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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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과 상상력은 끝을 알 수 없어 행복하다. 독자는 늘 2% 부족하고 낯선 이야기를 기다린다. ‘傳冊論’을 내세워 세상에 있지도 않은 허황된 이야기로 선비들을 미혹케하는 ‘傳’은 읽지 말아야 하며, ‘冊’은 바른 이치를 깨닫게 해준다고 말했던 홍대용 등 조선 후기 성리학자들은 ‘소설 무용론’을 주장했었다. 그러나 아직도 가장 건재한 장르는 소설이다. 가장 널리 읽히는 책의 종류도 소설일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재밌으니까.

  김현 선생의 말처럼 현실 원칙과 쾌락 원칙의 ‘금기’ 사이에서 갈등과 억압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적절한 장르는 소설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미디어 매체가 발달한다고 해도, 소설의 위기가 도래했다고 엄살을 떨어도 활자화된 소설은 여전히 잘 팔리고 재밌게 읽힌다. 시대가 변하고 세월이 흐르면 또 다른 양상을 보일 지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여전히’라는 말을 사용해도 무방할 듯하다. 이렇게 소설이 건재한 이유는 천명관의 <고래>같은 소설이 끊임없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문학동네 심사위원들의 다소 과장된 주례비평에 손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천명관이라는 걸출한 입담꾼이 탄생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기존의 소설작법이나 현대문학의 주된 흐름속에 몸을 담그지 않은 소설가의 탄생은 신선하다. 남진우와 신경숙의 결혼과 무관하게 지나친(?) 상업화와 문단 권력의 문제로 몸살을 앓았던 ‘문학동네’를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천명관은 <프랭크와 나>라는 단편 하나를 써서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았고, 뒤이어 <고래>로 10회 문학동네 소설상을 받았다. 별로 권위있는 상은 아니지만 그 이유로 세상에 나온 책이다.

  <고래>는 내용이 형식을 압도한다. 소설은 글이 위주가 된다는 가장 기본적 상식을 뒤엎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철저하게 입말 위주이다. 이문구 선생이나 박상륭 선생의 소설보다 철저하게 입말 위주의 소설이다. 판소리의 창자나 무성영화의 변사만큼 요설적 화자의 이야기에 독자들은 넋을 빼앗길 수 밖에 없다. 그 기괴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밥 때를 놓칠만큼 흥미롭다. 세상에 쏟아져 나온 그 수많은 엽기적인 이야기와 환타지와 무협지로 모자란 것이냐고 묻는다면, 또 다른 종류의 흥미라고 답할 수 밖에 없다. 무려 450페이지 달하는 두꺼운 장편은 단숨에 읽힌다. 화자의 화려한 스토리텔링만으로 지루함을 견뎌내기는 어려운 법이다. 각각의 이야기들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 탄탄한 서사구조를 이루어낸다.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현실 가능태의 문제나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는 질문에 짤막한 대답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소설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멈칫거릴 수밖에 없다. 어쩔 것인가 완벽한 소설은 세상에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을. 그런면에서 <고래>는 분명한 성과와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볼 수 있다. 잠 안오는 겨울밤 머리맡을 책임질만 소설로 손색이 없다.

  <총잡이>, <북경반점>의 시나리오를 쓰다가 소설을 써보라는 동생의 권유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아직도 영화를 더 미쳐있는 소설가 천명관. 빚진 것도 책임질 일도 없기 때문에 보다 자유롭고 새롭고 낯선 이야기들을 들려 줄 것으로 기대한다. 적지 않은 나이에 세상에 소설을 내놓은 작가는 살아온 시간이나 쌓여온 세월만큼의 저력을 기대해 본다. 나이에 기대 작품의 수준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미처 발산하지 못한 내공을 기대한다는 뜻이다. 두려움이 없다면 한없이 자유로울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노파와 금복, 춘희가 보여주는 여인들의 삶의 과정을 전근대와 근대, 탈근대로 대표되는 시대 정신으로 읽어내는 것은 도식적인 책읽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역사와 시대 정신을 무시하는 것도 하나의 축복이다. 진지하고 성찰적인 태도만이 소설의 태도가 아니라고 믿는다면 특별한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지나간 시간들을 우리에게 말해 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어차피 그것이 우리들의 이야기고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에 대해 질서를 부여하고 정돈하고 엮어내는 방식만을 달리했다는 겸손의 말을 하더라도.

