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과 함께 사는 법 - 다양한 몸 사이의 경계를 허물기 위하여 땅콩문고
백정연 지음 / 유유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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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식할 때마다 짜장면이 먹고 싶다고들 해서 짜장면을 좋아하는 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외식하며 먹어 본 음식이 짜장면밖에 없어서 항상 짜장면을 고른 거더라고요.” - 50쪽


어쩌다 한번 외식을 할 때 떠오르는 메뉴가 자기 경험의 한계다. 마치 언어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인간의 세계처럼 음식은 삶의 경험을 함의한다. 무엇을 먹었는지 말해보라, 네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는 어느 요리사의 금언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주어진 환경, 양육과정, 현재 생활 정도에 따라 선호하는 음식이 달라진다. 우영와 김밥은 어머니와 고등와 또 다르다. 가수 김창완은 「어머니와 고등어」에서 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보니 한 귀퉁이에 고등어가 소금에 절여져 있는 걸 발견하고 소금에 절여놓고 편안하게 주무시는 어머니의 나지막한 코 고는 소리를 듣는다. 자신의 경험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상상력의 한계가 자기 인식의 범위를 뛰어넘을 수는 없는 법. 


백정연은 장애인을 소외된 이웃이나 배려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척수장애인 남편과 결혼하기 전에도 발달 장애 관련 기관에서 일했으나 생활 속의 장애는 지극히 구체적이고 일상적이다. 거주지의 조건은 물론 욕실의 배치와 가구, 생필품의 위치까지 장애인과 함께 사는 법은 신경쓸 일이 한둘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적 수사가 없고 건조하고 덤덤한 목소리로 일관한다. 이 책의 미덕은 바로 여기에 있다. 유아, 노인, 환자를 포함하면 버스를 타고 지하철로 환승하며 외출을 하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 행사인지 실감한다. 장애인 이동권에 관심을 기울인 적이 있나. 아니 적어도 그들을 비난하거나 내 불편을 호소하며 분노하지는 않았을까. 장애인과 함께 사는 법은 장애인 가족을 위한 매뉴얼이 아니라 비장애인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다. 다양한 몸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효율성과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 다양성과 행복의 크기를 위해 장애인과 함께 사는 법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넷플릭스 전 세계 1위를 차지했다는 한국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화제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ASD)라는 용어도 낯설지만 아스퍼거 증후군에 해당하는 천재 변호사 우영우는 더 어색하다. 장애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고 이해의 폭을 넓힌 드라마의 순기능을 부정할 생각은 없으나 현실은 드라마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는 대략 5%, 250여만 명의 장애인이 살아간다. 비장애인 4,750만명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해당하기 때문일까. 여전히 우리는 장애인과 그들의 삶에 대해 무지하다. 


