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멋대로 써라 - 글쓰기.읽기.혁명
데릭 젠슨 지음, 김정훈 옮김 / 삼인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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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심상사’에서 ‘청소년 문학 창작학교’ 캠프에 갔을 때 박동규 교수를 비롯한 많은 시인과 소설가들의 이야기는 하나의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 고정관념을 버려라. 둘째 낯설게 바라보라. 물론 내가 나름대로 얻어낸 결론이지만 문학적 글쓰기의 기본 토대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거나 낯설지 않은 작품은 감동을 주지 못했다. 그 후로 접하게 되는 시나 소설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었고 지금도 가끔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생각할 때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말들이다.

  4차 교육과정 시절이었다. 교과서는 ‘바이블’이었고 마르고 닳도록 암기하고 또 외우면 된다. 교과서 이외의 지문은 학력고사에 출제된 적도 출제될 필요도 없던 시절이었다. 신동엽의 <금강>을 밤새워 읽지 않는 대학생의 되지 말라는 고 3 담임이었던 국어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대학보다 <금강>을 먼저 만났다. 인생이 도움이 될만한 국어 교육과 글쓰기 교육은 그 후로 단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스스로 찾아 나서지 않으면 우리 나라의 교육 과정상 정상적인 글쓰기 교육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교 교육 과정상 ‘쓰기’의 심화 과목인 ‘작문’이라는 과목이 있지만 대개의 경우 고 3에 배치해서 언어 영역 문제집을 풀거나 ‘작문의 절차 5단계’의 지식 전달 교육으로 끝난다. 초등학교 시절 일기와 중학교 시절 의무적인 독후감 제출이 전부로 기억된다.

  열악한 글쓰기 교육이 현재도 다름없음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체계적이거나 전문적인 글쓰기 교육이 없거나 불가능한 현실을 비추어 볼 때 대입에 반영되는 ‘논술’ 시험은 국민 전체가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사기극이다. 고등학교 과정에서 가르칠 수 없거나 ‘작문’을 선택하지 않으면 배울 기회조차 없는 ‘논술’을 언제 누가 가르치고 배워야 하나? 글쓰기를 통해 그 사람을 판단한다는 취지에 적극 동감한다. 하지만 현실적 대안과 방법론의 문제를 간과할 수 없다. 모두가 고민하고 방법을 바꿔야 한다.

  데릭 젠슨의 <네 멋대로 써라>의 가제를 ‘어떡하면 안 가르칠까’였다는 후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한다는 말이다. 글쓰기는 삶의 모습이어야 하며 사고 과정의 반영이어야 한다. 붕어빵틀처럼 동일한 방식의 주입식 교육을 받고 부모로부터 일찍부터 경제교육이라는 미명아래 자본주의 속성과 경쟁 원리를 몸에 익힌 학생들은 수입과 직결된 직업을 선망하며 때로는 어른보다 더 속물적 성향과 배타적 이기주의를 드러낸다. 지나치게 부정적인 견해일까? 그렇지 않다.

  데릭 젠슨은 높이 뛰기 선수로 활약했으며 캘리포니아 북부 해안가에서 살면서 산업화로 인한 문명이 자연을 파괴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심각한 눈으로 바라볼 줄 아는 선생이자 농부이며 양봉업자이기도 하다. 여러 대학과 교도소 등에서 글쓰기를 가르친 방법과 내용을 아주 쉽고 자연스럽게 풀어 나가고 있다. 항목별로 설명하고 있지도 않으며 특별한 방법을 제시하지도 않지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가 제시하는 첫 번째 글쓰기 원칙은 ‘읽는 사람을 지루하게 하지 마라’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무척 어려운 일이다. 글의 종류와 쓰는 목적과 방법에 따라 다르겠지만 지루하지 않은 글을 읽고 싶은 마음은 모든 사람의 공통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지루하지 않은 삶과 생각을 끊임없이 이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르게 바라보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며 조금 더 깊이 고민하는 방법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학생들과 실제 수업 사례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글을 쓰고 다듬는 방법의 핵심 원리는 경험적, 실천적 글쓰기라고 말할 수 있다. 자발적인 글쓰기가 선행되어야 하며 진심을 담아야 하고 온몸으로 글을 쓰되 자신만의 이야기를 해야한다.

