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 장정일 단상
장정일 지음 / 행복한책읽기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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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에 대한 명상>으로 장정일을 처음 만났다. 이후 <길안에서 택시잡기>까지가 장정일과의 인연이었다. 그의 소설을 읽지 않은건 산문에 대한 편견이 아니라 ‘아무 뜻 없’이 손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도 사실 이웃 블로거(시라노의 酒冊잡기)의 리뷰가 아니었다면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장정일은 40이 넘었다. 10여년을 훌쩍 넘긴 세월이었으니…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 필화 사건으로 언론에 보도될 때도 소설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었다. 편견때문이 아니라 시를 통해 그의 성향과 사유의 방식들을 지나치게 드러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두 권의 시집이후 시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혐오로 점철된 그의 발언 들은 차라리 애처롭기까지 했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의 말을 전적으로 수용할 수는 없다.

  이 책은 그야말로 雜文 모음이다. 그렇다고 절대 글이 잡스럽지는 않다. <생각生覺>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형식은 혼란스럽다. ‘아무 뜻도 없어요’는 지난 몇 년간 쓴 단상들을 펼쳐놓고 있으며, ‘신작시’ 7편, ‘전영잡감’이라는 영화평 10편, ‘삼국지 시사파일’이라고 쓴 칼럼과, ‘나의 삼국지 이야기’로 이루어진 책이다. 그래서 사실 단상으로 꽉 채워진 것보다 뒷부분의 글들은 부록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과 단상 속에서 촌철살인의 한마디 한마디를 풀어낼 수 있는 것이 작가의 능력이라면 장정일은 차고 넘친다. 왜냐하면 정말 오랜만에 책을 보며 혼자 낄낄거리고 키득거렸으니까 말이다. 주변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볼 정도였다. 나만 그랬을까? 개인적으로 통쾌하고 직설적이며 정곡을 찌르는 글들이 고플 때가 많다. 쓸데없이 돌려 말하거나 젠체하거나 점잖빼는 글들에 신물이 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사안에 대해 다르겠지만 장정일은 일정부분에 적합한 문체를 지니고 있다. 그 부분을 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글 중에 ‘성조기’라는 표현을 비판한 부분이 나온다. 읽다가 책꽂이의 국어사전을 얼른 꺼내 찾아보았다. 나도 무심코 써왔던 표현이라 가슴이 뜨끔했기 때문이다. 한자로 ‘星條旗’로 별과 세로 줄이 그려진 깃발이라는 뜻으로 미국 국기의 외양을 표현한 것 이외에 다른 뜻을 찾을 수 없으나 장정일은 미국 국기를 ‘성조기’라고 표현하는 것은 친미(親美)를 넘어 숭미(崇美)에 해당한다고 흥분하고 있다. 나는 장정일보다 미국을 더 싫어한다. 그런데도 이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혹시 장정일은 ‘星條旗’를 ‘聖條旗’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었다.

  그의 글을 읽다가 온 몸이 경직되고 순간 가슴이 두근거리며 한참동안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고 삶의 자세를 다시 한번 가다듬게 하는 글을 만났다. 당연한 말이면서 실제 누군가의 입을 통해 듣게 되는 통렬함이여. 직업병 때문인지 몰라도 밑줄을 쫙 그어놓은 부분은 다음과 같다.

