禁止를 금지하라 - 지승호의 열 번째 인터뷰집
지승호 지음 / 시대의창 / 200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이 사람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안다’는 말은 무엇을 말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사람의 본질은 그대로 드러나는 법이 없다. 사회적 가면에 의해 가려진 모습들과 본능적 자아의 모습 사이에는 언제나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른다.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확인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때 사람들의 자신에 대한 평가는 낯설기만 하다. 한 사람을 규정짓고 판단하는 것만큼 조심스럽고 어려운 일은 없다. 말이나 글을 통해 한 사람을 바라보는 것도 켤코 쉽지 않다. 왜냐하면 다면적인 인간의 모습을 완벽하게 보여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의 기초는 대화에서 비롯된다. 한 사람을 이해하는 여러 가지 방식 중에 지승호는 질문을 선택했다. 어떤 사람이 쓰고 싶은 것을 쓰고 독자는 읽는다면 독자는 수동적 수용자가 된다. 게다가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면 더더욱 한 사람에 대해 알고 싶은, 이해하고 싶은 욕망은 해결할 방법이 없어진다. 하지만 인터뷰라는 독특한 대화 방식을 통해 독자들의 궁금증은 실마리를 풀어간다. 인터뷰어가 누구인가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같은 사람을 대상으로 어떤 방식으로 어떤 질문을 하느냐에 따라 독자들의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것이다. 물론 궁금한 사람의 선정에서부터 궁금한 내용까지 독자들의 모든 욕구를 충족시킬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인터뷰의 능력과 시각에 따라 인터뷰이에게서 끌어낼 수 있는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지승호의 인터뷰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든다.

벌써 열 번째라는 사실에 놀랬다. 지승호의 <禁止를 금지하라>는 무르익은 지승호의 인터뷰를 보여준다. 대상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고 깊으며 공격적이거나 피상적인 질문이 없다. 질문의 핵심이 뚜렷하고 칭찬 일색의 인터뷰와도 다르다. 인터뷰이의 주장의 반대편에 선 사람들이나 이야기를 제시할 때도 차분하고 논리적이다. 다양한 시각들을 전달하고 깊이있게 대화를 끌어갈 수 있는 능력은 물론 철저한 준비와 지승호만의 노력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인터뷰 대상과 방식과 내용이 모두 마음에 든다.

인터뷰어라는 직업이 있는지 모르지만 전문 분야로 삼고 매진하는 그의 모습은 아름답다.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현실적인 문제를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독자들의 격려와 스스로가 찾아낸 자신의 역할일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조용한 응원의 박수를 보내야 한다. <禁止를 금지하라>는 지승호와 네 번째 만남이다. 나는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지승호 자신의 셀프 인터뷰가 압권이라고 생각한다. 셀카도 아니고 셀프 인터뷰라니? 전무했던 방식이 아닌가? 재밌고 즐겁게 읽었다. 앞선 책에서 보여줬던 그의 인터뷰들과 저간의 심정들이 고스란히 표현되어 있고 솔직하고 대담한 방식으로 가슴속의 먼지들을 털어내는 모습들이 독자 입장에서는 그의 책을 더욱 친근하게 만든다. 솔직한 사람이 가장 무섭다.

이번 책에는 박원순, 조정래, 마광수, 문정현, 정태인, 이상호, 최승호 등 7명과 지승호 자신까지 포함해서 8명을 인터뷰 한 내용이 담겨있다. 최근 2년간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던 문제들의 직, 간접 당사자들이나 꾸준히 우리 사회의 마이너리티 혹은 왼쪽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이다. 자유는 끊임없는 감시의 대가라는 말이 실감나게 하는 이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여보자. 이데올로기를 넘어 시대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자화상을 보게 된다. 내 일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일이기 때문에 외면할 수 없다. 지승호의 말대로 모든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뭔가 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통해 실천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7인7색>도 그랬지만 제각각 다른 인물들을 통해 하나의 흐름을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보이지 않는 지승호의 메시지는 그 인터뷰의 행간에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인터뷰어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책을 통해 읽어낼 수 있는 것들은 항상 독자의 몫이 아닐까 싶다. 인터뷰이가 맘에 들지 않아 책을 사지도 않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 사람들이 좋아 책을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주류에 편입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과 정당하지 못한 방법들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과 저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 어느 편에 어떤 방식으로 서 있든, 아니 어정쩡한 자세로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강제로 읽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지향점이 어디든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아야 한다. 그것이 이 책이 갖는 최소한의 의미이다.

