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탈리즘 - 개정증보판 현대사상신서 6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박홍규 옮김 / 교보문고(교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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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먹구름의 장막을 걷어내듯 시원스레 퍼붓는 소나기처럼 읽혔다. 책을 읽다가 눈물을 ‘흘려’ 본 기억은 거의 없다. 하지만 눈물이 날 뻔 했던 책들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참으로 오랜만에 책을 읽다가 눈물이 날 뻔했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읽다가…… 국민학교에 입학해서 지금까지 학교만 다녔다. 배우러 그리고 가르치러 뻔질나게 학교 교문을 드나들며 난 무엇을 배웠으며 무엇을 가르쳤나하는 자괴감에 눈물이 날 듯 했다. 그것은 개인적 차원의 삶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넘어 이 사회의 구조적 한계에 대한 원망과 분노의 표현이었다. ‘이데올로기의 종점은 실천이다’는 J. 네루의 언설로도 설명될 수 없는 내면의 고백이었고 삶에 대한 개인적 목표로도 설명될 수 없는 답답함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대변할 수 없고, 다른 누군가에 의해 대변되어야 한다.
    - 칼마르크스(Karl Marx) <루이 보나파르트 브루메어 18일>

  동양이라고 하는 것은 평생을 바쳐야 하는 사업이다.
    -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 <탱크레드>

  라는 명제로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시작된다. 사이드는 마르크스로 대표되는 학문과 영국의 수상이었던 디즈레일리로 대표되는 정치를 통해 지식과 권력 - 앎과 힘의 관련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두 가지의 인용이 이 책에서 비판되는 오리엔탈리즘의 두 가지 속성 - 인식과 실천을 대변하고 있다. 사이드가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대한 서양의 사고방식이자 지배방식’이다. 이것이 어떻게 미국과 유럽의 제국주의와 식민 정책에 영향을 끼쳤는가를 실증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의 발생, 발전, 전개라는 논리에 따라 3부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박홍규의 번역이기 때문에 더욱 빛난다. 저자인 사이드는 문학평론가이다. 팔레스타인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이주한 사이드는 카이로에 있는 빅토리아 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과 하버드에서 학위를 받는다. 그의 삶의 행로가 바로 이 책의 내용을 아우른다.

  사이드의 관심이 그의 생과 밀접한 관련을 보이는 것처럼 이 책에서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은 중동과 이슬람에 대한 서양의 사고방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7, 8세기부터 비롯된 ‘오리엔탈리즘’의 역사적 근원을 파헤치고 실증적 자료와 문헌들을 통해 그 허구적 성격을 사이드 특유의 해박한 지식과 번득이는 예지로 풀어내고 있는 책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은 역사서도 아니고 사회비평과 관련된 개설서도 물론 아니다. 그저 사이드가 제시하는 비판적 관점을 따라가며 인간의 성향과 속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까지 확인하면 되는 것이다. 누가 이에 대한 답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다만 이러한 현상들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못하고, 제대로 눈뜨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수많은 질문과 반성을 유도할 뿐이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취급되는 크로머의 <현대 이집트>라는 책은 일본에서 1911년에 번역되어 한국지배의 기본이 되었음은 주목할 만하다. 멀리 존재하는 그들만의 논의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리의 현실 속에 가시처럼 박혀, 치유되지 않은 생채기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현재에도 더욱 유효하다. 일본의 역사왜곡과 독도 문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등 숱한 현실적 문제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오리엔탈리즘’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은 관습화되어 생활과 사고방식 곳곳에 숨어 삶의 목표와 사유 방식 자체를 통제하고 변질시킨다.

  유럽에게 이슬람은 치료될 수 없는 정신적 외상(trauma)이었다. 17세기말까지 ‘오토만 제국의 위협’이 유럽의 주위를 둘러싸서 모든 기독교 문명에 대한 끝없는 위험을 표상했다. 곧 유럽 문명은 그러한 위협이나 전설도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도 미덕이나 악덕도 모두 병합하여, 스스로의 삶의 옷감 속에 짜넣어 흡수했다. (본문 117페이지)

  처음부터 논의의 초점이 명확하고 문학가로서 지성과 비판 정신으로 무장한 사이드의 이야기는 설득력 있게 전개된다. 한 권의 책에서 모든 것을 기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슬람 국가 이외의 지역이 논의에서 제외되었다고 해서 이 책의 내용이 편협하다고 볼 수도 없다. <오리엔탈리즘>은 지구상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종교인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대립과 갈등 측면에서 문헌학적 전개과정을 고찰하고 있으며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 자체가 어떤 식으로 동양인들에게 자리잡고 있는가하는 논의까지 이끌어내고 있다. 그래서 사이드는 다음과 같이 책을 맺고 있다.