  목적과 실용성을 묻지 않는 책읽기의 즐거움에 빠져 보고 싶다면 소설만을 고집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한 번쯤 푹 재미있게 읽어볼 만한 소설이다. 이제 시작인 소설가에게 작은 박수를 보낸다. 박민규와 구별되는 또 다른 소설의 재미를 기대해 본다.


2005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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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
천운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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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긴장감은 떨어지고 극단적인 묘사(showing)와 지루한 말하기(telling)가 반복되면 독자들은 견디기 힘들다. 인간의 무의식의 일면을 들여다보는 작업은 정밀하고 난해하지만 전달자의 입장은 일관되게 하나의 주제를 향해 끊임없이 질주하고 치밀하게 계산된 작업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재미도 의미도 잃게 된다. 스타일을 위주로 한 소설인가, 내용과 흥미를 위주로 한 소설인가 결정하는 것은 소설가의 몫이고 개성이지만 본능적으로 독자들은 그 흔적들과 문학적 성과를 체감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재미는 다양성 속에서 발현된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종류의 재미가 있는가?

  천운영의 두 번째 소설집 <명랑>에는 모두 8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숨은 그림 찾기도 아니고 퍼즐 게임도 아닌 소설집에서 공통점 찾기 놀이는 재미없다. 각각의 단편들 속에 숨어 있는 날선 칼날들을 만나고 싶은 것이 독자의 소망이다. 때로 도끼와 낫을 만나더라도 오래동안 벼려왔던 무언가로 뒤통수를 칠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근원을 알 수 없는 곳에서 우러나오는 서러움과 울분으로 공감대를 극대화하던가.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스타일은 가라. ‘명랑’의 할머니를 위시하여 ‘멍게 뒷맛’의 새댁, ‘모퉁이’의 주인공 등 대부분의 화자는 ‘불행’을 운명으로 살아간다. 일반적 기준으로 일상성에서 벗어나 있는 그들의 행동과 심리는 독자를 불편하게 한다. ‘세번째 유방’과 ‘아버지의 엉덩이’, ‘입김’, ‘그림자 상자’ 등 나머지 단편들도 모두 그로테스크한 일상의 우울을 변주한다. 그 우울의 기저에 깔린 생의 성찰과 반성은 공감을 얻지 못하고 허공을 맴돈다.

  ‘늑대가 왔다’의 소녀가 보여주는 행동과 심리는 ‘늑대’라는 상징을 통해 소설가의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다. 어느 문학잡지에서 읽은 적이 있는 ‘세번째 유방’과 ‘명랑’은 다른 단편에 비해 완성도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을 수 있겠다.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소설에 대한 전반적인 주제와 소재들 내용의 전개방식과 단편이 주는 울림이 <바늘>에 비해 오히려 떨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앞으로 무엇으로 승부할지 알 수 없으나 작가의 풍부한 역량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장편을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섣불리 판단할 순 없지만 지속적인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판단이다. 매번, 모든 소설에서 다수의 독자들에게 만족을 주는 작가가 어디 그리 흔한가. 선뜻 아무 소설에나 손이 가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통해 얻고자하는 독자들의 목적과 효용도 제각각이기 때문에 더욱 그럴지도 모르겠다. 소설과 무관한 일이지만 ‘창비’에서 ‘문학과지성사’로 옮겨가는 일은 무엇 때문인지 궁금하다.

  몇 년간의 공력과 세월이 단편집을 묶어 내면서 정리되기 때문에 소설가들에게 소설집은 대단히 큰 시간의 매듭 역할을 한다. 함부로 평가하고 쉽게 정의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앞서 말한대로 독자들은 가장 본능적으로 그리고 가장 날카로운 잣대로 나름의 평가를 한다. 단순한 재미를 위한 통속 소설을 원하는게 아니라 어느 한 부분에서라도 놓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하는 작가를 만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2005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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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꽃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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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숨을 쉴 때마다 폐부 깊숙이 도달하는 통증. 무엇인가 쓰지 않고서는 버텨낼 재간이 없는 사람들 - 天刑을 받고 태어난 사람이 시인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것에 충실한 사람은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 역할에 즐거움을 느끼고 스스로 몰입의 즐거움을 느끼는 작가는 얼마나 행복한가?

