀의 주장 이전까지는 통용되지 않았다는 것일까? 문학과 예술에 대한 접근 방식과 이해의 폭은 중간에 끼여든 평론가를 통해 왜곡되고 변형될 수 있다. 비평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부터 다양한 문제점과 해법들이 제시되고 있다. 문학을 포함한 예술 전반에 걸친 맹목적인 주례비평에서 헤게모니를 둘러싼 권력 다툼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 비평이다. 결국, 문학에서 감상과 수용의 최종 단계라고 할 수 있는 독자들과의 만남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하는 문제는 해석과 비평에 대한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로 남는다. 수잔 손택의 <해석에 반대한다>는 주는 의미는 바로 이 지점에 대한 논의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는 책이다.
060625-0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