  내가 독자들에게 이해를 바라는 것은, 오리엔탈리즘?대한 해답이 옥시덴탈리즘 곧 서양주의가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의 ‘동양인’은 자신이 이전에 동양인이었기 때문에 쉽게 - 너무나도 쉽게 - 자신이 만들어낸 새로운 ‘동양인’ - 곧 ‘서양인’ - 을 연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도, 아루런 거리낌도 없을 것이리라. 만일 오리엔탈리즘을 아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식이 유혹에 의해 타락한 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점이다. 설령 그것이 어떤 지식이든지 간에또는 어떤 곳, 어느 때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필경 과거 이상으로 지금이 그것을 생각하기에 적합할 것이다. (본문 570페이지)

  이후에 1995년판 후기가 이어지고 박홍규의 ‘옮기면서’라는 역자 후기가 붙어 책은 800페이지에 달한다. 흥미있는 것은 1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박홍규 교수의 ‘옮기면서’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개인적으로 이 책이 나에게 빛이 되는 이유는, 본문은 물론이려니와 박홍규의 적절한 역주, ‘옮기면서’에서 보여주는 냉소주의에 가까울 정도의 신랄한 우리 사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이다. 그것은 삐딱한 지성이 내지르는 허튼 소리가 아니며 덜떨어진 얼치기 교수의 사회 비판적 투정의 목소리는 더더욱 아닌 것이다. 우리 사회 곳곳에 숨어 있는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심각한 경고의 목소리로서 내 영혼을 울리고 갈고리처럼 살을 후벼 파는 자성의 목소리로 삶의 자세와 태도를 되돌아 보게 한다.

  번역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달으며 박홍규 번역의 증보판 <오리엔탈리즘>에 최고의 상찬을 아끼지 않는다. 오래 간직하고 두고 볼만한 좋은 책 한 권을 책꽂이에 더하는 기쁨은 덤으로 얻었다.


2005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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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기의 방법
유종호 지음 / 삶과꿈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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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시인의 숫자가 가장 많은 나라, 시집이 가장 많이 팔리는 나라, 노래와 음악을 즐겨 시가(詩歌)문학이 발달할 수 밖에 없는 전통과 환경을 가진 대한민국의 대표선수를 뽑는 것은 만만찮은 일이다. 유종호 선생은 한용운부터 신현림에 이르기까지 시대별로 50명의 한국시 대표선수와 대표시를 선별하여 독자들에게 <시 읽기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대표시 한 편을 소개하고 쉽고 간략한 해설을 덧붙이고 그 시인의 다른 작품 한두편을 더 소개하면서 시인의 특징과 내력을 간략하게 소개하여 시에 대한 흥미와 더불어 시 자체에 대한 호감과 정서적 반응을 훈련(?)시키는 잡지의 연재물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노교수의 수고와 세월이 묻어나는 새로운 이론서이거나 나름의 독특한 방향 제시를 기대하고 직접 책을 뒤적여 보지 않고 주문한 것은 개인적인 실수이다. 책을 주문한 목적과는 차이가 있으나 일반 독자에게 시를 소개하는 방법과 안목, 쉬우면서도 탄탄한 문장은 나무랄 데가 없다.

  다만 월간지에 연재되었던 글이라서 그런지, 앞부분과 뒷부분에 시에 대한 관점과 소개가 겹치고 있는 것이 흠이다. 또한 시에 대한 주관적 호감과 해설이 불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가장 나쁜 책이 될 것이다.