  줄쳐진 노트의 줄을 무시하고 대각선으로 길게 편지를 썼던 시절이 있었다. 파란색 볼펜으로 반듯한 사각형 노트나 편지지를 대하는 마음은 누구나 답답하다는 것이다. 일정한 형식과 동일한 방식의 글쓰기는 공장에서 구어낸 공산품처럼 재미없다는 것이 저자의 말이다. 삐딱하게 쓰려면 삐딱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고개를 5°쯤 기울이고 다른 각도와 시선으로 바라보면 된다. 글쓰기의 시작은 거기서 부터다. 현상이 아니라 본질을 파악하려는 노력, 사실이 아니라 진실을 알고 싶은 욕망,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나만의 무엇인가가 가슴에서 폭발하지 않으면 쓰지 않는 편이 낫겠다.

  일상적인 글쓰기는 우리의 생활이다.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하다 못해 문자를 보내고 친구에게 메모를 남기고 일기를 쓴다. 모두가 소중한 개인의 기록이며 의사 표현 행위이고 생각과 삶의 반영이다. 두려워하?말고 저자의 말대로 멋대로 써야 한다. 그렇게 할 것이다.


2005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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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자유의 역사
존 B. 베리 지음, 박홍규 옮김 / 바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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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으로 박근혜의 머리통을 한 대 갈기고 싶다. 다소 과격한 표현인가? ‘유신 공주’ 박근혜의 정체성부터 묻고 싶어지는 발언들이 사람들을 미혹케 한다. 대중은 바보인가? 대한민국의 체제 수호와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파수꾼 박근혜는 어떻게 현실 정치의 중앙에서 행세하고 있는가. 부끄러운 우리의 정치 현실의 단면을 보고 있는듯 하다. 보수과 진보, 우익과 좌익을 논하기 이전에 창피하고 부끄러운 수준의 이념 공방을 보면 대한민국을 뜨고 싶다. 우리나라에서 ‘사상의 자유’를 논하는 것 자체가 죄라는 것은 모두가 다 안다. 부끄러운 현실이다. 문명국가 한국은 아직도 야만의 정서와 믿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21세기 한국에서는 사상 논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대부분의 문명국가와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미 용인된 사상의 자유가 없다. 한국의 정치적 군사적 특수성 때문이라는 위협은 이제 지나가던 개도 웃게 되었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고 국가 보안법은 여전히 존속되고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

  헌법 19조, 20조에 양심과 신앙의 자유는 명시하고 있지만 사상의 자유는 인정하지 않는다. 양심의 자유에 일부 포함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헌법 37조 2항에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 ․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로 한하여 벌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고 못 박고 있어 국가권력에 의한 통제를 헌법에 명시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언제쯤 ‘사상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을까? 언제쯤 반공 이데올로기와 레드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1914년,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출판된 존 B. 베리(John Bagnell Bury, 1861-1927)의 <사상의 자유(A history of freedom of thought)>가 박홍규 교수에 의해 완역본으로 다시 나왔다. 이 책은 그리스와 로마 시대부터 19세기까지 시대별로 사람의 생각을 가두고 억압했던 인류의 역사를 종교를 통한 사상 통제의 역사로 풀어내고 있다. 각 시대별로 사상의 자유를 위해 피흘렸던 선각자들의 이론과 저작을 통해 이성적 존재라고 믿었던 인간이 얼마나 긴 세월동안 야만의 시대를 겪어왔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특히 중세를 암흑기라 했던 이유는 ‘교회의 영향력이 최고도에 달했던 시기’였으며 ‘이성은 기독교가 쌓아올린 인간 정신의 감옥 안에 사슬로 매여’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의 자유는 완전한 사상의 자유를 향한 중요한 발걸음이었다. 그래서 이 책은 기독교와 가톨릭으로 대표되는 종교의 배타성이 어떤 방식으로 인간의 이성을 억압해 왔으며 고통스런 역사속에서 어떤 식으로 그것을 극복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인간의 사상의 자유의 역사이다.