  “짐승은 배울 수 있지만 아무래도 깨달을 수 없고, 인간은 어쩌다 깨달을 수는 있지만 결코 배우지는 못한다.” 하므로 교육에 관해서는 단 한가지 원칙만 유효하다. 선생은 절대 학생에게 ‘주입’하지 말고 ‘암기’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 배움은 다 쓸데없다. 어떻게 하면 “깨닫게 해 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게 교육이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25주년 기념일이다. 이 날을 기억하는지 하늘도 눈물을 흘리고 있다. 민주화 영령들의 평안을 진심으로 기원하며 오늘 나의 삶의 자세를 가다듬는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 브레히트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 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2005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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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듣다 읽다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미학강의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음, 고봉만.류재화 옮김 / 이매진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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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은 서양미술사 <고전주의와 바로크>를 다시 뒤적여 본다. 고전주의와 바로크 시대의 거장 푸생의 ‘아르카디아의 목자들’과 ‘엘리에제르와 레베카’라는 그림으로 시작되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미학 강의는 인류의 발자취를 더듬어 대표적인 예술작품을 통해 교훈을 얻어내고 있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미학강의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보다 듣다 읽다>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푸생을 보고, 라모를 들으며, 디드로를 읽는 것이 주된 내용이고 ‘말과 음악’, ‘소리와 색깔’, ‘오브제들에 관한 시선’으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도록 총 6부로 구성되어 있다. 한가지 곤혹스러운 것은 라모가 누구인지도 모르며, 들어본 적도 없는 나는 음악에 대한 이론들이 마치 낯선 외국어처럼 이해 불가능했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1908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나 1930년에 최연소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브라질로 건너가 원주민과 함께 거주하면서 미개문명에 대한 탐구에 정열을 쏟았고, 2차 대전을 피해 뉴욕으로 건너가 언어학자 야콥슨을 만나 언어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후 프랑스로 귀국하여 ‘사회인류학’ 강좌를 창설한 20세기의 뛰어난 지성이다.

  이 책의 서두에서 푸생의 두 그림을 꼼꼼하게 해설하는 방식은 당시 예술가들의 이론을 소개하고 분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당시 라모의 음악에 열광했던 이유를 멜로디와 화성으로 나누어 고찰하고 있다. 디드로의 예술론이 보여주는 당시의 논의들을 통해 미의식에 대한 변화들을 분석해주고 있는 셈이다.

  시대를 뛰어넘는 예술의 아름다움에 대해 회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현시대가 아닌가 싶다. 레비-스트로스가 푸생과 라모와 디드로를 선택한 것은 사회인류학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서 비롯되었겠지만 고전주의와 바로크, 신고전주의 대표자를 통해 인간의 미적 가치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시대를 초월한 예술과 시대에 충실한 예술의 가치 평가를 내릴 때 어느 쪽이 우수하다고 평가할 수 없듯이 인류가 쌓아온 문화는 상대성과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특정 인물인 푸생, 라모, 디드로를 넘어 말-여기에는 언어학자 소쉬르의 ‘빠롤parole’ 개념이 ‘랑그/랑가주langue/langage'과 구분되어 쓰인다-과 음악, 소리와 색깔이라는 사유방식으로 확장되어 ’오브제objet'에 대한 시선으로까지 확대된다. 인간이 살아온 문화와 인류의 생활방식들 속에서, 특히 문명화되지 않은 '바구니'에 대한 사소함에서, 대상에 대한 그의 탁월한 분석과 날카로운 시선을 만나게 된다. 그것이 비록 온전히 내게 전달되어 육화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우리 고유의 예술 대상들, 즉 오브제에 관한 연구와 깊이있는 관심은 결국 한국인의 사유방식과 문화 코드를 읽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객관적(?)인 저력 때문이다. 이름난 유럽과 서양의 예술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 것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곧 우리 민족 고유의 미의식을 현재화하고 세계화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우리 고유의 미학 강의가 나올 날이 멀지 않다고 믿는다.

 
2005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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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수련 옮김 / 인간사랑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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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있는 21세기를 한 세대, 아니 22세기의 후세들이 어떻게 정리하게 될지 궁금하기도 하고 흥미롭기도하다. 물론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게임과 같이 우리가 만들어 가야할 미래는 아득하고 막막하기만 하다. 전지구적 환경의 변화는 경제, 정치, 군사, 환경, 특히 문화적 징후들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을만큼 급박한 변화와 조정을 거치고 있는 상태다.