<7인 7색>을 읽고 쓴 리뷰에 지승호씨가 직접 댓글을 달아 준 적이 다.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인터뷰라는 것도 결국은 사람과 사람의 소통을 위한 방편이라고 믿는다. 어느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고 말했지만 그 섬에 갈 수 없어도 거리를 좁히는 방법들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지승호의 어렵지만 의미있는 작업들이 스스로의 즐거움이길 바라며 그의 말대로 선비의 기질과 양아치의 기질이 극단적으로 공존하는 비슷한 성격의 많은 독자들이 웃음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쓰레기 댓글들에 더 이상 신경 쓰며 분노하지 않으시기를...


061211-13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
헤르만 헤세 지음, 김지선 옮김 / 뜨인돌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헤르만 헤세의 이름을 보자 책갈피에 꽂아둔 오래된 사진처럼 아련했다. 누구나 한 번 쯤 그랬겠지만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지독한 열병을 앓았던 시절에 나는 헤세와 마주했다. 특히 <수레바퀴 밑에서>와 <知와 사랑>에 대한 기억은 사춘기 시절의 다른 이름이다. 골드문트와 나르치스의 우정과 방황은 며칠 동안 잠 못 이루는 밤을 만들었다. 이제와 생각하면 순수했던 시절의 흑백 사진처럼 선명하다.

1877년에 태어나 1962년 죽은 헤르만 헤세는 사후에 그의 문학적 평가가 어떠하든 개인적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던 작가임에 틀림없다. <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은 책과 관련된 글들을 모아놓은 수상집이다. 잡지와 신문에 발표됐든 글이나 전집류에 포함된 글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이 책에 처음 소개된 글들도 있다. 책을 주제로 독서와 문학 전반에 관한 단상들이 솔직하고 편안하게 전개된다. 짧은 글들을 모아 놓았지만 책의 내용과 흐름은 ‘독서’라는 맥락으로 연결된다.

독서와 글쓰기에 관한 책들이 넘쳐나지만 주로 100년쯤 전에 쓰여진 헤세의 글들은 시대와 상관없이 많은 의미를 던져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독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며, 왜 책을 읽는지조차 정확히 모른다.”는 도발적인 문장으로 이 책은 시작된다. 한 문장을 읽고 한참 생각했다. 나는 독서라는 행위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나름의 기준과 방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왜 책을 읽는가에 대한 반성은 때때로 필요하다. 인쇄술과 대량 출판이 이루어지면서 지식의 대중화의 선봉에 섰던 책을 헤세는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을까?

스스로 만든 세계 문학 전집의 목록과 작품에 대한 간단한 인상 비평 등은 지금 우리 시대의 책읽기에 대한 반성의 잣대가 된다. 지금 그 목록이 유효하다는 말이 아니라 책의 효용을 따지기 이전에 독서를 통해 우리가 얻어야 할 궁극적인 삶에 대한 태도와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취미삼아 읽는 독서에 대해 헤세는 “불량독자들이 시나 소설에 끼치는 부당함은 여기서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잘못된 독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부당하다. 무가치한 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자신에게 하등 중요하지도 않고 그린 금방 잊어버릴 게 뻔한 일에 시력과 정신력을 소모하며, 일절 도움도 안 되고 소화해내지도 못할 온갖 글들로 뇌를 혹사하는 짓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문학을 위주로 한 독서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다른 면에서 아쉬운 점도 많다. 다치바나 다카시처럼 절대로 소설을 읽지 않는 독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헤세와 다른 이야기를 하겠지만 일반적인 문학 독자들을 위한 충고와 성찰을 위해서 이 책은 시원한 냉수와 같다. 문장의 곳곳에 숨어 있는 날카로운 비판과 충고들은 지적 우월감과는 다르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철지난 노래처럼 들리는 부분도 많고 지금 상황에 적용되지 않는 이야기들도 많다. 하지만 독서에 대한 기본 자세와 독자들의 태도는 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종이로 된 책의 시대가 끝났다고 선언하는 말들과 문학의 종언을 고하는 조사들이 난무하는 시대지만 문학이든 아니든 “인간이 자연에게서 거저 얻지 않고 스스로의 정신으로 만들어낸 수 많은 세계 중 가장 위대한 것은 책의 세계다.”