  베리가 종교를 중심으로 ‘사상의 자유’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까지 나는 거의 전적으로 종교에서의 사상의 자유만을 고찰해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반적인 사상의 자유를 측정하는 온도계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본문 190페이지)”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제 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기 전까지 종교가 사상의 자유를 측정하는 온도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리의 우려대로 인류의 ‘사상의 자유’는 이데올로기라는 직격탄을 맞는다. 우리 사회도 예외가 아니어서 반공을 국시로 하여 지난 반세기 동안 지독한 사상 탄압과 맞물려 언론의 자유까지 유린되었다. 종교의 근본주의가 가장 심각한 나라가 되었으며 아직도 양심적 병역거부와 사상의 자유가 없는 지구상의 특별한 나라가 되어 가고 있다.

  분당에 800억짜리 교회가 지어지고 있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인가. 개신교 세계 50대 교회중 44개가 대한민국에 있으며, 세계 10대 교회 중 7개가 대한민국에 있다. 규모와 신도수로 특정 종교를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이 책에서 언급한 특정 종교의 배타성이 인류 역사에서 초래했던 불행과 과오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우리 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에 대한 심각한 반성과 자성의 목소리가 필요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치적 목적과 종교적 목적이 결합되어 자행되었던 지난날은 이대로 묻혀 가는 것인가?

  “다른 그 어떤 자유보다도 양심에 따라 자유로이 알고 말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자유를 내게 달라” - 존 밀턴(John Milton), 본문 120페이지

  토머스 페인(Thomas paine)의 <인간의 권리(Rights of Man)>에도 이와 동일한 항의가 등장했다. “관용이란 불관용의 반대가 아니라 그것의 모조품이다. 그 둘 모두 독재이다. 하나는 양심의 자유를 억누를 권리가 있다고 자처하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부여할 권리가 있다고 처한다.” - 본문 133페이지

  밀턴과 페인의 말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사상과 양심의 자유 혹은 관용과 불관용을 논하는 것 자체가 그 사회의 건강성을 역설적으로 반증한다. 우리 사회의 미래는 어떠해야 하는지 베리는 100년전에 설파했고 대부분의 문명 국가와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미 끝나버린 논쟁들을 우리는 여전히 유효한 갈등 요소로 감싸고 있으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지난해 종교의 자유를 외치며 학교를 상대로 외롭게 싸웠던 일, 양심적 병역 거부 문제로 매년 1천여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감옥에 갇히는 일, 지금 현재 동국대 강교수에 대한 국가보안법 적용 논란 등은 우리 사회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내가 의지했던 권위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생각들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그 호두껍질처럼 단단하게 나를 깜싸고 있던 암흑의 세월들을 난 이제 믿지 않는다. 그 첫 단추는 부모로부터 학교로부터 채워진다. 지금 우리의 초등 교육은 어떠한가? 베리의 걱정은 아직도 유효한가? “너의 부모를 믿지 말라”는 말은 곧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말이다. 이 한마디에서 삶은 시작되고 나라는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이 촉발된다. 전도유망함의 제 1계명만이라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다면, 그것을 배울 수 있는 학교가 있다면 진정한 행복을 배울 수 있을 텐데……

   우리는 모든 노력을 총동원하여 사상의 자유가 인류 진보의 원칙이라는 점을 젊은이들에게 각인시켜야만 하는데, 그러나 걱정스럽게도 이 일은 앞으로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의 초등교육 방식이 권위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 본문 274페이지

   “너의 부모를 믿지 말라”라는 말은 전도유망함의 제1계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들은 바를 권위에 의지하여 받아들이는 것이 어떤 경우에 정당하고 어떤 경우에 정당하지 않은가를 아이들 - 이제 막 이해할 만한 나이가 된 - 에게 설명해 주는 것은 반드시 교육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 본문 275페이지

