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계 살림지식총서 85
강유원 지음 / 살림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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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사람들이 행하고 있다 하여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며, 압도적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소수의 책 읽는 이들이 벌이는 일종의 음모임에 틀림없다. (본몬 4페이지)

  강유원의 <책과 세계>는 이렇게 도발적인 선언으로 시작된다. 상식과 타성에 젖어버린 책에 대한 생각들을 일순간 뒤집어버리는 한 마디가 통렬하다.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전인류의 40%가 손으로 음식을 먹는다. 이들을 미개하다고 할 수는 없다. 옳다 그르다의 문제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책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읽어도 읽어도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을 수도 있다. 대지와 호흡하고 하늘을 우러르며 두 뺨에 스치는 바람이 일러준대로 살아가는 삶이 더 행복하거나 인간적(?)일 수 있다.

  지식을 위한 방편이라고 하기엔 시대가 너무 달라졌고 빠르게 변하고 있다. 이 시대에도 여전히 나무를 베고 종이를 만들어 책을 찍어내는 일이 유효한가? 저자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고전들을 들쑤셔본다. 국가론, 갈리아 전기, 우정론, 신국, 신학대전, 군주론, 리바이어던, 백과전서를 거쳐 국부론, 종의 기원까지 인간과 세계를 변화시킨 고전의 의미를 재해석해보는 것으로 대부분의 내용을 할애하고 있다.

  책이 가지는 매체로의 속성 또한 다양하다. 진흙판에서 죽간, 최근의 e-book에 이르기까지 매체 자체가 가지는 역할과 의미도 다양하게 해석된다. 인간을 중심으로 결국 책은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인간과 세계의 관계 속에서 책은 나름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며 인류가 발전(?)을 거듭하며 문명을 이룩해 오는 과정에서 책의 역할과 의미를 강조하며 그래서 ‘책’은 중요한 것이다는 교훈적 결론과는 거리가 멀다. 이를테면 책의 재조명 작업 정도로 불릴 수 있겠다.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라고 평했던 어느 역사의 말을 되새겨본다. 15세기 이후 축적된 인류의 이성과 문화의 발달이 현재의 관점에서도 지속 가능한 일인가? 고전을 통해 자아를 들여다보는 일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이며, 무언가 세계를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게 하는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사실일 수도 있다고 저자에게 설득 당했다.

  물론 수많은 반론과 각론이 있을 수 있겠지만, 책과 세계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탐색 없이 책읽기에 몰두하거나 아이들에게 책 읽히기에 목매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다시 한번 살펴야 한다는 의미 정도는 읽어낼 수 있다. 아울러 단 한권의 책, 고전이 인류에게 미친 영향과 의미들을 다시 한번 새겨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현재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를 지닌 실용적 목적이 아니라 역사와 시대를 들여다 볼 수 있고 그것을 통해 현재를 조망해 볼 수 있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현재에는 현재의 고전이 만들어지고 있을 것이다. 넓게 보고 깊이 읽는 안목이 절실히 필요해진다. 얼마나 더 들여다보아야 안개 속에서 어렴풋하게나마 길이 보일런지......

  인간을 움직이는 힘은 궁극적으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공포이고, 다른 하나는 탐욕이다. 공포는 자신의 몸에 가해지는 고통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요, 탐욕은 자신의 몸에 가해지는 즐거움에 의해 생겨난다. (본문 11페이지)

  저자의 말처럼 인간을 움직이는 두 가지 힘 중에 나는 늘 탐욕을 탐한다. 누구나 그런가? 고통을 즐기고 즐거움을 음미하는 듯한 태도는 가식이다. 고통스러운가? 아니면 즐거운가? 어느 쪽인가? 그것이 직접적으로 몸에 가해지는 일들이라면 더욱 본능에 충실해진다. 책과 무관한 인용일 수 있으나 생각해보면 온몸이 떨리는 즐거움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은 개인마다 다르지 않은가. 오늘도 공포를 통한 고통이 아니라 탐욕을 통해 즐거움을 얻기 위해 몸부림치는 나를 포함한 전 인류를 위해 건배할 일이다.