  “시는 이해(理解)되기 전에 전달(傳達)된다”는 T. S. Eliot의 말은 내가 시를 대하는 기본 태도이다. 해석과 분석은 어찌보면 남의 생각 들여다 보기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열린 시각의 확산이다. 특히 한 편의 시를 읽고 음미하며 감상하고 내것으로 소화하는데 설명과 방법이 있다는 것에 나는 반대 입장이다. 물론 시는 어렵고 딱딱한 것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시를 싫어하거나 거부감을 느끼는 독자를 염두에 두고 소개된 ‘시 읽기의 방법’이겠지만 지나친 해설은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

  이 책은 그런면에서 나름대로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우리 시문학의 대가들을 골고루 다루고 있으며, 그들 시에 대한 설명이 지나치게 주관적이거나 분석적 설명을 지양하고 있어 성공적이다. 반면 앞서 말한대로 한 편의 시든 그 시인의 다른 시이든 하나의 관점과 목표를 가지고 시를 대할 수 있는 위험 요소들을 독자들에게 심어 줄 수 있다는 측면에서 실패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그래도 시를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데 일조할 수 있다면 좋은 책이 될 것이다. 생활이 힘겹고 팍팍할 때 메마른 가슴을 적셔주는 혹은 촌철살인의 한마디로 의표를 찔러주는 다양한 시들을 찾아 읽는 재미는 문학의 다른 장르에서 얻을 수 없는 기쁨임에 틀림없다. 소개된 50편의 시 중에서 찾아낸 내가 공감하고 재밌게 있었던 시 한 편은 다음과 같다.

 


      오늘의 노래 - 故 이균영 선생께

  심야에 일차선을 달리지 않겠습니다.
  남은 날들을 믿지 않겠습니다
  이제부터 할 일은, 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건강한 내일을 위한다는 핑계로는
  담배와 술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헤어질 때는 항상
  다시 보지 못할 경우에 대비하겠습니다

  아무에게나 속을 보이지 않겠습니다
  심야에 초대를 기다리지 않겠습니다
  신도시에서는 술친구를 만들지 않겠습니다
  여자의 몸을 사랑하고 싱싱한 욕망을 숭상하겠습니다
  건강한 편견을 갖겠습니다
  아니꼬운 놈들에게 개새끼, 라고 바로 지금 말하겠습니다
  완전과 완성을 꿈꾸지 않겠습니다
  그리하여 늙어가는 것을 마음 아파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오늘 살아 있음을 대견해하겠습니다
  어둡고 차가운 곳에서 견디기를 더 연습하겠습니다
  울지 않겠습니다

                                        - 시 : 이희중




2005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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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속 여행 쥘 베른 걸작선 (쥘 베른 컬렉션) 1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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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장르가 어차피 허구의 세계라면 인간의 상상력을 극대화시켜주는 내용이 가장 소설다운 것은 아닐까? 그런 면에서 쥘 베른의 소설들은 시대를 앞서고 있다. 1828년 프랑스 항구도시 낭트에서 태어나 1905년에 사망할 때까지 쥘 베른은 끊임없이 현실밖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도전과 상상력을 표현해 냈다.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이제 고전이 되어버렸고, <해저 2만리>와 <달나라 탐험>은 CF의 카피가 되어 작가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진 경우이다. 과학에서 ‘문학적 상상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증명하는 실례로서 그의 소설은 자주 인용된다. 하지만 그의 소설을 단순히 SF 과학소설로만 볼 수는 없다.

  쥘 베른 컬렉션 첫 번째 작품으로 열림원에서 번역한 <지구 속 여행>은 재미있다. 다시 한번 번역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신춘문예에 관심이 있었던 고교시절 <이상의 날개>라는 작품으로 등단한 김석희의 소설을 꼼꼼히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이제 그는 전문 번역가로서 이름만 보고, 믿고 고를 수 있는 번역서들을 수없이 쏟아내고 있다. 150여년 전 작가의 상상력은 지금도 나를 즐겁게 한다. 지구의 중심으로 떠나는 황당(?)한 여행이 아이들에게만 흥미를 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쁜 일상과 고정관념에 젖어 있는 이 시대 어른들에게 잠시나마 휴식과 여유를 즐기게 할 것이다.

  ‘1863년 5월 24일 일요일’이라는 특정한 시간으로 소설을 시작한 것은 내용의 신뢰감을 주기 위한 좋은 방법으로 보인다. 19세기 중반, 종교와 과학은 이미 대립을 넘어 주도권을 완전히 과학이 잡게 된 시기였다. 쥘 베른은 당시의 발달된 과학 지식을 총 동원하여 개연성 있는 허구의 세계를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생물학과 지질학을 비롯하여 온갖 과학적 상식과 당시로서는 최첨단 장비들을 동원하여 지구 속 탐험을 떠나는 주인공들에게 독자들은 신뢰를 보일 수 밖에 없다. 여로형 구성법의 전형인 이 소설은 인간의 상상 이외에는 접근할 수 없는 지구 중심으로 떠나는 여행을 보여준다. 주인공 리덴 브로크 교수와 그의 조카, 그리고 충직한 한스는 완벽한 3인조 여행단이 된다. 나레이터는 조카인 나의 시점이다. 물론 관찰자의 역할만 담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도적인 역할에서 한발 빗겨선 모습에서 서술되고 있기 때문에 상식적인 독자들에게 가깝고 그것이 이 소설을 읽는 재미를 더한다.

