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미술 라루스 서양미술사 1
자닉 뒤랑 지음, 조성애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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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타면 종부리고 싶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경계하는 말이다. 그러나 어찌보면 그 욕망이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을 읽다가 허황된 욕망에 빠진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스폰서가 내게 있다면, 아니 내게 무지하게 돈이 많다면 3년 정도만 세계 여행을 떠나고 싶다. 특히 각국의 미술관과 고대 건축물들만 돌아보는 코스로 3년. 책밖으로 눈을 돌리다 혼자 웃었다. 3년은 아니더라도 머지않아 유럽의 건축물들과 미술관을 순례하는 여행을 떠날 것이라고 계획을 잡는다. 이 책의 도록은 그만큼 선명하고 사실감이 넘친다.


  이 책은 전 7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이 중세미술이다. 5세기경 고대 문명 사회가 붕괴되는 시기부터  15세기 르네상스로 막을 내린다. 고딕과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대표되는 중세시기는 미술보다 건축과 조각 양식이 훨씬 흥미롭다. 작가 자닉 뒤랑은 10년 넘게 루브로 박물관에서 중세 예술사를 주제로 강의했다. 텍스트 자체는 분량이 많지 않지만 구체적인 도판과 해설이 충실하기 때문에 중세의 미술사를 이해하는 데 적절하다. 특히 전공자가 아닌 나처럼 예술에 문외한에게 더더욱 적당하다. 단숨에 1권을 읽어버리고 2권을 주문하고 나서 다시 책을 뒤적이며 여운을 즐긴다.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보면 수도원에서의 미술품 생산화 조직화 과정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고 건축 장인조합과 길드의 역할을 참고할 수 있다. 중세의 건축물과 조각품 하나하나에 묻혀진 장인들의 손길과 그들의 예술혼을 어떤 고귀한 정신에 비유할 수 있을까. 예술품보다 먼저 그들의 삶에 숙연해진다.


  이 책은 단순히 시대별로 예술가들과 예술품들을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다. 문화사적 시각에서 사회경제적 흐름속에 놓이는 미술의 위치와 탄생과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깊이 있는 책읽기가 가능하다.


  샤르트르 대성상, 랭스 대성당, 아미앵 대성당은 프랑스 고딕 양식의 대표적 건축물로 고딕 건축의 파르테논 신전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직접 실물로 보고 싶은 욕망이 끓어오른다. 예술은 과거와의 대화다. 인류가 걸어온 시간을 더듬어 보는 떨림과 두근거림이 있고 인간의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미에 대한 본질적 그리움을 달래준다.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그 안에 들어가 하루쯤 보내며 루앙의 대성당을 빛의 흐름과 시간에 따라 다르게 표현한 모네처럼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도 즐겁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으나 제대로 된 여행을 위해 책으로 만족하고 예술에 대한 안목이나마 높힐 수밖에 없다.


  ‘서양미술사’는 곰브리치가 워낙 막강하다. 하지만 프랑스 라루스의 서양미술사 시리즈는 또다른 방식으로 눈과 손을 즐겁게 한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분량과 한정된 도판 때문에 갈증을 배가 시킨고 객관적이고 잡다한 여러 지식을 나열하는 방식이 옳다고 볼 순 없지만 프랑스 중심의 서술이 간간이 거슬리기도한다.


  좋은 그림과의 만남을 준비하며 이렇게 기다리는 것도 내게는 의미 있는 일이다. 서양 중세를 산책한 오늘 하루는 여유로운 아쉬움을 남긴다.

 