2005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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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건강법 - 개정판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민정 옮김 / 문학세계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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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톡한 소설을 만났다. 밀란 쿤데라 이후 몰입할만한 외국 작가를 만나지 못했다. 번역과 정서의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휘와 문장에서 느껴지는 섬세한 느낌들이 주는 문체가 내용과 어울려 전체로 다가와야 하지만 쉽지 않다.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를 일부러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겉도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대부분의 외국 소설은 나에게 그렇게 읽힌다. 번역시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아멜리 노통브의 <살인자의 건강법>은 그런대로 좋은 평가를 내릴만하다.

  우선 내용 자체가 주는 신선함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를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작가의 문학에 대한 전반적인 선언적 의미로 읽힌다. 주인공인 타슈의 입을 통해 문학에서 오용되거나 독자들이 읽어내고 싶어 하는 비유와 상징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냉소가 시원하다. 공간의 이동도 시간의 흐름도 이 소설에서는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인터뷰를 통한 기자와 작가 사이의 대화로만 구성되어 있다. 장편소설에서 신경써야할 다양한 인물이나 복잡한 갈등도 간접적인 복선과 암시도 다 필요 없다. 그저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서만 소설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기자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타슈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분석을 통해 그의 전 생애를 밝혀낸다. 유년시절의 지독한 사랑과 추억 때문에 세상과 단절한 채 살아가는 추악한 외모를 가진 늙인이의 진실을 밝혀낸다. 그러나 기자가 밝혀내는 결국 늙은 대가의 숨겨진 삶이 아니라 진정한 ‘문학’ 속에 가려진 진실 찾기 게임이다. 문학적 진실이란 과연 무엇인가? 현실과 문학의 모호한 경계위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즐기는 듯한 이 소설은 작가 스스로가 밝히는 자신의 문학론으로 읽힌다.

  소설은 결국 허위적 진실이다. 허구라는 말도, 진실이라는 말도 모두 맞거나 모두 틀린다. 말장난이 아니다. 소설은 양면성을 지닌 두 얼굴의 사나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비평가나 독자들의 상상력은 자유지만 해석은 위험하다. 현실보다 진지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소설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는 것처럼 소설의 의미 자체를 탐색하는 듯한 이런 종류의 소설 또한 쉽지 않다.

  또 하나의 축은 ‘사랑’이다. 작가 타슈의 어린 시절 절대 사랑이었던 사촌 레오폴딘. 그 사랑은 완벽했다. 탸슈의 입장에서. 성장하기 이전, 그러니까 2차 성징이 드러나기 이전의 상태로 가장 순수한 모습만을 사랑했고 추억하는 현실 속의 환상이다. 그런 환상을 현실에서 지켜내는 방법은 일탈 행위 뿐이다. 살인을 통해 영원한 기억 속에 묻어버린 타슈는 그 후 전 생애를 글쓰기 속에 묻혀 산다. 다소 비현실적인 내용이지만 남녀간의 진부한 사랑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사랑 이전의 사랑을 확인한 후 작가가 보여줄 사랑 얘기가 궁금하다.

  인류의 삶은 지속될 것이고 새로운 작가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나타날 것이다. 그들이 내놓는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 나름의 진실은 각각의 목소리를 낸다. 훌륭하고 위대한 문학으로 남겨질 작품은 결국 보편성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물론 대중성과는 다른 문제이다. 특별한 의미와 내용을 담고 색다른 방식으로 다가오는 그녀의 소설이 매력적인 이유는 단순한 발랄함이나 재치만으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기자와 타슈가 보여주는 대화의 특성은 간결하고 직설적이다. 이전의 다른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타슈의 말들은 현란하고 자유롭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요설들은 작가의 언어에 대한 화려한 요리 솜씨를 보여준다.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능력은 작가로서 가지는 첫 번째 장점이다. 촌철살인의 은유와 풍자, 비틀고 후려치는 어법을 통해 ‘문학’ 자체에 대한 작가의 방법론을 확인할 수 있다.

