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을 넘어선 자본 리라이팅 클래식 2
이진경 지음 / 그린비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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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단순히 돈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는 것은 무의미할 정도다. 누구도 사회구조와 경제환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17세기 무렵 중상주의자들에 의해 부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절대군주의 국가에서 경제적 수단에 의한 연구가 경제학의 기초가 되어 애덤스미스에 이르러 정치경제학은 새로운 단계에 도달한다.

맑스는 이러한 청치경제학을 통해서 자본이 집적한 거대한 부의 본질이 바로 노동자들의 노동이라는 점을 보았으며, 바로 그러한 사실이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야기하는 요인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았다.

맑스의 자본(Das kapital)은 이러한 토대에서 생산된 최고의 저작으로 일컬어진다. '청치경제학 비판'에서 비롯되어 '자본'으로 완성된 그의 이론은 후대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물론 맑스도 그가 처한 환경과 상황에서 헤겔의 이론을 수용하고 새로운 전망과 비판을 내놓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인간과 인간이 모여 살아가는 이 사회의 구조를 자본과 노동이라는 관점에서 경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미친 영향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자본'의 의미는 무엇인가? 현대 사회에서 결국 우리의 위치, 아니 나의 의미를 찾기 위한 하나의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거대한 자본의 힘을 절감하며 노동의 착취와 억압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갔고 다른 형태이기는 하나 맑스의 주장은 현재에도 유효하다.

체제 전복의 불온한 사상으로 매도되기 이전에 맑스의 '자본'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연구가 거의 불가능했던 우리 사회의 레드컴플렉스는 그 실체를 더욱 깊숙히 감추어 두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일반인들에게, 나처럼 무식한 노동자들에게 자본에 대한 거부감과 자본가에 대한 저항을 위한 이론적 무기의 역할만을 한다고 믿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처한 현실과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고 사회 현상들을 본질에 대해 고민할 재료들을 던져준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진경은 맑스의 자본을 넘어서 새로운 삶을 꿈꾸는 '현실적인 이행운동'이 자본주의 외부에서 무수히 창출되고 시도되기를 열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전은 '영원성'이 부여되어 현재적인 문제설정들에 일조하고 사유의 깊이를 제공하며 살아 숨쉬는 유기체의 역할을 해야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고전이 지닌 미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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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것의 역사
빌 브라이슨 지음, 이덕환 옮김 / 까치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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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방학이 되면 충청도 시골 외가댁에 며칠씩 놀러가는 일이 큰 행사였다. 그저 평범한 시골이었지만 논과 밭이 있었고, 여름이면 물장난질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개울이 있었다. 뒷동산은 당연히 거기 있었다. 평범한 시골에서 큰 재미가 있는건 아니었지만 도시의 아이들이 느끼기에 충분히 새롭고 신선한 환경이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밤의 화장실이다. 집 뒤켠에서 멀리 떨어진, 그것도 언덕이랄것도 없지만 조금 낮은 지대로 내려가 있었던 화장실은 상상할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헛간 한쪽에 엉성한 나무조각을 막아 놓은 재래식 화장실의 냄새와 공포 분위기는 상상 이상이다. 혼자 간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고 작은 볼일은 물론 마루의 요강을 이용했었다. 7, 80년대 시골 풍경이었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건 시골의 밤하늘이다. 가로등 하나 없는 캄캄한 시골 마당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경외롭다. 쏟아질듯 반짝이는 그 별빛들은 15년쯤 후에 강원도 비무장지대 매복지에서 바라볼 때까지는 마지막이었으니까. 주변에 불빛이 없고 먼지가 없는 맑은 하늘은 별을 관찰하기에 최적의 조건이다. 마루의 평상에 누워 했던 그때 생각들이다. 저 별빛은 어디에서 오는걸까? 하늘에는 얼마나 많은 별들이 있을까? 하늘밖에는 우주가 있다는데 우주의 끝은 있을까? 우주의 그 끝 밖에는 뭐가 있을까? 총명한 영재였다면 훌륭한 천체 물리학자가 되었겠지만 학교에서 암기식으로 주입되던 지구과학, 생물, 화학, 물리는 나를 완전히 환장하게 만들었었다.