  수 백년 간 지속된 인류의 사상적 변모는 사회변동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사회정치적 배경과 인간의 사유방식은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세상을 인식하고 우리를 돌아보는 철학방식은 중심개념과 논의의 초점이 하나로 일치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근대 이후 ‘다양성’이라는 가장 두드러진 특성을 보여주는 일련의 현상들은 계급의 붕괴와 시민사회의 발달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각종 예술과 문화의 주체로서 당당하게 참여하게 된 ‘민중’들의 힘이 발휘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0여년 전의 일일 뿐이다. 그래도 그 변화의 속도를 정신을 차릴 수 없을만큼 급진적이며 변화양상 또한 파격적이다. 그 숱한 변화와 다양한 문화 현상 속에서 현대인의 사유 특징을 나름의 방식대로 읽어낸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슬라예보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이라는 책은 1989년에 출판된 그의 초기작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지젝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고민과 사유 방식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의 사상적 배경과 문화 해석의 논리들이 어디서 출발하고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는지 선명하게 보여주는 그의 대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제 1부 증상에서는 마르크스가 어떻게 증상을 고안해냈는지를 살펴보고, 그의 증상에서 증환으로 나아가는 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는 프로이트와 알튀세르, 카프카의 작품이 동원되며, 헤겔식 농담과 영화 ‘타이타닉’을 동원하여 이해를 돕는다. 물론 문화 현상들이 지젝의 이론을 대변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론과 언어 형식에 매몰될 수 있는 개념들을 이해하기 위한 방식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제 2부 타자 속의 결여에서는 ‘케 보이’와 ‘당신은 두 번 죽는다’는 제목으로 이데올로기의 정체성과 왜상, 동일시, 욕망의 그래프를 통해 본격적으로 지젝의 사상을 배경이 되는 라캉의 이론들을 꼼꼼히 분석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포스트 구조주의자’라는 총체적 분류방식을 거부한 지젝은 라캉의 누빔점과 타자의 개념의 오독을 지적하고 있다.

  마지막 제 3부 주체에서는 실재의 주체 개념을 확인하고 ‘메타언어는 없다’는 후기 구조주의자들의 유명한 명제를 분석하며 지젝 나름의 주체와 실재 사이의 개념을 확립하고 있다. 그것은 라캉이 말한대로 상징계와 상상계의 모호한 구분과 구별되는 실재계에서 존재하는 주체의 역할과 개념을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읽은 지젝은 뼈와 살에 달라붙지 않았다. 이물감을 느낄만큼 거부감이 들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내 안에 소화되어 내재화 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것은 개념과 언어때문이었다. 철학의 대상자체가 ‘언어’로 귀착되기 시작하고 모든 사유 방식의 근원이 되는 ‘언어’에 대한 분석과 해석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20세기 언어 분석철학부터 시작된 이 기나긴 여행은 언제쯤 또다른 변화와 도전을 겪게 될지 알 수 없다. 지난 세기 가장 명민한 철학자로 일컬어지는 비트겐슈타인의 관한 <비트겐슈타인은 왜?>라는 책을 보았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지젝의 사상적 배경과 변모과정을 설명한 <누가 슬라예보 지젝을 미워하는가>를 통해 대강의 모습을 그리고 시작한 책읽기였지만 선명한 개념과 인식 방법을 체득하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마르크스든, 헤겔이든, 라캉이든 그들의 개념을 재해석하고 있는 지젝이든 인류의 사상적 진보는 계속될 것이며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귀기울여 들어보고 21세기에 그려나갈 우리의 모습이나 지나온 20세기를 정리해서 현재를 살아가는 ‘누빔점’을 삼을 수 있다면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지만 내게는 좀 더 정밀한 책읽기와 사유가 필요한 듯 싶다.


2005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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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에 아픈 사람 민음의 시 120
신현림 지음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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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표지를 열자, “21C 말에는 즐거운 블루스를 출 수 있을까? - 96年 가을에.”라는 파란색 볼펜의 글씨가 한 줄 선명하다. 신현림의 오래된 시집을 꺼내본다. 비닐 코팅된 표지는 괜찮지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책 윗부분은 벌써 누렇게 변색되기 시작했다. 잊었던 그녀의 시편들이 살아 움직이는 옛날 시집을 뒤적이며 <세기말 블루스>를 통독한다. 첫시집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고 외치던 그녀는 2년만에 <세기말 블루스>를 추자고 덤볐었다. 미술을 전공하려다 그녀의 표현대로 ‘4수끝에 편안하게(?)’ 국문과에 입학한 그녀는 여전사의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왔었다. 나도 20대였고,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지고 싶은 정도가 아니라 세상을 끝장내고 싶었던 시절이었고, 세기말과 상관없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지독히 몸을 떨어야했던 시절이었다.