  흔히들 한 편의 소설이 전하는 의미를 확대해석하거나 외면해 버린다. 물론 모든 책은 선택일 뿐이라는 사실에서 벗어날 순 없다. 하지만 잠시 일상을 벗어나거나 알지 못했던 시간과 역사에 대해 혹은 무심했던 진실들에 대해 고민하고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기도 한다. 내겐 그것이 책이 주는 의미다. 역사의 시공을 뛰어넘어 현재의 의미를 성찰하고 나를 돌아보며 우리의 모습을 반추해본다. 거창하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결국 나는 왜 사는가와 어떻게 살 것인가로 늘 귀결되는 문제이므로. 매일 반복되는 일상들 속에서 사람들은 어떤 행복을 느끼며 어떤 삶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인지 궁금할 때가 많다. 다들 거기서 거기라고 하기엔 사람들의 의식도 생활도 방법도 너무 다양하다.

  20세기 후반에 태어나 21세기 초반에 걸친 삶을 마감하게 될 내 삶은 흔적없이 사라질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이 살았던,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할아버지 세대가 살았던 시절의 이야기는 당연히 궁금하고 소중하게 여겨진다. 불과 백년 전. 멕시코 이민자들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제각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영하의 <검은 꽃>은 탈근대의 역사 속에 주목받지 못한 미시사에 해당한다. 고종의 생각도 근심과 걱정도, 명성황후의 죽음도, 대원군이나 순종의 이야기도, 최후의 왕손이 일본에서 사망한 최근의 뉴스 보도도 사실 나에겐 먼 나라 이야기로 들릴 때가 많다. 하지만 멕시코 에네켄 농장의 채무 노동자로 팔려간 1033명의 우리 할아버지 세대의 삶은 눈물겹게 읽힌다. 그들은 우리와 다른 위정자도 아니고 오히려 그들에 의해 삶을 유린당한 민초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한제국의 군인, 농민과 도둑, 파계 신부와 박수무당, 보부상 등 역사와 시대의 흐름에서 소외된 이웃들의 삶의 모습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들은 더 가질 수 있는 행복을 포기한 채 일포드 호에 오른 것이 아니다. 이 땅의 신산스런 삶을 뒤로 한 채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 이 땅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유예된 4년간의 시간만큼 이 땅에서 더 나은 삶을 기대했던 평범했거나 그 이하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읽는 사람은 더욱 가슴이 아려온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출발할만한 성질의 이민사와는 사뭇 다른 측면이 있다.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 팔려간 조선인 1033명의 운명은 1905년 대한제국의 운명을 대변하는 시간의 비극성을 대표한다.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지구의 반대편 멕시코로의 공간적 이동은 강압에 의한 탈근대를 대표하는 시간적 이동을 상징한다. 반상제도와 남녀차별 등 봉건적 요소가 붕괴되는 과정이 일포드 호의 선실에서 벌어진다. 그리고 에네켄 농장에 도착한 후 노동의 과정을 통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것을 이민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알 수 없으나 우리 민족의 비극성을 가장 첨예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야기다.

  작가의 말대로 피로써 쓴 1차 자료가 없었다면 이런 종류의 소설은 시작부터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로도 다 말해질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을 알기 위해 우리는 소설을 읽는다. 작가가 영원히 쓰고 싶은 소설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몰두하고 열정을 다했던 소설답게 성공적이다.

  일종의 역사소설로 분류될 수 있으나 역사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이나 영웅은 등장하지 않는다. 역사를 보는 여러 가지 시각을 점검할 필요도 없이 작가의 시선은 냉정하고 객관적이다. 감상에 치우치거나 그들의 삶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지도 않는다. 객관적 정황과 사실성을 토대로 소설의 구성은 탄탄하며 인물들이 지니는 특성은 여러 주인공들의 면면들이 전체 이민자와 상황 속에 잘 어루어진다.

  에네켄 농장의 4년을 넘어 멕시코의 혁명 전쟁, 과테말라의 게릴라 전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한 권의 장편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다. 작가의 역량과 힘을 실어 좀 더 길고 다양한 면들을 보여주는 역작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 아쉬움이 남는다. 그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추적할 순 없지만 과테말라의 띠깔에서 ‘신대한’을 세우고 사라진 사람들에 대한 사실들은 단순한 역사적 가쉽을 넘어서는 특별한 의미와 감동을 전한다. 쿠바의 카스트로와 체게바라처럼 마리오와 김이정의 이야기는 또 하나의 소설이 될 만하다.