 
2005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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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인이 되기 위한 즐거운 글쓰기
루츠 폰 베르더. 바바라 슐테-슈타이니케 지음, 김동희 옮김 / 들녘미디어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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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용어들 중에 개념 자체가 모호하거나 구분하기 힘든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교양인’이라는 단어가 그렇다. 학력으로 구분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지식의 양이나 범위로 구분하는 건 더욱 불가능하다. 객관적으로 시험을 만들어 ‘교양인’ 자격증을 줄 수도 없다. 나는 누가 교양인인가하는 의문을 갖는다. 루츠 폰 베르더와 바바라 슐테-슈타이니케가 공저한 <즐거운 글쓰기>의 부제를 ‘교양인이 되기 위한’이라고 되어 있어 한참을 생각해 보았다. 원제는 ‘Schreiben von tag zu tag’이니 우리말로 간단하게 ‘매일 매일 글쓰기’ 정도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 사람들은 교양인이 되기 위해서 글을 쓴다는 말인가. 말도 안되는 이야기인줄 알면서도 출판사에서 제목을 그렇게 정한 이유는 대다수 사람들의 의식을 반영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혼란스럽다.

  글은 아무나 쓴다. 전문적인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은 책임감 있게 써야 하고 사회적 영향이나 독자를 고려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 책에서도 언급했듯이 작가가 되기 위한 글쓰기가 아닌 다음에야 어려워 할 것은 없다. 다만 마음 속에 부담으로부터 벗어나 그저 자판을 두드리거나 펜을 잡고 손을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모든 것들은 스스로 배워 나가고 조금씩 발전해 나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특히 일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 책에서 배울 것은 단 한가지 매일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길이요 진리다.

  책의 구성 또한 간단하다. 문학적인 글쓰기, 치료적인 글쓰기, 철학적인 글쓰기가 핵심 내용이다. 그러기 위한 준비 단계를 설명하고 매일 매일 써야할 주제나 고민할 내용을 제시한 후 다음 날로 넘어간다. 말하자면 혼자 글쓰기의 진수를 보여주는 책이다. 글을 쓴다는 것 자체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거나 막연한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글쓰기 자습서’ 정도로 이름을 붙혀 둘 만한 책이다.

  산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바라보고 무엇을 지향하며 어디서 행복을 느끼고 생의 참된 의미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모두 다른 답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것이 인생의 목표라는 이름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가치관이나 인생관이라는 제목으로 일기장에 적히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생각이 아니라 실천일 것이다. 누구나 안다. 하지만 쉽지 않다. 그 실천 방법 중의 하나가 글쓰기라고 두 사람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써라. 일단 써라. 그리고 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써라. 인생이 달라지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질 것이며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자아’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무엇을 쓰냐고 묻는 사람에게 권한다. 일기를 쓰라고.

  책에서 권하는 방법대로 매일 정해진 분량이나 내용을 따라 글쓰기를 하게 되면 많이 달라질 것이라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정해진 날짜별로 세 유형의 글쓰기를 대략 합해보면 250여일 정도가 소요될 것이다. 나머지 연습과 도움말을 참고하면서 혼자서 이 책을 완벽하게 실천하는 데 1년 정도의 계획을 잡으면 되겠다. 물론 철저하고 꼼꼼한, 학창시절 모범생으로 자부하던 사람의 경우다. 그렇지 않다면 대략 훑어보고 이런 방식으로 글쓰기가 진행되며 사고 과정에 유의하는 정도로 받아들이면 될 듯싶다. 글쓰기의 궁긍적인 목적과 방향만 정해진다면 사실 문제될 것이 별로 없다. 다만 생의 감동을 적어보거나 자신을 치유하고 철학적인 글쓰기를 통해 ‘자아’를 찾아보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책이기 때문에 ‘교양인이 되기 위한’이라는 다소 애매한 부제가 붙지 않았나 싶다.

  어쨌든 우리는 거의 매일 글을 쓴다. 문자를 쓰든, 이메일을 쓰든, 쪽지나 메모를 쓰든, 일기를 쓰든 아니면 창조적인 글을 쓰든 뭐든 쓴다. 하다못해 표현하지 않을 뿐 머릿속에라도 매일 쓴다. 쓴다는 행위는 사고 행위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 행위들을 통해 변화된 나의 모습과 내안의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 글쓰기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싶다. 물론 작가가 되기 위한 사람들이나 전문적인 글쓰기가 필요한 사람들은 또 다른 노력과 시도가 필요하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편안하게 시작하면 될 일이다. 특별한 비법은 없다. 이 책의 제목처럼 매일 쓰는 수밖에.