2005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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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평전 역사 인물 찾기 10
장 코르미에 지음, 김미선 옮김 / 실천문학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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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인간에 대한 정체성을 규정하는 일은 무조건 오류다. 인간은 그렇게 한마디로 이해될 수 없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에르네스트 체 게바라’를 한마디로 이름 붙힐 수는 없다. 다만 그가 살아온 길과 방법들에 대해 들여다볼 뿐이다. 단순한 구경꾼의 의미를 넘어 진행형의 역사에서 그를 자리매김하는 것은 물론 독자의 몫이고 실천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1928년에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의학박사 출신으로 쿠바 혁명에 가담하여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게릴라전을 성공시킨 인물인 체는 그 후, 아프리카 콩고를 거쳐 볼리비아 혁명을 실천하던 중 1967년에 사망한다. 그의 나이 서른 아홉이었다. 스무살을 전후하여 그의 친구와 함께 남미를 여행하며 그는 사상의 기초를 마련한다. 이 여행 과정을 그린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가 국내에서도 얼마전에 상영되었다. 혁명전사 체는 열렬한 독서광이었다. 쿠바의 시에라마에스트라에서 아바나에 입성할때까지 숱한 전장에서도 체는 책을 놓지 않는다. 책과 사람을 통해 세상에 대한 생각이 변화하고 그것을 실천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아니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체는 그렇게 했다.


  “진정한 혁명가는 사랑이라는 위대한 감성에 의해 인도 된다”고 말하는 체는 단순히 공산주의자나 마르크스주의자로 규정할 수 없다. 지구상에 모든 이데올로기가 그렇듯이. 수정주의, 교조주의, 네오맑시즘, 해방철학, 유로코뮤니즘등 공산주의 분파들은 엄청난 차이를 드러내며 현실속의 이데올로기로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구소련의 레닌과 트로츠키, 중국의 마오쩌둥과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등 현실속에서 그들이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과 방법들은 개별적 상황과 현상속에서 각기 다른 이름으로 공존해왔다. 체의 사상을 한마디로 규정하는 것은 그래서 더욱 어렵고 위험하다. 플라톤의 ‘이념속의 현실’에서 발원한 공산주의를 마르크스의 이론으로 실천한 사람도 국가도 없다. 그래서 지금, 체의 사상적 기저를 논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내가 주목한 것은 체의 실천성이다. 쿠바 혁명 과정과 그 이후에 그가 보여주는 삶의 모습은 두려움은 느끼게 한다. 누가 생각한대로 살 수 있단 말인가.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장 코르미에에 의해 10년간 수집된 자료가 기초가 되었다. 체의 딸(일디타)과 청소년기의 꿈과 이상을 공유했던 친구 로베르토 그라나도의 도움으로 쿠바를 답사하고 많은 주변인들과 인터뷰를 통해 저술된 책이기 때문에 이 책의 가치는 더욱 크다. 객관적이며 방대한 서술로 체의 삶을 연대기식으로 들여다 볼 수 있으며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고 체의 편지와 일기를 삽입해서 사실감을 높혔다. 평전이 가질 수 있는 영웅적 서술과 신비감을 드러내기 위한 주관적 서술에 의존하지 않고 다양한 사례와 여러사람의 시각으로 한 혁명가를 분석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이 가진 미덕이다.


  20대에 공산주의자(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바보이고, 서른 넘어서까지 공산주의자인 사람도 바보라는 어느 프랑스인의 말을 떠올려 본다. 과연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 나아가 이 지구상에 펼쳐지는 점점 더 복잡한 양상을 띠는 세상을 위한 이념과 체제는 존재하는 것일까? 그것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과 냉정한 인식은 얼마나 필요한 것이며 그것은 어떤 형태로 내 삶의 모습에 반영되어야 할까? 나는 이제 서른이 훌쩍 넘어버렸고 마흔이라는 나이와도 만나게 될 것이다. 진보와 개혁을 외치는 모든 사람이 나이가 든다고 해서 보수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듯이 자기 정체성과 실천의 문제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생의 뜨거운 화두가 된다. 사춘기를 넘어서면서부터 시작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작은 고민.

 