발달장애 관련 기관에서 일하다가 세상의 모든 정보를 쉽게 만들어 장애인들의 자립을 돕는 사회적 기업 ‘소소한 소통’을 설립한 백정연은 척수장애인과 결혼했다. 내 삶의 일부, 아니 장애인이 가족일 때 일상생활은 이전의 삶과 전혀 다르다. 저자는 결혼과 일상을 통해 장애인과 사는 법을 비로소 알게 된다. 동료로, 친구로 조금 더 알아야 할 일들이 일반 시민들의 책무라면 저자는 조금 더 세심하고 깊은 곳까지 헤아리며 장애인의 문제를 짚어내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다른 책과 달리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무관심을 질타하지도 않고 분노를 표출하지도 않는다. 일상에서 보고 듣고 느낀 동료, 친구, 남편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준다. 그 갈피마다 숨어 있는 비장애인들의 시선과 제도적 문제점은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한다. 정책 변경, 시설 개선을 촉구하는 대신 ‘장애인과 함께 사는 법’이라는 제목의 이유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마지막 부분에 제시한 장애인과 경계를 허물고 함께 살아가기 위한 방법이 매우 현실적이다. “모든 집마다 장애인이 있으면 좋겠어.”라는 문장을 한참 들여다봤다. 이해와 공감은 경험에서 나온다.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라면 함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없다. 장애인 문제가 그렇다. 행복한 사회는 다수가 행복한 사회보다 소외된 소수가 행복한 사회에서 더 빨리 실현된다는 저자의 말은 울림이 크다. 공평하지 않은 사회에서 장애인 또는 장애인의 가족으로 산다는 것은 차별 또는 폭력을 감수하며 사는 것과 같다는 주장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진부한 문장이 때로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어린이, 노인에 대한 배려가 장애인에 대한 배려와 다를 바 없다. 건강한 성인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세상에서 장애인과 노약자는 소외될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는 그들과 함께 사는 법을 고민할 만큼 충분한 경제력 토대를 마련했고 성숙한 시민의식도 갖추고 있다고 믿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장애인과 함께 사는 법에 대해서도 좀 더 관심을 기울여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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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조건 - 철학이 진실을 구별하는 방법
오사 빅포르스 지음, 박세연 옮김 / 푸른숲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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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두 가지 유형의 무지, 즉 근거 없는 잘못된 믿음과 믿음의 부재가 존재한다. 이는 잘못된 정보를 받아들인 것과 정보를 전혀 받아들이지 못한 것의 차이다. - 180쪽


우리는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다는 자동차 백미러의 경고를 때때로 잊는다. 시야각을 넓히기 위한 착시현상은 일상에도 나타난다. 현상은 본질을 드러내지 못하고 결과로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기 쉽다. 소설가 이현은 단편 「거의 하나였던 두 세계」에서 “나는 진실의 반대말이 주로 거짓이나 가짜라고 배워왔는데, 살면서 오히려 무지에 더 가까운 개념이 아닌가, 생각할 때가 많았다.”고 고백한다. 스웨덴의 저명한 언어철학자 오사 빅포르스는 이를 증명하듯 무지의 반대말로서 진실이 갖춰야 할 조건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 과연 ‘진실’ 따위가 존재하느냐는 냉소적 태도도 좋고, 진실 그 자체를 갈구하는 종교적 몰입도 좋다. 다만 사실fact와 진실truth 사이의 거리만큼 먼 세계에 진입하기 위해 우리가 갖춰야 할 조건에 대해서는 한번쯤 살펴봐야 하는게 아닐까.


포스트 트루스post-truth(탈진실, 진실보다 감정과 개인적 믿음이 여론 형성에 더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현상)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익숙해진 ‘대안적 진실alternative truth’이라는 말은 트럼프 당선 이후 일상적인 허위의 세계를 근사한 포장지에 불과한 게 아니라 또 하나의 진실을 창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가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온갖 가짜 뉴스와 추측성 보도, 편집과 일방적 프레임으로 언론의 기능을 상실한 몇몇 레거시 미디어의 헤드라인을 볼 때마다 느끼는 분노에 가까운 불편함을 설명하기 어렵다. 어이는 집을 나가고 헛웃음이 나지만 정치적 성향에 따른 이념 논리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어차피 객관적 거리가 불가능하다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진실의 세계는 존재하기나 하는 걸까.


우리는 왜 지식에 ‘저항’하는가. 아니 그 전에 지식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1. 이론적 지식theoretical knowledge : 무엇을 알고 있는지knowledge that, 알고 있는”과 “2. 실천적 지식practical konwledge : 방법을 알고 있는지knowledge how, 할줄 아는”으로 나눈다. 이론과 실제의 거리만큼 추론과 경험의 세계는 타협할 수 없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로 시작하는 경험론자들과 ‘논리적으로 그게 가능하냐’는 주장이 부딪치는 자리에서 우리는 ‘의심’ 이외에 믿을 구석이 없다. “지식은 우리 모두가 협력해 만든 창작물이다. 즉, 각자가 다양한 방식으로 기여해온 인식적 노력이 누적된 결과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의 사고는 왜곡되는가. 거짓말과 가짜 뉴스가 판치는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저자는 한발 더 나아가 그 원인을 교육 현장에서 찾는다. 구성주의가 교육에 미친 영향을 꼼꼼하게 살핀다. 비판적 사유의 부재가 악惡이라고 선언한 한나 아렌트의 말은 언제나 옳다. 진실 고수holding true를 위해서는 인식적 불평등epistemic injustice을 극복하고 암묵적 편견implicit bias을 이겨내는 실천적 지혜practical wisdom가 요구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저자는 최악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비판적 사고, 출처 비평, 전문가 신뢰, 토론과 팩트체크’를 제안한다. 