  다르다는 것은 미덕이다. 특이한 내용과 색다른 방식으로, 무엇보다도 <살인자의 건강법>이라는 주목할(?) 만한 제목으로 일단 독자들에게 주목받고 많은 소설들을 쏟아내고 있는 작가의 다른 작품 몇 편을 더 읽어봐야겠다. 그래야 그녀에 대한 평가는 그 이후의 일이겠다.

 


2005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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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길 문학과지성 시인선 305
윤중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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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첫 시집 <본동에 내리는 비>는 88년간에 출간되었고 이듬해에 그를 만났다. 물론 시로 그를 처음 만났다. 문단에 화려하게 데뷔한 시인도 아니고 주목받는 작품을 쏟아낸 적도 없다. 그의 첫 시집 마지막 시다.

죽지 않기 위하여

춥다.
곱은 손을 비비며 아침을 맞는다
성에 낀 유리창에 손톱으로
‘나는 오늘 아침에도 숨을 쉰다’라고 쓴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죽지 않기 위하여
몇 번 부대끼며 거리로 나서면
한 번 더 우스워지는 꿈.
생각할 줄 안다는 가장 빛나는 선물로
우리는 이만큼 슬펐잖은가

삶의 이유를 죽음에서만 찾아야 하는
우리들의
마른하늘을 위하여
마른기침과 변신을 필요로 하는
또 다른 나와 내일을 위하여
입김으로 곱은 손을 녹이며 쓴다
‘살아야지 살아야지’

  2005년 가을. 그의 유고 시집 <고향길>을 대하는 마음은 헛헛하다. 첫 시집의 마지막 구절이 아이러니 하게도 ‘살아야지 살아야지’였는데, 이제 그의 마지막 시집을 들고 있다. 가난한 농촌과 농민들의 삶을 살뜰하게 드러내고 도시의 척박함을 담아내던 시인은 꼭 반세기를 살고 세상을 떠났다. 몇 년전 돌아가신 이문구 선생님의 뒤를 따라.

나헌티는 책음감 있이 살라구 허시등만
- 이문구 슨상님께

비설거지할 참도 마다하고
곰새 내렸다, 히뜩
골안개만 피우고 사라지는
여우비
처럼, 황망하게 가셨네.
개갈 안 나는 세상이라구
비죽이 웃으시드니,
슨상님 혼자 손 털고 뒷짐 진대유?
세상은 여적 그 세상인디……

  ‘세상은 여적 그 세상인디’, 아직 할말이 많이 남았을텐데 윤중호 시인은 세상을 떠났다. 지금쯤 이문구 선생을 만나 못다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이제 둘이서 손 털고 뒷짐 지고 이 세상을 내려다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산다는 것이 때로 저 하늘의 구름만큼 덧없이 느껴질 때가 있다. 깊어 가는 가을을 배경으로 푸른 하늘을 우러러 깊은 숨을 쉴 때 마다 맡아지는 공기의 냄새. 살아있음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다만 먼 훗날 내 삶의 자세를 되돌아보며 후회를 남기지는 말아야 할텐데 싶다. 윤중호 시인의 명복을 빈다. 부디 편히 잠드소서.

돌아갈 곳을 알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세요.
모두 돌아갈 곳으로 돌아간다는 걸
왜 모르겠어요.
잠깐만요. 마지막 저
당재고개를 넘어가는 할머니
무덤 가는 길만 한 번 더 보구요.

이. 제. 됐. 습. 니. 다.

- 미완유고시 ‘가을’

 

 

 

2005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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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 세상을 뒤바꾼 위대한 심리실험 10장면
로렌 슬레이터 지음, 조증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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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나는 한겨레를 신뢰한다. 금요일자 북섹션 <18.0°>을 꼼꼼하게 읽고 소개되는 책이나 고전 중에 메모해서 읽어보게 된다. <과학 콘서트>의 저자 정재승의 리뷰를 읽고 로렌 슬레이터의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를 주문했다. 손꼽히는 좋은 책으로 남는다. 좋은 책이라는 판단 기준은 내게 몇가지 기준이 있다. 첫째, 새로운 앎의 세계를 얻었는가? 둘째, 익히 알던 사실들을 재해석하거나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는가? 셋째, 가슴이 미어지도록 감동을 받았는가? 넷째,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과 인생에 대한 통찰력을 얻었는가? 다섯째, 실천의지와 삶의 태도와 방법을 새롭게 했는가? 생각나는대로 적어보았지만 겹치는 부분도 있고 뭔가 빠진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대게 이중에 한가지 정도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책이라면 독서의 즐거움을 얻고 좋은 책을 만났다고 생각한다.