2005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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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무거운 이유 창비시선 252
맹문재 지음 / 창비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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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인은 책이 무거운 이유가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책이 나무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시험을 위해 알았을 뿐
고민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에 밑줄을 그었다 - '책이 무거운 이유'중에서



  맹문재의 시집 <책이 무거운 이유>의 표제작 중 일부다.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그곳에 숨어 있는 진실을 알지 못하는 곳에 혹은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 항상 시인들의 시선과 손길이 먼저 닿아 있다. 그래서 나는 시를 읽는지도 모른다. 맹문재의 표정은 너무 진지해서 오히려 화가 난다. 말간 얼굴로 왜 그러냐고 묻는 아이의 순진한 표정은 때로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하물며 그것이 어른의 것이라면 느낌이 어떨까? 물리적인 나이가 왜 의미가 없는 것인지 나는 살아가면서 느낀다.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어른이 있는가하면 노인의 눈으로 사람들을 쳐다보는 십대도 있다. 맹문재의 시선은 그것과는 사뭇 다르게 진지하다. 사람들이 애써 외면하고 싶은 현실과 눈감아버리고 싶은 일들을 들추어내고 쿡쿡 찔러본다. 그리고 묻는다. 아프냐고.

  그리고 그 애매한 실체에 대해 고민하고 괴로워하면서 울부짖지 않고 무심히 투덜댄다. 소시민적 비애와 생활에 대한 발견이 그래서 새롭게 다가온다. ‘억울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그것이 억울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시간이 만들어 준 나이테처럼 선명한 우리들 삶의 자국들이기 때문이다. 그가 지나온 80년대, 청년 시절에 대해 말하는 방식은 선동적이거나 운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거나 마음의 빚을 청산하기 위한 방식이 아니다. 그것이 맹문재 시의 특징이다. 시대를 벗어나 걸어가고 있는 중년 남성의 뒷모습은 패배자의 것이 아니라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돌아보며 미래를 얘기한다. 그가 얘기하는 미래는 어떤 것인지 각자 찾아볼 일이다.


1980년대에 대하여

나는 그를 원망한다
그 때문에 노조원인 나는 안정된 직장을 잃었고
첫사랑을 빼앗겼다
거대한 여당에 표를 찍을 수 없었고
신물 사설에 밑줄 긋지 못했다
더 억울한 것은
종달새 소리와 흰나비를 쫓던 순진한 가슴에
적을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분명 성실한 회사원이 되었을 것이다
적금 액수를 따지고
부서장의 성격에 관심을 갖고
승진과 아파트 가격에 신경 썼을 것이다
틈나는 대로 주식에 투자하고
주말이면 낚싯대를 챙기고 친목 바둑을 두고
직장간 친선 축구대회에 나가 공도 찼을 것이다

그 모든 기회를 잃어버리고
나는 불만만 많은 소시민이 되었다
산다는 것이 별것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분배와 정의와 환경오염을 괜히 문제 삼는다
술을 마시며 이데올로기까지 따지는
추상적인 인간이 된 것이다

부정의 가치를 운명으로 받아들인 나는
억울하지만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지만 시선을 멀리하면 결코 깨끗하지 못하다. 시원한 바람이 귓불을 간질이는 가을밤 공원에 산책을 나가보라. 어둠의 저편에서 우리를 응시하는 보이지 않는 시선들이 우리를 가두고 있다. 내 안에 나를 들여다보듯 우리가 서로를 들여다보고 있다. 아니 들여다 보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하다. 우리는 왜 시를 읽는가. 대답없는 시대의 메아리를 위해, 아무것도 ‘없는’ 시집에서 무얼 찾는가. 그래서 이제 아무도(?) 시를 읽으려 하지 않는 것일까. 그래서 시인인 이렇게 답한다.