  베스트셀러와 유행에 대한 개인적인 거부감이라는 핑계로 이제야 탐독하게 된 책이지만 두고두고 가슴속에 오래 남을 만한 좋은 만남이었다. 체를 통해 느낀 것은 어쩌면 단순하고 당연한 논리이다. ‘사상의 종점은 행동이다’라는 명제. 항상 그것이 문제다. 그가 남긴 숙제 같은 한마디가 오래오래 가슴에 남는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우리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2005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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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세계사 - 거꾸로읽는책 3 거꾸로 읽는 책 3
유시민 지음 / 푸른나무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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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 되면 가끔 TV 리모컨으로 장난을 한다. 그러다 우연히 ‘도전 골든벨’이라는 프로를 가끔 본다. 파주의 한 여고생인 지관순은 이름만큼이나 특별하게 어려운 환경속에서 생활하면서도 역사와 자신의 미래에 대해 자신감과 희망을 잃지 않는 소녀로 소개 되었다. 골든벨을 울리게 한 마지막 문제의 정답이 ‘드레퓌스 사건’이었다. 역사에 관심이 깊거나 유시민의 베스트 셀러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읽은 것이 틀림없다. 그녀는 이제 역사학을 전공하는 여대생이 되었다. 언론을 통해 가끔 그녀의 소식이 전해지기도 한다.

88년에 초판이 나온 이 책은 열혈 지식인 청년의 지적 반항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신선했다. 95년에 개정판이 나온것을 2004년에 다시 개정판을 내놓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소련 동유럽의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졌고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고 독일이 통일 되었다. 이 역사적 사건들을 나는 TV화면을 통해 지켜보았다. 인류 역사의 현장에 가보고 싶은 욕망만 가지고 있다. 10년 안에 가볼 수 있을까?

제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의 10월 혁명, 히틀러, 팔레스타인, 4․19, 베트남 전쟁, 말콤X, 독일 통일들 굵직한 세계사의 단면들을 소개한 교양 서적으로서 의미를 갖는다면 이 책은 별 볼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저 상식이 부족한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로 그칠 수도 있을 테니까. 역사에 관한 담론과 시선은 그 시각이 가장 중요하다.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해답은 없을 수도 있다. 유시민은 나름대로 ‘낯설게 바라보기’ 혹은 ‘뒤집어 보기’ 방법을 통해 세계사를 거꾸로 읽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인 역사적 사건들의 수용자세를 탓하기 전에 다양한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는 방식이나 관점들을 소개하는 책들이 더 풍부해지기를 기대해본다.

100분 토론 사회자를 거쳐 금배지를 달고 노빠 부대의 선봉에 선 유시민을 본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사회민주주의라 밝힌 바 있는 그의 행동과 변화들을 지켜보는 것은 불량스런 시선으로 한 인간을 관찰하는 음험함이 아니라 애정과 신뢰를 담아 보내는 우리 사회의 작은 도전과 실패이기도 한다. 그 작은 점들이 모여 선을 이루고 면을 이룬다면 3차원의 공간이 마련될 것이고 조금씩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는 건강성을 담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서로 다른 이념과 의견들이 받아들여지고 공동의 선을 위해 한 발 물러설 줄 아는 정치 풍토와 발전을 위한 토론과 인식의 전환, 잘못된 과거에 대한 반성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똥통에 빠져 허우적대는 정치인들의 몫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과 나의 책임이 아닐까 싶다

 

2005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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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라루스 서양미술사 7
제라르 르그랑 지음, 정숙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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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는 예술의 한 흐름이나 일시적인 사상적 흐름으로 파악되기 보다는 한 시대를 특징짓는 역사적 시대 구분으로 이해해도 좋을 듯싶다. 미술 분야의 르네상스는 문학에서처럼 고전에 대한 향수와 부활의 의미로, 혹은 중세에 대한 극복의 의미로 규정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혁신이나 ‘복귀’(라블레의 표현), 부흥이라는 용어까지도 당시에는 보편적이었을만큼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이 유일하게 존재했던 시기였다고 샤스텔은 이 시기를 평가하고 있다.

페트라르카로 인해 문학이 되살아났고, 조토와 함께 화가들의 솜씨는 다시 부흥하게 됐다. 우리는 이 두 개의 예술이 완벽에 이르는 것을 보았다고 얘기하는 피„에 이어 에라스무스도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은 얼마나 굉장한 세기(世紀)인가! 다시 젊어지고 싶구나!”라며 새로운 황금기를 찬양했다. 그 시대에 몸담고 있던 예술가들이 스스로 찬탄할 정도로 생기 넘치는 시기가 바로 르네상스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에 대한 이해는 곧 르네상스 미술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관점이 된다.