독서에 무슨 기술이 있겠는가? 책을 밥벌이의 수단이나 실용적 목적으로 활용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달콤한 유혹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은 없다. 다만 끊임없는 자기 반성과 독서의 태도와 방법에 대한 점검이 필요할 뿐이다. 헤세는 이 책에서 독서와 책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시대를 넘어서는 단상들을 제공한다. 각자 독서의 방법과 자세에 따라 한 마디쯤 새겨둘 말이 있다면 이 책은 충분한 의미가 있다.

작가의 짧은 글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팔아먹기 위한 편집 능력과 상술에 혀를 내두를 정도로 허접하지 않다. 독서란 무엇인가에 대해 한 번 쯤 점검이 필요한 분들에게 권할 만한 책이다.

바닥에 아무리 멋진 카펫이 깔려 있고 호화로운 벽지와 명화가 온 벽을 뒤덮고 있다 한들, 책이 없다면 가난한 집이다. 또한 책을 알고 소유하고 아끼는 사람만이 자라나는 자녀들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깨닫도록 도와줄 수 있다. - P. 183


061210-135

댓글(5)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짱꿀라 2006-12-11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을 보셨군요. 저도 이 책을 읽었답니다. 많은 정보를 얻게 한 책이었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좋은 한주 되시기를......

드팀전 2006-12-11 0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주에도 수 십에서 수백권이 나오는 책들 중에 무가치한 책들-저자에게는 가치가 있을지몰라도-이 다수지요. 무조건 책읽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대개 좋은 책을 보지도, 많은 시간을 독서에 쓰지도 않는 모습을 봅니다.가끔 직장에서 동료들이 들고 다니는 책을 보면 ^^ ... 쉽게 맛을 내는 조미료에 익숙한 사람들처럼 전부 말랑 말랑한 책들만 봅니다.무언가 고민거리를 던지는 책들은 마음을 불편하게 하기에 다들 눈을 돌려버리는 듯 합니다.그리고 가만 있으면 다행인데 가끔 제가 이상한 책을 한 권 들고 다니면 '이런거 왜봐..취향 독특하네.그런건 대학교때나 한번 보는거 아니야?'라는 식입니다.젊은 세대일 수록 더 하더군요....책을 통한 의식의 성장이나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보입니다. 안타깝지만 제가 관여할 일은 아니지요. 리뷰 잘 보고 있습니다.

sceptic 2006-12-11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antaclausly

santaclausly님도 행복한 한 주 보내세요.

드팀전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타인의 독서 취향을 쉽게 바뀌기는 어렵습니다. 독서의 효용에 대한 이해와 독서의 목적도 다르니까요. 안타깝긴 하지만 나름의 목적을 가지고 자기만의 방식을 넓혀 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의식의 성장이나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는 독서를 위해 저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marine 2007-01-03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소 지루한 원론적인 책이 아닐까 싶었는데 리뷰를 보니 읽고 싶어집니다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sceptic 2007-01-05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쉽고 간단한 에세입니다...^^
 
국가의 역할 - 장하준이 제시하는 '우리 모두를 위한 발전과 진보의 경제학'
장하준 지음, 황해선, 이종태 옮김 / 부키 / 200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짧게는 눈을 뜨면서 잠들 때까지 길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우리의 모든 생활은 경제학이다. 학문 영역에 기초한 영역이 아니더라도 경제와 관련되지 않는 부분이 없을 정도이다. 우리 생활은 경제와 그만큼 경제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특히 ‘세계화’라는 괴물이 등장한 이후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은 전지구화와 세계화가 되었다. 그러나 이 잣대는 모호하기만하다. 특히 경제 분야에서 준거 틀이 되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거부할 수 없는 흐름으로 이해되었지만 판단 기준도 모호할 뿐만 아니라 실제 생활과의 관련성 측면에서도 반성적 성찰이 심각하게 요구되고 있다.