시집읽기

누구도 믿지 않는다면 방문 닫아걸고 읽었다
시집 속에 등불은 없었다
늙은 신도가 천국을 외치는 지하철역에서 읽었다
시집 속에 일할 자리는 없었다
전투경찰이 어디론가 바쁘게 몰려가는 거리에서 읽었다
시집 속에 조용한 공원은 없었다
맹인 부부가 뽕짝을 부르는 육교 위에서 읽었다
시집 속에 향수는 없었다
재건축 아파트 값이 홍수처럼 넘치는 동네에서 읽었다
시집 속에 따뜻한 방은 없었다
사채업자가 채무자를 두들겨 패는 골목에서 읽었다
시집 속에 신용대출은 없었다
포주가 처녀들의 자궁을 들어내는 산부인과에서 읽었다
시집 속에 어머니는 없었다
가두리 양식장을 허가하며 표를 긁어모으는 군청에서 읽었다
시집 속에 수질 오염은 없었다
친일문학상 후보에 오른 것을 자랑하는 시인 앞에서 읽었다
시집 속에 지식인은 없었다
마흔의 나이에 낙향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읽었다
시집 속에 내가 받을 이자는 없었다
불합격 통지서를 찢듯 쓰린 배를 움켜쥐고 읽었다
시집 속에 배고픈 내가 있었다


 뭐 별로 대단한 것은 없다. 당연한 말이다. 책 속에, 시집에 뭐가 있겠는가. 삶의 ‘진정성’이라는 모호한 대상을 들여다 보고 싶은 욕망만 제거할 수 있다면 그리 궁금할 것도 없는 세상이 아닌가 말이다. ‘그래도 다시 더 한번,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라고 말한 소월은 뭐가 그리웠을까. 인생의 행복은, 삶에 대한 사랑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다.


2005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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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 생각의나무 우리소설 10
윤대녕 지음 / 생각의나무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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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가 아니라 소설을 읽는 동안 젖어 있는 것은 특별한 현상이다. 물론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윤대녕의 소설은 사건 중심의 재미나 흥미진진한 스토리로 독자를 책 속에 묻어 버리는 힘을 빼고 있다. 스스로의 선택이든 그의 소설의 특징이든 분명한 것은 윤대녕 특유의 문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선명하면서도 평범한 진술을 통해 감정을 배제한 채 낮은 목소리로 자분자분 내면의 이야기들을 털어놓는 그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스무살을 갓 넘겼을 때 윤대녕이 등단했고 그의 소설의 특징은 이십대의 화두처럼 뜨거웠다. 물론 개인적 만남과 느낌과 공감은 문학 안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를 감안하더라도 내게는 그렇게 특별한 만남으로 기억된다. <은어 낚시 통신>이나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는 한 작가를 ‘존재의 시원(始原)’을 추구하는 작가라는 다소 모호한 이름으로 규정짓기에 충분한 듯 보였다. 그만큼 그의 소설은 일상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듯 했다. 인물들의 특징과 나이, 성장배경이나 직업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으니 당연히 개연성과도 거리가 멀어질 우려가 있었지만 많은 독자들은 그에게 열광했다.

  근작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는 제주도에 머무는 동안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한 소설이다. 그 과거는 물론 작가의 과거이며 구체적으로 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는 청년 시절에 대한 마감 작업으로 보인다. ‘어쩌면 돌아보고 싶지 않은 것을 돌아보는 일이야말로 소설의 몫인지도 모르겠다.’는 그의 말처럼 이 소설은 윤대녕에게 좀 더 특별한 의미의 전환적 작품이 될거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그런 생각을 하자 다음 소설에 대한 변화와 기대가 더 커진다.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생의 어느 한 나절을 정리하는 의미를 지닌 소설은 많이 아프다.

  “고독한 자들은 말이 없지만 외로운 사람들은 대개 말이 많은 편이죠” - P. 132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외로움은 소설에서 그리 특별한 주제가 아니다. 아니 문학에서 가장 흔한 대상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어떤 식으로 보여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자칫 감상에 젖어 허우적거리거나 공감할 수 없는 개인적 고백으로 지루한 하품을 유도하기도 한다.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무엇보다도 보여주기나 말하기의 차원을 넘어서는 여백의 울림을 만들어내는 일은 정말 어려워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윤대녕은 그 울림을 만들어 낼 줄 아는 작가다. 그래서 그의 소설에 젖는다.