     자화상

  울음 끝에서 슬픔은 무너지고 길이 보인다

  울음은 사람이 만드는 아주 작은 창문인 것

  창문 밖에서
  한 여자가 삶의 극락을 꿈꾸며
  잊을 수 없는 저녁 바다를 닦는다 - <세기말 블루스, 1996>중에서

마지막 페이지를 끝으로 10년 가까이 시를 버렸던 그녀가 돌아왔다. 그녀는 짐짓 나이를 먹지 않은 듯 예전의 나를 기억해 달라는 듯,

  가난과 설움을 넘어
  흐느껴라, 노래하라, 타올라라
  허기진 생활의 멜로디여
  아슬아슬한 나날의 쌀자루여
  낡은 육신의 그물을 던지는 나와 너여 - ‘흐느껴라, 노래하라, 타올라라’ 중에서

  라고 <해질녘에 아픈 사람>을 시작한다. 그러나 “무섭게 흐르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 시간/ 달리는 바다는 달리지 않는 바다/ 시간이란 아예 없는 겁니다/ 최대의 재산인 꿈이 있을 뿐이죠”라는 신파가 시작된다. “슬퍼하지 마세요. 세상은 슬퍼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니까요”라거나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낄 때/ 비로소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무엇이든 다시 시작하리라”고 말하는 대목들을 읽다가 울컥 짜증이 밀려온다. 시를 읽는 행위는 정교한 언어에 대한 최고의 상찬이라고 믿는다. 시간이 남아돌거나 사춘기 소녀의 취향으로 겉멋을 내기 위한 현학취가 아니라면 누가 이 시대에 시를 읽는가. 신현림은 지독하게 고생을 했는지는 몰라도, 시에 대해 고민은 하지 않은 흔적이 역력하다. 긴 시간의 공백이 주는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어차피 시가 개인의 내밀한 고백의 형식이라는 변명은 할 수가 없다. 그것이 보편성을 담보하지 못했을 때 감당해야할 무게는 만만치가 않다. 싱글 맘 시리즈의 시편들은 점입가경이다.

  “그는 밥 속에 헝그리 정신을 비벼 넣고 싱글 맘으로 희망의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 여성의 슬픈 등에 꽃을 피운 이 시집을 우울한 육체 위에 한 땀 한 땀 새긴 영혼의 자서전”이라고 평한 천양희 시인의 생각에 절대 동의할 수 없다. 헝그리 정신을 비벼 넣으면 희망의 폭풍이 되는가? 배고픈 싱글 맘은 저절로 눈물과 페이소스가 뒤섞인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페미니스트가 되는가? 비극과 비장이 뒤섞여 춤을 추고 시의 형식을 빌어 신세 한탄에 가까운 일기가 되어 버렸다. 그녀의 시에 대한 관심과 애정만큼이나 매정하게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퍼렇게 날선 감각과 세상에 대한 삐딱한 시선, 대담하고 솔직한 화법이 주는 신선함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남았나 다시 찬찬히 들여보지만 별로 건질게 없다. 실망이다.