저마다의 상식이 다르다. 각자 선악의 기준이 다르고 공정과 정의를 보는 관점도 다르다. 내로남불이 본능이라는 핑계에도 한계가 있다. 진실의 조건마저 상대적이라면 우리는 어느 지점에서 서로 다른 생각과 개별적 사실을 확인해야 할까. 언어의 명징함, 개념의 정확성, 비판적 사유의 엄중함이 우리를 구원케 하리라. 진실의 반대말이 무지라면 겸손과 반성적 태도가 자신을 한발 나아가게 하지 않을까. 지금 생각한 대로 살고 싶다면 말릴 수는 없으나 대부분 사람들은 그게 사는 대로 생각하는 증거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분야는 다르지만 최근에 쏟아지는 논의는 개별적 진실, 즉 대안적 진실을 주장하는 이들의 태도다. ‘왜’가 아니라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서로 궁금해하는 게 아닐까. 우리라는 카테고리 안에 담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분야별로, 쟁점마다 진실을 서로 다르게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게 최소한 내 생각과 믿음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은 기본이 아닌가. 


우리는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에 항상 마음을 열어놓아야 한다. - 3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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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호소의 말들 - 인권위 조사관이 만난 사건 너머의 이야기
최은숙 지음 / 창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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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1호 터널을 빠져나온 버스가 정류장에 설 때마다 고개를 들어 건물 꼭대기에 적힌 ‘국가인권위원회’ 일곱 글자를 올려다본다. 2001년 김대중 대통령이 설립한 국가 기관이다. 감사원과 헌법재판소처럼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적 기관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기관의 수장에 따라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은 중립을 지키지 못하고 정치적 편향성에 몸살을 앓기도 했지만 국가인권위원회는 다른 어떤 기관보다 국민들의 삶과 맞닿아 있다. 아니, 그 상징성만으로도 인권감수성을 높여온 공을 인정받아 마땅하다. 


20여 년간 인권위에서 조사관으로 일한 최은숙의 책 제목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호소’라는 단 한마디가 그렇다. 이메일 주소를 결정할 때 의견이 모아졌다는 ‘호소’라는 말이 인권위의 성격을 말해주는 듯하다. 법치를 부르짖는 법기술자들, 선택적 정의를 구현해온 정치인들, 사람보다 이익과 효율을 앞세운 자본가들 앞에서 잃어버린 인권은 여전히 ‘호소’의 대상일까. 『불편해도 괜찮아』같은 책은 물론 인권영화프로젝트 등으로 꾸준히 국민들의 인권 감수성을 지켜온 인권위의 노력과 달리 이 책은 지극히 개인적인 소회를 담고 있다. 생활인으로서 느낀 소탈함, 조사관의 고충과 애로사항, 안타까운 사연과 진정인들의 아픔이 그대로 전해진다. 현실을 전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면 이 책은 쉽고 친근하게 다가서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것을 일반화하는데 성공하고 있어 공감과 설득력을 얻는다.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된 실수를 바로잡는 일은 왜 어려울까. 공무원들은 실수를 인정하는 데 인색하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나 때때로 자기 책무를 방기하고 권한을 남용하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직급이 높을수록, 권한이 많을수록. 그래서 최은숙은 “비극적인 사건은 본래 자신들이 해야 할 일들을 정확히 정반대로 한 경찰, 검사, 판사, 국선변호인이 만들어낸 불법과 무책임과 무능의 총체적 결과였다.”(73쪽)라고 말한다. 엉뚱한 사람이 누명을 쓰고, 공권력이 남용되며, 시민이 보호받지 못하는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전체를 위해 개인의 피해는 감수해야 한다거나, 너 하나 때문에 모두 불편하다거나, 그걸 왜 갑자기 문제삼느냐고 말한 적은 없을까.