  분량에 비해 소설의 내용과 구조는 단순하다. 소설가 영빈은 성수대교 붕괴현장을 같이 목격한 해연과 9년 만에 같은 아파트 주민으로 다시 만난다. 가볍게 키스하는 정도의 사이인 그들은 자주 다니던 ‘히데코’라는 카페에서 재일교포 유미코를 만난다. 어머니의 부정으로 이혼하고 바다에서 낚시를 하다 휩쓸려간 아버지를 둔 해연과 고등학교 시절 사랑했던 남자가 등에 자신의 이름을 문신으로 남겨 놓은 채 자살한 사건을 경험한 유미코는 나름의 상처가 죽음으로 기인한다. 프락치로 몰려 자살한 형을 둔 영빈은 병원에서 노년을 쓸쓸하게 보내고 계신 아버지를 가끔 찾아뵙는 소설가로 등장한다. 사기사와 메구무라는 실존 작가는 유미코의 고교 동창으로 등장하는데 영빈과 우연히 신촌에서 만난 적이 있지만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제주도로 내려간 영빈은 그곳에서 실존 인물인 사진 작가 김영갑을 가끔 만나며 낚시에 몰두한다. 결국 일본으로 돌아간 유미코도 자살하고 제주로 내려온 날 해연은 영빈의 아이를 갖게 된다. 영빈의 자신의 몸에서 호랑이가 빠져 나가는 것을 목격하고 제주를 떠나 서울로 가기전 그녀가 살았던 통영을 찾아 바다를 내려다 본다. 그녀의 이름 해연은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으로 바다제비[海燕]라는 뜻이다.

  소설의 큰 축은 세 인물이 겪는 내면적 갈등과 그 부딪힘으로 요약된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을까마는 세 사람이 가슴에 응어리진 아픔들은 모두 ‘죽음’에서 비롯된다. 그것이 가족이든 연인이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트라우마로 남겨지는지 살아있는 사람들간의 관계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어한다. 자의적 해석일지 모르나 이 상처들은 결국 타자에 의한 치료는 불가능하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결국 자신의 생채기는 아물때까지 기다려서도 안되지만 타인의 도움으로 그것을 치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스스로 받은 상처는 스스로 치유하라는 전언. 그것이 이 소설의 의미로 읽힌다. 물론 일상에서 벌어지는 소한 일들을 모두 수학 공식처럼 대입해서 풀어 낼 수 있는 생의 법칙은 없다. 다만 삶의 방향이나 생의 태도 자체를 수정하게 만드는, 도저히 그 트라우마로 인해 바꿀 수 없는 개인들의 내면에 숨어 있는호랑이들을 찾아 나선 소설가의 노력을 담담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만약 그것이 날카로운 비명이거나 냉소적인 시선이었다면 오히려 부담스러웠을 것이지만 윤대녕은 마치 타인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듯 인물들의 목소리에 공허한 울림을 부여한다. 그래서 더 큰 울림이 전해지는 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은 설명도 변명도 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 차 있다. - P. 216

  이 소설에서 또 하나의 재미는 문장이다. 재기 발랄한 촌철 살인의 문장이 아니라 평범한 진술로 보이는 수많은 금언들이 숨어 있다. 나는 이 많은 ‘숨은 그림 찾기’ 놀이에 몰입했다. 행간을 건너뛰는 날카로운 문제의식이 아니라 문장과 문장 사이를 오가는 가벼움과 나른함, 일상적 진술들이 인물들 사이의 대화라기 보다는 하늘에 대해 내뱉는 공허한 울림처럼 들린다. 결국 영빈은 자신의 호랑이를 발견했고, 그 호랑이를 잡는 것이 아니라 호랑이를 풀어 주는 것으로 자신과 화해한다. 그것이 영빈의 마지막 출조이며 제주에서 보낸 한 시절을 마감하는 순간이 된다. 영빈의 속내를 말해주는 윤대녕의 목소리가 통증없는 메마른 목소리로 울려 오는 것은 나만의 느낌이었을까?

  영빈은 낚시대를 접고 남은 소주를 마시며 동이 터오기를 기다렸다. 그와 더불어 지나온 시간들을 무연히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제 자신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남아 있는 것일까. - P. 422


2005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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