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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로서의 질병 ㅣ 이후 오퍼스 9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2년 12월
평점 :
품절
질병과 고통은 생물학적 속성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자연의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는 당연하고도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죽음이다. 단 한 번의 생이기 때문에 소중하면서도 극적이다. 특히 질병과 그로 인한 고통은 물질적 존재로서 인간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 누구나 한 번은 병들고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는 이 절대 공평의 원리는 삶에 대한 비극성을 인식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원칙에 대한 확인이다. 죽음이라는 결론에 이르는 과정은 실로 다양하다. 어떤 병에 걸려 어떻게 죽느냐, 하니면 불의의 사고로 죽느냐에 따라 그 삶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까지 한다. 축복받는 죽음이 있는가 하면 모든 사람의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죽음도 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수잔 손택이 ‘은유metaphor’로서 ‘질병illness’을 분석한 책이 <은유로서의 질병>이다. 이 책은 ‘에이즈와 그 은유’라는 글과 묶여 합본으로 출판됐다. 10년의 간격을 두고 쓰여진 글 두 편이 연속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후 <타인의 고통>을 펴낸 손택은 사람들의 인생에서 질병과 고통 그리고 그것이 주는 이미지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확인하는 일관된 작업을 벌이고 있다. 그것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고 사회 속에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짚어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인간으로 태어나 질병으로 고통을 얻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는 실로 다양한 의미와 은유가 내포되어 있다. 의학의 발달과 더불어 점차 질병의 실체가 밝혀지는 과정에서 그 은유들은 점차 사라지는 듯 보이지만 ‘에이즈’라는 질병으로 과거로 회귀하는 듯하다.
이 책에서 특히 관심을 갖는 질병은 결핵과 암이다. 저자가 두 번이나 암에 걸려 극복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 책은 관찰과 사유로 이루어진 책이 아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결핵으로 사망했다. 아버지의 죽은 이유조차 감추었던 어머니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녀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당시 ‘결핵’이라는 질병이 지닌 은유에 대해, 이후 그녀가 걸렸던 ‘암’이라는 질병이 지닌 은유에 대해 이 책은 다양한 시각과 방법을 보여주는 문학적 에세이로 판단해야 한다. ‘은유’라는 말은 문학적 용어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일상에서 부딪히는 은유는 유사성에 바탕을 둔 비유법이다. 손택은 은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은유라는 표현을 쓸 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간결한 정의,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내린 정의를 따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은유란 어떤 사물에다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용轉用하는 것이다.” 그것이-아닌-다른 것으로, 또는 그것이-아닌-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어떤 사물을 부르는 것은 철학이나 시만큼 오래된 정신 작용이며, 과학적 지식과 표현력을 포함해 각종 이해 방식을 낳은 기초이다. P. -129
질병이 우리에게 주는 대표적 은유는 병의 원인에 있다. 어떤 사람이 어떻게 그 병에 걸리는가에 대한 문제가 질병에 대한 은유의 시작이다. 앞서 말한대로 의학 지식이 부족하거나 병의 증상이 보여주는 이미지가 그것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질병을 바라보는 방식이 치료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또한 개인적 차원의 치료를 넘어 주변 사람들과 죽음까지도 처리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죽은 사람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남은 생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에이즈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무지는 질병 자체보다 훨씬 더 격렬하게 환자들에게 다가온다.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시선들, 예를 들어 동성애자,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병역거부자 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 보다 오히려 더 크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에이즈 환자에 대한 시선일 것이다. 그 감염 경로와 치료 과정과 무관하게 널리 퍼져 있는 칼날같은 시선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다. 나와 무관하다는 안도감만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는 문제다. 페스트처럼 제 1차 세계대전의 희생자 수를 넘는 죽음을 불러온 질병들에 대해 인류는 속수무책이었다. 암의 정복 즉 질병의 정복은 단순히 생명 연장의 꿈이 아니라 질병에 대한 은유들을 제거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고통을 넘어 선 고통을 받는 ‘질병들’을 주의하고 조심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수잔 손택이 보여준 ‘질병으로서의 은유’의 역사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이다. 더구나 10여년의 간격을 둔 두 편의 글이 시간을 뛰어 넘어 하나로 읽힌다. <해석에 반대한다>를 읽기 위해 거슬러 올라가는 책읽기도 재미있었다.
060428-0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