장하준과 정승일의 <쾌도난마 한국경제>는 현 시점의 한국경제에 대한 거시적 관점의 문제제기였다. 이번에 출간된 장하준의 <국가의 역할Globalization, Economic Development, and the Role of the State>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깊이 있는 진단과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어떤 문제에 대한 반박은 반드시 대안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논의의 초점을 이끌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설득력을 지닐 때가 있다. 물론 이 책에서는 대안도 제시되어 있다.

성장과 분배에 대한 지루한 논쟁, 경기 부양과 투기 억제에 대한 우려가 현재 우리 경제의 가장 거시적인 논쟁거리라면 이 책은 그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 특히 ‘국가’와 ‘정부’를 중심으로 현안들을 점검하고 있다. 분명히 다른 ‘국가’와 ‘정부’를 구분없이 사용하는 것은 논의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에 혼용되고 있지만 모호하던 부분에 대한 명쾌한 설명으로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국가의 경제 개입을 부정할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이나 탈정치화론의 기반인 객관적 시장 법칙은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독자는 많지 않아 보인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미 FTA를 바라보는 관점을 이 책에서 빌려 올 수도 있다. 갈등 조정자로서 국가의 역할을 돌아보고 자유 무역 협정이 국내 경제에 미칠 영향과 파장에 대해서도 온 국민이 심각하게 고려해야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강건너 불구경 수준의 현실 인식과 대응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온 국민이 한미 FTA 반대 시위에 참여할 수는 없지만 세계 경제의 미국화에 팔을 걷고 나선 것처럼 보이는 정부의 태도에 대해서는 분명한 점검과 대안이 필요하다. 어차피 국가간 자유 무역은 신자유주의에 기초한 기업 경영 차원의 협력이 아닌가.

초국적 기업이나 거대 자본에 의한 경제 개발국과 구사회주의 국가의 예속적 경제 시스템은 국민 경제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정부의 개입과 규제는 시장에 부정적 영향만을 미치는가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정부와 기업 사이에서 국민들은 미래를 그들에게 맡겨야만 하는가에 대한 심각한 질문과 반성도 필요하다. 이 책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쟁점들을 우리는 객관적으로 성찰하고 현실에 반영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냉소적인 시각이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4장의 경제 발전에서 지적 재산권의 역할과 9장 개발도상국에서 공기업의 효율성에 대한 부분이었다. 캠브리지 대학에서 근무한다고 해서 객관적일 수는 없겠지만 우리 경제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의 상황들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부분들은 모호하던 개념과 상식이라고 믿었던 부분들에 대한 점검과 고민을 요구한다.

지난 50여년의 경험을 통해 확신할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세계는 우리가 믿거나 바라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실체라는 것이다. - P. 368

국가나 민족주의 담론을 넘어서 경제 부분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저자가 말한 것처럼 이 책 한권이 정답을 제시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판단하는 것보다 세계는 훨씬 더 복잡한 실체라는 사실이다. 단선적인 기준과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종합적이고 복합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판단력과 정책이 필요하다. 물론 그것 조차도 무게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장하준이 제시하는 ‘우리 모두를 위한 발전과 진보의 경제학’이라는 부제에 걸맞는 이 책이 ‘우리 모두’에 방점이 찍힐 수 있는 경제학이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누구에게 바라는가. 지금 현 정부에? 아니면 미래의 정부에?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답답한 노릇이다. 몸으로 실천할 수 있는 작은 부분들에 노력과 성찰로부터 대안을 찾아야하지 않을까 싶다.


061206-134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짱꿀라 2006-12-06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 가봐요. 저는 경제라면 너무 어려워서 잘 접근을 못하거든요. 잘 읽고 갑니다. 아 그리고 저도 쾌도난마 한국경제 읽은 기억이 나네요.

sceptic 2006-12-07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외한이라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어렵기는 저도 마찬가집니다. 쾌도난마에 대한 강렬한 인상때문에 장하준의 책을 또 읽게 되었습니다.