  인간의 가장 응축된 언어 형식으로서 시가 가지는 미덕은 읽는 사람마다 미감이 다르겠지만 일단 애정을 가지고 시를 대하는 나같은 독자가 가끔씩 지독한 혐오를 내뱉는다는 것은 염려스러운 일이다. 10년전에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지고 끝냈어야 했다. <세기말 블루스>가 10만부가 넘게 팔렸었다. 부담이 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는 이제 그만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지극히 내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또다시 그녀의 시집을 사는 일은 없겠다. 치열한 세상살이와 민감하고 도전적인 의식들로 사진을 찍고 에세이를 써내는 것이 훨씬 더 큰 울림과 감동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2005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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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봉감별곡 : 달빛아래 맺은 약속 변치 않아라 국어시간에 고전읽기 (나라말) 5
권순긍 지음 / 나라말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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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영원한 주제일 수밖에 없는 남녀 간의 사랑은 진부하다는 표현을 할 수가 없다.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으며 늘 새로운 형태로 전달되고 해석되어 감동을 전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관점으로 ‘단순’하거나 ‘뻔한’ 이야기로 치부될 수 없는 우리 고전소설의 아름다움은 당대의 가장 소중한 진실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춘향전이나 운영전보다 훨씬 애절한 사랑노래가 <채봉감별곡>이 아닌가 싶다. 소극적, 수동적인 모습으로 자신의 운명과 사랑을 지키려 노력했던 춘향이나운영이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모순된 당대 현실과 제도를 온몸으로 거부한 채봉이야말로 우리 고전문학사의 가장 현대적 개념에 근접한 여인상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달빛 아래 장필성과 김채봉은 한 눈에 반하게 되고 서로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긴 시간동안 시련을 극복하고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게 된다. 두 사람의 사랑을 방해하는 당시의 매관매직에 의한 뿌리 깊은 사회적 부패 현상과 기생제도에 대한 인권문제 등은 조선 후기 사회에 나타난 민중들의 분노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고난을 겪은 사랑일수록 더 값지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채봉이가 보여주는 눈물겨운 투쟁(?)과 적극적인 운명 개척의 정신이다. 소설의 전면에서 허판서의 첩으로 살게 될 운명을 거부하고 아버지를 구해내며 자신의 사랑까지 지켜나가려는 채봉의 적극성은 봉건시대 한국적 여인상이 지닌 미덕 아닌 미덕을 거부한다.

  평양감사의 업무 보조로 일하던 어느날 가을 달빛에 젖어 써내려간 ‘추풍감별곡’이라는 가사의 이름에서 ‘채봉감별곡’이라는 소설 제목이 연유하였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소설속의 장편 가사 ‘추풍 감별곡’은 당시 민중들의 애절한 사랑노래를 읽을 수 있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

  눈앞에 온갖 것이 모두 다 시름이라
  바람에 지는 낙엽 풀 속에 우는 짐승
  무심히 듣게 되면 관계할 바 없건마는
  이별의 한 간절하니 소리소리 수심이라
  굽이굽이 맺힌 시름 어찌하면 풀쳐낼고
  아해야 술 부어라 행여나 시름 풀까
  잔대로 가득 부어 취토록 먹은 후에
  석양산길로 을밀대 올라가니
  풍경은 예와 달라 만물이 쓸쓸하다 - ‘추풍감별곡’ 중에서


  이 시리즈의 또 하나의 특징은 책 중간중간에 끼어 있는 정보쌈지이다. ‘조선시대의 사랑’, ‘기방풍경’, ‘19세기 매관매직의 실태’, ‘고전소설 속의 여인들’, ‘평행기행’ 등 쉽고 재미있는 정보 페이지를 삽입해서 간단하지만 알면 더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소설 속 배경지식들을 덤으로 얻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전국국어교사 모임 ‘나라말’ 출판사에서 고전읽기 다섯 번째 시리즈로 출간된 <달빛 아래 맺은 약속 변치 않아라>를 받아 들고 반가운 마음에 단숨에 읽었다. 이 책의 일러스트레이션을 맡은 김은정씨를 비롯해서 전편을 번역했던 조현설, 신동흔 선생님등과 마지막 출판위원회를 열었던 지난 여름이 생각났다. 대학로에서 늦도록 술을 마시고 광화문에서 심야좌석을 탔던 기억이 새롭다. <함께 여는 국어교육> 여름호가 도착했으니 진짜 여름이 시작된듯 싶다. 반가운 선생님들의 글들과 고민들이 반갑다.

  우리 고전에 대한 이해와 깊은 애정은 한국문학에 대한 뿌리와 바탕을 이룬다. 정확한 해석에 의한 판본이 없어 쉽고 재미있는 우리 고전이 고전(苦戰)을 면치 못하거나 과소 평가되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정확하고 재밌는 시리즈를 기대하며 숨어 있는 고전읽기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었으면 싶다.



2005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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