  멕시코 이민 백 년. 많은 시간이 흘렀고 시대가 변했지만 신산스런 우리 조상들의 삶을들여다보는 일이 결코 유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과거나 지나온 역사를 부정할 수는 없다. 현재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퍼즐의 조각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발 딛고 선 이 땅의 역사와 지금 우리들의 모습은 힘겹기만 하다. 과거와 미래가 통어하는 순간들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소설이 훗날 어느 순간 쓰여질 것이다. 그 때 소설속의 주인공이 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미래보다 과거의 어느 찰나를 짚어내는 이야기에 관심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개인적 취향이다. 좀 더 괜찮은 김영하의 소설을 기대해 본다. 흐린 하늘을 쳐다보며 시간의 흐름속에 개인들의 삶을 녹여낸다면 먼지처럼 부유하는 티끌이 될 것이다. 그것들이 뭉쳐져 아름다운 눈송이가 되듯 역사는, 우리의 삶은 이름없는 것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믿는다.


2005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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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사진이 가르쳐준 것들
천명철 지음 / 미진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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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가입하고 활동하지 않는 예스24의 클럽 이름이다. 사진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이 급변하고 있다.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발터 벤야민은 사진이나 영화같은 복제 가능한 장르에는 원본 예술품만이 지닌 시간과 공간의 현존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우라를 찾아 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아우라가 있든 없든 사진은 가장 보편적인(?) 예술로 인정 받았다. 사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디지털 카메라의 등장으로 누구나 사진을 찍고 즐긴다. 순간을 기억하고 싶은 모든 인간의 욕망은 순간을 포착하는 사진으로 남는다. 과거 지향적인 사람일수록 지나간 사진을 들여다보며 과거를 추억하고 시간을 되돌려 생을 반추한다.

또한 사진은 자기 표현 시대의 대표적인 매체가 되었다. 미니홈피와 블로그에 올라오는 대부분의 사진들은 직접 찍은 것이다. 사진의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고 활자와 텍스트를 넘어 이미지로 승부하는 시대를 대표하는 매체가 되었다. 스스로의 모습을 찍기도 하고 눈에 보이는 대상들을 끊임없이 찍어댄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눈으로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아마추어와 전문 사진가의 차이점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눈에 보이는 것을 찍기 위해 셔터를 누르는지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것인지. 천명철의 <어느 날 사진이 가르쳐준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기 위한 노력들이 돋보이는 사진집이다. 사진과 에세이가 곁들어진 책의 특성상 실망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기획 취재에 걸맞게 온통 황량하고 허허로운 들판과 산자락에서 건져 올린 ‘봄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저자에게 사진이 말해준 것은 ‘희망’이 아닐까 싶다. 겨울에 찾아낼 수 있는 가장 스산한 장면들 속에서 봄을 잉태한 사진들은 정적인 이미지로 고정되어 있다. 노출와 셔터 속도가 어떠하든 3차원의 공간을 2차원의 평면으로 옮겨놓는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작가가 고민했을 흔적들과 대상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던 부분들이 잘 전해진다.

다만 크기와 사진의 특성을 오롯이 담아낼 수 없는 한계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가격과 책이라는 형식이 가진 근본적인 특징을 잘 살려내려고 했지만 두 페이지에 걸쳐진 사진을 대하는 독자들의 마음이 편치는 않을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이 그림을 그리게 했는지 사진으로 발전했는지 알 수 없다. 보다 정교하고 발달된 매체와 기계 수단들이 즐비한 시대에 사진이 갖는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눈에 보이는 대로,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까지도 담아내고 싶은 숨은 욕망들이 꿈틀거릴 때 셔터를 누르는 걸까?

이제 닫힌 공간과 활자로 표현된 텍스트를 넘어 이미지로 표현되는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결국, 사진은 피사체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찍는 사람의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일 테니까 말이다. 이 책이 출발선상에 서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점은 단 한 가지 ‘눈으로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는 점이다.

아름다운 사람과 멋있는 풍경만이 사진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무엇을 찍고 싶은지, 왜 찍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은 사진에 관심을 갖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고민일 것이다. 목적과 대상, 방법에 대한 고민은 모든 예술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다. 이 책을 통해 자그마한 해답을 스스로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제 텍스트를 넘어 이미지의 세계로 한 발쯤 넘어가고 싶다. 곧.


06110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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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6-11-01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와 닿는 글이네요. 이미 대중문화는 이미지가 지배하는 세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근본적인 질문은 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정말 사진이 가르쳐줄 수 있을까요? 갑자기 요즘 유행하는 렌즈달린 전문가용 사진기에 욕심이 생기네요. 이게 아닌데. ㅋㅋ

sceptic 2006-11-01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생은 용기 있는 자의 것이라고 누가 그러더라고요...저도 늘 새롭게 용기 낼 볼려구요...ㅋㅋ
 
인간 사색 - 한국인의 인간관계에 대하여
강준만 지음 / 개마고원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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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에서 의사소통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커뮤니케이션은 이러한 소통 방법에 대한 고찰이다. 이것은 원인과 과정, 방법과 결과를 망라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가능성에 대한 관찰과 현상에 대한 분석이 바로 강준만의 <인간사색>이라는 책이 갖는 의미이다.