아이들의, 아니 일반인들의 그런 사소한 호기심들을 재밌게(?) 풀어줄 수 있는 책이 있다.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다. 과학에 문외한이라고 밝힌 저자는 지구의 역사 크기, 우주에 관한 이론들, 인류의 기원과 생명의 신비로 부터 현재와 미래의 인간의 모습에 대한 반성까지 아우르고 있다. 과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론에 치중하기보다는 과학자들의 에피소드와 과학적 이론의 탄생과정과 정확성에 대해 알기 쉽게 풀어주고 있다. 학교에서도 이런식으로 호기심과 흥미를 유발하고 풀어줄 수 있는 방식으로 과학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랬다면 나도 과학을 재밌게 공부할 수 있었을텐데라고 핑게를 대본다.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우주와 지구의 역사에서 보면 점으로도 표시될 수 없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과 호기심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정확한 해답을 얻을 수 없겠지만 과학적 관점에서 현재 나의 모습을 고찰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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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손바닥 문학과지성 시인선 291
나희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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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66년생이니까 올해로 불혹의 나이가 되었다. 그녀를 처음 만났던 건 94년 가을이었다. 둥글고 까만 뿔테 안경을 쓴 짧은 커트 머리를 한 채 얼굴에는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길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 멀리서 밝혀져오는 불빛의 따뜻함을'(산속에서)이라고 말하는 그녀는 따뜻하고 순수하며 생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연민과 사랑을 품고 있었다. 젊고 생동감 넘치는 20대였기 때문일까? 진명여고 국어교사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그녀를 두번째로 만난것은 2001년 봄이었다. 7년이 흐르는 동안 나도 그녀처럼 국어교사 되어 있었다. 네번째 시집으로 만난 그녀는 이제 나이가 들었다. 시가 탄력을 잃었다는 말이 아니다. 관점에 깊이가 더해졌다. 물론 시대도 변했다. '어두워진다는 것'에서 유성호는 '내가 아는 희덕은 그만큼 감성적일 때보다는 논리적일 때, 그리고 자기 표현적일 때보다는 자기 반성적일 때 더 투명하고 깊은 사람이다'라고 서평에 적고 있다. 논리적이고 반성적인 감각이 그녀의 진정한 미덕일까?

그리고 그녀의 다섯번째 시집으로 그녀를 세번째 만나다. '나희덕 시 세계의 진정한 장점은 구체적인 감각적 이미지의 현실성에 기초한 간명하고도 절제된 언어적 형식에 있는 듯 싶다'(김진수)라고 시집 서평에 적고 있다. 그리고 창비에서 문지로 출판사가 바뀌었고 약력에 보니 조선대 문창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녀의 외형적 조건들이 인식의 틀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다. 사소한 조건들, 예컨데 시인의 나이와 직장, 가정 생활의 변화 등이 시에 미치는 영향은 적지 않다. 소설보다 훨씬 더 사적이고 감각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물론 객관화된 인식과 논리적 힘이 결여된 시를 읽을 사람도 없겠지만 관념 속에 허우적대거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는 이성의 영역으로 함몰될 위험을 배제할 수도 없다. 순수시의 죽음을 선포할만한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오랫만에 만난 그녀의 모습을 나는 씁쓸하게 바라본다.

시의 역할과 소명을 논하자는 것은 아니다. 이미지가 감각적일 지는 모르나 현실성에 기초했다고 보기엔 그 의미와 영역이 너무나 협소하다. 어쩌면 사적 경험의 객관화가 시의 본질이 아닐지도 모르겠으나 논리의 모순보다도 더 위험한 감동의 위축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땅 속의 꽃

땅 속에서만 꽃을 피우는 난초가 있다
땅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기 때문에
본 사람이 드물다 한다
가을비에 흙이 갈라진 틈으로 향기를 맡고 찾아온
흰개미들만이 그 꽃에 들 수 있다
빛에 드러나는 순간 말라버리는 난초와
빛을 피해 흙을 파고드는 흰개미,
어두운 결사에도 불구하고 두 몸은 희디희다