내로남불은 모든 인간의 습성이라는 사실 앞에 좌절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그걸 인정하고 끊임없이 성찰하고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아닐까. 인정할 수 있는 용기를 내는 건 나이, 학벌, 재산, 권력과 무관하다. 한 인간이 타인과 세상을 향한 태도의 문제다. 대개 그걸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정치를 하거나 진영논리의 첨병이 된다. 특정 직업의 확증편향으로 나타나거나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일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으려 든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대개 문해력이 떨어지고 가진 게 없거나 몸과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공정과 정의는 너무 멀다. 


공감도 능력이다. 감수성도 공부가 필요하다. 이성적 분노와 논리적 증오도 노력이 필요하다. 저자의 이야기가 자칫 인권위 조사관이라는 흔치 않은 직업에 대한 호기심으로 소비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 조금 더 나아지고 있는지, 내가 선량한 차별주의자로 살아가는 건 아닌지, 세상이 조금씩 성숙한 사회로 발전하는지 살펴보는 바로미터의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어떤 책은 독자에게 호소하는 대신 스스로 세상을 향해 빛을 낸다. 그 말들 사이사이에 놓은 너무 당연한 생각들이 더 많이 공유되었으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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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조금은 이상한 것을 믿는다 - 누구나 한 번쯤은 믿어봤을 재밌거나 이상하거나 위험한 생각들, 스켑틱 특별 합본호
니콜라 고브리트 외 지음, 스켑틱 협회 편집부 엮음 / 바다출판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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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무지가 빚어낸 상상력은 아름답다. 그러나 쥘 베른의 『지구 속 여행』(1864)이 무지의 산물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조금은 이상한 것을 믿지만 인류의 집단지성은 그것이 개연성 있는 허구의 세계인지, 이성적으로 가능한 과학적 현실인지 구별할 정도의 이성은 갖추게 됐다. 지구공동설에 기반한 이 기막힌 상상의 세계는 이제 SF 소설로 분류됐지만 당대에는 북극 탐험의 기폭제된 어느 사내의 미친 열정에 빚지고 있다. 지구 내부가 비었다는 공동설을 주장한 존 클리브스 시머스는 북극을 통해 속이 빈 지구 내부로 들어가려는 꿈을 꾸며 현실과 상상의 세계 양쪽에 모두 영향을 미쳤다. 탐험대가 마침내 북극에 도착하기 불과 수십 년 전인 1829년에 49세로 사망했으나 그의 아이디어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이상한 것을 믿는 게 꼭 삶에 부정적 영향만 미치는 건 아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유토피아를 꿈꾸고 지구의 내부에 또 다른 구체가 존재한다는 상상력은 환상적이지 않은가. 그러나 대체로 지나치면 독이 된다. 현실 부정의 논리로 작용하거나 극단적 맹신주의로 흐를 때는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다. 종교, 과학, 신념 등 그것이 어떤 명목이든. 


스켑틱 협회는 1992년 마이클 셔머가 설립한 비영리 과학 교육기관이다. 한국 스켑틱이 계간지 형태로 3, 6, 9, 12월에 발간된다. 이 책은 인간의 멍청함에 대한 보고서다. 전혀 이성적이지 않은데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착각 속에 사는 인간의 무모함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불편하다.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학문인 과학 분야조차 이상한 믿음은 계속된다. 일상에서 부딪치는 문제는 너무 익숙해서 과학이라는 말이 남발된다. 인상은 과학이고, 침대도 과학이고, MBTI도 과학이고, 혈액형과 별자리도 과학이다. 물은 답을 알고 있고 휴대폰은 암을 유발하고 음식으로 뇌를 고치며 음이온이 건강을 관리하는게 가능할까. 회의적인 회의주의의 시선은 리처드 도킨스, 스티븐 핑거, 샘 해리스 등 55,000명 이상의 회원을 거느린 협회의 명성만큼 세상을 구원하지 못하고 있다. 지속적인 해명 혹은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아니 세상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 걸까. 