  <스키너의 심리 상자>는 교육심리학을 공부할 때 수박 겉핥기로 지나쳤던 이론들을 새롭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런 이론이 주는 시사점이나 일상 생활과 개인의 행동 또는 인간 관계의 상관성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이 책에는 ‘세상을 뒤바꾼 위대한 심리 실험 10장면’이라는 부제답게 충격적인 실험과 실제 사건들이 담겨 있다. ‘보상과 강화, 처벌과 소멸’이라는 행동주의를 낳은 스키너의 심리 상자 실험, 살인 장면을 목격하고도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은 38명의 증인들, 스탠리 밀그램의 충격기계를 통한 권위와 복종의 심리 분석 등 실로 놀라운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있다. 심리학이나 교육학에서 접했던 실험과 내용도 있지만 해리 할로의 철사 원숭이 실험을 통한 스킨십이 사랑에 미치는 영향, 엘리자베스 로프터스의 가짜 기억 이식 실험을 통한 인간 기억의 허구성 등의 이야기는 흥미롭기만 하다. 실제 생활에서 논란이 되고 의심을 품었던 일들을 심리 실험이나 과학의 잣대를 통해 이해하고자 했던 호기심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들이다.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어떤 집단의 내부에서 자기가 속한 집단을 바라보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눈물겹기만 하다. 그것도 인간만이 가진 특성일 것이다. 더구나 실험이나 약물, 과학적 증명방법으로 유의미한 결론들이 얻어지지 않는 심리 실험은 그것을 해석하는 방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원숭이나 동물 실험을 통해 증명되더라도 인간에게 적용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남는다. 물론 모니즈처럼 용감하게 세계 최초로 인간의 뇌에 드릴로 구멍을 뚫어 정신과 수술을 개발한 사람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의 정신과 심리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나 명확하게 이것이다라고 선언할 수 없다. 이 책을 읽다보며 마치 유물론과 관념론의 집요한 대립과 싸움으로 읽힐때도 있다. 같은 분야의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들끼리도 하나의 사건과 실험을 대하는 태도나 입장,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은 너무나 다양하다. 인간은 그만큼 복잡하고 불가해한 존재라는 반증일 것이다.

  엽기 살인과 침묵하는 38명의 방관자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는다.

  인간은 대열을 무너뜨리느니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존재라는 것. 생존보다 사회적 예절을 더 중시한다는 것을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너무나 상반된다. 매너는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욕정보다 강하고, 두려움보다 원초적이다. (본문 111페이지)

  페스팅거의 인지 부조화 이론에서는 “자신의 믿음과 일치하지 않는 행동에 관여한 보상으로 사소한 것을 받으면 받을수록 자신의 믿음을 바꿀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하고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라고 믿는다.”

인간 기억의 허구성을 증명한 로프스터 교수의 말을 재인용하면,

  “하나는 이야기 진실, 또 하나는 실제 벌어진 진실이지요. 우리는 실제 벌어진 진실의 앙상한 뼈대 위에 살과 근육을 덧붙여 우리 자신이 만든 이야기의 관념 속에 빠질 수 있습니다. 실제 진실이 사라지고 이야기 진실이 시작되는 곳에서 혼동이 생기는 것입니다.” (본문 247페이지)

  “때때로 진실은 언어를 거부할 정도로 포착하기 힘듭니다. 평범하지만 엄청난 의미를 담고 있는 상처를 제대로 표현해낼 단어를 찾지 못하기 때문에 명백한 줄거리로 그것을 대신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몸의 세포 하나하나까지 믿어 의심치 않는 이야기를 날조합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희생자라는 정체성?주니까요.” (본문 248페이지)