  소설의 시작은 추리 소설처럼 시작된다. 룬 문자로 구성된 양피지 한 장이 고문서 속에서 발견되고 그 암호문을 해독하는 것으로 여행은 시작된다. 그런데 이 암호문의 비밀이 재밌있다.

  근대의 과학자들도 종종 자신의 발견을 애너그램으로 감춰두곤 했다. 왜? 한편으로는 종교적 검열을 피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가 한 발견을 오랫동안 자기 혼자 간직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당시는 경쟁적으로 발견이 이루어지던 시대. 나중에 발견의 우선권을 주장하려면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겨야 했다. 공개를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는 상황. 감추면서 드러내는 애너그램의 이중성은 이 고민을 간단히 해결했다. -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진중권, 휴머니스트, p188>

  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애너그램으로 감추어진 문서는 아르네 사크누셈이라는 학자의 암호문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단으로 박해를 받았고, 그의 저술은 1573년 코펜하게에서 모조리 불태워졌다. 그래서 그의 책은 아이슬란드만이 아니라 세계 어디에도 없다. 이 양피지 한 장이 그의 문서 전부인 셈이다. 암호문에서 힌트를 얻은 리넨브로크 교수는 조카를 데리고 ‘지구 속 여행’을 떠나게 된다.

  여행을 준비하고 땅 속으로 들어가기 전의 준비과정이 소설의 3분의 1쯤 된다. 구성이 치밀하지 못하고 긴장감이 결여될 수 있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이 여행을 따라가다 보면 잊고 살았던 유년의 추억과 상상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
 
  ‘인디애나 존스’로 대표되는 헐리우드의 환타지 모험 영화들은 모두 쥘 베른에게 빚지고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동화속 꿈의 세계를 꿈꾸며 현실이 아닌 허공에 발딛고 하늘을 바라보는 일은 모두에게 필요한 삶의 에너지가 아닐까 싶다. 그 꿈들이 우리에게 넉넉하고 여유있는 마음을 나눠주다면 왜 거부하겠는가. 다음에는 우주로 여행을 꿈꿔봐야겠다.


2005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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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여관
임철우 지음 / 한겨레출판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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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다른 짐승하는 구별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정교한 언어와 불의 사용, 혹은 웃음의 能否에 따라서 구별하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뚜렷한 특징은 생존과 무관하게 동족을 살해하는 행위가 아닐까하고 나는 생각해본다. 동물적 본능을 넘어서는 그 치욕스런 인간의 魔性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일 것이다.

  임철우의 장편소설 <백년여관>은 인간이 아닌 악마들에게 상처받은 인간들의 이야기이다. 제목을 보고 문득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을 떠올랐으나 연결되지 않고 여름 호러물로 제작되어도 좋을 만큼 참혹하다. 이 소설은 북망산자락 해가 들지 않는 습지의 축축하고 끈적한 이끼처럼 온몸을 휘감는다. 이틀동안 온 몸이 근질거리고 신경이 날카로워질만큼 가슴이 시렸다. 2003년 이청준의 <신화를 삼킨 섬>이 보여준 에둘러 말하기 방식으로는 같은 사건에 대한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다.

  제목에서 암시하는 백년은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 100년을 의미할 것이다. 제주도 4․3, 6․25와, 베트남 참전, 5․18로 이어지는 가장 비극적인 사건들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아픈 기억들을 토해낸다. “섬이 하나 있다. 그림자의 섬. 영도(影島).”의 백년여관에 시애틀에 사는 재미교포 김요안이 찾아오고 소설가 이진우가 우연한 동행이 되어 찾아든다. 이 여관을 중심으로 복수와 미자, 문태, 신지, 금주, 함흥댁, 순옥, 은희, 조천댁 등의 인물들이 견뎌낸 시간들이 우리들 삶의 일부이며 현재의 기억이다. 살아 남은 이들 모두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며 죽은 영혼들 또한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억울하게 죽어 구천을 떠도는 죽은 영혼들보다 지독한 트라우마(trauma).