특허청이 “음이온과 원적외선을 방출하는 토르말린, 모나자이트, 옥, 황토가 체온상승, 혈액순환 및 신진 대사 촉진, 성인병 예방 등에 효과가 있다”라는 발명가의 엉터리 주장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인정해준 셈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런 특허 중 상당수가 과거 미래창조부가 관리하는 구각연구개발 사업으로 개발되었다는 것이다. 정부가 세금으로 소비자의 건강을 위협하는 엉터리 기술을 개발하고, 특허까지 내주었다는 뜻이다. - 108쪽


인지 부조화, UFO, 예지몽, 유체이탈, 심령사진 등 이 책에는 성격과 운명, 일상 속 과학, 저세상에 관한 이상한 믿음 등 조금씩 한번은 그럴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여전히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 파란색 냄새를 맡는 소녀, 천국을 보았던 임사 체험자 등 우리 주변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확대 재생산된다.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인 이야기에 대한 호감이 만들어낸 재미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어느새 진실이 되고 운명을 좌우하기도 한다. 종말론을 믿는 사람들부터, 점을 보는 사람들, 징크스를 믿는 운동선수까지 우리 곁에는 다양한 형태의 이상한 것들이 널려 있다. 이것은 단순히 믿음의 문제가 아니다. 사고 방식과 태도의 문제다. 


마이클 셔머의 『스켑틱』을 인상 깊게 본 터라 이 책은 정기구독 잡지의 특별판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듯하다. 국내외 저자들이 들려주는 유사 과학에서 음모론까지 다양한 ‘이상한 것’들이 소개되고 그 믿음의 근거와 사람들의 관심을 보여준다. 물론 각 주제를 맡은 회의주의자들은 그 실체를 파헤쳐 분명한 증거 혹은 논리적 근거로 이상한 건 그냥 이상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의심하고 질문하고 성찰하는 게 귀찮으면 이상한 것을 믿으며 살면 된다. 우리는 자기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목적과 방법에 따라 나름대로 재미와 행복을 추구하며 산다. 다른 걸 틀렸다고 하지 않는다면 삶은 각자의 영역에 속한다. 그것이 타인에게 주는 영향, 공적인 영역에서의 태도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그러나 대개의 경우 사회적 관계, 정치적 표현, 종교적 태도, 일상적 습관에 드러나는 다양한 ‘이상한 것’들을 우리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어떤 호소의 말도 들리지 않고, 진실의 조건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살 수는 없지 않는가. 


확신을 가진 사람은 마음을 바꾸기 어렵다. 그에게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는 당신을 외면할 것이다. 사실이나 수치를 보여주면, 그는 출처를 물을 것이다. 논리에 호소해도 그는 논점을 피해갈 것이다. - 레온 페스팅거, 1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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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와 야생란
이장욱 지음 / 창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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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액션reaction은 즉각적인 반응에 불과하지만 리스판스response는 생각을 한 후의 응답이라는 어느 ‘미드’의 문장 하나가 하루를 가득 채우는 날이 있었다. 관습적 사고, 습관적 행동은 반응이다. 그것이 본능적 욕망에 기인한 것이든, 후천적 반복 훈련에 의한 것이든, 조건 반사든, 무조건 반사든 상관없다. 리액션은 결국 관성의 법칙을 따른 결과물이다. 힘들이지 않고 귀찮지 않으며 편하다. 리스판스는 ‘생각’이라는 거름 장치를 통과해야 한다. 질문이고 호기심이며 문제 제기다. 라틴어 “Nullius in verda”는 어느 것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의미다. 리스판스가 여기에 해당하는 게 아닐까. 