비로그인 2006-12-07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기 부양과 투기 억제는 초미의 관심거리이지만 서민의 입장에서는 손놓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어 답답합니다.

sceptic 2006-12-08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부를 압박하고 시민운동이나 다른 방법들을 동원해서라도 적극적인 의견 제시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결국 방법과 실천의 문제가 남습니다. 제대로 된 눈으로 감시하는 역할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는 법이니까요. 최소한 FTA 반대 집회 때 차 막힌다고 불평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외로운 발바닥 2007-01-16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절반쯤 읽었는데 논문적 성격이 있어서 쾌도난마 한국경제처럼 쉽게 읽히진 않더군요. 잠들기 직전 읽으려 했더니 몇 페이지 못 읽고 졸려서 아예 공부하듯이 집중해서 읽으니 잘 읽히더군요. ^^; 책을 읽으면서 제 머릿속에도 시장 우선주의적인 생각이 부지불식간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여러번 놀라고 있습니다.

sceptic 2007-01-17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으면서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지만 몸에 익숙하게 배어버린 습성들에 새삼 놀랐습니다. 집중해서 읽어야 할 책이죠.
 
장정일의 공부 - 장정일의 인문학 부활 프로젝트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는 1992년에 유고로 출간되었다. 빛바랜 누런 책표지는 책꽂이 한 켠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세월을 감내하고 있다. 그 시절이 생각나면 가끔 꺼내 뒤적여 보는 책이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쓴 김현의 일기 형식의 글을 책으로 출간했다. 책날개에 어딘가를 응시하는 선생의 표정이 여유롭다. 48세의 나이로 작고한 선생의 글을 좋아했다.

장정일의 <공부>는 그가 펴냈던 <독서일기> 7권에 해당한다. <공부>라는 제목과 주제별로 묶인 제목들은 출판사의 마케팅 전략에 다름 아니다. 더구나 ‘장정일의 인문학 부활 프로젝트’라는 가당찮은 제목은 씁쓸하기만 하다. 인문학이 고사 위기라는 이야기가 심각하게 대두되었고, 인문학 교수들이 위기 선언을 할만큼 우리 사회의 인문학적 풍토가 척박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책 한권으로 부활이 가능한가? 그렇다 치더라도 부활 프로젝트와 거리가 멀고 그저 개인의 내면적 고백과 ‘공부’ 과정일 뿐이다. 상업적인 냄새가 나는 수식어와 선정적인 제목에 알러지 반응이 있는 나로서는 ‘속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냥 <독서일기 7>이면 어떤가? 물론 이전의 책과 차별화할 필요가 있다면 그 특성을 책의 내용과 편집에서 살리면 그뿐이다. 독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심히 불쾌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장정일에 대한 개인적인 호의와는 무관하게 책 한 권이 주는 느낌은 각양각색이겠지만 책의 내용과 무관하게 기분 나쁘다.

한겨레의 고명섭 기자가 쓴 <지식의 발견>이 이 책과 유사하다.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대표적인 저작을 중심으로 작가들의 상이한 관점을 비교하고 하나의 주제를 명료하게 드러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작년에 읽은 책 중에서 기억에 남는 좋은 책이다. 이 책도 유사한방식과 관점을 지니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객관적이고 분석적인데 비해 이 책은 보다 주관을 많이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보다 친근하며 쉽고 재미있게 읽히지만 설득력은 떨어지고 핵심이 없이 책 내용의 요약과 설명으로 그치는 경우도 있다.

책 한 권 전체가 유기적인 관계로 구성되어 있지도 않고 그간의 독서이력에 대한 정리 수준에 머물러 있다. 장정일의 내밀한 감성도 느낄 수 있고 역사와 사회에 대한 견해도 엿볼 수 있으며 정치와 세상에 대한 의견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친다. 책의 본문에서 ‘지금 여기’를 이야기하는 하이데거의 존재자를 설명하지만 실천으로 육화되지 못하고 인식에 대한 방편으로 그친다. 예를 들어 2004년 17대 총선에서 민노당을 찍지 못했다는 고백은 실소를 자아낸다. 개인적인 정치적 견해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지만 자신의 경험과 고백들은 그가 인식한 세상과 책의 내용과 뒤섞이지 못하고 행간에서 불협화음을 이룬다. 나만의 느낌일까?

이 책의 목적이 인문학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에 호소하는 것이라면 반쯤 성공했고, 반쯤 실패한 것으로 본다. 얼 쇼리스의 책을 아직 보지 못했지만 최근 출간된 그의 책은 미국에서 노숙인에게 삶의 희망과 메시지를 전하고 세상을 바로 보는 안목을 전하는 것이 근본적인 대안이라고 생각했던 실천가의 책이기 때문에 관심이 간다. 인문학 자체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우리들 삶과 연결된 생생한 경험담이나 실천적 모습들이 더 필요하다. 그냥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얘기하면 공허한 울림으로 그치고 만다.