언론학자라고 한정하기에는 활동의 진폭이 큰 강준만의 책은 일단 재미있다. 물론 그 재미의 기준과 의미는 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지나친 정치적 수사와 직설적인 화법으로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고 현실적인 문제들로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지만 강준만의 이야기는 언제나 ‘래디컬’해서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강유원이 ‘래디컬하다’란 말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이 책과는 무관하더라도 그의 성향을 대표할 만하다. 이 땅의 수많은 지식인들을 지도로 그려보고 싶을 때가 있다.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고 성향에 따라 이름이나 사진을 놓아 본다면 재미있는 그림이 나올 것 같다. 그의 평소 발언이나 책의 내용들을 반영해서 누가 한 번 그려보면 좋겠다. 꼭 사서 읽어 볼테니.

이 책의 특징은 지난해 출판된 철학자 김용석의 <두 글자의 철학>을 떠오르게 한다. 전체 4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장마다 인간관계를 풀어내는 두 글자의 키워드가 제시된다. ‘사랑, 불륜, 질투, 순결, 키스’, ‘욕망, 열정, 감정, 체질, 싸움’, ‘청춘, 나이, 효도, 호칭, 권위’, ‘진실, 기억, 신념, 의리, 배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목들만 나열해도 호기심이 넘친다. 이렇게 흥미로운 두 글자들의 조합을 어찌 그냥 넘길 수 있겠는가.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한국인들만의 고유한 인간관계를 풀어낸 책이 많기 때문에 그냥 넘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머리말에서 저자가 밝혔듯이 ‘모든 국민이 다 전문가’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분석과 이 분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들 자화상을 그려내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저자 강준만이 용감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이런 걱정은 이 책에 대한 장점과 단점으로 드러난다. 가장 큰 단점은 저자의 피해가기 기법이다. 길지 않은 분량에 인용된 책과 잡지 등 각종 자료가 방대하다. 저자의 꼼꼼한 준비와 분석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객관적 시선 뒤에는 탁월한 주관적 배경이 배제된다는 함정을 피할 수가 없다. 강준만은 없고 수많은 인용과 관련 분야의 객관적 정보들이 넘쳐난다. 이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단점이다.

반면에 가장 큰 장점은 단점의 뒷면이다. 인간관계에서 살펴야하는 수많은 정보와 규칙들은 한 개인에 의해 정의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인 특유의 정서와 인간관계론을 분석적 방법으로 객관화시켜 나가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았겠지만 이렇게 물꼬가 터진 이상 즐겁고 재미있는 작업들이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정치와 사회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폭넓은 통찰력과 정확하고 날카로운 시선이 아니면 불가능한 ‘인간관계 커뮤니케이션’에 관심을 갖게하는 즐거운 책임에 틀림없다. 인용된 자료와 각주를 모두 읽어보고 싶을만큼 흥미로운 주제가 있는가 하면 밑줄 긋고 한참동안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도 많다.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과 관계들을 정확하게 짚어낸 부분들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한 권의 책을 묶어낼 수 있는 저자의 능력은 쉽게 판단할 수 없지만 주관적 정보의 주관적 선택이 만들어내는 객관적 분석은 훌륭하다. 인간관계를 고찰하는 일이 어찌 쉬운 작업일 수 있겠는가. 저자가 풀어내는 우리의 모습에 때로는 부끄러워하며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렴풋하게나마 우리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스스로의 모습을 가장 정확하고 객관화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거울에 비춰 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이다.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을 빌어 나를 돌아본다. 때로는 미시적 관점에서 감정의 미묘한 떨림을 이야기하다가 거시적 안목으로 사회 정치적 문제까지 다루다보니 다소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좁은 관계에서 넓은 관계까지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 현실의 모습들을 다양하게 엿볼 수 있다. 한 권의 책에서 큰 욕심을 내지 않고 풍성하고 화려한 인간관계에 관한 에피타이저 정도로만 이해해도 좋을 것 같다.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들 속에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느끼는 막연한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반성적인 시간을 갖게 해 줄 수 있는 강준만의 <인간사색>을 권한다. 때로는 즐겁게, 때로는 부끄럽게 나를 돌아보는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그 의미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06103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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