이장욱의 소설집 『트로츠키와 야생란』이 그렇다. 어떤 소설가는 리액션의 결과를 추적하고, 리액션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가담으며, 리액션의 근본적 이유를 묻는다. 생각없이 쓴다는 말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촘촘한 그물망을 짜는 일이 시인의 천형이라면 보이는 세계의 이야기를 깁는 일이 소설가의 임무다. 이장욱은 노골적인 것과 솔직한 것 사이의 간극을 보여준다. 때로는 경계를 허무는 일은 산을 옮기는 일보다 힘겹다. 틀을 깨고 나와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려는 ‘노오력’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의무가 아니다. 스스로 아프락사스의 품에 안기려는 자들의 땀방울이 세계를 조금씩 변혁시켜 온 게 아닌가. 


밀란 쿤데라는 소설을 “아무도 진실을 소유하지 않지만 모두가 이해받을 권리가 있는, 매혹적인 상상력의 영토”라고 정의했다. 이장욱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한 칸에 분류하기 어렵다. 다양한 인상 군상에 대한 관심이 모든 소설가의 눈에 비치지 않을 리 없다. 다만 그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에 궁금할 따름이다. 누군가는 작가의 눈치를 보며 그가 주제와 핵심을 파악하려 노력하나 또 누군가는 자기 삶을 투영하는 거울로, 또 하나의 벽을 넘어서는 담쟁이 넝쿨로 소설을 읽기도 한다. 자기 세계관을 들어올리는 지렛대의 역할로 책을 활용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오히려 안일하다. 작가에게 귀책 사유를 돌리거나 이미 만들어진 세계로 진입하려는 태도 때문이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일들이 인생을 이룬다고 생각하면 허망한가.” 단편 「잠수종과 독」에서 공이 현우에게 물었다면 다른 대답이 돌아왔을까. 독자는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작가의 질문에 응답한다. 그러한가, 아닌가. 공은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작용을 최대화하는 것이 의사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생각이 많고 양면성을 강조하고 상태의 복합적 측면들을 고려하며 아우르려는 사람들이야말로 무기력하다는 것을 공은 알고 있었다.” 아니, 무기력한 사람들은 자기 점검을 위해 오히려 다양성과 열린 태도를 살피라는 충고가 아닐까. 소설의 문장, 책장의 갈피마다 독자가 머무는 시간은 제각각이다. 


어떤 소설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건 결국, 자기 삶에 대한 고백이며 타인과 세상을 향한 독백이다. 유명한 정희가 그렇고, 혹자가 그러하다. “저들은 무엇에도 속하지 않고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되도록 해주기 때문에.” 외롭다. 쓸쓸한 고독 너머에 자기 존재 의미를 발견하려는 자들의 몸부림은 오늘도 계속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념과 세계사와 사후세계를 버리기. 성별과 이름과 가족계획을 망각하기. 우리가 함께 머물렀던 도시를 홀로 찾아와 헤매는 미래의 어느 날을 상상하지 않기.” 트로츠키는 멕시코에서 프리다 칼로를 만났다. 그의 마지막 연인이 되어 암살당했으나 세상에 남은 사람들은 그를 여전히 기억한다. 왜?


예의란 교양 있는 중산층 소시민들의 애티튜드에 불과하며, 예술이란 바로 그런 태도를 조롱하고 비판하고 전복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나는 배웠다. - 「노보 아모르」, 267쪽


예의 없는 것들의 세상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예술을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건 어불성설이 아닌가. 노보 아모르의 음악을 들으며 이장욱의 마지막 단편을 읽는 동안 오랜만에 소설다운(?) 소설을 읽은 여운을 놓치기 싫었다. 아무리 많은 이야기가 쏟아져도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것은 지극히 생의 이편과 저편을 가르는 도구가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고 견디는 최음제의 역할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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