역사와 철학을 통해 세상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 대학에서 보다 철저하게 인문학적 자연과학적 교양을 섭렵할 수 있도록 하고 고교 과정에서도 테크닉 위주의 논술이 아니라 비판적인 안목과 다양한 독서를 통해서만 수행할 수 있는 논술 문항의 개발도 필요하다. 공부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과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한 목적과 의도로 책 제목을 정했으리라는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 나는 개인적으로 감동적인 책을 만났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해서 조금 아쉽다.

<나비와 전사>에서 고미숙이 절규했던 것처럼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방법과 과정들을 소개하는 책과 프로그램들이 보다 많이 제시되었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 제도권 교육에서부터 평생 교육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노력만으로 공부하기엔 한계를 느낄 때가 많다. 보다 체계적인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거나 쉽고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목마르게 기대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공부는 학생이나 하는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할 수 없지만 ‘철학아카데미’나 연구공간 ‘수유+너머’와 같은 방식이 아니더라도 다양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인문학의 대중화가 필요하다.

어쨌든 장정일의 <공부>를 읽고 다같이 평생 ‘공부’해야 한다는 사실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중학교 중퇴라는 객관적 학력과 무관하게 내공을 연마하며 공부하는 그의 태도에는 늘 부러움과 응원의 감정이 깔려있다. <햄버거에 대한 명상>으로 만난 그가 통렬하게 비판하는 시인을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내리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있다. 김수영의 시를 인용하며 글을 쓰지 말고 시와 시인에 대한 독설을 멈추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했다.

생각나는 대로 떠드는 이런 종류의 리뷰도 장정일의 입장에서 끊임없이 함께 공부할 자세가 되어 있는 독자의 애정 어린 투정이라고 생각하면 그뿐이다. 장정일도 나도 열심히 공부하는 일만 남았다. 여전히,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061203-133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햄릿 2006-12-04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문> 장정일이 2002년 대선 때 이회창을 찍었다는 말이 '공부' 몇 페이지에 나오나요???

           아무리 봐도 없던데...?

           님의 오독이거나 아님 상상?

 

 


sceptic 2006-12-05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변> 한글 미해득? 잘 찾아보세요. 안가르쳐 드립니다. 분명히 나오니까 다시 읽어보세요. 별 쓰잘데 없는 내용을 가지고...오독이나 상상? 우습네요. 논쟁거리가 될만한 얘기를 하세요...

다시 읽고 못 찾았다면 정중하게 요구하시죠. 그러면 정확한 페이지를 알려드리겠습니다.

햄릿 2006-12-05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하지 않은 말을 지어내서 한다면 충분히 논쟁거리가 되죠.
제가 아무리 정중하게 부탁해도 님은 페이지를 적시하지 못할 겁니다.
장정일을 한권이라도 제대로 읽었다면, 장정일이 이모씨를 찍었으리란 상상은 하지 못할 텐데...

sceptic 2006-12-05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중하게 말씀하시니 저도 예의를 갖춰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햄릿님은 <공부>를 읽지 않으셨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해 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가 페이지를 적시하지 못할거라는 확신을 하시는지...책이 집에 있습니다. 오늘을 넘기지 않고 정확한 페이지와 장정일의 글을 그대로 올려 놓겠습니다. 장정일의 성향을 아는지라 저도 놀랐습니다. 장정일을 제대로 한 권이라도 읽은사람이라면 누구도 좀 놀라겠지만 개인적인 정치적 성향은 그리 중요한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햄릿님이 기분나쁜신게

1. 책에 없는 말을 제가 올려놨다고 생각하시는건지,
2. 장정일이 이회창을 찍은건지,
3. 책에 대한 부정적 리뷰인지,

아직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소모적인 논쟁은 이쯤에서 접어주시죠.
약속은 지키겠습니다.

sceptic 2006-12-05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부> 191페이지, 197페이지, 260페이지 참조.