  외상후 스트레스장애 [外傷後-障碍,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 충격 후 스트레스장애·외상성 스트레스장애라고도 한다. 전쟁, 천재지변, 화재, 신체적 폭행, 강간, 자동차·비행기·기차 등에 의한 사고에 의해 발생한다. 생명을 위협하는 신체적·정신적 충격을 경험한 후 나타나는 전신적 질병이다.
  증세는 개인에 따라 충격 후에 나타나거나 수일에서 수년이 지난 후에 나타날 수도 있다. 급성의 경우 비교적 예후가 좋지만 만성의 경우 후유증이 심해서 환자의 30% 정도만 회복되고, 40% 정도는 가벼운 증세, 나머지는 중등도의 증세와 함께 사회적 복귀가 어려운 상태가 된다.
  증세는 크게 과민반응, 충격의 재경험, 감정회피 또는 마비로 나눌 수 있다. 과민반응의 환자는 늘 불안스러워 하고, 주위를 경계하며,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증세를 보인다. 충격을 다시 경험하는 환자의 경우에는 사건 당시와 같은 강도로 느끼는 기억, 꿈, 환각이 재연될 수 있다. 감정회피 또는 마비를 나타내는 환자는 충격이 일어났을 때의 감정·생각·상황 등의 기억을 피하려고 노력하며, 정상적인 감정반응은 소실된다.

  임철우의 소설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심리학적 기제에 대한 설명이다. 김소진의 소설 <자전거 도둑>에서 볼 수 있는 개인의 정신적 외상이 아닌 우리 민족의 치유할 수 없는 트라우마를 임철우는 독자들에게 집요하게 되묻고 있다. 외면하고 싶거나 잊고 싶었던 기억의 촉수들이 살아나 더할 수 없는 가학적 쾌감을 느끼도록 할 목적이 아니라면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망각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 후기에서 “한 인간 존재의 죽음은 육신의 호흡이 멎음으로써가 아니라, 그를 기억하는 지상의 맨 마지막 인간이 사라지는 순간에야 비로소 완성되는 거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인권과 평등이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에 대한 부정은 인간 존재에 대한 부정이며 야만적 행위의 본질이다. 인류가 저질렀던 세계사의 만행들을 새삼 뒤적거릴 필요도 없다. 현재형이면서도 애써 외면하는 우리의 문제에 대해 작가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니다. 당신이 말하는 해묵은 역사나 지나간 사건 따위를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난 단지 사람을, 사람들을 기억하고 싶을 뿐이다. 죽은 자와 아직 살아 있는 자. 그들의 이름 없는 숱한 시간들을, 사랑과 슬픔과 고통의 순간들을 나는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기억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 작가 후기



2005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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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발견 - 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고명섭 지음 / 그린비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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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고 지식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은 누구나 한번쯤 하게 된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변화를 뜻하기 전에 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며 자기 탐구와 고백의 과정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독서 행위 자체가 갖는 의미는 없다. 한낱 지적 허영과 자기 만족을 위한 마스터베이션이 아니라면 철저하고 내밀한 자신와의 만남이며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의 변화이며, 또한 삶의 태도를 바꿔 행동하는 양심으로 거듭나기 위한 작은 몸부림이 내겐 독서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작은 곳으로부터의 혁명과 발전이 전체를 이룰 것이고, 전체가 부분의 합이 될 수 없을지언정 그 부분의 변화가 주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한겨레신문사의 고명섭 기자가 펴낸 <지식의 발견>이라는 책은 제목이 거부감을 일으켜 일단 손맛이 까칠하다. ‘무엇이 지식이며 그것은 발견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그가 발견한 지식들을 기웃거리기 시작한다. 이 책은 단순한 서평 모음집이라고 하기엔 울림이 크다.

  그 울림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구성원들의 삶과 직간접적으로 부딪히고 있는 문제들을 점검하고 반성하며 고민하게 하는 화두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개별 책들에 대한 서평을 넘어 통시적, 공시적 관점에서 그 의미망들을 구축하고 있다.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실들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다고 해서 거대 담론에 대한 회의적 반응을 보이는 것도 아니다. 저자 나름의 방식으로 문제작들을 풀어 내어 다시 묶어내는 방식으로 텍스트 상호간의 공통적 관심사나 차이점들을 드러내어 일관성 있게 현재의 관점들을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다.