조토의 <새들에게 설교하는 성 프란체스코>나 <유다의 입맞춤>에서 보여주는 종교적 대중화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나 로렌초 기베르티의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 얀 반 아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 초상화> 등의 작푸미 훨씬 더 현대적 관점에서는 신비스럽고 경외감을 느끼게 하는 작품들이다. 원근법이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회화의 사실성과 다양성이 풍부하게 표현되기 시작했다. <프리마베라 혹은 봄>으로 명명된 보티첼리의 대표작은 여신들의 부드러운 몸의 곡선, 신화적인 분위기가 배어 있어 그림에 문외한인 나의 눈길을 한참 붙들어 놓는다. 르네상의 절정기의 대표적 인물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수태고지>나 <모나리자>로 너무나 유명하고 <최후의 만찬>은 소설로 만들어져 소설적 재미와 상상력을 배가시키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다 빈치보다 스물살이상 어리다. 동시대 인물로 비교되고 있지만 건축이나 회화에서 보다 스스로 조각가라 여겼다. 그에 비해 라파엘로는 백과사전적인 다 빈치와 고뇌하는 반항자인 미켈란젤로 사이에서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다. ‘사실 그는 다만 다른 사람들이 실현하고자 꿈꿔왔던 것을 실현했다’라는 괴테의 놀라운 말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고고학자이면서 데생과 건축가였으며 시도 쓰고 조각도 했다. 예술 자체가 분화되지 않아 당시 상황으로서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 세명의 천재(?) 예술가들은 르네상스를 한층 더 풍요롭게 해준 대표적 인물들이다.

피렌체에서 로마, 베네치아를 거쳐 유럽으로 확산된 르네상스는 건축과 회화에서 상당한 영향을 끼쳤고 알브레히트 뒤러로 대표되는 새로운 취향의 회화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히에로나무스 보스의 <쾌락의 동산>,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의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 브뢰겔의 <이카로스의 추락>등의 작품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되묻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르네상스는 후에 매너리즘으로 변화한다. 자연으로부터 인위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정신, 장난스럽고 괴상하면서도 ‘이상한’ 인간의 발명품으로 예술을 대하는 것이 특징이다. 르네상스의 이상적인 아름다움보다 뛰어난 기교에 대한 열망이 예술가들의 관점을 바꾸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느 예술도 그러하듯이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면서 쇠퇴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라파엘로의 <아테나 학당>은 ‘철학의 성전’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으로 르네상스를 요약하고 있다. 부드러운 색감과 편안한 구도를 바탕으로 고대의 현자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한참동안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이유이다.

서양미술사 시리즈 두 번째인 이 책은 미술비평가이자 영화평론가인 제라르 르그랑의 설명으로 되어 있다. 제한된 분량으로 설명과 회화를 모두 담기에는 역부족인듯 싶은 아쉬움이 있지만 각 시대별로 일갈하기 위한 압축의 효과를 최대로 거둘 수 있을지 나머지 시대를 기대해본다.

2005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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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반점 - 2005년 제2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한강 외 지음 / 문학사상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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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CD 모니터에 깜박이는 커서를 바라보는 일은 외롭다. 그것은 작가로 이름 붙혀진 사람들만의 몫은 아니다. ‘고시에 합격하기보다 더 어려운 인생살이’에 대한 막막함 같은 것이다.

이문열이 소설만 쓰던 시절, 그러니까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이상 문학상을 받은 1987년부터 나는 <이상문학상>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과외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며 처음으로 책을 사기 시작했다. 그해 89년 김채원의 ‘겨울의 환’이 수상작이었다. 책꽂이에 나란히 17권이 꽂혀있다. 이청준의 ‘잔인한 도시’와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까지 19권이다. 나이테 같은 느낌으로 가끔 들여다 본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비슷한 나이의 작가들이 수상자로 선정된다. 벌써(?) 늙어버린듯한 착각과 더불어 책을 읽는 태도와 감정이 변해가고 있음을 느낀다.