2002년 대선에서 장정일이 이회창을 찍었다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습니다. 이에 햄릿님(장정일님으로 추정되나 어떤 분인지 알수 없어 궁금함)께 정중하게 사과드리고 리뷰에서 위와 같은 내용을 수정했습니다.

1. '부서진 손잡이'는 민주노동당이 아니라, 개혁과 민주를 미끼로, 개혁과 민주를 열망하는 대중의 표를 도둑질해 가는, 제도 정당이다! 부르주아 정당이 희망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거기에 표를 찍는 나의 어리석은 투표양식이다! - 본문 191페이지

2. 이전의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지만, 앞으론 반드시 고려하겠다. - 197페이지

3. 탄핵 정국 속에서 실시된 17대 총선에서 필자는 민주노동당을 찍지 못했다. - 260페이지

1번 내용으로 미루어 2002 대선에서 이회창이나 노무현을 찍었을 거라는 암시를 제가 '노무현'이 아닌 '이회창'으로 표현한 것은 분명히 잘못입니다. 그러나 3번 내용에서 보듯 2004년 17대 총선에서도 민노당을 찍지 못했다는 장정일의 글을 보고 자연스럽게 '부르주아 정당'인 한나라당과 연결시킨 것은 저의 오독으로만 볼 수는 없다는 것이 제 변명입니다.

직접 표현하지 않은 부분을 리뷰에 올린 것은 저자에게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풋내기 시인이었던 시절부터 애정을 가지고 읽어왔던 장정일의 글들과 내가 미루어 짐작했던 정치적 성향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실망감의 표현이었습니다. 민노당스러운(?) 작가에 대한 진심어린 애정과 불평으로 쓴 글입니다. 민노당이 아닌 한나라당이나 열린우리당은 당명만 다를 뿐이라는 개인적인 판단으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장정일씨.

햄릿 2006-12-05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린 우리당도 부르주아 당이죠...
장정일의 글을 좋아하는 애독자일 뿐입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탄환은 심장을 동경하듯이 인간의 유전자에는 폭력이 내재해 있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다. 영화 <뮤직박스>를 거쳐 <인생은 아름다워>, <베를린 천사의 시>, <쉰들러 리스트>를 보고 <피아니스트>에 이르기까지 난 주로 각색된 이미지를 통해 아우슈비츠를 기억했던 것이다. 사실에 바탕을 둔 역사적이고 체계화된 방식으로 유대인 학살에 대해 공부하지 못했다. 이 책 저 책을 통해 단편적으로 혹은 인상적으로, 피상적으로만 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현실이고 나의 역사 인식의 한계이다.

그래서 좀 더 가까이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아픈 기억을 훑어내듯이, 차마 감았던 눈을 다시 뜨듯이 지나간 시간을 들여다 볼 때가 있다. 간접적인 추체험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준다. 대학에 들어가 광주 비디오를 봤을 때 느꼈던 충격이 그러했다. 이후 크게 심호흡을 하고 세상을 바라보면 온통 절규와 혼돈으로 가득했으며 비관적 전망으로 암울했다. 지금도 기본적인 태도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면 과장일까?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살아 숨쉬는 보고서이다. 그녀 역시 유대인이었으며 시온주의자들을 위해 활동하다 체포되어 심문을 받은뒤 1933년에 프랑스에 망명한 뒤 1941년 다시 미국으로 망명한 한나 아렌트는 2차 세계 대전의 포화를 피해 떠난 수많은 유대인 중 하나였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수많은 유대인 지식인 계층 중 한 사람이었지만 그녀가 남긴 논쟁거리는 여전히 잠재워지지 않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책의 말미에 언급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이다. 유대인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만한 이 개념은 아이히만 개인의 문제에서 인류에게 내재해 있는 보편적 원리의 개념으로 바꿔버린 데 있다.

히틀러나 괴벨스, 아이히만으로 대표되는 개인들의 경악할만한 범죄 본능이나 야만적 폭력성에서 그 이유를 찾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당시 상황으로 비추어 볼 때 저자의 개념이 얼만큼 커다란 후폭풍을 일으켰을지는 짐작이 간다. 어쨌든 정치 철학의 지평을 연 그녀의 저작 중 가장 대중적이고 쉽게 읽히는 책이라는 데 위안을 가지고 책장을 열었다.