현상되지 않은 필름처럼 끝내 지상으로 떠오르지 않는
온몸이 뿌리로만 이루어진 꽃조차 숨은 뿌리인


이 시집의 마지막 시를 보며 그래도 그녀와의 다음 만남을 기약한다. '사라진 손바닥'이 '꽃조차 숨은 뿌리'가 되었기 때문이며, 땅 속에 숨은 꽃조차 꽃은 아름답다는 당연한 명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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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좋은일이 나에게도 좋은일입니다 - 상생과 공존의 지혜를 밝혀주는 15가지 이야기
안철수, 최재천, 이윤기, 강만길 외 12인 지음 / 고즈윈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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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 [共生, symbiosis]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서로 다른 두 생물이 특별한 해(害)를 주고받지 않는 상태에서 접촉하면서 같이 살아가는 생활 양식."이라고 되어 있다. 다시 상리 공생과 편리 공생으로 나눌 수 있다. 개미와 진딧물, 악어와 악어새, 한줄말미잘과 얼룩흰동가리, 바다거북과 따개비 등이 이러한 공생 관계에 있다. 서로 이익을 주고 받는 상리 공생이든 한쪽에게만 이익이 있는 편리 공생이든 이들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공생이라는 개념조차 모르고 있으며 그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긴다.
 
  이러한 공생 관계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이들은 서로 최소한 피해를 입히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들 관계의 전제가 된다. 이 관계가 깨지면 상대에게 피해를 입혀가며 자신의 이익만을 취하는 생존의 몸부림인 '기생'관계가 되는 것이다.
 
  왜 인간은 공생하지 못하는 것일까? 유행어처럼 신년벽두에 정치인들이 던지는 '상생(相生)'은 공생의 다른 이름이다. 매일 점보기 한대 탑승 인원인 500여명이 이 지구상에서 굶어죽어가고 있다. 그것도 대부분 어린이와 여성등 노약자가 대부분이다. 미국의 부시는 여전히 세계 경찰국가를 자임하는 지구상의 가장 강력한 깡패가 되어 재선에 성공했다. 취임식 축하연 비용으로 지진해일 복구 비용으로 기부하기로 한 돈보다 많이 썼다. 신산스런 근대사를 겪으며 파란만장한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는 역사의 교훈을 무시하고 베트남전에 참전했으며 지금도 이라크 파병에 대통령까지 나서고 있다. 지구상의 이 무수한 인간들의 아이러니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나 해답이 있을까?
 
  물론 혹자는 종교에서 구원과 안식을 얻기도 하고 혹자는 실천과 행동으로 직접 참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다수 지구인, 대부분의 한국인들의 의식과 생활은 그렇지 못하다. 물론 나도 그렇다. 다만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공생'에 대한 의미와 숨가쁘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현재 모습을 돌이켜 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헐떡이며 뛰어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잠시 흰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이마의 땀을 닦고 멀리 수평선을 바라본다. 그리고 나와 우리 그리고 모두 함께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모습을 되돌이켜 본다.
 
  벤처 CEO 안철수, 소설가 이윤기, 환경운동가 최열, 생태학자 최재천, 진보주의 지성 홍세화, 역사학자 강만길등 15명의 전문가가 상생과 공존의 지혜를 '공생'이라는 화두로 우리에게 전해주는 책이다. 그러나 제목과 책의 디자인이 맘에 들지 않는다. 본문에 지나치게 많은 사진과 설명도 거슬리고 특히 비싼(?) 종이는 심하게 짜증난다. 소박하고 저렴하게 만들 수 있는 책이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개인적인 취향일 수도 있으나 책값 상승요인을 제작비에서 찾으려는 느낌이다. 물질로서의 책이 주는 느낌과 감동도 내겐 중요하기 때문에 내용이 주는 감동을 다소 반감 시켰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도 뷔페와 같은 풍성함으로 전문가(?)들이 들려주는 현실속의 놓치기 쉬운 부분들을 짚어가며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 소중한 책이다.