매년 수상 작품집을 읽다보면 수상을 염두해 두고 쓴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들, 즉 이상문학상스러운 소설들에 눈이 간다. 올해의 수상작 ‘몽고반점’은 우수상 수상작들과 비교해서 단연 돋보인다. 수상 취지와도 부합하며 소설적 재미와 완성도 면에서도 훌륭하다. 유미주의나 탐미주의, 예술지상주의로 분류될만한 본격적인 예술가 소설로 읽혔다. 처제의 몸에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몽고반점은 비디오 예술가인 주인공의 상상력을 무한대로 증폭시키며 성적인 욕망으로까지 발전된다. 처제의 채식주의는 동물성에 대한 역겨움과 삶에 대한 환멸을 동일시한다. 꿈에 나타난 무의식의 세계를 형부의 제안으로 시작한 비디오 작업 속에서 다시 확인하며 인간 존재의 근원적 슬픔을 확인한다. 미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스친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동생과 남편의 비디오를 보고 정신병원으로 보내는 아내의 심정과 태도는 이 작품의 결말에서도 중요하지 않다. 몽고 반점으로 대표되는 몸에 대한 관심과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싶은 유년에 대한 그리움은 순수성에 대한 욕구의 다른 이름이다. 삶의 권태와 무기력에 대한 치기어린 행동으로 보기엔 너무 슬픈 몸짓이다.

소설가 한강의 문체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차가운 금속성의 소리를 낸다. 깔끔하고 단정한, 군더더기 없는 매끈한 문체의 수려함이 아니라 어딘지 어색한 냉정을 유지하고 있다. 철저하게 계산된 하드보일드라면 소설속 주인공이 주는 열정과 환상을 객관화시키는 중화제 역할을 한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한 편의 소설이 아니라 슬프고 처참한 현실속의 불감증 환자들에 대한 경고로 들린다. 삶에 대한 열정과 아픔이 없는 건조한 생활들을 돌아보는 한가한 시간의 향이 풍부한 커피 한잔 쯤으로 받아들여도 좋다. 소설이 내 삶에 무슨 의미가 있지?라고 생각하며 문학이 갖는 해묵은 사회적 기능에 대한 논쟁을 꺼낼 필요는 없다. 그런 사람이라면 읽지 않을 테니까. 몽고반점은 재밌다. 그리고 외롭다.

장편 소설 ‘길위의 집’과 ‘사랑하라, 희망없이’가 우연히도 책꽂이에 나란히 꽂혀있다. 우수상 수상작 이혜경의 ‘도시의 불빛’과 윤영수의 ‘내 여자 친구의 귀여운 연애’는 재미없다. 고백적 형식의 ‘도시의 불빛’은 새로움과 흡입력이 부족하고 윤영수의 소설은 밋밋하다.

이만교의 ‘표정관리주식회사’는 풍자적 세상읽기가 돋보이는 소설로 형식의 새로움과 인물에 대한 표현이 풍부하지만 사실성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김경욱의 ‘나비를 위한 알리바이’는 TV로 대표되는 매스미디어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 소외된 개인에 대한 현대인의 자화상으로 읽었다. 나비로 상징되는 주인공의 태도가 낯설지만 평범하다. 소설의 내용 또한 진부하다. 문체와 형식으로만 독자에게 다가설 수는 없는 일이다.

천운영의 ‘세번째 유방’은 재밌다. 맛깔스럽고 입에 감기는 서술이 돋보이며 고백적 형식이 답답하기는 하지만 독특한 내용의 신선함과 흥미로운 주인공들에 대한 접근 방식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박민규의 ‘갑을고시원체류기’는 그 답다. ‘슈퍼스타 감사용’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 그의 소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보여준 여유와 재치있는 글쓰기가 가벼움으로만 읽히지는 않는다. 다만 고시원에서 만난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분량과 상관없이 인상적인 모습들로 스케치하거나 독자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 부족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90년 초반에 대학 시절을 보낸 동시대 인물에 대한 연민이 개인적 경험으로 수용될 수 있어 특별하게 읽었다.

1년 후에 다시 만?작품집에 대한 기대보다는 이제 시간의 흐름과 나이에 대한 부담까지 떠오르는 무게를 지니게 되었다. 내년이면 일련번호 30번째 작품집이 나온다. 많은 작가들의 새로움을 확인하는 순간들을 기대해 본다.

2005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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