유대인 학살의 주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은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 비밀 경찰에 의해 체포된다. 다음 해에 예루살렘 지방법원에서 독일인 변호사 세르바티우스 박사의 도움을 받아 재판을 받지만 교수형에 처해진다. 예정된 수순을 밟듯 진행된 재판에서 인류에 대한 범죄(mankind of crime)와 인간성에 대한 범죄(humanity of crime)라는 미묘한 관점을 짚어내는 저자의 눈이 날카롭게 번득인다. 그녀 자신이 유대인이면서도 미국에서 이 재판을 취재하기 위해 이스라엘로 날아간 저자의 생각은 <뉴요커>에 게재된 이 책의 내용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이히만을 통해 국가 권력에 의한 한 개인의 희생이라는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본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450만에 600만으로 추정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대학살의 책임을 몇몇 개인에게서 찾는다는 것 또한 희극에 가깝다. 유리 상자 안에 들어앉아 원숭이처럼 살아남은 자들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아이히만에 대한 동정심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회의와 분노를 먼저 확인하게 되는 것이 이 책의 의미이다.

유대인 학살에 대한 과정과 방법은 이 책에서 부수적으로 다루어진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소에서 확인된 사실들을 재삼 언급하지도 않는다. 15여년이 흐른 후에 뒤늦게 체포된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은 저자에게 새로운 의미로 보여졌을 것이다. 미국에서 건너간 그녀의 시선은 동족을 살해한 살인자의 재판을 바라보는 시선은 분명 아니다. 이 책의 가장 큰 재미는 여기에 있으니 직접 확인해 볼 일이다.

전체 15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추방, 수용, 학살로 이어지는 3, 4, 5장이 잘 알려진 내용이고 나머지 부분들은 아이히만의 활동과 행동 반경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그리스, 루마니아, 헝가리, 스로바키아에 이르기까지 전 유럽이 참여한 이송과 학살센터에 관한 증거와 증언들이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아이히만에 대한 판결과 항소 그리고 처형으로 끝을 맺는다.

한 번 시도된 악은 반드시 인류에 의해 재발할 수 있다는 그녀의 후기가 섬뜩하게 읽힌다. 난징 대학살이나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즈 등 헤아릴 수 없는 학살의 예가 있다. 얼마나 죽었나가 문제가 아니라 왜 죽였냐가 문제다. 명분이 무엇이든 방법이 어떠하든 여전히 계속되는 폭력과 살인은 어쩌면 인간의 원죄인지도 모른다. 지나간 역사에서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것은 단순한 교훈만이 아닐 것이다. 예루살렘에 나타난 아이히만을 바라보며 우리는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 안에 숨어있는 아이히만을 말이다.


061130-132


댓글(4) 먼댓글(1) 좋아요(5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악의 평범성 : 희생양 제의 뒤 추악함들에 대한 묘사 -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2006
    from Fly, Hendrix, Fly 2009-07-07 14:48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한길사 PD저널 헨드릭스의 책읽기 2009년 7월 4일 지행네트워크의 예사인(예술, 사상-사회, 인문) 세미나의 두 번째 책은 한나 아렌트의 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한길 그레이트스트 북스에서 나온 책을 완독했다. 책은 손의 질감과 눈으로 느끼는 두께보다 훨씬 빽빽했다. 다른 사회과학서를 읽을 때 보통 시간당 100페이지를 읽는 데, 이 책은 시간당 30페이지 읽기가 쉽지 않..
 
 
짱꿀라 2006-12-01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악에 대한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주시는군요. 기독교에서는 악이란 과녁을 벗어난 것이라고 하던데요. 저는 아직도 악이란 정말 잘 모르겠더라구요. 한달 밖에 남지 않은 올해도 좋은 일 많이 생기시고 잘 마무리 하시기를 바랍니다.

sceptic 2006-12-01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12월이니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소리 들립니다. 님도 건강하고 행복한 마무리 하시기 바랍니다.

kleinsusun 2006-12-01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나치와 아우슈비츠를 "각색된 이미지"로만 갖고 있어요.ㅠㅠ
미루고 있었던 책인데, 님의 글을 읽고 보관함에 넣었어요. 감사합니다.^^


sceptic 2006-12-02 13: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 말씀을요...많이 긴장하지않고 편안하게 읽어볼만 합니다. 즐거운 독서하세요.