  어쩌면 과학이 인간에게 주는 혜택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만큼은 아직도 미지의 세계일 수 밖에 없다. 저자 로렌 슬레이터가 이 책을 쓴 이유도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하だ?노력일 뿐이다. 실험실에서 벌어진 때로는 끔찍하고 비윤리적인 실험들이나 실제로 벌어진 엽기적인 사건들을 분석하는 일들과 결과들에 대해 일반인들이 흥미로워 할 리가 없다. 저자는 심리 실험을 주도한 과학자들의 삶과 의식이 어떻게 실험에 반영되었는지 담아내려는 노력을 보인다. 일일이 그들을 만나서 인터뷰하고 가족들과 피실험자들까지 만나는 과정을 전해준다. 그래서 때때로 주관과 감정이 앞서고 이성과 감정은 위험한 줄타기를 한다. 저자 특유의 감상적 문체와 주관적 해석이 본질적인 문제를 고민하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게, 진지하고 깊이있게 생각하며 읽을 수 있는 문제와 사건 그리고 심리 실험들을 독자에게 전해주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찾고 싶었던 의미는 다음 말로 갈음할 수 있겠다.

  우리가 탈근대를 살고 있는지는 몰라도 탈인간이 될 수는 없다. 어떠한 과학 분야도 우리가 육체에서 벗어나게 해주지는 못한다. 결국 빛은 꺼지고 우리는 암흑 속으로 다시 들어가리라. (본문 296페이지)



2005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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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과 남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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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소적인 책읽기 스타일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열린 마음을 가지고 모든 책에서 저자와 대화를 나누며 감동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책에 대한 애증은 영원히 계속되겠지만 좋은 책에 대한 열망만큼은 쉽게 가시지도 않을 것같다. 그래서 더더욱 목마르고 갈증을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하드보일드 하드럭>으로 첨 만났다. 순전히 남미에 대한 관심 때문에 조금 다른 시각이나 특별한 애정으로 남미를 살펴 볼 수 있을까 싶어 그녀의 소설 <불륜과 남미>를 읽었다.

  책 뒤에 여행 일정표를 부록으로 실어 놓을만큼 그녀의 여행 경험이 철저하게 소설에 반영되어 있어 현실과 소설의 경계가 모호하다. 작가의 말에서 실제 여행 경험을 소설속에 녹여 낸 장면들도 발견된다. 여행하는 모든 인간들이 부럽다. 평생 세상을 떠돌며 책만 읽다 죽을 수 있는 자유를 사랑한다. 그래서 부럽다. 200여페이지의 짧은 분량속에 그림과 사진을 삽입해서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중심으로 한 남미에 대한 여행 욕구만 잔뜩 부풀려 놓는다. 그래, 가고 싶다.

  이 여행 에피소드 단편들은 7편을 묶었다. ‘전화, 마지막 날, 조그만 어둠, 플라타너스, 하치 하니, 해시계, 창밖’이 그것이다. 물론 제목처럼 불륜에서 오는 열정과 고뇌, 사랑에 대한 새로운 시도와 해석은 꿈도 꾸지 마라. 지루하고 나른한 일상처럼, 받아본 적도 없는 남미의 가을 햇살처럼 노근하게 온몸의 긴장을 풀어놓는 편안함과 여유가 오히려 독자를 긴장시킨다. 뭔가 있을 텐데 싶은 조바심도 생긴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다. 허무하다.

  이국적인 풍물과 분위기 낯선 곳에서의 상상과 추억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책이 될 수 있을까? 문체로 승부하기에도 내겐 너무 지루하게 느껴진다. 오감을 충족시키거나 이성의 뒤통수를 후려치거나! 어정쩡한 책을 골라내는 힘은 언제 생기려나.

  회색빛 하늘 만큼 우울한 날이다.



우울

어떤 형태로든
우울하다.

- 시 : 서정윤



2005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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