   인간의 마음처럼 시시때때로 변하는 것도 흔치 않다. 조금만 '마음을 놓으면<이것이 '방심(放心)'이다. 공부를 하는 이유를 맹자는 '놓친 마음을 되찾는 것(求放心)'이라고 말한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쉽게 잃어버리는 것이 마음이다.마음은 가시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슨 마음을 먹든, 무슨 생각을 하든 손쉽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이 이처럼 방일하게 되면 언젠가는 행동으로 나오게 되고, 이것이 빌미가 되어 사회의 조화 역시 어긋나게 된다. - 본문중에서

 

 2005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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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 7색 21세기를 바꾸는 교양 인터뷰 특강 시리즈 1
홍세화,박노자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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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에 관한 허다한 책들이 세상을 뒤덮고 있다. 교양이란 무엇인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교양의 사전적 의미는 “사회 생활이나 학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품행과 문화에 대한 지식”을 말한다. 지식과 교양에 대한 논의는 다양하다. 교양의 내용은 시대 또는 민족에 따라 달라지는데, 적어도 유럽문화권에 있어서는 이제까지 그리스·로마적인 교양의 이념이 일관하여 계승되었다. 고전 그리스에서의 '파이디아(paideia:교육)' 이념이 헬레니즘을 거쳐 그리스도교 세계로 계승되어 '그리스도교'라는 새로운 교양이 확립되었다고 보는 관점도 있다. 하지만 이 시대의 진정한 교양은 미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변화와 진보를 화두로 한 교양을 의미한다. 협소한 의미가 될 수도 있지만 시대에 따라 교양의 영역과 내용이 달라진다면 고려해 볼만한 일이다.

  한겨레신문사에서 2003년 3월에 <한겨레21> 창간 10돌 기념 이벤트로 '인터뷰 특강-21세기를 바꾸는 교양'을 진행했다. 이 강연 내용을 책으로 묶은 것이 ‘21세기를 바꾸는 교양’이다. 강연자는 박노자, 한홍구, 홍세화, 하종강, 정문태, 오지혜 다우드 쿠랍 등 7인의 아웃사이더 전사들이다. 실제로 박노자와 홍세화는 격월간 진보잡지 <아웃사이더>의 편집위원이다. 이들의 특강을 놓친 것이 아쉬웠는데 뒤늦게 책으로 만난다.

  현장의 분위기와 대면 접촉이 아닌 활자화된 내용의 한계가 아쉽긴 하지만 7명의 색깔이 분명하고 압축된 흐름으로 읽힐 수 있겠다. 아쉬운 것은 홍세화의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나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나를 배반한 역사>등 강사들의 책을 읽지 않았거나 평소 관심이 없던 독자들이라면 짜증섞인 비판이 나올법도 하다. 다소 수박 겉핥기식 교양 강의 수준으로 비춰질 수 있을 정도의 내용으로밖에 요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홍세화, 박노자, 한홍구의 강의 내용이 그렇다. 하종강의 강의는 들을때마다 박카스처럼 마음을 다지게 하고 오지혜의 강의는 친근하고 쉽게 다가온다. 쉽게 접하기 힘든 전쟁기자 정문태의 강의와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룬 쿠탑의 강의 내용이 새롭다. 진짜 교양은 관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평등 의식이나 정의감은 학습이나 훈련의 결과이거나(그것이 자기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취하는) 행동이 아니라 본성으로 타고나는 것’이라는 지적이 뼈아프다. 본성을 지켜가는 것조차 힘든 사회가 되는게 아니라 평등의식과 정의감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는 말이 얼마나 옳은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이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느냐 하는 겁니다. 자신의 부채를 어느 쪽으로 펼쳐야 할지 항상 고민하면서 살자는 겁니다. “나는 권력과 자본 그리고 노동자 사이에서 공정하게 중립을 유지할 거야.” 우리 사회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어느 것이 가치 있는 삶이겠어요?’ - 하종강의 강의 중에서

  누구든 쉽게 말할 수 있다. 현재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실천해 나가자고. 진보적 딴따라 오지혜처럼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러나 쉽지 않은 것이 실천이다. 양심에 귀기울이고 행동과 실천, 참여와 나눔으로 삶의 모습과 자세를 생활 속에서 조금씩 바꿔 나갈 수 있기를 스스로 다짐해 본다.

  한 권의 책은 필자가 두명 이상일 때 깊이가 떨어지고 남는게 없을 수도 있다. 이번에 주문한 책들이 대부분 그렇다. 여러명의 공동 집필이다. 충분하진 않지만 나름대로 가벼운 산책을 즐기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2005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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