  물론 모든 문제에 대해 다양한 시각을 가지고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면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권의 책에서 백과전서식 지식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면 오히려 참신한 느낌으로 읽을 수 있다. 상식과 일반론에서 벗어나 비판적이고 회의적 시각들을 주로 소개하는 것은 타성과 관성에 젖은 개념들에 대한 반성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 1부 민족주의, 국가주의 그리고 친일에서는 ‘민족주의, 국가주의, 국민주의’로 이름을 바꿔가며 해석돼 왔던 ‘nationalism’을 화두로 삼아 서중석의 <배반당한 한국민족주의>부터 꼼꼼하게 한국 사회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담론들을 정리하고 있다. 김동춘의 논의가 가세하여 진지한 자세로 반성적 관점을 제시한다. 박노자의 ‘고명섭의 민족주의론에 질문한다’는 글을 통해 자신의 글을 되짚어보는 기회를 동시에 제공하고 있으며, 한국 문단의 권력자로 군림해왔던 조연현에 대한 글과 친일문학에 대한 글은 <인물과 사상> 20호 ‘한국 문학의 위선과 기만’을 떠올리게 하는 글들이었다.

  제 2부 근대성/계몽의 이해와 넘어서기에서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을 재해석한 권용선의 책을 시작으로 파우스트와 니체의 사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정리한 책들을 소개하면서 근대의 개념을 탐구하고 있다. 푸른 눈의 탁월한 한국학자 박노자의 <하얀 가면의 제국>은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을 넘어서 다시 한번 우리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쳐 준다. 이어 김용옥의 <독기학설>과 신영복의 <강의>를 통해 주체적인 근대의 개념을 소개하면서 서양중심의 근대성이 지닌 보편성에 대한 탐구를 거듭하고 있다.

  마지막 3부 정치 ․ 사회 ․ 지식에서는 하버마스의 스승격인 한나 아렌트를 소개한 김선옥의 <정치와 진리>를 시작으로 김욱의 <마키아벨리즘으로 읽는 한국 헌정사>, 하승우의 <희망의 윤리 똘레랑스>와 적절히 연결시키고 있다. 홍성민의 <피에르 부르디외와 한국사회>는 시간을 내어 꼭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에필로그로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의 길잡이 리영희>는 강준만이 쓴 강준만론이라는 평가에 덧붙혀 나는 저자인 고명섭의 지향점으로 읽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소개된 책과 관련된 책들은 무수히 많다. 그래도 늘 찾아읽게 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한 책을 위한 책도 아니며 책을 소개하는 책은 더더욱 아니다. 고명섭 기자의 서평을 모은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각각의 주제에서 보듯이 결코 만만치 않은 담론들을 일관된 흐름과 형식들로 자연스럽게 묶어내고 있다. 책의 내용을 요약하는데 그치지 않고 비판과 문제점이 적절하게 드러나 독자들에게 책의 의미와 평가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독서의 방법이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는 가정하에, 내가 개인적으로 많은 부분 공감하여 좋은 책으로 평가하는 것은 일관성과 비판적 해석이다. 논의의 대상 자체가 주관적 해석이나 감정적 접근이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시종일관 객관적이고 침착한 분석으로 각각의 담론들을 일관성있게 비판적 관점으로 접근하고 있다.

  “자기와 상관없는 타인의 문제에 개입하는 사람”을 지식인이라고 정의한 장 폴 사르트르의 말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은 말로 책을 끝맺고 있다.

  “성찰의 차원에서 보면 지식인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개입해 자기 자신을 들볶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들볶기를 그만둘 때 지식인은 타락하고 지식은 거짓의 권력으로 떨어질 것이다.” - 에필로그

  지식인의 범주와 한계를 규정하지 않아 저자가 말하는 기준을 알 순 없으나 이 말은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면서 동시에 이 땅의 모든 지식인들에 전하는 죽비소리로 들린다. 나는 지식인과 거리가 멀다. 하지만 스스로를 감시와 비판과 견제의 대상으로, 부르디외가 말한 ‘성찰’의 대상으로 삼아 타락(?)의 위기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노력은 누구나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2005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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